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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추정강숙려의 풀꽃문학 원문보기 글쓴이: 추정
수필을 어떻게 쓸 것인가(수필의 의미화에 대하여)
추산 최채규
수필 문우님들 안녕하십니까.
오늘 여러분들을 이렇게 한 자라에서 뵙게 되어 매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오늘은 수필을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하여 아니, 수필다운 수필을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해서 같이 토론해 보고자 합니다.
예술이란 우리들이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에 어떠한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그 대상을 보다 아름답게 창조해 내고자 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예술 활동은 나름의 형식과 내용의 조화를 통하여 의미를 부여 받고자 하는데 문학은 언어로, 미술은 색상으로, 음악은 음률로, 무용은 율동과 선을 그 형식적 바탕으로 하여 그 안에 표현하고자 하는 의미를 구현한다고 할 수 있겠지요.
수필문학에 있어서 사물을 있는 그대로만 표현을 한다면 그것은 한갓 현상이요 사실인 동시에 현실일 뿐이기에 작가는 그 사실이요, 현상인 현실에 대하여 그 속에 내재하고 있는 의미를 찾아야만 할 것입니다.
즉 이 말은 선택된 대상으로서의 어떠한 소재를 의미화 해야 된다는 말이기도 할 터입니다.
이것은 작가가 선택한 소재의 주제를 구현하기 위한 작가의 의식이 될 수도 있을 것이며 이것이 수필문학의 생명이랄 수도 있을 터입니다.
한 편의 수필은 작가의 진솔한 삶의 체험을 통해 쓰여 지며 작가는 그 체험 속에 내재하고 있는 참된 의미를 발견해 내는 사람이라고도 할 것입니다. 작가는 자신에게 주어진 현상을 통찰함으로써 그 속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아야만 할 터입니다.
이미 형설 여름호에서도 기술한 바 있습니다만 오늘은 수필을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하여 잠시 논급하고자 합니다.
김시헌은 그의 ‘대중수필과 본격수필’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1. 충격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 귀로 듣는 것, 또는 친구와의 대화에서 사색 등에서 예고 없이 일어나는 가슴안의 동요가 바로 충격입니다.
이 충격은 기쁨일 수도 있을 것이고, 슬픔일 수도 있을 것이며 분노 등등일 수도 있으며 이 충격은 동기를 부여합니다. 이 동기의 폭발이 글쓰기의 욕망을 발동시킨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충격은 나아가 여러 가지 생각들을 집합시키며 그것들이 소재가 되기도 하고 그 속에서 주제가 추출되기도 할 터입니다.
2. 의미화
위에서 잠시 언급했습니다만 사물을 있는 그대로만 표현한다면 아무런 의의가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요 현상이며 현실일 뿐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그 현상에다 의미를 부여해야만, 그리고 그것을 문자화 해야만 독자에게 전달이 될 수 있을 것이고 그 문자 속에 내재하고 있는 의미 있는 작가의 철학은 읽는 독자들의 심정에 호소하여 독자들에게 감성이라는 울림으로 진하게 가슴을 두드리게 될 것입니다.
‘어윈 에드먼’은 “경험은 무의미로 가득 차 있다. 예술은 그것에 생명을 부여한다. 포괄적인 예술은 인생 전체를 생생하게 만들어 놓는다”라고 하였습니다.
의미있는 수필을 창작하기 위해서는 시를 창작할 때와 같이 ‘이토오.게이이치’의 “서정시 입문”에서 기술한 바, 아래의 8단계 훈련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① 나무를 그대로 나무로 본다
② 나무의 종류나 모양을 본 다
③ 나무가 어떻게 흔들리고 있는가를 본 다
④ 나무의 잎사귀가 움직이고 있는 모습을 세밀하게 본 다
⑤ 나무속에 승화하고 있는 생명력을 본 다
⑥ 나무의 모습과 생명력의 상관관계에서 생기는 나무의 사상을 본 다
⑦ 나무를 흔들고 있는 그 본질을 본 다
⑧ 나무를 매체로 하여 나무의 저 쪽에 있는 세계를 본 다.
위에서의 ①~④는 나무를 눈에 비치는 그대로 봄이요, ⑤~⑧까지는 보이지 않는 세계 까지를 보고 있음을 말하며 곧 의미화의 단계라고 할 수 있지요.
3. 통합
통합이란 작품이 될 여러 가지 요소를 한 자리에 모아서 질서를 부여하는 작업이라고 하며 다른 말로 구성이라고 할 수 있을 터입니다.
즉 소재와 의미와 주제가 하나의 끈으로 엮이어져 통일된 하나의 작품으로서의 완성품이 되는 과정일 것입니다.
오창익은 제10회 한국 수필가 협회 세미나의 주제 발표문에서 이와 같이 의미회의 생명적인 요소는 바로 ‘문장’이라고 말하고 수필의 문장은 효과적인 의미전달을 위해 ‘솔직성’,‘상징과 비유’,‘암시와 상상적 수사’ 기능을 생명시 한다고 전제하면서 문장은 주제를 의미화 하기 위한 생명적 요소라면서 수필의 문장이 다음과 같아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① 정서를 지성화 하여야 한다.
수필의 지성화가 제대로 되지 못한 작품은 흔히 자기몰입이나 흥분에 사로잡혀, 문장은 관념이나 추상에 붙들리고 만다. 넋두리가 되고 감상 일변도의 잡문이 되기 십상이다.
수필은 정서를 본질로 하는 인간화, 지성화의 문학이기에 자기감정의 인간적인 순화, 승화작용이 따라야만 하고 정서를 객관화 해야만 한다.
◑ 대화가 빈번하거나, 길어서는 안 된다.
◑ 한정어나 수식어, 의태어나 의성어를 남발해서는 안 된다.
◑ 관념어나 시어로 의식의 비약을 꾀해서는 안 된다.
② 수필은 정밀 구체적이어야 한다.
수필 문장은 작가와 독자 사이의 격의 없는 감정의 교류이며 그 정감의 실체인 진실의 공감대이다. 따라서 표현이 모호하거나 추상적이어서는 안 된다.
③ 수필의 문장은 때로 지성을 정서화 해야 한다.
수필은 개성을 위주로 하되 대우적 문학이다. 즉 명제는 작자의 것이로되 결론은 작자 혼자만의 것일 수 없다는 동화현상, 즉 공감이나 감동의 동질화 현상이 유지돼야 한다.
④ 주제를 상상화 해야 한다.
이것은 주제의 효과적인 의미전달을 위해서다. 효과적이란 직접성이 아니라 간접성, 즉 상상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상상의 문장들의 흔히 상징, 암시적인 어휘를 선택하거나, 생략, 함축적인 문구들을 요구한다. 때로는 의인, 우화 해학 등을 수용함으로써 주제의 상상화, 즉 문예적인 기능을 담당하기도 한다.
⑤ 간결 선명하면서도 정적이어야 한다. 비유 함축이면서 지적이어야 한다.
수필은 자신의 삶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며 바로 삶 그 자체입니다.
글쓴이의 삶 자체가 진실 될 때 그 글은 은은한 양기가 나게 되겠지요. 그런 글일수록 독자들의 심금에 닿아 진한 감동의 전율이 있게 마련일 것입니다.
미사여구나 멋을 부릴 필요도 없이 읽기 쉽게 시냇물이 소리 내며 흘러가듯이 생각을 따라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애써 꾸미지 아니하고 있는 그대로 보이려는 이런 글이라야 독자들을 차분하게 작가의 작품세계로 이끌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으로 수필 창작을 함에 있어서 표현기법상의 발상의 전환이 있어야겠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 수필에 있어서의 낯설게하기
수필문학도 시 창작에서와 마찬가지로 낯설게 하기의 기법이 필요하며 이는 매우 중요한 포지션을 차지한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낯설게 하기란 말은 20세기 초에 러시아와 체코에서 일어났던 이른바 러시아 형식주의가 표방한 분석방법과 객관적 서술묘사의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현대 시학에서 매우 중요한 시 창작에 있어서의 발상의 기본이 되는 원리이기도 합니다.
수필이 문학의 한 장르로써 이미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지 오래입니다만 흔히들 많은 사람들이 수필문학을 주변문학이니 신변잡기니 하는 말들을 해 오고 있습니다만 이러한 주장들은 수필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의 부족에 기인한다고도 볼 수 있겠으나 그 책임은 수필문학을 담당하고 있는 수필문학인 스스로도 반성을 해 보아야 할 문제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한편의 글에 담을 소재를 선택하고 그 속에 주제를 담아 독자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담았다 하더라도 그 표현이나 발상단계가 구태의연하다거나 상투적인 수준에만 머물고 있다면 아마도 그 수필은 독자들에게 식상한 이미지만을 전달할 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윤재천은 <청색지대>의 서문에서 ‘수필가는 이런 변화의 주모자여야 한다. 늘 깨어있는 강렬한 피돌기의 주체여야 한다. 우리는 범상을 두려워해야 한다. 평범 속의 비밀을, 평범 속의 혁신을, 애잔한 들꽃이 감춘 강인한 생명력을 찾아 오만하리만치 번득여야 한다. ‘체험의 고백’이라는 위선의 탈을 벗고 ‘양심의 분출’이라는 진실의 옷을 입어야 한다.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자유로운 몸짓으로 내면의 울부짖음을 토해내는 행위야 말로 올바른 문학 활동이 아닐까 “ 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낯설게 하기란 무엇일까요.
낯설게 하기란 한마디로 고정관념의 깨트리기 작업일 수도 있을 것이며 상투성에의 혁명이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떠한 대상을 관찰함에 있어서 통념상으로 인지되고 있는 현상을 과감히 깨트리고 그 현상의 내면속에 잠재되어 있는 근원을 탐구하는 재조명의 작업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를 기호학적으로 말한다면 우리가 통상적으로 보고 있는 실체와 그 실체 속에 내재하고 있는 근원을 전혀 다른 각도에서 조명하였을 때의 전혀 새로운 영상을 내밀하게 관찰하고 그 차이점을 찾아 하나의 새롭고 복합적인 기호로 재탄생시키는 작업을 말하지요.
문학의 생명은 관찰력, 상상력, 추리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중에서도 가장 기본적인 것은 관찰력이지요. '사소한 사물이나 현상도 그냥 내버려두지 말고, 거기에 기기묘묘한 착상이 있고 원리가 있고 언어가 있다.'는 이 말은 작가의 기본 정신으로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즉 말을 확대 해석해 보면, 요는 관찰하라는 말이 되는 것이며, 이 관찰하라는 말은 일상적인 시각에 머무르지 말고 거기에서 벗어난 시선으로 사물을 바라보라는 말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이 '낯설게 하기'란 개념은 일상적인 시각의 파괴란 의미로 이해가 될 것이며 수필문학이라고 해서 결코 이를 간과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을 강조 드리고 싶습니다.
▣ 문예미학적 수필문학
문학작품의 위대성 여부의 판단은 작품 속에 수용된 사상 여하에 달려 있다(웰렌의 주장)고 하겠지만, 그렇다고 문학작품 속에서 꼭히 사상을 찾아야 한다는 말은 아닐 것이며 지나치게 사상을 강조한 작품은 때로 독자들에게 생경감을 주거나 혼란을 야기 시킬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어떠한 성질의 것이던 미학적일 때 문학으로서의 의미와 가치를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이 흔히들 문학작품을 읽을 때 재미로만 읽지는 않을 것입니다. 만약 문학작품을 재미로만 읽을 때 문학이 지향하는바 궁극적 목적을 달성했다고는 볼수가 없겠지요. 우리 인간이 지니고 있는 문화 가치 창조의 능력에는 지성에 의한 능력인 진(眞)과 종교적 생활로서의 선(善), 정서적 표현의 미적 활동인 미(美)가 있습니다. 수필문학은 이러한 미학에 속하는 예술의 한 장르로서 당연히 예술의 특성인 미학적 특성을 살려 미학이 지니고 있는 미적 분석과 탐색이 이루어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수필문학이 작가적 체험과 현실성의 중요성이라는 대 명제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면 우리가 아무리 미학적 견지에서의 필요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현실과 작가적 체험을 떠난 공허한 사상과 정서는 독자들을 감동시킬 수 없을 것이며 한 낱 공허한 메아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
따라서 작가는 평소 고매한 인격에서 독자들의 심금을 울릴 수 있는 감명 깊은 글이 나올 수 있게 인격을 수양해야만 할 것입니다. 일찌기 유명 문인들의 일부가 기인행색을 한다거나 두주불사를 일삼으면서 해괴한 짓거리의 행동을 문학이란 미명하에 하여 왔습니다만 우리는 이러한 전근대적이고 망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천박한 인격에서는 천박하고 얕은 글이 나올 수밖에 없을 것이며 고매한 인격을 갖춘 작가에게서는 고매한 글이 나올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한 고매한 인격의 수양을 갖춘 작가에게서 우러나오는 글이란 구태의연하게 문학적 미학요소를 갖추겠다고 미사려구의 나열과 수식을 하지 않더라도 독자들에게 신선한 충격과 진한 감동을 전해줄 수 있는 글이 창작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 해학과 수필
수필문학의 형식은 매우 다양합니다. 일기문, 서간문, 감상문, 기행문 등을 망라하고 있으며 그 주관적 구체성으로 인하여 1인칭시점의 문학, 자기 고백적 문학, 자기 관조의 문학, 대우성의 문학 등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이 말은 수필이 허구에 의해서 구축된 소설과는 달리 내용에 있어서 실제 자기 체험의 신변잡사를 중심으로 창작되기 때문에 독자들의 입장에서는 소설보다 더욱 진한 감동을 주기에 충분한 문학의 양식이란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필은 일단 재미가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성립이 되며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글이라야 하겠습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수필문학의 해학성이 하나의 특성이 된다는 것이지요. 해학이란 유머(Humor)요, 익살입니다. 해학은 품위 있는 익살로 품위가 강조되며 수필문학에서의 해학은 다분히 이런 풍자적 요소와 함께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수필문학에서의 해학이란 무의미한 익살과 유머가 아니라 그 속에는 언제나 페이소스(연민)적인 요소가 깃든 해학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러한 해학이 수필문학의 표현기교로서 주제전달의 효과적인 방법론으로서의 역할로서만 사용이 되어야지 그 주객이 전도되어서는 안 될 것임은 자명하다 할 것입니다.
자, 그러면 지금부터 작품을 감상해 보기로 하지요.
작품 감상하기
1. 종착역
<최은정>
참으로 오랜만에 기차를 탔다. 기차를 탄 것은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무작정 나서보고 싶어서였다. 쾌속으로 달리는 바퀴소리와 함께 마음이 달리고 있었다. 연도에는 모내기가 한창이고, 둔덕에는 삘기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우리의 삘기꽃은 유럽의 ‘히이스’와 같은 느낌이라는 말을 들었다. 듬성듬성 소나무가 지나가고, 속살이 드러나는 황토들이 세차게 달리는 바퀴소리에 몸을 움츠린다. 나는 그런 것을 보면서 명상에 잠긴다. 지나간 일들이 스크린에 비치는 영상처럼 이런 저런 일로 형상화되면서 꺼졌다간 살아나고, 다시 꺼진다. 나는 시방 여행하는 기분으로 달리는 차 속에서 차창 밖으로 흘러가는 것들에 시름을 놓고 있다.
얼마를 달렸을까. 정거장에 멈췄다. 극락이라는 이름이 붙은 강을 건넜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이승을 떠나 천국으로 가는 기분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은 현실을 떠나 환상의 나라로 가는 것과 같은 말일 수도 있다. 어쩌면 나는 지금까지 그런 환상 속의 꿈을 안고 살아 온 것인지도 모른다.
첫 번째 멈춘 곳은 정거장 이름이 극락장이다. 나는 묘한 감상에 사로 잡혔다. 내가 정말 극락에 가고 있다는 것인가. 기차는 다시 들길을 가르며 힘차게 달렸다. 다음에 닿은 정거장도 잊히지 않는 인상적인 이름이다.
늙어서 편하다는 뜻인가. 아니면 늙어서 편하라는 뜻인가. 노안(老安)이다. 사람이 살다가, 가장 좋은 것이 후분이 좋아야 한다고들 하지만, 늙어서 편한 것이야 말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노안을 지나서 차창 밖으로 벌어지는 풍광은 더없이 아름다운 경관을 펼치고 있다. 푸른 둑과 지평선이 하나로 맞닿아 일망무제로 시야를 넓힌다. 나는 그 속에 빠져들며 새삼 자연의 아름다움을 실감한다. 탁 트인 시야로 인해 가슴이 후련해진다. 자질구레한 일들이 아득한 기억 속으로 모두 사라져 간다. 이래서 마음이 편해지고 몸이 건강해져서 ‘늙어 편안하다고’ 한 것일까?
나는 이 노안지대를 달리면서 마음이 저절로 비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부질없는 것들에 매여 마음을 얼마나 어지럽게 하였던가.
하늘은 끝없이 맑게 펼쳐진다. 내 마음도 따라서 청명하게 펼쳐진다. 이러는 중에 내가 젖먹고 자라던 영산포를 훌쩍 지났다. 영산포는 나의 수필 밭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그 영산포에서 추억이 넘실대는 유년 이후의 소녀시절까지를 보냈다. 그래서 그 영산포에는 아름다운 기억들이 곳곳에 새겨져 있다. 몇 개의 정거장을 거쳐 학교(鶴橋)라는 곳에 닿았다. 그곳에서 나는 선로수가 찻길을 바꾸는 것을 보았다. 기차는 그 바뀌어 진 선로를 따라 달려간다. 나는 그것을 보면서 인생길도 예외 아니란 생각을 하였다.
내가 부모를 떠나 결혼을 한 것도 그와 같은 것이고, 내가 불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것도 그런 것이다.
인생은 나면서부터 정해진 길이 있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 내가 걸어온 길이 그런 길인지도 모르나, 분명한 것은 선로수가 찻길을 바꾸듯이 인생의 삶 길에도 변화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의 생각 같아서는 더 바뀌어 지기를 원하지 않는다.
목포가 가까움에 따라 또 하나의 야릇한 지명과 만난다. 몽탄(夢灘)이라는 곳이다. 내 남편의 탯줄이 묻히기도 한 이곳 몽탄, 꿈 몽자, 여울 탄자라면 꿈꾸는 물이란 뜻일 텐데, 물을 인생에 비유하면 삶 또한 일장춘몽이란 뜻으로 통하는가 ?
하면, 차라리 꿈에서도 탄식한다는 夢嘆(몽탄)이라는 느낌이 더 어울리다. 꿈에서 탄식을 한다면 생전에 그처럼 컸을 후회는 없을 것이다.
인생의 길이 고해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지만 살아가는 길에서 후회 없기를 바란다는 것은 더 없이 어려운 것이다.
이런 인생을 암시라도 하듯 누가 지었는지 몽탄이란 지명은 잘 지은 이름이다. 내가 만일 죽는다면 영원한 그 꿈속에서 무엇을 탄식하게 될 것인가 ?
다시, 몽탄을 뒤로하고 닿은 곳이 일로(一老)라는 곳이다. 이 지명을 풀어 말하면 인생은 누구나 한 번 늙는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그렇다. 한 번 나서, 한 번 살다 죽음으로 간다. 나도 시방 그 길을 따라 한 번 늙는 길로 가고 있다. 참으로 묘한 지명들을 거치면서 꿈속에서 꿈을 꾸듯 나는 지금 달린다.
일로 역을 지나 마침내 기차는 목포역에 닿았다.
“목포-”하는 애잔한 목소리의 노래가 들린다.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이다.
나는 목적지도 없이 떠나 왔지만 이제 더 가려해도 갈 곳이 없다.
어느 땐가는 나의 인생길도 이처럼 어느 날 갑자기 총착지에 닿을 것이다. 그 종착지가 어떤 곳의 어떤 모양일지는 알 수가 없다. 극락강을 건너 극락역을 지나고, 일로 역을 거쳐 몽탄역을 거쳤듯, 내가 닿을 종착역도 그런 경로의 곡절을 안은 길임에는 분명하다. 나는 차에서 내려 유달산에 올라 이난영의 노래를 거듭 환청하면서 탁 트인 바다의 수평선을 보았다.
바다에는 크고 작은 배들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점점이 떠서 저마다 가고 있다. 내가 걸어온 인생의 길처럼 물위에 떠 있는 배들도 파도를 가르며 저마다 제 길을 간다.
나는 오늘 호남선의 종착역 목포에 내려 기차의 종착지와 더불어 인생의 종착역도 생각해 본다.
[작품의 감상]
위 작품은 우선 독특한 소재가 눈길을 끌고 있다고 말 할 수 있다.
하나의 평범한 기차 여행 중에 등장하는 역의 이름 “극락강-노안-몽탄-일로”등에서 작가는화자 만의 독창성이 번득이는 기지와 해학으로 그 이름들을 승화시키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즉 소재에 대한 화자만의 고뇌적 해석과 이해가 평범 속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수필문학이 무엇보다 개성을 존중하는 문학이라 할 때 이 수필은 적어도 화자 나름의 독자적인 세계가 시선을 사로잡게 한다.
‘소나무가 지나가고 속살이 드러나는 황토들이 세차게 달리는 바퀴소리에 몸을 움츠린다. 나는 그런 것들을 보면서 명상에 잠긴다“ 는 서두를 풀어낸 기차여행의 종착역. 목적지도 없이 훌쩍 떠나왔지만 이제 더 가려해도 갈 곳이 없는 화자의 고뇌는 바로 인간존재의 탐색으로 귀결되어 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수필은 어디까지나 선택된 화자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진실의 문학작품으로 형상화 시켜야만 한다. 즉 선택된 소재의 주제의식을 부여하고 사상과 철학을 심는 의미화작업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위 작품은 이를 훌륭히 이룬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수필다운 수필이란 같은 사물을 이야기 하더라도 남과 다른 그 어떠한 느낌을 주는 글이라야 생기가 넘치고 살아 있는 글이 될 것이다.
2. 빨래를 하며
<변해명>
세상 바람에 시달리다 풀이 죽어 늘어진 옷을 벗어 빨래를 한다.
살아가기 힘겨워 땀에 배인 옷, 시끄러운 소리에 때 묻고 눌린 옷, 최루탄 연기에 그을고 시름에 얼룩진 옷을 빤다. 장마 비 걷히고 펼쳐지는 푸른 하늘처럼 밤마다 베개 밑으로 흐르는 물소리는 악몽에 시달리는 나의 잠을 깨운다. 그 물소리처럼 지심에서 솟구치는 물꼬를 찾아 콸콸콸 넘쳐흐르는 물에 빨래를 담가 절레절레 흔들며 빨래를 하고 싶다.
여름의 한 줄기 소나기는 도심을 태우던 열기를 식혀주고 악취와 쓰레기를 쓸어가며, 시원하고 깨끗한 거리를 열어 준다. 그처럼 소나기를 맞으면 머리카락 올올이 빗물로 감기고, 주머니에 담긴 먼지처럼 답답한 가슴도 후련해지리라. 씹지 않고 말의 응어리도 풀 수 있는 소나기-빗질하는 가로수처럼 빨고 싶은 나날들.
옛날 어느 날 신부님은 내 이마에 물을 부으시며 마음을 빨아주셨다. 다시는 너의 삶에서 후회로움이나 욕됨이 없을지니라.
그러나, 어인 일인가. 내 마음은 갈수록 번뇌와 욕심으로 더럽게 얼룩져 샘터로 달려가 무릎을 꿇지만 마음의 주름살은 펴지지 않고 빛바랜 기도엔 바람만 오간다.
가난한 날들의 어두움, 기다리는 세월의 덩이진 아픔, 쫒기는 두려움, 누더기처럼 짜깁는 인정들-나는 언제나 외롭고 허기져 눈물을 흘려도 지워지지 않는다.
빨래를 한다. 흐르는 물에 담가 빨래를 한다.
깨끗한 빨래, 활활 털어 햇볕에 널면 빨래는 바람에 물고기를 날리고 거듭나는 몸짓으로 활개를 친다. 햇볕아래 눕는 눈부신 정결, 비로소 자유롭다.
어머니는 날이면 날마다 빨래를 했다. 손톱이 다 닳도록 비비고 두드렸다. 마디 굵은 손가락에 끼운 가락지도 손톱처럼 닳아 끈으로 두 쪽을 묶어 끼웠다.
흐르는 물소리에 실려 가던 빨래 방망이질 소리. 가슴에 서린 한을 자근자근 빨아대던 소리-지금은 지워져 들리지 않는다.
나도 어머니처럼 빨래를 한다.
빨래를 비비면 열 손가락 사이로 옛날이 흐르고 아리고 쓰린 삶의 가락이 굽이굽이 흐른다.
콩깍지 태워 잿물 내리고 광목을 필로 삶아 자갈밭에 널면 한 줄기 고달픈 흰 강이 출렁거렸다. 시집가는 딸이 한 끝을 잡고 지팡이에 의지한 노 할머니 한 끝을 잡고 눈으로 마름질하는 어머니 강줄기.
꽃가마 꽃상여를 앞뒤로 묶고 햇볕 아래 박꽃처럼 속살 보이던 광목마전에 어머니 근심도 하얗게 바랬다.
물은 언제나 고향.
오늘의 빈 잔을 채우고 마른 혼을 적셔준다. 물을 보면 물보라 위에 살아나는 추억의 송사리 떼-,기억의 징검다리 사이로 빠져나가며 생활의 뱃전에서 찰랑거린다.
나는 깨끗한 빨래이고 싶어 강물에 눕는다. 심신이 투명해지면 학처럼 날개를 달고 구만리 장천으로 비상하리라.
한 벌뿐인 옷을 들고 물가를 간다. 북한산 계곡 맑은 물이 흘러내리는 수유리 샘터에 앉아 언제나 진솔이고자 빨래를 한다.
바람은 옷자락에 풀을 죽이고 하루도 못 가 땀에 젖지만 진풀 먹여 밟고 두드려 옷깃을 살려야지. 삼베 모시처럼 상큼하게 고개를 들도록.
빨래를 한다.
새벽마다 남몰래 더러움을 쓸어 가는 청소부 할아버지 비질 소리처럼 새벽 미사 때 빈 성당을 채우는 신부님의 기도 소리처럼 외로운 샘터의 빨래소리.
물소리를 들으면 살아나는 청청한 영혼들.
머리를 감아 빗고 새 옷 입고 새벽길 떠나는 신부(新婦)처럼 물가로 간다. 지친 삶을 행구려고 샘터로 간다.
[작품의 감상]
위 글을 읽으면서 우리는 초산문적인 작가의 움직임, 그리고 시각에 가시처럼 파고드는 비유, 뿐만 아니라 그 모든 표현상의 특질에 의해서 살려지고 있는 삶의 저 깊은 속에 대한 급습과도 같은 통찰을 보게 된다.
술술 읽어 내려가기엔 다소의 노동력을 요하는 변해명씨의 작품세계는 정서의 충격과 인식의 갱신으로 점철되는 읽기의 환희를 촉발함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작가인 변해명씨의 글 쓰는 버릇일 수도 있겠거니와 이미 있는 생각을 글에다 옮겨 놓으면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파고, 후비고 하면서 새로운 의미를 캐내는 일로서 글을 쓰는 그의 특이한 글 버릇에서 비롯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위 글은 정감에다 교훈을 담는 기술이 아주 뛰어난 글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안스러울 정도로 몸과 마음을 사리면서 세심한 배려와 옹골찬 조심히 글의 행간이며 뒤에 마디마디 박혀있는 낌새를 느끼게 하는 문체. 거기에는 허공 중천에 매달린 줄을 타는 사람의 발놀림과 과녁을 향해서 맞추어진 화살의 내면적 긴장과도 같은 것이라면 어떨까. 실제로 글을 쓰고 있는 동안 이 작가의 붓끝이 떨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3. 달걀 이야기, 셋
<양미옥>
<1>
시어머니께서는 자격증만 취득하지 않았을 뿐 숙련된 산파이시다. 슬하에 열두 명의 자녀들을 두신 시어머니는 동네 아낙네들의 해산수발을 도맡아 해 오셨다.
시집살이를 시작한 지 이태쯤 되던 해에 나의 출산 날이 잡혔다. 시어머니께서는 예정일에 맞춰 차츰차츰 만삭이 되어 가는 내 배를 보며 손자 받을 준비에 들떠 있었다.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3월, 해질녘부터 슬슬 진통이 시작되었다. 나는 조산소에 가고 싶다는 말을 삼킨 채, 남편과 함께 산실로 꾸며진 아래채 방으로 들어갔다.
시어머니께서는 황급히 어디론가 다녀오시더니
‘아가! 이걸 톡톡 깨어 먹어라.“:
며, 달걀 열 알을 가져오셨다.
나는 그 진통 중에서도 영문을 몰라
“어머니! 왜 달걀을 먹어요?” 라고 했다.
“응, 그걸 먹으면 아기가 미끄러지듯 수월케 나오는 거란다.”
그 후로 나는, 둘째 셋째 애들도 달걀 열 알씩을 먹었고 아이도 순산하였음은 물론이다.
<2>
어느 해 봄이었던가, 잠에서 깨어 창문을 열자 라일락 향기가 온 집안을 맴돌고 있었다. 참새도 마당 귀퉁이에서 내게 무어라고 종알거리는 아침이었다. 내 가슴에선 알 수 없는 탄성이 울려나오고 있었다.
그 날 나는 어머니가 싸주신 도시락을 들고 학교로 달려갔다. 학교에는 벌써 급우들이 운동장에 모여 따스한 햇살에 뒤섞여 도란도란거리고 있었다. 운동장 모서리에서 뿜어내는 꽃들로 교정은 더욱 생기가 돋아 있었다.
얼마 후, 우리는 학교를 출발해서 멀지 않은 미륵산으로 소풍을 갔다.
내 가슴은 너무나 설레어 녹아 없어져 버릴 것만 같았다. 아슴하게 바라보이는 쪽빛 바다도 아름다웠고, 산등성이의 연록빛 나뭇잎도 아름다웠다.
그러나 나를 더욱 설레게 하는 것은 어머니가 싸 주신 도시락이었다. 달걀 다섯 알이나 삶아 도시락에 싸 주셨던 것이다. 산들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는 신록 속에서 그것을 펼쳐놓고 까먹던 맛은 참으로 좋았다. 입안에서 슬슬 녹던 어머니가 싸주신 달걀의 맛. 그때 나는 혼자서 먹기가 아까워 집에 네 알을 남겨 가지고 왔다. 동생들이 덥썩덥썩 메어먹으며 좋아하던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나는 가끔 그 시절이 그립다. 그때마다 달걀을 삶아 먹어 보기도 한다. 그러나, 지난날의 그 맛은 찾아 볼 수가 없다. 어머니의 손맛이 들어 있지 않아서일까.
<3>
얼마 전에 일이다. 모처럼 별식으로 떡국을 끓였다. 가족들이 식탁에 둘러앉아 수저를 들었다. 떡국을 유심히 보던 남편이
“왜, 노른자위가 보이지 않지?” 라고 물었다.
옆에 있던 큰애가 말했다.
“그 달걀에는 노른자위가 없겠지요.” 하고 대신 답을 하였다.
그러자, 며늘아이가 한 술 더 떠서
“혹시 노른자위는 어머니께서 마사지하신 게 아니예요?” 하며, 빙긋이 웃는 게 아닌가.
“그래, 새 아이 말이 맞다.” 하고 나는 웃어 주었다.
그러자 남편이 흐뭇한 표정으로 우리 고부간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장단을 맞추었다.
“의좋은 신세대 고부간이로군.”
그 날 저녁에 끓인 떡국 속에는 달걀 노른자위는 들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온 가족이 두 그릇씩이나 비웠고, 식사시간은 그 어느 때 보다 마냥 유쾌하기만 했다.
나는 오뚝이 모양을 한 달걀을 보면, 오뚝오뚝 오뚝이 인생을 배울 것만 같다.
게다가 싱싱한 달걀을 대하면 유난히 예뻐해 주셨던 시부모님과의 추억들을 잠시나마 회상할 수 있어 좋다. 또 삶은 달걀에게선 친정엄마의 따스한 체취가 느껴지는 것만 같다.
나는 달걀을 좋아한다. 싱거운 추억거리와, 내 인생의 영원한 노스탤지어(Nostalgia)를 사랑하기에.
[작품의 감상]
사상이 없는 수필, 철학이 없는 수필을 우리는 생각할 수 없다. 그러므로 수필의 소재가 비록 신변의 일이어도 그 문장 속에 사상이 숨어 녹아 있다면, 문학적으로 형상화의 과정을 거친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차피 수필문학이 신변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는 것이 특성이라면, 문제는 문학성을 확보하는 일일 것이다. 그렇기에 수필에서의 사상성 확보는 바로 수필문학이 문학성을 지니게 하는 관건이라 하겠다.
양미옥의 수필 ,달걀 이야기, 셋>은 주화소(主話素)인 ‘달걀’과 연관된 세 도막의 에피소드를 축으로 하여, 결미 부분에서 이를 통합하여 공통적인 주제를 발견해 내고, 이를 독자들에게 메시지로 전달하는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과거 회상과 현재의 에피소드가 복합적으로 사용됨으로써 이 작품은 그저 회상조의 감상적이고 회고적 정서에만 매달리지 않고 있다. 문장이 간결하고 산뜻하면서 단편적인 세 이야기가 옴니버스 식으로 통합 처리되는 기교의 묘미, 완벽한 미적 구성의 원용, 주제 의식의 명료함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신변의 이야기를 화소로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흔히 신변수필에서 보이는 수필 쓰기의 안이함이나 읽기의 식상함에서 벗어나 사상성의 탁월함을 보인다.
이 수필은 우선 구성 방법이 특이하다. 달걀과 관련한 세 도막의 화소가 공통된 주제 구현을 위해 상호 유기적으로 연관을 맺으면서 접속되어 있다. 수필의 화소인 소재라고 해야 별반 특이하지 아니하다. 기상천외하다거나 경이적인 것도 아니다. 그저 누구나 한 번 쯤 생각해 보았음직한 그렇게 평범한 이야기, 신변잡사라고 해도 좋을 성 싶은 것이 이 수필의 소재요, 대수롭지 아니한 세 도막의 삽화에 불과하다. 그런대도 왜 이 수필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가 ?
이 수필은 일단 이야기의 수준에서 벗어나 불필요한 요소들을 과감하게 잘라낸 문장의 순수성을 지니고 있다. 첫째 이야기는 시어머니와 관련한 출산 과정에서의 고부간의 사랑이 진하게 묻어 나온다. 둘째 이야기는 소풍과 관련한 친정어머니의 사랑 이야기이고 셋째 이야기는 가족간의 대화를 통한 현대의 고부간의 사랑 이야기이다. 시대별로 본다면 첫째와 둘쩨의 이야기에 해당하는 것은 과거 회상의 시점이요, 셋째 이야기는 현재의 시점이다. 또 이 수필은 각 도막의 이야기가 대상의 추이를 보이고 있다. 즉 시어머니--친정어머니--가족(현대의 고부 사이)로 진행되면서 과거와 현대라는 두 시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시대가 변해도 변함없는 ‘사랑’의 진실을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대상은 사믓 다르지만 결미에서 가족이라는 통합체로 승화함으로써 주제의식이 구현되고 있다.
필자가 여성이라는 측면에서 대상이 한정되어 있음은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이 같은 구성의 묘는 ‘사랑’이라는 주제를 염두에 둔 작가가 천착하고자 하는 인간성 회복이라는 대전제 아래 놓여 있다.
첫째, 둘째 이야기에서 보듯 가난이라는 남루를 걸치고 살아야 했던 질곡의 시대, 그땐 달걀 한 알의 의미가 얼마나 큰 것이었던가 ? 그러나 이제 시대가 바뀌고 풍요를 구가하는 현대인에게는 달걀의 의미는 참으로 큰 변화를 가져왔다. 그래 셋째 이야기에서와 같이 달걀은 생존의 문제가 아닌 삶의 질인‘마사지’용으로 퇴색되어 간다. 그럼에도 변할 수 없는 건 바로 ‘사랑’이라는 메시지다. 고부 사이에 달걀의 의미와 사상의 차이가 있을 지언정, 그 본래의 정신으로 회귀하는 감동이 있지 아니한가.
부모의 사랑, 가족 간의 사랑은 아무리 말해도 진부하지 아니하다. 수필문학은 바로 그 사랑을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이 수필을 그저 사랑이라는 주제만을 제시하기 위해 직설적 방식으로 써 놓았다면, 윤리교과서쯤에서 타락했을 것이다. 이 수필은 이런 보편적인 신변수필이 갖는 취약함에서 일탈하여 예술적인 승화를 꾀하고 있다. 수필어의 사용이 그러하고 정서의 동원이 그러하다. 오랜 세월 세상살이를 하면서 알게 모르게 화자의 내면 속에 용해되어 정서화 되고 사상으로 고착된 정신세계가 한 편의 작품 속에 이렇게 녹아 흐른 것이다.
이 수필의 묘미는 이들 세 가지의 화소가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고 통합화의 과정을 거쳐 결미 부분에서 “나는 오뚝이 모양을 한 달걀을 보면, 오뚝오뚝 오뚝이 인생을 배울 것만 같다. 게다가 싱싱한 달걀을 대하면 유난히 예뻐해 주셨던 시부모님과의 추억들을 잠시나마 회상할 수 있어 좋다. 또 삶은 달걀에게선 친정 엄마의 따스한 체취가 느껴지는 것만 같다. 나는 달걀을 좋아한다. 싱거운 추억거리와 내 인생의 영원한 노tm탤지어를 사랑하기에” 라는 말로 마무리하고 있다. 확연한 주제의식을 갖고 독자들에게 메시지로 전달되고 있다는 점으로 적지 아니 감동을 자아내게 한다. 자족 사이에 뜨거운 사랑, 이는 말로 하는 것이 아니다. 별스러운 것 같으면서도 잔잔하게 파문일 일구는 ‘사랑’이 참으로 아름답다. 세상 모두가 이렇게 살 수 만 있다면 무엇이 걱정일까. 이 수필은 아주 작은 일상이지만 이를 통해 독자들에게 주는 메시지는 엄청난 효과를 지니고 있다. 특히 이 수필의 강점은 작가의 건강성에 있다고 하겠다. 세상을 부정적 단견으로 보지 아니하고 긍정적 시선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우리를 기쁘게 한다.
그렇다. 수필문학은 분명 자잘한 일상을 중심으로 엮어지는 신변의 이야기에 불과하다. 그러나 수필이 여기에 이르면 감동과 정서의 파장은 엄청난 것이 된다. 이 점을 “수필의 특성도 모른채 ‘신변잡기’라고 매도하기 일쑤인 소아병적 기질의 놀자나 비판자들이”귀담아 들어야 할 일이고, 수필을 창작하는 수필가들도 자기반성의 계가가 되어야 할 줄 안다.
<작품 및 감평 자료 참조 : 한상렬箸 ‘수필 창작과 읽기’에서>
[출처] [본문스크랩] 수필을 어떻게 쓸 것인가(원고내용)|작성자 추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