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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신 양준혁
양준혁(梁埈赫, 음력 1969년 5월 26일/양력 1969년 7월 10일 ~ )은 대한민국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SBS와 SBS ESPN의 야구 해설가이다. 타격 폼이 마치 만세를 부르는 것과 같아서 붙여진 ‘만세 타법’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프로 야구 선수 시절에는 삼성 라이온즈의 대표적인 프랜차이즈 스타로 군림했고 ‘양신’(梁神)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야구 시작 ~ 고등학교 시절
양준혁은 양일환 삼성 라이온즈 2군 투수 코치가 그의 사촌형이고 삼촌 또한 노히트 노런을 기록한 투수 출신이었다. 어린 시절 사촌 형과 삼촌이 야구를 하는 것을 보면서 자란 그는 야구에 흥미를 느껴 자신도 야구를 하겠다고 부모에게 말했지만,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았던 이유로 부모는 처음에 양준혁이 야구를 하는 것을 반대했다. 하지만 양준혁의 야구에 대한 열정이 강해, 결국 가족들에게 허락을 받고 남도초등학교 4학년 시절부터 야구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투수였던 양준혁은 왼손잡이에 공도 빠른 편이었으나 투수를 하면 팔이 아파서 싫어했다. 경운중학교를 거친 그는 대구상고 때 타자로 전향했다. 그는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이미 학교의 4번 타자를 맡았으며, 당시에는 몸이 마르고 힘이 없어 홈런이 많지는 않았으나 지금과 달리 도루를 잘 하는 편이었고 타율도 높았다.
영남대학교 시절
양준혁은 1988년 당시 만 19세로 프로 데뷔가 가능한 나이였으나 스스로 영남대 입학의 길을 택했다. 그러한 선택을 한 이유는 당시 박영길 삼성 라이온즈 감독이 그에게 대학 진학을 권유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서울특별시 소재 대학에 얼마든지 들어갈 수 있었지만 삼성에서의 데뷔를 위해 영남대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대학 선수 시절 동안 오늘날 프로에서의 활약만큼이나 많은 기록과 수상 경력을 쌓았다. 1988년에 있었던 대학 선수권 대회에서 5할을 훨씬 넘은 5할 4푼 5리의 타율을 기록해 대학 선수권 타격상을 받았고, 이후 1989년에는 대학 추계 리그에서 도루상 또한 수상했다.
1988년과 1989년, 아마추어 야구에서 실력을 인정받게 된 양준혁은 생애 처음으로 국가 대표로 발탁되어 제2회 한·미 선수권 대회에 출전하게 된다.또한 푸에르토리코에서 개최되는 제 9회 대륙간컵에도 국가대표로 출전했다. 두 번의 국가대표팀 활동에서 그는 좋은 활약을 보였으나 아쉽게도 팀은 우승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1989년 대만에서 열린 제2회 IBA회장배 대회에 다시 국가 대표로 출전하여 우리나라가 우승하면서, 국가대표에 발탁된 이래 처음으로 우승을 경험하게 되었다. 1990년에는 전국대학 춘계리그에 출전하여 추계 리그에 이어 다시 한 번 도루상을 수상하였고, 9월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아시아 경기 대회에도 국가 대표로 출전했다.
1991년 영남대학교를 졸업한 그는 신인 드래프트에서 각 팀들의 지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그는 신인이었지만 이미 국가 대표 클린업 트리오 중 한 명이었을 정도로 발군의 기량을 보여주고 있었기에 모든 구단이 탐내는 선수였다. 물론 그는 삼성 이외의 팀에는 입단할 생각이 없던 터였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타력에 비해 투수력이 약했던 삼성은 당시 '만딩고' 김상엽 외에는 믿을 만한 투수가 없었으며, 이 때문에 140km 대의 빠른 구속을 가진 좌완 신인 김태한도 절실하게 필요했다. 그러나 연고 구단이 1차 지명할 수 있는 선수는 딱 한 명이라는 것이 문제였는데, 이에 삼성이 묘수를 냈다. 삼성은 1991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먼저 김태한을 연고 지명 케이스인 1차 지명으로 확보한 뒤 이듬해 드래프트에서는 양준혁을 1차 지명해 사자 유니폼을 입혔던 것이다. 이것은 2차 지명의 시효가 1년이라는 제도의 허점을 파고든 것으로, 1991년 당시 삼성은 일단 김태한을 1차 지명한 뒤 양준혁과는 모종의 합의 하에 상무 입대를 선언하게 한 것이었다. 쌍방울이 양준혁을 2차 지명했으나 이미 그의 상무 입대를 막을 수는 없었다. 결국 삼성은 방위 복무로 전환하게 되어 1993년 시즌 신인 드래프트에 다시 나온 양준혁을 1차 지명하여 거둬들였다. 이 때문에 몇몇 구단들이 거세게 반발했고, 이후 KBO는 2차 지명의 효력을 1년에서 3년으로 연장했다.
한편 1991년 11월 1992년 신인 드래프트가 있기 전, 양준혁은 제25회 대통령기에 출전해 타점상을 받았고, 또한 제 41회 백호기에 출전하여 도루상을 차지해 대학 시절 도루상을 3번이나 차지하는 기록을 세웠다.
상무 시절
삼성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진해서 상무 피닉스 야구단에 입대한 그는 병역 결정을 위한 신체검사 당시 상근 예비역으로 판정을 받아 1년간 현역병 생활을 한 후 방위병으로 전환해 복무하였다. 상무 시절 대통령배 추계 실업리그에 나가 홈런왕을 차지하게 되었고, 그 외에 여러 경기에 출전하여 좋은 기록을 세우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 전까지는 몸이 말랐으나 상무 때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면서 프로 첫 해까지 82kg로 몸무게가 불어났다. 제대 후 쌍방울 레이더스의 2차 지명권이 1년이었기 때문에 자동 말소되었고, 약속대로 1차 지명을 다시 받아 연고 팀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하게 되었다.
상무 피닉스 야구단의 박치왕 감독은 양준혁과 상무 동기이다.
드래프트 파동
양준혁이 쌍방울의 지명을 거부하며 상무에 자진 입대를 택했을 때 그와 삼성 사이의 밀약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당시 쌍방울의 감독이었던 김인식 감독 및 대부분의 야구 관계자들이 예상하고 있었다. 양준혁이 1993년 제대한 뒤 결국 삼성에 입단하게 되자, 제도의 허점을 보완하기 위해 KBO는 2차 지명의 보호권을 3년으로 늘렸다.(현재는 2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성과 양준혁 간의 밀약의 존재는 정황상의 심증만 있을 뿐 물증이 없었으므로 정작 당시에는 이 사건의 파장이 그다지 크지 않았다. 그러나 5년 후 양준혁이 삼성에서 해태로 트레이드 되었을 때, 오랜 잠적 끝에 가진 인터뷰에서 과거 트레이드 당시 있었던 삼성과의 모종의 거래를 폭로하면서 문제가 크게 불거졌다. 그는 1991년 삼성이 일단 급한 투수를 보강하기 위해 김태한을 1차 지명한 후, 자신을 1차 지명하기 위해 군에 입대하도록 권유했었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당시 2차 1순위권자였던 OB에서 백지 수표와 아파트를 제의했지만 거절했으며, 2차 2순위권자였던 쌍방울이 지명하였지만, 삼성의 권유대로 상무에 입대하고 난 뒤 월급조로 삼성으로부터 매달 100만 원씩을 받았다는 사실도 함께 밝혔다.
이러한 일이 있은 후 해태의 김응룡 감독은 "양준혁을 회유하여 팀에 입단하게 한 삼성의 행위를 문제 삼기 위해 구단이 직접 행동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당시 양준혁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던 해태는 '양준혁의 삼성 입단은 명백한 규약 위반이다'라며 문제를 제기하였고, 이에 KBO는 삼성에 1993년 양준혁의 입단경위서 제출을 요구했다.
삼성은 이러한 의혹에 대해 공식적인 입장을 밝히지 않다가 "오래된 일이라 자세히 생각나지 않고, 경리 장부에 매월 100만 원의 지출 내역이 있는지 확실치 않다. 일단 확인 작업을 거치겠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이후 양준혁이 해태로의 이적을 동의하게 되면서 이 사건에 대한 여론의 관심도 잠잠해졌고, 점차 대중의 기억 속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신인 시절
군 복무를 마친 양준혁은 삼성이 1993년 1차 지명함으로써 드디어 자신이 오래전부터 원했던 구단에 입단할 수 있게 되었고, 역대 타자 최고액인 계약금 1억 100만 원, 연봉 1,800만 원에 계약을 체결하였다. 1993년 4월 10일, 그는 자신의 프로 첫 경기 쌍방울과의 경기에서 임창식으로부터 첫 안타를 뽑으며, 5타수 5안타를 치는 무서운 활약을 선보였고, 그 후로도 계속 놀라운 활약을 펼치며 신인임에도 팀의 3번 타자로 꾸준히 출전하였다.[22] 당시 여러 전문가들은 양준혁, 김성래, 강기웅, 이종두가 있는 삼성의 중심 타선을 문제로 지적하고, 약체로 취급하게 하였으나 신인 양준혁의 대활약과 부상에서 돌아온 4번 타자 김성래 및 이종두의 활약으로 팀은 준우승까지 하였다.
MVP 경쟁
양준혁은 데뷔 첫 해 MVP 경쟁을 하게 됐는데, 그 경쟁자는 같은 팀 선배인 김성래였다. 정규 시즌에서 후반기로 갈수록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타율면에서는 양준혁이 0.341로 0.300인 김성래를 완전히 압도했다. 득점에서도 양준혁이 82점으로 64점인 김성래를 앞서갔고, 양준혁은 홈런에서 밀렸으나 타점에서는 1점 차이로 뒤진 채 시즌을 마감했다. 김성래가 아무리 홈런 기록이 양준혁보다 앞서간다고 해도 만약 타점면에서 양준혁한테 뒤지면 MVP는 같은 팀 후배인 양준혁에게 넘어갈 수 있었다.
MVP 경쟁에서 삼성 구단은 MVP 김성래, 최우수 신인 선수를 양준혁으로 정했으며, 우용득 감독은 남은 두 경기에서 양준혁과 김성래를 모두 내보내지 않았고, MVP 투표에서도 홈런왕과 타점왕인 김성래가 압도적인 표를 받고, 득점면에서 김성래에게 앞서가고, 수위 타자였던 양준혁은 단 2표만 받고 MVP는 김성래가 되었다. 그래도, 한 팀에서 MVP와 신인왕을 동시에 배출시킨 경우는 1985년 해태 타이거즈의 김성한(MVP)과 이순철(신인왕)에 이어 2번째였다. 양준혁은 삼성 라이온즈 최초의 신인왕이 되었다.
20-20클럽
1993년 이후로 양준혁은 1994 시즌에는 타점왕을 기록하고, 1995 시즌에는 특별한 성적을 보이지 못했다. 1996 시즌은 최초로 전 경기 출장과 3할 4푼 6리로 수위 타자가 되었고, 28홈런과 23도루[24]로 양준혁은 20-20을 기록했고, 20-20을 기록한 날짜는 1996년 8월 15일이다. 그는 프로 데뷔 첫 20-20 클럽에 가입하게 되었고, 또 20-20 클럽에 가입한 양준혁은 팀 사상 최초로 20-20을 기록하게 되었다. 2007 시즌에는 역대 최고령 20-20 클럽에 가입하였다.
양준혁은 20-20 을 4번 달성해 박재홍과 함께 최다 20-20 달성 선수로 기록되어 있다.
MVP 재도전
1996년에 양준혁은 20-20클럽을 성공해 MVP에 다시 도전하게 된다. 타율 3할 4푼 6리와 28홈런, 또 23도루를 기록해 MVP에 뽑힐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삼성은 팀 사상 최악의 성적인 6위와 첫 30-30을 기록한 박재홍, 다승왕과 최고의 마무리였던 구대성으로 인해서 양준혁은 MVP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예전 MVP를 뽑을 때나 지금에도 MVP를 뽑을 때 팀 성적이 나쁘면 여전히 MVP로 뽑히기 힘들어진다. 팀 성적이 나쁜 양준혁은 삼성이 만약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면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늘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1996년 삼성은 6위라는 성적을 기록했으며, 첫 30-30을 기록한 신인 박재홍, 다승왕과 최고의 마무리였던 구대성이 문제점이 되어서 MVP 투표에서 양준혁은 최고 수위 타자와 최다 안타, 장타율 1위를 기록하고도 다시 도전한 MVP에서 탈락하고 프로에 데뷔한 후 처음으로 받는 골든 글러브에 만족해야만 했다.
해태로 트레이드
1999년 양준혁은 삼성에서 해태로 전격 트레이드되었다. 이 트레이드는 선수협이 만들어지는 데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당시 유망주였던 곽채진, 황두성과 함께 해태 타이거즈 투수 임창용을 상대로 현금 트레이드되었다. 당시 삼성 라이온즈의 판단은 양준혁과의 연봉 협상을 피하기 위해 빅 트레이드를 성사시킴으로써 외국인 선수로 그 공백을 메우려는 것이었다. 양준혁은 이 트레이드 이후 열흘 이상 잠적하였다. 다시 기자 회견을 열어 트레이드를 전면 거부한다는 의견을 밝히고 미국의 마이너 리그에서 뛰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이 의견대로 미국으로 진출한다면 양준혁은 해태가 임의탈퇴 처리를 하면 한·미 선수협정 7항에 따라 미국에 진출을 할 수 없게 됨으로써 양준혁은 마이너 리그 진출이 아닌 1년간 미국 연수를 한다고 말을 하며, 트레이드 거부 의사를 밝혔다.
해태에서 양준혁 문제가 골칫거리가 되자 갑작스럽게 양준혁이 현대로 재트레이드된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고, 삼성은 양준혁을 "재트레이드를 하지 말라"라고 요청하자 해태는 재트레이드가 없음을 말했다. 양준혁이 계속해서 해태에 돌아오지 않자, 해태는 "다른 선택은 있을 수 없다"라는 의견을 밝혔고, 양준혁이 계속해서 자신의 주장인 미국행을 굽히지 못한다면 임의탈퇴 공시 신청을 할 예정이었다.
이렇게 끝날 줄 몰랐던 양준혁의 트레이드 파동은 그가 계속 자기 뜻을 굽히지 않고 미국행 연수를 하려 한 양준혁이 극적으로 해태에 가게 된 이유는 프로 야구에서 국내에서 팀을 옮기려면 10년을, 해외로 진출하려면 7년을 뛰어야 갈 수 있게 만든 자유 계약 선수 제도의 도입과 함께 당시 해태 타이거즈 감독 김응룡의 말에 의해 양준혁은 김응룡 감독에게 사과하고, 양준혁은 전화 통화 뒤 4일 만에 해태에 이적하겠다고 밝혀 트레이드 파동이 일단락되었다.
트레이드 파동이 일단락된 후 양준혁은 1999년 1월 8일, 해태에 첫 방문을 한 뒤, 팀 훈련에 합류하면서 김응룡 감독을 만나 해태 V10 결의를 했고, 해태의 선수들과 우승을 위해 전지 훈련을 떠난 뒤 양준혁은 개인적으로 특별 타격 훈련을 자청하였다.
라이벌 팀으로 트레이드된 이후에도 대구 팬들은 경기에 나선 양준혁을 반갑게 맞아 주었고, 이후 그가 FA를 선언하였을 때 김응룡 감독이 양준혁의 삼성 라이온즈 복귀를 도왔다.
선수협 결성
해태로 트레이드 된 이후 1년 뒤, 양준혁은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이하 선수협)를 결성하게 되었다. 그는 선수협의 설립 목적이 "국내 프로 야구 선수들의 권익을 옹호하고 대외 홍보를 강화하며 야구의 건전한 보급과 지원을 통해 장기적으로 한국 프로 야구를 국제 수준으로 발전시키는 데 있다"라고 밝히며 선수협은 노동조합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그는 옷을 벗을 각오까지 하고 선수협 결성에 나섰다고 밝히면서 선수들의 권익과 복지차원에서 선수협 결성을 추진한다고 말했다.[40] 주변의 우려와 소속 구단측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그가 선수협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히자, 해태는 양준혁이 단체행동 사전 고지 임무를 어겼기 때문에 임의 탈퇴도 불사하겠다는 강경입장을 표명했다. 이에 따라 은퇴까지 불사하고 선수협을 결성을 달성하려는 양준혁과 임의탈퇴라는 최후의 카드까지 꺼내든 소속 구단은 정면 대립의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다른 선수들과 합심하여 투쟁을 계속한 끝에 결국 2000년 1월 22일 한국 프로 야구 선수협회가 공식 출범하게 되었으며, 초대 회장은 송진우, 감사는 정수근, 박충식이 맡게 되었다. 선수협 출범 후 하루 뒤 KBO는 양준혁의 영구 제명을 추진하였는데, 이러한 KBO의 움직임에 이번에는 시민 단체가 선수협을 지지하며 KBO를 압박하기 시작했고, 양준혁을 비롯한 여러 선수협 선수들은 선수협이 공식적으로 인정받을 때까지 전지훈련에 불참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결국 선수협 문제는 2000 시즌 시범 경기 개막을 하루 앞둔 2000년 3월 10일 열린 선수협과 KBO의 협상에서, '선수협은 올시즌 종료 후 결성하고 제도개선위원회는 4월 3일 발족시킨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합의사항이 도출되면서 극적으로 타결되었다.
그러나 2002년 삼성으로 복귀 후 선수협이 2009년 선수노조로 전환을 시도하자 양준혁은 노조설립 안건에 대한 투표 자체를 거부하고 삼성 선수들을 인솔해 퇴장했다
LG로 트레이드
양준혁은 선수협 파동 이후 얼마 가지 않아 LG로 선수협 여파로 인해 다시 한 번 트레이드되었다. 당시 그는 자신의 소속 팀이었던 해태의 감독 김응룡이 양준혁을 "선수 + 현금" 방식으로 트레이드 하겠다는 뜻을 말하자, 직접 LG 권혁철 사장이 "적당한 선이라면 얼마든지 트레이드할 의사가 있다." 라고 영입 의사를 밝혔고, 또 당시 신생 팀이었던 SK가 양준혁을 사겠다고 선언했다. 현대도 여러 문제로 인해 양준혁을 사겠다는 입장이었지만, 선수협이 걸림돌으로 작용하여 양준혁 영입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해태가 '10승 투수를 내주어야 트레이드하겠다' 는 말에 SK와 LG는 서로 난색을 표했고, 결국엔 LG가 전년도에 10승을 거두었던 투수 손혁에 현금 5억 원을 얹어 현금 트레이드하여 양준혁을 영입하게 되었다. 당시 LG와 함께 양준혁 영입 쟁탈전을 벌이던 SK는 LG와 달리 해태와의 트레이드 협상이 LG처럼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해태의 트레이드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해 뒤처지게 되었다. 그는 이전에 있었던, 삼성이 해태로 자신을 트레이드한 사건과 달리 LG로 가는 이 트레이드에 불만이 전혀 없음을 밝혔다.
반면 양준혁의 현금 트레이드 상대였던 손혁은 이적을 거부하고 은퇴 의사를 굽히지 않게 되었고, 해태 구단은 손혁을 2000년 4월 16일에 임의탈퇴 신청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KBO 이상국 사무총장이 "손혁이 일본에서 돌아오면 직접 만나보고 최종 결정을 내리자."고 제안한 것을 받아들이며 해태 구단은 임의탈퇴 선수로 공시하지 않았다. 후에 손혁은 팀에 돌아오지만, 이렇다 할 활약을 해 보지 못하고 2002년 시즌 후 진필중을 상대로 김창희와 함께 두산 베어스에 트레이드된 후 2004년에 은퇴했다.
LG로 트레이드된 후 양준혁의 등번호를 정하기 위해 LG 구단은 많은 고민을 하였는데, 그 이유는 양준혁이 줄곧 달았던 10번을 내야수 안상준이 이미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상준의 사기를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묘안을 생각하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1번과 38번 중 하나를 생각했다고 한다. 당시 LG 이광은 감독은 "38광땡"이라 행운이 올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38번을 추천했다고 한다. 그러나 양준혁은 "선수의 권익을 위해 싸운 사람으로서 후배(안상준)의 등번호를 뺏기는 싫었다."고 고백하면서, 자신에게 생소했던 57번을 등번호로 달았다. 하지만 2001 시즌이 되면서 다시 원래의 등번호인 10번을 사용하게 되었다.
LG 이적 첫해에는 한때 타율이 0.235까지 떨어지는 부진을 보이며 LG 이광은 감독의 애를 태우기도 했지만 이후 타격 페이스가 살아나기 시작하며 3할이 넘는 타율을 유지하여 시즌을 마칠 수 있었고, 이듬해에도 본인의 최고 타율인 0.355 로 타격왕에 등극하며 FA 자격이 될 수 있는 시즌을 좋은 성적으로 마치면서 후일 LG와의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게 된다.
삼성으로의 귀환
양준혁은 FA 자격이 10년에서 9년으로 줄어들면서 2001년 말 FA 선언을 할 수 있게 되었고, LG 팀 훈련 도중 FA를 선언하기 위해 따로 귀국하였다.[58][59] 양준혁은 FA를 신청하기 위해 FA 신청서를 구단에 공식적으로 제출하였고, 제일 먼저 자신의 소속팀 LG와 협상을 하게 되었다. 양준혁은 LG에게 4년 연봉 16억 + 계약금 20억 원을 요구했고, LG 최종준 단장은 양준혁과의 3차 협상에서 협상 불가능이라고 뜻을 밝히며, 공식적으로 협상을 포기하였다. 양준혁은 LG와 협상이 결렬된 뒤 36억 원을 포기하며 다른 구단과 FA 협상할 준비를 하였으나 그의 여전히 높은 몸값으로 인해 선뜻 그를 원하는 구단은 나타나지 않았다. FA 선수 중 유일하게 계약을 하지 못한 선수로 남은 양준혁은 한동안 방황하는 듯했으나 다행히 당시 삼성 감독으로 있던 김응룡의 부름을 받으며 좋은 조건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한편, 기아가 거포 김기태를 놓치자 뒤늦게 양준혁을 영입하겠다는 의사를 보이기도 했으나 결국 양준혁의 몸값에 대한 부담과 팀 컬러에 맞지 않는다는 코칭 스태프의 의견으로 양준혁 영입은 확실히 넘어가게 되었다. 삼성 구단측은 애초에 양준혁이 FA로 나올 때부터 '양준혁 영입은 없다.'라는 입장을 고수했었다. 그 이유는 양준혁의 몸값과 삼성의 톱타자인 마해영, 이승엽과의 포지션 중복, 잇따른 FA 영입 실패로 인해 압박이 컸다. 그러나 삼성은 감독이었던 김응룡 감독의 요구와 양준혁의 입지가 크게 좁아지자 삼성은 양준혁 영입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삼성은 양준혁 영입에 관한 긴급회의를 열게 되었고, 모든 포지션을 수비해 본 양준혁을 외야수에 두면 포지션 중복이 없다는 의견이 나왔고, 김기태 수준으로 양준혁의 영입을 검토해 보겠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후 양준혁은 삼성과의 첫 협상 전, 27억 원이라는 입단 조건에 합의한 것으로 밝혀졌고, 첫 협상은 27억 원에 옵션 부문만 추후 협의하기 위해 협상을 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첫 협상은 계약기간과 계약금은 서로 비슷했지만, 연봉·옵션 부분에서 삼성은 마이너스 옵션을, 양준혁은 플러스 옵션을 제시하여 서로 의견이 달라지기는 했으나, '현재 밝힌 부분이 최종은 아니다.' 라고 말해 사실상 합의를 이뤘음을 암시했다. 이후 2차 협상에서 삼성과 양준혁은 2차 협상 전, 사전 조율을 통해 의견을 좁혔고 최종적으로는 23억 2,000만 원에서 마이너스 옵션 6억원, 플러스 옵션 4억 원으로 삼성에 입단하게 되었다. 양준혁은 이 협상에 협의한 이유가 옵션을 모두 플러스 옵션으로 끝낸다면 27억 원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삼성이 자신이 원하는 금액을 제시해 구단이 자신의 자존심을 세워 줬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계약에 협상했다고 밝혔다.
삼성에 입단한 양준혁은 이후 신문 기사에서 미국 메이저 리그 뉴욕 메츠에 입단할 수도 있었다고 보도했다. 이미 뉴욕 메츠에서는 바비 밸런타인 감독의 사인까지 난 상태에서 한국 프로 야구의 FA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뉴욕 메츠의 오마르 미나야 국제 스카우트 부사장은 양준혁과 직접 접촉까지 한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LG와 협상이 결렬된 뒤, 양준혁이 '국내 구단 중 아무런 곳도 불러주지 않는다면 해외로 진출 하겠다.'라고 말한 것도 뉴욕 메츠를 염두에 뒀기 때문에 이 같은 발언을 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밝혀졌다. 뉴욕 메츠는 여러 구단들이 선수협에 깊은 관련이 있는 양준혁을 아무도 부르지 않는다는 내용까지 파악하고 있었고, 계속해서 아무 구단도 영입하려 하지 않자 상황을 지켜 본 뒤 양준혁에 대한 영입 협상을 하려고 했지만, 삼성의 김응룡 감독이 영입 의사를 보이면서 4년의 계약에 성공했으며, 그에 따라 뉴욕 메츠의 양준혁 영입은 실패로 돌아갔다. (지금도 양준혁은 김응룡 사장을 은인이라고 존경할 정도로 김응룡 당시 감독으로부터 선수 생활 구제를 받았다) 당시 뉴욕 메츠가 양준혁에게 제시하려고 했던 금액은 계약 기간 2년에 약간의 계약금과 연봉 120만 달러(당시 15억 6천만원)라는 수준으로 조건을 제시하려고 했다. 뉴욕 메츠는 양준혁을 1루수, 혹은 외야수로 쓰려고 했는데 기존 1루수인 토드 질을 트레이드 하면, 양준혁이 빈 자리를 메꾸어 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양준혁을 영입하려고 했다. 또한 뉴욕 메츠는 양준혁을 이치로와 비교해서 수비는 떨어지지만 타격은 비슷한 수준이라는 평가까지 내린 상태였다. 만약 국내 구단들이 양준혁을 계속 외면했다면, 양준혁은 메이저 리그로 떠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양준혁이 기자에게 공개했던 뉴욕 메츠 입단제안서는 여러가지 면에서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2001년 당시 외국구단에서 KBO에 양준혁에 대한 신분조회 요청이 없었고, 양준혁 본인이 공개했던 뉴욕 메츠 입단제안서 외에는 다른 공식적인 확인이나 다른 야구인의 증언이 나오지 않았다. 제안서에 사용되었던 용어에도 한국식영어가 그대로 사용되었고, 메이저리그 야구에서는 사용되지 않고 한국 프로야구에서만 사용하는 용어들이 사용되는 등 여러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첫 우승
2002 시즌 친정팀 삼성에 돌아온 후 10년 연속 3할에 도전했었으나, 갑작스런 부진 슬럼프에 빠지게 되었다. 그는 2002년에 10년 연속 3할 타율을 기록 할 수 있었지만 2할 7푼대의 타율로 10년 연속 3할은 실패하고 말았다. 그는 "훈련 도중 FA를 위해 귀국해서, 훈련 부족이 문제가 되어 2002년에 3할의 타율을 기록하지 못하고 부진에 빠진 것"이라는 기사가 나왔다. 양준혁은 시즌 전 삼성의 훈련 끝에 자체 청백전과 시범 경기에서 대활약을 보여주면서 한때 한국 야구 위원회에서 설문 조사를 했을 때 가장 가능성 있었던 기록이 양준혁의 10년 연속 3할이라고 나왔었다. 또한 한국 프로 야구가 열리기 전 시범 경기에서 대활약으로 인해 여러 기사에서 극찬을 받았고, 기사에서 이종범, 이병규와 함께 타격 부문 후보로 뽑히기도 했다. 양준혁은 한국 프로 야구가 개막된 뒤 새로 만든 '탈수기 타법'으로 4할 1푼 7리라는 타율을 기록했으나 얼마 가지 못해 2할 7푼 8리로 추락하였고, 심지어 그의 타율은 개막전이 열린 후 5월 초부터 더욱 급격히 하향곡선을 보였고, 2할 5푼대를 기록한 후 계속해서 타율은 상승하지 못하였다.
양준혁은 6월에 5월부터 계속 지속되었던 타격 부진이 잘 맞은 타구가 계속해서 야수 정면으로 가고, 타격 부진이 지속되자 "작년에는 잘 맞은 타구가 거의 안타가 되었는데 올해는 이상하다. 자꾸 정면으로만 간다."라고 밝힌 적이 있었다. 그는 타격 부진이 일시적인 불운으로 생각되었으나 계속해서 타격 부진이 이어지게 되면서 타격 자세에 대한 의문이 들어 계속해서 타격폼을 바꾸었지만 역시 타격 부진은 지속되어 나아지지가 않았고, 타격감이 좋을 때는 타격 훈련을 통해 스윙을 점검하지만 타격감이 좋지 않을 때는 각종 자세를 시험해 보는 문제가 일어나기까지 했다. 계속되는 타격 부진에 이어 심지어 양준혁에게 타격 부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부담감, 스트레스 피로감으로 인해서 더욱더 타격 부진에 빠져 벗어나오기 힘들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전반기가 끝날 즈음에 양준혁은 다시 타격감이 좋아지게 되었으나 다시 후반기가 열린 뒤, 다시 타율이 2할 5푼 6리를 기록하는 등 타격감이 나빠지게 되었고, 결국엔 10년 연속 3할 타율을 포기하고 팀의 정규 시즌 우승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인터뷰를 통해 말했다. 10년 연속 3할에는 실패했으나 세 자릿수 안타는 간신히 성공하게 되었고 팀은 후반기에 연승 행진과 여러 선수들의 활약으로 인해 2002년에도 정규 시즌 우승을 하여 한국 시리즈에 진출하게 되었다. 양준혁은 한국 시리즈에서 2002년에 부진했던 것을 다시 좋은 활약을 보여 명예 회복을 다짐했고, 경산 볼파크에서 자청한 특별 타격 훈련을 받았다.
한국 시리즈가 시작된 후 1차전에서 그는 우익선상 2루타를 치고, 다음 후속 타자 진갑용의 우익수 플라이 후 전력 질주하여 3루까지 태그업, 과감한 허슬 플레이로 기사가 나왔고, 2차전에서는 선발 엔트리에서 제외가 되었지만 이후 3차전에서 팀이 승리를 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4차전까지 한국 시리즈에서 타율 4할 2푼 9리로 우승과 명예 회복을 앞두고 있었으나, 팀의 4·5차전 연패로 인해서 우승을 미뤘지만 결국 6차전에서 역전, 우승하여 그는 야구를 시작한 뒤 아마추어 시절에도 하지 못했던 우승을 프로에서 처음으로 맛보게 되었다.
우승 후 양준혁은 삼성 라이온즈와 마이너스 옵션과 플러스 옵션 식으로 계약했었으나, 2002년에 경기 출전, 타율면에서는 마이너스 옵션을 간신히 면할 수 있었지만 타점에서 10타점이 부족하여 팀에게 1억을 반납해야 했다. 그러나 삼성 라이온즈가 21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 시리즈 우승을 제패하면서 30억 원을 얻었기 때문에 일부에서는 양준혁의 반납 금액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양준혁은 "옵션 문제에 대한 씁쓸함을 느낄 겨를이 없다. 지금은 우승의 뒷맛을 즐기고 싶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양준혁의 구단인 삼성 라이온즈의 배려로 양준혁은 마이너스 옵션인 1억 원을 반납하지 않게 되었고, 삼성 라이온즈는 옵션 해제 이유를 최선참으로 선수단 내 끈끈한 팀워크를 형성하며 정규 리그 1위와 한국 시리즈 첫 우승에 공헌했기 때문에 1억 원을 받지 않겠다고 밝혔다. 당시 대구에 있었던 양준혁은 팀이 자신의 마이너스 옵션을 해제 해준 것에 대해 "구단의 배려에 감사하다. 올해 하지 못한 것까지 내년에 하라는 것으로 보고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두 번째 부진
2005 시즌, 그는 최악의 성적을 기록하게 된다. 2002년과 달리 훈련도 부족하지 않았고, 그리고 타격폼을 바꾼 2002년과 달리 양준혁은 심정수와 함께 팀 자체 청백전에서 대활약을 보였고, 자신 스스로 추가 훈련을 하면서 공격 훈련와 함께 스스로 수비 훈련을 하여 2004년 1루수 수비 이후 불안정한 수비를 해결하고 선동열 감독이 자신을 지명타자로 돌리는 것을 존중하나 타격감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수비도 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혀 수비 훈련을 열심히 하여 내야 수비가 안되면 외야 수비도 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한수에게 1루수를 넘겨주고 훈련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시범 경기에서도 지명 타자로 출전해 타격감도 좋지 않았다. 시즌이 열린 뒤 개막 3게임에서도 홈런 1개 없이 10타수 1안타로 타율은 1할을 기록하였다. 그는 최고참 명예 회복을 위하여 특타를 자청했지만 심정수, 진갑용과 함께 계속해서 부진하였고, 한때 현대전에서 4타점을 치고, 연타석 홈런을 기록하는 등 부활하는 기미가 보였으나, 이내 다시 침묵하여 타율은 2할 4푼대까지 떨어지고 말았다.
선동열 감독은 양준혁이 2할 4푼대까지 떨어지자 양준혁이 가장 안 좋았을 때는 타격감의 부활을 위해 최근 성적이 좋아진 심정수를 지명타자로 돌리고 양준혁의 타격감을 최대한 회복하도록 노력을 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타격감은 좋아지지 않았다. 하지만 양준혁은 2005년 시즌을 치르고 있는 도중에 장종훈의 최다 안타 기록과 같은 안타를 기록하여 타이를 이루고, 장종훈의 최다 안타 기록을 경신했을 때에는 무려 380경기나 앞섰다. 양준혁은 부진으로 인해 9타석이나 안타를 기록하지 못해 삼성은 꽃다발을 만들었다가 폐기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은 뒤에 경신을 하였고, 그는 이후 1773개의 안타를 기록하게 되었다. 그러나 최다 안타를 경신했을 때의 타율은 2할 3푼 8리로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었다. 타격 부진 끝에도 13년 연속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6월이 끝난 후에도 정확히 2할 3푼이라는 저조한 성적을 기록했고, 부진을 해결하기 위해 자신 스스로 한 특타를 계속했지만 타격감은 여전히 회복되지 않았다. 그는 2005년에 2할 3푼을 치는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을 때에 각 구단 전력 분석팀은 양준혁의 문제점을 상체만 돌고, 팔은 돌지 않는다는 점과 몸쪽 공에 있는 문제를 신경쓰다가 바깥쪽 공을 치는 데에까지 문제가 생겨 여러 투수들의 공격 포인트가 많아졌다고 지적했다. 7월 들어 갑작스럽게 높은 타율을 기록하였고, 1,593경기 만에 1800안타와 최다 득점을 세우는 등 여러 기록들을 세우게 되었다. 7월 이후로 다시 타율이 떨어졌고, 9월 들어 출장하는 경기가 적어져 13년 연속 100안타는 세우기 힘들 것으로 보였으나 한화전에서 2안타를 추가한 뒤 LG전에서 대타로 안타를 추가하면서 13년 연속 100안타를 힘들게 기록하였다. 양준혁은 13년 연속 100안타를 기록한 뒤 타율 2할 6푼 1리와 13홈런 50타점으로 시즌을 마감하였다.
그는 삼성이 여러 선수들의 활약으로 정규시즌을 우승하자 다시 한국 시리즈에서 정규 시즌에서 잃었던 명예를 다시 회복하겠다고 말했다. 이후 삼성과 두산의 한국 시리즈에서 2차전까지 6타수 2안타를 기록했으나, 한국 시리즈 3차전에서 상대 투수 이재우에게 3점 홈런을 쳐서 팀 승리에 기여하였고, 이후 4차전에서 삼성이 승리하는 등 양준혁은 두 번째 우승을 맞게 되었다.
2000 안타
그는 2007년 6월 9일, 두산과의 경기에서 3회초 우월 2타점 2루타를 기록한 다음 9회초에 1사 주자가 없을 때 타석에 올라 이승학을 상대로 좌중간에 떨어지는 안타를 쳐내면서 한국 프로 야구 사상 최초로 2000안타를 달성하였다. 양준혁은 최초로 2000안타를 기록한 뒤 다음 후속 타자인 김종훈이 병살타를 기록함으로써 아웃되었지만 1루를 밟은 뒤 양준혁은 삼성의 선동열 감독과 두산의 김경문 감독으로부터 꽃다발을 받았다.
2000안타를 기록한 후 한국 야구 위원회에서 양준혁에게 타자 모형과 2000안타를 상징하는 숫자가 담긴 크리스탈 상패와 김응룡 삼성 사장으로부터 황금 배트를 받았다. 그가 2000안타를 친 공은 현재 야구 박물관에 있다.
성구회 출범
양준혁은 2009년 1월 13일 한화의 송진우와 히어로즈의 전준호(현 NC 주루,작전 코치)와 함께 성구회를 출범하게 된다. 성구회의 가입 조건은 투수는 통산 200승 또는 300세이브, 타자는 2000안타 이상을 기록하면 가입이 가능하지만 양준혁은 타자 중에서 2202안타를 기록했기 때문에 현재 한국 프로 야구의 선수들과 해외에 있는 선수들 중에서 창단 회원으로 뽑히게 되었다. 그는 이후에 가진 기자 회견에서 "작은 모임이지만 많은 성원 부탁드린다"는 말을 했고, 청소년 야구 육성을 통해 건전한 운동 문화에 힘쓰겠다고 말을 하였다. 그는 또 이렇게 말을 이었다.
“우리 세 명만의 모임이 아니라 100년, 200년을 바라보고 만든 단체다. 유소년 야구, 사회인 야구만이 아닌 중,고교에서도 야구를 손쉽게 접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우리가 앞장 서서 프로 야구의 초석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지켜봐 주시고 많은 성원 부탁드린다.”
또 성구회의 창단 멤버인 양준혁과 송진우, 전준호는 마지막으로 "받은 사랑을 팬들에게 돌려주고 싶다".라고 말했다.
통산 최다 홈런 기록
2009년 5월 9일 대구에서 열린 LG 트윈스와의 홈경기에서 상대 투수 좌완 류택현의 바깥쪽 패스트 볼을 밀어치는 좌월 홈런(비거리 110m)을 기록하여 마침내 시즌 2호 홈런이자 통산 341호 홈런을 기록하였다. 이 홈런으로 양준혁은 장종훈 현 한화 이글스 2군 타격 코치가 가지고 있던 340개의 통산 홈런 기록을 경신하였다. 그는 홈런을 치고 난 후에 가진 인터뷰에서 "부상으로 2군에 내려갔다가 처음 등록하였고, 적응이 되지 않은 상황이라 홈런을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냥 풀 스윙을 했는데 넘어갔다"며 소감을 밝히면서도 "장종훈 선배가 생각난다."며 그의 기록을 기리고 싶다고 말하였다. 이외에도 양준혁은 "세울 수 있는 기록은 이미 갖고 있다. 팀에 필요한 선수로 남고 싶다."며 소감을 밝혔다.
이로써 그는 통산 타격 8개 부문(최다 홈런, 최다 안타, 통산 최다 2루타, 통산 최다 루타, 통산 최다 타점, 통산 사사구, 통산 타수, 통산 득점)에서 1위를 기록하게 되었다.
은퇴
2010년 시즌 삼성 라이온즈는 2008년 시즌부터 과감하게 진행시킨 주축 선수들의 세대 교체를 더욱 탄력적으로 이행했었다. 이 과정에서 양준혁은 노장 선수로서 점차 출전 기회가 줄어들었는데, 이에 대해 그는 마음을 비운 뒤 한참 심사숙고하다 18년 프로 현역 선수 생활의 마침표를 찍기로 결심했다. 자신이 선수 생활을 더 이어 가기보다 자신이 차지하고 있던 1군 엔트리 자리 하나를 어린 후배 선수들에게 양보함으로써 후배들이 더 많은 경험을 쌓고 출전 기회를 더 많이 잡을 수 있도록 배려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선동열 감독의 무언의 압박을 받았고, 그가 사랑하는 코칭 스탭과 구단 운영진에겐 자신이 은퇴함으로써 좀 더 원할히 세대교체를 실행할 수 있도록 배려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사실 그는 다른 구단으로 이적하여 더 많은 출전 기회를 얻으면서 현역 선수 생활을 유지할 수도 있었으나 일부러 그런 선택은 하지 않았다. 현역 선수 생활에 미련을 갖기보단 영원히 삼성 라이온즈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남고 싶었고, 박수칠 때 떠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시즌 중반 올스타전에 출전하여 좋은 활약을 펼친 양준혁은 올스타전 바로 다음날 자신의 은퇴 결정을 대대적으로 발표하였다. 삼성 라이온즈 구단은 그의 은퇴 결정을 존중해 주었고, 그에 걸맞게 성대한 은퇴식 및 은퇴 경기가 치뤄질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알렸다. 9월 19일 SK 와이번스와의 경기를 양준혁의 은퇴 경기 날짜로 정하고 구단은 일찌감치 그날 행사를 준비하였다. 은퇴 행사의 이름을 《Blue Blood in NO.10》라 지으며 대대적으로 홍보를 하였고, 팬들의 반응은 점차 뜨거워졌다. 인터넷 예매분 7000석은 25분 만에 매진이 되었고, 은퇴 경기 바로 전날 경기장 앞에 텐트를 치며 일찌감치 기다리는 팬들도 많았다.
은퇴 경기 시구는 양준혁의 아버지가 했고, 양준혁이 시타를 했다. 그가 그동안 밟아 왔던 그라운드를 되밟아 본다는 의미로 1회부터 4회까진 1루수, 5회부터 8회까진 우익수, 9회에는 좌익수로 경기에 나왔다. 공격할 때는 3번 타자로 출전하였다. 5회말이 끝나고 6회초가 시작되기 직전엔 10분 정도의 시간을 할애하여 여러 단체들이 준비한 공로패, 감사패 전달식이 있었다.
이날 상대 선발 투수는 김광현이었다. 자신의 프로 데뷔 경기를 삼성을 상대로 치뤘던 김광현은 그 경기에서 첫 피홈런을 맞았는데, 그 홈런의 주인공이 바로 양준혁이었다. 그때와는 반대로 양준혁의 프로 마지막 경기에 김광현이 선발 투수로 등판하면서 서로 묘한 인연이 되었다. 은퇴 경기에서 양준혁은 선발 투수 김광현에게 3타석 삼진 아웃을 당했고, 구원 투수 송은범을 상대로 2루쪽 땅볼 타구 땐 1루까지 전력질주 하는 모습을 보이며 총 4타수 무안타로 경기를 마감하였다. 은퇴 경기가 끝나고 정식 은퇴식이 시작되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으며, 양준혁은 은퇴식 도중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양준혁의 등번호 10번은 이 은퇴식을 기점으로 영구 결번되었다.
양준혁 선수의 은퇴 경기와 은퇴식은 KBS N Sports와 DMB 채널 QBS로 생중계되었다.
은퇴 이후
양준혁 전국 청소년 야구 대회 개최양준혁은 2010년 10월 24일 국내 최초의 자신의 이름을 건 야구 대회를 대전광역시 소재 갑천에서 처음 개최하였는데, 이 날 행사에는 전국 55개 청소년 야구 클럽 팀에서 1천 여명이 참석하여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그는 오래전부터 이런 행사를 개최할 것을 생각했으며, 이를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시작했다고 밝혔다. 양준혁 청소년 야구 대회는 학교 야구부에 등록되지 않은 순수 클럽 야구를 하는 학생만이 출전하는 대회로, 이 대회를 개최하기 위하여 양준혁이 은퇴 경기 당시 받은 입장 수익금 3천만원 전액을 사용하였다.
홍명보 자선 축구 대회 출전
양준혁은 2010년 12월 25일 전 축구 선수이자 현 대한민국 올림픽 대표팀 축구 감독인 홍명보가 이사로 있는 홍명보 장학 재단이 주최하는 자선 축구 대회에 특별 초청되어 참가하였는데, 이 날 그는 현역 시절 등번호인 10번을 달고 전반전에 출전하였다. 그는 사랑팀 일원으로 홍명보 및 김태영, 김정우, 김보경, 윤빛가람, 구자철, 지동원, 박주영 등 전·현직 축구 선수와 개그맨 서경석, 국회의원 정몽준, 여자 축구 청소년대표 선수 여민지와 한 팀이 되어 출전하였다. 이 날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자선 축구 경기에서 희망팀을 상대로 최전방 공격수로 선발 출전한 양준혁은 번번이 오프사이드 트랩에 빠지며 공격 흐름을 끊기도 했지만 전반 20분에 김태영의 센터링을 받은 서경석의 패스를 받아 왼발 슛을 성공하여 득점하였다. 골을 터뜨린 후 그는 현역 시절 보여줬던 특유의 어퍼컷 세레모니를 펼치며 곧바로 걸그룹 miss A의 춤으로 세레모니를 펼쳤다.
해설 위원 데뷔
미국으로 코치 연수를 떠날 것이라고 알려졌던 양준혁은 2011년 1월 11일 SBS와 해설 위원 계약을 맺게 되었다. 본인이 개최한 '전국 청소년 야구대축제'를 진행하면서 해외연수를 가려던 생각이 바뀌게 되었고, '양준혁 야구재단'의 설립과 운영으로 해외연수를 포기하게 되었다.
KBS 남자의 자격 출연
양준혁은 2011년 3월 14일 한국방송공사의 남자의 자격 - 죽기 전에 해야 할 101가지에 하차한 김성민 대신 7번째 멤버로 합류한다고 밝혔고, 4월부터 해당 프로그램에 고정출연하고 있다. 2011년 KBS 연예대상에서 쇼.오락 MC 남자부문 신인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2012년 7월 제작진 교체와 예능 적응 부족으로 전현무와 함께 하차했다.
양준혁 야구재단 설립
은퇴 후 여러 방면에서 활동하던 양준혁은 2011년 6월 13일 발대식을 개최하며 '양준혁 야구재단'을 출범했다. 양준혁은 “일반 학생들이 참가하는 야구 클럽을 활성화해 야구를 통한 인성교육을 목표로 재단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야구 붐을 타고 리틀야구팀도 많이 늘어나는 등 확장세에 있지만 중·고교생을 대상으로 한 청소년 야구는 사실상 정체 상태”라면서 “청소년이 너무 공부에만 얽매이지 않고 야구를 통해 훌륭하게 성장하도록 힘을 보태겠다.”고 각오를 밝혔다.
'양준혁 야구재단'은 한국 프로야구 출신 선수가 만든 최초의 재단이며, 국내 야구 선수가 만든 재단으로는 2001년 설립돼 해마다 장학금을 주는 재단법인 '박찬호 장학회'에 이어 양준혁이 두 번째이다.
자전 에세이 출간
2011년 7월 자전 에세이 '뛰어라! 지금이 마지막인 것처럼'을 펴냈다. 화려한 성공담보단 현역 시절 겪었던 위기와 실패, 좌절과 시련을 통해 얻은 본인의 인생 철학을 담았다. 중앙북스에서 출판하였다.
다문화 유소년 야구단 '멘토리 야구단' 창단
재단 법인 '양준혁 야구재단'은 2011년 11월 20일 창단식을 열고 국내 최초로 다문화 가정 유소년들로 구성된 야구단을 창단하였다. 서울시 교육청의 도움을 받아 서울시 거주 초등학교 4~6학년 다문화 가정 자녀 17명과 저소득층 어린이 12명이 1기 선수단으로 선발되었다.
창단식에서 양준혁 재단 이사장은 "가슴이 벅차다. 멘토리 야구단은 성적 위주의 야구가 아니라, 즐거운 야구를 목표로 한다. 운동장에서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고 싶다"며 "야구는 협동과 희생이 필요한 스포츠다. 야구를 배우며 팀원들과 하나됨을 느끼고 때로는 본인을 희생하며 팀을 위하는 마음을 배우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멘토리 야구단 초대 감독으로는 삼성 라이온즈 투수 출신 박충식감독이 선임됐다.
통산기록
타격왕 4회 (1993, 1996, 1998, 2001 시즌) - 장효조와 공동으로 역대 최다
통산 타율 0.316 역대 2위 (1위는 0.331 장효조)
통산 최다 안타 2,318 개 역대 1위 (2위는 2,018개 전준호)
통산 최다 루타 3,879 루타 역대 1위 (2위는 3,172개 장종훈)
통산 최다 홈런 351 개 역대 1위 (2위는 345개 이승엽)
통산 최다 타점 1,389 점 역대 1위 (2위는 1,145개 장종훈)
통산 최다 득점 1,299 점 역대 1위 (2위는 1,171개 전준호)
통산 최다 볼넷 1,278 개 역대 1위 (2위는 948개 김기태)
통산 최다 4사구 1,380 개 역대 1위 (2위는 1,064개 박경완)
수상 · 타이틀 경력
1988년 : 대학 선수권 대회 타격상 (타율 0.545)
1989년 : 전국 대학 추계 리그 도루상
1990년 : 전국 대학 춘계 리그 도루상
1991년 : 대통령기 대회 타점상 / 백호기 대회 도루상
1992년 : 대통령배 실업 추계 리그 홈런상
1993년 : 프로최우수 신인상, 스포츠조선 에스페로 타자상, 스포츠서울 올해의 선수 타자상, 일간스포츠 최고타자상 대상, 수위 타자상(타율 0.341), 출루율상(0.436), 장타율상(0.598)
1994년 : 최다 타점상(87점)
1996년 : 수위 타자상(0.346), 최다 안타상(151개), 장타율상(0.624)
1998년 : 수위 타자상(0.342), 최다 안타상(156개), 출루율상(0.450), 스포츠조선 레간자 대상
2001년 : 수위 타자상(0.355)
2006년 : 출루율상(0.445)
2007년 : 제일화재 프로야구대상 대상, 제12회 일구상 최우수선수상
2010년 : 조아제약 프로야구 대상 바이오톤상
골든 글러브 (총 8회 수상)
외야수 부문 : 1996, 1997, 1998, 2003년
지명타자 부문 : 2001, 2006, 2007년
내야수 부문 : 2004년
2010년 : 제11회 대한민국 영상대전 포토제닉상 스포츠스타부문
2011년 : 대한민국국제구조대 세상을 밝게 만든 사람들 상
2011년 : KBS 연예대상 쇼.오락 MC 남자부문 신인상
2012년 : 제2회 행복나눔인 보건복지부장관상
드라마출연
《응답하라 1997》 (tvN, 2012년) - 윤준혁(윤윤제 아빠) 역.
홍보대사 활동
2012년 통일부 홍보대사
2012년 제9회 한국스페셜올림픽 전국하계대회 홍보대사
2011년 구세군 홍보대사
2011년 스포츠바우처 홍보대사
2011년 투르 드 코리아 홍보대사
2011년 생명나눔 친선대사
2011년 대구시 홍보대사
2011년 월드비전 홍보대사
2009년 홍명보 장학재단 셰어 더 드림 풋볼 매치 홍보대사
2009년 전국한우협회 한우 홍보대사
2007년 경북지방경찰청 교통홍보대사
2002년 아동학대예방 홍보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