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창군 전투 이전의 배경 이해
고려와 신라가 공동전선을 펴가는데 불안과 증오를 느낀 견훤은 신라를 징벌하는 동시에 고려와의 연락을 차단하기 위하여 태조 10년(927년) 9월 신라의 상주부근을 공격하고 영천을 기습하였다.
후백제군이 수도 경주로 계속 진격하매 신라의 경애왕은 연식을 고려에 급파하여 지원을 청하였다. 고려는 신라와의 오랜 우호관계를 계속 유지하려는 목적하에 공헌 등이 지휘하는 1만명의 원병을 긴급출동시켜으나 후백제군은 동년 11월 고려지원군이 도착하기 이전에 경주로 진입하였다.
이때 신라 경애왕은 고려군의 지원만 믿고 비빈, 종척들과 어울려 포석정에서 놀이를 벌이고 있었다. 후백제군의 기습앞에 신라의 군신은 창황하여 조직적인 최후의 항전조차 전개하지 못하고 풍비박산하였다......(중략)
태조는 신라에 사자를 보내어 경애왕에 대한 조의를 표하는 동시에 후백제군의 귀로를 차단하고자 기병 5천을 친솔하여 남진하였다. 고려군은 대구 팔공산에서 개선중에 있던 견훤의 후백제군과 일대결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전세는 고려군에게 불리하여 고려군은 후백제 견훤군의 포위작전에 말려들어갔다. 대장 신숭겸과 김락이 사력을 다하여 싸우는 틈을 타서 태조는 간신히 단신으로 적의 포위망을 탈출하였으며 고려군은 완전히 괴멸되고 말았다.
공산전투를 계기로 후삼국 통일전쟁의 주도권은 후백제에게 돌아갔다. 후백제군은 공산전투 승리의 여세를 몰아 경북 약목군을 공취하고 들판에 쌓인 곡식을 불살랐으며, 동년 11월과 12월에 잇달아 벽진군 일대를 공격하였다.
태조 11년(928년) 10월 지금의 곡성을 점령한 견훤은 마침내 조어곡성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다. 조어곡성의 고려수비군은 1천여명이 전사하여 전의를 상실하였고 양지, 명식 등 6명의 장군은 후백제군에 항복하고 말았다. 죽령로상의 요충인 조어곡을 상실한 고려는 그 북방의 의성을 거점으로 하여 죽령로의 재개통을 위한 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태조 12년(929년) 7월 견훤은 5천의 병력으로 의성에 대한 선제공격을 감행하였다. 의성의 고려수장 홍술은 결사적인 방어전투를 계속하던 중 전사하고 의성은 마침내 실함되었다. 의성 점령에 성공한 견훤군이 여세를 몰아 북진 안동부근 순주를 공격하니 고려의 장군 원봉이 도망함으로써 안동부근 순주 이남의 죽령로는 완전히 차단될 위험에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후백제군의 죽령로 차단에 위협을 느낀 태조는 동년 9월 영주로 출동하여 인근지역의 군대를 독려하였다. 10월에 들어서자 견훤은 문경부근 가은현을 포위공격하였으나 고려군의 고수로 실패하고 안동부근 순주지방으로 후퇴하였는바 이로써 지금의 안동지방을 중심으로 여제양군의 주력이 대치상태에 들어갔으며, 이 지역에서의 승패가 곧 후삼국 통일의 최종적 주도권을 가름하게 되었다.
2. 고창군 전투
고려태조 12년(929년) 12월 견훤은 동계작전을 전개, 마침내 고창군(안동)에 대한 포위공격을 개시하였다. 견훤군의 맹공앞에 고창군이 실함의 위기에 직면하자 태조는 제장을 거느리고 직접 고창군 구원작전에 나섰다. 예안진에 도착한 태조는 제장과 더불어 작전회의를 열었는데 견훤군의 병세에 위압된 공헌, 홍유 등 제장들은 전세가 불리할 경우 죽령으로 후퇴하느냐 또는 간도로 후퇴하느냐고 후퇴로 선정에만 열을 올리는 등 공격계획보다는 후퇴의 방책을 주로 논의하는 패배의식에 사로잡혔다. 이때 오직 유금필만은 '적을 목전에 두고 후퇴만을 거론함은 불가하다'하고 실함직전의 고창군 구원작전을 자원하여 태조의 허락을 받았다. 유금필은 저수봉으로부터 진격하여 고창군을 포위중인 후백제군을 급습, 마침내 고창군으로의 통로를 확보하는데 성공하였으며, 태조 막하의 고려 주력군은 고창군에 들어가 수비대와 합류하였다. 고창군 지원작전의 성공은 고려군의 사기를 크게 진작시켰을 뿐만아니라 패배의식에 사로잡혔던 고려의 제장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었으며, 이에 힘입은 고려군은 후백제군과 결전을 하고자 고창군 병산에 포진하였다. 고려군은 5백보 떨어진 석산에 포진한 견훤과 종일 격전을 전개하여 저녁에 이르러 마침내 견훤군을 대파, 8천여명을 참살하였다. 고창군 전투의 대승리로 경상도 지방에 미치고 있던 견훤의 세력은 일소되었으며, 신라와 고려간의 안전하고 자유로운 육상교통로가 확보되었다. 고창군 전투의 초전에서 성을 고수한 성주 김선평은 대광(제2품), 권행과 장길은 대상(제4품)으로 승진되었으며, 고창군은 안동부로 승격되어 고려의 신라보호작전의 기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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