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장에는 사울이 신접한 여인을 통해서 죽은 사무엘을 만나는 장면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블레셋이 공격해 오고 다윗도 아기스의 호위대장으로 전쟁에 참여합니다. 사울은 블레셋군을 보고는 겁을 집어먹고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서 사무엘의 혼령을 불러내달라고 합니다. 혼백으로 나타난 사무엘은 사울의 시대는 이미 끝났고 다윗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16~19절을 보겠습니다.
16 사무엘이 책망하였다. "주께서는 이미 너에게서 떠나 너의 원수가 되셨는데, 나에게 더 묻는 이유가 무엇이냐?
17 주께서는, 나를 시켜 전하신 말씀 그대로 너에게 하셔서, 이미 이 나라의 왕위를 너의 손에서 빼앗아 너의 가까이에 있는 다윗에게 주셨다.
18 너는 주께 순종하지 아니하고, 주의 분노를 아말렉에게 쏟지 아니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주께서 오늘 너에게 이렇게 하셨다.
19 주께서는 이제 너와 함께 이스라엘도 블레셋 사람의 손에 넘겨주실 터인데, 너는 내일 네 자식들과 함께 내가 있는 이곳으로 오게 될 것이다. 주께서는 이스라엘 군대도 블레셋 사람의 손에 넘겨주실 것이다."
신접한 사람이 신과 사람을 연결시켜 주는 이런 종교행위는 인류의 오랜 전통이고 문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폭넓게 퍼져있는 샤머니즘이지요. 고대 이스라엘에서도 이런 종교문화는 뿌리 깊게 이어져왔고 우리나라의 전통 무속도 이 샤머니즘의 일종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종교적 전통은 이런 일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신접한 사람을 가까이하지 말고 죽이라는 규정이 모세오경에도 여러 차례 등장하니까요.
그러므로 본문의 기록자가 이 설화를 채택한 것이 자연스러워 보이지는 않습니다. 사울이 몰락해가는 과정을 극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채택한 것이겠지만 그 위대한 사무엘이 신접한 여인에게 조종되는 모습을 보는 보수적인 학자들에게는 곤혹스런 본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서의 기록을 모두 사실로 받아들이는 일이 얼마나 큰 모순인지를 이 본문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교우님들과 함께 생각해보고 싶은 문제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종교는 사후세계를 말합니다. 사후세계가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느냐는 문제는 종교마다 차이점이 있지만, 대체로 다음 세 가지 중 하나로 크게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사후세계가 천국과 지옥으로 나뉘어져 있다는 견해입니다. 기독교와 이슬람교로 대별되는 유일신종교들의 견해인데, 사람은 누구나 죽으면 신이 주관하는 심판을 받게 되고 그 결과에 따라 천국과 지옥이라는 극단의 두 세계 중 한 곳으로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천주교의 경우에는, 천국과 지옥 사이에 연옥이라는 중간지대를 설정해 놓기도 했지만 연옥은 천국에 갈 수 없는 영혼이 잠시 머무는 곳이지 영원히 거처하는 곳은 아닙니다.
둘째로, 유일신종교를 제외한 대부분의 종교들은 사람은 죽으면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이생에서 살아온 공적이나 죄업에 따라 그에 걸맞는 대가를 받게 된다고 가르칩니다. 불교의 윤회설처럼, 전생의 업에 따라 그에 걸맞는 생명체로 다시 태어나기도 하지만, 영혼의 상태로 다른 세계로 이동한다고 생각하는 종교도 많습니다.
그러나 한 번 가면 다시는 다른 세계나 다른 차원으로 이동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도 정화의 훈련을 거치면 더 나은 곳 또는 더 나은 차원으로 옮겨갈 수 있다고 생각하고 가르치는 종교도 많습니다. 요즘은 특정 종교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 중에서도 이런 견해를 갖고 있는 분들이 꽤 많이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이단으로 분류된 조직 중에도 이런 견해를 가진 분들이 있습니다.
때로는 죽은 자의 혼백이 갈 곳을 찾지 못해서 또는 어떤 목적이나 원한 때문에 이승에 머물며 다른 사람들의 삶에 간섭한다고 생각하는 종교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전통 무속도 여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셋째로, 사후세계를 인정하지 않고 사람은 죽으면 그냥 소멸되어 자연의 한 부분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로 비종교인들 중에서, 특히 과학과 합리성을 중시하는 분들 중에 이런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종교인들 중에도 사후세계를 인정하지 않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불교의 가르침 중에 유심론(唯心論)이라고 있습니다. 오직 유자, 마음 심자, 그러니까 모든 것이 마음에 있다는 것입니다. 천국도 지옥도 우리 마음 안에 있다는 것이고 마음이 만든 것이라는 뜻도 됩니다. 그러니까 사후세계도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티베트 사자의 서(書)> 라는 책이 있습니다. 제가 그 책을 읽은 지가 좀 오래 돼서 자세히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죽은 사람이 49일 동안 이승에 머물면서 환생할 곳을 찾아다니는데, 그 사람이 좋은 곳에서 태어나기를 빌어주면 즉시 좋은 곳으로 가게 된다는 이야기를 담은 책으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그 책 마지막 부분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이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말씀드린 세 가지 견해 중에서,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은 틀리다고 단정 지어 말할 수는 없습니다. 사후세계는 인간이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입니다. 초합리적인 세계인 것이지요. 합리적인 세계는 경험이나 이성으로 증명할 수 있는 세계입니다. 비합리적인 세계도 경험이나 이성으로 증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초합리적인 영역은 우리의 이성이나 경험으로 파악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 있습니다. 그래서 이게 옳다 저게 옳다고 단정 지을 수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지만 ‘내 견해는 이렇다’ 라고 자기 생각을 말할 수는 있겠습니다. 그래서 저도 제 생각을 좀 얘기해 보겠습니다.
우선 천국과 지옥에 대한 견해는,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유일신종교인들이 오래 동안 잘못 이해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천국은 공간적인 천국이 아니라 마음의 천국이고, 또한 이 땅에서 만들어가는 천국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누가복음 17장 20~21절을 보겠습니다.
20 바리새파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물으니,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21 또 '보아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말할 수도 없다. 보아라,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하면 하늘나라에 갈 수 있습니까?’ 하고 묻는 것이 아니라 ‘언제 하나님의 나라가 옵니까?’ 하고 묻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오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 있다 저기에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 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느 공간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있기에, 가는 곳이 아니라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천국이나 지옥 둘 중의 한 곳으로 간다는 교리는 현대과학이나 합리성과도 충돌합니다. 초합리적인 영역이 아니라 비합리적인 생각입니다.
두 번째 견해에 대해서는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동의하지는 않지만, 사후에도 사람이 영혼의 형태로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주장하는 분들의 견해가 틀렸다고 주장할만한 자료나 논리를 제가 갖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견해, 그러니까 사람이 죽으면 그냥 소멸해서 자연의 일부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저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100% 동의는 아닙니다. 90% 정도의 동의라고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제 생각이 틀릴 가능성도 남겨두고 싶기 때문입니다. 제가 뭐라고 인류가 오래 동안 경험하고 축적해놓은 이론에 대해 감히 전면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그건 교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 이성과 경험은 강하게 소멸론으로 기울어져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법륜스님이라고, 워낙 유명한 스님이라 대부분 아실 것 같습니다. 그분이 강의한 동영상이 유튜브에 많이 올라와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변하시더군요. 차가 다닐 때, 움직이기도 하고, 빵빵 소리도 나고, 라이트가 번쩍거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차가 수명이 다 돼서 폐기처분하면 움직이는 성질은 어디로 가고 빵빵하는 소리는 어디로 가고 번쩍거리는 성질은 어디로 갔습니까, 라고 묻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건 원래 있는 게 아니라 조건이 맞아서 발생된 작용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조건이 사라지면, 그분 말씀으로는 인연이 사라지면 작용도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칼 구스타프 융이라고 들어보셨는지요? 분석심리학자인데, 집단무의식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심리학에 도입한 학자입니다. 사람이 의식의 세계에서만 사는 것은 아니고 무의식의 세계가 있어서, 과거의 경험이나 억눌러진 욕망 등이 그곳에 있다가 의식의 세계가 무의식의 세계를 조절하지 못하면, 무의식의 세계가 전면에 나타나서 그 사람의 삶을 지배하게 된다는 말은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융은 이 무의식을 개인무의식과 집단무의식으로 구분했습니다. 집단무의식에는 개인의 경험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선조들의 경험까지, 때로는 인류가 오래 전부터 경험한 자료까지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무속인들이 신이 들리면 돌아가신 분을 불러내서 똑같은 목소리로 굿을 요청한 사람을 혼내기도 하고,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고 지시도 하는 광경을 볼 수 있는데, 이런 현상은 우리나라의 무속문화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이 본문, 그러니까 신접한 여인이 사무엘을 불러내서 사울에게 야단을 치는 것도 이런 현상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옛날에는, 그러니까 100년 전까지만 해도 이런 현상을 합리적으로 해석하는 이론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융이 집단무의식 개념을 발표한 이후로 많은 학자들이 이런 신들림 현상을 집단무의식의 발현으로 이해합니다. 집단무의식의 세계에는 그 개인 뿐 아니라 그 개인을 있게 한 선조들의 경험세계까지 담고 있어서 누군가 그 무의식의 세계를 접촉하면 발현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컴퓨터에 여러 자료가 저장되어 있는데 내가 사용하고 저장한 자료도 있지만 다른 누군가가 만들고 사용한 자료도 얼마든지 접근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종교의 세계, 우리가 흔히 영적이라고 말하는 세계도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건 어디까지나 제 개인의 생각입니다. 궁금해 하시는 분들이 많아서 그냥 참고하실 수 있도록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한 가지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사후세계를 인정하는 종교와 사람들이 한결같이 주장하는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 없이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장 아름다운 곳에 간다는 것입니다. 오직 유일신종교만이 유일절대신을 믿지 않으면 아무리 선하게 살아도 구원받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데, 이 교리도 지금은 내외부적으로 많은 도전과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요즘 현대신학자들과 종교학자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이런 종교 저런 종교 참 많기도 하지만, 결국은 표층종교와 심층종교, 둘이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표층종교는 겉모습의 다름에 집착하기에 끊임없이 내가 옳으니 네가 옳으니 싸우지만, 심층으로 들어가면 깊은 곳에서는 서로 만나고 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