■ 선풍기와 휴대폰 (2015. 06. 20.)
너나없이 대부분의 우리나라 사람들은 삼성과 LG라는 양대 가전 제조업체가 생산하는 제품을 선호한다. 품질이 우수하다고 믿고 있고 확실한 사후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 양사가 생산한 제품은 상대적으로 가격이 높아도 구매를 주저하지 않는 편이다. 제품을 사용하기도 전에 이미 기업 신뢰도가 작용해, 믿고 구매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일부 제품은 중소기업이 만들고도 이들 양사의 상표를 붙여 판매되기도 한다. 소형 가전일수록 이 같은 사례는 많다.
이런 가운데 이들 양대 가전 제조사와 당당히 겨루며 고유 영역을 구축해가는 회사들도 있다. 그 대표적인 제품이 신일산업과 한일산업이 만드는 선풍기이다. 쿠쿠 전기밥솥도 대기업 제품을 능가하는 선호도를 보인다. 삼보가 만드는 컴퓨터도 삼성과 LG가 생산하는 제품에 뒤지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중소기업의 규모는 한참 벗어났지만 만도의 경우, 김치냉장고와 에어컨에서만큼은 양대 가전사를 압도하는 브랜드 인지도를 갖고 있다. 지극히 제한적이지만 이렇듯 일부 제품은 양대 가전 공룡사의 틈새에서 당당하게 고유 영역을 구축해가고 있다.
신일과 한일은 선풍기 분야에서 절대적인 강자로 인정받고 있다. 물론 두 곳 거대 가전사가 판매하는 제품도 인기가 좋지만 그래도 아직 선풍기 분야에서 만큼은 신일과 한일의 시장점유율이 절대적이다. 대기업처럼 유명 모델과 계약을 체결해 고액의 광고비를 지불하고 광고를 제작해 광고폭격을 하는 것도 아니고, 주요 간선도로 목 좋은 곳에 대형 매장을 갖춰놓고 있는 것도 아니고, 서비스망이 제대로 갖춰있지도 않지만 그래도 소비자들은 신일과 한일 제품 선풍기를 선호한다. 그만큼 오랜 세월 기술력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지난여름 집에 있는 선풍기 목이 부러져 수리를 위해 한일산업 서비스점을 찾았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대전 동구 용전동에 수리점이 있었다. 선풍기를 차에 싣고 한일산업 서비스점을 찾았다. 서비스점은 대로변에서 벗어난 골목길 작은 건물 2층에 위치하고 있어 찾는데 다소의 애를 먹었다. 주차장도 따로 마련돼 있지 않았고 간판도 아주 작았다. 건물에는 엘리베이터도 없었고 좁은 계단을 통해야 서비스점 사무실을 찾을 수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협소하한 사무실과 수리실이 한눈에 들어왔다.
넓고 밝고 젊은 직원들이 북적이는 대기업 가전사 서비스점과 한눈에 비교가 됐다. 한일산업 직원들은 다소 촌스럽다 싶은 인상이 들 정도의 구형 작업복을 입고 손님을 맞았다. 좁은 접수 장소에는 몇 명의 대기 손님이 있었지만 그 흔한 커피 자판기 한 대도 갖춰져 있지 않았다. 고장 난 선풍기를 들고 접수대로 가니 중년의 직원이 접수를 받는다. 목이 부러진 선풍기를 보더니 바로 수리할 수 있다며 선풍기를 건네받고는 20분 정도 소요될 것이고 수리비는 2만 원이라고 안내한다. 수리 접수를 하면서 컴퓨터가 아닌 종이 전표로 접수증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적지 않게 놀랐다. ‘지금 세상이 어느 세상인데…’라고 혼자 생각했다.
수리를 기다리는 동안 접수 직원이 잠시 한가한 틈을 타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내가 갖고 있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풀어내기 시작했다. “아니, 그래도 한일산업인데, 우리나라 선풍기와 모터 분야 최고의 업체인데 내 눈에 비치는 서비스점의 모습은 너무 전 근대적입니다. 내가 20년 전 세상에 와 있는 것 같은 착각이 생깁니다. 대기업 서비스점과 너무나 비교가 되네요. 좀 더 투자해서 큰길가에 위치한 빌딩에 넓은 사무실로 옮기고 주차장도 마련하고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한일산업이라는 회사를 아끼는 마음에 느낀 대로 진솔하게 말을 전했다.
내 질문을 받은 중년 직원은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해명을 시작했다. “손님! 손님이 갖고 계신 스마트폰 얼마인 줄 아시죠? 각종 보조금 지원받는다지만 대개 100만 원 정도 할 겁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자 그 직원은 말을 이어갔다. “100만 원짜리 휴대폰 얼마나 쓰세요? 아마 모르긴 해도 2년을 채 못 쓰실 겁니다. 1년 조금 넘으면 기기 변경하라고 온갖 마케팅을 하니 바꾸지 않고는 못 견딜 겁니다. 그런데 우리 선풍기는 어떤가요? 대당 가격이 5만 원에서 비싸야 10만 원인데 한 대 사면 20년 이상을 씁니다. 고장도 거의 없어요. 맞죠? 그게 바로 제가 드릴 수 있는 답변입니다.”
그 직원의 답은 간단하고 명료했다. 제품의 단가가 낮고 내구성이 좋은데다 제품 교환 주기도 길어 수익구조가 취약할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인건비와 자재비 등은 상승하는데 선풍기 가격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다는 설명도 곁들였다. 그나마 중국 등지에 공장을 차려 현지 인건비를 적용하니까 이 가격에 생산이 되지, 국내 공장만 유지한다면 공장 문을 닫아야 할 형편이라는 상황 설명도 해주었다. 그의 말을 듣고 금세 상황이 머릿 속에서 정리됐다. 탁월한 성능의 선풍기로 고객에게 신용은 얻었지만 회사 수익 면에서는 별스럽지 않다는 이야기이다.
그와의 짧은 대화를 통해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가졌다. 기업이 성실하게 제품만 잘 만든다고 그것이 절대 선(善)이 될 수 있다는 생각, 20세기형 기업과 21세기형 기업은 지향점이 확연히 다르다는 생각, 국민적 신뢰를 받고 있는 기업도 시대 환경에 대처하지 못하면 앞서나갈 수 없다는 생각, 소비를 이끌어내기 위한 자본주의와 대기업의 상술에 일반 소비자들은 속절없이 따를 수밖에 없다는 생각, 굴뚝산업이 첨단산업의 거센 파도에 밀려 저항조차 못하고 쇠퇴하고 있다는 생각 등등이 꼬리를 물었다.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제조업국가이다. 세계 어느 나라를 가 봐도 한국처럼 공장이 즐비하고 생산 작업에 참여해 생계를 유지하는 국민의 비율이 높은 경우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실제로 우리는 제조업을 통해 가난의 굴레를 벗어던졌고, 세계적인 기술 강국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제조업도 제조업 나름. 전통적인 굴뚝산업을 활로를 찾지 못해 기근 상태로 빠져들고 있다. 첨단 산업은 회전력 빠른 제품을 진화시켜가며 고수익을 창출하고 있지만 전통 제조업은 마지못해 명맥을 유지해나가고 있는 꼴이다. 애처롭기 그지없다. 뒷방 신세를 면치 못하는 제조업체가 어디 선풍기 업체 뿐이랴.
신일과 한일이라는 두 회사가 이끌어온 한국의 선풍기 산업은 세계 최강 수준이었고 지금도 그 사실은 유효하다. 하지만 기술력만으로는 21세기의 강자로 군림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에어컨 사용이 일반화 됐고, 제습기가 틈새시장을 파고들고 있다. 안전성을 극대화 시킨 날개 없는 선풍기가 인기몰이를 하고 있고, 중국에서는 2만~3만 원 대의 저가 선풍기가 밀려오고 있다. 이 같은 현상은 전통 제조업체들이 직면한 상황을 대변한다. 선풍기 외에 몇몇 소형가전제품을 시판해 새로운 트렌드에 대비하고 있지만 역부족이다.
전통적인 제조업체들은 기술 강국 대한민국의 근간을 이루어 부국의 꿈을 실현시켜준 고마운 존재이다. 하지만 지금 그들의 입지는 한 없이 좁아져 있다. 그들에게 닥쳐올 사면초가의 위기는 앞으로 더욱 거세질 것이다. 여전히 세계 최강의 기술력을 자랑하는 우리의 기업은 많다. 하지만 그들은 기술력을 넘어선 그 이상의 가치를 창출하지 못해 고심하고 있다. 대한민국이 세계 10대 경제대국의 꿈을 실현할 수 있게 한 선봉장은 전통적 제조업체들이다. 그들을 향한 국가와 국민의 애정 어린 눈길과 손길이 절실하다. 우리는 그 덕을 보고 여기까지 오지 않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