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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무술의 한국유입과정
한국에 중국무술이 전파된 것은 첫번째는 1949년 중국의 국민당 정부가 몰락하고 무술을 배운 중국인들이 한국 등 다른 나라로 이주해 간것이 사실상 중국무술의 본격적 보급의 시발이라 할 수 있다.
두번째는 중국과 한국이 수교하고 자유왕래가 되면서 중국본토의 무술을 배우게 된것이다.
한국에서 1990년도 이전에 배울 수 있는 중국무술은 소림권, 당랑권, 팔괘장 3가지 밖에 없었으며 지금도 태극권 정도가 추가 되었었을 뿐 사정이 바뀌지 않았다.
우선 화교에 대해 알아보자
중국인이 외국으로 많이 나가던 19세기 말경에는 외국의 중국인들을 청국인(淸國人), 청상(淸商), 화인(華人), 화상(華商)과 같이 표현하였는데 화교(華僑)라는 말이 처음 둥장한 것은 일본 요코하마에 살던 중국인들이 1898년에 학교를 세우면서 화교학교(華僑學敎)라고 명명한 것에서 비롯한다.
이 후 중국에서 화교라는 단어가 공식화되어 공문서에 쓰이기 시작하면서 '화교'는 더욱 애용되었다.
화교유입은 임오군란직후 체결한 "조청수륙무역장정(朝淸水陸貿易章程)"에 의해 한국에 들어오기 시작한 이래, 1910년에는 만명이 넘을 정도로 빠른 증가를 보였고 1942년에는 82.000명으로 화교인구가 불어났다.
하지만 한국전쟁과 한국의 외국인 이민규제에 의해 1980년에는 29.400명으로 감소하였다.
화교의 출신지역은 94%이상이 산동성이다. 산동성과 인천은 지리적으로 가까웠고 19세기 말부터 겹친 재앙으로 만주로 이동했던 산동출신 중국인들이 신의주를 통해 한국으로 이주하게 되어 한국의 화교는 산동출신이 많다.
임오군란 후에 한국에 오게된 화교들은 청나라의 지원으로 경제가 날로 번창하였으나 식민지시절인 1930년대부터 일본의 적극적인 규제에 의해 화교경제가 쇠퇴하였다.
그러나 2차대전후 화교는 다시 경제붐을 일으켰고 홍콩, 마카오를 포함한 중국과 무역이 활발해졌다.
하지만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화교무역업은 몰락하였고 화교들은 자본이 적게 들고 기술연마가 필요하지 않은 요식업으로 전향하는 사람이 많았다.
1977년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화교의 78%가 요식업을 운영하고 있었다.
화교들은 대부분 산동성출신이었기에 빵과 국수 만드는것은 누구나 할 수 있었다. 1957년에는 1.703개이던 중국집이 1960년대 말에는 3.000여개소로 증가를 하였다. 당시에는 중국집이 한국사회의 각계 각층에 다 인기가 좋았다. 부자들은 태화관, 대려도, 대관원 같은 큰 중국요리집의 손님이었고, 일반중국집은 서민층들이 잘 이용했다.
요즘 TV에서는 중국에는 짜장면이 없다고 하는데, 실제 산동성에는 춘장을 이용한 요리가 많다. 양장피는 중국본토에서 찾기 어렵고 대만과 복건성 등에서 볼 수 있는 요리라고 한다.
그렇다면 한국 화교들의 문화는 산동성과 중국 본토의 개방이전에 왕래가 가능했던 대만의 것들이 묘하게 섞여있는 것이다. 게다가 무술에 대한 태도와 인식도 대만의 것과 유사하였다.
화교협회장 성운승(좌측5번째), 두학제(죄측6번째), 이덕강(맨우측).
이대앞 이덕강선생 도장에서
화교들은 대개 처음에 호떡집으로 시작해서 돈을벌어 분식집을 차렸으며 더 나아가 중국음식점을 하는 과정이 많았다.
그러나 1961년 외국인 토지법에 의해 외국인은 토지를 전혀 소유할 수 없었기에 자신의 음식점을 한국사람의 명의로 바꾸어야 했다.
게다가 1960년대 말부터 단행된 도시계획에 의해 도로가 확장되자 대개 도로변에 위치하고 있던 중국음식점은 막대한 손해를 보게 되었다.
화교들은 일반적으로 요식업에 종사하였으나 무술을 할 줄 아는 화교들은 생계의 수단이 하나 더 가지고 있는 셈이었다.
초기에 화교들은 한국인에게 무술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표면상의 이유는 중국무술은 심신수련을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어야지 상대를 공격하는 투기무술이 될 경우, 그 위험도가 너무 컸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이 같은 금기는 중국대사관을 본령으로, 전국에 산재한 중국무술가들에게 잠정적으로 취해진 엄한 약속이자 법규였다.
화교들은 좀처럼 한국인에게 전수를 꺼렸다. 1950년대의 한국에는 무전취식자가 많았으며 이들이 중국음식점으로 찾아가 음식을 공짜로 먹고 행패를 부리는 일은 자주 볼 수 있었다.
외국이라는 지역적인 한계와 화교들의 사회적인 지위와 대우는 자연스럽게 한국인들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게 하였다. 그 와중에는 무술을 할 줄 아는 중국인들은 자연스럽게 무술을 자신들만이 가지는 부가가치로 생각하였다.
이런 화교들의 특수한 상황 때문에 중국무술의 전래과정은 왜곡된 부분이 많았다. 화교들은 자신들의 독점적 지위를 굳히기 위해 없어도 만들어 가르쳐주었고 고의로 잘못 가르쳐주었다.
한국에서 중국무술의 보급은 화교들에 의해 쿵후나 십팔기란 명칭으로 불리워지면서 보급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지금의 명동 코스모스백화점이 들어서기 전 중국대사관 부속건물에서 화교들에게만 지도나 수련이 가능했고, 한국인에게는 절대 지도할 수 없다는 원칙이 있었다. 당시 그곳은 '한국화교무술총회'라는 간판으로 철저하게 극히 제한된 화교들만의 전용도장이었다.
여기서는 원래 고씨 성의 사범과 여품삼이 무술을 가르치고 있었다. 여덕용이라는 이름도 사용했으며 여품삼은 고사범의 제자였다. 여품삼은 소림권을 배웠으며 소공동에 있는 유도도장에서 운동하기도 하였고 서울의 팔레스호텔 뒤에 있는 자신이 운영하는 태평관이라는 식당에서 운동을 하였다. 1961년 즈음에는 대구에서 올라와 합기도 체육관을 낸 지한재의 도장을 빌려쓰기도 하였다.
그런데 고사범이 갑자기 주자 무술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을 물색하였고 당시 춘천에서 음식점을 경영하고 있던 임품장(林品璋)이 물망에 떠올랐다. 임품장은 이전에는 강릉에서 음식점을 열기도 하였으나 춘천으로 자리를 옮겼다.
임품장은 산동성 모평현(牟平縣)에서 출생했으며 기춘정(紀春亭)의 제자이다. 기춘정은 중국의 대련에서 당랑권을 교습하였고 임품장은 이곳에서 당랑권을 배웠다.
연무중인 임품장선생
당랑권의 최고 정화는 적요권(嫡要拳)이다. 특히 투로가 많기로 유명한 당랑권이지만 그 많은 투로들도 적요권을 성취하기 위한 하위단계라고 일컬어질 정도이다. 실제로 적요권을 수련한 사람에 따르면 '적요권은 모든 수법이 실전적으로 군더더기 없이 이루어져 있어 의혹이 업다'고 한다.
적요권은 모두 7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중 1단과 2단은 쉽게 배울 수 있으나 3단부터는 배운 사람이 중국본토에도 많지 않으며 적요권을 배우고 다른 지역이나 문중을 떠날 사람들은 4단까지 밖에 배우지 못하는 것이 관례였다. 임품장은 기춘정에게서 적요권을 4단까지 수련하였다고 한다.
임품장은 춘천에서도 무술을 가르쳤는데 정식체육관이 아닌 사적으로 적당한 장소를 찾아다니며 가르쳤다고 한다. 당시 당랑권을 배운 사람은 지금은 고인이 된 화교 이자량(李子良)과 한국인 이봉철이 있다.
이자량은 자타가 공인하는 임품장의 수제자이지만 특이한 인물은 이봉철이었다.
임품장은 공식적으로 한국인 제자들이 없다. 또 옛날에는 화교와 같이 무술을 수련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봉철은 운이 좋게도 화교 그룹안에서 당랑권을 배웠다. 이봉철은 춘천의 음식점에서 심부름과 배달을 하였다. 그는 임품장이 이자량에게 가르치는 모습을 보며 따라 했는데 자질이 대단했으며 임품장도 감탄할 정도였다. 이봉철은 적요권을 2단까지 수련했으며 중국무술을 배운 사람들에게 실력가로 인정을 받았다.
하지만 이봉철은 말년에는 정신이 이상해졌다. 이유로는 술과 집안사정이 있었으나 주변사람들에 따르면 기공을 배운 적이 없는 상태로 혼자 수련하다가 피까지 토하는 부작용을 겪었다고 한다. 이봉철은 당랑권을 후대에 제대로 전하지 못한채 부랑자처럼 혼자 외롭게 죽었다.
이러한 가운데 지방에서 극소수의 사범들이 자신의 수련을 위한 수단으로 한국 소년들을 대상으로 마당에서의 수련은 간혹 있었다고 하며 사설도장을 직접 개설하여 운영한 곳은 그때까지는 없었다.
중국무술이 한국인에게 개방된 것은 1960년대 들어서면서였고 서울과 인천 등지를 중심으로 전국으로 파생되기 시작한다.
여품삼과 두학제는 1958년 봄 춘천으로 가서 임품장을 초청하였고 중국대사관내에서 무술을 가르치게 되었다.
이후 임품장은 중국대사관을 나와 여품삼과 소신당을 데리고 1960년 가을 화신백화점 맞은 편에 체육관을 설립하여 제자를 받아 들였으며 한국인들에게도 문호를 개방하였다.
그후 1963년 봄 종로3가 장사동에 중국무술관을 설립하여 두학제, 여품삼, 이덕강, 소신당이 장권(長拳)을 가르쳤다. 임품장은 당랑권을 배운 사람이지만 한국인들에게 당랑권을 가르치지 않았다.
한국에서 가르친 장권은 족보가 없는 권법이었다. 당랑권 등의 전통무술을 한국인에게 전하기 싫은 화교들은 일부러 장권을 만들어 가르쳤다. 지금 떠돌아 다니는 많은 수의 무술투로들이 한국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1963년 종로3가 장사동에 체육관을 내자 이덕강선생이 종일 무술을 지도하였으며 그이외에 사람들은 다른 직업을 가지고 파트타임으로 사람들을 가르쳤다. 다른 직업은 대부분 음식점을 경영하는 일이었다.
이덕강선생은 1931년 산동성 연태시 출신이며 18세에 부친과 함께 한국에 오게 되었다. 이후 아현동과 퇴계로에서 체육관을 열었다가 지금은 70세가 넘은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이화여대 앞에서 무술을 가르치고 계시다.
이화여대 앞에 있는 이덕강선생님의 도장내부
현재 중국무술을 수련한 한국인 원로들은 거의 대부분 이덕강선생의 제자이다. 선생은 실질적으로 중국무술을 한국에 뿌리내리게 한 장본인이다.
대만 무술대회 참가후, 뒷줄 좌측2번째가 이덕강선생, 5번째가 임품장선생
또 다른 당랑권의 명인으로는 강경방(姜庚芳)이 있다. 강경방은 산동성 연태 출신이다. 강경방은 산동성 연태에 근거지를 두고 있는 학가문의 2대 종사 학향록의 제자이다.
학가문은 당랑권의 5대 양학향 대에서 갈라져 나온다. 양학향의 유명제자로는 강화룡, 학련여등이 있는데 학가문은 이 학련여로부터 출발한다. 강화룡의 제자로는 임품장의 스승인 기춘정이 있다.
강경방은 한국에서 보기 드물게 계통이 뚜렷한 무술가였다. 강경방은 부산 쪽에 근거를 두고 있었으면 도장을 만드는 등의 적극적인 활동은 하지 않았으나 찾아오는 사람은 가르치기도 했다.
다음으로는 인천에 노수전이 있다. 노수전은 무술을 일제시대부터 원주를 비롯한 여러군데서 가르쳤다. 이후 인천에 정착을 하게 되지만 직접 도장을 연 것은 아니고 다른사람의 도장에서 교습을 하거나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돌아다니면서 가르쳤다. 노수전이 가르친 무술은 팔괘장이다.
1972. 6. 29. 인천 신흥동 도장에서 연무중인 노수전과 아들 노수덕
팔괘장은 태극권, 형의권과 더불어 내가권에 포함되며 성립된 시기도 얼마되지 않지만 다른 중국무술과는 많은 차이가 난다.
팔괘장은 별다른 기본자세가 없고 주권(走拳) 이라는 독특한 단련방법이 있다. 일정한 크기의 원주를 정해진 보법과 팔 자세를 고정시키고 빙빙도는 것이다.
노수전이 배운 팔괘장이 어떤 유파의 것이고 스승이 누구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노수전에게 배운 제자들은 노수전은 격투에 능했으면 정정화류의 용조장을 자주 사용하였다고 회고한다.
노수전은 투로에는 그다지 능하지 못했기 때문에 제자들은 그가 중국에서 많이 배우지 못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노수전은 자신의 스승인 이경호라는 사람을 거명했는데 이경호는 북파권법을 배운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나중에 북경에 간 한국인들이 중국무술협회 등을 통해 수소문한 결과 팔괘권사 중에 왕동이라는 사람이 있고 왕동의 제자가 이경호라는 것이다. 이경호는 북파무술과 팔괘장을 배웠으며 노수전은 이경호와 왕동에게서 팔괘장을 배운 것으로 추측하고 있으나 확실한 증거는 아직 없다. 산동성 연태에 왕동과 비슷한 이름의 묘가 있는 것을 확인했을 뿐이다.
노수전의 초기제자로는 화교인 노수덕, 유순화, 강영재, 강학문과 한국인 박복남, 전대성이 있다. 전대성은 누수전의 한국인으로서 첫 번째 제자이며 노수덕은 노수전의 외아들이다.
노수전은 투로는 많이 몰랐으나 일신의 공력은 대단 하였다고 한다.
노수전은 실제 30살이 넘어서 팔괘장을 시작하였고 제자들에게 한번 주권을 도는 것이 백번 주먹 치는 것보다 낫다고 주권을 강조하였다.
팔괘장은 나이가 들어서 시작해도 대성할만큼 시스템이 훌륭한 무술이다.
제자들이 노수전의 막강한 공력을 보며 팔괘장을 오래 수련하면 저런 힘이 생기는구나라고 짐작을 했다. 노수전은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엄격했고 한 수를 이해 못하면 다음으로 넘어가지를 않았으며 벌로 2배로 운동을 시켰다.
한국인 제자가 없는 사람으로는 산동성 영성현 동산촌이 고향인 필서익(畢庶益)이 있다. 필서익은 할 줄 아는 무술이 당랑권, 태극권 등 무려 10가지가 넘었다. 영성현은 무술이 성해서 개들도 3수를 안다는 말이 있다.
필서익도 인천, 대구, 군산, 부산 등을 돌아다니며 무술을 가르쳤으나 화교들에게만 전수하였다.
이외에도 이름이 나타나있지 않은 화교들이 체육관 없이 식당이나 마당 또는 산 등에서 비공식적으로 산발적인 지도가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1960년대 후반이 되면 화교들에게 무술을 배운 한국인들이 직접 도장을 여는 시대로 접어든다.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중국무술도장을 연 사람은 강용일이다.
강용일은 1960년부터 이덕강에게 무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강용일은 1967년 4월 영등포에 중국무술도장을 열었고 잇달아 이일형, 정소우 등이 도장을 개관하였다.
이후 1960년대 중반에는 최초로 한국인들에 의해 대한십팔기협회라는 무술단체가 창립되었다. 처음에 중요한 역활을 한 사람은 황주환, 강용일, 김갑현, 김영호 등이 있으며 회장은 황주환이 맡았다. 이들은 단증을 발급하기도 했으며, 각종대회에 출전하면서 많은 수의 체육관을 보급해 나갔다.
인천에서는 전대성이 신흥동에 중국무술십팔기총본관이라는 도장을 만들었고 박복남은 도화동에 체육관을 설립하였다. 이 중 박복남은 1980년대 미국으로 건너가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1980년대 사단법인 대한쿵후협회가 창립된 후, 대한십팔기협회는 빛을 잃어가면서 유명무실해지고 말았다.
이후 또 다른 사회단체로 인천에 근거를 둔 한중쿵후협회가 창립되었으며 경기도에 근거를 둔 한국쿵후협회 등이 생겨났다. 임의단체로 중무회, 신무회, 한국쿵후연맹 등이 생겨나면서 국내 중국무술계는 춘추전국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일본에서도 중국무술이 뿌리내리는 것도 중국이 1978년 개혁, 개방을 한 이후이다. 그나마 한국은 지리적인 여건과 역사적인 배경 때문에 화교들이 대거 들어오면서 중국무술의 존재를 알려나간 것이다.
인천에서 체육관을 운영중인 한 중국무술계 인사는 "실질적으로 무술을 많이 배운 것은 근래에 들어서이다. 한중수교이후가 본격적인 시작이라고 보아야 한다. 시작은 오래 전이지만 이전 것은 제대로 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국인들이 무술에 대한 정보를 얻는 곳은 대만이 유일하였다. 대만이 더 잘살기에 대접은 융숭하였으나 지금 중국 본토와 같이 기술전수는 전혀 없었다.
화교들은 한국인과 화교를 엄연히 구분하여 가르쳤으며 화교의 유언이 한국인에게는 무술을 가르치지 말라고 했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었다.
1990년을 기점으로 중국무술을 힘을 잃는다. 동네마다 번성하던 중국무술, 십팔기, 소림권의 간판은 자취를 감추고 한국사람들은 중국무술로는 태극권이나 배울 뿐이고 나머지는 검도와 한국무술류로 넘어갔다.
많은 이들이 그리워하는 그 시절처럼 일반인들은 허름한 시멘트 건물에서 한 여름에 땀을 뻘뻘 흘리며 운동하는 것을 즐기지 않는다. 운동을 해도 에어콘이 있고, 운동후 샤워를 할 수 있는 시설이 좋은 곳에서 하고 싶어한다.
한국의 중국무술계는 경제성장에 따른 사람들의 생활수준의 향상을 따라가지 못했다.
한국에서 중국무술이 다시 꽃을 피울 것인가는 경기종목인 우슈에게 바턴을 넘긴 채 침묵하고 있다.
제가 보기에는 한국이나 중국이나 마찬가지이나 전통권은 거의 마지막 세대이지 않은가 싶다. 후학들의 발양에 기대를 하며....
2000.7/8 마르스에서 따옴
첫댓글 안녕하세요 오랫만에 들러서 그동안 궁금했던 점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