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여름 밥상
조정
음식에 대한 취향은 나이가 들면서 보수적으로 변해간다. 미슐랭 가이드 북에 오른 식당의 특별했던 음식도, 여름 보양식인 초계탕이나 용봉탕도, 어머니의 음식처럼 언제나 그리운 맛은 아니다. 어머니의 손맛이 담긴 정갈한 밥상은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치유의 힘이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름 밥상의 최종 승자는 단연 오이지다. 얄팍하게 썰어 짠맛을 우려낸 후 찬물에 파와 고춧가루를 띄운 오이지 국물 맛은, 더위에 잃은 미각돌기를 되찾아준다. 오이는 뜨거운 소금물을 부어 그늘에 열흘쯤 두면 노르스름한 오이지가 되는데, 어두운 항아리 속에서 맛을 내는 것은 오직 소금이다. 단맛, 쓴맛, 신맛, 감칠맛을 모두 수렴해 음식 맛을 좌우하는 것은 짠맛이다. 간고등어나 어란, 염장 대구의 맛을 결정적으로 지배하는 것도 결국은 소금이다.
슴슴한 오이지 국물 맛에 속이 편안해진 나는 어느새 기억 저편 고향 집 툇마루에 앉아 있다. ‘머리에 흰 수건을 두른 엄마는 초여름에 수확해 빻은 누르스름한 밀가루를 놋양푼에 담고 있다. 엄마는 눈대중으로 날콩가루도 조금 넣어 반죽을 치대기 시작한다. 낮게 접힌 둥근 밥상 위에서 홍두깨에 감긴 밀가루 반죽이 점점 얇아진다. 송글송글 엄마 이마에 땀방울이 맺힐 때쯤 가지런히 썬 칼국수가 상 위에 올려지고 부엌에선 구수한 장국이 끓고 있다. 오이지, 도라지 생채 무침, 참외장아찌가 놓인 밥상 위에, 엄마는 호박 볶음이 올려진 칼국수 대접을 식구 수 대로 옮기고 있다.’
어머니의 음식 중 가장 그리운 것은 감자떡이다. 바다가 먼 경기도 내륙의 고향 집 우물가는 여름내 감자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죽 늘어선 항아리 속에는 밭에서 캐다 호미에 찍혔거나 한쪽이 썩은 감자들이 물에 잠겨 있었는데, 엄마는 그 물을 자주 갈아주었다. 찌는 더위에 매미 소리가 기승을 부릴수록 항아리 밑바닥엔 감자녹말이 수북이 가라앉았다. 햇볕과 바람에 감자녹말 펼쳐 말리기를 반복하던 어느 날, 엄마는 녹말 반죽에 동부 콩 소를 넣어 가마솥 채반에 가득 올렸다.
생 쑥 태우는 연기가 모기를 쫓고 그윽한 옥잠화 향기가 바람에 실리는 여름밤, 식구들은 멍석 위에 둘러앉아 '진고개 신사' 라디오 연속극을 듣고 있었다. 할머니 무릎을 베고 누운 나는 언제쯤 엄마가 마당으로 나올까 부엌문만 바라보았다. 달빛을 받은 식구들 얼굴이 박꽃처럼 환해질 때쯤, 엄마는 감자떡이 담긴 소쿠리를 들고 멍석으로 다가왔다. 방금 쪄낸 가무스름한 감자떡에선 쿰쿰한 냄새가 났다. 놀랍게도 한 입 베어 문 감자떡은 결이 곱고 쫀득하며 동부 콩 소에선 밤 맛이 났다. 식구들은 말을 아끼며 빠른 손놀림으로 소쿠리를 비워내고 있었다.
내 기억에 각인된 감자떡은 미각의 저 깊은 곳을 깨우는 순수의 맛이었다. 그 맛은 고향의 흙냄새와 바람, 달빛과 새벽이슬이 담긴 어머니의 정성이었다.
처서 무렵의 마지막 더위는 텃밭의 꽃과 작물에 아낌없이 남은 햇살을 내려준다. 들기름에 볶아 국간장과 들깻가루로 양념한 머웃대, 꽈리고추 조림, 근대 된장국, 새우젓 호박 볶음, 노각 무침, 깻잎 조림---, 요즘 우리 집 밥상은 텃밭을 그대로 옮겨놓은 차림새다. 모두 어머니의 여름 밥상에 자주 오르던 반찬들이다.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 맛의 기억은 무구한 시간 속으로 나를 끝없이 이끌곤 한다. 입맛도 생명의 뿌리를 찾아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는 회귀본능이 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