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캐나다 매트로 밴쿠버 지역 젊은 예술가들의 데뷔 갤러리로 유명한 더 슬라이스 오브 라이프 (The Slice of Life Gallery)에서 6월 22일에서 27일까지 'April Showers, Flowers Blooming with Dona senorita' 라는 제목으로 도나 박(Dona Park)의 개인전이 있었다.
['April Showers, Flowers Blooming with Dona senorita' 라는 제목으로 열린 도나 박(Dona Park)의 개인전 홍보 포스팅]
[이미지 출처 : 슬라이스오브라이프 갤러리 인스타그램 instagram.com/slicevancouver]
[더 슬라이스 오브 라이프 (The Slice of Life Gallery)에서 6월 22일에서 27일까지
April Showers, Flowers Blooming with Dona senorita 라는 제목으로 열린 도나 박(Dona Park)의 개인전]
[사진 출처: 통신원]
전시회에 가보고 싶다는 강렬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킨 계기가 있었는데, 도나 박의 인스타 계정에서 본 작가의 셀피 사진 때문이었다.
[도나 박의 전시 소개 글과 작품 소개 / 사진 출처: instagram.com/donasenorita]
도나 박의 얼굴에 붙여진 작은 그림들은 스티커나 판박이 같았다. 캐나다에서 한국과 가장 큰 온도 차를 느꼈던 문화로 꼽을 수 있는 것이 타투(Tatoo)의 대중적 인기였다. 도나 박의 얼굴에 가득한 메시지는 그녀가 겪고 있는 또는 오랫동안 겪었을 한국인과 캐나다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문신(:피부에 새겨져 지워지지 않는)과 다름 아니게 느껴졌다. 피부가 아닌 정신 속에 새겨진 두 개의 분리되지 않는 정체성일 것이다. 그녀의 디자인으로 만들어진 그림 메시지 조각들은 도나 박이 2~3년마다 방문했던 한국에서 경험한 여름을 반영한 것이라고 했다. 한국의 뜨거운 습도(후덥지근하여 끈적이는 느낌의)와 끈적끈적한 가족관계를 끊임없이 그리워하며 스티커 형태로 요약하기로 결심했다고 소개했다. 그늘에 들어오면 시원함을 느낄 수 있는 캐나다의 여름을 살았던 작가가 한국의 후덥지근한 여름을 그립다는 표현하는 것이 의아함과 동시에 더움과 한국인들의 가족 간의 끈적함을 연결시켜 스티커로 제작한 감각은 역시 탁월하구나 싶었다.
Q. 어려서부터 그림을 그렸나요? 어떻게 지금의 일러스트레이션 아티스트가 되었나요?
제가 걸음마를 배운 이후로, 어머니는 언니와 저를 데리고 합창 콘서트부터 영화, 미술 공예 박람회 등 박물관과 예술적인 모든 것들을 탐험하게 했습니다. 그런 어린 시절을 통해, 우리는 예술을 통해 자아를 표현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게 됐습니다. 아버지께서 작가였기 때문에 다른 작가들과 함께 일하시는 환경이었고, 저는 자연히 자라면서 창의적인 전문가들의 지도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저에게 예술가가 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배고픈 예술가"라는 고정관념과는 반대로 저는 운 좋게도 예술가 공동체와 전문가들에게 둘러싸여 성장했고, 예술적인 열정에 대한 추구가 실제 직업이 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의 예술가로서 자질은 아주 어릴 때 언니가 그린 그림을 따라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발현되었습니다. 제 내면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제2의 천성이 되었고, 어쩌면 학교 선생님들과 친구들에 의해 강화되었을 것입니다. 저는 학창 시절 내내 '예술가'로 불렸습니다. 고센 대학(Goshen College)에서는 역사와 미술을 전공했고, 영어를 부전공했습니다. 제가 미국 역사를 집중적으로 공부하던 그 시절, 저에게 예술은 학업으로부터의 피난처이자 휴식처가 되었습니다. 저는 제가 결국 로스쿨에 진학하거나, 역사 또는 국제 발전과 관련된 어떤 일을 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몇 가지 개인적인 난관을 겪은 후, 제가 어떤 직업을 선택하든, 여전히 예술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 더 분명해졌습니다.
Q. 학업을 마치고 캄보디아에서 봉사활동을 했지요? 어떻게 그런 결심을 하게 되었나요? 또 그 시간을 통해서 배우고 느낀 점이 있다면? 이 때의 경험이 성장하는데 어떤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나요?
2017년 졸업 후 2017년부터 2018년까지 캄보디아 프놈펜의 평화 단체인 여성평화인을 위한 자원봉사 프로그램 지원관으로 활동했으며 2020년까지 원격 근무를 계속했습니다. 예술가로서, 또 역사를 전공한 학생으로서, 저는 사회 정의 추구에도 헌신했습니다. 특히 인종을 주제로 말이죠. 특히 소외된 지역사회에 대한 국제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그룹인 <소셜 저스티스 클럽>의 리더가 되어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저는 그림 같은 대학 캠퍼스를 벗어난 환경에서 제 가치관을 실천하고, 제 관점이 평화 및 갈등 문제에 어떻게 하면 실제적으로 기여할 수 있을지, 스스로를 시험해 보고 싶었습니다. 또한 해외에서 공부하고 자원봉사를 해본 적이 있었던 저는 이제 갓 대학을 졸업한 사람으로서 제가 해당 국가의 언어를 쓰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 많은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또한 외국인으로서의 제 위치와 제가 짊어진 권력의 역할과 무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캄보디아에서 시간을 보낸 덕분에 제가 지금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다른 문화와 커뮤니티에 눈을 뜨게 됐습니다.
[2019년 캄보디아 Women Peace Makers에서 “Life Afloat' 활동 중인 도나박 / 사진 출처: donapark.com]
[2020년 CITI/SEEN Public Art Initiative, The Reach Museum 아보츠포드 비씨주 캐나다(Abbotsford, BC, Canada)]
[사진 출처: donapark.com]
제작영상 및 작가 인터뷰
Q. 벽화그리기 작업도 여러번 하셨지요? 벽화와 디지털 아트 상반된 구조의 작업을 병행하고 있는데요. 그 기획단계나 진행과정에서 어떤 점이 다른가요?
벽화의 경우, 이미지 크기를 100배 이상 조정해야 하지만 작업단계는 일반 그림과 매우 유사합니다. 어떤 유형의 일러스트레이션이든 마찬가지로, 제 작업은 디지털 스케치로 시작합니다. 그런 다음 투영이나 간단한 그리드 이용을 통해 실제 벽에 이를 전치합니다. 다만 이미지가 상당히 커지기 때문에 벽화 작업 시에는 수치가 왜곡되지 않도록 신경을 써야 합니다. 벽화 예술에는 육체적인 노동이 많이 들어가지만, 저는 이 작업도 동일하게 즐기는 마음으로 합니다. 물리적인 면에서 도전이 되지만, 예술 작품이 웅장하게 완성되면 꽤 만족스러워요.
[2020년 캄보디아 Mural for HK International School 벽화 작업 중인 도나박, / 사진 출처: donapark.com]
Q. 전시 “April showers, Flowers Blooming'의 기획은 어떻게 이루어졌나요?
이 전시회는 성장통에 대한 것입니다. 더 구체적으로는 '애도'였습니다. 이민의 트라우마로 인해 이민자들은 고통과 감정을 처리하는 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리고 너무 자주 이 고통을 미래 세대에 투사시킵니다. 그 순환은 계속됩니다. 제가 만든 작품을 통해 자신들의 경험을 확인함으로써 반성하고, 애도하고, 치유할 수 있길 원했고, 이 전시회가 이민자들, 특히 한국 이민자들에게 마음이 편안해지는 장소가 되길 원했습니다. 4월과 그 계절은 죽음을 상징하는데, 죽음은 곧 또 다른 탄생, 다음 세대의 시작점이라는 것을 꽃이 피어나는 모습으로 상징화했습니다. 그렇게 그 순환은 계속됩니다.
[April Showers, Flowers Blooming with Dona senorita 중에서 / 사진 출처: 통신원]
Q. 심청을 모티브로 한 <Vengeful Shimchong>은 매우 의미심장했습니다. 이야기 속에 심청에게 일어난 일이 우리가 사는 지금 현재에도 계속 일어나는 상징적 사건으로 본 것인가요? 작가님의 웹사이트에서 소개한 부분인 “정체성을 강요받는 사회적 압력'이라는 개념을 좀 더 설명해주세요.
<벤지풀 심청(복수심에 불타는 심청)>은 효도와 심청전에 대한 페미니스트적 반전입니다. 심청이 자기를 희생하는 딸의 역할을 해내는 대신, 원래 심청전에서처럼 행동하도록 만든 사회적 압력에 대해 저항했더라면 어땠을까요? 사회적으로, 한국은 성 역할이 뚜렷이 나눠진 가부장제 국가로 남아 있습니다. 심청전 같은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여성들이 유순함을 지키고 순종적으로 살며 유교적인 가치를 되새기기를 기대합니다. 심청이 요즘 세상에 태어난 여자였다면 어땠을지 현대적 시각으로 해석하면서 그 무고한 죽음의 아픔에 집중하고 싶었습니다. 거인이 되어 난기류를 일으키는 그녀의 거창한 행동은 그녀가 자기 자신의 보호자로서 권력을 되찾고, 보수적인 사회에서 젊은 여성들이 부닥치게 되는 억압을 벗어던지는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작품 'Vengeful Shimchong' / 이미지 출처: 도나박 인스타그램]
Q. 본인이 경험한 인종차별이나 아시안인 협오를 경험했나요? 만일 그랬다면 어떻게 지혜롭게 대처했습니까?
아시아인으로 자라면서, 그리고 미국과 캐나다의 백인 사회 속 이민자로서, 저는 인종 차별을 경험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저는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했음에도 불구하고 제가 아시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뜬금없이 "곤니치와"라든지 "칭총" 따위의 말을 던지는 사람도 간혹 있었습니다. 즉 모든 아시아인을 '기타 등등 중 하나' 또는 영구적인 외국인으로 분류하는 무지와 위험이 널리 퍼져있었다는 얘깁니다. 캐나다나 미국에 거주한 아시아 이민자들이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세대별로 그들은 '중국인'(구어체적으로)으로 분류되었고, 그런 시류 속에서 아시아 이민자들의 다양성과 역사는 묻혀버립니다.
COVID 기간 동안 밴쿠버에서 아시아 혐오 범죄는 717% (2012년에 12건이었던 것이 2020년에는 98건) 급증했고, 밴쿠버는 한마디로 아시아 혐오 범죄의 수도였습니다. 당신이 중국인이든 한국인이든 일본인이든 상관 없습니다. 저는 항상 "모든 아시아인들은 다 비슷하게 생겼다."는 말을 들어왔고, 그러한 발언은 무해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인종 폭력을 초래합니다. – 1982년 빈센트 친 살해(Killing of Vincent Chin)에 대해 읽어주세요. 여기서 논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전례들이 있고, 우리가 단순히 백인들과 가까이 산다고 해서 아시아인들이 '캐나다인'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으리라는 것은 알아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캐나다의 백인들 또한 서로가 서로에게 인종차별에 대한 경각심을 깨워주고 각자 소임을 다하는 데 있어 도우미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Asians in history' 그녀의 인스타 계정으로 방문해서 동영상으로 감사하길 추천한다. 굉장하다. 웃기지만 우습지 않은 작품이다.]
[이미지 출처: : instagram.com/donasenorita]
Q. 작품 “ Nuclear Family' 도 매우 흥미로운 주제였습니다. 오늘날 남북한이 여전히 휴전상태인채로 70년이 되었습니다. 이 작품을 통해서 북한을 바라보는 전세계 미디어에 대한 작가님의 생각을 조금 엿볼 수 있었다고 할까요? 북한을 보도하는 미디어에 대한 비판이었습니까? 여러 측면에서 일반 사람들이 간과하고 지나갈 수 있는 비판의식을 한 장면으로 실랄하게 보여준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을 통해서 작가님이 사회에 촉구하고자하는 토론과 촉구에 대해서 조금 더 설명해주십시오.
<뉴클리어 패밀리>는 신랄한 사회적 비판을 담고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널리 퍼져있는 북한에 대한 인식(그 중에서도 특히 미국의 관점에서 해석된 것)과 전쟁에 대한 선정적 묘사에 도전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북한은 역사상 6번의 핵실험을 하여 세계적으로 지탄 받았습니다만, 미국은 총 1032번의 핵실험으로 북한의 그것을 능가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작품은, 감상하는 이로 하여금 자신의 선입견에 의문을 제기하고 북한 (그리고 더 나아가 남한) 정치의 복잡한 현실을 심도있게 탐구하도록 초대합니다.
[작품 “ Nuclear Family' / 이미지 출처: 도나 박 인스타그램]
작품명으로 고른 '핵가족'이라는 단어에는 명백하게 이중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저는 이 작품을 통해 남북한의 현실과, 휴전 상태이기에 오히려 끊임없이 존재하는 긴장감의 다면적인 차원, 즉 한국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자 했습니다. 또한 국가간의 전쟁이 개인의 인생에 미치는 여파와 지역사회에 미치는 깊은 영향, 그리고 핵전쟁이 어떠한 결과를 초래할 것인가 하는 부분에 방점을 찍고자 했고, 감상자로 하여금 두려움(심리적 거부감)이나 선정성을 제거하고 전쟁의 실상에 대한 안목을 가질 것을 촉구하고 싶습니다. 전쟁을 찬양하는 것은 결국 전쟁의 폐해에 대한 둔감화와 전쟁의 결과를 삶 속에서 살아내야 하는 모든 이들의 비인간화라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Q. 작가님의 앞으로 하고 싶은 작업에 대한 이야기도 궁금합니다.
지난 몇 년간 제가 다뤄온 디지털 작업과는 대조적으로, 이제는 대규모 캔버스 작업을 하면서 점점 유화로 전환하고 싶습니다. 촉각적인 재료를 더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방향으로 진행할까 합니다. 배움에는 끝이 없는 것이기에 앞으로는 전통적 테크닉을 더 익혀서고 활용하면, 제가 지금 가진 역량을 더욱 향상시킬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Q. 미술적 재능을 가진 전세계 한국이 아닌 지역에서 나고 자란 후배들에게 아티스트가 되는 길에 대한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여러분의 목소리를 내세요. 시각적 창작물이든, 글이든, 음악이든, 계속해서 연습하고 표현하세요. 일관성과 실천이 관건입니다. 우리가 유럽식의 백인 중심적 세상에 속해 있기에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체계적인 역경은 있겠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더 열심히, 꾸준히, 작품을 통해 우리 자신을 드러내야 합니다.
도나 박은 1995년 한국에서 태어나 2000년 가족이 미국 버몬트로 이민을 갔고, 2002년에 캐나다 노스 밴쿠버로 이사해서 미국과 캐나다의 공립학교를 경험하고 성장했다. 어머니 백경심 씨는 성악을 전공했고, 아버지 박준형 씨는 『글로벌 에티켓을 알아야 비즈니스에 성공한다-북쏠레, 2006』, 『내 아이 창의력을 키우는 영어 글쓰기-웅진리더스북, 2008』, 『크로스컬처-바이북스, 2010』, 『분별: 대장간, 2017』과 『일상의 분별: 대한기독교서회, 2020』등의 저자이자, 2004년 캐나다의 아동 작가들과 함께 ‘어린이를 위한 창의적 글쓰기 사회(Creative Writing for Children Society)’기관을 설립했다.
도나 박의 전시회 오프닝에 참석하여 작품을 관람하고 다양한 관람객들 속에서 질문을 받는 모습을 뒤로 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캐나다에 나고 자라는 한국인 2세, 3세 가운데 예술적 재능과 창작 열정을 품은 젊은 작가를 어쩌면 도나 박이 대변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들었다.
내가 만난 도나 박은 역사와 미술과 영어를 전공하고, 음반을 녹음하여 발표하는 가수이기도 하다. 고등학교 벽과 배에 그림을 그리는 실천가이며 백인 사회 속 이민자로 경험한 인종 차별을 대담하게 예술 작품 속에 풍자와 유머로 녹여낼 수 있는 배짱과 용기의 소유자였다.
흔한 표현으로 예술가와 작가인 부모님의 DNA를 물려받은 데다가 지금까지의 길지 않은 여정에서 도나 박 작가의 크고 작은 실험들은 승어부(勝於父)의 길 위로 들어선 듯하다. 우리 시대의 젊은 실험가의 다음 행보가 몹시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