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2일 (월) (녹)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7,1-5
건물을 지을 때 넘어가는 것을 막으려 바닥이나 천장에 대는 지지대를 ‘들보’라고 합니다. 금방 눈에 뜨입니다. 하지만 티끌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남의 눈의 티끌’은 쉽게 찾아냅니다. 그러면서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이 ‘눈 속에 들보’가 있는 사람인지요?
남을 심판하는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타인을 심판하기는 쉽습니다. 본인이 없는 곳에서 허물을 말하기는 정말 쉬운 일입니다. 순간적으로 방심하면 누구나 빠지는 실수입니다. 하지만 그런 행위가 자신의 눈에 들보를 채우는 일이라고 하십니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말할까?’ ‘어찌하여 저런 식으로 행동할까?’ 무의식중에 이렇게 말합니다. 본인도 모르게 ‘비판의 시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꾸려면 ‘긍정의 시각’을 훈련해야 합니다. ‘아, 그렇게 말할 수도 있구나.’ ‘그렇게 행동할 수도 있구나.’ 이렇게 받아들이는 자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쁨을 갖고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기에 만나는 이들에게 ‘당신의 힘’을 주셨습니다. 병자들은 병이 나았고, 악한 기운에 붙잡힌 이들은 자유를 선물받았습니다. 그러한 주님께서 심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남을 판단하는 자체가 ‘삶의 기쁨’을 감소시키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6월 23일 (화) (녹) 연중 제12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7,6.12-14
주문모 신부님은 우리나라에 들어온 첫 외국인 선교사입니다. 청나라 사람으로 ‘북경교구 신학교’를 1기생으로 졸업하고 사제가 되었습니다. 교구장 ‘구베아 주교님’은 조선 교우들의 청원을 받아들여 그를 조선 땅으로 보냅니다. 주 신부님은 조선인으로 변장하고 1794년 12월 어렵게 국경을 넘습니다. 그를 안내했던 분은 순교자 ‘지황’이었습니다.
신부님은 한양에 도착하여 ‘최인길’의 집에 머물며 조선말을 익힙니다. 마흔두 살의 나이에 외국 말을 배우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듬해인 1796년 예수 부활 대축일에는 교우들과 함께 조선말로 미사를 드렸습니다. 이 땅에서 봉헌하는 첫 번째 예수 부활 대축일 미사였습니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해 배교자에 의해 입국 사실이 알려지고 최인길과 지황은 순교합니다. 다행히 신부님은 피신했지만 숨어 지내며 사목 활동을 해야 했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로 교우들은 붙잡히고 신부님의 거처를 캐묻는 문초를 받습니다. 교우들의 고통에 마음 아파한 신부님은 순교를 결심하며 관아에 자수합니다. 그리하여 1801년 5월 31일 한강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당하셨습니다. 당시 나이 49세였습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비좁기 마련이다.’ 자신을 낮추고 작아져야만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주문모 신부님은 그렇게 사신 분입니다. 이 땅에서 활동하신 첫 사제였지만 지금도 ‘소박한 모습’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6월 24일 (수) (백)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성 요한 세례자 성 요한 세례자(Joannes Baptistae)는 예루살렘 성전의 사제인 즈가리야(Zacharias, 11월 5일)와 성모 마리아(Maria)의 친척인 성녀 엘리사벳(Elisabeth, 11월 5일)의 아들로서 예루살렘 남서쪽에 위치한 아인 카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 역시 가브리엘 천사의 탄생 예고를 통하여 그동안 수태하지 못하던 엘리사벳에게 잉태되었습니다(루가 1,5-25). 그는 서기 27년경까지 유대 사막에서 은수자로 살았고, 30세가 되었을 때부터 요르단 강가에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설교하기 시작하며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에게 세례를 받으려고 오실 때 그분이 메시아임을 알아보고는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 하며 말렸습니다(마태 3,14). 그리스도께서 갈릴래아로 떠나신 뒤에도 그는 요르단 계곡에서 자신의 설교를 계속하였습니다.
갈릴래아의 영주 헤로데 왕은 세례자 요한의 언행과 또 군중들에 대한 요한의 권위를 두려워하던 중에 어처구니없는 이유를 들어 그를 사해의 마캐루스 성채에 투옥하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인 헤로디아와 결혼한 것은 옳지 않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헤로디아는 간계를 꾸며 딸 살로메에게 그의 목을 청하도록 하여 요한은 결국 참수 당하였습니다. 역사가들에 의하면 세례자 요한은 쿰란 공동체에서 살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 대축일은 6월 24일이고, 수난 기념일은 8월 29일입니다.
6월 25일 (목) (녹) 연중 제12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7,21-29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말을 앞세우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말로만 섬기지 말고 몸으로 실천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수없이 “주님, 주님!” 하고 불렀습니다. 그만큼 행동이 뒤따르고 있었는지 이제는 돌아볼 시간입니다.
다급할 때에는 누구나 “주님, 주님!” 하고 부릅니다. 하지만 상황이 좋아지면 서서히 잊어버립니다. 말은 빠르고 행동은 느린 ‘인간의 본질’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신앙생활은 말이 아니라 행동이라는 것을 누구나 조금씩은 알고 있습니다.
우리말에 ‘시원섭섭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해하지만 외국인은 잘 모릅니다. 우리만의 독특한 표현입니다. 성당에서도 ‘시원섭섭한’ 모습을 만나게 됩니다. 어떤 것은 시원한데 어떤 것은 섭섭한 것이지요. 대부분 사람과 연관된 일입니다.
화끈한 교우들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교우들도 있습니다. 무던한 신부님이 계시는가 하면 괴팍한 신부님도 계십니다. 시원한 모임도 있지만 귀찮은 모임도 있습니다. 하지만 섭섭한 모임과 까다로운 사람들에게서도 ‘어떤 순간’ 힘을 얻습니다.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은총이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이 말하는 것처럼 행동하라는 말씀입니다. ‘말하는 만큼’ 행동하려고 노력하라는 말씀입니다.
6월 26일 (금) (녹) 연중 제12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8,1-4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복음의 한센인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분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었습니다. 그분께서 지니신 애정을 믿었습니다. 그러기에 기적을 체험합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주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받아 주셨습니다. 그에게 애정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분의 따뜻한 마음입니다.
의사 선생님 한 분이 계십니다. 매주 월요일이면 한센인들에게 진료와 수술을 해 주는 분입니다. 치료를 받는 사람들은 그가 누구인지 압니다. 자신들의 얼굴과 손발을 닦아 주는 분이 보통 의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피부과를 전공했지만 한센인들을 위해 성형 공부를 다시 했습니다. 주위 사람들은 돈을 더 벌려고 그러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매달렸던 것은 환자들의 상처를 고치기 위한 성형 공부였습니다. 그는 지금도 한센인들을 위해 시간과 열정을 봉헌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왜 이런 일을 하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답변은 ‘의사이기 때문에’가 전부였습니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을 했습니다. “한센병은 발병하더라도 5일만 복약하면 전염성은 없어진답니다. 꾸준히 치료하면 완쾌되는 병입니다.” 그는 천사입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드러내는 이 시대의 숨은 천사입니다.
6월 27일 (토) (녹) 연중 제12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8,5-17
‘화수분’은 ‘재물이 자꾸 생겨서 아무리 써도 줄지 않는 보물단지’라는 뜻을 지닌 말입니다. 그런 화수분 하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는지요? 얼마든지 남을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음먹으면 화수분을 만날 수 있습니다. 살 수는 없지만 얻을 수는 있습니다.
화수분은 중국 진나라 때 만들어진 말입니다. 진시황은 만리장성을 쌓을 때 강물을 길어다 구리로 만든 동이에 채우게 했습니다. 그 물동이가 얼마나 컸던지 한 번 채우면 아무리 써도 없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황하수 강물’을 채운 동이라는 뜻에서 ‘화수분’이란 말이 나왔습니다.
“주님,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백인대장은 예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자신의 종을 살려 주시길 청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칭찬하십니다. 부하를 위해 자신을 숙이며 간청하는 그의 마음을 보셨던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예수님께서 감동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누군가를 감동시키면 그와 특별한 관계를 맺게 됩니다. 인생의 화수분 하나를 만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부하를 낫게 하셨습니다. 그들에게 삶을 바꾸는 감동을 주셨던 겁니다. 주님께서는 지금도 수많은 사람에게 화수분을 만들어 주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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