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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3:1-5) 여성인권을 무시하는 가부장적인 하나님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를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네가 함께 하던 하녀들을 둔 보아스는 우리의 친족이 아니냐 보라 그가 오늘 밤에 타작 마당에서 보리를 까불리라 그런즉 너는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타작 마당에 내려가서 그 사람이 먹고 마시기를 다 하기까지는 그에게 보이지 말고 그가 누울 때에 너는 그가 눕는 곳을 알았다가 들어가서 그의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우라 그가 네 할 일을 네게 알게 하리라 하니 룻이 시어머니에게 이르되 어머니의 말씀대로 내가 다 행하리이다 하니라.”(룻3:1-5)
나오미의 교묘한 결혼작전
이삭을 주우러 나간 첫날에 룻은 밭주인으로 인자하고 믿음이 좋은 친족 보아스를 만났습니다. 율법규정을 넘어서는 보아스의 친절한 배려로 약 두 달간의 추수철 동안에 룻은 그의 밭에서 아무 방해 없이 양껏 이삭을 주울 수 있었습니다. 워낙 넉넉한 양이라 당분간 생계 걱정을 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시어머니 나오미는 그 첫날 이후로 룻의 재혼을 위해서 본격적으로 기도했을 것입니다.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를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자기 생각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안식할 곳’의 원어의 뜻은 ‘평화스럽고 안정된 생활 여건’인데 일부 영어 성경은 ‘가정’ 혹은 ‘남편’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당시로선 젊은 과부가 안식할 곳이란 재혼하여 가정을 갖는 길 뿐입니다.
본문은 나오미가 그 생각을 실현하려고 교묘한 계획을 세우는 내용입니다. 우선 룻더러 목욕 단장하고 나가서 주인 보아스가 종들과 함께 먹고 마신 후에 타작마당에서 누워 잘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이 일이 어느 때인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지만 추수를 마치기까지 룻은 이삭을 주었다고 말한 후(2:23) 본문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추수나 양털 깎는 일을 마치면 수고한 종들을 위해서 잔치를 벌여주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문맥으로나 당시 상황으로 봐서 추수철 마지막 날일 것입니다.
그리고 나오미는 룻더러 보아스의 발 치의 이불을 들고 누우라고 즉, 잠자리를 같이 하라는 노골적인 지시를 했고 룻도 그대로 순종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실제로 어떤 여성분이 한 남성이 너무 좋은데 자신을 친구로만 대하니까 술을 먹여 취하도록 유도해 동침함으로써 결혼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지금 보아스도 술을 마셨으니 마치 그와 같은 상황입니다.
보아스로선 나오미와 룻이 그렇게 나오리라는 사실을 꿈에도 알지 못했습니다. 이번에야말로 나오미는 떡 줄 사람은 생각지도 않는데 김치 국물부터 마시는 격입니다. 오늘날의 신자가 보면 믿음은 둘째 치고 윤리적으로도 비난 받을 일입니다. 지금껏 보여준 두 여인의 성품과 믿음에 비추면 조금 이해하기 힘든 일입니다.
물론 젊은 과부가 재혼하는 것은 전혀 하자가 없고 선한 일입니다. 계속 말씀드리지만 고대에서 과부가 재혼을 하지 않으면 거지나 창녀가 되는 수밖에 없습니다. 말이 거지이지 모든 것이 열악했던 상황인지라 생존을 위해선 정절을 온전히 지킬 수도 없을 것입니다. 지금도 홈리스 여인들이 성추행을 예사로 당하지 않습니까? 물론 룻이 재혼하지 않아도 보아스의 성품으로 봐선 계속해서 마음껏 이삭을 줍도록 할 테니 굶어죽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아스도 언제라도 가난해질 수 있고 또 언제 죽을지 모르니 무한정 그만 믿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나오미는 모압에서 돌아올 때부터 며느리들의 장래를 위해서 고향에 남아 재혼하라고 간곡히 당부했습니다.(룻1:9) 지금도 그 마음은 전혀 변하지 않았고 오직 룻이 잘 되기만 바랐기에 현실적으로 가능한 최선의 조치를 택한 것입니다. 룻 또한 시모의 그 따뜻한 마음을 잘 알았고 그러면 자기도 시모를 더 잘 모실 수 있으므로 선뜻 동의했습니다.
문제는 롯의 재혼상대를 본인의 의사나 선택과 관계없이 시어머니가 결정했다는 것입니다. 약 두 달간의 추수 기간 동안에 룻과 나오미는 보아스에 대해서 많은 대화를 나눴을 것입니다. 룻과 보아스의 직접적인 교류는 첫날 이후로는 없었겠지만 종들을 통솔하는 모습에서 그의 훌륭한 인품과 믿음을 계속 확인했을 것입니다. 룻의 재혼상대로 나이가 좀 많았지만 고대에는 별로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그때까지 보아스가 독신이므로 나이 많은 것이 오히려 룻의 재혼에 유리하게 작용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보아스보다 더 가까운 고엘이 있다는 사실을 나오미가 알았는지 여부는 성경이 침묵하고 있지만 몰랐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따로 고엘이 있는데 이렇게 하면 율법을 위반한 죄로 비난받아 마땅하고 나중에 첫째 고엘로부터 책임 추궁을 당하게 된다는 것을 나오미가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나오미는 룻의 여생을 맡길만한 남편감으로 보아스만한 사람이 없는데다 마침 근족이라 그와 재혼시키기로 계획했고 룻도 전혀 반대하지 않았으니 내심 보아스가 싫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나아가 율법은 계대 결혼해야 할 의무가 있는 고엘이 주저하면 여인은 성읍 장로들에게 재판을 제기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신명기25:7) 말하자면 하나님이 과부더러 계대 결혼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명한 셈입니다. 나오미가 이 결혼을 추진한 것 자체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선한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나오미가 지시한 이 방법이 과연 옳았는지는 따져봐야 할 것입니다.
기도는 반드시 결말을 봐야 한다.
타작마당은 추수한 단을 두들겨서 알곡을 떨어낼 수 있게 딱딱한 흙바닥이거나 편편한 돌을 깔아 놓은 곳입니다. 누구나 사용할 수 있게 꽤 넓었고 동네 가까운 어귀에 있었습니다. 보아스가 잔치를 마치고 편하게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데도 나오미는 타작마당에 누워 자리라 예상했습니다. 주인이라 곡식을 누가 훔쳐 갈까봐 남아서 지켰다기보다는 룻으로부터 평소에도 종들과 친밀하게 지내며 가끔 그곳에서 누워 잤다고 전해들었을 것입니다.
나오미는 추수기간 내내 룻의 장래를, 특별히 보아스가 고엘이 되어줄 것을 소원하며 기도했을 것입니다. 마지막까지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아무런 징조도 없었습니다. 이럴 경우 가만히 있는데 하늘에서 도깨비 방망이처럼 뚝딱 해결해주시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기도란 가부간의 확실한 응답을 받든지 최소한 그에 대한 분명한 징조, 증거, 보장을 받을 때까지는 지속해야 합니다. 말기 암 같이 아무 손을 쓸 수 없거나 하나님이 다 해주신다는 확실한 응답을 받지 않았다면 가만히 기다리고 있어선 안 됩니다. 모든 되어져 가는 정황을 이성을 동원해 지혜롭게 분별하면서 기도한 내용대로 하나씩 실천해 나가야 합니다.
나오미로선 아무리 룻을 보아스와 결혼시키고 싶어도 보아스가 나이가 많아서 선뜻 먼저 그런 말을 꺼낼 수 없는데다 평소에 인품도 점잖다는 점을 감안했습니다. 틀림없이 룻에게 매일 그날 있었던 일과 특별히 보아스에 대해서 꼬치꼬치 물었을 것입니다. 보아스도 자기를 싫어하는 것 같지 않고 계속해서 친절하게 대해준다는 대답을 들었을 것입니다. 이제 추수가 끝났는데 가만히 있으면 내년 추수까지 일 년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 때가서 기도해도 동일한 과정을 거쳐서 동일한 결과만 나올 것입니다. 모든 정황상 더 이상 기다릴 수 없고 행동으로 옮겨야 하고 기회는 오늘 하루뿐입니다.
룻이 보아스의 발 치의 이불을 들치고 눕는 것은 아내로 거두어달라는 구애의 표시입니다. 나오미는 그러면 “그가 네 할 일을 네게 알게 하리라”고 말했는데 모든 처분을 보아스에게 맡긴다는 뜻입니다. 만약 룻이 거절되면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으로 판단하고 깨끗하게 포기하면 됩니다.
나아가 나오미는 보아스의 인품이 워낙 훌륭해서 룻이 그런 제안을 한다고 해서 그 자리에서 선뜻 응하여 관계까지 갖지는 않을 것도 예상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보아스는 룻이 빈부나 나이를 따지지 않고 늙은 자기를 재혼의 상대로 택해 준 것을 감사하다고 말하면서(룻3:10) 그날 밤에는 룻의 정절을 지켜주었습니다.
따라서 나오미의 이 지시는 룻의 젊음을 활용하여 육체적으로 유혹하거나 술의 힘을 빌리려는 치사한 계략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 모든 처분을 맡기면서 지금까지 기도한 것에 대한 최종 응답 내지 증거를 받으려 한 것입니다. 나오미나 룻은 율법에 따라서 그분의 뜻에 합당하게 행했고 윤리적으로도 하자가 없었습니다.
독선적이고 고리타분한 하나님?
이제 공정하신 하나님이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하게 취급받을 수밖에 없고 윤리적으로도 하자가 있어 보이는 계대결혼제도를 왜 제정했는지 살펴볼 차례입니다. 아무리 가문의 기업과 이름을 유지시키는 것이 목적이라 해도 재혼 상대를 스스로 선택하도록 해서 여성의 권리를 보장해주어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실제로 이런 규정들 때문에 기독교 외부는 물론 내부로부터도 성경의 하나님은 남성만 우대하는 가부장적인 하나님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일부 교파에선 성경에서 하나님에 대한 남성대명사를 중성명사로 심지어 여성명사로 대체한 경우까지 생겼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율법을 제정하신 뜻을 잘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오해와 잘못입니다.
고대에는 여성은 몇 번 말씀드린 대로 자식을 낳는 기계, 성적 희롱의 대상, 노동을 하는 종, 사고 파는 재산 정도로만 취급했습니다. 한국만 해도 여자는 무조건 아버지가 정해주는 대로 결혼해야 했던 때가 그리 오래 전이 아닙니다. 오죽하면 여자는 평생 아버지 남편 아들 세 남자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속담까지 생겼겠습니까? 최근 탈레반 사태에서 보듯이 여성을 차별 학대하는 나라가 여전히 아주 많습니다.
간단히 결론부터 말하면 지금껏 여성의 인권을 무시하고 천대하는 자는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 남성이었습니다. 룻기의 배경도 하나님을 완전히 무시하고 자기 소견에 좋은 대로 행했던 사사 시대인지라 이스라엘이라고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 남성들의 사악함을 잘 아시기에 출애굽 후 곧바로 주신 율법 안에 이미 여성들을 보호해주는 조치 둘을 마련했습니다. 첫째는 아내를 함부로 버리지 말며 결정적 하자가 있어서 혼인을 중지하고 싶을 때는 이혼증서를 써주라고 했습니다. 둘째는 지금 살펴보고 있는 계대결혼입니다. 고대의 극도로 타락한 인간사회에서 이혼 당한 여자나 남편이 죽은 과부들이 거지나 창녀 신세로 전락하지 않고 재혼으로 안식할 수 있도록 보장해주는 최적의 방안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뜻은 구약시대엔 일부 혹은 모호하게 계시되다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후에 비로소 명확하게 드러났습니다.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줄곧 너희는 모세 율법에서 이렇게 저렇게 배웠으나 당신께선 이렇게 저렇게 다시 가르친다는 식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을 부인하고 새 것으로 대체하려는 뜻이 아닙니다. 율법을 제정하신 하나님의 입장에서 그 원래의 목적과 정신을 정확하게 가르쳐주려는 것입니다.
여성에 관한 계명만 따지자면 율법에선 단순히 간음하지 말라고 했지만 주님은 예쁜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도 간음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겉으로 드러난 행동으로만 판단하지 않고 그 마음의 중심을 본다는 뜻입니다. 또 율법에선 증서를 주면 아내를 버려도 되는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은 음행한 연고 없이는 절대로 아내를 버리지 말라는 뜻이었다고 다시 정확히 깨우쳐주셨습니다. 만약 음행하지 않았는데도 버려진 아내가 재혼하게 되면 그 여자와 새 남편 모두가 간음죄를 범하게 된다고 경고했습니다. 음행하지 않았는데도 버려지면 하나님의 뜻 안에선 그 여자는 여전히 전 남편의 아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유대랍비라면 절대 금기시 되었는데도 거리낌 없이 세상에서 손가락질 받는 여성들을 만나고 남성들과 동등한, 때로는 그 이상의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당신께서 가르치신 하나님의 온전한 뜻으로 몸소 먼저 실현해 보이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런 가르침은 현대 선진국의 윤리보다도 훨씬 고차원적이며 여성 인권을 온전히 보장해 줄 수 있는 방안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당신의 거룩한 뜻을 온전히 인간에게 적용하면 아무리 신실하고 경건한 신자라도 온전히 지키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실체를 죄에 찌든 인간이 직접 대면하면 그 자리에서 순식간에 소멸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온전한 윤리 기준 전체를 정확히 다 드러내면 그 엄중하고 거룩함을 제대로 깨닫는 것만으로도 인간은 숨이 턱턱 막혀서 죽을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윤리 중에 예수님이 일부만 모범삼아 가르친 산상수훈만 해도 제대로 지킬 수 있는 자가 과연 우리 중에 한 명이라도 있겠습니까?
십자가 복음으로 이끄는 율법
만약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온전한 윤리로, 아니 예수님의 산상수훈으로 율법을 주셨다면 어떻게 되었을 것 같습니까? 우상 숭배하는 이방 나라에서 사백 년간 노예로 지낸 그들이 제대로 이해도 못했을 것입니다.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로 헌신 순종하겠다고 서약할 리도 없고, 가데스 바네야에 이르기 전에 약속의 땅 가나안은 포기하고 짐 싸들고 애굽으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은 온 세상이 죄악으로 타락한 가운데 하나님을 아는 백성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요구사항입니다. 인간의 영적수준에 맞추어서 충분히 지킬 수 있는 내용입니다. 지금 우리 모두가 느끼기에는 엉성하다 못해 미개종교 같은 규정들입니다. 당시는 이스라엘을 제외한 모든 족속들이 힘으로 여자를 뺏은 라멕의 후예들이었고(창4장)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았던 소돔과 고모라와 방불한 모습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선 이혼증서와 계대결혼 제도를 통해 이혼녀와 과부의 인권을 보호해주는 간단한 모습만으로도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때로부터 약 천년 후 예수님 당시에 유대를 다스리는 분봉왕인데도 헤롯 안티파스는 이복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와 눈이 맞아 율법(레18:16)에서 금지한 결혼을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아니었지만 만약 에돔 족속에게도 이 두 제도가 있었다면 그런 불륜행각을 벌릴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이스라엘은 이 규정들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는데 이스라엘이 그랬다면 세상 모든 이들은 그보다 더 사악했다는 뜻입니다. 아담 이후로 세상에는 의인은 없고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롬3:13-15).
바울 사도는 또 이렇게 덧붙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3:19,20)
쉽게 말해 하나님이 율법을 제정할 때부터 인간이 제대로 지키리라고 기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믿고 따르는 이스라엘조차 하자가 있어 보이는 그 윤리기준도 제대로 지키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율법을 주신 그분의 진짜 본심은 모든 인간이 그 간단한 규정조차 지키지 못함을 처절히 절감토록 해서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영적으로 처절한 절망에 빠진 온 인류를 그대로 버려두지 않으시고 율법 외에 당신만의 온전한 의를 드러내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3,24)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기 죄 값을 대신 갚은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는 값없이 의롭다고 칭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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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하나님은 율법을 주시기 약 500년 전에 이미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웠습니다. 그는 두 번이나 자기만 살려고 거짓말로 아내를 팔아먹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자가 많아 보이는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세운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솔직히 저부터 당시 그의 입장이었다면 훨씬 더 비겁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윤리적으로 따지면 그도 천하의 죄인으로 당장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한 처지였습니다. 그러나 갈대아 우르에서 아이를 산 채로 불의 신에게 제물로 바치고 신전에서 성적으로 음란하게 제사 지내는 모습을 보고 영적으로 크게 고뇌했을 것입니다. 우상 신들이 너무 싫고 참 하나님이 계시다면 따르고 싶다는 소망이 생겼을 것입니다. 물론 그의 모든 영적 순례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그를 먼저 택한 후에 당신에 대해서 조금씩 알게 하고 당신을 따라오게끔 당신께서 이끄신 결과입니다. 그는 인생 말년에 자기 생명보다 귀한 외아들 이삭을 바치면서 오직 하나님의 긍휼만 간절히 소원했습니다. 따라서 아브라함도 사실상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 얻은 것이며 또 그래서 신약신자의 믿음의 조상도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으로 구원받은 일이 먼저 있은 후에 율법을 주셨습니다. 율법은 세상 모든 죄인들로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날 하나님의 완전한 의로 이끌기 위한 하나님이 마련한 예비 조치였습니다.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롬4:15) 율법을 제대로 지킬 수 있는 자는 한 명도 없으니 율법의 근본 역할은 모든 인간을 정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느 누구도 스스로 의로워질 수 없기에 율법의 공의보다 복음의 은혜부터 먼저 세우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당신의 백성들에게도 완전한 윤리보다는 당신의 대한 겸손한 믿음만 요구한 것입니다.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에게도 신약의 예수님처럼 단 한 치의 윤리적 하자는 없었습니다.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이 실제로 자행하고 있는 죄악의 타락상이 너무나 비참하고 가난했을 뿐입니다. 계대결혼을 두고 여성의 인권을 무시하는 독선적 규정이라거나 비윤리적이라고 비난할 자격은 그 때나 지금이나 인간 중에는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역설적으로 따지자면 계대결혼과 이혼증서는 간음도 죄가 아니며 성적인 문제는 오직 개인의 소견과 자유에 맡기는, 말하자면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헤롯 안티파스처럼 행하는 지금 세대에 더 필요한 제도일 것입니다.
종말을 맞는 신자의 자세
이번 주에 끔찍한 뉴스를 보고 많은 이들이 경악했을 것입니다. 뉴욕 시의 지하철에서 기차가 들어오자 갑자기 한 여성이 일어나서 자기 바로 앞의 통로에 서있던 여자를 기차 쪽으로 밀어버렸습니다. 둘은 서로 알지 못하는 생면부지의 사이였습니다. 그냥 자기 분풀이로 살인하려 한 것입니다. 밀쳐진 여인은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중태라고 합니다.
아무리 세상이 타락해도 이런 식의 범죄는 거의 없었으나 펜데믹 이후로 이런 말도 안 되는 범죄를 이제 거의 매일 뉴스에서 접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범죄율이 최고 높은 시카고에서 살인이 지난 일 년 만에 무려 30%나 증가했다고 합니다. 그 증가분이 바로 이런 종류의 아무 이유 없이 타인을 증오하는 무차별적인 살인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종말의 특징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딤후3:1-4) 잘 따져보면 이중에 지금 이 세대에 적용되지 않는 것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얼마 전까지는 전반의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정도였습니다. 후반의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라는 특징은 역사상 현세대가 가장 두드러질 것입니다.
뉴욕 지하철의 그 여인에게 정신적인 문제가 있었겠지만 모든 이가 무정하고 절제하지 못하고 사나워졌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뉴욕의 지하철에는 오늘도 그녀 같이 행동으로는 옮기지 않아도 마음속에 까닭 모를 증오로 가득 찬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이 타고 있을 것입니다.
최근의 펜데믹 사태나 지구온난화에 의한 자연재앙 같이 인간 외부 여건의 변화로 말세의 고통을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 내면 특별히 마음과 영혼의 왜곡 파괴로 인해 사람들 사이에 저주가 가득 차면 인류의 종말이 임합니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오직 하나 사람들 사이에 참된 사랑이 완전히 실종되었기 때문입니다.
해결책은 당연히 사람 사이에 사랑을 회복시켜야 하는데 완전한 참 사랑은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 죽음에 드러난 사랑뿐입니다. 인간의 내면에서 저주를 몰아내려면 바로 그 사랑을 받아서 인격체 전체가 하나님의 자녀로 바뀌는 것 외에는 불가능합니다. 인간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을 대적함으로써 자신만 높이려 들었고 필연적으로 인간끼리도 서로 대적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또 그 결과 모든 이가 자기 자신까지 미워하게 된 것입니다. 각 개인이 하나님을 다시 온전히 사랑하게 되어서 자신의 참된 정체성을 회복하고 자신도 사랑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실종된 사람 사이의 사랑을 다시 회복시키지 않고는 종말로 치닫고 있는 흐름을 절대로 멈출 수 없습니다.
바꿔 말해 이런 암울한 종말 시대에서 갈 바 모르는 세상에 소망의 빛을 비출 수 있는 사람은 예수 십자가 사랑을 받아 누리는 신자들뿐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종말의 특성을 설명하면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다고 결론 지었습니다. 앞에서 열거한 종말의 고통들을 이겨낼 수 있는 길은 경건의 능력뿐인데 그것이 속은 텅텅 비었고 껍데기 형식만 남았다는 뜻입니다. 세상을 바로 세울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인 경건의 능력이 실현되지 않고 있으니 당연히 종말일 수밖에 없습니다.
경건의 능력은 무엇입니까? 예수님 같은 초자연적 기적적 능력을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다. 경건의 모양은 교회에서 배우는 성경 교리와 기독교적 의식과 관습입니다. 능력은 모양의 반대이므로 성경 진리가 객관적 교리로 남아있지 않고 실제로 삶에서 실현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작금 세상에 소금과 빛으로 서는 신자가 너무 드물고 세상 사람들로부터 자기들과 같거나 더 나쁘다고 비난받고 있습니다. 심지어 신자들끼리도 서로 무정하고 미워하고 사나워졌습니다. 성적정체성, 낙태, 백신접종 같은 이슈에 대해서 좌우로 나눠져 서로 비방하기 바쁩니다.
신자는 보아스가 율법 규정을 넘어서는 사랑을 룻에게 베풀었듯이 일반 윤리를 뛰어넘는 예수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참되고 완전한 사랑을 주변에 베풀어야 합니다. 나오미와 룻도 뉴욕의 지하철 사건의 두 여인들처럼 처음에는 인종 문화 관습 종교가 다른 생면부지의 사람으로 만났습니다. 함께 여호와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자 하나님이 자기들을 죽음으로 갈라놓지 않는 한 서로에게 최선의 안식을 주려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뉴욕 지하철의 그 여인이 사탄의 멸망의 자리에 맨 앞에 서있다면 나오미와 룻은 그 정반대의 예수님 구원의 맨 앞자리에 서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모든 신자가 서야할 자리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인간이 참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길은 온전한 사랑을 하는 것뿐인데 먼저 예수님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어야만 가능해집니다. 예수 십자가만이 알파요 오메가일 뿐입니다. 신자는 입술로만 교리를 전하지 말고(경건의 모양) 어떤 희생과 수고도 아끼지 않는 삶으로써(경건의 능력) 예수 십자가가 세상 사람들에게 정말로 좋은 뉴스로 들리게 만들어야 합니다. 신자들이 경건의 모양이 아닌 능력으로 살아가지 않는 한 세상은 멸망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지금 같은 모습을 지속하면 아직은 뉴욕 지하철에 한 명의 여인이 이상한 짓을 했지만 서서히 아주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바뀌어 아예 지하철을 타지도 못하는 세상이 닥칠 것입니다.
박진호
첫댓글 오늘은 도와주시길 기도드립니다;;;
요즘엔 먹을것도 살 수 없는 형편이군요
후원이 없습니다 카페후원을 부탁드립니다 공과금을 내야합니다
공과금도 못내고 지병인 당뇨합병증 치료받으러 병원도 가지도 못해요
후원 참여가 없습니다 후원으로 도와주셔서 용기를 주십시요...
카페지기는 너무 힘든 시간을 보냅니다 늘 어렵게 살아가는데
코로나 사태로 후원이 거의 없어지니 하루하루 사는게 말이 아니네요,,
통신료 공과금 30만원과 치료비를 마련해야합니다
카페지기는 생활고를 겪고 있습니다 작은 나눔의 손길이 되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도와주신 분을 위해서 집사람 박경옥 전도사가 매일
기도해 드리고 있습니다.....
지병으로 투병하며 카페일로 소일하며 지냅니다 수입이 전혀 없이 살고 있습니다
예수 코리아 카페를 도와주실분을 기다리고 작정기도합니다 매월
자동이체 정기후원 회원님이 계셔야 카페를 운영 할 수 있습니다 공과금으로
30만원 병원약과 주사비가 30만원 40만원으로 먹을거라도 사야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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