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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의 귀를 여는 데 대간들은 목숨을 걸었다” 직언으로 生死가 오간 사람들 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효종 5년(1654) 황해도 관찰사 김홍욱(金弘郁)이 국왕의 구언(求言)에 응해 상소를 올렸다. 그는 이조좌랑 시절 권신 김자점(金自點)과 뜻이 맞지 않자 사직할 정도로 강직한 사대부였다. 김홍욱은 효종이 잇따른 재변에 널리 구언하자 상소로 답했는데 결국 자신의 목숨을 앗겨야 했다. 그 상소 내용에 일종의 금기였던 강빈(姜嬪)의 옥사를 거론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김홍욱의 상소를 본 효종은 경악했다. 강빈은 바로 8년전 부왕 인조에 의해 사형당한 자신의 형수였다. 부왕 인조에 의해 독살당한 비운의 왕세자 소현세자(昭顯世子)의 부인이 강빈이었다. 인조는 소현세자를 독살한 후 강빈까지 죽여 버렸던 것이다. 결국 강빈의 문제는 효종 자신의 정통성 문제에까지 닿아 있기 때문이었다. 시국의 물줄기를 바꾸는 상소 사건 당시부터 강빈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여론이 팽배했다. 하지만 세자와 세자빈이 죽어 나가는 판에 목숨이 열개라도 부족한 상황이라 다들 입을 다물었던 것이다. 강빈의 옥사를 당시에는 ‘강옥’(姜獄)이라고 불렀다. 이 사건을 김홍욱의 주장대로 재심해 강빈이 무죄임이 드러날 경우 살아있는 그의 아들, 즉 소현세자의 아들 문제가 대두되게 되어 있었다. 강빈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것이 인정될 경우 그에게 씌워졌던 역적이란 누명이 벗겨지는 것은 물론 당시 살아있던 소현세자의 아들이 왕위를 이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여론이 조성될 수 있었다. 때문에 효종은 강경대응해 김홍욱을 체포해 국문했다. 그러나 김홍욱은 모진 고문 속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대신과 삼사를 향해 부르짖었다. “어찌하여 말하지 않는가. 어찌하여 말하지 않는가. 옛날부터 말한 자를 죽이고도 망하지 않은 나라가 있었습니까? 신은 용봉(龍封)·비간(比干)과 더불어 지하에서 함께 놀겠습니다. 내가 죽거든 내 눈을 빼내어 도성 문에 걸어 두면 국가가 망해 가는 것을 보겠습니다.” 용봉은 관용봉(冠龍封)을 말하는데 하(夏) 걸왕(桀王)의 무도함을 간하다 피살된 인물이고, 비간 역시 은(殷) 주왕의 무도함을 간하다 살해된 인물이다. 김홍욱은 결국 곤장을 맞다 죽었는데 이를 두고 “효종실록”의 사관(史官)은 이렇게 평하고 있다. “(김홍욱이 강옥의) 의심스러운 단서를 소장으로 올려 그 원통함을 풀어 주려 한 지 오래였는데 이때에 와서 분부에 따라 진언했다가 마침내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니 듣고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김홍욱이 효종에게 올린 상소는 응지(應旨)상소였다. 조선은 천재지변이 발생하면 백성들의 억울한 원한 때문에 하늘이 노한 것으로 받아들였기에, 그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임금은 자주 신하들에게 구언(求言)했던 것이다. 구언에 응해 올리는 상소가 응지상소로서 이때는 그 내용이 아무리 강경해도 처벌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김홍욱은 바로 그 응지상소를 올렸다. 목숨을 잃은 특별한 경우에 해당한다. 효종이 “모든 일을 숨김없이 다 말하라. 말이 비록 거칠거나 참람하더라도 나는 죄를 주지 않을 것”이라고 구언해 놓고 김홍욱을 처벌하는 것에 대해 여론이 들끓었으나 효종이 워낙 강경해 구할 도리가 없었다. 김홍욱이 장사(杖死:곤장을 맞다 죽음)한 후 다시는 강빈의 말을 입밖에 꺼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그 5년 후인 효종 10년(1659) 이조판서 송시열(宋時烈)은 이른바 기해독대(己亥獨對) 때 다시 이 문제를 꺼냈다. 임금과 단 둘이 있는 자리에서 송시열은 “강빈의 옥사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에 불평이 있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정면에서 물었다. 효종은 금기사항을 면전에서 다시 꺼내는 송시열의 태도가 큰 불만이었겠지만, 이때는 송시열에게 강빈의 옥사에 대해 변명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언로는 제도에 의해서만 트이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지존(至尊)인 임금에게까지 목숨을 건 투쟁이 있어야만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국왕의 잘못 바로잡는 諫官 제도화 조선시대 상소는 일반 사대부가 자신의 의견을 국왕에게 전할 수 있는 일반화된 방법이었다. 상소는 벼슬아치는 물론 벼슬 없는 백두의 유생들도 올릴 수 있었는데, 봉장(封章)·주소(奏疏)·진소(陳疏)·장소(章疏) 등으로도 불린다. 언로가 막히면 나라가 망한다는 것이 유교정치의 이상이기 때문에 조선은 상소의 내용이 강경해도 처벌하지 않거나 관대하게 처리했다. 그러나 때로는 이런 원칙이 무시되고 상소 내용이 문제되어 처벌받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국왕이나 대신들을 심하게 공격하는 상소는 때에 따라 귀양을 가거나 목숨까지 잃게 마련이었다. 조선의 어떤 제도들은 현대 국가의 제도들보다 뛰어났다. 그 중 하나가 간관(諫官)제도다. 간관이란 사간원의 관원을 뜻한다. 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따르면 간관의 임무는 간쟁과 논박으로 되어 있다. 간쟁이란 임금의 언행이나 시정에 잘못이 있을 경우 이를 바로잡기 위한 것이고, 논박은 인사문제 등 일반 정치에 대해 시비를 논하는 것이다. 즉, 조선은 국왕이나 정치의 잘못에 대해 시비하는 관직을 두었던 것이다. 이를 통해 국왕은 사대부들의 여론을 듣고 집권자의 잘못을 자정(自淨)하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간관제도는 오늘날에도 도입을 생각해 볼 만한 제도라 아니할 수 없다. 국왕도 두려워하지 않고 간쟁하는 간관이 있다면 이른바 대통령 친·인척이니 실세니 따위의 이름으로 언론의 논쟁 범위에서 간단히 피해 버리는 그릇된 정치풍토를 바로잡고 부정부패를 막는 데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선의 간관은 대관(臺官)과 뗄래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대관과 간관을 합쳐 대간(臺諫)이라고 부르는데 때로는 이들을 양사(兩司)라고 불렀다. 역시 간쟁의 역할도 맡고 있던 홍문관을 합쳐 삼사(三司)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들 삼사를 조선의 언론기관이라고 하는데, 이들이 사대부들의 여론을 전달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헌부(司憲府) 관원을 뜻하는 대관(臺官)과 사간원·홍문관 관원을 뜻하는 간관의 역할은 조금씩 달랐다. 사헌부의 대관은 벼슬아치들의 비행을 적발, 탄핵하는 것이 기본 임무로 요즈음에 비유하면 검찰이나 감사원과 같은 것이다. 경국대전은 사헌부를 정치의 시비에 대한 언론활동, 백관에 대한 규찰, 풍속을 바로 잡는 일,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펴주는 일, 외람되고 거짓된 행위를 금하는 일을 하는 기관으로 기록하고 있다. 간관은 간쟁과 논박을 하고, 대관은 백관에 대한 규찰까지 겸하는 집행기구의 성격이 더 있었던 것이다.
대간들 품계 낮으나 특별한 대접 받아 사헌부의 수장인 대사헌은 종2품이었고, 실질적으로 업무를 주도하는 집의는 종3품, 장령은 정4품, 지평은 정5품이었다. 사간원의 수장인 대사간(大司諫)은 종3품 당상관이었고, 사간은 종3품, 헌납은 정5품이었다. 품계로 따지면 그다지 높다고 할 수는 없으나 대관은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관리가 서로 마주칠 경우 상관은 하관의 인사를 받아도 답례하지 않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비록 당상관이라 할지라도 대간의 인사를 받으면 정중히 답례해야 했다. 이것이 경국대전에 명문화된 규정이라는 점에서 대간이 어느 정도의 대접을 받았는지 알 수 있다. 오늘날 일반 국민 상당수가 검찰을 불신하는 이유는 정치인이나 고위관료들에게는 허수아비 같으면서 일반 국민들에게는 추상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의 대간은 달랐다. 조선의 대간은 위로는 영의정을 비롯해 지존인 국왕에게까지 서슴없이 간쟁했다. 대간의 생명은 직언(直言)이었다. 대간들은 직언을 자신들의 존재이유로 삼았기에 간쟁을 서슴지 않았다. 국왕의 친·인척이나 실세라 하더라도 대간들에게는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왕권에 버금가는 권력을 누리던 권신 한명회(韓明澮)가 성종 재위 때에만 무려 107회에 달하는 탄핵을 받은 것이나 연산군 당시의 권신 임사홍(任士洪)이 이보다 많은 140회의 탄핵을 받은 것은 조선 대간의 기상을 단적으로 말해 준다. 국왕에게도 간쟁을 서슴지 않는 대간이 대신들의 눈치를 볼 리 없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조선의 대간들처럼 강직한 인물들이 없음을 한탄하듯 국왕이나 권력자를 향해 간쟁하고 탄핵하는 것은 사실상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집권자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비판적인 목소리를 싫어하게 마련이었다. 이런 절대군주에게 간쟁해야 하는 대간들이 고초를 겪었을 것임은 쉽게 예상할 수 있다. 태조 이성계의 재위 2년 내시 이만(李萬)이 세자빈 유씨와 간통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엄청난 사건에 대해 대간에서는 이는 개인사가 아니라 국가적인 대사건이므로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러자 이성계는 수십명의 대간들을 하옥하고 유배를 보내 버렸다. 조선의 대간들은 이런 고초를 겪으면서도 ‘창업군주’에게까지 간쟁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두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 끝에 즉위한 태종의 경우는 한층 더했다. 즉위 원년 사간원에서 궁실(宮室)을 짓기 위한 토목공사를 중지하라고 소청(疏請)하자 태종은 좌사간 윤사수(尹思修) 등을 순군(巡軍)에 하옥해 버렸다. 재위 8년에는 모반죄로 체포되어 능지처사로 판정 받은 목인해(睦仁海)의 처형 연기를 주청했다는 이유로 대사헌 맹사성(孟思誠)을 비롯한 간관을 순금사(巡禁司)에 하옥한 후 장(杖) 100대의 형벌을 내리기도 했다. 태종은 대간의 역할이 국왕에 대한 간쟁이 아니라 관원들의 부정부패를 막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재위 18년에 태종은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정권이 모두 대간에게 돌아가는 것은 마땅치 않으나 대간에게 권력이 없는 것도 역시 마땅치 않다. 지금 이런 세상을 당하여 대간이 권력이 없으면 탐포(貪暴)한 자들을 제어할 수 없다.” 해동성군 세종도 대간들의 언론 억압 태종의 이런 생각과 달리 조선의 대간들은 자신들의 達グ?관리들의 규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국왕에 대한 간쟁에 있다고 믿었기에 간쟁의 임무를 포기하지 않았다. 세종은 흔히 백성들의 여론을 잘 수렴한 임금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그 역시 대간들의 언론을 억압하는 데서는 태조나 태종 못지않은 임금이었다. 대간들에 대한 세종의 억압이 얼마나 심했던지 “세종실록” 15년조는 다음과 같은 의금부 옥졸들의 말을 전하고 있다. “대간들이 오늘은 헌사(憲司:사헌부)에 앉아 있으나 내일이면 반드시 하옥되어 나의 제어를 받을 것이다.” 해동성군으로 불리는 세종마저 이럴 정도였으니 국왕이 직언에 귀를 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짐작케 한다. 그러나 대간들은 이처럼 하루살이같은 파리목숨에 처해서도 국왕에 대한 간쟁을 그치지 않았다. 언론을 심하게 억압한 결과 많은 부작용이 드러나자 세종은 재위 24년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나는 초기에 언관이 비록 작은 잘못을 범하였어도 철저히 죄를 주었다. 이로써 언관이 모두 오래지 않아 갈리었으니 이 어찌 옳은 일이겠는가. 근년 이래로는 작은 잘못은 용서하였다.” 세종은 스스로 언론에 대한 억압이 지나침을 느끼고 후기에는 언관의 간쟁을 허용했던 것이다. 이는 그만큼 세종의 왕권이 안정되었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중요한 점은 국왕이 언론을 그토록 억압해도 언관들은 굽힘없이 간쟁을 계속했다는 점이다. 언로는 집권자가 허용하는 만큼 누리는 것이 아니라 언관·언론인들이 확보하는 영역만큼 누리는 것이다. 오늘날 언론이 불신받는 이유는 많은 국민들이 현재의 언론을 공정하지 않다고 의심하기 때문이다. 언론에서 간쟁을 하면 집권자측에서는 순수하게 바라보지 않고 그 배후를 의심한다. 이는 집권자측의 비뚤어진 사시(斜視)일 수 있지만 지금의 언론인들이 과거 정권에서 이런 사시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처신을 해온 전례들이 있기 때문에 쉽게 수정되지 않는 것이다. 조선의 대간들은 그 자신이 공정하기 위해, 그리고 청렴과 강직성을 유지하기 위해 뼈를 깎는 노력을 했다. 조정에서 회의가 끝나 물러날 때도 대간은 다른 관리들이 모두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나갔다. 다른 관리들과 뒤섞이지 않기 위해서였다. 이런 자기관리가 있었기에 국왕에게까지 서슴없이 간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언관의 직언이 강직함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그것이 공론(公論)이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왕도정치의 이상은 여론을 하늘의 뜻, 공론으로 믿고 서슴없이 간쟁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 당쟁이 격화되면서 언론도 더 이상 공론이 아니라 당론(黨論)을 여론이란 이름으로 호도하는 상황이 되었다. 조선 초기의 대간들은 국왕과 대신들을 상대로 굽히지 않고 간쟁하고 탄핵했다. 세종이 재임 후반에 대간들의 언론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취한 것은 대간들의 간쟁이 비록 듣기는 싫어도 사리사욕이 배제된 공론이란 사실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달랐다. 효종이 재위 10년만에 급서하자 인조의 계비(繼妃)인 자의대비의 복제문제가 대두되는데 이것이 바로 제1차 예송논쟁이다.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들은 효종이 장자(長子)가 아니라 소현세자의 동생이므로 자의대비가 차자의 복인 1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년복설의 배후에는 복잡하고 중요한 이론들이 내재되어 있었지만 당초 1년복을 주장할 때만 해도 이것이 그다지 문제가 될 줄은 몰랐다. 그런데 정권에서 소외된 남인 윤선도가 송시열의 1년복설이 효종의 정통성을 부인한 것이라며 3년복설을 주장하는 내용의 상소를 올림으로써 서인과 남인 사이의 민감한 당쟁으로 전화되었다. 윤선도의 주장에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윤선도의 이론 또한 천하의 공론이라기보다 정권에서 소외된 남인들의 당파적 주장이란 한계가 있었다. 서인들은 남인들이 3년복설을 거듭 제기하는 속뜻이 단지 복제를 바로 잡자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예론을 빙자해 서인들을 역적으로 몰아 실각시키고 정권을 장악하려는 의도임을 알고 강경대응했다. 이처럼 예송논쟁이 당쟁으로 전화되면서 윤선도는 삼수(三水)로 귀양을 갔는데 사형당하지 않은 것만해도 다행이었다. 당쟁이 성행한 이후 당론을 공론으로 빙자해 상소하는 것이 조선의 큰 병폐가 되었다. 사림의 분당 직전에 이런 당쟁의 병폐를 예언한 인물이 있었다. 선조 당시 영의정이던 동고(東皐) 이준경이었다. 사림파가 동인과 서인으로 갈리기 직전인 선조 4년(1571) 이준경(李浚慶)은 유차(遺箚:죽음에 임해 올리는 약식상소문)를 올려 이렇게 주장했다. “지금 벼슬아치들이 이런저런 명목으로 붕당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는 대단히 큰 문제로서 나중에 반드시 나라의 고치기 어려운 환란이 될 것입니다.” 이준경의 이 유차는 당시 사대부들의 중심이었던 율곡(栗谷) 이이(李珥)를 지목한 말로 받아涌㈐낡? 율곡 또한 그렇게 생각해 글을 올려 변명했다. “조정이 맑고 밝은데 어찌 붕당이 있겠습니까? 이는 임금과 신하를 갈라놓으려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음에 임해서는 그 말이 착한 법인데 이준경은 죽음에 이르러 그 말이 악합니다.” 율곡을 따르는 사림파가 장악한 삼사는 거듭 이준경의 벼슬을 추탈하고자 탄핵했으나 유성룡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 4년 후인 을해(乙亥:1575)년에 비로소 을해당론으로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갈리자 사람들은 이준경의 혜안에 새삼 탄복했고, 율곡은 이를 부끄러워하면서 당론을 조제하는 것을 평생의 과업으로 삼았다. 이는 이이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줄 아는 대학자이자 대정치가였기 때문이었는데, 더 이상 이런 큰 인물은 등장하기가 쉽지 않아 당론을 조절하기보다 당쟁을 부추겼다. 왕위 계승문제에 개입해 목숨 잃은 송시열 조선 후기에 이르면 당쟁이 왕위계승 문제에까지 개입하는 등 말기적 증상을 드러내게 된다. 나라야 결딴나건 말건 대권경쟁에만 온 신경을 집중시키는 현재의 당쟁과 비슷한 말기적 병폐를 보이게 된 것이다. 거유(巨儒) 송시열이 83세의 나이로 사형당하게 된 배경도 왕위 계승문제에 개입한 것이었다. 숙종은 재위 15년만에 희빈 장씨에게서 고대하던 왕자가 탄생하자 이 갓난아이를 원자(元子)로 책봉하고 종묘(宗廟)에 고묘(告廟:나라의 중대한 일을 선왕들에게 고하는 것)까지 마쳤다. 그런데 송시열은 이것이 부당하다는 상소를 올려 끝내 사약을 마시게 된 것이었다. 송시열이 죽음을 무릅쓰고 원자책봉 반대 상소를 올린 이유는 희빈 장씨가 자신과 반대 당파인 남인가 출신이기 때문이었다. 남인가 여인의 몸에서 난 왕자가 왕위에 오르게 둘 수 없다는 생각에서 극력 반대한 것이었다. 희빈 장씨 소생의 아들은 끝내 즉위해 임금이 되었는데 그가 바로 경종이었다. 그러자 경종을 반대했던 노론에서는 경종의 이복동생 연잉군(훗날의 영조)에게 정권을 주기 위해 경종에게 왕세제 책봉을 윽박질러 왕세제가 되게 하고 대리청정까지 시켜 왕권을 빼앗으려 하다 소론 강경파 김일경(金一鏡)의 반격에 밀려 실권하고 말았다. 경종 원년(1721) 천재지변이 거듭되어 임금이 구언하자 김일경은 “삼강(三綱) 중 군위신강(君爲臣綱)이 으뜸이며 오륜의 첫머리는 군신유의(君臣有義)”라며 세제의 대리청정을 주장한 노론 4대신을 역적으로 몰면서 모두 법으로 처단하자고 주장해 결국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영중추부사 이이명(李命) 등 노론 4대신이 사형 당하게 되는 것이다. 당론이 격화되면서 신하들이 넘봐서는 안되는 왕권까지 당쟁의 대상으로 삼았고, 그 결과가 노론 4대신의 죽음이라는 비극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결국 경종 독살설 끝에 영조가 집권한 후 이번에는 김일경이 사형당하고 말았는데, 이 역시 원칙을 잃은 당쟁의 비극이었다. 당쟁이 격화되면서 언관들도 공론이 아니라 당론을 주장하게 되었고 조선의 사대부 그 누구도 더 이상 언관들이 공정하다고 믿지 않게 되었다. 당쟁은 끝내 반대당의 언로 자체를 봉쇄하는 전제정치로 흐르게 되었다. 영조 4년(1728) 소론 강경파 이인좌(李麟佐)가 일부 남인과 함께 경종을 독살한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으로 일으킨 무신란 이후 남인들의 고장인 영남인들은 과거 응시 자체가 봉쇄되었다. 조선 후기 영남 사대부들은 철저하게 차별받았던 것이다. 국론을 압도하는 당론으로 언론 파행 정조가 즉위한 후 남인 채제공(蔡濟恭)을 우의정에 발탁하는 등 남인들을 우대하는 조짐을 보이자 이에 고무된 영남 남인들은 상소문과 자신들이 이인좌에게 동조하지 않았다는 내용을 담은 “무신창의록”(戊申倡義錄)을 갖고 대궐로 올라갔으나 노론이 장악한 승정원은 상소 봉입 자체를 거부했다. 정조 12년 8월부터 석달 이상 대궐문 앞에 꿇어 엎드렸으나 노론이 장악한 승정원은 끝내 이들의 여론을 무시했다. 이들은 그해 11월5일 정조가 효창묘(孝彰廟)에 행행(幸行)하는 틈을 타 신문(新門) 밖에서 대전별감을 통해 상언할 수 있었다. 이?우여곡절 끝에 상소문과 무신창의록을 읽은 정조는 이렇게 말했다. “그대들이 여러 달 동안 대궐문 앞에 꿇어앉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봉소를 거절한 승정원에 책임을 묻겠다. 영남이 이인좌의 난에 일부 가담한 것은 몇몇 흉도들만의 소행인데 이로 인해 영남 일도(一道)를 어찌 다 버릴 수 있겠는가? 영남을 이인좌 난의 소굴이라 한다면 서울에도 역적이 많이 나왔으니 서울을 모두 반역의 소굴로 삼아야 하겠는가?” 정조가 무신창의록의 간행을 명하자 노론이 장악한 대신들은 물론 시신(侍臣)들인 승지, 사관들까지 항명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에 정조는 화가 나서 이렇게 외쳤다. “오늘날 조정에 임금이 있는가, 신하가 있는가? 윤리와 강상이 있는가, 국법과 기강이 있는가?” 당쟁이 격화되면서 신하들은 임금의 신하가 아니라 당수의 신하였고, 왕명이 아니라 당명을 좇는 당인들이었으며, 국론보다 당론을 더 우위에 두게 되었다. 오늘날 툭하면 국회나 국민을 볼모로 전개되는 당쟁이 국가나 국민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당을 위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명약관화하다. 야당의 당론에 여당 또한 당론으로 맞서니 당론만 횡행하고 국론은 설 자리가 없는 것이다. 조선 초기 국왕에게까지 간쟁을 서슴지 않았던 대간들의 기상이 그리워지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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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국왕의 귀를 여는 데 대간들은 목숨을 걸었다” |작성자 맘착한 토끼아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