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
장학금 신청 거부
자신의 길을 가기로 한다.
새이 백화점 지하도 야채 파는 할머니
정주영 회장의 고향 출신
칸트는 장학금을 거부했다.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국가의 돈을 함부로 받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내 인생에도 칸트가 있다. 우리 동네 칸트는 나이다. 슈퍼 사장님께서 수십 년째 정확히 같은 시간에 내가 장을 봐서 뭐 하시는 사람인지 궁금했다고 물었다. 나도 처음 알았다. 내가 그런 종류의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장마철이다. 우리의 삶은 나아졌지만 행복은 너무 먼 당신이 되었다.
누우면 피부가 장판에 찐득찐득 달라붙었던 한여름의 깊이가 생각난다. 마치 바다 깊이 누워있는 감촉의 느낌이었다. 난 좌도 우도 아니다. 중도도 아니다. 보수도 급진도 아니다. 난 그냥 정도이다. 正 道 바를 정, 길 도이다. 난 그렇게 살아왔다. 모든 벌을 다 받아도, 옳은 길만 걸어가고 싶은 사람이다. 스스로의 도덕률마저 없다면 삶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언젠가는 꼭 그녀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롤 모델은 대전광역시 오류동 새이 백화점 지하도에서 야채 파는 할머니이다. 그녀의 집도 가게도 침실도 다 지하도이다. 그녀의 이름을 난 알지 못한다. 그러나 어쩌면 그녀는 대전의 유명 인사일지도 모른다. 그녀의 인생은 하나의 멋진 퍼포먼스였다. 그녀는 율곡 이이나 칸트만큼이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동사무소에서 직원들이 나와서 지하도에서 먹고 자는 할머니께
"어르신 나라에서 집도 주고 밥도 줍니다. 길에서 주무시지 않으셔도 돼요."
수시로 말려도 그녀는 지하도가 울릴 만큼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사지가 멀쩡한데 왜 내가 나랏돈을 축내!!"
이렇게 멋진 그녀를 난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그녀는 그 당시 90살이 이미 훌쩍 넘었으며 감기 기운이나 몸이 안 좋은 날에는 찜질방에 가는 게 전부였다. 위대한 정주영 회장과 모임을 했으며 평양여고 출신의 엘리트였다. 특유의 사투리는 세고 강하지만 놀라운 기억력은 상상을 초월했으며 어느 누구의 말도 통하지 않았다.
지금 그녀는 어디에 있을까? 나처럼 세상을 버리고 잠적했을까? 마더 테레사보다 더 멋진 그녀의 말은 다 인생의 명언이었으며 무엇보다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난 그녀의 배포를 사랑한다. 신념의 여인이다. 길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단잠을 잘 수 있는 자가 얼마나 될까?
자식들도 다 잘 키웠고 나처럼 실패한 인생도 아니었다. 수십 명의 소년 소녀 가장들을 도와주었다. 명절이나 크리스마스에 케이크를 슬며시 놓고 오면 기막히게 기억하고 반드시 갚았다. 축복의 말도 잊지 않았고 몰래 모자 쓰고 지나가도 바로잡았다. 1996년에 설립된 대전 오류동 새이백화점과 그녀도 같이 사라졌다. 그리고 나는 나의 삶을 오롯이 잃어 버렸다.
" 온이야! 너래 복받을 기야!"
그녀의 예언도 축복도 빗나간 화살이지만 난 그녀의 마음이 진심이란 걸 알고 있다. 그녀 특유의 평양 사투리가 그리워지는 밤이다. 난 충분히 오래 살았지만 그녀처럼 근사하게 살지는 못했다. 돈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자 얼마나 될까?
오늘도 술 마시고 새벽 5시에 자는 나름대로의 미라클 모닝이다. 내 영혼이 반딧불이 되어 다시 돌아온다면 꿈에서라도 그녀처럼 당당하게 살고 싶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공부가 되는 새벽, 진정한 학문이란 삶에 대한 바른 이해이다.
코로나 372번 참회하는 마음으로(?) 승정원 기록처럼 올립니다. 나를 위한 피의 고백서! 삶에서 못다한 말들, 그리고 그 누구도 예견하지 못했던 지나간 시대의 비극인 <코로나 일지>. 한번 피해자는 영원한 피해자입니다. 누군가는 기록하고 기억해야할 <상실의 아픔>을 열심히 쓰고 있습니다. 좋은 이웃이 있어서 감사합니다. 너무나 망해 버린 삶, 누군가에겐 희망이길 바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