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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4년 7월 4일 목요일
[(녹)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백] 포르투갈의 성녀 엘리사벳
말씀의 초대
아모스 예언자는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이지만 주님께 붙잡혔다며, 이스라엘은 제 고향을 떠나 유배를 가리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에게, 죄를 용서받았으니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가서 내 백성에게 예언하여라.>
▥ 아모스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7,10-17
그 무렵 10 베텔의 사제 아마츠야가 이스라엘 임금 예로보암에게
사람을 보내어 말하였다. “아모스가 이스라엘 집안 한가운데에서
임금님을 거슬러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이 나라는 그가 하는 모든 말을 더 이상 참아 낼 수가 없습니다.
11 아모스는 이런 말을 해 댑니다.
‘예로보암은 칼에 맞아 죽고 이스라엘은 제 고향을 떠나 유배를 갈 것이다.’”
12 그런 뒤에 아마츠야가 아모스에게 말하였다.
“선견자야, 어서 유다 땅으로 달아나,
거기에서나 예언하며 밥을 벌어먹어라.
13 다시는 베텔에서 예언을 하지 마라.
이곳은 임금님의 성소이며 왕국의 성전이다.”
14 그러자 아모스가 아마츠야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다.
나는 그저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이다.
15 그런데 주님께서 양 떼를 몰고 가는 나를 붙잡으셨다.
그러고 나서 나에게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16 그러니 이제 너는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너는 ‘이스라엘을 거슬러 예언하지 말고
이사악의 집안을 거슬러 설교하지 마라.’ 하고 말하였다.
17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 아내는 이 성읍에서 창녀가 되고 네 아들딸들은 칼에 맞아 쓰러지며
네 땅은 측량줄로 재어 나누어지고 너 자신은 부정한 땅에서 죽으리라.
그리고 이스라엘은 제 고향을 떠나 유배를 가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군중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1-8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배에 오르시어 호수를 건너
당신께서 사시는 고을로 가셨다.
2 그런데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평상에 뉘어 그분께 데려왔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3 그러자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속으로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고 생각하였다.
4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느냐?
5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6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그런 다음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7 그러자 그는 일어나 집으로 갔다.
8 이 일을 보고 군중은 두려워하며,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진정 의인을 죄인과 함께 쓸어버리시렵니까? 혹시 그 성읍 안에 의인이 쉰 명 있다면, 그래도 쓸어버리시렵니까? 그 안에 있는 의인 쉰 명 때문에라도 그곳을 용서하지 않으시렵니까?” …… “소돔 성읍 안에서 내가 의인 쉰 명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들을 보아서 그곳 전체를 용서해 주겠다”(창세 18,23-26). 소돔 땅을 두고 시작된 하느님과 아브라함의 이 대화에서 의인의 숫자가 쉰 명에서 열 명까지 점점 줄어듭니다. “그 열 명을 보아서라도 내가 파멸시키지 않겠다”(18,32).
이 대화에서 우리는 중요한 신비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의인들의 믿음을 보시고 죄인들을 용서하여 주시는 신비입니다. 그리고 이 신비가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을 통하여 그대로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를 당신께 데려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니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우리가 기도할 때, 미사를 드릴 때, 신앙인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할 때, 오늘 복음이 알려 주는 이 신비가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신앙생활 안에 있는 믿음을 보시고 누군가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찾으며 십자 성호를 긋는 순간, 그와 동시에 죄인들을 향한 자비와 용서도 함께 쏟아져 나옵니다. 기도가 메말라 갈 때마다, 신앙생활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때마다 오늘 복음이 알려 주는 이 신비를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오늘 예수님을 찾으며 드린 그 한 번의 기도 안에는 누군가가 죄를 용서받게 되는 은총이 담겨 있습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는 그 모습 안에는 누군가를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자비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아멘.(김재덕 베드로 신부)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성인이 되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1995년 예수 성심 대축일을 ‘사제성화의 날’로 선포하였습니다. 사제들이 먼저 성화 되어야 교회가 성화 될 수 있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예부터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고 하였습니다. 매일 미사를 봉헌하고, 성사를 집전하는 사제가 거룩한 모습을 보이면 공동체도 그런 방향으로 나갈 것입니다. 서울대교구에 있을 때는 사제성화의 날을 의미 있게 보냈습니다. 교구는 사제성화의 날 프로그램을 마련했습니다. 강의를 듣고, 고백성사를 보고, 은경축을 맞이하는 사제들을 축하하며 함께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저도 8년 전인 2016년 사제성화의 날에 은경축 축하 미사를 함께 했습니다. 미국에 와서는 사제성화의 날이 있음을 알았지만 덤덤하게 지냈습니다. 신문사에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제가 속했던 브루클린 교구에서도 특별한 프로그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2024년 사제성화의 날에는 그래도 의미 있는 일이 있었습니다. 10시 미사를 마치고, 봉성체를 다녀왔습니다. 5개월 전에 사고로 거동이 불편해진 할머니와 할머니를 돌보시는 할아버지를 위한 봉성체였습니다. 성체를 모시기 전에 두 분은 먼저 고백성사를 보았습니다. 5개월 동안 성당엘 못 오셨으니 ‘주님 부활 대축일’도 참례하지 못하였습니다. 성체를 모셔 드리고,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귀가 잘 들리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큰 소리로 이야기했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있었습니다. 당시 조선은 일본의 침략으로 왕은 피신을 가야 했습니다. 백성들은 심한 고초를 겪었습니다. 풍전등화와 같았던 조선은 전국에서 일어난 의병들의 힘으로 일본의 침략을 저지할 수 있었습니다. 조선의 요청으로 명나라는 파병을 결정하였고,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은 일본군을 격퇴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불멸의 이순신 장군이 있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명량, 한산, 노량에서 일본의 수군을 물리쳤습니다. 임진왜란은 단순히 조선과 일본의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동아시아의 패권을 둘러싼 전쟁이었습니다. 일본군은 조선의 도공들을 일본으로 끌고 갔습니다. 역설적으로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의 도공은 일본의 도자기 생산에 큰 공헌을 하였습니다. 일본의 도자기는 유럽으로 팔려 나갔고, 일본의 도자기 산업은 일본 근대화의 기틀이 되었다고 합니다. 만일 임진왜란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한국의 청자와 백자가 유럽으로 수출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일본보다 먼저 조선이 근대활 될 수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으로 명하기도 합니다.
‘나라를 빼앗긴 민족은 다시 일어설 수 있지만 역사를 잊어버린 민족은 다시 일어설 수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에 조선은 임진왜란을 막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유명한 율곡 이이의 ‘십만 양병설’입니다. 율곡 이이는 일본의 힘이 강해질 것을 예측했습니다. 강해진 일본은 조선을 넘보리라 예측했습니다. 그래서 십만의 병사를 양성하자고 했습니다. 무너진 산성을 개축하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조선의 왕과 대신들은 율곡 이이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직전에 조선은 일본의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서 수신사를 보냈습니다. 일본의 상황을 살펴본 수신사들은 엇갈리게 보고했습니다. 한쪽은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공할 야욕이 있다고 보고했습니다. 다른 한쪽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을 침공할 만큼 강인하지 않다고 보고했습니다. 조선의 왕과 대신들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지 않을 거라는 보고를 받아들였습니다. 당시에 조선의 정부가 율곡 이이의 충정을 받아들였다면,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것이라는 수신사의 보고를 받아들였다면 임진왜란을 없었을 것입니다. 설사 있었다고 해도 조선은 능히 물리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아모스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운명을 예언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우상을 섬긴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큰 혼란을 겪을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이스라엘의 왕과 예언자들은 아모스 예언자의 말을 무시했습니다. 결국 아모스의 예언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의 침략을 받았습니다. 나라를 빼앗겼고, 많은 사람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유배지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나라를 빼앗긴 원인을 깊이 성찰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이 성전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성전을 빼앗긴 이스라엘은 다시 일어설 수 있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잃어버린 이스라엘은 다시 일어설 수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말씀을 편집하였고,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전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하느님께서 그리 하시니>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마태 9,8)
하느님께서
그리 하시니
우리 믿어요
하느님께서
그리 하시니
우리 희망해요
하느님께서
그리 하시니
우리 사랑해요
하느님께서
그리 하시니
우리 보듬어요
하느님께서
그리 하시니
우리 나누어요
하느님께서
그리 하시니
우리 일으켜요
하느님께서
그리 하시니
우리 살려요
오늘의 성인
성녀 엘리사벳(Elizabeth)
신분 : 여왕, 3회원
활동지역 : 포르투갈(Portugal)
활동연도 : 1271-1336년
같은이름 : 엘리자베스, 엘리자벳, 이사벨, 이사벨라
에스파냐 아라곤(Aragun)의 왕 페드로 3세(Pedro III)와 시칠리아(Sicilia)의 왕 만프레디(Manfredi)의 딸인 콘스탄스(Constance) 사이에서 태어난 그녀는 자신의 고모할머니인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Elisabeth, 11월 17일)을 따라 같은 이름을 지었다.
12세의 어린 나이에 포르투갈의 왕 디니스 1세(Dinis I)와 결혼하여 오랫동안 자녀를 낳지 못하다가 결혼 7년째 되던 해에 자녀를 얻었다고 한다.
한편 디니스 1세는 능력 있는 강력한 통치자였지만 남편으로서는 칭찬받지 못할 사람이었다. 성녀 엘리사벳은 남편의 불신앙을 감내하면서 자신이 낳지 않은 서자들의 교육까지 담당하였으며, 끊임없이 기도와 경건한 삶을 추구하여 병원, 고아원, 매춘 여성들의 보호소, 양로원 등을 설립하였다.
성녀 엘리사벳은 남편의 냉대와 불신앙을 인내심을 가지고 대하였다. 그리고 1297년 이복형제들에게 관대한 아버지의 행동에 분개하던 아들 아폰소 4세(Afonso IV)와 남편 디니스 1세 사이의 대립을 중재하고 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녀의 정치적 영향력 때문에 오해를 받아 한때 알랑케(Alenquer)로 추방되기도 했던 그녀는 1324년 남편 디니스 1세가 병을 얻자 헌신적으로 간호해 주었다. 극진한 그녀의 정성에 감동한 남편은 회심하였지만 이듬해 사망하고 말았다.
남편이 사망한 후 성녀 엘리사벳은 코임브라(Coimbra)의 집으로 은거하였는데, 그곳에는 자신이 세운 성녀 클라라(Clara)의 가난한 자매 수도회가 있어서 인근의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펴기 위함이었다. 또한 그녀는 수녀가 되겠다는 이상을 포기하고 작은 형제회 3회원이 되어 엄격한 보속생활과 봉사활동을 하였다.
그녀는 1336년 7월 4일 에스트레모스(Estremoz)에서 사망하여 코임브라의 수도회 성당에 묻혔다. 성녀 엘리사벳은 1516년 교황 레오 10세(Leo X)에 의해 복녀로 선언됨으로써 코임브라 교구에서 공식적으로 공경 예절이 허락되었으며, 1626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에 의해 시성되었다.
1630년 로마 순교록에 성녀의 축일이 7월 4일로 수록되어 있었으나 1695년에 교황 인노켄티우스 12세(Innocentius XII)가 7월 8일로 바꾸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 두 날을 모두 축일로 인정하면서 그중 하나를 선택하여 기념하도록 하고 있다. 그녀는 흔히 포르투갈의 이사벨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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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하깨 (Haggai)
활동년도 : +6세기BC
신분 : 구약인물, 예언자
지역 :
같은 이름 : 하가이, 하까이
기원전 538년 바빌론 포로생활에서 첫 번째 귀향한 유태인들은 폐허가 된 예루살렘에서 다시금 올바른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힘을 기울였다. 그들은 우선 ‘번제의 제단’을 세웠다(에즈 3,1-6). 그리고 성전을 다시 짓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포로로 끌려가지 않고 팔레스티나에 남아 있던 ‘지방민’(사마리아인과 아시리아의 식민지 주민)의 방해로 이 첫 번째 재건축의 시도는 좌절되었으니, 이 지방민들은 옛날 아시리아 왕들이 이스라엘에 포로로 끌어온 이교도들의 후손으로, 야훼께 대한 순수한 신앙을 우상숭배로 오염시킨 자들이다(에즈 3,7-13; 4,1-5 참조). 그래서 그 후 18년 동안 성전을 다시 짓는 공사는 중단된 채였다.
그러던 중 522년 페르시아제국의 캄비세 왕이 죽고 다리우스 1세가 등극하게 되었는데, 귀향한 예루살렘의 유태인 공동체는 이 사건을 하느님의 간섭을 예고하는 징표로 보았다(하깨 2,21-22). 이러한 징표를 느끼던 유태인들 앞에 하깨와 즈가리야는 예언자로 등장하였다. 그들은 하느님의 왕국이 도래하기 위해서는 성전을 다시 지어야 한다고 조건을 내걸었다.
성 하깨는 6월의 신월제(新月祭)를 지내던 날, 정확히 말하면 기원전 520년 8월 27일에 설교를 시작하여 그 해 12월말까지, 그러니까 약 넉 달 동안 활약을 하였는데, 그의 설교는 하깨 1장 14절이 증언하듯 성공적이었고, 성전 재건축을 위한 예언활동은 즈가리야에 의해 계속되었다(에즈 5,1-2). 히브리어 ‘하깨’(Haggai)라는 말은 ‘나의 축일’이란 뜻인데 이 이름은 우리가 잘 모르는 이 예언자의 모습을 보여 주는 하나의 열쇠로 볼 수 있다. 아마도 예언자가 예배와 성전에 큰 관심을 쏟고 성전 주변에서 생활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하깨는 고대 이스라엘의 성전 예언자의 후계자로 보인다(1사무 10,9-10; 2열왕 4,38; 예레 35,4).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유태인들은 매우 가난하였다. 게다가 팔레스티나에 남아있던 지방민들의 방해로 시달림을 받아 실의에 빠져 있었다. 하깨는 그들에게 시대의 징표를 해설하며 귀향한 공동체가 겪는 가난의 원인은 바로 종교적 열성이 저하되고 성전을 짓지 않는 데 있다고 지적하며 이방민족들의 왕국이 뒤흔들리는 것은(2,7-22 참조) 하느님께서 또다시 당신 백성의 역사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신 증거라고 하였다. 예언자들의 전통적인 설교도식에 따라 하깨는 귀향한 유대 공동체가 평화를 선물로 받고(2,9) 이방민족들의 보화를 차지할 것이라고 하며(2,7-9를 이사 60,5-13과 비교) 또한 즈루빠벨(2,20-23)이 다윗의 후예 메시아를 대변하고 있다고 예언하였다.
하깨의 활동기간은 아주 짧았지만 공동체를 다시 일으키고 예배를 정화시키고 희망을 진작시켰다. 그리고 솔로몬이 지은 첫 성전보다 더 영화로운 제2 성전과 하느님의 통치를 이룩할 왕적인 메시아에 대한 그의 예언은 하느님의 백성인 우리를 마지막 성전이자 종말의 메시아인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으로 인도한다. 비록 하깨와 즈가리야의 설교로 기원전 515년에 완공된 제2 성전은 사라졌지만 하깨는 지금도 우리들에게 살아있는 성전인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참 신앙의 요구를 하고 있다.
성 울다리코 (Uldaricus)
활동년도 ; 890-973년
신분 ; 주교
지역 ;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
같은 이름 ; 우달리꼬, 우달리꾸스, 우달리코, 우달리쿠스, 울다리꼬, 울다리꾸스, 울다리쿠스, 울리크, 울릭
독일의 아우크스부르크 출신인 성 울다리쿠스(또는 울다리코)는 스위스의 성 갈루스(Gallus)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았고, 또 삼촌인 아우크스부르크의 주교 복자 아달베로(Adalbero, 4월 28일)의 지도를 받았다. 성 울다리쿠스는 923년에 고향의 주교가 되었고, 아우크스부르크가 마자르인(Magyars)들의 침략으로 폐허가 되었을 때 온 주민들과 더불어 도시의 재건을 지휘하여 큰 명성을 얻었다. 나이가 많아지자 그는 주교직을 사임하였다. 그의 시성은 993년에 교황 요한 15세(Joannes XV)가 거행했는데, 이것은 교황이 시성식을 거행한 첫 번째 기록이다. 그는 울릭(Ulric) 또는 우달리쿠스(Udalicus)로도 불린다
복자 베드로 (Peter)
활동년도 : 1369-1387년
신분 : 추기경
지역 : 룩셈부르크(Luxemburg)
같은 이름 :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베드로(Petrus)는 로렌(Lorraine)의 리니(Ligny)에서 룩셈부르크 백작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4살 때에 양친을 잃었다. 매우 총명했던 그는 불과 10세의 나이로 파리(Paris)에서 공부했으며, 그 후 노트르담(Notre-Dame)에서 성직자가 되었다. 1380년부터 1381년까지는 그의 큰 형에 대한 몸값으로 칼네스에서 포로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이를 통하여 베드로는 겸손과 덕행에 현저한 진보를 보였고 또 인생의 대전환기가 되었다. 그는 1384년에 메스(Metz)의 주교가 되었고, 또 2년 뒤에는 벨라브로(Velabro)의 산 조르조(San Giorgio)의 추기경이 되었다. 그의 높은 성덕을 대변하는 것은 다음의 말 한 마디이다. "세상을 경시하고 너 자신을 경시하라. 그때 자신의 경멸에서 기쁨을 찾아라. 그러나 다른 사람을 경멸해서는 안 된다." 그는 1527년 교황 클레멘스 7세(Clemens VII)에 의해 시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