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상권이 발달하고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곳에 ‘-리단길’이라는 이름이 붙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서울에서는 망원동 일대를 ‘망리단길’, 석촌호수가 있는 송파 일대를 ‘송리단길’, 충정로역 중림동 일대를 ‘중리단길’이라고 부른다. 서울만 그런 것도 아니다. 부산에서는 해운대역 뒷길을 ‘해리단길’, 범어사 근처를 ‘범리단길’, 전포동 일대를 ‘전리단길’이라고 부른다. 인천에는 부평 ‘평리단길’이, 대구에는 대봉동 ‘봉리단길’이, 광주에는 동명동 ‘동리단길’이, 울산에는 방어동 꽃바위에 ‘꽃리단길’이 있다. 광역시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수원시 화성행궁 근처로는 ‘행리단길’이라는 이름이 붙었고, 경주시 황남동에는 ‘황리단길’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며, 전주시 객사(客舍) 근처로는 ‘객리단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처럼 전국에 ‘-리단길’이라는 이름이 붙은 곳은 손가락 열 개만으로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이제는 많은 분들이 알고 있겠지만, 이러한 이름들의 원조는 서울 이태원의 ‘경리단길’이다. 길이 시작되는 지점에 육군중앙경리단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경리단길은 2013년 무렵부터 유명해지기 시작했는데, 이국적이고 특색 있는 상점이 많이 모여 이른바 젊은이들의 핫플레이스로 명성을 떨쳤다. 그리고 특색 있는 상권의 대명사로 여겨지며 전국에 수많은 아류(亞流)를 낳기까지 하였다. 이름을 따라 짓는다는 것, 이름이 탐나서라기보다는 성공이 탐나서가 아니었을까? 그런데 채 10년도 지나지 않은 지금은 전국의 수많은 ‘-리단길’만 성공의 바람을 담은 명칭으로 남았고, 막상 ‘경리단길’은 공실(空室)만 남은 몰락한 상권의 대명사로 언급된다. 경리단길의 몰락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건물주들이 상가 임대료를 지나치게 높게 올렸다는 사실을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손꼽는다. 그리고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갈라버린 꼴이라며 안타까워한다. 유만주(兪晩柱, 1755~1788)는 서른네 살의 나이로 요절한 인물이다. 일생 대부분을 과거 시험 공부에 바쳤기 때문에 그리 널리 알려진 인물도 아니었다. 그런데 유만주는 남들이 쉽게 할 수 없는 대단한 일을 해냈다. 무려 13년 동안이나 일기(日記)를 적은 것이다. 그리고 이 일기에 자신의 자호(自號)와 같은 『흠영(欽英)』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13년이라는 시간의 더께만큼 『흠영』에는 18세기 후반을 살다 간 인물이 경험한 다양한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다. 이 일기를 통해 우리는 어느 한 개인의 개인사(個人史)를 볼 수 있으며, 그가 살아갔던 사회와 시대를 함께 엿볼 수 있다. 1783년 10월 24일의 일기에서는 고구마에 대해 언급하였다. 고구마가 조선에 언제 들어왔는지, 고구마의 맛은 어떤지, 주로 어느 지역에 심었는지, 구황작물로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등에 대해 기록하였다. 신뢰할 만한 여러 기록들에 따르면 1763년에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조엄(趙曮, 1719~1777)이 대마도에서 고구마 종자를 가져왔다고 하니, 유만주의 기록 역시 사실에 대체로 부합한다. 고구마는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고, 재배가 어렵지 않은데다가, 수확량도 많기 때문에 그야말로 기근의 시대에 배고픔을 해결해주는 구황작물(救荒作物)로서는 제격이었다. 그래서 동래부사(東萊府使)로 있던 강필리(姜必履, 1713~1767)는 『감저보(甘藷譜)』라는 책을 써 고구마를 재배하고 수확하는 방법을 널리 알리고자 노력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고구마가 백성들의 기근 해결에 도움이 된 것도 그리 오래 가진 못하였다. 관리들이 고구마에 무거운 세금을 매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결국 백성들은 세금을 견디다 못해 고구마를 다 뽑아 버리고 다시는 심지 않는 지경까지 이른다. 고구마를 캐서 굶주림을 해결하는 이익보다 세금으로 바쳐야 할 부담이 더욱 크다면 굳이 힘들게 고구마를 재배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관리들의 이런 횡포는 유만주의 기록 이후로도 오랜 기간 만연했던 것 같다. 정조 때 호남위유사(湖南慰諭使)로 나갔던 서영보(徐榮輔, 1759~1816)가 1794년에 올린 별단(別單)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신이 이번 길에서 연안의 군과 여러 섬들을 많이 돌아다녔는데 이러한 곳에 반드시 고구마를 많이 심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흉년에 곡식이 없는 것을 목견하고는 구제할 방도가 없어 시험 삼아 고구마의 유무를 찾아보다가 그 사실을 갖추어 알았습니다. 고구마 종자가 처음 들어왔을 때는 백성들이 다투어 심어서 생활에 보탬이 되는 경우가 왕왕 많았는데, 얼마 되지 않아 영과 읍의 가렴주구가 따라서 이르면서 사나운 관리가 문에 이르러 고함을 치며 수색을 하였습니다. 관에서 백 포기를 요구하고 아전은 한 이랑씩 다 거두어 가니 심은 자는 곤란을 당하고 아직 심지 않은 자는 서로 경계하여 부지런히 심고 가꾸는 것이 점점 처음만 못해지다가 이제는 희귀하게 되었습니다. - 『정조실록』 18년(1794) 12월 25일 조
고구마 이야기에 대한 결론으로 유만주는 우리나라의 못된 풍속을 개탄한다.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일들을 그냥 놔두면 참 좋으련만 꼭 끈덕지게 훼방을 놓아 견딜 수 없게 한다는 것이다. 만약 관리들이 고구마에 적당한 세금을 매겼더라면 백성들의 굶주림도 해결하고 관아의 곳간도 채울 수 있었을 것이다. 왜 꼭 백성들이 농사를 포기할 마음을 먹을 때까지 몰아붙였어야 했는지 의문이다. 한때 성공한 상권의 대명사로 불리던 경리단길이 이제는 젠트리피케이션(둥지내몰림) 현상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언급되고 있다. 높은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해 내몰린 상인들의 모습은 차라리 굶을지언정 고구마를 뿌리째 뽑아버리고 농사를 포기한 18세기 후반 백성들의 처참한 모습과 많이 겹친다. 인간은 늘 앞선 실패를 거울삼아 많은 것을 배운다. 다행히 최근에는 적정 수준의 임대료만 받겠다는 ‘착한 임대 문화’를 정착시키려는 움직임이 있다고도 한다. 부디 경리단길 이후로 생겨난 수많은 ‘-리단길’이 젠트리피케이션의 유사 사례가 아니라 상생(相生)의 성공 사례로 그 이름을 오래 유지하기를 희망한다.
* 유만주의 일기 『흠영(欽英)』 가운데 일부는 선역(選譯)이 되어 있다. (김하라 편역, 『일기를 쓰다 1, 2』, 돌베개, 2015). 본 원고의 작성 과정에서 이 책의 도움을 크게 받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