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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작림(张作霖). Zhang Zuolin, 장쭤린. 여하간에, 우정(雨亭) 이라는 제법 운치있는 자를 사용한 이 인물은 1875년 3월 19일에 태어났고, 이 날은 청 광서 원년이며 음력 2월 12일 생입니다. 만주 봉천성(奉天省 : 지금의 요녕성) 해성현(海城縣)에 있는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조상들의 이야기를 해 보자면, 원적에 대해서 산동성 설 이었다는 설과 하북성 설이 있습니다.
"스스로" 취임했던 중화민국 육해공 대원수에 오를때, '중화민국 육해공 대원수 장공행장' 에서는 이런 식으로 설명했습니다.
"공의 이름은 작림이고, 자는 우정이다. 봉천 해성인이며 원적은 산동이고 집안은 번성했다. 청 도광 초에 해성으로 이주했다. 조부대에 농업을 일으켜 소봉(관직 없는 명예직)의 칭호를 받았다."
독군서(督軍署) 참모장 장식의(臧式毅)가 서명하고, 이하 8명의 처장들이 서명한, 장작림 신도비(神道碑)에는 또 다른 소리가 쓰여져 있습니다.
"공의 이름은 작림이고, 자는 우정이다. 선조는 직예(直隸 : 하북)인이며, 청조 말에 봉천 해성으로 이주했다."
무엇이 옳을 지, 정확히 판단을 내리기는 어려우나 대다수 매체에서는 그를 하북성 원적으로 봅니다. 장학량(張學良)의 경우 원적지를 하북성 대성현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일단 장작림을 하북 원적으로 단정하고 이야기를 전개하겠습니다.
장작림의 선조 장영귀(张永貴)는 먹고 살기 위해 봉천의 동북 지역까지 와서 농지를 개간해서 농업에 종사했습니다. 그리고 장발(张發) 대에 와서 소봉 칭호를 받아 집안이 제법 볼만해졌습니다. 장발은 아들 4형제를 두었고, 셋째가 바로 장작림의 아버지 장유재(张有財) 입니다. 장발이 죽자 형제들은 재산을 나누어 가져, 장유재는 약간의 돈을 가지고 분가하여 장작림이 태어난 마을로 왔고, 잡화점 가게를 열었습니다.
허나 장유재는 근면 성실쪽 과는 거리가 먼, 노는 줄 밖에 모르는 한량이었습니다. 잡화점은 보잘것이 없었고 수입은 더 별볼일 없었습니다. 결국 잡화점은 망해 먹고 살 길이 막막한데, 장유재는 재기할 생각은 않고 노름에만 빠져 지냈습니다. 노름 빚은 쌓이고, 갚을 길은 없고, 결국 장유재는 빚쟁이들에게 살해당하고 맙니다.
이 당시 장작림의 나이는 고작 14살이었고, 집안은 망해서 돈도 없고 가난하여 공부를 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행하게 마음씨가 곧고 바른 선생님을 만나 수업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사숙(私塾 : 글방)의 선생님이던 양경진(楊景鎭)의 덕택이었습니다. 이치가 그리 된 바에는 아래와 같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한참 수업에 열중하던 양경진은 문득 밖에서 어떤 아이 하나가 몰래 자신의 강의를 주섬주섬 엿듣고 있는 것을 창밖으로 보았습니다. 아이가 장작림 임에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입니다. 호기심이 생긴 양경진은 아이를 불러 이것저것 물었습니다.
"너는 어째서 내 수업을 엿듣고 있는 것이냐?"
"제 이름은 장작림이옵고 공부는 하고 싶은데, 집이 가난해 도저히 학교를 다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주 여기에 와 몰래 선생님 말씀을 엿들었습니다."
"아, 네 마음이 참 가상하구나!"
학구열에 감동한 양경진은 장이 돈 문제에 구여받지 않고 수업을 할 수 있게 무료로 학교에 다니도록 했고, 직접 책과 공책을 사주기까지 했습니다. 장작림은 기초적인 공부를 하여 읽고 쓰는 문제와 기본적인 교양을 배울 수 있었는데, 이는 그의 인생에서 아주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배우지 못해 무뢰배들이 많은 중국 천하에서, 약간이나마 바른 몸가짐 등을 배운 장의 태도를 높게 여기고 그를 중용하던 사람들이 훗날 꽤 있었기 떄문입니다.
장은 이때의 고마움이 참으로 뼈에 사무쳐 나중에 육군 27사 사단장이 되었을때, 옛 정을 잊지 않고 양 선생님을 몸소 심양(瀋陽)으로 불러 집 안에 사숙관을 열게 해주었습니다. 다름 아닌 장학량이 이곳에서 공부를 했다고 술회했습니다.
참 선생인 양선생님의 도움으로 학업에 열중하던 장이었지만 무너진 집안 가세는 어찌 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장의 어머니 왕(王) 씨는 4남매를 데리고 친정으로 떠났습니다. 장에게는 두 명의 형과 한 명의 여동생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외할머니 집도 가난 하기는 매한가지였고, 입만 다섯개가 늘었음으로 집안의 꼴이 참으로 가관이었습니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장은 이곳에 계속 있으면 희망 없이 나이만 먹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어 우선 집 밖으로 뛰쳐나왔습니다. 세상에 몸을 던진 것입니다.
검은 옷을 입고 있는 여인이 장의 첫번째 부인 조춘계(赵春桂). 사진의 가운데, 조씨 왼쪽의 사내 어린이는 다름 아닌 장학량이고, 오른쪽의 아이는 차남 학명(學銘) 입니다.
장이 강호에 출사할 무렵, 청나라는 숫제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복싱 선수와 같았고 열강은 마음 놓고 중국 강산을 때어먹으며 유린했습니다. 제정 러시아가 150만 제곱 킬로미터를 분할해버렸고, 갑오전쟁(甲午戰爭 :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자신감을 크게 얻어 중국 동북 지역에 눈을 번뜩거렸습니다. 이런 상황에도 탐관오리들은 자신들의 배 불리는데나 열성이어서 백성들은 집을 버리고 산림으로 모여들었고, 말을 타고 마적이 되어 노략질을 해대었습니다.
집을 버리고 뛰쳐나온 장은 이런저런 일을 하며 식사를 해결하면서 사방을 떠돌아다녔습니다. 마차를 부리는 점포에 들어가 잡일을 하기도 했고, 나귀에게 약을 주고 고쳐 수의사(獸醫師)가 되기도 했습니다. 대군벌과 수의사는 그다지 접점이 없는 이름이지만 장은 뜻밖에도 수의사의 일에 재미를 느꼈고, 적성에 맞아 크게 만족했습니다. 장은 동물의 병을 치료하는 점포를 차려서 생업을 꾸리려고 했으나 운세가 따라주지 않아 누명을 쓰고 매를 맞는등 고생을 하며 전전했습니다.
바로 이때가 갑오전쟁, 바로 청일전쟁이 발발한 시기입니다. 오갈데도 없는 장은 한 가닥의 희망을 가지고 군대에 뛰어들었습니다. 전황은 심기일전하고 이 날만을 기다려온 일본에게 유리하여, 청군은 바다와 육지 양쪽에서 지리멸렬하게 당하고 있었는데 마침내 일본군의 제3사단장 가쓰라 타로(かつらたろう)는 12월 13일 해성을 함락했습니다. 해성은 봉천과 요녕 반도의 가운데 있어 양쪽에 위압을 가 할 수 있고, 산해관(山海關)으로 가는 길도 뚫려 있어 만약 베이징까지 진격하고자 한다면 실로 요지였습니다. 다만 당시 일본의 국력으로는 부담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해성은, 다름아닌 장작림의 본거지이기도 합니다.
청나라 조정은 태평천국 운동을 겪은 75세의 노장 송경(宋慶)을 기용했습니다. 그는 여순에 주둔하는 의군(毅军)을 이끌고 요동으로 급히 내달렸습니다. 바로 이 의군에 장작림이 끼어든 것입니다. 장은 수의사 일에 흥미를 느꼈다고 언급했듯이, 동물을 좋아했고 말을 잘 다루어 기병으로 종군했고, 말을 다루는 솜씨가 나쁘지 않아 초장(哨長 : 한 초의 우두머리. 보통 1초는 백여명 가까이)으로 발탁되기까지 합니다.
노장 송경은 열심히 싸웠고, 나름대로 성과도 내었습니다. 하지만 곧 전쟁이 끝나 장은 돌아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천둥벌거숭이로 지낼때보다야 그럭저럭 여유가 생겨 1895년에는 21세 나이로 결혼도 하게 됩니다. 지주 집안의 둘째 딸 조춘계와 결혼한 것입니다. 고향에서 나름대로 한가하게 지내던 장이었지만 그는 무미건조한 생활에는 쉽게 실증을 내던 사람이었고, 다른 일이 없을까 하고 여기저기를 기웃거렸습니다.
청일전쟁 후 만주 지방은 몇가지 문제에 시달리게 됩니다. 첫째는 해산된 군인들인데, 한번 전쟁을 경험한 인물들이 시골로 가서 한가하게 지내기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시골로 가더라도 가난하여 딱히 할 일도 없었기에 끼리끼리 뭉쳐 다니게 되었고, 두번째로 거지들이 들판에 넘쳐났습니다. 세번째로 이를 관리해야할 관부는 썩을때로 썩어 치안은 엉망이었고 마적(馬賊)들이 도처에 횡행하게 된 것입니다.
세상은 갈수록 무법천지가 되어가는데, 나라는 자신들을 지켜줄 생각이 전혀 없으니, 사람들은 자체적인 치안 확보를 위해 스스로 무장 조직을 만들어 적을 막아세웠습니다. 그러한 조직을 대단(大團)이라고 일컫었습니다. 그리고 마적도 마적 나름이라, 마구 약탈하고 사람들을 해치고 다니는 못된 비적(匪賊)들이 있는가 하면, 대단을 이루어 호방한 행동을 하고 주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자체적으로 무력을 갖춰 비적들을 막아 세우는 마적들도 있었습니다. 장작림은 전자가 될 만큼 상황이 나쁘지는 않았기 때문에, 후자가 되려고 하였습니다.
1900년. 장작림은 장인 어른인 지주 조점원(赵占元)에게 도움을 구했습니다. 이 조씨 집안의 조가묘(赵家廟)로 힘쎈 청년들을 불러 모았고, 20여명이 되자 장은 그들 사이에서 소두목 노릇을 하며 인근 몇 개 마을의 치안을 책임진다고 나섰습니다. 일종의 나와바리인 셈입니다. 장작림은 자신의 나와바리에서 규칙과 규율을 철저하게 지키고 치안을 유지해 나가, 이 지역에서는 비적들이 출몰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장이 일을 잘 한다고 칭찬했습니다.
장의 명성은 이 마을 저 마을 퍼져나갔습니다. 더불어서 그에게 몰려드는 청년들과 보호를 부탁하는 마을도 늘어나, 그는 20여개 마을을 관할하는 큰 대단이 되었습니다.
그 조가묘의 서북쪽에는 또다른 큰 대단이 있었는데, 단주의 이름은 김수산(金壽山)이라는 양반이습니다. 김수산 역시 떠도는 건달들을 불러 모아 100여명의 대단을 조직했는데, 문제는 그는 행실이 비적이나 다를 바 없는 못된 작자였다는 것입니다. 감수산은 자신의 나와바리에서 실질적인 왕 노릇을 하며 그 흉악한 일이 비적에 조금도 뒤지지 않았습니다. 보민(保民)을 해야할 마적 대단이 되려 해민(害民)을 자행하는 기막힌 일이었던 것입니다.
백성들은 참다 못해 장작림을 찾아갔습니다.
"제발 우리를 도와주게나."
"못된 놈이로군! 물론 그렇게 해야지."
장은 부하들을 보내 이 김수산을 내쫒고 그의 나와바리를 접수했습니다. 부하들은 더욱 늘어났고 세력 또한 더욱 늘어났습니다. 하지만 좋은 시절도 잠시였습니다.
1901년 섣달, 그믐날 야밤에 김수산은 다짜고짜 장작림을 습격했습니다. 느닷없는 일격을 당한 장은 허둥치둥 딸과 부인을 데리고 포위망을 뚫고 간신히 피신을 했고, 현재 요녕성 태안현 소속인 팔각대(八角臺)까지 피신했습니다. 얼마나 급박했던지, 부인 조씨는 도망치는 마차 안에서 아들을 낳았는데 이 아이가 다름 아닌 장학량입니다.
본래 장작림은 팔각대를 지나 요남의 녹림 풍덕린(馮德麟)을 찾아가볼까, 하는 요량이었습니다. 그러나 팔각대는 상점이 50개나 있는 큰 마을이었고, 장작림 식구와 딸려온 40여명의 일행은 팔각대의 보호를 받으며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장이 백성들을 괴롭히지 않아 그 평판이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팔각대 상회 회장인 장자운(張紫云)은 명성 높은 장작림을 한번 보고 싶어하다가 드디어 실물을 보았습니다.
"사람이 북방인이지만 인상이 남방인 얼굴이고, 이목구비도 수려하구만. 행동에도 절도가 있고 말하는것도 속되지가 않고. 명불허전일세. 이곳에 머물게 하게."
당시 팔각대 대단의 두목으로 장경혜(張景惠) 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장은 제법 명성이 있음에도 굴러 들어온 신세가 두번째 자리를 달게 받아들였습니다. 이 장경혜는 훗날 장작림의 측근으로 맹활약하게 됩니다. 지방 유지들도 이름 높은 장작림이 팔각대를 지켜준다는것에 큰 만족감을 표시했습니다. 많은 고생을 했던 장작림이지만 여러 좋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점점 성장하며 생활에 활로가 보였고, 이제 뜻을 펼칠 마음을 크게 먹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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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오 2편이 기대됩니다 ^^
진짜 몇 십년이나 몇 백년 뒤에 저 시대 관련 소설이 나와 대박 인기끌 듯
삭제된 댓글 입니다.
풍운아네요
오 새로운시리즈
작림이 자기이름도 못쓸 의인인 줄 알았는데, 기본소양은 익혔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