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치고 힘든 상황을 모두 맞고 있다.
현재 뉴사우스 웨일즈의 감염자수는 나날이 증가하고 있고 백신접종률은 저조하다. 신종변이는 개발된 백신을 비웃고 있다. 백신을 아에 맞으면 안된다는 부류도 있고 아스트라제네카만은 피해야 한다는 사람도있고 백신무용론을 바이러스처럼 양산하여 전파하는 유튜버들도 있고 정부의 방침에 따라 백신을 맞는 사람도 많다. 록다운으로부터의 자유를 외치며 마스크를 벗고 손에 손을 잡고, 살과 살을 맞대며 거리로 뛰쳐나온 인간들도 수천이나 되었다. 스스로 감염인지를 못하고 시위에 참여한 자들은 동료에게 바이러스를 옮겼고 결국 자신들의 사랑하는 가족 친지뿐아니라 그가 속한 커뮤니티의 자유를 빼앗고 있다.
주정부는 시민의 혈세를 풀어 밑빠진 독에 물을 붓고 있다. 비판을 등에 엎고 다소 뒤늦게 접종에 박차를 가하고 있지만 한 치앞도 내다 볼 수 없는 상태이다. 온라인 리테일은 사상최대의 호황을 누리고 있고 여행업이나 다이닝위주의 식당들, 필수비즈니스에 속하지 않는 소규모자영업자는 정부만 바라보고 있고 자구책을 구하거나 자포자기하고 있다. 매일 업데이트되는 주정부 발표에 저마다 한마디씩 불만을 토로하며 때로는 소요를 일으키고 선동하고 예언하니 살면서 말로만 듣던, 책에서만 보던 난세라는 것이 바로 지금인 것 같다. 난세와 꼭 붙어다니는 영웅은 아직 도래하지 않고 있지만 후대의 사람들은 기어이 한 두명을 만들어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혹은 세계를 구한) 영웅을 만들어 칭송할 것 같다. 난세와 영웅이란 사람들의 서사구조에 너무 잘 팔리는 짝궁이기 때문이다.
공자가 예기에서 말한 난세란 지금처럼 세계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지는 재난을 의미하기 보다 어느 커뮤니티(혹은 국가)의 수준을 측정하여 분류하는 용어로 쓰였다. 천하위공, 즉 천하가 공공의 것이었다는 대동사회, 그것만은 못한 소강사회, 그리고 그것만도 못한 사회를 통칭해 난세로 불렀다. 공자의 대동사회, 맑스의 공산주의, 사도행전 이장에 등장하는 이상사회의 개념이 얼마나 같고 다른지는 모르지만 작금의 사태로 우리는 적어도 몇가지는 확인 할 수 있었다.
하나는 소위 선진국들이라고 하는 서구국가들의 민낯이었다. 팬데믹에 대한 시민의 의식수준의 밑천들을 관찰한 할 수 있었다. 특히 (모두가 인정해 주면 좋겠지만) 스스로를 선진국시민으로 불러야 하나 망설이던 한국인의 눈에는 잘난척하더니 뚜껑을 열어보니 두루마리 휴지들만 사제끼고 별거 없었다는 자신감과 모범방욕국이라는 칭송을 들을 수 있었다. 두 번째는 (뉴사우스웨일즈의 프리미어의 말대로) 정말 바이러스는 누구도 차별하지 않았다. 톰 행크스도, 보리스 존슨도, 백신이 필요없다는 트럼프도 모두 바이러스 앞에서는 평등하였다.
초기에는 한국이나 대만처럼 비교적 규모가 작고 행정력이 강해 국가 주도식으로 강력하게 대처한 (다른말로 사회주의식으로) 나라들이 선전하는 듯 했지만 현재의 델타변이 앞에서는 봉쇄도 통제도 효과가 없다. 신규 감염발생자수는 수는 객관적인 '숫자'임에도 불구하고 속해있는 사회에 따라 전혀 보정이 되지 않은 채로 체감되고 있다. 예를 들면 연일 3천이 넘는데도 올림픽을 치르는 일본, 백방으로 애를 써도 2천에 근첩하고 있는 한국, 글을 쓰는 시점에 돌파한 200여명이란 숫자에 모두가 경기를 일으키는 호주. 매일 3만 5천을 육박함에도 불구하고 종식을 선언한 영국, 국민의 30퍼센트는 백신무용론을 믿으며 최대백신 생산국임에도 접종을 거부하는 다수가 있는 미국, 너무 사상자의 숫자가 커 집계조차 못하는 인도, 칠레정도를 제외하고 전 대륙이 초토화된 남미... 걸려죽던지 굶어죽던지... 집단병리적 사회현상은 록다운이 길어질 수록 금방 만나게 될 것이다.
찰즈다윈의 예측은 맞았다. 시드니의 0번환자로 알려진 공항운전사가 순례하신 본다이 쇼핑센터에서 어느 감염자가 확진자와 접촉한 시간은 십여초에 불과했다. 델타변이의 전파력이 쇼핑센터의 에스컬레이터를 비추는 폐쇄회로티비에 잡혀 생생하게 방송되었다. 하루에도 수십개씩 재호한국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질문들 '씨바 나는 이렇게 규칙을 잘 지키고 이렇게 강력히 록다운을 하는데 도대체 왜 감염이 왜 줄지않냐'는 질문에 델타변이의 전파력을 대입하면 이 방정식이 쉽게 풀린다. 이 공식을 다윈은 Natural Selectio 자연선택으로 불렀다. 코로나바이러스는 빌게이츠, 중국정부,혹은 악마의 계획에 의해 심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변이의 발생과 전파는 오롯히 자연선택을 따르고 있다. 3F 라고 부르는 Fertility, Fidelity, 그리고 Fecundity 의 조건, (다산력, 생산력, 그리고 복제율)에 의해 변이가 생성되고 전파되고 이제 스스로의 치사율을 낮추고 전파력을 높여 영생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
대부분의 물리법칙은 시간이 지나면 새로운 발견으로 수정되거나 한정된다. 다윈이 발견은 아직 도전받고 있지 않는데도 이를 무시한 팬데믹 초창기의 노르딕나라들의 대응-집단면역-은 발상도 무모했고 결과도 참혹한 전략이었다. 왜냐하면 바이러스의 초기의 치명률이 높다는 것은 새로운 발견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 때 극성이었던 이볼라(에볼라)바이러스를 보면 자이르 변이가 90퍼센트의 치사율이 올랐다가 수단을 거치며 (60%) 우간다에서는 25퍼센트까지 감소한다. 초기에는 숙주를 죽이며 까지 전파에 집중하지만(알파변이) 바이러스 입장에서 안정권에 들어가면 굳이 숙주를 죽이며 자신의 생존을 위협할 필요가 없기때문이다(델타변이). 결국 독감처럼 인류와 공생하며 영생에 도달하기 유리한 입장이 되었다.
홍상수 영화제목처럼 그땐 완전히 틀렸던 집단면역이라는 처방이 백신접종률을 어느정도 달성한 영국에서 다시 시도하고 있다. 그들의 믿는 구석은 높은 백신 접종률이다.
현재의 난국을 타개하는 방법은 백신이라는 주장을 나는 반박할 수 없다. 온라인에서 발견한 백신 반대자들에게 예민반응이 일어났다. 그들이 풍기는 극우기독교단체, 극우정치성향의 냄새는 후각이 예민하지 않아도 맡을 수 있었다. 그들이 제시하는 증거들을 찾아서 읽어 보았다. 가짜 뉴스도 있었지만 그보다 기사를 교모히 왜곡한 것이 더 많았다. 예를 들면 외신의 원본은 '하버드 연구결과에 의하면 백신을 맞지 않는 사람들의 학력수준이 의외로 높았다'가 원문이라면 이걸 '백신을 맞지 않는 것이 지적인 결정'으로 둔갑을 하거나 '백신을 맞고 시간이 지나 항체가 감소하였다'라는 기사는 '그렇기 때문에 죽을때까지 맞아야 한다'로 둔갑하였다. 좀더 원색적인 주장은 백신에 개인정보를 해킹하고 디엔에이구조를 바꿔 수명이 앞으로 5년이나 10년밖에 남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내 엉성한 짐작으로는) 미국은 이런사람들이 인구의 2-30퍼센트는 되는 것 같고 한국과 호주는 한 10퍼센트정도 되는 것 같다. 한 사람의 신념을 바꾸기가 인류전체의 치료제를 개발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것을 안다. 문제는 신념이 강한 사람의 일부는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며 자신의 신념을 설파하고 다닌다. 타이밍이 너무 좋지 않다.
어려움은 이들의 논리가 헛점만으로만 점철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스테이크를 굽기 전 뿌려놓은 후추처럼 고기에 후추가 닿아 있는 부분을 안 닿아 있는 부분과 분리하여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진영을 나눠 싸울 땐 우리는 (언제나 그렇듯) 상대를 (완결 순수한)멍청이로 인식하는 오류를 범한다. '이런 확실한 증거를 보고도 그런 이야기가 나오냐, 어떻게 그런 걸 믿냐','어떻게 그 당을 찍냐'는 식으로 접근하면 두 진영은 평행선을 달리게 된다. 제시하는 주장의 근거는 아직 펼쳐 볼 단계에 이르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 수사학의 설득의 요소 중 가장 크리티컬한 요소는 로고스가 아닌 파토스이기 때문이다. 맞는 소리, 바른말인데도 싫은 사람이하는 말이라면 다 싫다. 몇 해 전 진중권이 조국을 비판하는 강연에서 수사학을 언급하며 한국사회를 윤리적으로 만들라고 뽑아준 민주당에 에토스가 없다고 맹렬히 비판했다. 그는 에토스를 에틱스(윤리학)로 해석했는데 예전부터 논리와 데이터로 이름을 얻은 그가 그 무렵즈음 해서 스스로에게 논객으로서의 사망선고를 한 사건으로 나는 기억한다. 에토스는 화자자신 혹은 화자의 권위인데 백신무용을 주장하는 사람은 '이왕재'가 아니라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이왕재'가 되어야 하고 '석사진중권'이 아닌 '동양대교수 진중권'이 되어야 한다. 두 경우 모두 '전'이라는 중요한 접두사는 가끔 의도적으로 생략한다.
당신은 보수인가 진보인가의 질문처럼 백신은 안전한가 위험한가에 대답도 단답형이 될 수 없다. '아스트라제네카의 혈전위험 확률은 아스피린복용으로 죽을확률보다 백배 낮고, 피임약복용으로 죽을 확뷸보다 열배 낮다' 라는 식의 우회적 대답밖에 될 수 없다. 같은 맥락으로 현재의 백신은 충분한 검증없이 만들어 부분승인을 받았다는 것도 사실이고 잠재적 위험을 내포할 확률도 있다.
하지만 우리의 모든 행동과 결정은 이분법적 바이너리의 형태를 띄고 있다. 짜장면이든 짬뽕이든 하나는 시켜야 한다. 결정을 내리기 위해 우리 내부의 계산기를 두들긴다. 백신을 맞는 것이 나의 감염위험을 줄이고 커뮤니티의 감염을 막고 록다운으로 부터 탈출을 앞당길 거란 계산은 복잡하지 않았다. 90퍼센트의 1차 접종, 50퍼센트의 2차접종이 우리에게 자유를 줄 것이다.
그때는 틀렸지만 지금은 맞다.
첫댓글 백신상황에 대한 합리적 결론 완판이네. 내 전화 번호가 바뀌고 전화번호가 모두 사라졌네. 0421711419로 번호 남겨요.
많이 답답하네요. 선생님. 건강 챙기시고 안전하게 지내시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