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란 무엇인가? 예배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 간의 교제 혹은 만남"이다(로버트 웨버,
1999 : 8 ; 김소영, 1977 : 39). 본질적으로 예배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대한 인간의 응답으로써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봉사와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교회의 봉사의 관계 속에서 전개되는 대화의 사건이다(정일웅, 2000 : 146). 이것이 학자들의 예배에 대한 정의이다.
학자들의 이야기가 신학적인 통찰력을 담고 있긴 하지만 보통의 성도들에게는 조금 낯설기 때문에 우리는 보통의 성도들이 생각하는 예배에서 출발하려고
한다.
소박하게 말하자면 예배는 하나님께 기도와 찬양과 헌금을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는 것이다. 가끔씩은
예배에 성례식(세례와 성찬)이 포함되기도 한다. 주일 오전 예배, 주일 오후 예배(찬양 예배), 수요 예배(기도회), 및 금요 예배(기도회)를
보통 공(公) 예배라 한다. 그 외에도 가정 심방이나 환자 심방 등의 심방 예배가 있고 교회의 각종 회의나 행사에 앞서서 드려지는 예배가 있고
또한 교역자 없이 평신도들이 중심이 되어서 드리는 구역 예배나 가정 예배가 있다. 이뿐 아니라 개업 예배, 주택 구입 예배(입택 예배), 칠순
기념 예배, 돌 예배, 그리고 생일 축하 예배와 같은 것들도 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을 다 동일한 의미에서 예배라고 말할 수 있을까? 혹시
예배라는 말이 무분별하게 남용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외에도 많은 질문들이 있다. 교회의 정규적인 예배가 신앙 생활에서
필수적인가? 주일 예배 대신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예배나 인터넷의 사이버 예배를 드리면 안되는가?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인가? 주일
오전 예배를 경배와 찬양 식의 예배로 드릴 수 있는가? 성가대는 꼭 있어야 하는가? 예배 시간에 좀 늦게 가도 헌금 드리고 설교 들으면 예배의
중요한 부분을 다 충족한 것이 아닌가? 축도를 못 받으면 예배는 별로 소용없고 예배 시간에 좀 늦었어도 축도를 받으면 예배를 통한 축복은 받을
수 있지 않은가? 등등.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면 예배에 대한 신학적 성찰이 필요하다. 물론 신학적 성찰을 통해서 모든
질문에 대하여 명쾌한 답변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 글은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답변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지도 않다. 필자의
의도는 이미 언급한 여러 가지 질문들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 깊이 생각하려면 반드시 예배에 대한 신학적 성찰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신학적 성찰의 과정을 진지하게 밟아나간다면 이 질문들에 대한 답변을 못한다고 하더라도 예배에 대한 바른 시각을 정립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이 예배라는 주제에 대하여 표면적인 것에만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뿌리에 해당하는 근본적이고 원리적인
것에 더 많이 관심을 갖자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신학이라는 말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꽤 있을 것 같다. 그런
사람들은 신학이란 추상적인 이론에 불과하고 현실적인 신앙 생활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으며 차갑고 메마른 것이라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살아있는 만남의 체험이지 이론에 불과한 신학은 별로 쓸모가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넓게 보면 그러한 생각 역시 하나의 신학적
입장이다. 폭넓은 관점에서 본다면, 그것은 신비주의, 경건주의, 부흥 운동주의, 혹은 은사주의적인 입장에 해당한다. 자신의 생각이 이미 어떤
특정한 신학적 토대 위에 있는 것임을 모른다면 그는 신학적 반성의 힘을 잃어버리고 타의에 의해 이리저리 떠밀려 다니게 되고 말
것이다. 좋음과 싫음에 상관없이 이미 우리는 신학의 지평 안에 있다. 바른 신학은 항상 성경에 근거한다. 성경을 떠난 바른 신학은
없다. 동시에 신학은 역사성을 가진다. 과거의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성경에 근거하여 자신의 신학을 세웠다. 교부들도 종교개혁자들도 다 성경적
원리에 근거하여 자신들의 신학 체계를 정립했다. 그들은 자신의 신학이 성경적이라고 믿었다. 신학적 체계와 성경적 원리는 이런 면에서 동일한
차원을 갖는다. 오늘날 우리가 과거의 신학적 전통을 무시하고 성경에서 직접 어떤 원리를 찾겠다고 고집하는 것은 오히려 성경을 무시하는 처사다.
과거의 신학자들도 역시 성경에서 신학적 원리들을 찾아냈다. 그들이 찾아낸 성경적 원리를 무시하고 우리가 직접 성경을 보고 찾아낸 성경적 원리만을
주장하는 것은 일종의 영적 교만이다. 그러므로 정말로 성경적 원리를 든든히 세우기를 원하면 과거의 신학적 전통 즉, 과거 신학자들의 신학적
작업과 성찰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 이 짧은 글에서 과거의 모든 신학자들과 대화할 수 없다. 주로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들과
18세기 이후 영어권 신학자들의 신학적 작업의 일부를 간단히 살펴보면서 그들의 예배관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들을 찾아내려고
한다. 그 당시 사람들이 어떻게 예배를 드렸는지는 지금 우리의 관심이 아니다. (관심 있는 사람들은 이 글 말미에 있는 참고 문헌 중 한 두
권을 보면 유익할 것이다.) 우리의 관심은 과거 신앙 선배들의 교훈을 통하여 오늘날 우리 시대의 예배에 필요한 원리와 기본 정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칼빈은 예배에 관해서 4가지를 강조했다(존 레이스, 1992 : 210-214 ; 김영재, 1997 :
100-102). 첫째, 예배는 성경적이어야 하고 신학적으로 충실해야 한다. 루터는 성경이 분명하게 금지하지 않은 사항에 대해서는 자유롭게 예배
형식을 정해도 좋다고 생각했다. 반면에 칼빈은 성경적 원리에 비추어서 분명하게 검증된 것만 예배 형식으로 삼고자 했다. 물론 예배 시간, 예배
장소, 예배 순서 등의 사소한 문제까지 전부 다 성경적 비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신학적 의미를 가진 모든 문제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성경적 원리를 적용하기를 원했다. 둘째, 예배의 모든 순서는 회중들이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라틴어로 예배드리는 중세의 예배를
반대했다. 성경도 회중의 언어로 읽고 설교도 회중의 언어로 하고 찬송도 회중의 언어로 해야 함을 역설했다. 칼빈이 오르간 연주나 화음이 있는
찬송을 반대한 것은 그것이 찬송 가사의 분명한 이해를 방해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회중들이 예배를 이해하게 하기 위해서 교회의
교육을 매우 중시하였으며, 성찬식의 바른 이해를 위하여 교리 교육을 철저하게 시행했다. 셋째, 예배는 사람들의 덕성을 함양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덕성 함양이란 신앙 인격의 성장을 말한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신앙 인격이 성숙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넷째, 예배는 단순해야 한다. 칼빈은 예배가 너무 지나치게 화려하고 상징이 많은 것을 거부하고
또, 건축 양식에 있어서 겉치장과 인간의 영광에 헛된 관심을 쏟는 일을 싫어했다. 칼빈이 주장한 예배관은 오늘날에도 배울 점이
많다. 예배의 형식이나 순서 중에서 신학적인 의미를 가지는 모든 문제는 철저하게 성경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오늘날 이러한 성경적 신학적 검토
작업 없이 실용적이기만 하다면 무조건 예배에 이런 저런 요소들을 도입하는 일들이 많은데 이러한 행위는 무분별한 처사이다. 또한 예배의 이해
가능성 원리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회중의 언어로 예배해야 한다는 것은 많은 의미를 함축한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적용하자면, ① 난해한 신학적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회중들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평신도의 언어로 설교해야 한다는 점, ② 회중들이 잘 이해하고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예배가 되도록 계획해야 한다는 점, ③ 예배에 대한 교육을 강화하여 회중들이 예배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청교도들의 예배관은 칼빈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아주 비슷하다. 그들은 예배가 질서 정연해야 하고 또한
간소하고 단순해야 한다고 믿었다(리랜드 라이큰, 2000 : 248-252). 설교 시간은 한 시간 정도였다(Ibid. : 209). 우리
현대인들이 보기에는 긴 시간이지만 당시의 기준으로 보면 오히려 짧은 시간이었다. 청교도들의 예배에서 큰 특징 중 하나는 목사가
사제복 입기를 거부하고 평상복을 입고 예배를 인도한 것이다. 사제복 입기를 거부한 이 운동이 청교도 운동의 본격적인 시발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사실 사제복의 문제는 입어도 되고 안 입어도 되는 문제, 즉 예배의 자유에 속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청교도들은 사제복을 반드시 입어야 한다는
영국 국교회의 주장에 대한 반발로써 사제복 입기를 거부한 것이다. 청교도들은 그만큼 철저한 개혁을 원했고, 이 철저한 개혁에의 소망이 예배
개혁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한편, 다수의 청교도들은 예배서(기도서)를 사용하는 예배보다는 일정한 형식 없이 자유롭게 드리는 예배를 좋아하였다.
이것도 청교도 예배의 주요 특징이다. 하지만 예배서(기도서)가 하나의 지침으로써 필요하다는 것 자체는 부인하지 않고 그 존재를
인정하였다(Ibid. : 260 참조). 청교도의 예배는 예배의 고루한 형식을 탈피하고 예배의 자유를 보다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는
다수의 청교도들이 회중주의자들이었다는 사실과도 관계가 있다. 종교의 자유를 찾아서 신대륙으로 건너간 청교도의 주류는 대다수가 회중주의자들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예배에 있어서도 회중들의 자발적 참여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또한, 회중에 대한 강조와 함께 청교도의 예배에 관한 큰 특징은 가정
예배의 강조이다. 청교도들이 가정 예배를 강조했다는 사실은 학문적으로도 이미 널리 인정되고 있는 사실이다. 이와 같은 청교도의
예배관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예배의 자유에 대한 갈망과 예배드리는 회중에 대한 강조와 가정 예배의 중시이다. 특히 가정을 하나의 작은
교회로 보고 가장을 한 가정의 영적 지도자로 간주하는 그들의 사고 방식(Ibid. : 186-190)은 오늘날에도 큰 도전으로 다가온다. 기록에
따르면, 철저한 청교도 그리스도인들은 적어도 일주일에 두 번은 가정 예배를 드린 것으로 보인다(Ibid. :
188).
18세기 이후의 현대 개신교 예배는 크게 3가지 흐름을 가지고 있다(로버트 웨버, 1999 : 99-106).
(1) 첫째는 고정된 예배 형식을 거부하는 흐름이다. 이것은 분리주의적 청교도에게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초기의 침례교나 퀘이커 교도들은
예배서의 사용을 완전히 거부하고 예배의 고정된 형식을 타파하고 완전히 자유스러운 예배를 드리고자 했다. 예배를 전적으로 내적인 것으로만
간주했다. (2) 둘째는 이해를 강조하는 흐름이다. 이것은 회중 교회와 장로 교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장로 교회는 웨스트민스터 예배 규칙서에
따라서 예배를 드렸다. 일정 부분 예배의 고정 형식을 채용한 것이다. 장로 교회의 예배의 큰 특징은 성경 낭독과 설교를 크게 강조한 점이다.
설교를 통해서 회중들이 성경 말씀을 이해하는 것이 예배의 중심이 되었다. (3) 셋째는 체험을 강조하는 흐름이다. 여기에는 경건주의와
모라비안주의와 부흥 운동과 현대의 은사 운동이 속한다. 이들은 다 기독교 신앙을 형식적으로나 교리적으로 이해하고 외적으로만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고 개인적인 회심의 체험을 강조했다. 예배에서 교회의 객관적이고 집단적인 행위보다는 예배자 개인의 체험에 초점을 둔다.
모라비안주의와 웨슬레의 부흥 운동의 큰 특징은 찬송을 중요시한 점이다. 이들의 찬송은 대개 개인적 회심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개인적 체험을
강조하는 내용이다. 종교개혁 이후의 개신교에서는 일반적으로 시편과 기타 성경 본문의 내용에다 곡을 붙인 찬송을 불렀다. 그러므로
모라비안주의자들과 웨슬레안들이 직접 찬송을 만들어서 부른 것은 그 당시로 보아서 매우 혁신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결국 웨슬레를 통하여 널리
시행된 그러한 류의 찬송이 현대 개신교 예배의 한 특징이 되었다. 한편, 현대의 은사주의의 예배의 경우에도 체험을 강조하는 경향은 동일하다.
은사주의 예배가 가지는 독특한 특징은 예배에서 각 개인들의 은사의 사용을 장려함으로써 회중 각자가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예배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의 예배도 이러한 현대 개신교 예배의 흐름에 영향을 받고 있다. 한국의 경우는 장로 교회가 가장
세력이 컸기 때문에 이해를 강조하는 예배의 흐름이 주류를 이루었으나 점차 체험을 강조하는 예배의 흐름으로 바뀌고 있다. 경배와 찬양 식의 예배나
은사주의적인 예배를 이제는 흔히 볼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예배자의 주관적이고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참여를 고무한다는 점에서는 좋은 일이다.
하지만 너무 주관적으로 흐르는 예배는 본질과 목적을 쉽게 상실할 위험성을 내포한다. 그러므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예배의 형식에 대한 신중한
신학적 성찰의 작업이 필요하다. 그리고 주관적인 경향으로 흘러가는 예배의 제반 요소들에 대하여 신학적 의미를 묻고 검토해야 하며 그것이 성경적
원리에 부합한지를 주도면밀하게 살펴야 한다. 성경적 원리에 부합하고 신학적으로 타당하다는 확신만 있다면, 예배가 현대적 경향에 발맞추어 적당하게
주관적 경향으로 흐르는 것이 좋은 일일 수도 있다.
우리는 이제껏 예배의 역사를 간단하게 살펴보면서 배울 점들을
찾아보았다. 마지막으로 필자의 생각을 간단히 덧붙여 가면서 종합적으로 정리하고자 한다.
첫째, 성경에는 어떤 형식으로
예배를 드리라는 규정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의 형식을 적절하게 선택할 자유가 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예배의 원리는 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예배한다.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예배한다.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예배한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고 믿음과 순종으로 예배하되, 한사람 한사람이 예배할 뿐만 아니라 교회 공동체가 예배해야 한다. 예배는
삼위일체 하나님께 드려지지만 나아가 세상을 향한 봉사로도 표현되어야 한다. 종말 이후의 영원한 나라에서의 예배를 소망하면서 종말론적 예배를
드려야 한다." 이러한 예배의 원리들에 대하여 깊은 신학적 반성이 있어야 한다.
둘째, 예배의 신학적 원리 같은 것이
어렵게 느껴지고 별로 관심 없다고 하더라도 이것만은 명심해야 한다.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
그리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마음이다. 이것이 없으면 어떤 예배 갱신도 헛되다.
셋째를 하기 전에 말해둘 것이 있다.
예배는 객관적 요소와 주관적 요소가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아주 단순하게 말하면 객관적 요소란 예배의 외형적 모습이고 주관적 요소는
예배자의 마음이다. 객관적 요소로는 예배당의 외부와 내부의 구조, 예배 순서, 성례식, 그리고 예배에 사용되는 여러 가지 상징들을 들 수 있다.
주관적 요소는 주로 사람과 관련된 것으로써 예배 인도자, 설교자, 찬양 인도자, 그리고 회중들과 관련된 것들을 말할 수 있다. 이제 이러한
요소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셋째, 범교회적인 합의가 이루어진 예배서 혹은 교단적인 차원에서 만들어진 예배서가 있어야 한다.
예배서는 모범이 될 만한 예배 순서(성례식 포함)와 기도문 등의 각종 모범 사례를 수록한 책이다. 우리는 예배의 자유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고정된 형식의 예배에 얽매일 필요가 없지만 예배가 너무 자유분방하게 멀리 나가지 않도록 하기 위한 일종의 지침으로서 예배서는 있어야 한다.
예배서가 있어야 예배학이 성립하고 예배에 대한 신학적인 성찰이 가능해진다(김영재, 1997 : 69). 현재도 각 교단에 예배 모범이 있기는
하지만 거의 유명무실한 것으로 안다. 그런 예배 모범 말고 신학적 합의와 교회적 승인을 통해서 실제적인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 예배 모범이
필요하다.
넷째, 성례전 특히 성찬식이 지금보다는 좀 더 강화되어야 한다. 우리가 예배의 역사를 고찰할 때 성찬의 문제를
다루었어야 했지만 너무 중요한 주제라서 짧게 다룰 수 없었기 때문에 아예 논의 자체를 생략했다. 성찬은 예배와 관련해서 매우 중요한 주제이지만
현대인들 특히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루터는 한달에 한번씩 성찬식을 행했고 쯔빙글리는 1년에 4회 성찬식을 행했다.
칼빈은 매주 성찬식을 하기를 원했지만 쯔빙글리식의 전통이 관행이 되는 바람에 1년에 4회 성찬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거의 관례가 되어서
18세기 이후 미국의 각 교회에서도 대개 1년에 4회 정도의 성찬식을 행하게 되었다. 한국 교회는 대체로 1년에 1회 내지 2회의 성찬식을
한다. 이것은 너무 횟수가 너무 적다. 성찬식은 최소한 1년에 4회 혹은 매달 1회 행해야 한다. 왜 그런가? 예배는 객관적 요소와 주관적
요소가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현대에 오면서 점점 예배의 객관적 요소는 약화되고 주관적 요소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 예배의 형식 자체를 아예 무시하고 무제한적으로 자유로운 예배를 드리는 것이 오늘날의 형편이다. 성찬식은 그 자체로 예전적인 성격을
가진다. 성찬식에서 사용되는 떡과 포도주는 그 자체로 객관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메시지를 전하는 강력한 수단이다. 설교와 비교해본다면, 설교는
설교자의 주관적인 측면, 즉 신앙 인격과 영적 지식의 정도에 따라서 상당 부분이 좌우되지만 성찬식은 그 자체로 객관적인 은혜의 수단이다.
그러므로 성찬식을 자주 시행할수록 예배의 객관적 요소가 잘 보존된다. 어떤 방법으로 성찬을 강화할 것인가에 대한 연구가 있어야
한다.
다섯째, 예배당의 구조에 대해서도 신학적 의미를 물어야 한다. 예배당 건물의 외형적 측면도 중요하지만 예배당 내부
구조의 신학적 의미가 더 중요하다. 한국 교회의 경우 예배당 내부 구조의 형태는 크게 3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이중 강단이다. 예배
인도자와 설교자가 사용하는 중앙 강대상이 있고, 그 아래에는 작은 강대상이 있다. 중앙 강대상은 성역화 되어있어서 아무나 함부로 올라갈 수 없는
자리로 인식된다. 강단 뒤에는 휘장이 있어서 강대상이 있는 자리는 거룩한 자리라는 인식을 심화시킨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속 사건 이후에 지성소 휘장이 갈라짐으로써 누구나 그 거룩한 자리에 다 들어갈 수 있다는
만인제사장의 원리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그리고 아래의 작은 강단은 원래 성찬상이었다. 그런데 성찬상이 제2의 강단으로 사용됨으로써 성찬의 의미가
약화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중 강단은 종교적 계급 구조를 강력하게 암시한다. 이중 강단의 존재 자체가 많은 신학적 문제점을 안고 있으므로 마땅히
갱신되어야 할 것이다. 다른 하나는 강단이 예배당의 양쪽에 배치되어 있는 경우이다. 회중석에서 볼 때 왼편은 설교단이고 오른편은 성경 낭독대인데
성경 낭독대는 예배 인도자와 기도자가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리고 가운데 벽면에는 성찬상이 붙어 있다. 이것은 성찬이 예배의 중심이 된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이러한 구조는 주로 로마 가톨릭과 영국 국교회에서 취하는 방식인데, 오늘날 한국 개신교 내에서도 성찬상을 가운데 두는 방식을
많이 사용한다. 이것은 신학적으로 반성해야 할 문제이다.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은 예배의 중심을 설교로 보았다. 그래서 설교단을 예배당의
한가운데 배치하고 설교단 앞에 성찬대를 두었다. 또 다른 하나는 아예 설교단이나 성찬상이 없는 무구조의 구조를 취하는 예배당이 있다. 이것은
현대의 경배와 찬양 식의 예배가 유행하면서 생겨난 풍조다. 찬양을 강조하다 보니 예배당 전면을 무대로 사용하고 설교단이나 성찬상을 필요할 때마다
간단하게 설치하여 사용한다. 이러한 방식은 잘못되었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교회의 2대 표지는
설교와 성례전이다. 예배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설교와 성찬이다. 설교단과 성찬상은 교회의 교회됨을 나타내주는 표지로써의 상징적 기능이 있다.
그러므로 설교단과 성찬상을 아예 없애버리고 그 자리를 무대화하는 것은 교회의 표지를 소홀히 여기는 처사요, 예배의 가장 중요한 요소를 경시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글이 너무 길어지니까 여기까지만 하자.
여섯째, 예배 순서의 세밀한 부분에까지 신학적 의미가
있는 부분은 다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예배 시작을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가? 예배 순서 중에서 회중들이 화답하는 순서를 어떻게 만들어야 할까?
성가대가 찬양할 때 예배 인도자(또는 설교자)는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주로 장로들이 담당하는 공중 기도에 대한 교육은 필요한가? 헌금은 어떤
방법으로 드리게 해야 하는가? 예배 중에 헌금자의 명단을 일일이 호명해도 괜찮은 것인가? 교회 광고는 예배 순서 속에 들어가는가 예배 끝난 후에
해야 하는가? 축도는 하나님의 축복을 선포하는 것인가 아니면 예배 후 하나님의 복주심을 간구 혹은 기원하는 것인가? 이 모든 문제들이 다 신학적
성찰이 필요한 부분들이다. 신학적 의미가 있는 예배 순서에 대해서 민감할 줄 알고, 성경적 원리에 비추어서 검토하고 논의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일곱째, 회중들이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이것은 예배의 주관적 측면이다.
종교개혁자들이나 청교도들이 회중의 언어로 예배하는 것을 그토록 강조한 것도 회중의 자발적 참여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설교 시간에도 회중들은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설교를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기록하고 또 기록한 것을 가정 예배를 드릴 때 사용하고 성도들 상호 간에 토론하는 의제로
삼기도 했다. 현대에 오면서 설교 시간이 점점 회중들의 필요에 부응하지 못하고 회중들과 동떨어진 것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은 거의
설교자의 책임이다. 설교자들이 설교 시간에 회중들의 적극적 참여가 가능하도록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한편, 경배와 찬양 식의 예배와
은사주의적 예배가 발달하면서 회중들의 자발적 적극적 참여가 상당한 정도로 고무되었다. 회중의 참여라는 면에서 좋은 현상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예배당이 무대화되면서 회중들이 쇼를 관람하는 관객과 같은 위치에 머물게 되는 위험성도 내포되어 있다. 우리에게는 예배의 형태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다만 어떤 형태의 예배이건 간에 회중들의 자발적이고 적극적 참여가 필요하다는 이 원리는 꼭 붙잡고 있어야 한다. 이 원리에 따라서
어떻게 회중들의 참여를 유도할 것인지에 대해서 끊임없이 연구하고 계발하는 일이 있어야 한다.
이제 조금 더 실제적인 문제를
2가지만 지적하고 글을 맺으려고 한다.
여덟째, 어느 정도의 예전적 형식을 갖춘 예배를 주 1회 드리고 그 외에는 자유롭게
예배를 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가능하다면 주일 오전 예배를 예전적 형식을 갖추고 나머지의 경우에는 자유롭게 예배드리는 것이 좋겠다. 하지만
주일 오전 예배를 불신자들을 위한 예배로 계획한다면 주일 오후 예배를 예전적 예배로 드리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감사와 순종의 마음을 가진
예배자들이 있고, 기도와 찬양이 있고, 또 말씀의 선포가 있다면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예배가 아니겠는가?
아홉째, 여러
가지 많은 명목으로 행해지는 예배에 대하여 좀 절제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교회 안에서 예배가 너무 많다. 어떤 회의나 행사를 할 때 예배드림으로
시작하자는 정신은 좋다. 하지만 반드시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은 아니다. 기도함으로 시작할 수도 있고, 함께 찬송하고 회의나 행사의 시작을
선언함으로써 시작할 수도 있다. 예배가 너무 많아지면 오히려 예배를 소홀히 여기는 마음이 틈탈 여지가 생긴다. 절제가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개업 예배니 칠순 예배니 돌 예배니 생일 축하 예배와 같은 수많은 예배들에 대해서도 한 번쯤은 진지하게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 예배의 주인공은
사람인가 하나님인가? 예배는 오직 하나님께서 마땅히 받으셔야 할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드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모임에서는 예배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러면 예배말고 다른 무슨 말을 사용해야 하는가? 대안적인 좋은 말은 잘 떠오르지 않는다. 그냥 단순하게
개업 축하 모임이나 칠순 축하 모임이라고 불러도 괜찮지 않을까? 함께 모여서 축하하고 서로 교제를 나누는 일은 아름답다. 다만 예배라는 말을
남용하는 것은 조금 절제했으면 좋겠다.
부족하지만 필자 나름대로 예배를 신학적으로 성찰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려고 했다.
독자 제위께서 이 글을 통해서 예배에 대한 관심이 새로워지고 또 예배를 신학적으로 성찰하는 일이 정말 필요하다는 의식이 생기게 되기를
바란다.
참고 문헌 김소영, 「현대예배학」,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1997. 김영재, 「교회와 예배」, 서울: 합동신학대학원출판부, 1997. 라이큰, 리랜드, 「청교도-이 세상의
성자들」, 서울: 생명의말씀사, 2000. 레이스, 존, 「개혁주의란 무엇인가?」, 서울: 반석문화사,
1992. 웨버, 로버트, 「예배학」, 서울: 생명의말씀사, 1999. 일리온 존스, 「복음적 예배의 이해」,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1995. 정일웅, 「기독교 예배학 개론」, 서울: 이레서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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