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일시: 2021. 5. 7.~8.(금,토) - 음력(3. 26.~27.), 일출 06:15~일몰 18:55
●산행지: 비슬지맥 2구간 (팔조령-앞고개)
●산행코스: 팔조령(380m)-봉화산(473.5m)-대바우봉-바람골재-삼성산-우록재/수야밤티재-지슬밤티재-우미산갈림봉-우미산-지봉(695.7m)-청산-통점령/청산재-730m봉-범바위등(669.7m)-586.6m봉-신뱅이산-원계재/윙계재-조리봉-헐티재-676.9m봉-용천봉(775.2m)-용천사갈림길-청룡지맥분기점-비슬산천왕봉-삼봉재-극락봉-대견봉삼거리(1018m)-조화봉-상애덤-가차바위, 오페라바위-원명고개-529.1m봉-예복산/월곡봉-난두산/마령산-마령재-수복산-비치재-359.2m봉-방골재-묘봉산-퉁짐이재-배고개/광산재-열왕지맥분기-천왕산왕복-배바위산-건티재-호암산북봉-요진재-참요진재-546.4m봉-581m봉-삼지송안부-습지-화악산-돌탑봉(913m봉-운주암갈림-헬기장(853m)-봉천재-형제봉-562m봉-팔방재-산불초소-앞고개-낙수봉(314.8m)-임도(산림자원센터)
●먹거리: 생수1.8리터, 빵(옥수수꿀호떡2, 호떡1, 밤만쥬1), 홀스3, 사탕2, 알마겔5, 홍삼스틱5 + 준희선생님 행동식, 천왕봉님 백설기
●준비물: 바람막이, 스틱, 헤드랜턴, 구급약, 피부연고, 부직반창고, 마스크3, 충전지2, 충전짹, 반장갑, 머리띠(땀), 손수건, 수건2, 휴지, 우의, 물티슈, 스패츠, 긴팔, 말방울, 매트리스(깔판), 은박매트, 안대, 귀마개, 양말, 여분의류, 띠지40, 고무줄, 비닐
●거리: 약 66.6km
●소요시간: 37.04h
●누구랑: 나홀로
●경비: ITX21,100, 소주,안주5,600, 택시7,900, 헐티재10,000, 비티재18,000, 택시14,900, 고속버스32,800
●날씨: 9~25, 대체로 맑음, 첫째날 저녁부터 황사 심함.
●산행경과:
* 5. 7.
- 04:23 : 팔조령/ 산장휴게소, 식수, 정자
- 04:32 : 북봉대
- 04:40 : 봉화산
- 05:08 : 대바우봉(583m)/ 전망대
- 05:21 : 바람골재
- 05:50~06:12 : 삼성산(668.4m)/ 전망대
- 06:34 : 우록밤티재
- 07:04 : 지슬밤티재
- 07:17~30 : 우미산갈림봉/ 0.38km
- 07:24 : 우미산(747.3m)
- 08:01 : 지봉(698.2m)
- 08:28 : 청산(802.3m)
- 08:50 : 통점령/청산재
- 09:58 : 신뱅이산(688.6m)
- 10:28 : 웡계재
- 10:40 : 조리봉(676.4m)
- 10:55~11:30 : 헐티재/ 포차휴게소, 식사, 물
- 12:25 : 용천봉(778.1m)
- 12:55 : 용천사갈림길
- 13:21~40 : 청룡지맥분기점
- 13:32 : 비슬산(1,083.4)/ 정자
- 14:07 : 극락봉(1,003m)/월광봉
- 14:32 : 대견사갈림삼거리/ 식수
- 14:45 : 조화봉(1,059m)
- 15:28 : 생애봉(989.7m)/ 남악봉, 구구봉
- 15:44 : 기차바위
- 15:53 : 오페라바위
- 16:44 : 임도
- 16:53~17:02 : 원명이재
- 18:07 : 마령산(611.3m)
- 18:22 : 마령재
- 18:55 : 수복산(592.5m)/수봉산
- 19:24 : 비티재/ 포장마차, 쉼터, 정자
* 5. 8
- 01:35 : 비티재
- 03:07 : 묘봉산(514m)
- 04:05 : 광산재/배고개
- 04:38 : 열왕지맥분기점(596m)
- 04:42 : 천왕산(619.3m)
- 05:31 : 배바위산
- 05:55~06:57 : 휴식
- 07:35 : 건티재
- 08:12 : 호암산북봉
- 08:49 : 요진재
- 11:54~12:18 : 화악산(931.5m)
- 12:42 : 운주암갈림길(운주암 0.5km)
- 13:21, 13:53 : 봉천재 임도
- 14:01 : 봉천고개
- 14:34 : 형제봉
- 15:38 : 삼면봉(284m)
- 17:07~19 : 산불감시초소
- 17:24 : 앞고개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2구간 주요 구간 세부거리
팔조령-(0.5)-봉화산-(3.9)-삼성산-(3.8)-[우미산-0.7km]-(2.9)-통점령-(6.8)-헐티재-(3.9)-[비슬산-0.4km]-(2.6)-조화봉-(8.2)-수봉산-(4.9)-묘봉산-(3.5)-천왕산-(0.9)-배바위산-(3.7)-(호암산-0.7km)-(6.5)-화악산-(3.6)-형제봉-(5.3)-앞고개
- 팔조령~비티재 38.8km
-. 팔조령~헐티재 20.3km
-. 팔조령~우미산갈림길 8.8km
- 헐티재~건티재 30.8km
-. 헐티재~비티재 18.5km
-. 헐티재~원명재 13.5km
- 비티재~마흘리고개 58.2km
-. 비티재~앞고개 27.8km
-. 비티재~천왕산 8.8km
-. 비티재~호암산북봉 14.83km
-. 비티재~봉천고개 25.1km
-. 비티재~화악산 21.6km
- 건티재~덕곡리고개 29.5km
-. 화악산~봉천고개 3.9km
-. 화악산~앞고개 8.9km
-. 봉천고개~날되고개/마흘리고개 16.1km
* 사전 정보 및 식수 공급처
- 팔조령: 산장(야간에는 안 함, 수도도 안 나옴)
- 헐티재: 간이매점, 식사, (10시에 출근, 퇴근은 아마 일찍...)
- 대견봉삼거리: 대견사(053-746-0020), 식수
- 비티재쉼터: 파전, 국수, 계란말이, 고추삼겹, (출근은 모름, 퇴근은 20시 쯤...)
- 운주암: 식수 500m
- 밀양 개인택시(010-3591-6432, 055-355-3323)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서울에서 팔조령 가는길
- 서울역~대구역 15:43, 16:11, 16:40, 17:35, 18:11, 4h, 21,100
- 대구역~우록리: 중앙통 급행2번, 304번 우록방면, 우록리 또는 삼산리입구 30번도로 하차
* 앞고개에서 서울 오는길
- 청도역~서울역
* 밀양에서 서울 오는길
- 밀양역~서울역
* 동대구-동서울: 16시, 16:40, 17:20, 18시, 18:40, 20시
- 대구역ITX, 동대구역KTX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매번 말씀드리지만 저의 산행후기는 지맥이 지나는 지역에 대한 여러 자료에 목말라 하시는 후답자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 위해서, 선답자님들이 산행후기를 정리하여 간추린 것에 불과하며 보다 부지런히 많은 선배님들의 산행후기를 살피지 못해 미진하기만 합니다. 후답자 분이 제 산행후기를 토대로 수정, 보완하여 더 완성도 높은 지맥 산행후기를 작성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그 이상 바람이 없습니다. 이번 비슬지맥과 팔공지맥은 "대구매일신문"에 연재한 자료가 많은 도움이 되어주었습니다. 홀대모카페 취지에 맞게 기맥을 지맥으로 변경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비슬지맥 2구간을 출발하기 앞서 7일 오후 약간의 비 예보가 들어 고무줄과 비닐봉다리를 준비하고, 방장님 사무실에 들러 다가오는 홀대모 봄모임 등 현안문제를 상의하던 중에 준희선생님이 창녕군관계자들과 열왕지맥을 함에 있어 운영진 대표로 부뜰이부부님이 참석하신다는 방장님 말씀으로 저도 천왕산에서 만날 수 있도록 노력하기로 했습니다. 대구역에서 우록리 가는 막차가 끊겨, 대일리에서 택시를 타고 팔조령에 올라 정자에서 잠깐 쉬고 이른 새벽에 출발하여 시간을 맞췄습니다.
대구에 대한 유년기 추억이 있습니다. 대구 범물동에 사시는 아저씨는 아버지의 동네 후배(친구 동생)였습니다. 대구에서 터를 잡게 된 이 분은 몇 년만에 한번 씩 고향이 그리우면 시골 저희집을 찾아 오셨지요. 키도 훤칠하고, 핸섬하시고 아이보리 양복을 입으셨던 멋쟁이였습니다. 지금은 그 분의 성함도 물을 사람이 없네요. 그 분의 자녀는 아버지의 고향마을에 대해 알고는 있을까요.
대구역에 내려 가창으로 향하며 문득 가창오리와 가창면은 무슨 관계가 있을까, 풍각면과 풍각쟁이는?
정답은 아무런 관계도 없다. 입니다.^^ ㅋㅋ
촌두부와 청도 동동주로 요기하고 비티재 정자에서 잠깐의 수면을 취한 후 새벽 1시반에 출발하여, 새벽 다섯시 직전 천왕산에서 창녕군관계자와 부뜰이부부님, 그리고 총대장 노란세이브님과 반갑게 조우하고, 산행을 마치고는 준희선생님이 계시는 창녕군 부곡면 부곡하와이로 가서 뒤풀이에 참석하고 이튿날 첫차로 상경하였습니다.
비실이대선배님부부와 준희선생님의 황제지원을 받으며 열왕지맥을 하신 부뜰이운영자부부님의 산행기가 벌써부터 기다려집니다.^^ 아울러 비실이선배님의 압력밥솥 수육찜을 나누며 준희선생님의 지맥에 대한 해박하신 기억력과 식지않는 열정에 감탄을 하였습니다. 덕분에 창녕군에서 예약한 룸에서 온천욕을 하는 호사를 누렸습니다. 감사를 드립니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대구광역시
한반도 동남부에 위치한 도시로 삼국시대에는 신라에 속하는 요충지였으며 고려시대 들어 그 지리적 가치가 높이 인정받기 시작했고, 임진왜란 후에 관찰사영이 설치되면서 경상도의 중심지가 되었다. 1949년 대구시가 된 이후, 1981년 직할시로 승격하면서 인접한 경산군, 달성군, 칠곡군의 일부 읍면을 편입했다. 1995년 광역시로 개편된 후에 달성군을 통합하여 지금에 이른다. 대구광역시의 도심에 해당하는 대구분지는 북쪽으로 팔공산을 중심으로 하는 산지와 남쪽으로 청룡산으로 이어지는 산지, 동쪽으로 용지봉과 대덕산으로 이어지는 산지로 둘러싸여 있다. 그 사이로 금호강이 동에서 서로 흘러 낙동강으로 유입된다. 이 일대는 내륙분지지역이어서 연중 기온의 차가 크며 강우량은 상대적으로 낮다. 1942년 이래 대한민국 기상청 관측 이래 가장 높은 기온인 40도를 여러번 기록한 지역이기도 하다. 일제 강점기 이후 대구시의 면적이 계속 확대되고 해방 이후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인구도 계속 증가했다. 1981년 직할시로 개편될 때에 183만 명이었던 인구는 1990년대 들어 200만 명을 넘었고 2018년에는 248만 명에 이르렀다. 해방 이후 1960년대부터 서문시장을 중심으로 화학섬유 생산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1970년대에는 섬유산업을 기반으로 도시가 발전했으나, 1990년대 후반 IMF로 인해 침체기를 겪었다. 2000년대에 들어 최첨단 소재산업의 중심지로 재도약했다. 행정구역은 중구·동구·서구·남구·북구·수성구·달서구, 달성군 등 7개구 1개군 6개읍 3개면 130개 행정동 195개 법정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청소재지는 대구광역시 중구 공평로 88이다. 삼국시대에 신라의 위화군(喟火郡)과 달구화현(達句火縣:또는 達句伐)이었다. 757년(경덕왕 16)에 위화군을 수창군(壽昌郡)으로, 달구화현을 대구현(大口縣)으로 개칭하여 양주(良州:양산) 관하에 두었다. 이때 수창군은 대구현·하빈현(河濱縣)·팔리현(八里縣)·화원현(花園縣)을 영현으로 관할했다. 고려시대에 들어와 940년 수창군은 수성군(壽城郡)으로 이름을 바꾸고 1018년(현종 9)에 경주에 속했다가 1390년 감무를 둠으로써 독립했다. 대구현은 1018년 경산부(京山府:성주)의 속현이 되었으나 1143년(인종 21) 현령을 둠으로써 그 지위가 상승하기 시작했다. 조선초 1394년(태조 3)에는 대구현이 수성현과 해안현(解顔縣)을 관할하게 되었으며 1419년(세종 1)에 군으로, 1466년에 도호부로 승격했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대구의 군사적·지리적 중요성이 인정되어 1601년(선조 34) 경상도 관찰사영이 설치됨으로써 경상도의 중심지로 자리잡았다. 현종 때에는 풍각현(豊角縣)을, 숙종 때에는 화원현을 다시 합병하여 면적을 확대함은 물론 교통의 요지를 확보했다. 별호는 달성이었다. 지방제도 개정으로 1895년에 대구부 대구군, 1896년에 경상북도 대구군이 되었다. 1906년 월경지 정리에 의해 두입지인 각북면·각현내면·각초동면·각이동면이 청도군으로 이관되었다. 1911년 동상면과 서상면을 합하여 대구면을 신설했다. 1914년 군면 폐합 때 시가지 부분인 대구면은 대구부가 설치되어 독립되고, 옛 대구부의 30개면이 12개면으로, 현풍군의 15개면이 4개면으로 통합되어 달성군이 되었다. 대구의 성장에 따라 1938년에 달성군의 수성면 일원과 성북면·달성면 일부가 대구부로 편입되었으며, 1949년에 대구시로 개칭되었다. 1958년에 달성군의 동촌·공산·성서·월배·가창의 5개면이 대구에 편입되었다가 1963년 동촌면을 제외한 4개면이 다시 달성군에 환속되었다. 1962년에 구제가 실시되고 1980년에 수성구가 신설되었다. 1981년에 직할시로 승격되면서 경산군의 안심읍·고산면, 달성군의 월배읍·성서읍·공산면, 칠곡군의 칠곡읍이 편입되었으며, 1988년에 달서구가 신설되었다. 1990년 7개구 141개동의 행정구역에서 1992년 서구 평리동·산격동, 수성구 만촌동·지산동·황금동, 달서구 월배동이 분동함으로써 7개구 147개동으로 행정구역이 늘어났다. 1995년 시의 명칭이 광역시로 변경되었으며, 같은 해 지방자치선거를 앞두고 실시된 전국행정구역개편으로 달성군이 통합되어 도농통합시를 이루었다(화원현, 해안현, 현풍현). 대구시에서는 2002년 FIFA 한일월드컵, 2003년 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 2011년 세계육상선수권대회 등 세계적인 스포츠 대회부터 2013년 세계에너지총회, 2015년 세계물포럼대회 등과 같은 규모있는 행사가 개최되어 국제적인 도시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대구시는 침식분지인 대구분지에 발달해 있다. 대구분지는 동서 약 26km, 남북 약 33km의 규모로서 북부와 남부산지가 병풍처럼 분지를 둘러싸고 있으며, 금호강이 흐르는 동·서부는 남·북부에 비해 고도가 낮다. 분지상에는 고도 200~300m의 구릉지와 대규모의 범람원이 발달해 있다. 대구분지의 북쪽은 팔공지맥으로 팔공산괴를 주체로 하는 산지가 발달해 있다. 이 팔공산괴는 불국사관입암으로서 초례봉(636m)·환성산(809m)·인봉(891m)·팔공산(1,192m)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팔공산괴 내에는 하천의 침식에 의해 형성된 소규모 분지가 곳곳에 산재하며, 그 주변산록에는 도덕산(660m)·응해산(526m)·문암산(431m)·응봉(456m)·용암산(368m) 등이 환상산맥을 이루고 있다. 이 환상산맥은 팔공산괴를 구성하는 화강암이 관입될 때 경상누층군의 암석들이 경화되어 만들어진 접촉변질경화대에 해당되는 곳이다. 비슬지맥이 흐르는 남부에는 신천 서쪽에 청룡산(794m)·산성산(653m)·앞산(660m)·삼필봉(468m) 등이 있으며, 동쪽에는 용지봉(629m)·대덕산(600m)·병풍산(571m) 등이 솟아 있다. 이들 산지 사이에는 팔조령(373m)·비내현(426m)·통점령(703m) 등의 고개가 있다. [통합포탈 발췌 정리]
* 창녕군
경상남도 북부 중앙에 있는 군으로 낙동강 유역에 위치하여 일찍부터 농경문화가 이루어진 지역으로 전형적인 쌀농사지대이다. 비화가야가 있었으며, 삼국시대에는 신라의 방어 요충지로 이와 관련된 유물·유적이 많다. 부곡온천이 있다. 행정구역은 창녕읍·남지읍·고암면·성산면·대합면·이방면·유어면·대지면·계성면·영산면·장마면·도천면·길곡면·부곡면 등 2개읍 12개면 139개리가 있다(법정리 기준, 행정리 기준 285개리). 군청소재지는 창녕군 창녕읍 군청길이다. 지금의 창녕군은 옛 창녕현(昌寧縣)과 영산현(靈山縣)이 합하여 이루어진 곳이다. 옛 창녕현 지역은 삼한시대의 불사국(不斯國)으로 비정되기도 한다. 삼국시대 초기에는 가야의 영역이었음을 이곳에 분포·출토되고 있는 가야의 고분과 유물들이 말해주고 있다. 신라의 세력확장에 따라 6세기 중엽인 555년(진흥왕 16)에 신라가 이곳을 점령하고 하주(下州)를 설치했다. 565년에 하주를 폐지하고 비자화군(比自火郡) 또는 비사벌군(比斯伐郡)을 두었다. 영산현은 삼국시대에 서화현(西火縣)이었다. 신라의 삼국통일 후 757년(경덕왕 16)에 창녕지역은 화왕군(火王郡)으로 개칭되고 현효현(玄驍縣:玄風)·유산현(幽山縣:청도군 풍각면)·계성현(桂城縣:창녕군 계성면)을 영현으로 관할했으며, 영산은 상약현(尙藥縣)으로 개칭되어 밀성군(密城郡:밀양)의 영현이 되었다. 고려초인 940년(태조 23)에 각각 창녕군과 영산현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1018년(현종 9)에 2곳 모두 밀성군(密城郡:密陽)의 속현으로 병합되었다. 1172년(명종 2)에 창녕군, 1274년(원종 15)에 영산현에 감무가 파견됨으로써 독립했다. 조선초의 군현제 개편으로 1413년에 창녕현과 영산현이 되어 조선시대 동안 유지되었다. 1631~37년(인조 9~15)에 창녕현이 영산현에 합병되기도 했다. 창녕의 별호는 창산(昌山)·하성(夏城)이었으며, 영산의 별호는 취산(鷲山) 취성(鷲城)이었다. 지방제도 개정으로 1895년에 대구부 창녕군·영산군, 1896년에 경상남도 창녕군·영산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 때 영산군이 폐지되고 영산군 부곡면·길곡면·도천면·계성면은 그대로, 읍내면이 영산면으로, 장가면·마고면이 장마면으로 통합되어 창녕군에 편입됨으로써 면적이 크게 넓어졌다. 이때 면의 폐합도 이루어져 창녕군의 창락면은 그대로, 읍내면·고암면(일부)이 읍내면으로, 월말면·고암면(일부)이 고암면으로, 성상면·성하면이 성산면으로, 합산면·개복면·대곡면이 대합면으로, 오야면·이방면이 이방면으로, 유장면·어촌면이 유어면으로, 대초면·지포면이 대지면으로, 남곡면과 영산군 도사면이 남곡면으로 통합되었다. 1918년에 읍내면을 창녕면으로, 1936년에 남곡면을 남지면으로 개칭했다. 1955년 창락면이 창녕면에 병합되고, 1960년에 창녕면이, 1962년에 남지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전체적인 지세는 동부에서 서남쪽으로 열린 형태이다. 군의 북동부는 천왕산(619m)·묘봉산(513m)·수봉산(593m) 등이 경북과 경계를 이루며 솟아 있고, 영취산(737m)과 열왕산(663m)이 동쪽 밀양군과 경계를 이룬다. 동부지역에 위치한 화왕산(757m)은 군내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창녕의 진산이며, 영취산(일명 영축산)은 영산현의 진산이었다. 북서부와 서부에는 구룡산(208m)·구진산(300m)·고운봉(241m) 등 높이 200m 내외의 구릉성 산지가 분포한다. 낙동강이 군의 서쪽과 남쪽을 흐르면서 합천군·의령군·함안군 등과 경계를 이루며, 이방면과 남지읍에서 황강과 남강을 각각 합류한다. [통합포탈 발췌 정리]
*밀양시
경남 북동부에 있는 시로 1995년 밀양군과 통합시를 이루었다. 부산과 대구간의 교통의 요지이며, 도내의 주요 곡창지대이다. 자연경관이 수려하고 유물·유적이 많아 영남지방의 일일관광지이다. 삼랑진읍·하남읍·부북면·상동면·산외면·산내면·단장면·상남면·초동면·무안면·청도면·내일동·내이동·교동·삼문동·가곡동 등 2개읍 9개면 5개동이 있다(행정동 기준, 법정동 기준은 8개). 시청소재지는 경상남도 밀양시 밀양대로이다. 청동기시대의 유물·유적이 많이 분포되어 있어 일찍부터 인간의 거주가 시작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밀양은 삼한시대에 미리미동국(彌離彌東國)이 있던 곳으로 비정되고 있다. 신라 때에는 추화군(推火郡:밀벌 또는 미리벌의 한자 표기)이 설치되었다. 757년(경덕왕 16)에 밀성군(密城郡)으로 고치고 밀진현(密津縣)·상약현(尙藥縣)·오악현(烏嶽縣:또는 烏兵縣)·형산현(荊山縣)·소산현(蘇山縣)을 영현으로 관할했다. 고려시대에 들어 995년(성종 14)에 밀주(密州)로 개칭했다. 고려초에 오악현·형산현·소산현은 청도군으로 이관되었다. 1018년(현종 9)에 밀성군(密城郡)이 되어 창령군·청도군과 현풍현·계성현(桂城縣)·영산현(靈山縣)·풍각현(豊角縣)을 속군현으로 포함했다. 1275년(충렬왕 1)에 군민의 모반 사건으로 귀화부곡(歸化部曲)으로 강등되어 계림부(鷄林府:경주)에 병합되었다. 후에 현으로, 1285년에는 군으로 승격되었으나 곧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390년(공양왕 2)에 밀양부로 승격되었다. 조선초의 군현제 개편으로 1415년(태종 15)에 밀양도호부가 되었다. 1518~22년에 현으로 강등되기도 했다. 별호는 응천(凝川)·밀산(密山)이었다. 지방제도 개정으로 1895년에 대구부 밀양군, 1896년에 경상남도 밀양군이 되었다. 1918년에 군의 중심지인 부내면이 밀양면으로 개칭되고, 1931년에 밀양읍으로, 1989년에 밀양시로 승격되어 밀양군에서 분리되었다. 1995년 지방자치선거를 앞두고 실시된 대대적인 전국행정구역개편으로 전형적인 농촌지역이던 밀양군과 중심도시기능을 담당했던 밀양시가 하나로 통합되어 새로운 형태의 도농통합시인 밀양시가 되었다. 지형은 대체로 백두대간 낙동정맥의 영향을 받아 그 지맥들이 북동에서 남서방향으로 뻗어 있다. 북동쪽이 높고, 남쪽으로 갈수록 고도가 낮아지며 낙동강과 밀양강 유역에는 저평한 충적평야가 발달해 있다. 북쪽에 가지산(1,240m)·운문산(1,188m), 서쪽에 천왕산(619m)·덕암산(545m), 동쪽에 천황산(1,189m)·향로봉(727m)·재약산(1,108m) 등의 험준한 산들이 솟아 있다. 이들 산지에서 발원하는 하천들은 모두 낙동강의 지류를 이루는데, 밀양강은 이 지역의 중앙을 남북으로 흐르다가 산내천·단장천 등과 합류하여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또 서쪽의 청도천과 남쪽의 해양강이 각각 남쪽으로 흘러 낙동강과 합쳐진다. 밀양강을 따라서 남북으로 길고 넓은 지역에 걸쳐 발달한 하안평야(일명 삼문들)는 농경지와 시가지로 이용되고 있다. [통합포탈 발췌 정리]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팔조령(八助嶺, 360m)/ 산장휴게소 식당
팔조령은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과 경북 청도군 이서면 사이의 큰고개로 봉화산(539.7m)과 상원산(674.1m) 사이에 있다. 청도군 이서면에서 달성군 가창면으로 넘어가는 여섯 개의 주요 고개인 우륵재, 봉화재, 팔조령, 범재, 독지재, 상원산재 중에서 가운데 있는 팔조령은 가장 낮은 해발고도의 고개로서 조선시대 한양으로 향하는 큰길인 영남대로의 주요 길목으로 문경새재 다음으로 가장 높은 고개로 알려져 왔지만, 경부선 철도의 건설과 팔조령 터널로 인해 지금은 교통량이 급감하여 겨우 명맥만 유지한 채 관광코스로 활용되고 있다. 조선시대 기팔조령(八助嶺: 360m)록에 ‘최정산 팔조령’으로 나타나고, 근세엔 ‘삼성산 팔조령’으로 표시된 고개다. 청도군지는 "수레도 넘지 못하여 소, 당나귀, 인력으로 짐을 옮기거나 고개를 넘어야 했기 때문에 상당히 붐볐고, 대구로 가는 가장 직선길이었기에 화물이 줄을 이었다" 고 적고 있다. 행인들은 양원에서 단숨에 이곳까지 왔지만, 이 고개를 넘기 위해 한숨을 돌려야 했기 때문에, 팔조리 윗마을 옛길 입구 쪽에는 주막터가 남아있다. 이 곳은 조선시대에 행인들이 힘든 고개를 넘다 쉬어가는 곳이기도 했지만, 행인 규합을 위한 역할 때문에 더 중요했다. 청도의 운문적과 함께 팔조령 봉화산은 마적단이 득실거려 8명이 모이지 않고는 고개를 넘지 않았다는데서 이름하였다고 한다. 흔히 서울~부산 간 최단거리 코스라 하며, 조선시대 ‘영남대로’ 경유점이고 임진왜란 때 왜군의 중요한 북상코스였을 뿐 아니라 경부선 철로 통과지로 내정됐던 곳이라는 얘기도 있다. 중요한 길목이란 뜻이다. 팔조령은 물자와 사람들이 지나는 도로 역할뿐만아니라 군사적 요지 역할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실제 대우는 그만하지 못해, 옛날엔 역로(驛路)에서조차 제외됐던 듯하고 자동차도로 또한 이제 와서야 투자가 이뤄지고 있을 뿐이다. 팔조령의 중요선은 임진왜란 이전부터 제기되었는데 승정원일기 1788년(정조12) 6월 12일 기록에 따르면 선조 20년에 청도읍성을 쌓고 청도읍 주변의 신학성, 고읍성, 중성 그리고 남쪽의 오혜산성 등을 묶어 방어선을 구축하자는 제안이 있었다. 하지만 임진왜란 중 이 전략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으며 결국 팔조령과 성현의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대구가 함락되는 결과를 낳았다. 팔조령이란 이름을 두고 한양에서 부산까지의 관도인 영남대로 중에서 여덟 번째의 고개라는 설도 있고, 여러 얘기가 나돌지만, 그것 역시 글자풀이의 결과일 뿐 ‘八助’(팔조)는 순수 우리말 이름의 음을 표기한 이두식 한자일 것이리라는 시각이 유력하다. ‘팥재’ 같은 게 그 본명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지형도 상 팔조령 높이는 380여m, 터널은 해발 250m 정도로 읽힌다.
- 팔조령은 아래로 팔조령터널이 뚫려 현재는 버스노선이 지나지 않습니다.
♤ 북봉대(北烽臺, 419m)
팔조령 이후 동·서간 지형 구성은 대체로 봉화산(473.5m)~자양산(581.6m)~바람골재(528m)~삼성산(668.4m)~수야밤티재(535m) 순으로 이어진다. 그 중 봉화산은 옛날 봉수대 자리라 해서 이름 붙여졌는데, 부산 쪽에서 올라오는 통신을 청도 남산의 남봉대(南烽臺)로부터 이어받아 대구 법이산 봉수대로 이어주던 북봉대가 그것이다. 하지만 봉수대 터 안내판이 서 있는 곳은 그에 앞서 닿는 419m 첫 봉우리다. 북봉대는 청도군 이서면 팔조리 소재로서 봉수대는 변방을 침범하는 적의 동태와 지방의 민정을 봉수로서 중앙에 알렸던 고대의 군사적 통신 방법으로 조선시대에는 전보요령, 봉수대시설, 근무요원 및 근무태만에 대한 벌칙 등이 구체화 되었다. 홰는 밤에 불을 켜서 서로에게 알리는 것으로 불빛은 싸리나무 다발 속에 관솔을 넣어 만들었고 수는 낮에 연기를 올려 통신하는 형태로 재료는 섶나무를 태우고 그 위에 가축 똥으로 연기를 피웠다. 북봉대 명칭은 조선후기 지방지도(서울대규장각)에 기록된 것으로 봉수대 형태는 산돌을 사방에 쌓고 중앙에 화구를 설치하였고 주변에는 봉군집터와 주막이 있었다. 규모는 담 두께가 0.8m이고 둘레는 20m이다고 안내되어 있다.
♤ 봉화산(봉화산, 473.5m)
봉화산은 북봉대 설명판이 세워져 있는 419m봉서 8분가량 더 진행하여 도달하는 봉우리인데, 청도서 팔조령 오를 때 왼편으로 죽 내려 서 보이는 산줄기의 꼭대기다.
- 탁상 두개가 설치되어 있다.
♤ 봉암산(584.6m)
평이한 등로를 따르다, 우측 암릉봉이 있어 올라보면, 준.희님의 산패와 산이좋아모임'에서 붙여놓은 코팅지 표지판이 나무에 달려있다. 바위 위로 오르지 않으면 만나지 못하는 봉우리이다.
- 봉암산에서 3분여 진행하면 나오는 이정표(↓팔조령 2.1km, ←최정산목장 10.4km/ ←녹동서원, ↑대바우봉)에서 맥길은 좌측으로 꺾여지지만, 우측 방향의 바위봉에 잠깐 올라선다.
♤ 대바우봉(583m)/ 자양산(紫陽山)
자양산 정점은 530m분기점과 4분 거리에 있는 585m과 582m 바위 쌍봉이다. 우록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이 전망대 바위를 이 지역 사람들은 대바우라 했다. 다른 지방에도 간혹 보이고, 대부분의 경우 널찍한 전망대 바위라는 뜻의 대암(臺岩)이지만, 이곳서는 ‘큰바위’(大岩)로 이해했는지 大岩山(대암산), 大岩寺(대암사) 등의 표기가 우록 쪽 도로변에 보이고, 이곳 암봉 밑에도 페인트로 대암봉이라 써 놨다. 하지만 이 산의 전래 명칭은 자양산(紫陽山)이다. 임진왜란 시기에 살았던 모하당 김충선 장군 문집 고지도에서 확인되는 바다. 장군이 별세했을 때 이 산에서 붉은 빛(紫陽)이 솟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봐 그 일로 해서 자양산이란 이름이 유래한 것 아닌가 싶다. 그래서인지 옛날부터 산 북편 우록 자연마을은 자양동이며, 산 남쪽 신촌리 골 끝 저수지 이름은 자양지이다. 전체 산덩이는 자양산, 최고점에 있는 암괴는 대바위라고 정리하면 될 것 같다. 개념도나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상에는 봉화산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린 지능선 상의 308m봉(자양지 동쪽 봉우리)을 유야무야한 구릉인데도 자양산으로 표기하여 놓았는데, 이는 오류라는 지적이다.
- 대바우봉에는 청도산악회에서 창립 30주년을 기념하여 2012. 5월에 세운 대형 자연석 정상석과 전망 사진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 조망 안내판에 의거 살펴보면, 좌측으로 보이는 삼각형 산은 우록 뒷산인 우미산이고 그 우측으로 백록마을과 남지장사가 위치하고 있고, 앞쪽 정면 아래로 녹동서원과 한일 우호관이 있는 우록리다. 우록리 우측 정면의 산마루는 삼정산(566.4m)이고, 그 뒤 우측편으로 최정산, 그 우측 멀리로 앞산이 희미하게 조망된다. 그 우측 아래로 가창 삼산리와 삼산지, 청도 이서와 가창을 잇는 30번 국도가 이어지고 있다.
♤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友鹿里)
우록리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에 있는 리(里)로, 삼정산(566m), 최정산(906m), 청산(802m), 삼성산(668m), 자양산(584m), 우미산(747m) 등 해발 고도 500m 이상의 높은 산이 감싸고 있어, 마을 안으로 이어진 왕복 2차로의 좁은 도로만 차단하면 공략하기엔 힘들지만 방어하기는 수월한 천연 요새로 변한다. 우록리는 풍수지리적으로도 인재와 재물 발복의 기운을 발산하는 명당인 무곡성(武曲星) 자리라고 한다. 풍수가들은 북두칠성에 두 개의 별을 더한 구성(九星) 가운데 제1성 탐랑성(貪狼星)과 제2성 거문성(巨文星), 제6성 무곡성(武曲星) 을 '삼길성(三吉星)'이라고 한다. 국내 재계 순위 1위인 삼성의 회사이름은 여기서 '길' 자를 빼고 정한 것이라 한다. 우록리가 일본 마을과 유사하다는 일본 국민작가 시바 료타로 등 일본인들의 방문기가 있어, 임진왜란 때 귀화한 일본 장수 모하당(慕夏堂) 김충선(金忠善·1571~1642)이 자신의 고향과 비슷한 곳을 세거지(世居地)로 고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산업 군사 풍수 등 다양한 공간적 이점을 두루 갖춘 우록리를 물색한 그의 지리안목이 돋보인다.
♤ 가창면 삼산리(삼산리)
조선초기에 처음으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하며 마을 동, 서, 남 삼면이 산으로 둘러있고 산봉우리 세개가 마을 가까이에 솟아있어 삼산동(삼산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자연 부락으로는 삼산, 인곡, 녹문, 진터, 범골, 금곡으로 형성된 여섯개의 자연부락이 있으며 마을 앞으로 개천이 흐른다. 금곡을 쇠점, 수점이라고 하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기전 마을 주위의 산이 헐벗기 시작하여 나무는 점점 사라지고 앙상한 산이 되었는데 이를 보고 쇠점이라 하다가 수점으로 부르게 되었고, 녹문은 모하당 김충선이 우록동에 정착한 후 우록동 입구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녹문이라 했고, 범골은 김충선이 우록동에 들어올 때 마을에서 글 읽는 소리가 들려와 "이곳에서 어찌 글 읽는 소리가 날 수 있으랴. 아마도 호랑이 소리겠지"라고 한데서 연유하여 범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남지장사(南地藏寺) & 녹동서원(鹿洞書院)
우록리의 유명한 곳으로 남지장사와 녹동서원이 있는데, 남지장사(南地藏寺)는 우록리 최정산(最頂山)에 있는 사찰로, 684년(신라 신문왕 4)에 양한(良漢)이 창건하였고, 1263년(원종 4)에 일연(一然)이 중창하였으며, 1767년(영조 43) 모계(慕溪)가 중창한 뒤 팔공산 동화사 부근의 북지장사(北地藏寺)와 서로 대칭되는 곳에 위치한 절이라 하여 절 이름을 남지장사로 바꿨다고 한다. 여말선초의 고승 무학대사가 이곳에서 수도했으며, 임진왜란 당시 사명대사 유정(惟政)이 이 절을 승병 훈련장으로 이용하였다. 당시 승병과 의병장 우배순이 거느린 의병이 함께 훈련하였는데, 모두 3천 명에 달했다고 한다. 인근에는 1789년(정조 13) 지역 유림에서 유교적 문물과 예의를 중시하였던 김충선의 뜻을 기려 건립한 녹동서원이 있다. 이 서원은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휘하의 좌선봉장으로 참전하였다가 조선에 귀순한 모하당(慕夏堂) 김충선(金忠善, 1571~1642년) 장군의 위패를 봉안한 서원으로, 김충선은 조선에 귀화한 이후 조총제작 기술을 전수하고 경주, 울산 전투에서 공을 세워 조정으로부터 김충선이라는 성과 이름을 하사 받았다. 이후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 당시에도 큰 역할을 하였으며 말년에는 낙향하여 향리교화에 힘썼다. 장군의 묘소 아래 녹동서원이 있으며 한일 우호관이 조성되어 일본인 관광객이 자주 찾는 곳이다.
♤ 바람골재(528m)
재 북편 골을 ‘바람골’이라 하는데, 우록 사람들은 이 고개를 넘어 이서(伊西)장에 다니고, 쇠점 사람들은 그걸 넘어서 대구로 내왕했다고 했다. 또한 모하당 김충선 장군이 청도 지역 의병장들과의 교류를 위하여 넘나들었던 고갯길이라고 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반감을 품고 있던 일부 사무라이들은 바다를 건너오자마자 조선에 항복한 다음 어제의 전우들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히데요시에 의해 일본 전역이 합병되긴 했지만 그 직전까지 일본의 각 번이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처럼 독립된 통치체제를 갖추고 서로 피 흘리며 싸웠다는 점을 고려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다. 항왜는 임진왜란 당시 뛰어난 무예 실력과 화포 기술을 전수하여 조선군의 역량을 배가시켜 주었다. 하지만 조선의 위정자들은 기질이 드센 항왜의 존재를 부담스럽게 여기고 중국으로 보내거나 변방 수비에 동원하는 등 소모적인 자원으로 활용했다. 김충선은 그런 각박한 환경 속에서 꿋꿋하게 살아남아 자랑스러운 조선인으로 자리매김했던 아주 특별한 항왜였다. 그는 1592년 귀화한 뒤 임진왜란, 이괄의 난, 병자호란 때 혁혁한 공을 세워 ‘삼난공신(三亂功臣)’으로 불리기까지 했다.
♤ 삼성산(三聖山, 668m)
바람골재에서 20여분 만에 도달하는 613m봉을 넘어서서, 정상부가 653m~6668m~663m짜리 세 봉우리로 구성된 봉우리를 차례로 넘는데, 그 중 중앙 제일 높은 봉우리가 삼성산이다. 현지에선 “세 성인이 나서” 삼성산이라고 한다는 전설이 전해진다고 하지만, 세개의 산 봉우리 형태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추측된다. 동편 653m봉에서 내려서는 북릉은 마지막에 438m봉으로 되솟아 우록리 당산(堂山)이 된다고 했다. 둘째이자 최고인 668m봉에선 남릉이 내려서서 문수리와 수야리를 구분 짓는다. 세 번째 663m봉 구간은 능선이 좁고 길면서 평탄해 마치 솔밭 산책로를 걷는 듯하다.
- 통상 이 지역의 삼성은 원효와 설총, 일연을 말하는데, 팔공산 서봉의 원래 이름도 삼성산이다.
- 삼성산 앞에 설치된 전망데크에서 남쪽으로 청도군 이서면 산하에 저수지가 보이니 좌로부터 풍양지와 수야지 그리고 우측으로 칠엽지이다. 그 뒤로 청도의 이서면과 각남면 그리고 풍각면을 지나 올라야할 비슬지맥의 화악산 줄기가 펼쳐져 있다. 날씨가 좋으면 화악산 우측으로 창녕의 관룡산과 화왕산도 볼 수 있다. 가아할 방향인 북서쪽으로는 우미산이 가깝고 그 우측 뒤로 통점령과 정상부에 통신탑이 있는 최정산이 보이기 시작하며 그 우측으로 더 멀리 대구를 지나 팔공산이 아련하게 보인다.
♤ 청도군 이서면 수야리
청도 수야리의 옛 지명은 물야였는데 그 연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수야는 골짜기가 세곳에서 내려와 계곡과 산의 모습이 야쟈 모양이라고 해서 수야라고 한다는 말도 있다. 자연마을로는 행정마을, 신기, 중리, 명곡, 덕령, 이천 등이 있는데 행정마을은 박하담의 조부인 소고공 박건이 심은 은행나무가 자라서 정자를 이루어 행정마을이라고 했다. 골짜기 맨 안쪽에 자리잡은 마을은 이천으로 이 마을 선비들의 문집이나 묘비에는 이화라고 쓰여 있으나 그 뜻을 알 수가 없다. 다른 이름으로는 귀일이라고도 하며 병재 박하징이 다른 곳에서 돌아왔다고 해서 귀일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하고 소요당 박하담과 성와 박하청, 병재 박하징 3형제 중 위의 둘은 산동의 선마루로 가서 정착을 하고 막내를 이곳에 두고 가서 뒤돌아 보았다고 해서 귀일이라고 했다고 전한다.
- 지맥길이 용강서원 하산 갈림이정표에서 우틀하여 찾아보니 용강서원은 청도 이서면 학산리에 있는 서원으로 충숙공 박익(1332~1398)과 임진왜란 당시의 14의사를 제향하기 위해 1780년에 건립한 서원이다.
♤ 우록재(535m)/ 육각정 쉼터
삼성산을 지나 603m봉을 지나면 535m재로 급락한다. 북편 당성 가창 우록리 밤티골 하백록 황새들마을과 남쪽 청도 이수 수야리 절골 귀일마을을 잇는 임도가 통과하는 ‘밤티재(栗峴: 율현)’다. 수야리 쪽에서 땔나무를 해 대구로 팔러 다니던 고갯길이자, 우록마을서 풍각장을 내왕하던 길목이라 했다. 허나 그 못지않게 주목할 점은, 조선조 중 후기에 발달하는 고지도들과 지지들이 청도 서쪽 경계의 상징으로 거명하는 '율현(栗峴)'이 바로 이 밤티재일 가능성이다. 옛날 청도 서쪽 끝이 현재의 이서면이었던 데다 이 밤티재가 바로 이서면의 서쪽 끝 경계선을 물고 있기 때문이다. 밤티재 서편 두번째 봉우리인 593m봉서 출발해 내리는 홍두깨산 능선이 그것이다. 이 곳을 '밤티재'라 한다면, 다음 구간에 629m봉을 지나 또 하나의 우록과 지슬을 있는 '밤티재'를 지나게 되어 서로 구분이 어려워 진다. 때문에 이 곳을 우록과 수야를 잇는 '수야밤티재'로, 다음 구간에 지나게 될 밤티재를 '지슬밤티재'로 부르면 변별력이 있을 것으로 주장하는데, 이 두 밤티재의 거리는 30분 거리다.
- 비포장 임도에 육각정 쉼터가 있다. 밤티재(율현)인 이곳을 개념도에는 우록재로 표기하고 있는데, 그냥 우록리 남쪽에 자리잡은 재여서 그렇게 붙인 이름이다. 임도 한가운데 키 큰 모과나무에 둥글게 쉼터 의자를 만들어 놓았다.
- 우록재를 출발할 때는 우측(북쪽)이 대구 광역시 달성군 가창면이고 좌측(남쪽)이 청도군 이서면으로 구분지으며 서향으로 잠시 달려, 홍두깨산 갈림봉(593.1m)에서 북향하면서 좌측이 청도군 각북면으로 바뀌어 이어지고, 청산재 육각정자에서 서향으로 바뀌어 헐티재 이후까지 이어진다.
♤ 홍두깨산갈림봉(593m)/ 삼면 경계봉(달성군 가창면, 청도군 이서면 → 각북면)
청도 칠엽리 갈림길에서 4분여 올라서면, 홍두깨산 갈림길이다. 삼면봉으로 이정표(↓팔조령 6.9km, 최정산목장 5.7km/ 헐티재 11.9km→ )가 서 있다. 『수야밤티재(우록재)를 통과한 산줄기는 583m봉으로 올라섰다가 홍두깨산능선 분기점인 593m봉으로 건너간다. 593m봉(삼면봉)에서 비슬지맥은 동·서 주행에서 북으로 방향을 바꾸어 동쪽 가창면, 서쪽 각북면으로 나누어 나가고, 남쪽으로 한줄기 능선을 내 보내는데 동 이서면과 서 각북면을 구분 지으며 홍두깨산(604m)을 지나는 능선으로 풍각~각북~헐티재를 잇는 902번 지방도의 동편 담장이 된다.
♤ 홍두깨산(606.5m)
경북 청도군 풍각면과 이서면 경계에 위치한 홍두깨산은 팔조령과 삼성산이 청도의 북령을 이루면서 최정산에서 갈라져 남으로 내려와 이서면과 경계가 되고 있다. 이 지역이 600고지의 홍두깨산을 솟게 하고 다시 달리어 대밭골산(364.8m)이 동쪽을 차단하고 있다.
♤ 청도군 각북면 삼평리(三坪里)
홍두깨산 아래에 위치한 청도군 각북면 삼평리는 비슬산 봉우리가 크게 두 갈래로 갈라져 하나는 동쪽에서 다른 하나는 서쪽에서 각북천을 두고 2봉(峰) 1천(川)이 남쪽으로 달려 골 안의 들 가운데 산비탈에 취락이 형성된 마을이다. 율정(栗亭), 풍산(豊山), 방지(芳旨)마을이 있는데, 산행들머리인 방지마을은 과거의 각북면소재지로 마을 앞의 숲이 둥글고 꽃모양과 같이 아름답다고 붙여진 동명이라는 설과 아름다운 반송(盤松)이 있어서 붙여졌다는 설이 있다.
♤ 지슬밤티재(574m)
삼면봉(593m)을 지나 비슬지맥이 북으로 향하는 초입에 ‘갖골재’라 부르는 얕은 잘록이가 있다. 갖골은 서편 각북면 덕촌리 지촌마을의 본명이니, 갖골재는 그 마을로 길이 이어지는 고개를 뜻한다. 갖골재에서 652m봉에 올랐다가 다시 629m봉을 지나 내려서면 또 하나의 밤티재에 내려선다. 앞에서 지난 밤티재가 우록(友鹿)과 청도 이서면 수야리(水也里)를 잇는 재인 반면 30분 거리로 떨어져 있는 이 곳은 우록과 청도 각북면 지슬리(芝瑟里)를 잇는 밤티재다. 개념도에서는 이를 구분하기 위해 앞의 것을 우록재, 뒤의 것을 밤티재로 붙인듯 하며,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는 뒤의 밤티재 자리에 '방치재'로 표기하여 놓았는데, 이는 구술한 것을 표기하면서 오류를 범한 듯하다. 양쪽 마을들로 이어가는 산길이 지금도 뚜렷한 지슬밤티재 윗부분은 마당같이 평평하다. 하지만 재를 지나면 산줄기는 본격적으로 높아진다. 724m-747m-747m 세 봉우리를 이어가며 북편의 백록과 남쪽의 하백록(밤티골)을 가르는 ‘우미산’으로 1차 상승한 후, 최정산 권역을 향해 2차로 도약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산길은 우미산을 빼먹고 지슬밤티재서 그 산 북편의 ‘지슬재’(607m)로 수월하게 이어간다. 되도록 힘을 덜 들이고 넘어 다녀야 했던 생활용 산길이란 뜻이다. 옛 백록 어른들은 마을 남쪽 ‘도독골’을 걸어 지슬재로 오른 뒤 저 산길로 우미산을 우회하고 지슬밤티재를 거친 다음 갖골재서 지촌마을로 내려가 풍각장을 다녔다고 했다.
- 통나무 벤치가 설치되어 있으며 달성쪽 도로는 시멘트포장이 되어 있으나 좌측 청도 쪽으로는 작은 소로만 나있다.
♤ 신천(新川) 발원지
신천이란 새로운 하천이란 뜻이다. 대구 중심부(대구읍성)의 물난리가 심하였는데, 조선 정조 2년(1778년) 대구판관 이서(李逝)의 사재로 제방을 새로 쌓아 물줄기를 돌렸다. 이러한 연유로 신천이 되었다. 이전의 물줄기는 용두산 아래-봉덕동 효성타운 -수도산 동쪽(건들바위)-반월당-동산동 구. 구암서원-서문치안센터-달성공원 앞으로 해서 달서천으로 합류하였다. 대구광역시의 남쪽에서 북쪽으로 흘러드는 신천은 대구광역시의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금호강의 지류이면서 또한 금호강과 더불어 대구시의 중심하천이다. 신천의 발원지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의 우미산 남서쪽 위치한 밤티재 부근이다. 이 곳 밤티재에서 출발한 신천은 대구광역시 달성군 용계군 가창교 남쪽에서 신천의 지류인 용계천을 합류하여 대구광역시 북구 침산동에서 금호강에 합류하는 유역면적 150㎢ 총길이 27㎞에 달하는 都市河川이다.
♤ 우미산갈림봉/ 우미산 370m, 약 15분 왕복
밤티재에서 3분여(100m 정도) 오르면 직진 선명한 등로 우측 능선으로 희미하게 오르는 등로가 나오는데, 좌측 직진길은 우미산 갈림봉을 좌측으로 우회하여 지나는 일반 등로길로 대부분의 산객들은 이 일반 등로로 진행하지만 우미산을 다녀올려면 우측으로 올라서야 한다. 우미산 갈림봉까지는 등로가 비교적 선명하지만 가파른 오르막이다. 약 10분 정도 가파른 오르막을 올라 시그날이 몇 개 걸린 우미산 갈림봉에 다다르고, 이 곳에서 맥길은 좌측으로 이어지지만, 맥길에서 우측으로 약 370m(15분 왕복) 정도 벗어나 있는 우미산을 다녀온다.
♤ 우미산(牛尾山, 747.3m)
우미산은 대구광역시 가창면 우록리와 경북 청도 각북면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는 산으로, 정상은 비슬지맥길에서 조금 비켜서 있지만 동쪽으로 삼성산을 마주보며, 남쪽으로는 홍두깨산과 연결되어 있다. 우록리 분지의 서쪽을 막고 있는 것 외에 별 특색은 없다.
- 우미산 정상에는 청도산악회에서 설치한 정상석과 준희선생님 산패가 있다. 잡목에 가려 조망은 없다.
♤ 지봉(698.2m)/ 준희님 산패가 있다.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는 695.7m로 표기되어 있는 등로 좌측 봉우리이다. 준희님의 산패가 나무에 걸려있으며 글자가 거의 마모되어 판독이 어려운 4등삼각점, 청도413이 있다.
- 지봉 직전 바위봉에 "백록가는길 우록생수 30분" 이정판이 있다.
♤ 청산(802.3m)/ 헬기장/ 최정산(906.2m) 북쪽으로 4.5km
지슬재 이후 산길은 지봉(698.2m)을 거쳐 40번 송전탑과 762.3m봉을 거쳐 청산으로 올라선다. 북서쪽으로 거대한 평원이 펼쳐져 보이기 시작하는 백록마을 뒷산이다. 지맥길은 헬기장이 있는 802.3m봉, 다음의 781m재, 마지막 794m봉에 올랐다가 좌틀하여 704m재로 내려서는데, 이 산덩이 전체를 근동에서는 ‘청산’이라 불렀다. 이외 청령산, 청룡산, 천등산, 취(최)경산, 취(최)정산 등 혼란스럽게 지칭되고 있는데, 대강 최정산 혹은 최경산의 변음이라고 생각하는데, 1940년대 씌여진 「청도문헌고」에는 ‘최경산(璀瓊山)은 군의 북쪽 60리에 있으며, 삼성산에서 뻗어 나온 맥이 이걸 거친 후 삼봉현(헐티재를 잘못 지칭)으로 이어간다’고 적고 있다.
- 청산 이정표(←남지장사 3.5km, ↓백록마을회관 3.1km, ↓팔조령 11.4km), 청산 헬기장에서 맥길은 좌틀한다.
- 헬기장에서 약간 진행하면 정면으로 조망이 트인다. 가운데 펑퍼짐한 둥근 산이 최정산(906.2m)이고, 좌측으로 887봉과 889봉이 솟아있고, 최정산 우측으로 공군부대 사이트의 통신 안테나 시설물이 보이고, 그 우측으로 주암산(854.7m)이 위치하고 있다. 그 좌측은 비슬산 방향이다.
♤ 최정산갈림삼거리
직진방향으로 최정산목장이 바라다보이고, 좌틀하면 진행방향인 서쪽으로 억새밭 넘어 비슬산이 웅장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 최정산갈림삼거리는 세개의 넓은 나무탁자가 놓여져 있다.
♤ 최정산(最頂山, 906.2m)
최정산은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에 위치하고 있는 산이다. 수성구나 동구지역이나 앞산(660m) 주능선에서 남쪽으로 보면 멀리 보이는 정상에 철탑 두개가 서있는 바로 그 산이다. 백두대간의 지맥인 비슬지맥에 솟아 있으며 비슬산과 닮아 비슬산과 형제라고도 한다. 앞산(660m)과 더불어 백악기때 화산활동이 활발했던 곳 중 하나이다. 이 산과 통점령(청산벌) 사이에 있는 700m 고지는 국내에서 강원도의 대관령과 함께 스위스 샬레와 같은 형태의 고위평탄면 지형을 가지고 있는 곳으로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며 대구지역에서 유일하게 고랭지 농업과 목축업이 성행하고 있는데 이 지역이 원래는 화산 분화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에 캠핑장인 힐링파크 포니목장이 조성되어 있었다가 지금은 대새목장이라는 카페가 조성되어 있다. 정상부에는 kt 및 대구광역시 소방본부의 중계소와 모 부대의 야외훈련장 등이 설치되어 있어 출입이 금지되고 있으며, KT중계소와 훈련장 사이의 헬기장이 정상을 대신한다. 다만 정상부에 이런 시설들이 있는 덕택에 정상까지 포장도로가 나있어 정상까지 차량이 올라갈수 있으며,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대구 수성구 야경은 일품이다.
♤ 통점령(通店嶺, 793.7m)/ 육각정자/ 조망처 쉼터
청산 다음으로 혼란한 명칭은 ‘통점령’이다. 국가기본도에는 793.7m봉에 그 이름이 기재되어 있고, 현지에서는 781m 잘록이에 ‘통점령’이란 팻말이 세워져 있다. 산등성이가 통점령인 듯한 자료들인데, 북서편으로 넓은 평원이 펼쳐져 대관령 같아 붙여졌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변에서는 ‘통점령’이란 이름을 들은 바가 없다고 한다. 이 평원에는 ‘청산에 있는 평원’이란 뜻의 ‘청산벌’이란 이름이 있다고 한다. 현지인들도 모르는 통점령이 국가기본지도에 버젓이 기재되어 있는 이유는, 1918년 일제가 펴낸 한반도 등고선 지도에 통점령이라 표시된 곳이 나오는데, 국가기본도의 793.7m봉이나 ‘통점령’이란 팻말이 세워져 있는 781m 잘록이가 아니라, 더 서쪽으로 내려서 있는 704m 잘록이에 ‘통점령’이 기재되어 있다. 그러면서 남쪽 기슭 지슬못 안쪽 골짜기에 ‘통점’이란 자연 마을이 있다고 표시되어 있다. 즉 남쪽의 청도군 이서면 지슬리 통점마을과 북쪽 달성군 가창면 주리를 잇는 재가 ‘통점령’이었던 것이다. 현지인들은 이 재를 ‘청산재’, 또는 ‘치실재(지슬재)’라고 했을 뿐인데, 일제가 임의로 붙인 이름인 것으로 추측될 따름이다.
- 정자에서 좌측으로 희미한 족적을 따라 내려서다 보면, 정면 멀리 비슬지맥 상 조화봉의 강우레이더 관측소 건물이 희미하게 보이고, 그 우측으로 지슬리마을 뒤로 비슬산 천왕봉과 대구로 뻗어 나가는 청룡지맥의 라인이 펼쳐져 있다.
- 좌틀 이후 잘록이 안부인 통점령(청산재)을 지난다. 이정표(←최정산목장 0.2km/ 헐티재 6.4km, →팔조령 12.4km, ↑최정산목장 힐링쉼터 1.0km)에서 직진 방향이다. 청산재에서 잠시 3분여 올라서면 730m봉이다. 이 봉에서 가창의 지형을 좌우하는 매우 중요한 산줄기가 북으로 갈라져 나가는데, 최정산-주암산 능선이 그것이다. 지맥길은 고도를 차츰 낮추어 713m구릉에서 한숨을 돌린다.
- 헐티재를 출발할 때는 우측(북쪽)이 대구 광역시 달성군 가창면이고 좌측(남쪽)이 청도군 각북면으로 나뉘어 남서향하여 비슬산 천왕봉 0.4km 전방 청룡지맥분기점(1040m)까지 약 4km 정도 이어지고, 이 곳에서 맥길은 남동향으로 바뀌면서 행정계도 우측(서쪽)이 대구 달성군 가창면에서 유가면으로 바뀌어 상여덤 암봉(988.5m봉)까지 이어진다. 이 봉에서 우측이 유가면에서 풍각면으로 바뀌고 좌측은 계속 청도군 각북면으로 경계지으며 남동향하다가, 삼거리(920m)에서 온전히 풍각면 안으로 들어서서 남향하여 원명재까지 이어지는데, 원명재 직전 삼거리 갈림길에서 우측(서쪽)이 경남 창녕군 성산면으로 바뀌어, 원명재 이후까지 이어진다.
♤ 범바위등(669.7m) & 상심미기(552m)
범바위등에서 좌측으로 휘어져서 내려선다. 713m구릉을 지나서 억새밭 방화선 따라 진행하면 ‘범바위등을 만난다. 범바위가 있어서 이름 붙여졌는데, 북편 평지말계곡으로 들어갈 때 정면으로 가장 뚜렷이 돌출해 보이는 봉우리다. 이 '범바위등'에서 지맥길은 좌측으로 격하게 꺾어 순식간에 120고지를 내려선다. 까딱 하산 길로 잘못 빠지는가 싶어 등산객들이 긴장하는 지점이다. 그렇게 내려서는 곳은 상심미기라 불리는 묵은 재다. 남쪽 청도 지슬리서 북편 가창 소매골로 이어 다니던 길목이라 하는데, ‘미기’는 잘록이를 뜻하는 ‘목’을 나타내며 깊은 곳의 미기라는 심미기에다 상(上)자가 붙었으니 어딘가 아래쪽에도 고개가 있는 모양이다.
- 상심미기를 지난 뒤 산줄기는 591m봉(586.6m)으로 잠깐 올랐다가 다시 567m 잘록이로 내려앉는다. 쇠실마을(금천리)과 평지말을 잇는 또 다른 상심미기라 했다. 앞의 것을 지슬 상심미기라 한다면 이건 쇠실 상심미기인 셈이다. 두 상심미기 너머 함께 도달하게 되는 가창 쪽 골은 상심미기골이라 했다. 평지말 상류 소매골의 한 지류다.
♤ 신뱅이산(688.6m)
국립지리원 지도에는 685.9m로 표기되어 있다. 쇠실 상심미기재에서 줄기차게 1시간을 올라서야 한다. 이정표(←헐티재 2.65km, ↓최정산목장 4.3km/ 팔조령 16.1km)에서 좌틀로 내려선다.
- 전위봉을 지나 정상에 오르면 거대한 정상석이 있으며 주위 잡목으로 조망은 없고 준희님 산패가 있다.
중요한 고개인데, 각북면과 대구미술광장을 가리키는 이정표도 있었는데 한참을 디다보다 인증을 까먹었습니다.^^
♤ 원계(遠溪)재(514m)/ 윙계재
원계재는 경북 청도군의 북서쪽에 있는 각북면 금천리 송내(松內) 마을과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정대리를 연결하는 고개이다. 군의 각북·풍각면을 비롯하여, 경남 밀양시와 창녕군에서 대구광역시로 가는 가장 가까운 길목으로 과거에는 교통량이 많은 대표적인 고개였는데, 조선시대에는 이 고갯길을 이용하는 관리들을 위하여 풍각에 유산역이 있었다. 원계(遠溪)재란 이름은 고개까지의 계곡이 깊고 멀다고 하여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 외 윙계재, 배정재, 이정현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데, 윙계재는 원계재의 지역의 방언이라고 할 수 있다. 배정재는 달성군 정대리 배정마을로 가는 고개에서 유래하였다. 일제 강점기 「조선지형도」에는 이정현(梨亭峴)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는 배정재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배정 마을은 큰 배나무 정자가 있어 사람들이 쉬어 간 데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한다. 상심미기 구간과 윙계재 및 헐티재 사이 비슬지맥을 함께 놓고 보면, 670m봉(범바위등)~552m재(상심미기)~689m봉~514m재(윙계재)~676m봉(조리봉)~510m재(헐티재)~677m봉을 이어가며 비슷한 높이로 오르내림을 반복된다. 거기 속한 상심미기, 윙계재, 헐티재 중 자동차길은 헐티재 뿐이다. 그 하나만 살아남았다는 뜻이다. 반면 상심미기는 존재조차 잊혀졌다. 윙계재는 요행히 지도에 이름이 올려졌으나 등산객들은 그저 옛날 나뭇길 정도로 생각할 뿐 대수로워 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동차가 흔치 않던 불과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대구와 청도 서부를 잇던 일대 제일의 재는 윙계재였다. 헐티재는 그 인접 오산리 사람들이나 이용했지만 윙계재는 청도 각북·풍각은 물론 밀양·창녕 북부 사람들도 줄을 이어 다녔다. 조선시대 경상감영 가는 길이었고 근세 대구나 화원시장 오가는 주 관문이었기 때문이다. 길목을 따라 주막이 늘어설 정도였다고 하는데, 청도 쪽 들머리는 헐티재 남쪽 각북 금천리 송내마을이고, 마을 입구 정자 자리가 옛날 주막 터였다고 한다. 옛 어른들은 가창 정대로 가는 길로 헐티재가 머리 위로 빤히 보였지만 그 길을 피하였는데, 윙계재로 가는 길보다 훨씬 멀 뿐 아니라 높이에서도 결코 유리하지 않아서였다. 대신 송내마을 주막터를 지나 중고개(382m)를 거쳐 불개산능선을 걸어 오르더니 막바지에 늙은솔골 안으로 감아들어 윙계재에 닿았다. 불개산능선은 윙계재 서쪽에 인접한 비슬지맥 상의 557m봉에서 출발해 중고개 및 불개산(436m)을 거쳐 남쪽으로 내려서며 금천리를 송내와 쇠실로 가르는 능선이다. 마을입구~중고개 20분, 중고개~윙계재 15분 거리였다. 윙계재를 넘으면 달성군 가창면 정대리 윙계골이다. 그곳 물길을 따라 하류로 걸으면 ‘대구미술광장’(폐교) 인근서 헐티재~가창 사이 도로를 만나 대구로 갈 수 있다. 그러지 않고 그곳 큰 물길을 건너 초곡마을(정대리) 장단이골로 들어서면 화원 본리리 가는 옛길과 연결된다. 대구 쪽서 헐티재로 오를 때 폐교 지나자마자 왼편 산 안으로 나 있는 길이 윙계골 진입로다. 청도 옛 어른들은 소나무를 연목(서까래)으로 깎은 뒤 저 윙계재 길을 걸어 화원시장에 내다 팔았다. 그 행렬에는 가창 정대 사람들도 동참해, 써레·쟁기 등등을 만들어 장을 찾아 다녔다. 그때 나무농기구를 내다팔던 들녘 장터가 화원·현풍이었다는 얘기다. 이렇게 중요한 통로였던 윙계재를 일제시대 지형도는 ‘梨亭峴’(이정현)이라 표기해 놨다. 윙계를 한자로 표기할 방법이 없자 배정마을 이름을 억지로 끌어다 댄 결과가 아닐까 싶다. 이 통로를 공무상 여행했던 조선시대 관리들은 풍각에 있던 유산역(幽山驛)과 화원에 있던 설화역(舌化驛)서 말을 갈아탔을 것이다. 앞서 본 상심미기와 이 윙계재 사이에 솟은 비슬지맥 상의 689m봉은 일대 최고봉이다. 그 북릉이 지나온 소매골과 다음의 윙계골을 구분하기도 한다. 하지만 689m봉엔 이름이 없고, 그 서편에 붙어선 604m봉이 갈모봉이란 이름표를 대신 달고 있었다. 윙계재서 가장 솟아 보이는 게 원인이 아닐까 싶다.
- 이정표가 있는 갈림사거리이다.
♤ 조리봉(676.4m)
남쪽 금천리서 ‘행개띠빙이’, 북편 윙계서 ‘조리봉’이라 부르는 봉우리다. 이들 662m-676m 쌍봉은 남쪽서 헐티재로 차를 몰 때 정면으로 가장 뚜렷이 솟아 보이는 봉우리들이다.
- 조리봉이란 정상석이 있으며 그 옆에 조리봉 이정표(← 헐티재 0.9km, ↓최정산목장 6.0km/ 팔조령 17.8km)가 세워져 있고, 3등삼각점, 청도304 와 준.희님의 산패가 있다. 좌측으로 약 50분 내려서면 헐티재에 닿는다.
♤ 헐티재(535m)/ 여기부터 비슬산권역/ 902번 2차선 포장도로/ 간이매점
헐티재는 경북 청도군의 서쪽에 있는 각북면 오산리와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정대리 잿들마을을 연결하는 고개로, 과거 청도 서부지역 사람들이 대구와 화원으로 오갈 때 이용하던 여섯 고개, 즉 헐티재, 원계재, 통점령, 무등재, 상심이고개, 율치(밤티재) 중 가장 서쪽에 위치한 고개이자, 유일하게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고갯길이다. 지명 유래는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지만, 과거 조선 시대에는 이 일대를 토현(土峴)으로 표기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헐티를 흙으로 표기한 것에서 유래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일설에서는 고개가 험준하고 힘들어서 그 고개를 넘으면 숨을 헐떡이며 배가 고파온다고 하여 붙여졌다고도 한다. 헐티재는 비슬산과 우미산 사이에 있는 고개로서 청도천의 지류인 각북천의 최상류에서 고개를 넘는다. 각북천 상류는 덕촌리에서 세 갈래로 나뉘는데 서쪽의 오산리를 택하면 헐티재에 이르고 중간의 금천리를 경유하면 윙계재 그리고 동쪽의 지슬리를 거치면 율치를 각각 넘는다. 송서리에서 각북천을 거슬러 올라와 덕촌리에서 각북천 최상류를 택하면 오산리에서 고개를 넘게 되는데 헐티재는 창녕, 밀양, 부산 방면에서 각북면을 거쳐 대구로 가는 주요 고개 중에서 가장 높은 고도이다. 과거에는 매우 구불구불하고 험준하였지만, 현재는 포장도로로 잘 정비되었을 뿐만 아니라 주변 경관이 매우 수려하여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드라이브 코스로 유명하다. 「조선지형도」에는 삼봉현(三峰峴)으로 표기되어 있으나 오기인 것으로 보인다. 삼봉재는 각북면 오산리에서 달성군 현풍면 유가사를 연결하는 비슬산 주능선에 위치한 고개이기 때문이다.
- 들머리는 이 곳에서 우측 도로따라 대구 방향으로 약간 내려서다가 좌측 숲으로 올라붙는 방법과, 좌측 앞으로 이어지는 청도가는 도로 따라 약 0.3km 가다가 볼록거울이 있는 곳에서 우측 길로 들어서는 방법 두가지 중 하나를 택하면 된다.
- 헐티재를 지나면서 지맥은 드디어 비슬산 권역에 들어선다. 하지만 재에서 그 다음의 677m봉으로는 바로 이어 걸을 수 없다. 땅 주인에 의해 철책이 쳐져 버렸기 때문이다. 때문에 지맥 답사자들은 용천사 동편의 ‘감비골’ 쪽으로 내려선 다른 맥을 타고 677m봉에 오른다. 통상 헐티재에서 들머리로 삼는 곳은, 청도 방향이라지만 가능한 지맥길에 충실한다면 대구 방향으로 약간 내려서서 펜스가 끝나는 지점, 도로가 우측으로 휘어지는 커브길에서 좌측으로 들어서서 숲길을 올라 맥길을 이어간다. 과거에는 철조망이 얼기설기 쳐져 있었지만, 지금은 모두 철거되었고 비교적 들어서기에 불편하지 않은 들머리이다.
♤ 청도군 각북면 오산리
청도군의 가장 서북쪽에 위치한 오산리는 용천사가 있고 대구와 인접한 전원주택 단지로 알려져 있다. 1896년 이전은 대구부 풍각현 각북면으로 청도읍지에는 기록이 없었다가 1906년에 청도군에 편입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 당시 고산동, 오이동, 금곡동의 비지를 병합하여 오이와 고산의 이름을 따서 오산동이라 하고 각북면으로 편입하였다. 오산리는 고산(귀미)과 심천, 오리가 합해져서 만들어진 동네로서 덕산과 오리 사이에 있는 고산은 대구읍지에는 도며리라고 적혀있고 마을 사람들은 귀미라고 부르고 있다. 오리는 오산을 말하는데 대구읍지에 동네 이름이 오이원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 달성군 화원이나 가창으로 갈 때 산기슭에 당도해 해가 저물면 오이원에서 자고 떠났다고 하는데 오이원은 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정대리와 오이리를 잇는 길목이며 대구읍지는 지금의 가창면을 상수서라고 기록하고 있다. 1988년 오산동에서 오산리로 이름을 바꾸었다. 비슬산 동쪽 첫 동네인 오산리는 청도군의 가장 북쪽에 위치한 동네로 청도에서는 오지 중의 오지로서 비슬산 중턱에 자리잡은 마을은 넓은 경작지가 없는 편인데 계단식 밭과 다랑논으로 되어 있다. 오리 서쪽에는 대동골이라는 계곡이 있으며 이곳에서 발원한 청도천의 원류인 오산천은 동쪽으로 흐른다. 오이마을은 오동나무가 많으며 용천사 가는 길목에 공덕비문이 있고, 또한 오산리에는 수령 310년의 버드나무인 당산나무가 있으며 방아타령, 나물노래, 도라지타령, 청도 차산 농악, 청도 삼베짜기 등으로 유명하다. 오산리에서 남산리, 삼평리, 우산리, 명대리로 이어지는 20km는 각북 벚꽃길로 아름다운데 이 길을 지방도 902호선이 지나 헐티재를 넘는다. 헐티재 정상에는 씨없는 감 청도 반시라고 새겨진 조형물이 청도 방면 오른쪽 커브길에 세워져 있으며 왼쪽에는 헐티재 휴게실이 조성되어 있다. 휴게실은 청도군의 특산물인 감말랭이를 조그맣게 팔던 곳에서 시작하여 현재는 커피 등과 같은 음료수에서 간단한 식사(라면, 파전)도 먹을 수 있는 장소로 바뀌었는데 휴게소에서 아래로 오산리 전경이 한눈에 바라보인다.
♤ 감비골산(677m)
남쪽서 차를 타고 헐티재로 오를 때 뚜렷이 솟아 보이는 봉우리다. 조리봉과 이 봉 사이에 헐티재가 들어 있다. 677m봉 또한 그만큼 돌출성이 뛰어나다는 뜻이다. 그 위 벼랑바위들에서 가창호 최상류 수원지인 북편 ‘마내미골’이 한 눈에 조망되는 것도 그 덕분이다. 하지만 봉에 이름이 없다. 오산리 마을서는 그냥 감비골산 이라고만 가리키고 있었다. 677m봉에서 시작된 벼랑바위군은 그것과 20여분 떨어져 있는 다음의 757m봉 지나서까지 계속된다. 문바위 같은 것도 있고 흔들바위 닮은 것도 있다. 헐티재~비슬산(정상) 사이에서 벼랑바위들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구간이다.
- 시원한 골바람이 불어오는 677m봉 전망바위에서 앞쪽으로 건너다 보면 청룡지맥상의 880m봉이 아주 가까이 다가와 있다.
♤ 용천봉((湧泉峰, 757m)
개념도상 778.1봉이다.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상에는 775.2m로 표기되어 있다. 다른 지도에는 용천봉으로 표기되어 있는 봉우리로, 이 봉 동남쪽 청도 각북에 위치하고 있는 용천사에서 그 이름을 따 왔다. 757m봉(개념도상 778.1봉)은 677m봉에 이어 두 번째로 오르기 숨가쁘다. 하지만 그 수고는 그 위의 시원한 조망으로 보답된다. 꼭짓점이 통바위로 되어 있어 남쪽 오산리 일대가 훤히 보인다. 677m봉은 북쪽, 용천봉은 남쪽을 보는 전망대인 셈이다. 헐티재~비슬산(정상) 사이 3대 중요 지형 중 둘이 이들이다.
- 4등삼각점, 청도404와 준희님 778.1m 산패가 있다.
♤ 용천사(湧泉寺)갈림길
지맥이 886m봉을 넘어서면 847m구릉에 닿는다. 국가기본도가 ‘삼봉재’라는 엉뚱한 이름표를 붙여놓은 지형이다. 그 다음의 837m봉 잘록이에 인접해 오래된 산길이 나 있어 오해된 결과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그 잘록이도 삼봉재는 아니다. 그 옆으로 난 오래된 산길 또한 오산리서 ‘중댕이바람’을 걸어 비슬산 최고봉으로 다니던 길목일 뿐이다.
♤ 용천사
용천사는 비슬산 동쪽 기슭에 자리잡은 절로 670년 의상대사가 옥천사로 창건한 대동 화엄 전교의 10대 사찰 중 한 곳으로 1267(고려 원종 8) 일연이 중창하여 불일사라 칭하였다가 다시 용천사로 고치고 임진왜란 후 1631년(인조 9) 조영대사가 3중창하였으며 1805년(순조 5) 의열이 크게 중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용천사라는 이름은 맑고 풍부한 석간수가 끊임없이 용솟음쳐 흘러내리고 있어 용천이라 붙인 것으로 전하며 이 용천의 샘물은 가물 때나 장마가 질 때도 늘 일정한 양이 맑은 물이 흐르고 사철 마르지 않으며 한겨울에도 어는 법이 없다고 한다.
♤ 청룡지맥분기점/ 비슬산까지 0.4km로 왕복 30분 소요되며, 되돌아나와 남쪽으로 비슬지맥을 따른다.
용천사 갈림길 이정표가 있는 재에서 20분 정도 올라서면 이정표와 돌탑 4개가 있는 비슬산 천왕봉 갈림길이다. 들머리 헐티재에서 4km 지점(이정표 상 3.8km)으로, 비슬지맥에서 분기하는 청룡지맥 분기점이다. 저 잘록이(삼봉재) 이후엔 산줄기가 25분여 간 줄곧 내쳐 올라 비슬산 최고봉에 이른다. 드디어 번치라 불러온 그 곳 평원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제 비슬산 본체에 들어서서 청룡지맥이라 불리는 산줄기를 북쪽으로 내보내는데, 이 산줄기와 비슬지맥 구간 중 청산벌~비슬산 사이 10여km 사이에 40리 물길이라는 가창 정대계곡이 형성되고 있다.
- 청룡지맥분기점이정표에서 시계방향으로 멀리 최정산, 청산, 우미산이 조망되고 그 우측으로 정대계곡과 지나온 지맥길이 조망되며, 가야할 방향으론 조화봉과 그 우측 대견봉, 그리고 우측 뒤편 멀리 지맥에서 서쪽으로 벗어나 있는 관기봉이 조망된다.
♤ 청룡지맥(靑龍枝脈)이란
청룡지맥은 낙동정맥 사룡산분기점에서 나누어진 비슬지맥이 비슬산 직전 400m지점에서 산줄기 하나가 북쪽으로 분기하여 비슬산(천왕봉, 1083.4m)을 지나 대구 앞산(660m)을 향해 뻗어가는 산줄기로 비슬산(1083.4m), 청룡산(794.1m), 산성산(653.4m)을 지나 대구 시가지 수계를 둘로 갈라 놓으며 두류산(130.8m)을 지나 와룡산(299.6m), 궁산(252.6m)을 거쳐 금호강을 건너는 강창교 북편까지 이어가며 팔공지맥의 기산에서 온 황학지맥의 끝봉인 죽곡산을 바라보며 끝나는 도상거리 37km의 산줄기로 금호강의 우측 분수령이 된다. 강창교에서 1.7km정도 제방둑을 따라 내려가면 금호강이 낙동강에 합수되고 팔공지맥 가산에서 분기한 황학지맥이 끝나는 합수점 부근엔 4대강 사업의 대표적 상징물인 강정고령보와 디 아크가 있다. 대구 시가지로 들어오면 대부분 지맥길 능선 마루금 흔적을 찾을 수 없고 이제 도시화로 인하여 지루한 도로를 종주해야 하는 수고가 있다.
♤ 청룡지맥 개념도
♤ 비슬산 천왕봉(琵瑟山, 1,083.4m)/ 삼면봉(청도군 각북면, 대구 달성 가창면 → 유가읍)/ 육각정자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유가읍·옥포면과 경상북도 청도군 각북면에 걸쳐 위치한 산이다. 비슬산괴는 대구분지 남부산지의 주체이며 비슬산은 이 산괴의 주봉으로 여기서 북북서 방향으로 청룡산, 산성산이 있고, 앞산에 이르러 분지상에 임한다. 산지는 전체적으로 급준한 사면을 가지고 분지에 임하고 있으나 그 산정에는 평탄면을 형성하하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예를들면 산성산은 480m 부근 이상에서는 갑자기 경사가 완만해지고 곡폭도 넓어져 높이 600m의 고산현까지 계속되고 있고 청룡산은 500m 부근부터 완경사지가 보이고 산정부에 평탄면이 나타나고 최정산에 있어서도 약 700m 이상에서는 완사면을 이루고 있다. 비슬산에는 유가사, 소재사, 용연사,, 용문사, 임휴사, 용천사 등의 많은 사찰이 산재해 있는데 그 가운데에서 용연사는 경내에 보물 제539호인 석조계단이 있으며 가까이에 유명한 약수터도 있고 1986년 2월 22일에는 군립공원으로 1993년 1월 18일에는 자연휴양림으로 지정되어 관광지로서 각광을 받고 있다. 대구분지 남쪽을 에워싸는 비슬산괴 중 최고봉은 비슬산의 대견봉(大見峰, 1,083m)이다. 도성암 위에 위치하는 천왕봉(天王峰) 역시 대견봉과 거의 같은 높이라는 기록이 『여지도서』에 나온다. 비슬산의 주봉은 북쪽으로부터 천왕봉~대견봉~조화봉(照華峰, 1,058m)~관기봉(觀機峰, 990m)으로 이어진다. 비슬산에 관한 내용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고문헌은 『삼국유사』로, '포산(苞山)'으로 기록되어 있다. '소슬산(所瑟山)'이라고도 하였다. 인도의 범어에 해당한다. 한자로는 포산이 된다. 신라시대에 인도의 스님이 우리나라에 놀러 왔다가 인도식 발음으로 비슬(琵瑟)이라고 해서 이름을 붙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경상도지리지』, 『경상도속찬지리지』에서는 비슬산의 한자 표기가 현재 사용하는 비슬산(琵瑟山)과는 다르다. 비슬산의 '비'가 '비파 비(琵)'가 아니라 '도울 비(毗)'다. 즉 비슬산(毗瑟山)으로 기록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발간 이후의 고문헌에서는 모두가 비슬산(琵瑟山)으로 기록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비슬산을 일명 포산으로 기록하고 있다. 포산은 수목에 덮여 있는 산이란 뜻이다. 『유가사사적(瑜伽寺寺蹟)』에는 산의 모습이 거문고와 같아 비슬산(琵瑟山)이라고 했다는 기록도 있다. 비슬산 주능선은 저 와와(臥蛙)능선을 북서외곽으로 펼쳐 놓은 뒤 1,052m 북방 구릉 종점을 떠나 남진하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곧이어 비슷한 높이의 1,054m 구릉을 거쳐 1,083.4m 최고봉(비슬산 천왕봉)에 오른다. 거기엔 넓고 훤히 산상 평원이 펼쳐져 있다. 그걸 주변 마을들에서는 ‘번치’라 불렀다. 북편 바로 아래 옥포 김흥리서는 그냥 ‘번치’, 동편 바로 아래 각북 오산리서는 ‘이곡번치’라 부르는 것이다. 번치는 고원지대 평원을 가리키는 일반명사로 다른 지방서도 더러 쓰는 단어이고 ‘이곡’은 ‘이고개’의 준말이다. 비슬산 번치는 옛 사람들에게는 보배 같은 곳이라 했다. 오산리 할머니들은 거기서 지천으로 널린 나물을 뜯으러 드물잖게 올라 다녔다고, 바깥 어른들은 거기서 거름으로 쓸 모풀을 베었으며, 아이들은 도라지를 캐 제사상에 쓸 수 있도록 도왔다는 것이다. 저 번치를 떠 받치는 것은, 서쪽을 향해 입 벌린 고래 모양을 한 바위덤이다. 그 서편 및 남서쪽 바로 아래에는 1,036m-1,038m짜리 두 벼랑바위가 대문 양쪽 문설주같이 솟았다. 혹자는 저런 모습에서 거문고를 연상하는지, ‘비슬산’ 이란 이름이 거기서 생겼으리라 추정하는 경우도 보인다. 하지만 산 주변 마을에서 통하는 보다 오래된 명칭은 비슬산이 아닌 ‘비들산’이다. 옛날 대홍수 시대에 이 산이 모두 물에 잠기고 비둘기 한 마리 앉을 만큼만 겨우 남아 붙게 됐다는 이름이다. ‘비들’은 ‘비둘기’를 이곳 방식으로 발음한 ‘비들기’에서 파생했을 터이다.
- 지금 최고봉에 높다랗게 서 있는 정상 표석은 ‘비슬산 천왕봉'이다. 1988년 이후 줄곧 ‘천왕봉’이라는 표석이 세워져 있었는데, 1997년 일부 유림들이 정확한 근거도 없이 2km쯤 남쪽 1,035m봉에 세워져 있던 '대견봉' 정상석을 이 곳으로 옮겨 정상을 차지하고 있었고, 2014년 대견사지 터에 대견사가 중창되면서 다시 서로 자리를 바꾸어 세워져 있다고 한다.
- 비슬산 정상에는 1등삼각점 청도 11이 있다.( 실제로는 도엽명과 숫자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 '천왕봉' 설명판.
내용은 "비슬산은 정상부의 바위 생김새가 신선이 앉아 비파를 타는 형상이어서 '비슬(琵瑟)'로 불리고 있으며, 북 팔공 남 비슬로 지칭되어 북쪽의 팔공산은 남자의 산, 남쪽의 비슬산은 여자의 산으로 비유되고 있다. 2014년 3월 1일 대견사 개산일에 비슬산 최고봉 지명이 대견봉에서 천왕봉으로 변경되었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 유가사(瑜伽寺)
달성군의 서쪽으로는 유장하게 낙동강이 흘러가고 남쪽에는 비슬산이 높이 솟아 있다. 그렇듯 지세가 좋으니 낙동강변에는 태고정 같은 정자가 자리를 잡았고 비슬산 산기슭에는 용연사, 유가사 등 명찰이 들어섰다. 달성을 상징하는 비슬산은 달성군과 청도군에 걸쳐있는 산으로 봄철이면 참꽃(진달래), 가을철이면 억새풀밭이 장관이다. 비슬이라는 산 이름은 정상의 바위모습이 신선이 거문고를 타는 것과 같아 붙여졌다고 한다(사실 "비슬"이란 말은 고대 인도 힌두의 신으로 불교에 수용된 "비슈누"를 한자로 음역한 "비슬노"에서 온 용어이다. - 한국문화유산답사회 편(2002), <답사여행의 길잡이 8권> 동화사의 말사인 유가사는 신라 흥덕왕2년에 도성국사에 의해 창건되었으며 절 이름은 비슬산의 바위모습이 아름다운 구슬과 부처의 형상과 같다 하여 옥 유(瑜), 절 가(伽)자를 따서 지어졌다고 경내에 세워진 안내판에 적혀있다. 그 뒤로 진성여왕 3년에 원잠선사가 개축하는 등 여러 차례 중수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부속 암자로는 수도암, 청신암, 도성암을 거느렸다. 범종각 부근에서 대웅전 지붕 위를 올려다보면 비슬산 바위군이 기와처럼 대웅전 위에 얹혀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문화재로는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50호 석조여래좌상과 괘불(掛佛), 삼층석탑, 15기의 부도 등이 있다. 이 중 괘불은 주변의 마을 주민들이 가뭄이나 질병, 적군의 침입 등으로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봉안하고 소원을 빌었다 한다. 특히, 가뭄이 심할 때에는 괘불에 소원을 빌고 대견사터에서 기우제를 지내면 반드시 비가 내렸다고 한다. 삼층석탑은 높이 364㎝이며, 아래쪽에 있었던 원각사터에서 1920년에 옮겨온 고려시대 양식을 띤 작품이다. 또, 이곳에 있는 15기의 석종형 부도는 도굴의 화를 입지 않아 온전히 보존되어 있는데, 낙암당(洛巖堂)·월호(月湖)·휴영당(休影堂)·설청(雪淸)·해백(海白)·경수(景修)·진흘(眞汔)·명학(明學)·처명(處明)·사옥(思玉)·영규(靈圭)·도경·풍렬(豊烈)·하초(夏初)·세민(世敏) 등의 부도이다. 부속암자로는 비구니들의 수도처인 수도암(修道庵)과 경북의 3대 수도처 중의 하나인 도성암(道成庵)이 있다.
- 유가사에서 비슬산 정산 천왕봉까지는 약 3.5km로 1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 유가읍(瑜伽邑)
대구광역시 달성군에 위치한 읍으로 동쪽으로 비슬산을 경계로 청도군과 북쪽으로 가창면, 논공읍, 서쪽으로 현풍읍, 구지면, 남쪽으로 창녕군이 위치해 있다. 서남쪽에는 성산면과 경계에 달창저수지가 축조되어 있으며 곳곳에 소규모의 저수지가 많고 주요 농산물은 쌀, 양파, 고추, 수박 등이며 최근에는 방울토마토와 같은 원예작물재배갸 활발해지고 있으며 또한 읍내에 제지와 화학 등의 제조업체가 있다. 또한 동화사의 말사인 유가사가 있어 비슬산 들머리로 많이 이용되고 있다. 비슬산 유가사에서 유래하여 유가읍이라 이름 붙여졌다고 한다. 유가읍 읍소재지는 금리이고 서부의 봉리와 금리 일대에 펼쳐진 평야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이 높고 험준한 산지를 이루고 있으며 동쪽에는 비슬산을 비롯한 1,000m내외의 산들이 솟아있다. 원래 달성군의 읍/면들 중 가장 인구가 적었으나 테크노폴리스의 개발로 인구가 유입되기 시작하면서, 2015년 기준으로 하빈면을 뛰어넘었다. 2012년 이곳의 인구는 2천여명 남짓에 불과했지만, 2016년 테크노폴리스에 건설중이던 아파트에 대거 입주를 시작하면서, 그 해 3월 17일 1만여명의 주민이 거주하게되며 급격한 인구유입속도를 보였고, 같은 해 12월에는 인구 2만여명이 유입되어 차후 발전이 기대되는 지역이다. 2018년 3월 1일 유가읍으로 승격되었다.
♤ 삼봉현(三峰峴)/ 삼봉재/ 마령재(X)
대견사 갈림길 이정표를 지나고 청룡지맥 분기점에서 약 10분여 내려서면 만나는 잘록이 안부인데, 개념도상 마령재다. 주능선은 최고봉인 천왕봉 이후 하강하기 시작한다. 그 내리막을 400여m 걸어 도달하는 곳은 돌탑들이 옹기종기 모여선, 비슬산 주능선이 비슬지맥과 만나는 해발 1,030여m 연결점이다. 비슬산의 북동외곽능선 출발점이 되는 셈이다. 거길 지나면 주능선은 얼마 후 가장 낮은 구간으로 내려선다. 최저점이 해발 900여m인 곳이다. 그 중 905m 잘록이로는 주능선 유일의 동·서간 고갯길이 나있다. 동쪽 각북면 용천사 쪽에서 출발한 등산객들이 참꽃 군락지를 향해 갈 때 처음 올라서게 되는 고개마루로, 각북면 오산리에서는 이를 삼봉재라 했다. 재 우측 옆으로 솟아있는 980m봉-974m봉-911m봉의 세 바위봉우리가 삼봉이라 했다. 마을 여느 집 마루에서도 쉬 올려다 보일 정도로 뚜렷한 곳을 일제시대 지형도가 헐티재에 잘못 갖다 붙였고, 현재의 국가기본도가 헐티재~천왕봉 사이 어느 봉우리에다 엉터리로 붙여놓은 삼봉현(三峰峴)의 진짜 주인이 바로 이 고개인 것이다. 이 삼봉재는, 옛날 어렵던 시절 각북 오산리 주민들이 소나무 서까래 깍아 무겁게 짊어지고 이 재를 넘어 30리 길이라는 현풍장에 져다 팔아야 곡식을 사 죽이나마 끓여 먹을 수 있었다. 거기 가야 콩·깨 같은 농산물이나 돼지새끼를 구해 올 수 있었다고도 했다. 그러나 주능선 너머 달성 땅에서는 삼봉재라는 이름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거기로는 소장수나 넘어 다녔을 뿐 일반인은 그럴 일이 없어 관심이 없었다”는 얘기였다. 그러나 이 삼봉재가 엉뚱하게 마령재로 잘못 안내되고 있는데, 진짜 마령재는 남쪽으로 9km가량 더 내려 간 비슬산 남록(南麓)에서 창녕(성산면)~청도(풍각면)를 연결하던 매우 이름 높던 옛날 재인데도 그랬다.
♤ 극락봉(1,003m)/ 월광봉(X)
삼봉현에서 올라서면 1,003m봉이다. 산길이 그 정상부를 거치지 않고 서편 중허리를 감아 지나침으로써 존재감이 제대로 부각되지 못하는 봉우리다. 하지만 이 봉우리는 옆구리에 훤칠한 벼랑바위를 낀 산줄기가 동편 오산리 쪽으로 내려서는데, 그 곳 대동골을 물통골과 극골골로 양분하는 능선이다. 1,003m봉을 오산리서는 극락이 혹은 극락봉이라 불렀다. 그 동편 극락골에 있는 극락사 절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그런데도 전래 명칭을 모르는 등산객들 사이에서 월광봉(月光峰)으로 통하고 있었다. 그건 옛 기록에 조차 없는 이름이다. 현풍 쪽 기록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건 월광봉이 아니라 월선봉(月先峰)일 뿐이다. 월광봉이란 이름이 나타나는 유일한 책은 근년에 씌어진 달성군지 뿐으로, 그건 옛 기록의 ‘先’을 ‘光’으로 오기한 결과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게다가 1,003m봉은 월선봉일 개연성조차 극히 낮다. 옛 기록은 “대견봉의 남쪽에 월선봉이 있다”고 써 둔 반면, 1,003m봉은 대견봉의 북쪽에 있다고 보는게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월선은 달이 먼저 떠오르는 곳을 가리키는 듯하며, 산동네들에서 그런 봉우리는 대개 달등이라 불린다.
- 삼봉재를 지나면서, 극락봉으로 올르기 위해서는 넓고 선명한 우회길을 버리고 좌측(직진) 능선으로 가파른 등로를 치고 올라야 한다.
- 조화봉 비슬산강우레이더 구조물과 그리로 향하는 고가다리가 지네처럼 보인다.
여기서 그만 큰 실수를.... 여기서 충분히 대견봉에 다녀올 수도 있었는데, 이때까지는 제 머리속에 대견사가 조화봉의 다음에 있었습니다. 칼바위에 올라 뒤돌아보니 앗! 대견봉이 저기... 크, 아까 화장실 60m 표지에서 내려갔어야 하는거였다는... 그제서야 지형이 머리속에 이해되어 들어왔습니다.
♤ 대견봉 갈림봉(1,018m봉)/ 대견봉(1,035.4m)까지 0.6km
조뿔 뒷담 구간 주능선이 마지막 올라서는 1,018m봉은 사실 별개 봉우리라 보기 힘든 지형이다. 칠분지(조화봉)로 가는 오르막의 한 중간점이라 보는 게 더 정확하다. 그 후 겨우 7m가량 하강하여 곧바로 칠분지를 향해 높아져가기 때문이다. 등산객들이 그냥 삼거리라고만 부르는 이유도 그것일 터이다. 그런데도 거기다 굳이 '1,018m봉'이라는 명패를 얹어 두는 것은, 특별히 중요한 한 능선이 거기서 출발해 가기 때문이다. 신신골(조피벌·군락지)과 그 다음의 큰골(휴양림골)을 가르면서 대견사터 위를 지난뒤 둥그렇게 퍼져가는 게 그것이다.
- 극락봉과 이 칠분지 사이의 동편 골짜기는 각북면 오산리 극락골이다. 칠분지서 동쪽으로 큰 산줄기가 뻗어 그 북쪽의 극락골과 남쪽의 애골을 가르면서, 동시에 오산리와 남산리를 구획짓는 것이다.
- 좌측길로 조화봉을 향하나 우측 대견사를 둘러보고 갈림삼거리로 뒤돌아온다.
♤ 대견사(大見寺)/ 2014년 3월 복원
창건자는 미상이나 신라 흥덕왕 때 창건된 사찰이다. 당나라 문종(文宗)이 절을 지을 곳을 찾고 있었는데, 하루는 낯을 씻으려고 떠놓은 대야의 물에 아주 아름다운 경관이 나타났다. 이곳이 절을 지을 곳이라 생각한 문종은 사신을 파견하여 찾게 하였다. 결국, 중국에서는 찾을 수 없게 되자 신라로 사람을 보내어 찾아낸 곳이 이 절터이다. 이 터가 대국에서 보였던 절터라 하여 절을 창건한 뒤 대견사라 하였다는 전설이 전한다. 창건 이후의 역사는 거의 전래되지 않고 있지만, 1416년(태종 16) 2월 29일과 1423년(세종 5) 11월 29일 이 절에 있던 장륙관음석상(丈六觀音石像)이 땀을 흘려 조정에까지 보고되었고, 종파는 교종(敎宗)에 속하였다고 한다. 절의 폐사에는 빈대와 관련된 일반적인 설화가 전래되고 있으며, 그 시기는 임진왜란 전후로 전해지고 있다. 그 뒤 1900년영친왕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하여 이재인(李在仁)이 중창하였으나 1908년 허물어지기 시작하여 1917년 다시 폐허화되었다. 2011년 11월 대견사 재건 공사가 착공되어 2014년 3월 적멸보궁, 요사채, 산신각, 목조와가 등 건물 4동이 완공되었다. 이로써 대견사가 폐지된 지 100여년 만에 다시 복원되었다. 현재 이곳에는 신라시대에 축조한 것으로 추정되는 길이 30m, 높이 6m의 축대가 남아 있고, 무너진 구층석탑과 거대한 석조선각불상, 10여 명이 앉을 수 있는 동굴대좌(洞窟臺座) 등이 있다. 이 중 축대는 현재까지 온전히 보존되어 있으며, 동굴은 참선 또는 염불도량으로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도굴꾼에 의해서 무너진 구층석탑은 원래 높이 4.5m, 기단 너비 1.2m이었던 우수한 작품이다. 전성기에 이 절은 비슬산의 중심사찰이었다고 한다. 산 밑에 있는 소재사(消災寺)는 옛날 이 절의 식량이나 각종 생활용품·의식용품 등을 공급하던 곳이었다고 하며, 소재사 앞터에는 방앗간을 비롯하여 두부공장·기왓골 등도 있었다 한다. 현재 이 절의 축대 밑에는 맑은 물이 솟아나는 샘터가 있으며, 가뭄 때면 달성군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기우제를 지내고 있다.
- 칠분지를 약간 벗어나 내려서다 등로 우측으로 보면, 대견봉이 우뚝 솟아있고 그 아래 최근 개사한 대견사가 자리잡고 있다.
- 가야 할 방향 능선으로 좌측 암봉은 988.5m봉인 상여덤(남악봉)이고, 기맥 능선은 좌측으로 이어진다. 우측 멀리 뾰족한 봉우리가 대구 시계 능선상에 있는 관기봉(가마봉, 992m)이다.
좌측 지네다리로 가는 길을 버리고 직진하여 칼바위 능선으로 오릅니다. 칼바위를 넘으며 대견사를 되돌아 보고는 아차 싶더라구요. 물을 보충해야 하는 지점인데.... 300m 돌아가기도 그렇고, 남은 물과 날씨를 보니 잘하면 비티재까지 갈 것도 같습니다.
♤ 칼바위 들머리
현위치 표시 이정표(임-10, 1,018m)와 볼록거울이 설치되어 있는 비슬산 강우 레이더관측소로 이어지는 도로에 올라서면 좌측은 비슬산 강우 레이더관측소로 이어지는 고가다리를 따라 진행하는 길인데, 대부분은 알기쉽게 고가다리를 통해 조화봉으로 오르지만 정면 축대 우측 정상 등로로 오르는 들머리로 올라선다. 등로 초입에 '칼바위 120m, 조화봉 300m' 표지판이 있다. 들머리에서 잠시 오르면 등로 좌측 위에 칼바위(톱바위)가 줄지어 서있다. 톱바위를 지나서 약간 더 오르면 레이더 강우 관측소가 나온다.
♤ 톱(칼)바위
극락봉(1,003m)을 지나면 주능선은 다시 951m잘록이로 내려앉았다가 1,018m봉으로 올라선 후 흔히 톱바위라 부르는 특이한 형상의 바위군을 거쳐 1,059m봉으로 솟구친다. 그 도중의 톱바위를 두고 비슬산휴양림 안내판은 석검봉이라 표시해놓고 있다. 칼 같은 바위들이 부채꼴로 삐죽삐죽하게 솟아 톱니 모양을 이루는 게 옛 기록에 나타나는 石劍峰(석검봉)의 이미지와 닮았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하지만 옛 기록은 분명하게 “석검봉은 비슬산의 북쪽에 있다”면서 인접한 봉우리로 천왕봉 · 수도봉을 들었다. 지금의 톱바위에서 북으로 3km 가까이 떨어져 최고봉 인근에 솟아 있다는 말인 셈이다. 수도봉을 거론한 걸로 봐서는 그게 주능선에 있지 않을 수도 있다. 더욱이 톱바위는 뚜렷이 솟은 별개의 봉우리라 보기도 어렵다. 그냥 생긴대로 톱바위라 하는게 맞겠다.
♤ 조화봉(1,059m)/ 칠푼지/ 비슬산강우레이더관측소
비슬산 해맞이 제단이 놓여있는 넓은 공터인 칠분지에 올라선다. 톱바위에 인접한 1,059m봉은 강우관측소로 상징되는 비슬산 제2봉이다. 그 남쪽 면은 대단한 절벽바위로 깎여내려 더 남쪽의 풍각 상수월마을서 병풍덤이라 부를 정도로 풍광이 뛰어나다. 병풍덤서 그 마을 쪽으로는 치이(키)덜겅, 정지(부엌)덜겅 등 덜겅이라 불리는 굉장한 너덜이 둘이나 펼쳐져 있기도 하다. 그러나 1,059m봉은 실제 높이와 보는 높이 사이에 편차가 극심한 봉우리다. 청도 쪽에서는 이게 비슬산 최고봉인 듯 생각될 정도로 솟아 보인다. 특히 7층짜리 하얀 관측소 빌딩이 세워진 뒤 비슬산 남사면 풍각 쪽에서는 오직 이것만이 두드러져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비슬산 서쪽 유가읍 땅에서는 이 봉우리가 있는 줄조차 제대로 알아채기 힘들 정도로 희미하다. 그 전면(서쪽)으로 1km나 튀어나간 지점에 다소 낮지만 훨씬 두드러지는 1,035.4m봉[대견봉]이 솟아 시야를 가리기 때문이다. 그러한 1,059m봉에는 조화봉이라는 정상표석이 서 있다. 하지만 실제로 그게 조화봉이라는 확증은 어디도 없다. 조화봉은 서쪽 유가읍 지역을 중심으로 봍여진 이름일진대, 거기서는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이 봉우리에 그런 특별한 이름이 주어졌을 가능성도 높아 보이지 않는다. 현장에서 그 일대 명칭으로 통하는 건 오직 칠분지(칠푼지)였다. 뜻이 무엇인지는 물론이고, 그게 과연 봉우리만을 가려 가리키는 것인지조차 불확실했다. 하지만 칠분지는 주변 여러 마을에 큰 편차 없이 공통되게 통하는 이름이었다. 동편의 청도 각북면 남산마을 및 낙성마을, 서편의 달성 유가읍 가재마을, 남편의 청도 풍각면 상수월마을 등에서 공히 그랬다. 이렇게 분명한 이름을 가진 것은 1,059m봉이 주변 마을 사람들에게 매우 밀접한 생활 터전이었기 때문인듯 했다. 그 동편 각북면 남산리서는 할머니들까지 그곳 지형을 소상히 알 정도로 누구없이 끊임없이 올라다녔던 곳이라 했다. 오산리에선 가물 때 올라 무지(기우제)를 지내던 터라 했다. 근년 가뭄이 들었을 때는 용머리를 누른 탓이라며 강우관측소 건립을 원망도 했다는 것이다.
- 개념도 상 해발 고도는 1059m이고, 국지원 지도상 고도는 1059.4m이다.
- '칠분지'에서 원명재로 이어지는 기맥길 들머리는 '해맞이 제단' 우측 숲길로 들어서야 하는데, 이 곳부터는 등로가 잡목으로 뒤덮혀 거의 보이지 않아 잘 살피면서 진행하여야 한다.
- 조화봉 정상에서 조망을 맘껏 즐긴 후 조화봉 뒤쪽 능선으로 들어가면 전망바위가 나온다. 그곳에서 가야할 마루금도 살펴 보고 나와 좁게 나있는 능선 진입 등로를 따라 989.7m 암봉으로 지맥길을 잇는다.
- 금수암전망대갈림길을 지나 10여 분 더 오른다. 상여덤은 암릉봉이라 우회하기는 위험하여 올랐다가 다시 되돌아나와야 하는데, 이 곳에서 대구 시계능선(관기봉 방향)으로 약간 내려서면 좌측편으로 기차바위로 우회하는 등로가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 상여덤(989.7m)/ 삼면봉(청도군 각북면, 달성군 유가면 → 청도군 풍각면)/ 비슬산 대문/ 구구봉, 남악봉
비슬산 주능선은 조화봉[칠분지]을 지난 뒤에도 남쪽으로 1.3㎞를 더 나가서 의미있는 갈림봉인 상여덤에 닿는다. 산행 안내도에는 '남악봉'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근거가 있는 이름인지는 모르겠다. '운문서 화악까지'에서는 '상여덤'으로 부르고 있다. 이 주능선의 동편에는 '애골', 서편에는 '큰골'이 펼쳐져 있다. 애골은 청도 각북면 남산리 공간이고, 큰골은 '소재사'라는 고찰에서 출발해 비슬산 휴양림을 거쳐 퍼져 오르는 달성 유가면 용리 계곡이다. 비슬산 주능선 남부 종점 990m봉은 일대 산줄기 흐름 상 매우 중요한 지형이다. 비슬산을 얘기하는데 이름이 꼭 필요하다는 뜻이다. 뿐만 아니라 990m봉은 그 자체로도 상당한 돌출봉이다. 특히 남쪽서 보면 그렇다. 그쪽 부분이 끝없이 떨어져 내리는 절벽으로 깎인 결과다. 그 남동쪽 비티재나 남서편 아래 창녕 성산면 대산리 월곡마을서 보면 실감된다. 하지만 거기에는 제대로 된 명칭이 없다. 그 남쪽 바로 밑 풍각면 화산리 원명마을에서는 그 아래 골 이름을 따 '신주골 만댕이'라고만 불렀다. 남동쪽 풍각면 상수월마을서는 비슬산 산내 공간으로 들어갈 때 꼭 거쳐야 하는 관문이어서 '대문'이라는 말로만 가리켜 왔다고 했다. 동쪽 각북면 남산리서는 그 일대 암릉을 합쳐 '기차덤'이라 부른다고 했다. '비슬릿지'라 불리는 비슬산 최고의 암릉이 거기에 열차처럼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 외 남서편 월곡마을에서는 이름없이 그냥 “기슭에 맷돌샘이라는 게 있고 옛날 정씨네가 피난했던 곳으로 전해져 온다”고만 했다. 다만 귀가 번쩍 뜨였던 건, 화산리 동원마을에서 '상여덤'이란 이름을 기억해냈을 때였다. 옛 어른들로부터 들은 것이라고 했을 뿐 아니라 모습 또한 그걸 연상시킬 만하니 가능성 있을 듯도 했다.
- 삼각점이 있는, 개념도상 969.7m 암봉이다. 국립지리원 지도상으론 988.5m봉이다.
♤ 기차덤
레일이 지나가 깊게 패인 자욱도 있고 기차 지붕 위로 걷는 둣한 느낌이다. 로프 가드가 설치되어 있다. 덤이란 말은 기백산 지날 때도 있었어요. 누룩덤이라고... 바위가 쌓여져 있는 봉우리로 보면 되겠죠.
♤ 오페라바위
- 기차바위를 지나 954m봉에 이르고 입석바위와 오페라바위도 지난다.
♤ 면계갈림봉(920m)/ 각북면 → 풍각면
상여덤(989.7m)에서 남동향으로 분기하는 기맥 능선은 남쪽으로 한참 더 내려가다가 동쪽으로 굽는다. 990m봉서 화악산으로 이어가는 '화악분맥' 노선을 700여m 더 타고 흐르다가 갈라지는 것이다. 거기 해당하는 화악분맥 구간이 앞서 비슬릿지 혹은 기차덤으로 불린다고 했던 그 암릉이고, 그걸 지나 도달하는 해발 920여m 되는 지점이 남동능선 분기점이다. 920m 분기점 이후 남동능선은 북편의 각북면(남산리)과 남쪽의 풍각면(수월리)을 가르며 동쪽으로 달리는 능선을 하나 분기시키고, 지맥길은 풍각면으로 진입하여 남쪽으로 이어진다. 즉, 920m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각북면과 풍각면이 나뉘어 나가고, 기맥길은 남향하여 풍각면 관내로 들어서서 원명고개까지 이어지고, 원명고개에서 우측이 경남 창녕군 성산면, 좌측이 풍각면으로 나뉘어 이어지게 된다.
- 개념도 상 삼거리(920m)에는 이정표(→보림사 2.5km, →상수월마을정상 0.5km)가 세워져 있다.
- 상수월마을 정상 표지판에서 좌측 보림사 방향으로 이어간다.
♤ 청도군 풍각면, 창녕군 성산면/ 도계이자 면계
면계갈림봉(920m)에서 1시간 정도 내려서면 양회임도에 닿는다. 임도따라 우측으로 20m진행하면 임도삼거리다. 삼거리 갈림길에서 등로는 좌측이다. 이 삼거리에서 우측편이 경남 창녕군 성산면 대산리와 만나, 좌 청도군 풍각면, 우 창녕군 성산면의 도계이자 면계와 만나 이어지게 된다.
♤ 원명이고개(427m)/ 원미이재/ 서낭단(城隍壇)고개/ 도계
비슬산 대문 상여덤(990m)을 통과해 산외(山外) 공간으로 나서면 영 딴 세상이다. 990m봉~천왕산(618m)~화악산(932m) 사이 25km를 니은(ㄴ)자 형태로 달리는 능선이다. 행정구역도 변해, 990m봉~천왕산 사이 15km 구간의 서편 및 남편은 대체로 경남 창녕군 성산면, 그 반대편은 경북 청도군 풍각면이다. 그 다음 천왕산~화악산 사이 10여km의 북편은 청도군 각남면, 남쪽은 밀양시 청도면으로 바뀐다. 앞의 것은 풍각-창녕 경계, 뒤의 것은 각남-밀양 경계인 것이다. 산줄기 위력이 새삼 실감되는 대목이다. 그 중 풍각-창녕 구간(990m봉~천왕산) 15km는 비티재를 경계로 다시 둘로 갈라 살필 수도 있다. 990m봉~비티재(278m) 사이 8.8km의 비슬산권과, 비티재~천왕산 사이 6.2km의 여타 산권(山圈)이 그로써 나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둘은 높이에서도 차가 져, 비슬산권에선 대체로 500m 이상의 고도를 유지하는 반면, 비티재 이후엔 대부분이 300m대를 맴돈다. 저 풍각-창녕 구간의 전체적 흐름은 990m봉~920m분기점~서낭단고개(400m)~난두산(611m)~마령재(405m)~수복산(593m)~비티재(278m)~방골재(296m)~묘봉산(514m)~퉁점이재(324m)~배고개(305m)~천왕산(618m) 순이다. 그 초입서 화악분맥은 920m분기점을 지나자마자 유례 드물게 직선까지 그리면서 급강하한다. 동쪽의 상수월마을(수월리)과 서쪽 원명마을(화산리) 사이를 헤집고 순식간에 500m나 폭락하는 것이다. 도달하는 해발 400m 저점은 등산객들에 의해 흔히 ‘원명재’라 불리는 곳이다. 그러나 그 본명은 ‘서낭단(城隍壇)고개’로 확인됐다. 거기 선 노송 두 그루가 원명 당산(堂山)나무라 했다.
- 준.희님의 '비슬지맥 / 원명고개 427m 산패가 달려있다. 우측으로 나 있는 등로로 들어선다.
- 가전당처사임공묘(可田堂處士 林公墓)를 넘어 약 100m 정도 더 오르면 4등삼각점, 청도 461이 있는 529.1m봉이다. 개념도 상 535.8m봉이다. '529.1m봉'에서 잠시 내려서서 잘록이 안부를 지나고 다시 '563.9m봉'을 향해 오른다. 등로 우측에 송전탑이 보이고 그 아래로 창녕군 성산면 월곡마을의 논들이 보인다.
♤ 원명(元明)마을
경북 청도군 풍각면 화산리 원명마을은 경남 창녕군 성산면 대산리와 접하여 경남-경북 주민이 한 마을처럼 대대로 살아오고 있다. 이 마을 지명은 최근까지도 '우멍이' 또는 '움미이'로 불렸다. 임진왜란 당시 비슬산 일대에서 왜군과 맞서 싸우던 망우당 곽재우 장군이 비슬산에서 포진하다 이곳으로 진지를 옮겨 도착하여 동이 트자 '여명'(黎明)이라 이름 붙였는데, 세월이 흐르며 '원명'(元明)으로 변했다는 설이 있다.
♤ 청도군 풍각면 화산리
화산리는 비슬산 아래 첫 동네인 원명과 동원 및 서원을 합하여 만들어진 동네이다. 명칭 유래는 마을 앞산의 이름이 꽃밭동산이라서 화산이라고 하는데 밀주지에는 동원과 서원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고 원시만 보이는데 서원은 청도군의 가장 서쪽에 위치한다고 하여 서원이라 불리고 원명은 우멍이 또는 움미라고 불리는데 세월의 흐름에 따라 원명으로 변했다고 전한다. 원산리마을의 형성 및 변천은 본래 풍각현의 지역으로 고려 때에는 밀양도호부에 속해 있었고 조선시대에는 대구부에 속했으며 1895년(고종 32)에 청도군 이동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동원동, 서원동, 원명동을 병합하여 화산동이라 하고 풍각면에 편입되었고 1988년 화산동에서 화산리로 이름을 바꾸었다. 마을이 자연환경은 청도군에서 서쪽으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으며 비슬산 조화봉에서 금곡으로 내려오는 등성이 첫머리에 있는 마을로 계곡 두개를 끼고 위치하는 화산리는 위쪽이 동쪽이고 아래쪽이 서쪽이어서 마을 이름도 동원과 서원으로 불리고 있다. 용각산계에서 비슬산으로 이어지는 태산준령들 사이로 송서에서 부터 서쪽으로 이르는 골 안으로 형성된 마지막 골짜기이며 계곡을 따라 금곡리와 안산리 쪽만 열려있고 경작지는 거의 없으며 밭 경작과 함께 산채나물과 약초 및 자연산 송이 등을 채취한다.
- 원명고개를 출발할 때는 우측(서쪽)이 경남 창녕군 성산면 대산리이고 좌측(동쪽)이 청도군 풍각면 수월리로 나뉘어 남향하다, 수복산을 지난 곳부터 남동향하면서 천왕산 갈림봉(열왕지맥분기봉: 596m)까지 이어지고, 이 봉에서 우측(남쪽)이 창녕군 성산면에서 밀양시 청도면으로, 좌측(북쪽)이 청도군 풍각면에서 각남면으로 바뀌어 동향하면서 건티재 이후까지 이어지게 된다.
♤ 마령재(馬嶺峙, 410m)
마령재는 경남 창녕군 성산면 연당리 웃당마을에서 청도군 풍각면 금곡리를 오가던 고개인데 연당리 동쪽에 소재한 고개로 신라 때 낙동강 서부의 진주와 합천 등지에서 경주로 가는 대로로써 인마의 왕래가 많았다고 한다. 청도군 풍각면 송서리에서 청도천의 지류인 풍각천을 거슬러 올라 봉기리를 지나 금곡리 입구에 이르면 마령치를 넘게 되는데 청도에서 창녕군으로 가는 다섯 개의 주요 고개인 비티재, 마령치, 배고개, 통짐이재, 매봉재 중 마령치는 가장 많은 통행량을 자랑하였다고 한다. 남·북간으로는 난두산과 수복산의 중간에 있고, 동·서간으로는 창녕 연당리와 청도 금곡리 사이에 나 있는 고개다. 청도읍지인 「오산지(鰲山志)」(1673)는 “비파산(琵琶山)의 지맥이 남쪽으로 가서 마치협(馬峙峽)을 지난 뒤 굽이쳐 갑을령(甲乙嶺)이 됐다가는 동쪽으로 굽는다”고 적어뒀다. ‘마치협’과 ‘갑을령’을 특히 주목한 것이다. ‘마치협’은 바로 마령재고, ‘갑을령’은 ‘서쪽(갑을방향) 창녕 경계에 있는 것’이라고 각주된 걸로 봐 수복산 정도를 가리키는듯 하다. 지명은 말의 형세를 한 이 산의 모양에서 말안장을 얹는 말의 등 부분에 해당한 데에서 유래하며 말재 혹은 마령으로도 부른다. 지리지에는 마현으로 수록하고 있는데 현의 북쪽 30리에 있으며 비슬산에서 이어진다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마치(馬峙) ∙ 말치 ∙ 마령(馬嶺) ∙ 마령치 ∙ 마랑재 등등 여러 이름으로 통한다. 거기서 금곡리로 내려서는 골짜기 이름도 ‘말치골’인 걸 보면 말과 무슨 인연이 있는가 싶다. 풍각서 비티재로 향할 때 전면으로 올려다 보이는 잘록이가 그 고갯길이다. 마령재가 도보시대 일대의 간선로 역할을 했던 것은 그 양쪽에 매우 넓은 생활권역이 분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쪽에는 대합면 · 성산면 등 창녕 북부권과 유가면 · 구지면 · 현풍면 등 달성 남부권이 펼쳐져 있고, 동편에는 풍각을 시작으로 청도의 넓은 땅이 이어져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장날이면 서쪽 아주머니들은 동쪽에서 나는 고추 등등과 바꿔 가려고 땅콩 같은 그쪽 산물을 챙겨 줄을 이었고, 소들 또한 규모 큰 풍각 우시장을 드나드느라 숱하게 마령재를 넘었다. 금곡리 쪽에는 덩달아 저들을 대상으로 한 주막이 성업했으며, 소장수들은 거기 여러 개 박아둔 말뚝에 소를 매어놓고는 눈을 붙이고 가곤 했다. 그러다 보니 돼지새끼 팔고 돌아가다가 강도 당한 이야기 등등 숱한 희비가 묻힌 곳 또한 마령재라는 것이다. 마령재는 한국전쟁 초기인 1950년 9월 창녕 · 달성 쪽의 수많은 피란민들이 넘었던 고개이기도 하다. 남 · 북 방향 마지막 전선이던 낙동강 물길을 지키던 미군방어선이 무너졌기 때문이었다. 1950년 9월 창녕과 달성 쪽의 수많은 피란민들은 마령재를 걸어 넘어서는 청도 풍각천과 청도천 등등 하천바닥에 움막을 치고는 인천상륙작전 때까지 버텼다. 당시 패배한 미군부대는 자동차로 비티재를 넘어 후퇴한 뒤 비슬지맥에 다시 방어선을 구축했다. 마령재 초입의 금곡리 입구 마을 숲에 진을 치고는 수복산 위로 탱크를 올려 보내 비슬지맥을 오르내리며 새로 구축한 전선을 지킨 것이다. 그럴 때 비슬지맥 서편의 창녕 쪽 기슭은 모두 불태워졌고 동쪽 청도의 금곡마을 숲 거목들은 미군들이 장난삼아 쏘아댄 권총에 맞아 모두 썩었다고 했다. 어려서 전쟁을 목격한 현지인들은 줄줄이 재를 넘어오던 미군의 자동차 행렬을 지금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같은 시기엔 한국군이 지키던 동 · 서 방향의 팔공지맥 전선도 동부에서 상당 구간 붕괴됐다. 영천 · 포항 등등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비슬지맥을 넘어 청도의 산동지방 하천으로 피난했다. 당시 청도에는 무려 40만 명이나 되는 난민이 몰려들어 전국 각 도청 단위로 임시 행정소를 차릴 정도였으며, 이승만 당시 대통령이 피난민을 위로하러 금천면 지역을 찾아야 하기도 했었다. 아군이 한국전쟁 마지노선으로 설정했던 전선은 남북으로 이어진 낙동강 물길과 동서로 연결된 팔공지맥 산줄기를 왜관 지점에서 연결한 역기역자(ㄱ) 선이었다. 하지만 그것조차 적의 8월 공세와 9월 공세를 견디지 못하고 몇몇 곳에서 무너졌을 때, 정말 최후의 생명선으로서 나라를 지키고 피란민을 품어 안았던 것이 비슬지맥이고 화악분맥이었던 것이다.
- 현재 마령치는 더 이상 행인들이 오가는 도로가 남아있지 않으며 산을 찾는 등산객이나 이용하는 등산로 역할을 한다. 과거 마령치가 담당했던 역할을 비치재가 대신하고 있으며 통행량의 증가로 비치재 또한 도로 확장을 위한 공사가 시행되고 있다.
♤ 창녕군 성산면 연당리
연당리의 연당은 연꽃이 핀 연못이니 연내골이라 속칭되는 연당리 일대가 불교와 인연 깊은 곳임을 확연하게 보여준다. 연당은 부처님이 계신 곳인 연좌와 불좌를 가르킴이니 연화대가 있는 곳은 곧 불교의 성지라 하는 뜻과 같다 하겠다. 이 근처에 있었던 사찰의 이름은 연화사로 연꽃이 있는 곳은 바로 연못이므로 연당이라는 지명이 불리게 되었다고 할것으로 이 지역 넓게 연꽃과 연관을 맺어 앞 봉우리는 봉우리가 동서로 두개가 있는 연화봉(430m)이고 산 아래의 들판과 마을은 연평이라 부른다. 연당을 조선 초기에는 연화라고 불리었으며 연화가 그 후 연당으로 바뀌었는데 연당의 본동은 연화사가 있었던 곳이라 하여 연화라 불리었는데 지금은 산아래 평지의 연화와 구분키 위해 이 옛마을을 구연화라 부른다. 연당은 창녕군 연화리 북부에 있는 행정 리의 마을 이름으로 마령치 서쪽 아래에 있는데 성곡초둥학교가 있는 한정지의 동쪽 대산천의 가에 있는데 이 일대가 부처님이 계신 곳은 연화이고 그 아래이니 이곳은 대좌인 연화대라 하고 연화대는 낮은 골짜기 일대라고 한다. 따라서 바로 그 연못이란 뜻으로 연당이라 하였으나 사실은 이 마을에 신을 모시는 당집이 많이 있었으며 무당이 많았던 동네였으므로 당집이 있는 마을이라 연당이라 한 것이 변한듯 하다고 한다. 남쪽 산자락에 연밥에 해당하는 곳이 명당이라고 소문나 여러 문중에서 묘를 들였으나 아직 그 명당은 찾지 못했다고 전하며 산의 서남쪽 줄기는 제비가 나는 형국이라 하여 연봉 또는 연비산이라 하고 서쪽 봉우리는 웃줄기 또는 매방산, 방응산, 응방산이라 하며 남쪽 300m봉우리는 남방을 가린다 하여 가림산, 가남산이라 부른다. 또 북쪽 줄기는 홰학골산이라 부르는데 이렇게 산 하나를 놓고 여러 이름이 산줄기마다 생긴 것은 마을과 문중에서 묘를 들이고 그곳의 지형에 따라 작명하여 불렀기 때문이다.
- 30분 부지런히 올라서면 수복덤(556.2m)에서 전망이 기다린다. 진행방향 우측 아래로 경남 창녕군 성산면 연당리(蓮塘里) 전경과 그 우측으로 연당리와 냉천리, 그 너머 달창저수지가 희미하게 보인다. 지나온 비슬지맥 능선과 그 뒤 달창저수지에서 부터 비슬산으로 이어지는 대구시계 능선이 조망된다.
♤수복산(592.5m)/ 수봉산
마령재 남쪽으로 경남북 경계에 솟아있는 산으로 서쪽 산아래에 연내각씨묘, 연화사, 구연화 등이 있는데 수봉이란 뜻은 으뜸되는 봉우리란 뜻이니 마령이, 마리재로 머리라는 뜻과 서로 같은 이름이라 하겠다. 수복산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그 정점 북편에 수복덤이 솟은 때문이라고도 한다. 일대서 보기 드문 수복덤 벼랑바위 위에 앉으면 비슬산 남부능선은 물론 멀리 왕산과 우포늪으로 펼쳐져 가는 창녕 땅이 훤히 조망된다. 간혹 '수봉산'으로도 표기되나 '수복산'이 맞는 이름일 것 같다. 지맥은 수복산을 지나면 비티재로 급락한다. 그리고는 천왕산에 이를 때까지 대부분 구간에서 야산 같은 모습을 보이며 창녕군 성산면 방리·가복리와 청도군 풍각면 안산리·월봉리를 가른다. 월봉·안산·가복 세 마을 접점, ‘묘봉’마을 서편에 자리한 묘봉산(514m)이 그 도중 유일하게 높이 솟는 봉우리다.
부뜰이운영자님이 비티재에서 천왕산까지 6.21km라고 알려주셔서 그게 도상거리인걸 감안하지 못하고 느긋하게 생각했습니다. 세시간 이내에는 충분히 도착하겠구나 하고는 여유를 잡고 1시반에 일어나서 출발했는데......
♤ 비티재(278m)/ 국도 20호선 왕복 2차선 도로/ 휴게소
비티재는 청도군 풍각면과 창녕군 성산리를 연결하는 국도 20호선이 지나는 고개로서 청도군 서쪽 경계계선이다. 북동쪽으로 풍각면 금곡리를 지나며 남서쪽으로 창녕군 운봉천 골 안과 연결되는데 청도군 쪽은 풍각천을 건너 풍각면으로만 연결되나, 서쪽에선 재 밑 ‘운봉천’ 골 안 동네 방리에서 다시 둘로 갈려 우측은 마령재와 좌측은 방골재가 지난다. 골 물길을 따라 북서쪽으로 내려가다가 5호선 국도(마산~창녕~대구~안동)에 연결하거나, 골 남쪽을 가로막고 있는 큰 산줄기(왕령지맥: 천왕산 지능선)를 하나 더 넘어 남서쪽으로 직진해 고암면 · 창녕읍을 향해 남서 방향으로 직진하는 것이다. 방리가 자동차교통에 요긴한 길목인 셈이다. 하지만 비티재는 그 이전 도보시대에는 통행인이 많지 않던 재라고 했다. 그 구간 비슬지맥을 넘던 주목적은 서쪽의 창녕장 · 현풍장과 동쪽의 풍각장 생활권을 잇는 것이었으나 그런 일에는 그 좌우에 있는 방골재나 마령재가 훨씬 유용했다는 얘기다. 일제강점기 이전까지 오가는 사람들로 번잡했던 마령치가 인적이 드문 곳으로 바뀐 것은 비티재가 일제강점기 때 자동차가 오갈 수 있는 신작로가 생기면서 부터이다. 지금같이 핵심 교통로로 부상한 것은 한국전쟁 이전에 거기로 신작로가 나고 버스가 다니기 시작하면서였다는 것이다. 수봉산 동남쪽 끝자락을 휘감아 돌며 넘어가는 고개로서 직선로인 북쪽 마령치와 남쪽 방골재에 비해서 그 거리가 멀다. 도보로 고개를 오가던 시절 금곡리 사람들은 마령치를, 방골 사람들은 방골재를 통해서 창녕읍과 풍각면을 오갔지만 일제강점기 때 신작로가 개설되고 6.25전쟁 당시 탱크와 군용 차량이 지나기 위한 신작로 확장이 이루어지면서 청도군과 창녕군을 잇는 주요 고개가 되었다. 비티재 정상 창녕군 방면 왼쪽에는 비티재 쉼터가 조성되어 있고 비티재 쉼터 내에는 청도군 풍각면을 상징하는 석조 조형물과 함께 벤치가 조성되어 있다. 우측에 간단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휴게소도 운영되고 있고 창녕군에서 청도군으로 오가는 유일한 길이지만 고개가 험하고 길이 구불구불하여 적은 눈에도 교통이 통제되는 구간이기도 하다.
- 비치재에는 라면과 음료 등을 파는 가게가 있어서 지나가는 싸이클족이나 드라이빙족들이 잠시 쉬었다 간다.
- 우측 창녕방향으로 도로를 따라 오르다, 좌측 시멘트 도로가 묘봉산으로 오르는 들머리이다.
밤에 지나는데 윙윙거리는 소리가 엄청시리 크더군요. 고압선철탑에 야간 조명이 멀티처럼 깜박이고....
♤ 북경남변전소
창녕군 성산면 방리에 위치한 북경남변전소는 신고리 원전 3,4호기에서 발전한 전기를 765KV선로를 따라 북경남변전소까지 송전하여 경남, 경북 일대에 배송하게 된다. 밀양송전탑사건(密陽送電塔事件)으로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765kV 북경남 변전소 및 송전선로가 당초 계획보다 2년여 늦어진 2015년 6월 5일 본격적인 상업운전에 들어갔다. 지난 2004년 11월 신태백, 신가평 765KV변전소 준공 후 약 11년에 만에 국내에서 765KV변전소가 준공 됐으며, 송전계통에 연결된 5번째 765KV변전소다. 북경남 변전소가 상업운전을 시작함에 따라,그 동안은 신고리 1,2호기에서 만들어진 200만 KW의 전기를 345KV를 통해 우회 송전을 해왔던 것을 앞으로는 신고리~북경남 변전소간 다이렉트 765KV송전이 가능해짐에 따라 년간 300억원 가량의 손실비용을 줄이는 것은 물론, 준공을 앞둔 신고리 3, 4호기(각 140만KW)와 5, 6호기(각 140만KW)까지 총 고리원전에서 생산되는 560만KW의 전력을 안정적으로 영남지역에 공급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 좌측 방향 청도 풍각면으로 멀리 왕령지맥 마루금이 바라다보인다.
♤ 방골재(296m)/ 무티재/ 갈림길 주의
옛 도보시대에 창녕읍과 풍각면을 잇는데 편리했던 길목은 창녕 방리의 ‘안마실’과 청도 안산리 무태(안태)마을 사이에 난 방골재였다고 했다. ‘무태재’라고도 불리는 이 재를 통해 풍각 사람들은 창녕장을 내왕하며 돼지 ∙ 개 같은 가축의 새끼나 참깨 ∙ 콩 ∙고추 같은 양념거리를 샀고, 창녕 쪽에서는 이런저런 농산물을 이고지고 풍각장에 팔러 다녔다. 방골재 양편으로 지금도 선명히 나 있는 길은 그런 발길들의 흔적일 터이다.
- 방골재를 지나자 말자 갈림길 주의 구간이 나오는데, 선명한 직진 등로가 아니라, 좌측 시그날이 많이 달려있는 숲길로 올라서야 한다.
♤ 묘봉산(妙峰山, 514m)/ 묘봉재/ 모분재
묘봉산은 경남 창녕군 성산면 가복리와 청도군 풍각면 월봉리의 경계에 위치한 산이다.(국토지리정보원 지도상에는 온전히 성산면 안에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표기되어 있다) 가복리 덕곡마을 북쪽에 소재한다. 모분재, 묘봉재라고도 한다. 지명은 퉁짐이[銅店]에서 청도 풍각면 월봉리 묘봉으로 가는 고개라고 한 데서 유래되었는데, '모분재'로 와전되었다고 한다. 고갯길은 묘봉산의 정상 동편에 있다. 밀양시 쪽의 산자락에 지명을 딴 마을이 있다.
- 묘봉산에서 우틀하여 약 5분여 진행하면 갈림봉인 499.3m봉에 오른다. 준희님 500.3m 산패가 달려있는 곳인데 이 봉에서 맥길은 좌측으로 이어지므로 직진하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한다. 이후 퉁짐이재까지 한두차례 약간 오르는 구간이 있지만 계속되는 내리막길이다.
♤ 퉁짐이재(324m)
재 우측 아래에 '퉁짐이'마을이 있는데,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상 '동점'으로 표기되어 있다. 퉁짐이 마을에서 동남쪽으로 약간 지난 곳에 광산마을이 있다. 동(銅)을 '퉁'이라 하고, 질이 나쁜 놋쇠를 또한 '통'이라 하는데, 옛날 아래쪽 광산마을에서 캐 낸 동광석(銅鑛石)을 퉁짐이 마을의 점터에서 녹여 아연과 섞어서 놋쇠를 생산하고, 구리(銅)를 만든 곳이었기에 '퉁점' '즉 '동점(銅店)'이 되었을 것이다.
♤ 배고개(305m)/ 광산재
개념도에는 '광산재'로 표기되어 있는데, 남쪽 아래에 있는 '광산마을'에서 따 온 이름이다. 저 노정에서 지맥은 방골재(296m) · 퉁점이재(324m) · 배고개(305m) 등으로 세 번 고도를 더욱 낮춘다. 묘봉산에 닿기 전에 자리한게 방골재, 묘봉산을 지나서 나 있는게 퉁짐이재다. 둘을 거친 후에는 비포장 임도인 마지막 배고개서 순식간에 300여m나 치달아 열왕지맥분기봉에 오른다. 9부능선에선 너무 가팔라 등산한다기 보다는 기어올른다는 느낌을 주는 급경사 구간이다.
♤ 열왕지맥분기봉(596m)/ 삼군봉(청도군, 창녕군 → 밀양시)
열왕지맥분기봉은 천왕봉 남쪽으로 약 120m 아래에 있다. 비슬지맥을 따르다 북쪽의 천왕봉을 약 70m 다녀와야 한다. 비슬지맥분기점과 천왕봉은 지척거리이다. 고로 천왕산은 청도, 밀양, 창녕의 삼군봉이자 청도군 풍각면, 각남면, 창녕군 성산면, 밀양시 청도면의 사면봉이다.
- 열왕지맥에 배낭을 놓아두고 천왕산을 다니러 간다면 낭패를 겪는다. 돌아나오는 길은 열왕분기점까지 오지 않고 중간에 배바위로 향한다.
♤ 열왕지맥(烈旺枝脈)이란
열왕지맥이란 경남북 경계이며서 경북 청도군, 경남 밀양시, 창녕군 3개 시군의 경계점인 비슬지맥의 천왕산(619.3m) 남쪽 갈림봉에서 비슬지맥을 동남쪽으로 보내고, 남서쪽으로 따로 한 줄기를 분기하여 내려가는 지맥으로, 천왕산(619.3m), 천왕재(391.1m), 열왕산(663.3m), 영취산(738.8m)을 지나 부곡온천 뒷산인 종암산(종지바위산, 546.6m), 덕암산(545.3m), 팔도고개, 처녀봉(445.4m), 비룡산(350.1m)을 경유하여 청도천이 낙동강에 합수되는 창녕군 부곡면 학포리의 학포양수장까지 도상거리 31.9 km인 산줄기이다. 이 지맥 산줄기 동쪽으로는 청도천을 가두어 낙동강으로 흘려 보내며 서쪽에 흐르는 토평천과 계성천의 분수령이 된다. 지맥 이름을 부여한 열왕산보다 영취산이 더 높고, 전국적으로 유명한 창녕에 유명한 부곡온천물이 열왕지맥(종암산)에서 솟아나는 셈이다. 열왕산은 '여래봉'을 잘 못 표기한 산이름이라고도 한다.
- 열왕지맥분기점을 알리는 준.희님 산패가 나무에 걸려있다.
♤ 열왕지맥 개념도
♤ 왕령지맥(旺嶺枝脈)이란
낙동정맥에서 분기한 비슬지맥이 비슬산을 넘어 내려오다가 천왕산에서 남쪽으로 열왕지맥을 나누고, 열왕지맥은 남진하면서 서쪽으로 낙동강을 향해 두 가닥의 산줄기를 다시 나누는데, 토평천을 사이에 두고 위쪽은 왕령지맥, 남쪽이 화왕지맥이다. 열왕지맥의 534.4m봉에서 서쪽으로 분기해서 아래로 토평천(土坪川), 위로는 차천(車川)을 낙동강으로 흘려 보내면서 왕령산(旺嶺山, 429m), 퇴포산(268m), 태백산(泰白山, 284m), 대니산(408m), 석문산(242m), 진등산(283.8m)을 지나 대구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개포나루터에서 그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31.1 km인 산줄기 이다. 그런데, 창녕군 대합면의 태백산(284m)에서 다시 남쪽으로 분기해서 구룡산(209m), 험듬산(219m), 코장산(228m), 둔지산(191m), 큰당매산(194m), 듬밑산(181m)을 지나 창녕군 이방면 성산리 토평천/낙동강 합수점으로 이어진 산줄기가 총도상거리가 5.5km 정도 더 긴데다, 토평천 합수점으로 이어져 있어 왕령지맥 끝자락에 대한 논란이 야기되고 있다.
♤ 화왕지맥이란
비슬지맥 천왕산에서 분기하여 669.2m봉에서 남쪽으로 열왕지맥이 흐르고 서쪽으로 화왕지맥이 이어지는데 서쪽에서 시작한 화왕지맥은 화왕산에서 남쪽으로 꺽여 내려가다 구현산을 넘어 남서쪽으로 뻗는다. 큰갓길산에서 다시 남쪽으로 뻗어 함안군 대산면과 의령군 지정면 그리고 창녕군 남지읍의 경계인 낙동강과 남강이 만나는 합수점에서 끝을 맺는 도상거리 42.7km의 산줄기다. 지나는 주요산은 천왕산, 열왕산, 관룡산, 화왕산, 구현산 그리고 큰갓길산을 지난다. 이 합수점에서 화왕지맥 건너편에는 낙남지맥의 광려산에서 뻗어 내려오는 화개지맥이 마주하고 있고 우측으로는 남덕유산에서 시작하여 진양호에서 막을 내리는 진양기맥의 한우산에서 분기되어 나오는 우봉지맥이 합수점의 기강나루터에서 끝난다. 화왕지맥과 화개지맥 그리고 우봉지맥이 함안군과 의령군 그리고 창녕군의 경계에서 서로 마주하면서 끝을 맺고 있다.
♤ 화왕지맥 개념도
♤ 천왕산(天王山, 619.3m)/ 삼면봉(청도군 각남면, 청도군 풍각면 → 경남 밀양시 청도면)
천왕산은 경북 청도군 각남면 옥산리와 풍각면 월봉리, 덕양리, 경남 밀양시 청도면에 걸쳐 있는 산이다. 서쪽의 묘봉산과 동쪽의 배바위산으로 이어지는 비슬지맥에서 좌측으로 약간 벗어나 있지만 경남 창녕군의 화왕산과 관룡산 조망이 일품인 산이다. 동쪽으로 배바위산, 화악산(932m), 철마산(634m)으로 연결되며, 서쪽으로 능선을 따라 묘봉산, 수봉산, 비슬산(1,083m)으로 연결된다. 북쪽으로는 족금당(551m)을 지나 청도천 방향으로 산지가 낮아지며, 남쪽으로는 창녕군의 산지로 연결된다. 천왕산의 북쪽에는 천왕산 동쪽 사면에서 발원한 소하천이 부곡천으로 유입되며 서쪽 사면에서 발원한 소하천이 풍각천으로 유입된다. 부곡천이 청도천으로 유입되는 지점에는 제4기에 충적층이 퇴적되어 넓은 범람원을 형성하였으며 대표적인 송서들이 나타난다. 천왕산은 천왕봉을 중심으로 좌우 봉우리들이 모두 홍수 설화에 기대고 있다. 다 물에 잠기고 꼭대기만 조금 남아서 '족금당(551.2m, 천왕봉 북쪽 0.8km지점 봉우리)', 배를 묶어 뒀다는 '배바위', 그 난리에도 당당하게 잠기지 않아 '천왕봉'이라고 각각 이름이 붙었다 한다.
- 준희선생님 산패와 3등삼각점, 청도 337이 있다. 열왕지맥분기봉 쪽으로 다시 돌아나와야 한다.
♤ 배바위
육산에 어울리지 않게 등로 오른편에 높이가 5m는 족히 됨직한 바위가 서 있다. 배바위다. 옛날 큰 홍수가 났을 때 배를 묶어 뒀다는 전설이 있어 그렇게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진다. 아무리 큰 홍수라도 해발 600m가까운 이곳까지 물이 올라왔을 리가 없어 청도 사람들 누구도 이 전설을 믿지 않지만, 그렇게들 부르고 있다. 배바위에는 로프가 설치되어 있어서 바위 위에 올라 전망을 즐길 수 있다.
♤ 배바위산(608.2m)
경북 청도군 서쪽에 있는 풍각면 덕양리와 각남면 옥산리 경계에 위치한 산이다. 배바위산 정상은 배바위로부터 3분 거리다. 정상이지만 능선과 고도 차이가 크게 없고 등로 우측으로 살짝 벗어나 있으므로 자칫 그냥 지나치기 쉽다. 준희님 산패와 '청도↓밀양 / 배바위산 / 607m' 표지판이 달려있다.
- 배바위산 정상부터 건티재까지 약 3km 남짓한 구간은 송전탑 공사나 간벌 작업을 위해 조성된 임도가 넓고 평평하여 트레킹하기에 좋은 구간이다.
- 남쪽으로 밀양시 청도면 마을 저 멀리 열왕지맥 마루금이 펼쳐져 있다.
♤ 건티재/ 건치재
경북 청도군의 각남면 옥산리와 경남 밀양시 청도면 소태리를 연결하는 두개의 고개중 하나이다. 이곳 건티재는 호암산 서편의 고개이고 요진재는 호암산 동편으로 오른다. 건티재의 명칭 유래는 인근의 건티산(429.5m)과 같은 이름을 쓰고 있으며 긴티재 또는 큰태재라고도 한다. 경남북의 경계는 청도군 각남면과 밀양시 청도면에서 높은 산지를 형성하는데 화악산(931.5m)에서 호암산(611.6m)을 거쳐 천왕산(618.2m)에 이르는 산지가 그것이다. 요진재가 화악산과 호암산 사이의 고개인데 반해 건티재는 호암산과 천왕산 사이의 고개이다. 조선 시대에 밀양, 마산 방면의 행인은 건티재를 넘고 다시 팔조령을 통해 대구와 한양으로 갔다. 현재는 국도 25호선, 경부선 등 다른 교통로를 이용하게 됨에 따라 쇠퇴하여 사람들이 왕래하지 않는 폐도가 되었고, 등산로로 활용되고 있다. 이 고개는 산세가 마치 소리개가 하늘 높이 날아 있는 형상이라고 하여 건치재라고 하였으나, 지금은 건티재로 부른다. 「오산지(鰲山志)」에는 근치협(近峙峽)으로 기록되어 있고, 현대지형도에는 큰태재로 표기되어 있다.
- 비포장임도가 끝나고 양회임도와 만나 삼거리를 이루는 곳이 건티재다. 다음구간 들머리는 포장임도로 나서서, 직진 방향 임도(함박리 가는 방향)로 약간 나가 우측 숲길로 올라선다.
- 건티재에서 임도를 지나 각남면 함박리 방면으로 약 20여분 거리의 구간은 백양목이 군락을 이루고 있어 장관이다.
- 건티재를 출발할 때는 우측(남쪽)이 밀양시 청도면이고 좌측(북쪽)이 청도군 각남면으로, 도경계로 나뉘며 대체로 동향하여 화악산까지 이어지고, 화악산에서 청도읍과 만나 남향으로 바뀌어 좌 청도군 청도읍, 우 밀양시 청도면으로 나뉘어 이어지다, 헬기장(853m)에서 좌측이 밀양시 부북면으로 바뀌면서 온전히 밀양시 관내로 들어서서 284m봉까지 이어지고, 이 봉에서 우측이 밀양시 청도면에서 밀양시 무안면으로 바뀌어 앞고개 이후까지 이어지게 된다. 전체적으로 청도와 밀양을 가르며 ‘?’ 형태로 이어진다.
♤ 호암산북봉(542.4m)
호암산갈림봉으로 길주의구간이다. 호암산/ 범바위산(611.2m)은 0.7km 떨어져 있다. 지맥길은 호암산방향 송전탑으로 가지 않고 좌틀하여 급하게 내려서야 한다.
♤ 요진재(415m)
천왕산~화악산 구간 10여㎞ 산줄기에 의해 나뉘어 있는 청도군 각남면과 밀양군 청도면 사이에 두 개의 고갯길이 나 있는 점이다. 그건 그 중간에 범바위산(호암산, 611.2m)이 솟아 죽바위산(422m)으로 이어지는 큰 산덩이로 발달하면서 청도면 상부를 소태리 공간과 요고리 공간으로 갈라놓기 때문이다. 비슷한 원인으로 북쪽 청도 땅도 옥산리 공간과 함박리 공간으로 나뉜다. 그 결과 옥산리~건티재~소태리, 함박리~요진재~요고리의 두 코스 옛길이 형성됐던 것이다. 둘 중에서 행인이 더 많던 중심도로는 요진재 길이었다고 했다. 건티재는 밀양의 북서쪽으로 치우쳐 있으나 요진재는 인구 집중지역과 직결되어 있어서였을 것이다. 재 바로 남쪽에 많은 마을이 모여 있을 뿐 아니라 직선으로 흐르는 청도천의 꼭짓점에 해당해 밀양 무안면·초동면·하남읍 등과 최단거리로 연결되는 것이다. 행인이 많다보니 요진재 북쪽의 청도 각남면 상함박리에는 주막이 성업해 지금도 주막걸이라는 지명이 남아있을 정도라 했다. 상함박리 마을에서는 골이 아니라 저 주막걸 위 산줄기를 바로 타고 오르도록 옛길이 연결돼 있었다고 했다. 현재 경운기 길로 확장돼 있는 그 코스를 따라 오르다가 임도(녹명리~사리) 노선에 합류해 요진재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청도쪽 사람들은 저 재를 넘어 무안·하남까지 다니며 양식을 구했었다고 했다. 청도면·무안면 등 밀양 쪽에서는 풍각장에 다니느라 저 재를 숱하게 넘었다고 했다. 불과 100년 전까지만 해도 밀양 청도면이 청도군 소속이었으니 양측의 동질감은 더 컸을지도 모른다.
- 요진재는 산길이 세갈래의 비포장임도를 만나는 곳이다.
♤ 원래 요진재(405m)
송전철탑(#29)에서 좌측으로 약간 내려서서 잘록이 안부에 닿는데, 대구매일신문 박종봉 편집위원이 현지 주민들의 증언으로 확인한 실제적인 요진재(405m)다. 앞의 요진재에서 0.9km 지점이고, 건티재에서 3.4km 지점이다. 이 요진재의 위치가 잘못 가리켜지고 있는 점 또한 환기해 둘 사안이다. 국가기본도는 범바위산 동쪽(실 지도상 북쪽) 413m잘록이를 요진재라 표시하고 있다. 임도가 연결되고 평평하게 닦여 있어 정말 유서 깊은 재인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는 곳이다. 그러나 현지인들은 거기서 동쪽으로 15분 정도(800여m) 더 간 곳이 진짜 요진재 자리라 했다. 445m봉(국지원지도상 438.4m)을 넘어 도달하는 405m잘록이가 그것이다. 녹명리 임도가 사리를 향해 방향을 바꾸는 지점서 20여m만 오르면 닿을 수 있다. 잡풀에 깊이 묻혀 쉽게 분별이 안 되지만 마침 송전 철탑이 세워져 지표 역할을 해주니 그나마 다행이다.
- 요진재(405m)를 지나 449m봉을 남사면으로 지나치면 이번엔 421m잘록이에 닿는다. 200여m 될까 말까 하게 떨어져 있는 농장(옛 상지목장) 바로 서편이다. 거기엔 농장서 이어온 사설 임도가 연결돼 있다. 임도는 이후 산줄기를 따라 조금 오르다가 굽어서 농장 상부 구간을 한바퀴 감아 돌면서 이어져 간다.
♤ 밤티재 정상 삼거리 돌탑
화악산 정상 직전 습지대를 지나 능선에 오르면 정상은 우측편에 있고 좌측 능선은 한재마을과 밤태재방향에서 올라오는 능선이다. 정면으로 불당골 아래로 청도읍 평양리 중리마을이 내려다 보인다. 중앙 봉우리 뒤편이 상리마을이다. 청도 한재 미나리로 유명한 곳이다. 그 우측으로 아래화악산과 철마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다.
♤ 남산(870m)/ 삼면봉(각남면, 화양면, 청도읍)
화악산에서 북쪽으로 가지를 쳐 처음 도달하는 봉우리는 852m봉이다. 청도읍·화양면·각남면 등 3개 읍·면 접합점이라 해서 '삼면봉(三面峰)'이라고도 부른다. 그런데도 국가기본도는 거기에 '남산'이라는 이름표를 붙여 놨다. 그게 최고봉인양 착각케 만드는 것이다. 반면 실제 최고봉은 그 지점서 둘로 나뉘어 가는 산줄기 중 북서방향 것을 타고 10여분 더 걸어야 도달된다. 높이는 870m봉(이 봉이 진짜 남산이다). 그길 지나 조금 더 내려서면 헬기장이 있는 853m봉에 닿고, 거기서는 남산골 기도원 앞 등산기점으로 내려가는 주등산로가 출발한다. 저 헬기장을 지나치면 곧바로 삼각점(828m)이 가설된 경사면에 이르는 바, 거기서는 옛 화양시가지 중심부 지형을 결정하는 중요한 지릉 두 개가 북으로 분기한다. 죽림사 골짜기를 복판에 두고 나란히 내려서는 둘 중 동쪽 것의 끝자락에 '오산(鼇山, 자라산)'이 있다. 북서릉 외에 삼면봉(852m)에서 동쪽으로 난 능선을 타고 가며 남쪽의 확 트인 풍광을 즐기는 산길도 있다. 그 길을 35분여 걸으면 산줄기가 다시 크게 둘로 갈리는 805m봉에 닿는다. 805m봉에서 북으로 가는 능선은 유명한 낙대폭포 계곡을 복판에 두고 다시 둘로 갈리며, 그 중 서쪽 것에 '은왕봉(644m)'이 있다. 또 은왕봉 직전 잘록이(595m)에서 서편의 신둔사·기도원 및 동편 폭포 모두로 이어지는 길이 나 있다. 805m봉에서 동으로 가는 산줄기를 택하면 바로 봉수대 유적지로 내려서며, 얼마 후엔 도솔암~적천사 쪽으로 이어가거나 청도읍-화양읍 경계능선을 타거나 할 수 있는 분기점에 닿는다.
- 밤티재 동편은 '한재'라는 이름으로 통칭되는 청도읍 공간이다. 높은 쪽부터 상리·평양리·음지리·초현리 순으로 분포한 일대 마을들이 합쳐져 '한재'라 불리는 것이다. 지금은 '한재미나리'라는 이름에 포함돼 더 많이 알려져 있기도 하다.
♤ 화악산(華岳山, 932.1m)/ 둔덕산(屯德山)/ 삼면봉(밀양시 청도면, 청도군 각남면 → 청도읍)
화악산은 경북 청도군의 서쪽에 있는 각남면 사리, 청도읍 평양리, 경남 밀양시 청도면 요고리에 걸쳐 있는 산이다. 비슬산의 지맥으로 옛 기록에는 화산·화악·화악산·둔덕(屯德) 등으로 명칭이 다양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밀양)에 의하면 ‘화악산을 둔덕이라고도 하며, 밀양도호부의 북쪽 19리에 있으며, 진산이다’라고 적고 있다. 「대동지지」(청도)에 ‘화산은 서남 5리에 위치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주봉인 문월대(聞月臺)와 그 옆의 선장봉(仙掌峯)의 형태가 황소의 등을 방불케 하고 또 그 사이에 작은 봉우리가 있어 작은 화악산이라는 명칭을 가지게 되었다. 본래 화악산은 이 세 개의 봉우리의 형상이 중국의 오악(五嶽)의 하나인 서악(西嶽), 즉 화악(華嶽)의 삼봉(三峯)과 비슷하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다. 일명 둔덕산(屯德山)이라고도 하는데, 산의 생김새가 덕성스러운 모습에서 연유하였다. 또 아주 먼 옛날 천지가 개벽될 때 온 세상이 물에 잠겼을 때, 화악산에는 황소 한 마리가 앉을 자리만큼 물에 잠기지 않았다고 한데서 산의 이름이 유래한다고 한다. 화악산은 동남쪽으로 철마산과 서쪽으로 요진재 및 큰태재를 넘어 배바위산과 천왕산 그리고 남쪽으로 경남 밀양시의 형제봉과 북쪽으로 밤티재에서 낮아지다가 남산에서 다시 솟아나며 청도천 방향으로 계곡을 따라 선상지를 이루며 낮아진다. 화악산 북쪽 능선의 밤티재를 중심으로 동쪽에는 한제천이 흐르고 서쪽에는 부곡천이 흐른다. 화악산의 깊은 계곡에는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마르지 않는 샘인 비수덤이 있고 과거에는 가뭄이 심하면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하며 화악산의 봉우리 중 하나인 신선봉은 신통력을 가진 신선인 신당 할멈이 살았다고 하여 마을의 무사태평과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모셨다고 한다.
- 이정표(화악산정상, ←밤티재 1.6km/ ←한재(평지마을) 4km, 윗화악산 2.1km→ / 아랫화악산 3.4km→)와 청도산악회에서 1992년 창립10주년을 기념하며 세운 대형 자연석 정상석이 세워져 있다. 2등삼각점 청도 21이 있다.
화악산을 출발하여 약간 나가면 우측으로 조망바위가 있다. 화악산에서 남동 방향으로 흘러내리는 능선이 회골을 지나 밀양시 청도면 요고리로 이어진다. 멀리 중앙 우측으로는 시계가 맑으면 지리산 천왕봉과 중봉도 보인다지만 오늘은 황사 영향으로 어림없는 기대가 되었다.
♤ 불당골갈림봉(913m)
이정표(불당골갈림길, ←불당골(한재) 2.7km, ↓화악산정상 0.6km, ↑윗화악산 1.5km/ ↑아래화악산 2.8km)가 세워져 있다.
- 암릉 전망대에 이르러 다시 한번 한재 방향을 내려다 본다. 멀리 동쪽으로 영남알프스를 이루는 운문산의 운문지맥과 가지산에서 능동산 지나 천왕산과 제약산, 영축산으로 이어지는 낙동정맥의 마루금이 펼쳐져 있다. 서쪽으로는 열왕지맥과 화왕지맥의 마루금이 펼쳐져 있다.
♤ 폐헬기장(853m)/ 삼면봉(밀양시 청도면, 청도군 청도읍 → 밀양시 부북면)/ 도계
운주암 갈림길의 이정표(운주암 0.5km→, ↓화악산정상 1.2km, ↑아래화악산 2.3km)를 지나 헬기장(853m)로 내려선다. 여기서 지맥길은 헬기장 우측 희미한 등로로 내려서면서 청도군과 이별하고 온전히 밀양시 권역으로 들어선다. 선답자들의 시그날이 걸려있지 않다면 바른 등로를 찾기가 쉽지 않은 지점이다. 여기서부터 지맥길을 밀양지맥이라고도 한다. 밀양강의 서쪽 둑 역할을 하기 때문인데, 청도천의 동쪽 둑 역할도 아울러 하고 있어서다.
화악산 정상에 있는 밀양시의 정상석은 이쪽으로 옮기는게 낫지않을까요? 높데서 좋은게 아니건만....
♤ 아래 화악산(755m)/ 밀양시 주산
이 헬기장에서 직진으로 이어가면 윗화악산이라 불리는 837.4m봉을 지나 (아래)화악산이라는 755m봉, 철마산(鐵馬山, 634m)까지 이어지는 능선이다. 화악산이란 명칭을 두고 혼란이 있다. 현재 국가가본도는 932m 최고점에다 화악산이란 이름표를 붙여놓고 있다. 그러나 주변 마을에선 이야기가 다르다. 저 최고점 산덩이에는 별도의 전래 명칭이 없다는 증언까지 있는 것이다. 대신 마을들에서 화악산이라 가리켜 온 것은 아래화악산이라 하는 757m봉이라 했다. 이걸 그냥 화악산이라 부르면서 그 직전의 839m봉은 윗화악산(=우악산)이라고 겻들여 불러 왔다는 것이다. 청도군 평양리에서도 그랬고 밀양시 옥산리에서도 그랬다. 이렇게 되면 예부터 밀양의 진산 혹은 주산이라 했다는 화악산이 932m 최고점 덩어리인지 아니면 이 757m봉인지 다시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더우기 932m 최고점 부분은 밀양시 중심지에서는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그런 산을 진산이라 했으리라고 보는건 어쩐지 어색하다. 뿐만 아니라 저 산덩이는 옛날 그 시절엔 밀양 땅도 아니었을 듯하다. 그 절반이 걸쳐 있는 청도면이 오랫동안 청도군 소속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757m(아래)화악산은 밀양 시가지로 이어가는 산줄기의 출발점이다. 밀양 중심부와 매우 밀접한 관계로 이어져 있는게 저 산봉우리라는 얘기다.
♤ 철마산(鐵馬山, 634m)/ 도계(청도군 청도읍, 밀양시 상동면)
화악분맥 꼬리 구간의 꼬리인 철마산은 절벽이 특히 아찔해서 더 상쾌한 봉우리다. 아래화악산서 추락하듯 280여m나 폭락했다가 또 하나의 산덩이(512m봉)까지 거친 뒤 다시 올라서야 해 화악산과 별개 산으로 구분된 듯하다. 이름은 옛날 전쟁 때 쇠로 만든 말을 세웠던 곳이라 해서 붙었다고 전한다.
♤ 운주암
운주암은 경남 밀양시 청도면 요고리에 있는 암자로서 신중탱과 칠성탱화 등 2점이 도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운주암은 밀양 표충사의 직말사로 6.25전란을 겪으면서 폐사 지경에 놓인 것을 1960년 묘산 비구니 스님의 원력으로 6.25 이후 잔존한 사우를 부분 보수와 함께 불상을 봉안하면서 신중탱과 칠성탱을 인근 내원사에서 이봉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운주암은 화악산 주봉 문월대의 아래 쪽에 있는 암자로서 신라 고찰인 봉천사에 속했던 암자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다. 본사가 없어지고 청연암과 백연암 등 부근 암자들이 다 폐허가 된 뒤에도 이 운주암이 그대로 존속되어 있는 것은 화악산에서 차지한 그 절묘한 위치 때문인것 같다. 소금강이라고 할 만한 아름다운 암벽을 배경으로 하고 만장의 층애 위에 자리잡아 남쪽으로 백리산천의 운물이 일망무진한 안계를 열어준다. 한때 불도에 정진하는 학승이 있었던 것 같으며 화악산 운주암 간행이라는 간기가 있는 불서가 서울 장서가의 서가에 꽂혀 있는 것을 보아도 알 만하다.
봉천재와 운주암을 잇는 포장도로에 내려서서 도로를 따라도 되고, 맥길을 따라 20분 정도 진행하면 봉천재에 닿는다.
♤ 봉천재
봉천재 우측은 운주골, 회골을 지나 요고리 대촌마을로 내려가는 길이다. 좌측 아래로 이어지는 도로는 밀양시 부북면 퇴로리 봉천마을로 내려서는 길이다. 부북면 대항2리 봉천동은 화악산 중턱에 옛날 봉천사라는 신라 고찰이 있었고 절 밑에 5~6호의 민가가 살았다고 전해지는데 지금도 탑과 부도 등 석조물의 단편과 민가의 흔적이 남아 있다. 절은 임진왜란 후까지도 있었는데 인근 산에 묘를 쓰고부터 폐사가 되었다는 말이 전해오고 있다. 현재 문헌상으로 남은 곳이 없고 오직 손태좌의 시 한수가 구밀주지에 남이 있을 뿐이다.
- 운주암 표지판 뒤로 내려선다. 연등이 달려있다.
♤ 형제봉(556.7m)
봉천재에서 약 150고지 정도를 쳐 올려 형제봉에 올라선다. 주 등로에서 우편 약간 들어간 곳에 준희님 형제봉 산패와 독도님의 코칭지가 나무에 달려있다. 형제봉을 지나면서 부터 다시 고만고만한 봉우리를 오르내리는 빨래판 구간으로, 533.1m봉까지 대체로 서향하게 된다.
- 형제봉 산패는 주등로에서 우측으로 약간 들어간 곳에 설치되어 있어 그냥 지나치기 쉽다.
♤ 성돌(562m)
562m봉에서 약간 내려서면 등로 좌측으로 떡시루를 닮은 두개의 바위를 포개놓은 모양의 바위가 나온다.
♤ 팔방고개(273m)
과거 밀양시 청도면 고법리와 부북면 대항리를 이어준 고개였다. 좌측 부북면 퇴로리 대항저수지 쪽에서 올라오는 묵은 수렛길과 만나는데, 재 이름은 우측 밀양시 청도면 고법리 팔방마을에서 따왔다.
♤ 삼면봉(284m)/ 삼면봉(밀양시 부북면, 청도면 → 무안면)/ 개념도 상 '팔방재'라고 표기.
이 봉에서 좌측으로 이어지는 지맥길은 좌 밀양시 부북면, 우 밀양시 무안면으로 나뉘어 이어지는데, 우측으로 뻗어 가는 능선은 우측이 밀양시 청도면이고 좌측이 밀양시 무안면의 경계가 되어 남서향하여 뻗어나간다.
♤ 밀양시 무안면(武安面)
밀양시 무안면은 시의 서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무안의 어원은 물안에서 비롯했다고 한다. 창녕군 학포와 인교 근처에 낙동강이 거슬러 올라와 호수처럼 물이 고여 있는데 그 안쪽에 있다하여 물안이라 칭하였다. 사명대사의 불력(佛力)으로 안전한 곳이라 하여 물안이라고 했다는 말도 있다.
우봉지맥의 마지막 남강이 낙동강에 합수하는 기강나루는 창녕 남지로 건너다니는 나루터였는데, 이곳에서 곽재우장군이 첫 승을 거둔 곳이기도 합니다. 그 강변에 보덕각과 쌍절각이 있는데 쌍절각의 주인공이 의병장 손인갑, 손약해 부자입니다.
♤ 무안면 삼강동(三綱洞)
무안면 중산리(中山里) 일대에서부터 그 위쪽 웅동리(熊洞里), 가례리(佳禮里) 골짜기에 걸쳐 있는 마을 전체를 일컬어 삼강동(三綱洞)이라 칭한다. 삼강동은 무안면에서 태어난 인물들과 관련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임진왜란 당시를 배경으로 한다. 무안면 가례리 서가정 출신의 손인갑(孫仁甲)이라는 의병장이 있었다. 그는 1592년 6월 초순에 벌어진 무계전투(茂溪戰鬪) 때 정인홍군의 선봉장이 되어 300여 명의 병력으로 적진을 포위한 후, 50명의 정예군으로 왜군 100여 명을 사살했다. 또 6월 말에 있었던 초계(草溪)의 마진전투(馬津戰鬪)에서도 뛰어난 전술로 낙동강을 항해 중이던 왜선단(倭船團)을 격파하였다. 그러나 남은 적선을 모조리 무찌르기 위해 강으로 뛰어들어 추적하던 중 묽은 진흙에 빠져 말과 함께 전사하고 말았다. 훗날, 병조판서라는 벼슬을 받을 만큼 공로가 높이 인정되는 인물이었다. 손인갑의 아들 손약해(孫若海)는 나라를 구하고 아버지의 원수도 갚기 위해 아버지의 병사들과 함께 왜군과 싸우다 끝내 전사했다. 손약해가 태어난 곳이 지금의 웅동리라고 한다. 노개방(盧蓋邦)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무안면 가례리 서가정에서 풍천 노일의 아들로 태어났다. 선조 때 동래부(東萊府) 교수(敎授)를 지냈다. 1592년 봄 고향에 잠시 내려있다가 임진왜란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급히 동래로 달려가 모시던 위패를 봉안한 뒤 성으로 들어가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 양산군수 조영규(趙英珪) 등과 끝까지 성을 지키다 전사하였다. 이 때 노개방의 아내 이 씨는 전쟁터로 나가는 남편을 마중하며 이후의 처신을 어찌하면 좋을지를 물었다. 노개방은 동쪽 하늘에 붉은 구름이 피어오르면 자신이 죽은 줄 알라는 말을 남기고 집을 나섰다. 이 씨 부인은 하루도 빠짐없이 절터의 벼랑 끝에 서서 남편의 무사귀환을 기원했다. 그러던 어느 날, 동쪽 하늘에 붉은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것이 아닌가. 이 씨 부인은 남편의 죽음을 직감하고 상심한 나머지 벼랑 아래로 몸을 던져 남편의 뒤를 따랐다고 한다. 일설에는 남편이 송상현과 함께 전사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남편의 혼패(魂牌)를 안고 엄광산에서 자결함으로써 남편의 뒤를 따랐다고도 전한다. 이처럼 무안면에서는 손인갑, 노개방 같은 충신, 손약해와 같은 효자, 이 씨 부인과 같은 열녀가 모두 쏟아져 나왔다. 훗날 선조는 그들의 뜻을 기리고자 표충서원(表忠書院)과 충효사(忠孝祠)를 짓도록 했다. 그리고 이들이 나고 자란 땅이름을 삼강동(三綱洞)이라 명명하도록 했다. 책 속 구절인 삼강오륜이 이 마을에서 실현되었다는 뜻이다. 지금도 중산리 동구에는 '삼강문'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바위가 있고, 그 근방의 들판을 충절들 또는 충렬목들이라 부른다.
♤ 산불감시초소(258.5m봉)
조망이 좋은 산불감시초소를 지난다.
♤ 앞고개(189.4m)
밀양시 무안면 동산리와 부북면 대항리의 경계로 24번국도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이 고개는 '안고개'라고도 불린다.
- 도로를 따라 우틀하여 고개를 넘으면 건너편 낙석주의 표지판과 전봇대 사이 있는 곳이 산행 들머리다.
♤ 무안면 동산리
동산리는 화악산의 한 지맥이 서남으로 뻗어 내려 팔방재에 이르고 이곳에서 한 줄기가 남으로 뻗어 내려 앞고개와 대불산에 이르며 또 한 줄기가 서남으로 뻗어 천마봉을 지나 까막소 마을에 이른다. 이 산 기슭 아래쪽에 동산리가 있는데 마을 앞으로 청도천이 흐르고 있으며 서쪽으로 트여있는 마을로서 서로는 내진리, 북으로는 청도면, 동으로는 부북면, 남으로는 운정리와 각각 인접하고 있다. 동산리는 원래 하서면 지역으로서 부락 뒷산에서 구리가 났다고 하여 구리미(뫼)라 하였고 이를 한자어로 바꾸어 동산이라 했다고 하며 일설에는 9개의 부락으로 형성된 마을이라고 하여 구리미라 했다고도 한다. 행정이동명은 동산리이며 자연부락으로는 까막소, 못안, 사당각단, 돌각단, 부림촌, 원당골, 돌밭골, 영남촌 등이 있다. 밀주지에 의하면 지사역이라 하였고 후대에는 동산리라 했다고 하며, 밀주징신록의 멸별연혁조에는 하서면의 북쪽에 있는 동산리가 중세에 경북 청도군 외서면에 속했다가 1912년 행정구역 개편 때 원당골, 돌밭골, 영남촌의 일부와 내진리의 일부 및 청도면 고법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동산리가 되어 하서면에 편입시켰다가 그 후 1933년에 무안면으로 편입되었다. 마을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옛날에는 원당골의 뒷산에서 흘러나온 토사가 쌓여 영남촌의 가운데에 애끼뚝이라는 큰 둑이 생겼는데 이를 기준으로 위쪽, 즉 못안, 서당각단, 까막소, 들각단, 부림촌과 영남촌의 일부는 경북 청도군 외서면에 속했고 아래쪽의 원당골, 돌밭골, 영남촌의 일부는 밀양군 하서면에 속했다고 한다. 1832년에 편찬된 밀양군읍지(경상도읍지 소수, 규장각)에는 동산리가 밀양군 하서면에 속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지금도 원당골을 아래구리미라 부르는 것으로 보아 애끼둑 아래쪽의 원당골, 돌밭골, 영남촌의 일부를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첫댓글 풍라라님이 비실이의 나와바리인 팔조령을 무단출입 해브렀응게
과태료 날려보내야하는데,
부곡온천에서 칠성판 드리댔응게 이번엔 면제할까? 고민되넹...
선배님! 이번 한번만 봐주시면 팔공지맥 때는 꼭 신고드리겠습니다.^^ 단결~~~!!
10년이 지난 비슬지맥 구간
정상석부터 많이 바뀌었네요..
우미산도 비슬지맥에 외면받는 산인데 찾아주셨고요..
힘도좋네요 비슬산 정상석까지 다녀오시고요
헐티재 모녀지간에 운영하시는데
아마도 요즘은 따님이 하지싶은데요..
전번이 안바뀌었으면
010-2511-1825
청룡지맥하실려면 다시 와야하니 참고하십시요..
모든 정상석과 이정표가 세삼바뀐게
앞으로 10년이 지나면 또 어떻게 바뀔지 궁금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지맥님!
아직 청룡지맥 계획은 없습니다.^^
현재까지는 100km 전후 지맥 15개가 목푭니다.
비티재 포장마차는 모자지간이 하더군요.
헐티재 아줌니는 전화통 붙잡고 머락케샀는지 당초 말 붙여볼 시간을 안 주더군요.^^
청도군 관내 모든 산에는 디따시 큰 정상석이 거짐 올라있는데,
2000년도 초에 청도산악회 회장을 산을 좋아하는 경찰서장이 이끌면서 헬기를 동원해 죄다 올렸다더군요.
어휴 도대체 몇키로입니까?
대구에 적을 둔 관계로 이 근처는 자주 간 곳이라 눈에는 선한데
팔조령에서 우와~ 비슬산까지는 이해가는데 그 넘어 천왕산, 화악산까지 넘어가셨네요 허걱
이거 엄청난데요?
무거운 짐을 지고 이 먼거리를 진짜 대단합니다.
대구 지역민들도 이렇게 산행한 사람이 과연 몇 되겠습니까?
저같이 농땡이는 엄두도 안납니다 ㅋㅋㅋ
그래도 다행히 준희선생님도 뵙고 비실이선배님, 부뜰이 운영자님도 뵙고 멋진 대접 받으셨네요
멋집니다 .(충분히 자격 있으십니더~ 짝짝짝~)
여름이 다가옵니다. 더울때는 너무 무리하게 다니지는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드네요
항상 좋은 일들만 넘치는 하루 되세요~
부럽고, 놀라고, 대구라 반갑고... 뭐 그런 많은 느낌의 후기 즐거이 감상했습니다 .ㅎㅎㅎ
다 읽으셨어요?^^
부담드려서 죄송합니다.
요것저것 관련 있는 것들을 주워 모으다보니 양이 비대해졌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는 해야 기억에도 오래 남고 지맥을 한거 같아서요.^^
원래 두 구간으로 할렸는데 능력이 안되어 무리하지 않고 세 구간으로 타협을 봤습니다.
대구에는 배방장님이 이끄는 명문 J3클럽이 있습니다.
J3클럽은 비슬지맥+낙동강+영축지맥을 묶어서 한꺼번에 하더라구요.^^
준희선생님과 비실이부부대선배님과의 만남은 진행 날짜가 겹쳐 우연하게 이뤄졌네요.^^
덕분에 부곡하와이에서 좋은 추억을 남겼습니다.^^
각자 자기만의 추구방식이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므로
주어진 저질체력에 맞게 여유로이 즐기는 산행을 하다 이렇게 장거리 능력자의 글을 보면
뭔가 부러움 같은게 생겨나곤 합니다.
이러한 부러움은 비단 저뿐만이 느끼는 감정은 아니겠지요? ㅎㅎ
멋진 추억이 담긴 비슬지맥 ~ 수고많으셨습니다.
삼성산에서 시산제 산객에게 막걸리와 떡을 도움받아 먹었던 추억 열왕지맥 분기점 천왕산 왕복 청룡지맥 분기점 비슬산 천왕봉 등 여름철 화악산 오름이 빡세게 오름입니다 그리고 사타구니가 헐어서 119 부르려고 했던 추억이 되살아납니다 멀리도 가셨네요 반가운님들과 조우하여 2차도 즐겁게 하시고 멋있는 비슬지맥 길입니다 항상 응원합니다 화이팅입니다 ~~~~
세르파선배님!
올려주신 비슬산 정상의 사진도 기억나네요.
이 길 여름에 가셨죠.
마지막 구간 더위에 지쳐 밀양시립묘원에서 중탈하신 걸로 알고 있어요.^^
삼면봉에서 내려서서 관리되지 않은 무덤들이 잔뜩 있는 곳을 지나는데 간간이 나타나는 띠지가 반가웠습니다.^^
여름에 거길 가셨으면 가시 덤불에 어려움이 꽤 많았겠어요.
화악산 오름이 길게 느껴졌죠.
습지가 있다던데 대체 나타나야 말이죠.
8부능선에 있겠지 했는데 올라가보니 정상 턱 밑(9.7)에 있더군요.
마지막 구간은 우령산에서 비박하고 종남산에서 일출을 볼려고 계획하고 있는데 가능할지 모르겠네요. 감사합니다.^^
이틀동안 추억의 비슬지맥길..
밤낮없이 걷고 걸어서 67km, 하루반을 꼬박 멋진 발자취를 남기신 셈입니다.
다행히 날씨가 좋아서 맑은 하늘은 보이지만 8일은 전국적으로 황사현상이 극에 달했던 것 같습니다.
비슬산 조화봉, 대견봉은 역시 멋진 풍치를 드러냅니다.
앞고개까지 서둘러 진행한 탓에 준.희선생님을 비롯한 반가운 분들과의 접선도 가능하셨구요.
언제보아도 산에서 맺은 인연으로 뭉쳐진 정감어린 모습이 반갑기만 합니다.^^
수고많으셨습니다.
네 방장님!
언질 주신 덕분에 열왕지맥팀과 화왕산과 부곡하와이에서 멋진 추억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우연히 운행 날짜가 맞았다는게 신퉁방퉁입니다.ㅋ
시간과 체력 모두 충분히 다녀올 수 있었는데...
대견봉삼거리에서 지리감을 충분히 익히지 못해 대견봉을 다녀오지 못해 아쉽습니다.
8일, 황사가 심했다지만 화악산에서 건너다본 남산의 하늘은 푸르렀습니다.
멀리 보이는 산에 앝게 내려앉은 황사가 송진가루 처럼 날렸을 뿐,,, 덕분에 잘 다녀왔습니다.^^
퐁라라 룸메이트님!
원 나잇에 함께한 화왕산입니다.
비슬지맥 하신다고 고생많으셧습니다.
선배님들 한분한분 대단하다고 여겨집니다.
나는 과연 할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글을 올립니다.
꽃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가시는 곳마다
많은 홍보를 해주시니 더욱 감사합니다
사진중 석검봉, 구구봉 펜으로 적은 글은
너무 희미하게 보여서
창녕군수님이 산행중
가지고 있던 펜으로 새롭게 쓰신 글입니다.
언제나 건강하시고 안산하세요.. 화왕산 드림
화왕산선배님!
저희가 다시 계속될 인연이었는가 봅니다.^^
그 봉우리(989.7m)는 이름이 많더군요.
높이로는 990m봉이라 구구봉이라고 하고요.
비슬산 남쪽 입구라하여 남악봉이라고도 하고, 바위덤인지라 잘못 알려졌다는 석검봉으로도 불렸습니다.
그런데 생김새는 상여를 닮은 모습이라 생여봉 또는 상여봉이라고도 부른다네요.
그 우측으로 대구시계 관기봉(가마봉)도 있습니다.^^
사진은 상여봉에서 바라본 가마봉입니다.^^
청산 지나서 있는 육각정자.
그곳에서 냉면 끓여 먹었던곳이죠.
화악산 오름길에 잡목도 심하고 오르막도 심하고...
꽤 어렵게 올랐던 기억이 납니다.
함께 했던 지인이
정상석에 돈 들이지 말고
등산로나 똑바로 정비하는게 낫겠다라고 했던곳인데...
즐거웠던 지난 기억을 소환해 주는 사진들입니다.
밤낮없이 긴 상행 하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똥벼락님!
청산 지나 삼거리에서 200m 더 진행하여 육각정에서 최정산 살폈습니다.
그리고 날씨가 좋아 멀리 비슬산과 조화봉의 모습도 잘 살폈답니다.
통점령 너른 들판을 지나는데 그 모습이 다소 이국적이었구요.
잘 하면 어디에 약수가 있을것 같은 지형이었어요. 딱 약수터가 필요한 지점이더군요.^^
화악산은 사전에 공부한 대로 마음 달래며 올랐는데도 길게 느껴지더라구요.
띠지를 보면 그 사람의 케릭터, 인간적인 면모나 인격이 먼저 떠오르게 된답니다.
따라서 띠지 아무나 함부로 다는게 아닌데 부끄러운 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서 걱정입니다.
똥벼락님 띠지 두 종류 다 확인하며 걸었습니다. 저에게 힘을 주는 띠지 중에 하나입니다.^^
대여섯개 트랙을 살펴 그 중에 가급적 정통 맥길을 고집한 것으로 따르고 있습니다.
트랙을 살려놓고 앞뒤 좌우를 살펴 띠지를 확인하며 조사한 자료를 확인하고 진행하는데...
이번 구간에서도 갈림길을 지나 직진하다 빠꾸한게 두번 있었습니다.^^
길찾기 난해한 헛갈리는 곳이나 갈림길에서는 선배님들의 띠지가 많은 도움이 된답니다. 감사합니다.^^
여기서 대견봉삼거리까지 6시간 정도 걸렸더군요. 육각정서 비슬산과 조화봉을 찍은 사진입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저는 비슬지맥을 제일먼저 했는데
헐티재에서 국수사먹은 기억이 생생합니다~
감사합니다~
퐁라라님 늘 안,줄산을 발원드립니다~
법광선배님!^^
이제 지맥 몇 개 남으신건지요.
손가락으로 꼽으실것 같습니다.
잘 쓰시는 산행기 여기에도 올려주심 좋으련만 거리를 두시는것 같아 아쉽습니다.^^
법광선배님 산행기 보러 봄여름가을겨울산악회 많이 가봤네요.ㅎ
선배님도 지맥 졸업이 가까워오니 어언 초로의 노인이 다 되셔서 지나온 산줄기를 보노라면 느끼는 소회가 남다르리라 보입니다.
비슬지맥을 하신 년도가 궁금해요.^^
그때도 헐티재에 저 국수집이 있었구요.
그집 딸네민지 며느린지 BMW를 몰고 출근하더군요.
국시 팔아 그 돈으로 종자돈 삼아 재테크에 성공한 케이슨가 봅니다.^^
법광선배님도 그 세월동안 재테크 잘 이루셨으리라 봅니다. 감사합니다.^^
있는 정성 다 쏟아 준비하고, 산을 오르고, 다시 정리하는 과정이
산을 하나 쌓는 것보다 더 큰 작업임을 퐁라라님의 산행기에서 목도합니다.
누가 뭐래도 그 지난한 작업은
온몸의 숨구멍마다 울음이 배어나듯이 땀을 흘리는 것이나 진배없음을 잘 압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그 정성은 산자락 속속들이 스며들어 산길 밝히는 등불이 될 것임이 확실합니다.
비슬마루금에서 그 흔적들을 하나하나 확인하면서 산행기를 읽어나가니
산에 마음을 두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 행복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넘쳐 흐릅니다.
굳이 나누려는 표현이 없더라도 절로 나누어지는 힘이 엿보여서 참 기분이 좋아집니다.
고생한 흔적을 기쁜 마음으로 감상하고 익히고 배워갑니다. 감사합니다.
사견 하나 첨언함을 용서하시길.
대견사 마당바위 위의 삼층석탑과 허공이 만들어내는 조화는 천하일품이요,
울울창창한 운주암 앞뜰에서 굽어보는 아랫세상 풍경은 비슬의 백미라 해도 부족하지 않을 듯.....
범산선배님!
대견사도, 운주암도 도로가 좋아 차가 슝슝 날라다니더군요.
하지만 비슬에서 내 발로 선배님의 첨언을 확인함은 그 진미를 아는 사람만이 맛볼 수 있는 진경일 것입니다.
계산 착오로 대견사를 놓치고는 아차! 싶었지만 장거리라는 핑계로 300m를 되돌리지 못했습니다.
저도 큰거 하나를 놓쳤다는 아쉬움 감출 수 없었답니다.
형제봉 지나며 바라보는 운주암 또한 정상 목바치 y자계곡의 시작으로 태초에 따뜻한 자궁처럼 옥녀탄금형의 명당임이 확연했습니다.
차라리 물이라도 부족해 들리지않을 수 없었던들 지금보다 후회가 덜했을 것입니다.
여유를 가지고 첨언해주신 두곳 다 들릴 수 있는 호사로운 비슬길을 걷는 후답자님들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과찬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