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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예수가좋다오 원문보기 글쓴이: (일맥)
유교의 전통이강한사람 전도법
글쓴이: 신베드로
고린도후서10:3-6, 디도서3:9
고유 명절이 되면 부모공경을 가장한 우상숭배가 전국방방 곳곳에서 자행될 것입니다.
이 어리석고 가증스러운 우상숭배의 모태는 바로 유교입니다.
한번은저희 고모부님의 부친이 저희 할아버지께 "만약 내 아들을 교회에 데리고 가면 인연을 끊고 상종도 하지 않겠소"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고모부님의 가족은 유교를 숭상합니다. 이처럼 우리 나라에는 유교를 믿는 사람들이 꽤 됩니다. 그런데 유교는 버림받은 종교입니다. 유교의 본산지인 중국과 그리고 우리의 이웃나라인 일본에서는 유교를 벌써부터 폐기 처분했습니다.
1910년대초 아편전쟁의 패배와 그 후유증에 충격을 받은 중국의 지식인들은 중국을 망친 유교에 맹포격을 퍼부었습니다. 당시 지식인을 대표했던 후쓰는 '우리는 어느 길로 가야할 것인가'라는 글을 통해 유교의 폐해를 조목조목 열거한 후, '완전한 서양화'를 주장했습니다. 그의 주장은 '유교는 사람을 잡아먹는 것'이라는 공감대를 확산시키며 중국사회가 새로운 선택을 하도록 몰아갔습니다.
그리고,1966년 마오쩌똥에 의해 시작된 10년 문화대혁명도 유교를 공격목표로 한 것이 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유교의 폐해와 중국인들의 유교에 대한 피해의식이 얼마나 깊은 것이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중국인들은 중국을 망친 유교를 몹시 혐오했고, 미련 없이 버렸습니다.
한편,서구에 몰락한 중국의 모습에 충격을 받은 일본도 유교를 버렸습니다.
1868년에 출범한 메이지 정부는 새로운 일본 건설을 위한 연구에 착수했습니다. 그들은 서구 연구를 위해 총명한 청년들을 골라 영국으로 보냈는데, 그 중 한 명이 하얼빈에서 안중근에게 죽은 이토 히로부미였습니다. 뛰어난 한학자였던 이토는 철저한 서구화만이 강대국이 될 수 있고, 그것만이 식민지가 되지 않는 유일한 길임을 주장했습니다.
또한,메이지유신의 사상적 기초를 놓은 계몽사상가 후쿠자와 유기치 역시 '탈 아시아론'을 주장하며 중국 전통의 유학 문화를 맹비난했습니다. 그는 유교를 국가와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을 저해하는 적으로 간주하고 신랄한 비판을 퍼부었는데, 그의 유교에 대한 감정은 '대단히 증오에 찬' 것이었습니다. 메이지정부는 근대 국가 건설 성공을 위해 두 가지 점에 특히 유의했는데,
그 첫째가 중국문화의 잔재를 최대한 씻어버리고 철저한 서구화를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이와같이 중국과 일본은 벌써 100여년 전에 유교를 버렸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유교의 종주국인 중국이 버린 그 유교에 아직도 집착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어리석게 우리 나라에 들어 온 지가 오래 되었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남의 것을 우리 것으로 착각하면서 말입니다.
여러분,유교 문화의 수명은 이제 끝났습니다. 아니 이미 오래 전에 끝났습니다. 정다산의 학문을 실학(實學)이라고 부르는 순간 공학(空學)으로서의 유교는 이미 유효 기간의 만기가 선언된 셈입니다. 그러므로 더 늦기 전에 이제라도 과감히 유교를 버려야 합니다. 아마여러분 중에도 한국 최초의 갑골학 박사인 김경일 교수를 TV에서 보아 아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는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제목의 책을 썼습니다.
통렬한 한국 문화 비판서인 그 책에서 김경일 교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유교는 처음부터 거짓을 안고 출발했다.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지만 유교의 씨앗은 쿠데타로 왕권을 잡은 조갑이라는 한 중국인 사내의 정치적 탐욕을 감추려는 목적 아래 뿌려진 것이었다. 기원전 1,300년경 황하 유역에서 일어난 이 사건의 현장을 우리는 고대 동양 문화의 실록인 갑골문에서 발견하게 된다. 그 후 이 정치적 사건은 교묘하게 도덕적으로 위장되어 전해오다가 공자라는 한 사나이에 의해 후대에 전해졌다. 물론 그 당시 공자는 사건의 내면에 숨겨진 불순한 문화적 코드를 읽어내지 못한 채 도덕만을 외쳐댔다.
그결과 현란한 수식어에도 불구하고, 공자의 도덕은 '사람'을 위한 도덕이 아닌 '정치'를 위한 도덕이었고, '남성'을 위한 도덕이었고, '어른'을 위한 도덕이었고, '기득권자'를 위한 도덕이었고, 심지어 '주검'을 위한 도덕이었다. 때문에 공자의 도덕을 딛고 선 유교 문화는 정치적 기만과 위선, 남성적 우월, 젊음과 창의성의 말살, 그리고 주검숭배가 낳은 우울함으로 가득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이방인의 문화는 조선 왕실의 통치 이데올로기가 되어 우리의 삶 속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것은 사농공상으로 대표되는 신분사회, 토론부재를 낳은 가부장 의식, 위선을 부추기는 군자의 논리, 끼리끼리의 협잡을 부르는 혈연적 폐쇄성과 그로 인한 분열 본질, 여성 차별을 부른 남성 우월 의식, 스승의 권위 강조로 인한 창의성 말살 교육 따위의 문제점들을 오늘날까지 지속시키고 있다. 이것들은 오늘날 우리들 삶의 공간에 필요한 투명성과 평등, 번득이는 창의력, 맑은 생명들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것들이다. 유교의 유효 기간은 이제 끝난 것이다."김교수가 잘 지적한 대로, 유교는 사람을 위한 도덕이 아니라 정치, 남성, 어른, 기득권자, 주검을 위한 도덕입니다.
이들 하나하나를 다 살펴보면 좋겠지만 시간 관계상 유교는 모든 사람을 위한 종교가 아니라 권력자를 위한 종교라는 점만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유교는 백성들을 위한 종교가 아니라 군주를 위한 것이었으며, 권력의 시녀였습니다. 우리가 이것 하나만 바로 알아도 유교에 집착할 이유가 전혀 없음을 알게 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유교가 권력을 잡은 자들을 위한 것이었다면 그런 유교를 무엇 때문에 믿겠습니까? 더구나 우리는 민주화 시대에 살고 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교는 폐기 처분되어야 마땅합니다.
어떤사람은 도대체 무슨 근거로 공자의 유교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권력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십니까?" 라고 묻고 싶을 것입니다. 이런 분들을 위해 오늘 저는 중국과 한국의 역사를 통해 이 의문에 대한 시원한 답을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유교의 원조격인 은나라의 조갑과 조상숭배.
유교에서는'이상사회'를 주장합니다. 그런데 이상사회는 논픽션이 아니라 픽션입니다. 쉽게 말해서 허구입니다. 그것은 공자가 지나가는 말처럼 내뱉은 몇 마디 말을 가지고 부풀려놓은 허상에 불과합니다. 그러면 공자의 머리 속은 어떻게 구성되기 시작했을까요? 그의 의식구조는 어떻게 형성되었을까요? 왜 그는 그런 말들을 했을 까요? 뿌리를 캐보면 공자도 결국은 전수자에 불과합니다. 유교가 공자의 독창적인 작품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옛날옛날, 그러니까 기원전 1324년쯤, 중국의 황하 유역 '은'이라는 지역(지금의 安陽)에서 쿠데타가 일어났습니다. 공자는 기원전 551-497년에 산 인물이니까 공자가 태어나기 7-800년 전의 일입니다. 현재까지의 고고학적 발굴과 역사의 실록인 갑골문, 그리고 '상서'라는 문헌을 토대로 재구성해보면 당시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중국황하 유역, 그 중에서도 한반도 쪽에 가까운 지역들에는 수백 개의 부족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세력이 강한 부족이 둘 있었는데 하나는 상족이고, 다른 하나는 후일 한반도로도 흘러 들어온 동이족이었습니다. 이 두 종족은 앙숙인지라 늘 전쟁을 거듭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싸움에서 치명적인 패배를 당한 상족이 동이족의 근거지를 떠나 좀더 내륙 쪽으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이 땅이 바로 '은'이라는 지역입니다.'은'으로상족을 이끌고 들어온 인물은 반경이라는 왕이었습니다. 반경은 미신을 열심히 신봉했던 인물로 온갖 잡신을 다 섬겼습니다. 그가 죽자 아들인 무정 역시 황하신, 산신, 조상신, 천신 등 온갖 잡신에게 날마다 제사를 지내곤 했습니다.
무정에게는 여러 아들이 있었는데, 죽을 때가 되어 장자인 조강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습니다.
그런데문제가 있었습니다. 맏형인 조강보다 동생인 조갑이 더 똑똑했던 것입니다. 아버지 무정은 똑똑한 동생 조갑을 왕실에서 먼 곳으로 보내 버렸습니다. 그러나 몇 년간 숨어 지내던 조갑은 마침내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이쿠데타를 놓고 '상서'와 관련된 여러 문서들은 이런 기록을 전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무정이 형인 조강을 두고 동생 조갑을 왕으로 세우려 하자 조갑은 이를 피해 있다가 할 수 없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이것은 거짓말입니다. 유교 근본주의자들의 눈에 세습 체계를 흔드는 조갑의 행동은 못마땅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조갑의 쿠데타를 허위로 미화시킨 것입니다.
상서를서구에서는 '공문서 모음집'(The Book of Documents)이라 부릅니다. 그 내용이 모두 중국의 왕실 비사이며 정치 행적의 X-파일들이기 때문입니다. 약 4,000년 전에서 3,000년 전의 하나라, 은나라의 왕실 파일들을 모아놓은 게 '상서'입니다.
문제는 이 책의 변질입니다. 고대로부터 전해오던 하나라, 은나라 왕실 기록들의 일부를 공자가 100편으로 추려 묶었고, 이는 다시 29편으로 줄어들었습니다. 진시황의 분서갱유 때 모든 경서가 불 타 사라졌다가 한나라 때의 유학자 복생(伏生)에 의해 다시 29편으로 만들어졌던 것입니다. 이처럼 원래의 역사적 실록이 공자와 복생이라는 인물을 거치면서 유교적 가치와 편의를 위해 상당 부분 변질되었습니다.
하지만변질의 역사는 언제나 진실에 의해 밝혀지는 법입니다. 1899년, 3,500년 이상 땅 속에 파묻혀 있던 갑골문들이 발견되었습니다. 그 동안 상서들의 문헌이나 전설에 의해서만 전해지던 은나라의 본모습이 갑골문을 통해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갑골문과 함께 발견된 수많은 고고학적 발굴품들은 당시의 생활상을 조금의 가식도 없이 시대를 건너뛰어 전달하고 있습니다. 땅 속에 묻혀 있었기 때문에 유교 근본주의자들의 손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었고 역사 왜곡을 피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갑골문의 발견은 '상서'와 '주역'의 오류를 밝히는데 커다란 공헌을 하고 있습니다. 갑골문이 발견되면서 중국의 고대 역사는 다시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동안 철석같이 믿었던 수많은 유교 경전과 역사서의 내용 가운데 일부가 사실이 아니라 거짓이었다는 점이 속속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자,그러면 다시 조갑의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쿠데타로 왕이 된 조갑이 취한 첫번째 조치는 제례 문화의 정비였습니다. 그는 이전에 있던 모든 토템, 즉 황하신, 천신 등에 대한 제례를 폐지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직계 혈족들의 제례만을 강화했습니다. 이 조치의 중요성은 중국 역사상 최초로 일어난 인위적 문화혁명으로, 유교 문화의 시발점이 되는 사건이라는 데 있습니다.
유교문화의 핵심 내용 가운데 하나가 바로 조상에 대한 제사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은 유교에서 그토록 중요시하는 제사의 어이없는 기원을 보여줍니다.
이 사건은 갑골문을 통해서만 확인됩니다. 후대의 한자로 된 문헌들, 즉 시경, 상서, 주역, 주례 등 이른바 '13경'을 통해서는 알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사를 방편으로 한 엉터리 효가 무지한 사람들에게 통한 것입니다. 어쨌든조상신을 가장 위대하고 유일한 신령으로 삼겠다는 이 행동은 당시의 종교 문화적 행태들을 볼 때 여간 돌발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갑골문의 기록을 보면 조갑에 의해 조상신은 전쟁, 농사, 날씨, 질병 등을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전천후적 존재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의문이 하나 생깁니다. 조갑은 왜 당시의 수많은 토템과 애니미즘(만물 모두에게 신령이 존재한다는 생각), 샤머니즘 등을 강제로 폐하고 조상신 하나만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았을 까요? 그것은 명약관화합니다. 바로 자신의 정치적 위상을 강화하기 위한 고도의 전략이었던 것입니다. 조갑과 그의 신하들은 우선 자신들 조상들의 족보를 재수정했고 조상에 대한 제사를 정례화 했습니다.
이것은 주변 부족들에게 자신들의 조상이 모든 토템과 샤머니즘적인 숭배 대상들을 초월한 존재임을 과시하기 위한 대단히 정치적인 전략이었습니다. 유교 문화의 족보 만들기, 족보 캐기 등의 출발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됐으며, 자신의 씨족 혈통 우월 의식 또한 여기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이상소개해드린 대로, 유교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권력을 위한, 그리고 진정으로 조상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역시 권력을 위한 제사제도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유교는 날조된 경전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교를 믿는 것과 조상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은 실로 허망하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2.주나라의 문왕과 은나라의 유 집단..
조갑이 만든 깜짝쇼 '조상신 숭배'는 훗날 공자에 의해 유교 문화에 사용됩니다.
그러면 조갑의 조상 숭배 의식은 어떻게 공자에게 전수되었을까요? 그리고 깜짝쇼에 불과했던 조상 숭배 의식이 어떻게 동양사회 전체에 영향을 끼치는 거대한 유교의 시발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을까요? 조갑의 깜짝쇼는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3,500년 전의 중원은 주술적 미신으로 가득했습니다. 그 중원에서 '우리 조상이 최고'라는 억지는 주변 부족들에의 시기와 질투를 한 몸에 받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은나라의 '우리 조상 최고' 를 보다 못한 여러 부족들은 몰래 연합해 은나라를 깨부수기로 결의를 했습니다.
이 연합에 앞장을 선 부족 이름이 바로 주(周)였습니다.
당시 전쟁을 이끈 주나라의 왕은 무(武)였고 은나라의 왕은 주(紂)였습니다. 이 전쟁 후에 후대 유교 사가들은 은나라의 주왕을 천하의 폭군으로 묘사했습니다. 또 당시 은나라 주왕의 여자는 달기 였는데, 그녀를 요물로 묘사하며 전쟁의 정당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좌우지간 전쟁이고 선거고 이기고 볼일입니다. 그러나상황을 면밀히 살펴보면 당시 은나라가 패망한 이유는 '조상 강조'로 인한 폐쇄적이고 권위적인 외교 정책 때문에 야기된 외교적 마찰과, 우리 민족의 기원과 연관이 깊은 동이족과의 지속적인 싸움으로 국력이 약화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쨌든전쟁은 주나라의 승리로 끝났고 은나라의 백성들은 노예가 되는 처참함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전쟁, 농사, 날씨, 질병 등을 조절할 수 있다고 꾸미고 그 잘난 조상들에게 드린 제사가 아무런 효과도 발휘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나라가 패망국 은나라에 취한 조치 중에 특이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은나라의 제례 전문가들을 살려둔 것이었습니다. 이들을 후대 사람들은 유(儒)라고 부르는데 그 글자를 풀어보면, 그들은 주술적인 존재들 즉 '무당'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나라에서 자리를 얻은 이 유들이 맨 먼저 착수한 일은 주나라의 족보를 체계화하는 일이었습니다. 족보의 체계화는 얼핏 보면 은나라가 조상숭배를 정치에 이용한 것과 동일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조금 다른 점이 있습니다. 지나친 자기 조상의 권위 강화가 타 부족의 불만을 일으켰고 마침내 정권의 붕괴로 치달은 것을 깨달은 은나라 출신 유들은 이번에는 보완책을 마련했습니다. 그들은 제례 대상을 두 가지로 나누는 이원화 정책을 펼쳤습니다. 즉 왕실 내부적으로는 주나라의 왕통 족보를 다시 다듬었고, 외부적으로는 타 부족과 공통으로 숭배할 수 있는 존재인 '하늘' 즉 '천(天)'을 대체의 절대신으로 제시했습니다.
'천'의개념이 은나라 때 조갑에 의해 사라진 지 약 300년만에 다시 주나라에 의해서 등장한 것입니다. 이것은 주나라 때의 청동기인 '대우정(大盂鼎)'에 쓰인 문장을 통해 확인됩니다. 조금 어렵지만 유교 문화의 뿌리를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문장이기에 잠깐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不顯文王受天有大命 - 불현문왕, 수천유대명"(뜻: 주나라의 위대한 문왕이 하늘의 커다란 천명을 받았다.)
이처럼주나라에 머리를 빌려준 유 집단에 의해 컴백한 '하늘'은 그후 동양인의 머릿속에 초월적 존재자로 자리잡습니다. 동양 문화 속의 '하늘'은 이처럼 출발부터 대단히 정치적이었습니다. 당시 유 집단이 만들어낸 주나라의 정통성은 대충 이런 것이었습니다. 즉 타 부족을 포함한 모든 종족들의 토템이나 조상신을 초월하는 존재자가 하늘인데, 유일하게 주나라 왕만이 '하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천자(天子)'입니다.
'천자'는따라서 정치적 존재인 동시에 종교적 존재였습니다. 동양 정치의 검은 그림자인 통치자의 카리스마, 혹은 쉽사리 법을 유린할 수 있는 초법적 권한 행사와 문화적 면죄부가 바로 이때 주어진 것입니다. 때문에 시간은 많이 흘렀지만 이 천자의 정치 문화를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한국과 중국, 그리고 메이지유신 이전까지의 일본의 정치가들의 '준법 정신' 은 낙제점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초월자의 아들인 천자는 자신들의 아들을 각 지역의 정치 책임자로 보냈는데, 이것이 바로 지역의 제후들입니다. 즉 천자와 제후의 통치 체제는 근본적으로 혈친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나라 때의 종법(宗法) 정치로 후일 동양사회의 뿌리 깊은 혈연주의의 시발이 됩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생겼습니다. 그것은 보내야 할 정치 책임자는 많은데 한 여자에게서 낳는 남자의 수는 너무 적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바로 축첩제도였고 남존여비 사상이었습니다. 3,000년 가까이 여성의 삶을 왜곡의 현장으로 몰아넣은 결과를 부른 시발은 이처럼 몇몇 유들의 비굴한 처세가 불러온 것이었습니다.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주나라 왕실에 바친 잔머리의 결과치고는 너무도 엄청난 결과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들 유 집단의 이데올로기를 정통으로 받아들인 인물이 바로 공자입니다. 공자는 주나라의 종법 제도에 크게 심취해 있었고, 이를 제자들에게 집중적으로 가르쳤습니다. 주나라의 종법 제도를 가르치면서 그는 주나라의 종법 제도가 완벽한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 은나라의 모든 역사적, 정치적 사건들을 점차 미화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한 예로, "효경"에서 공자는 자신의 제자 증자에게 과거를 미화하기 위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옛왕들은 모두 진실하고 정직함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백성들은 언제나 화목했고, 관리와도 원한이 없었는데 너는 이 사실을 알고 있느냐?"왜공자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했을까요? 그는 정말로 이렇게 믿고 있었을까요? 바보가 아닌 이상 그렇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자기의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이처럼 공자는 자기의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해 역사를 왜곡하고 거짓말도 서슴치 않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도덕을 논할 자격이 있을까요? 판단은 여러분이 스스로 내리시기 바랍니다.
3. 한나라의 한무제와 동중서의 대일통.
중국인들은중국 문화의 원류를 말할 때는 언제나 한(漢)을 들어 말합니다. 한자(漢字)가 그렇고 중국어를 뜻하는 한어(漢語)가 그렇고, 지식인들 사이에서 은근히 만들어지고 있는 단어인 한혼(漢魂)이 그렇습니다. 한혼이란 일부 중국 지식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표현으로 '중국인의 정신'과 같은 말입니다. 그렇다면 왜 중국 역사 속의 수많은 나라들 속에서 유독 한나라가 중국의 정신을 대표하는 것이 되었고, 이웃 나라들까지 문화적으로 집어삼키는 힘을 가지게 되었을까요? 여기에는 강력한 힘과, 위장된 도덕의 묘한 타협이 숨겨져 있습니다. 바로 한나라의 정치적 역량과 유교의 통치 기술이 만든 희대의 사기극이 그것입니다.
긴춘추전국의 혼란을 마감한 인물은 진시황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글쟁이들을 우습게 여겼습니다. 오만 방자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그러나 전쟁과 통치는 다른 법입니다. 그래서 그의 참모들은 "말을 타고 천하를 얻을 수는 있어도 천하를 다스릴 수는 없다"고 간언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듣지 않았습니다. 진시황은 타고난 성질대로 나라를 통치했습니다. 때문에 유방이 통치하던 한나라 초기는 노장사상이 기승을 부렸고, 나라는 무척 어수선한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나 한무제가 등극하면서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창업보다 수성이 어려운 것임을 직감한 한무제는 천하에 영을 내려 대책을 구했습니다. 이때가 기원전 134년으로, 나름의 국가 마스터플랜을 제출한 전국의 재사들만도 100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중 한무제의 눈길을 끄는 인물과 '대책'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얼굴이 동그마하고 콧수염과 턱수염이 삐죽한 나이 예순넷의 동중서라는 인물과 그가 제시한 '대일통(大一統)' 론이었습니다.
한무제는이 대일통 론에 홀딱 빠져버렸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중앙 집권의 강화와 불필요한 사상 논쟁을 금지하는 내용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통치권자의 입맛에 딱 맞는 대책이었습니다. 이처럼 동중서의 대일통 론은 비열하기 짝이 없는 출세용 작품이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도 흔히 볼 수 있는 통치자의 취향을 분석한 후 거기에 맞는 대책을 내놓아 출세하는 학자들의 전형적인 처세술이었습니다. 대일통은 정치와 사상 두 부분으로 나뉘어 전개되는데, 특히 사상 부분에 주안점을 두었습니다. 왜냐하면 황제의 정치적 권한 강화와 중앙 집권 강화를 위한 나름의 이론 근거가 바로 사상 부분이었기 때문입니다. 동중서의 논리는 사실 간략했습니다.
"천자는하늘로부터 명을 받았다. 때문에 제후는 천자로부터 명을 받아야 한다. 또 신하는 통치자로부터 명을 받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명을 받아야 하고, 아내는 남편으로부터 명을 받아야 한다. 따라서 명을 받고 위를 섬기는 자들이 실제적으로 섬기는 것은 하늘이다."
이글을 읽고 나름의 매력을 느끼는 사람은 위정자나 사내들일 거고, 쪼끔 열을 받는 사람은 아랫것들 그리고 좀더 열을 받는 사람들은 여자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도대체 이건 누구를 위해 울리는 종입니까? 대일통에 평등은 처음부터 없습니다. 각각의 상하관계는 서로 다르지만 하늘을 섬기게 되는 원리는 동일하다는 것이 바로 대일통의 논지입니다.
그는 또 천명을 받들고 천자를 중심으로 하늘의 뜻을 받들기 위해서는 유교의 교훈 외에는 어떤 것도 가르쳐서는 안 되고, 논의를 해서도 안 된다는 주장을 폈습니다. 유교만이 최고의 진리이기 때문에 더 이상 다른 것은 배울 필요도,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이 선언과 함께 유교를 제외한 모든 사상은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요즘말로 하면 언론에 대한 기술적 통제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유교의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바로 공자의 교훈입니다. 또 공자의 가르침이란 무엇입니까? 요약하면 '과거 무결점주의' '조상 숭배' '수직 윤리' '인과 의' 등인데, 동중서는 이 중에서 '인과 의'에 대한 교훈은 완전히 들러리로 써먹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공자 교훈의 실패가 어디에 있었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춘추전국시대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공자가 이야기했던 인과 의 따위는 현실 정치에 걸맞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동중서는공자의 유교를 끌어들이되 몇 가지 보완과 수정을 가했습니다. 그는 주나라 때부터 성행한 정치적 존재 '하늘'과 공자의 '과거 숭배' '제례 문화' 등의 토대 위에 주술적 분위기를 첨가했습니다. 즉, 통치에 적합한 '수직 윤리' '조상 숭배' 등은 천명 사상과 믹서해 써먹되 '인과 의'의 교훈은 대 국민 순화용으로만 이용했습니다. 동시에 그는 몇 가지 주술적 분위기를 첨가해 정치에 힘을 더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흔히 '오행설'로 불리는 주술적 우주관이었습니다.
그는우주의 모든 존재를 다음과 같은 10개로 단순화시켰습니다.
하늘, 땅, 사람 음, 양 금속, 나무, 물, 불, 흙
이 10개 원소설의 오리지널 명칭은 10단(端)입니다. 그리고 금속, 나무, 물, 불, 흙의 다섯 가지만을 강조해서 말할 때는 오행설이라고 부릅니다. 동중서는 이 10가지 원소들이 서로 상호 작용을 하면서 인간 세계에 화와 복을 만들게 되는데, 그 화와 복은 전적으로 하늘에 대한 인간의 태도 여하에 달려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인간이 하늘에 잘못하게 되면 음과 양, 그리고 오행의 요소들이 순환하며 우주의 질서를 만들어가다가 엉기면서 재앙을 만들어낸다는 논리입니다.
그래서 그는 일식과 월식, 지진, 홍수와 가뭄 같은 자연현상을 백성들과 신하들의 행위를 들어 설명했습니다. 물론 때로는 황제의 행위에 대해서도 언급을 하기는 했지만, 그건 완전히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고 중요한 것은 어디까지나 신하들의 황제에 대한 보필이나 백성의 관리들에 대한 충성 여부였습니다. 하늘이 인간의 행동에 반응을 보인다는 논리이기 때문에 '천인감응설'이라고도 하는 이 동양적 우주론은, 사실은 이렇듯 정치에 서비스하기 위해 만들어진 일종의 시나리오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희극입니다. 이것을 희극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당시의 모습이 우스워서만은 아닙니다. 아직도 이것을 세상만사에 적용해 보려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우습다는 것입니다. 당시 동중서는 이 10단의 '천인감응설'을 통해 홍수와 가뭄을 막는 방법을 고안해냈는데 대충 이런 것이었습니다.
"남자는 양에 속하고 여자는 음이다. 비는 음에 속하고 가뭄은 양에 속한다. 가뭄이 오는 것은 양이 지나치게 강하기 때문이니, 여자들은 나와 춤을 춰 음기를 발산해야 한다. 이때 남자들은 숨어야 한다. 반대로 비가 많이 오면 여자들은 숨고 남자들이 나와 활동을 해야 한다."이런 황당한 이론에 대해, 당시 유학자들에 의해 이단 중의 이단으로 불리던 황충이란 학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비가 오다보면 그치는 법이고, 오래 가물다보면 비가 오는 거지 뭐!"
여러분,그가 왜 이단이란 소리를 들었는지 알만하지 않습니까? 그러고 보면 유교사회 속에서 이단이란 바로 합리주의와 동의어가 되기도 합니다. 아무튼유교는 한나라 동중서에 이르러 정치력을 얻으며 동양 문화의 주류로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역사를 보면 정치에 머리를 숙인 철학은 언제나 그 시대의 주류로 자리 매김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그 정치력에 힘입어 철학은 그 시대의
문화적 속성을 결정짓는 주류가 되곤 했습니다. 이것이 유교가 동양에 퍼지게 된 낯 부끄러운 이유입니다.
4. 태조 이성계와 정도전에 의해 조선에 뿌리 내린 성리학.
유교가우리 나라에 소개된 것은 삼국시대부터였지만, 그것이 국가의 지도이념으로 자리잡고 사회제도를 지배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의 건국과 더불어서였습니다. 유학의 한 갈래인 주자학(한국과 일본에서는 주자학(朱子學)이라고 하지만, 중국에서는 주로 이학(理學)이라 부른다.)은 조선 500년은 물론 우리의 근대사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주자학은 주자(1130-1200)가 공자 맹자의 유교를 자기 나름대로 해석한 논리체계로 송대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송학이라고도 하고, 공자 맹자의 유교를 새롭게 해석했기 때문에 신유학이라고도 불립니다.
후대의 중국학자들 조차도 "윤리와 과학을 혼란스럽도록 뒤섞어놓은 사상"으로 평가하는 주자학은 정치적 필요에 의해 조선 왕조의 기틀로 자리매김되면서 커다란 재앙을 잉태하게 됩니다. 그러면 유학의 한 갈래인 주자학이 어떻게 조선 왕조의 기틀이 되었는 지 함께 추적해봅시다.
고려우왕 때인 1378년경, 왜구는 수시로 한반도로 건너와 약탈을 일삼았습니다.
주로 대마도에서 출발한 대규모의 왜구들은 남해 일대를 휘젓고 다니며 우리 백성들을 약탈하고 부녀자를 강간하는 일을 저지르고 있었습니다. 특히 이들 주력부대는 지금의 지리산 근처까지 침입하면서 내륙을 쑥밭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때 이성계는 그의 다섯째 아들 방원을 데리고 나가 왜구들을 몰아냈습니다. 그런가 하면 8월에는 다시 지금의 북한 황해도 지역으로 왜구가 침입했고, 충청도 전라도 일대도 제 집 드나들 듯했는데, 기록을 읽다보면 더이상 읽기 싫을 만큼 왜구에게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런데 이때마다 이성계는 뛰어난 실력으로 왜구들을 물리치곤 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왜구와의 싸움은 이성계의 군사적 세력을 불려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고려 때는 병졸들을 나라에서 장부를 가지고 관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힘있고 돈 있는 군벌들이 나름의 군사력을 보유할 수 있었습니다. 이성계가 온 나라가 주목할 만한 군사력을 갖추면서 나라에는
유언비어가 떠돌았습니다.
"목자(木子)가득국(得國)한단다."목자(木子)는바로 이(李)를 풀어놓은 말장난입니다. 고대의 왕이 되고 싶은 인물들이 애들 떡 사줘가면서 흔히 만들곤 하는 말장난인데 이성계도 이런 장난을 쳤습니다. 힘있겠다,유언비어도 깔아놨겠다 야망 달성을 위한 준비는 되어가지만 결정적 명분이 서지 않았습니다. 한데 찬스가 왔습니다. 바로 고려가 결정한 요동 땅 정벌이었습니다. 요동은 압록강 건너에 널려 있는 지금 중국의 리야오닝 성으로 옛날에는 고구려의 영토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중국은 몽골이 세웠던 원나라가 망하고 한족들이 다시 세운 명나라가 지배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고려에게 지나친 요구를 해오자 고려 우왕은 요동 정벌을 명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성계는 다음의 네 가지 이유를 들어 반대했습니다.
"첫째,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칠 수 없습니다. 둘째, 농사철에 군사를 모으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셋째, 원정을 하면 왜구가 파고들 것입니다. 넷째, 비가 많이 오고 무더우므로 사기가 떨어지고 질병이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왕은 정벌을 강행했습니다. 영을 받은 이성계는 평양을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반도와 중국을 가르는 압록강 안의 작은 섬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리고 맙니다. 1388년 5월 22일. 바로 위화도 회군입니다. 당시 명나라는 몽골의원나라와 전쟁을 겪은 뒤라 대단히 어수선했고, 따라서 충분히 승산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하지 않고 정벌에 나섰다면 지금도 고구려의 수많은 유적들이 지하에서 후손을 기다리고 있는 비옥한 땅 리야오닝 성은 현재 우리 나라 영토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라를 키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이성계는 개인 출세의 기회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그 결과 1392년 7월 17일, 이성계는 드디어 조선의 왕이 됩니다. 이성계가 왕이 되자 그의 주변에 자천 타천의 인물들이 들끓기 시작했습니다. 그중 정치적 야심과 두뇌를 갖춘 인물이 하나 있었는데 그의 이름이 정도전(?-1398)입니다. 당시 전국의 학자들은 고려 충렬왕 때 수입된 주자학을 놓고 명륜당에 모여 활발한 논의를 벌였는데, 정도전은 성균 박사, 태상 박사에 임명되어 주자학의 토론을 실질적으로 이끌었습니다. 정도전은 주자학적 '이상사회'를 실천하려던 야망을 가지고 있었고, 고려 말기 흔들리는 사회 속에서 힘을 보유하고 있던 이성계를 자신의 정치적 포부를 현실로 바꾸어줄 수 있는 인물로 점찍었습니다.
그는 이성계를 만나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인 끝에 드디어 함주까지 따라가 1383년 그의 막료가 됩니다. 이때는 아직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이었는데, 그는 이성계 앞에서 자신이 장차 이성계의 오른팔이 될 것을 암시하는 시를 써서 바치기도 했습니다.
이때부터 정도전은 이성계의 가려운 곳을 주자학을 가지고 긁어주게 됩니다. 정도전은 이성계의 세력 강화를 위해 두 가지 일에 착수했습니다. 하나는 당시 고려 귀족들의 정신을 지배하던 불교를 몰아내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고려 말 불교가 지니고 있던 예언이나 참언들을 공박하면서 불교 대신에 주자학을 대체 윤리로 삼을 것을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얼핏 보기에 사상적 논쟁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정치적 힘겨루기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즉 그는 초기에는 주자학적 측면에서 불교를 배척하였지만 이성계와 가까워지면서부터는 고려 말기 세력가들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그들의 사상적 기반을 공격했던 것입니다.
또다른 이유로 그는 불교가 가져온 왕권 약화 현상을 보면서 더 확고한 정치적 안전장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고맙게도 주자학에는 절대왕권의 논리가 있었습니다. 이건 이성계로서도 무척 마음에 드는 점이었습니다. 정도전은 다음과 같은 논리로 왕권 강화와 동시에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했습니다.
"군주는 하늘을 대리하여 통치하며, 군주가 치정을 하는데 있어서는 관리를 두고 직무를 나눈다."
정도전은 조선이 한양으로 천도할 때(1393년) 궁궐과 종묘의 위치를 지정해주고, 경복궁과 각 궁전 및 궁문의 칭호, 8대문 등의 명칭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경서와 주자학의 논리를 토대로 "조선경국전"(이것이 나중에 '조선경국대전'으로 정리됩니다.)을 만들어 조선 왕조 법제의 기틀을 세우게 됩니다.
이성계로봐서는 대단히 다행스러운 이 거대한 작업은 차라리 없었어야 했습니다. 이성계의 왕위 등극이 지금에 와서 보면 후회스러운 것이었던 것처럼, 정도전의 정치적 야심이 불러들인 주자학 역시 후회스럽기 그지없는 것이었습니다. 한편,많은 학자들이 분석하듯이 주자학은 공자 맹자가 말했던 순진한 윤리적 메시지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과학적 검증도, 열린 토론도 거치지 않은 한 사나이의 깊은 사유가 만들어낸 불완전한 우주론적 수필(그때 그때 본 대로 들은 대로 느낀 대로를 붓가는 대로 적어 낸 글)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우주를 담론의 대상으로 하는 도가적 발상에 불과할 뿐, 더 이상의 우주적 통찰도 철학적 통찰도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주자학을 신봉하고 연구하며 500년을 보낸 조선시대의 불행했던 역사가 알려주는 우울한 결론이기도 합니다. '윤리와 과학을 혼란스럽도록 뒤섞어놓은 사상'인 주자학의 내용을 단순화 시키면 이런 말이 됩니다. "우주는 어떤 특정한 힘에 의해 논리적으로 움직인다. 인간은 그 특정한 힘이 만든 존재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그 특정한 힘이 지니고 있는 특정한 논리가 내재되어 있다."
그런데 주자는 자신이 이 논리의 체계를 알아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태극이며, 음양이며, 이(理)며, 기(氣)며 하는 따위의 것들이 모두 주자에 의해 다시 해석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사용되고 있기도 합니다. 즉, '어떤 특정한 힘'은 태극이며, '논리적으로 움직이는 상황'은 음과 양이 서로 순환한다는 설명과 동일한 의미입니다. 그리고 '인간에게 내재하는 특정한 논리'를 풀어내겠다는 것이 바로 점술입니다. 그런데 만약 주자의 논리가 절대적이고 분명하다면, 이 위대한 논리를 기반으로 출발한 조선의 역사는 아름다웠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어떠했습니까?
500년 동안, 주변의 나라들이 새로운 생각과 행동으로 숨가쁘게 발전해가고 있는 상황에서 우주의 이치는커녕 자신들의 운명조차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던 논리와 점술들, 그것이 과연 정말 논리이고 점술이었을까요? 앞에서 주자학이 불완전한 우주론적 에세이에 불과하다고 말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불행하게도 주자가 사색하고 나름대로 결론 내린 공상적 우주론은 조선 유교의 근본적 뿌리가 되어, 어느 누구도 토를 달지 못했고 다른 해석을 달지 못했습니다.
조선의 사내아이들은 걸음마만 끝나면 외우기 시작한 주자의 주해를 죽을 때까지 외워댔습니다. 조선 500년 동안 지식인들의 사유는 주자의 관념 체계 안에 갇혀 한 걸음도 밖으로 나가지 못했습니다. 조금의 이견도 용납되지 못하고 이단으로 치부되고 말았습니다. 더구나 권력을 잡은 사람들의 사상체계가 철저하게 주자학으로 무장되어 있었기 때문에, 주자학을 비판하는 것은 바로 체제비판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류에서 밀려나는 것을 의미하고, 잘못 엮이면 삼족이 멸망하는 역적의 누명까지 뒤집어쓸 수도 있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수많은 사화들이 유교와 주자학의 정치적 해석 논쟁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주자학의 정치적 이슈였던 '존왕양이'(우리의 왕을 보호하고 오랑캐를 몰아내자.) 사상은 조선시대 내내 왕실과 사대부들을 지배해 쇄국정책으로 이어졌고, 나라가 망하는 불행을 자초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즉, 1910년 두고두고 수치가 되는 한일합방이 체결된 것입니다. 한일합방은 조선왕조 500년 동안 금과옥조로 생각해온 유교 문화의 온갖 병폐가 붕괴 사이클을 따라 퇴적되어 오다가 붕괴의 시점에서 마침내 터져버린 최악의 재앙이었습니다. 사실 되돌아보면 한일합방은 여간 황당한 사건이 아닙니다. 만일에 당시 사대부들이 논어와 맹자를 잠시 놓고 격동하는 국제 정세를 텍스트로
삼았더라면, 그들이 민족 전체를 고려하고 사태를 조금만 냉정하게 살펴보았더라면, 러시아 영국 독일 프랑스 등 해외의 문물을 보았던 민영환이란 인물이 독립당을 옹호한다는 죄목으로 대신 자리에서 밀려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그런 인물이 몇이 더 있었더라면 한일합방 같은 황당한 사건은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세상에 총도 한 방 안 쏘고 나라를 내주는 바보들이 어디에 있습니까?
나라를일본에 내준 그들은 바로 전형적인 유교적 관료들이었습니다. 즉 논어, 맹자, 대학 따위의 유교 경전만이 머릿속에 가득한 관료들이었습니다. 유교 국가의 도덕적 기치는 조선 건국 때나 말기의 대한제국 때나 동일하게 내걸었던 정치적 모토였습니다. 그리고 힘을 장악한 사대부 층은 언제나 도덕과 충, 효로 스스로를 변호하면서 이익과 권력을 탐닉했습니다. 그들은 중국과 일본을 서로 끌어들이면서 자기 집단의 이익을 최대화하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에게나라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이 속한 지역을 기반으로 한 집단의 이익만이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법을 초월한 이들 힘의 남용이 나라 전체를 부식시킨 끝에 마침내 나라를 통으로 일본에 내주는 결과를 빗고 만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유교가 우리 나라에 들어와서 한 일입니다. 그런데 나라를 망치고 백성을 일본의 노예로 전락시킨 유교가 무슨 면목으로 아직도 이 땅에 남아 있다는 말입니까? 이제 유교는 중국과 일본에서 사라진 것처럼 이 땅에서도 사라져야 합니다.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유교는 나라를 망친 주범입니다. 김경일 교수가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쇼킹한 제목의 책을 쓴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 책은 이런 말로 시작합니다. "1910년 한일합방, 1950년 6.25, 1997년 IMF.100년도 안 되는 세월 동안 우리 민족은 세 번을 죽었다가 살아났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민족 자체가 자칫 인류 역사에서 잊혀버릴 수도 있는 위기였다. 하지만 그때마다 우리는 그럭저럭 위기를 수습해왔다.
그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 참담했던 과거를 잊어버렸다. 아니 오히려 스스로를 '역경을 이겨낸 위대한 민족' '하면 되는 민족'으로 위안하며 대견스러워 했다. 그러나 50년이 멀다 하고 되풀이되는 이 역사적 사건들이 그저 우연한 것이었을까? 이런 위기의 연속에는 우리들 내부에 숨어 있는 어떤 필연의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닐까?...나는 새로운 답을 찾고 싶었다. 그리고 그 답을 공자의 유교에서 찾아냈다. 유교 사회 속에서 성장했고 그것을 공부했던, 그래서 한때는 그것을 가장 아름다운 가치로 생각했던 나에게 찾아낸 이 답은 충격이었다.
하지만 그건 새로운 출발을 약속하는 작은 희망이기도 했다. 한일합방을 부른 무기력한 정부와 위선적 지식인들, 6.25를 부른 우리 문화 속의 분열 본질, 그리고 IMF를 부르고만 자기 기만과 허세, 그것들은 도덕의 가면을 쓴 유교 문화 속의 원질들과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었다. 위선, 분열 본질, 자기 기만과 허세, 그것들은 바로 우리 사회가 그토록 즐겨 부르짖던 도덕적 가치, 단일 혈통의 우월성, 그리고 무거운 권위들의 벌거벗은 뒷모습이었다. 단지 그것들이 도덕적으로 위장되어 있었고 정치적, 사회적 권위에 의해 보호되어 왔기에 쉽사리 알아채거나 지적하는 일이 쉽지 않았을 뿐이다.
이러한요소들은 오늘도 어렵지 않게 우리 사회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지금도 우리 내부에서는 크고 작은 한일합방 류의 협잡과 6.25식의 동족 죽이기와 분열, 그리고 허세와 자기 기만으로 인한 IMF형 파산이 연속되고 있다. 사건이 달라 보이고, 크기와 규모와 영역이 달라 별개의 사건들처럼 보이지만 그것들은 우리 문화의 심층에 자리잡고 있는 하나의 원인 때문에 지속되는 것들이다. 그것은 우리 문화의 내면을 한 꺼풀만 젖히고 들여다보면 언제라도 쉽게 찾을 수 있는 시커먼 곰팡이, 바로 유교라는 곰팡이 때문이다. 장이 나쁘면 시도 때도 없이 여드름이 돋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무리 화장을 해도 소용이 없다."
여러분,더이상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유교는 과거에 나라를 망쳤을 뿐 아니라 지금도 나라를 좀 먹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해충과 같은 유교를 단호히 배척하고 버려야 합니다.하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억울해서 한 마디만 더 하려고 합니다. 여러분 알고 계십니까? 우리는 모두 유교 사회의 폐해를 심각하게 입은 세대들입니다.
유교는 거의 전국민을 벙어리와 바보로 만들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바로 우리 나라의 영어 교육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늘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영어 교과서를 바보들이 만들었나? 왜 이렇게 만들었을까? 아이들이 말을 배울 때 글자부터 배우나? 문법부터 배우나? 말부터 배우지 않는가? 그런데 왜 영어 시간에는 말을 가르치지 않고 말도 못하는 우리들에게 글을 가르치며, 더욱이 미국인들도 잘 모르는 문법을 가르친다는 말인가?'
한국의 영어 교육은 철저하게 실패했습니다. 국가에서는 교과서를 만들 때 사용 현장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문법과 어휘에만 중점을 두었습니다. 또 교과서를 만들 때 주로 특정 문장을 통해 아이들에게 '도덕적 교훈'을 주겠다는 유교적 '훈수'가 바닥에 깔려 있었습니다. 우리 나라 지식인 대부분이 그렇지만 이들은 가르친다는 행위에 반드시 '도덕적 교훈'을 주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모두 유교의 교육관과 글을 숭상하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전통적으로 유교는 말에 대해서는 억제하는 태도를 가졌고, 시나 문장 등의 글 다루기에는 후한 점수를 주었습니다.
이 영향으로 외국어 학습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의사소통은 무시되고 글 다루기 능력 위주로 교과서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또 선생님들은 그것을 가지고 역시 의사소통과는 관련이 없는 단어 스펠링이나 문법 등만을 가르쳤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국가적으로 수십 년 동안 수백만 명이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해댔던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얼마나 열심히 공부를 했었습니까? 연습장이 새까맣게 되도록 단어를 외웠건만 미국인을 만나면 '하우 두 유 두'조차 나오질 않습니다. 저는 이 사실이 두고두고 억울합니다. 유교를 상대로 손해 배상 청구라도 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내친김에 자녀 교육을 위해 한 마디만 하겠습니다. 영어 교육은 조기 교육이 중요합니다.
일반적으로 7세까지는 프로그램과 환경에 따라 2개 정도의 언어를 모국어 수준으로 습득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말도 하기 전에 단어니 문법을 가르치지 말고 회화를 중점적으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보통 우리 나라의 부모들은 피아노 학원이니 뭐니 하는 데를 잘 보내는데, 피아니스트를 만들 것이 아니라면 그런데 보내지 마십시오. 보내려면 일찍부터 영어 회화 학원과 컴퓨터 학원을 보내십시오. 그것이 자녀의 장래에 백배 도움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