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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 왼손을 주먹 쥔 채 리모컨으로 TV를 꺼버린다. |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현장에서 철저한 역할 분담을 하는 조미나(가운데), 김경환(오른쪽) 공동감독. 전자는 연기 지도를, 후자는 카메라 위치와 제자진행을 맡았다. 하지만 정작 이 둘은 "이렇게 하자"와 같은 건 없었고, "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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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주교회의 생명 단편영화 촬영현장
"죽일 놈." TV 뉴스에서 살인현장 검증장면이 나오자 노인(임형태)은 묵직한 한마디를 던진다. 그때 옆에서 링거를 갈아 끼우던 간호사 정미(송지언)는 멈칫한다. 순간 5평 남짓한 병실 안의 공기가 싸해진다. 도대체 이 둘에게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일까.
1강도 살해사건으로 혼수상태가 된 아들.
2거울을 보고 있는 노인.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지난 7월3일 경기도 안산에 위치한 서울예대 내 기숙사. 병실로 개조한 이곳에서 단편 [세상에 들어온 것처럼 세상에서 나가라](연출 김경환·조미나, 각본 이정화)의 촬영이 한창이다. 강도살해사건으로 며느리와 손자를 잃고, 혼수상태에 빠진 아들을 간호하는 노인이 인혁당 사건으로 억울하게 아버지를 잃은 정미를 만나면서, 가해자에 대한 마음을 서서히 여는 내용이다. 이는 천주교 주교회의 사형제도폐지소위원회에서 주관한 '생명 단편영화 시나리오 공모전'에서 선정된 5편의 시나리오 중 하나로, 천주교 쪽으로부터 제작지원까지 받게 됐다.
공간이 좁은 만큼 열기는 뜨겁다. 한쪽에선 조미나 공동감독이 "선생님, 카메라가 여기서 바라보니까 (얼굴) 각도는 이 방향에서 천천히 반대로 움직이시면 되요"라며 노인 역을 맡은 임형태에게 동선 지시를 한다. 그동안 촬영팀은 멀쩡한 창을 빼내고 있다. 건물 밖에서 안으로 찍어야 되는데, 중간에 있는 유리창이 그림을 가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일 촬영계획표가 벽에 가지런히 붙어 있는 복도에서는 김경환 공동감독이 모니터를 통해 카메라의 위치와 앵글을 맞춰보고 있다. "선배님, (앵글을) 조금만 더 오른쪽이요. 네. 지금이 좋아요." 오가는 사람들로 병실 안은 정신없이 북적거리는데도, 스탭들은 저마다 자신의 역할을 위해 열심히 구슬땀을 흘린다.
"영화 관련 사업은 이번이 처음"이라는 조성애 수녀는 "대한민국은 사실상 사형 폐지 국가나 다름없다. 하지만 제도적으로 완전한 폐지와 사형제에 대한 대중의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만큼 영향력 있는 매체가 없다"라며 사업의도를 말했다. 마치 TV에서 백번 토론하는 것보다 극장에서 한번 본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 대중의 뇌리에 더 깊이 각인되는 것처럼 말이다([우리들의…]의 모니카 수녀의 실제 모델이기도 한 조성애 수녀는 사형수의 대모로 불린다).
진중한 주제라 그만큼 부담도 클 것이다. "이번 영화에 출연하면서 인혁당 사건에 대해 알게 됐는데, 억울한 희생을 당한 사람이 너무나 많다는 걸 깨달았다"는 정미 역을 맡은 송지언의 말이다. "죽일 놈"이라는 노인의 한 마디에, 그녀가 "앞으로의 갈등을 암시하기 위해" 미소를 짓자, 감독은 "미소 없이 놀라는 표정만" 주문한다. 작은 분위기 하나가 자칫 주제에 큰 영향을 끼칠까 우려라도 하듯 말이다.
인간의 감정은 마음먹은 대로 쉽게 흘러가지 않는다고 했던가. 며느리와 손자를 죽이고, 아들을 혼수상태에 빠뜨린 강도를 노인은 쉽게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아니, 죽이고 싶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사형제폐지운동 서명을 받는 정미는 얄미운 존재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정미는 자신을 미워하는 노인을 아랑 곳 않고 정성을 다해 돌본다. 과연 영원히 닫힐 것 같은 노인의 마음이 열릴 수 있을까. "사형제 폐지에 관해 한번쯤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는 게 조미나 공동감독의 연출 의도다.
영화는 제작지원을 받은 나머지 4편([낙원](최우수상, 김영훈, 이상경) [햇빛 좋은 날에](가작, 조중만) [고리](가작, 이유리) [138bit의 리듬](가작, 윤미현))과 함께 10월10일(사형 폐지의 날) 시사를 목표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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