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간 소개
식물성 언어로 교직한 현실 진단과 각성의 노래
- 김경옥 시인의 두 번째 시조집 「덕자」
나혜석문학상을 수상한 김경옥 시인의 두 번째 시조집 『덕자』가 작가 기획시선 Sijo Collections 34번으로 출간되었다. 저자 김경옥 시인은 부산에서 태어나 2012년 계간 《시조미학》 창간호 전국백일장 장원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며 월간 《유심》 신인상, 한국가사문학상, 열린시학상, 나혜석문학상을 수상했다. 2020년 시조집 『코스모스와 달』 출간하였으며, 현재 수원문인협회 수석부회장, 한국시조시인협회 이사, 백봉·홍재문학상 운영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번에 펴낸 김경옥 시조집 『덕자』는 모두 5부로 나뉘어져 총 60편의 시조로 구성되었다. 이 시조집에는 유난히 꽃과 관련된 시조가 많다. 그 작품들을 들여다보면 크게 세 갈래로 나눌 수 있다. 그 하나는 자연 그대로의 꽃을 노래한 작품군이고, 또 다른 한갈래는 중의적으로 현실을 담고 있는 작품군이고, 다른 하나는 꽃을 대상으로 불심을 표현한 작품군이다.
읽던 책 밀쳐놓고 마당으로 내려온
배롱꽃
분홍 입술을
주인 없는 강바람이
만대루 기둥 사이로 그만 훔쳐 달아나네
- 「여름 병산서원」 전문
퇴계의 제자 류성룡을 모신 병산서원은 특히 배롱꽃이 유명해서 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이다. 이 작품은 군더더기가 없다. 그냥 이 시조에 표현된 풍경 그대로의 모습을 읽으면 된다. 엄격한 격식을 갖춘 서원이지만 여기서는 배롱꽃이 주연이다. 강바람은 조연이다. 그러나 무르익은 봄 풍경에서 강바람이 없었다면 이 작품은 싱거웠을 것이다. 배롱꽃은 배롱꽃 그대로의 배롱꽃이다. 시적 기교가 아름다운 작품이다. 단정하고 가식 없는 시인을 가장 많이 닮은 배롱꽃의 향기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보라색 흰색 어우러진 분 내음 따라
유럽 황실 어디쯤 온 듯 데자뷔 즐거워라
신산한
봄바람에 맞선
보드라운
비폭력
- 「자스민의 봄」 전문
현실 의식이 스미어 있는 시다. '신산한, 봄바람에 맞선, 보드라운 비폭력' 때문이다. 그러나 그 강도로 보면 가벼운 편이다. 그림이 모던하면서도 비교적 세련된 느낌을 준다.
덕진공원 연지가 참 좋다던 무소유 스님
말씀 따라 그 연꽃 만나러 가는 머리 위로
불현듯 예고도 없이
장대비 쏟아진다
우리는 비를 피해 백련 사이 내달리고
젖어있는 풍경 속에 번개 치듯 스치는
진흙이 꽃 피우는 일
얼마만 한 내공일까
눈에 선한 그 날이 살며시 곁에 오면
좋은 일이 있기보다 지금에 감사하라는
소인도 없는 편지를
두 손으로 받아 든다
- 「연꽃이 보낸 편지」 전문
‘무소유 스님’이나 ‘연꽃’, 특히 ‘진흙이 꽃피우는 일 얼 마만한 내공일까’ 와 셋째 수의 자기 성찰적 시구를 보면 이 작품은 불교적 사유에 충일한 작품이다. 이 시인의 경우 어떤 대상을 보아도 불교적 사유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그의 삶 자체가 녹아있는 작품을 쓴다면 불교는 언제나 그의 생을 지탱하는 정신적 기둥이기 때문이다. 꽃은 아니지만 식물을 두드러진 오브제로 삼은 작품이 있다.
읽던 경을 물리는 절집의 깊은 밤 자시
보름달은 중천이고 마당 가득 눈이 내려
감아도 눈이 부시는 무언극이 절정이다
허공에서 지상까지 먼 길 돌아온 손님
집 떠난 홀로움에 청솔가지 감싸 안았고
정한을 못 이긴 가지 팔 한 짝을 버린다
법맥을 이어받은 혜가의 단비처럼
감당할 그만큼만 받겠다는 의지인 듯
단호한 작별인사로 절명시를 읽는다
- 「함박눈과 소나무」 전문
여기서는 소나무 한 그루를 대상으로 달마대사의 법통을 이어받은 혜가의 일화를 그려놓고 있다. 아름다운 종교시다. 그러나 그냥 그 풍경대로 바라보아도 격조 있는 시어와 보름달과 소나무의 구도는 유연한 동양의 미를 탄주해 내기에 어울리는 한 폭의 한국화다.
비 온 뒤 여린 쑥이 솜털 달고 솟아났다
가위로 숭덩숭덩 한 움큼 잘라 와
콩가루 듬뿍 묻혀서
진쑥국을 끓인다
맑고도 향기롭게 봄이 절로 넘어간다
주인 없는 영토마다 일가를 이룬 저 힘
키운 이 누군지 몰라도
밥상 가득 오셨다
- 「쑥」 전문
쑥은 세를 뻗어 나가기로는 어느 식물 못지않다. 더구나 보릿고개를 넘을 때 구황식물로 일조한 식물이다. 이 작품에서 어색하지 않게 의인화해서 시인은 쑥을 예찬한다. “주인 없는 영토마다 일가를 이룬 저 힘 / 키운 이 누군지 몰라도 / 밥상 가득 오셨다”는 쑥의 특성을 예리하게 노래한 가구佳句다.
이처럼 김경옥 시인의 시조들은 섬세하고 따스할 뿐 만 아니라 일정한 수준의 격조를 지니고 있다. 대상에 대한 사랑이 극진하고 감정을 잘 조절할 줄 안다. 그리고 가독성이 있는 시조를 쓴다. 가락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시조를 쓴다. 시조적 형식면에서 그의 작품들은 완결성이 높다. 그만큼 그는 시조형식에 가까운 리듬을 가진 시인이었다. 많은 시인이 선택해서 자신의 문학세계를 열고 살아가는 시조 시단에서 그는 묵묵히 자기만의 올곧은 시조창작법을 다지며 이 길을 걸어오고 있다.
그래서일까. 그의 시조집을 펼치면 오늘의 비윤리적이고 비이성적인 무질서한 현실에 반항하는 어떤 의식이 깔려있다. 그래서 그의 시조 세계는 다분히 오늘날의 혼란에 대한 대안적 세계나 그가 열망하는 유토피아적 분위기를 다분히 재현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천사 횟집 의자에 앉아 갈치찜을 먹는
네온사인 밝혀진 목포의 늦은 저녁
노포집 벽을 차지한 여인이 눈을 끈다
꽃 시절 불러본 듯 다정한 저 이름
메뉴판에 딱 두 글자 내력이 수상하고
그 옆에 십사만 원은 궁금증만 더한다
낯선 마을에선 겸손하게 묻는다
병어보다 큰 놈인디 찜이 참 맛나요이
한 냄비 은갈치 앞에서 보고 싶은 그 여자
- 「덕자」 전문
고향 어디에 살고 있으나 오래 만나지 못한 어릴 적 친구 이름처럼 정다운 '덕자'라는 메뉴를 시인은 목포 생선찜 집에서 발견한다. 덕자가 왜 메뉴판에 있냐고 물으니 주인은 대답한다. "병어보다 큰 놈인디 참 맛나요이" 덕자라는 생선이 생경하면서도 이색적이다. 그 메뉴 덕분에 친구 덕자의 소식이 궁금해지는 목포의 늦은 저녁... 사투리도 어울리고 저녁 풍경도 아름답다.
이우걸 시조시인은 해설에서 “구수한 서민들의 일상사에서 채취한 인정과 세태의 가락을 가식 없이 노래하는 길, 언제나 겸손한 언어로 시적 대상에게 사랑을 전하고 그 응답을 옮기는 길, 항상 스스로를 먼저 반성하고 성찰하며 세계를 관찰하는 길, 그 길이 김경옥 시인이 걸어온 길이고 앞으로도 걸어가야 할 길일 것”이라고 언급한다.
정용국(한국시조시인협회 이사장) 시조시인은 “하찮고 보잘것없는 미물도 공경의 대상으로 모셔다가 풀어낸 시인의 정감은 벅차고 대견하다. ‘자스민’에 내재하고 있는 거대한 혁명의 기약까지 ‘비폭력’의 실체로 도출해낸 궁리의 힘은 김경옥 시조의 정점에서 힘차게 꿈틀거리고 있다. 특히 시집 표제작 「덕자」는 ‘노포집 벽을 차지한 여인’과 그리운 고향 친구를 병치시키며 시인의 복선과 독자의 상상력이 질기게 길항되는 능숙하고 여유로운 명장면을 연출하고 있다”고 평한다.
글이 그 사람이고 사람이 그 글을 쓴다고 했을 때 문학의 향기는 사람의 향기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면에서 모범을 보여온 김경옥 시인은 이미 하나의 성을 가진 문학의 성주라고 생각된다. 그런 영역은 문학적 향기의 영역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 사명감으로 그가 선택 한 시의 길을 걸어가는 김경옥 시인이 펴낸 시집 『덕자』가 독자들에게 영원히 기억될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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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 김경옥 시인
부산에서 태어나 2012년 계간 《시조미학》 창간호 전국백일장 장원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며 월간 《유심》 신인상, 한국가사문학상 열린시학상 나혜석문학상을 수상했다.
2020년 시조집 『코스모스와 달』 출간. 수원시 중등교장 역임. 현재 수원문인협회 수석부회장, 경기시조시인협회 부회장, 한국시조시인협회 이사, 한국여성시조문학회 한국문인협회, 오늘의시조시인회의, 경남시조시인협회 회원. 백봉·홍재문학상 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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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말
봄에는 꽃향기 맡고,
가을엔 보름달을 바라봅니다.
여름 햇살과 바람에 땀을 닦으며,
겨울눈으로 눈사람을 만듭니다.
우리의 호시절은 눈앞에 이미 펼쳐져 있습니다.
나에게도 호시절이 왔습니다.
시조를 읽고 쓸 자유를 선택하여 누렸기에 그렇습니다.
무심한 가을바람이 참 시원합니다.
세상의 모든
우리들의 친구, 덕자에게
이 투명한 가을물 서사를 한 아름 드립니다.
- 광교산 자락 물가에서
2024년 10월 어느 좋은 날, 김경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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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천사
김경옥의 시조는 살갑고 부드러운 서정 속에도 당찬 고갱이 같은 심지가 진중하게 자리를 잡고 있어서 무게감을 더한다. 부드럽고 향긋한 쑥에서도 영토의 힘을 받아들고, ‘행궁동 사월’ 따사로운 햇살이 빛나는 화성의 한 귀퉁이에서는 정조의 곧은 꿈과 혜경궁 홍씨의 빛바랜 정한을 목련꽃 화사한 잎에서 그려내는 정다운 결기를 보여주고 있다.
하찮고 보잘것없는 미물도 공경의 대상으로 모셔다가 풀어낸 시인의 정감은 벅차고 대견하다. ‘자스민’에 내재하고 있는 거대한 혁명의 기약까지 ‘비폭력’의 실체로 도출해낸 궁리의 힘은 김경옥 시조의 정점에서 힘차게 꿈틀거리고 있다. 특히 시집 표제작 「덕자」는 ‘노포집 벽을 차지한 여인’과 그리운 고향 친구를 병치시키며 시인의 복선과 독자의 상상력이 질기게 길항되는 능숙하고 여유로운 명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 정용국(한국시조시인협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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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속으로
사탕값도 안 되고 강아지도 안 물어가는
백동전 딱 한 개 그 위세가 당당한 고을
이순신, 장군 모시듯 서천 택시 납신다
시오리 장날 길에 발이 된 시골 택시
한 그릇 새알 팥죽 침놓는 의원까지
어디든 모셔다드리고 백 원이면 오케이
누가 만든 세상인가 하늘 아래 천국이다
달려온 기사님이 자식인 양 반가워
나으리 목민관 나리 어깨춤이 절로 난다
- 「백 원 택시」 전문, 본문 46쪽
주지 않는 숙제를 남몰래 받아들고
울 엄마 치마저고리 눈앞에 아른거려
개망초 흐드러진 오월도
그냥 흘려보내고
고삐를 매지 않아도 시 한 잔에 목이 말라
붓 한 자루 친구삼아 태산이라도 옮겨 볼까
사는 일 별거 있냐며
글을 받아 드는 날
광교산 솔바람에 보리밥 비벼 먹고 혼
자라도 외롭지 않은 함께하면 더 좋은
신발끈 고쳐 매는 일
저만치 달이 뜬다
- 「나의 시조」 전문, 본문 47쪽
기저귀 똥냄새에 아이들 울음소리에
애기똥풀 꽃 피우는 따뜻하고 작은 도시
불현듯 아기 낳으며 여기에서 살고 싶다
어느새 우리 집 셋째, 올해 들어 첫아기란다
고을의 어르신들 경배드리듯 찾아와
다둥이 잘 키우시라 큰돈 주고 가셨다
아가 웃음 잊을까 움츠린 나라 찾아
이 세상 제일 고운 별 바로 여기 내렸다고
나팔꽃 소문을 낸다
바람 편에 나른다.
- 「탄생을 찾습니다」 전문, 본문 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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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붓 한 자루 친구삼아 태산이라도 옮겨 볼까" 와 부회장님!
작고 아기자기한 시어들 속에 숨은 저 부회장님의 거다란 그릇이 군데군데~~~~
또 한 번 축하와 감동이 빗방을 만큼 전해 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