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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을의 세시 풍속
○ 1월
세배는 정월 대보름까지 하게 된다. 설날에는 집안끼리 지내다가 정월 대보름부터 마을 전체의 행사가 시작된다.
정초에는 정읍 입암면에 조리를 많이 만드는 곳이 있어서 그곳에서 가져온 조리를 사서 걸어 놓는다. 또 정초에 신수를 봐서 좋지 않다고 하면 물또랑 같은 곳에 짚을 엮어서 사람이 건너기 좋게 만들어 놓아 액을 방지한다. 이와 더불어 정초에 신수를 봐서 좋지 않다고 하면 허새비를 만드는데, 보통 옷을 만들어서 허새비에 입히고 비손을 한다.
갓 시집온 며느리는 새벽에 음식을 정성스레 만들어서 할아버지에게 상을 차려 들고 가서 문안을 한다.
한편, 장재 마을의 남자들은 정월 대보름에 부안군 백산면 사람들과 횃불을 가지고 싸움을 했다. 횃불싸움은 처음에 각자 논두렁을 태우고 다니다가 두 마을 사람이 서로 만나게 되면 싸움이 시작된다. 여기에서는 “그쪽 불을 댕겨 오면”, 즉 상대팀이 논두렁에 질러 놓은 불을 붙여 오면 이기게 되는데 이때 불을 뺏기지 않으려고 실랑이를 하다가 불에 덴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아이들은 망우리 돌리기를 하였다.
예전 보름에는 각 집집마다 오곡밥을 지어 상을 차려 먹었으나 요즘은 마을회관에 모여 십시일반 오곡을 모아 마을회관에서 오곡밥을 먹는다.
○ 2월
장재 마을에서는 음력 2월 초하룻날 당산제와 들시암제를 같이 지냈다.
○ 7월
1년에 술멕이를 보통 2번 하는데, 백중과 칠석에 주로 했으며, 술멕이를 3번 할 때에는 6월 유두에 한 적도 있다고 한다. 술멕이 때는 동네 사람들이 모정에 모여서 하루 종일 술을 마시고 춤을 추며 놀았고 장고명인 이명식이 장고를 치기도 하였다.
장재 마을에서는 ‘깬시기(쇠)’․장고 등의 굿물(풍물악기)이 많았는데, 그 악기들을 김영환(故)이 주로 관리를 하였다. 술멕이 날이 되면 마을 사람들은 아침밥을 먹기 전에 악기를 관리하는 김영환의 노고에 답례하기 위해 그의 소유인 논 열두 마지기의 김을 맸다고 한다. 송윤섭은 이것을 ‘두레’라고 불렀으며, 이 외에 다른 두레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였다. 김을 맬 때 부르는 노래는 없었으며, 이렇게 동네 사람들이 김영환의 논을 다 매고 나면 집으로 돌아가 씻고 아침밥을 먹은 후에 술멕이가 시작되었다. 술멕이에서 이명식은 어사화를 만들어서 춤을 재밌게 추는 사람에게 씌워 놀게 하였으며, 아이들에게 보기 좋게 한복을 입혀서 우천태(?)의 어깨에 무등을 태워 놀기도 하였다. 그리고 술멕이를 하고 난 다음날은 남은 술을 마시며 윷놀이를 하였다.
○ 11월
동지에는 개인이 팥죽을 혼자 써먹었는데, 요즘은 같이 십시일반 모아서 팥죽을 쑤어 먹는다.
○ 12월
겨울에는 연을 많이 날리는데, 그 연을 가져다 섣달 그믐날이나 정월 대보름에 올려서 연실 중간에 목화솜을 붙여서 거기에 불을 놓아 연줄을 끊어 날려보낸다. 이것을 액맥이라고 하였다. 다른 액맥이 방법으로는 대보름날 저녁에 각 가정에서 대나무, 마른 호박넝쿨, 그 외의 집안 잡동사니 등을 모아 태웠는데, 이렇게 하면 가정이 화목하고 병이 없다고 믿었다.
2) 마을의 민속 신앙
○ 당산제와 들시암제
장재 마을에서는 음력 2월 초하룻날 당산제와 들시암제를 같이 지냈다고 하는데, 약 30년 전에 중단되었다. 모정에 있는 2그루의 당산나무와 그 나무들 앞에 1미터가 안되는 크기의 돌덩이가 신앙의 대상으로, 나무들이 당산할아버지이고 돌덩이가 당산할머니라 한다. 현재 당산나무는 그대로 있으나 돌덩이는 몇 해 전에 파내 버렸다고 한다. ‘들시암제’란 마을의 공동우물에 지내는 제사를 말하는데 장재 마을의 공동 우물에는 예전에 향나무가 둘러 있었다고 하며 현재는 향나무도 모두 없어지고 우물도 이용하지 않아서 폐허인 채로 남아 있다. 장재 마을의 들시암은 인근의 7개 마을 사람들이 길어다 먹었다고 하는데, 당산제와 들시암제의 절차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정월 보름부터 마을 사람들이 풍물을 울리며 각 가정을 돌아다니며 지신밟기를 하면서 쌀과 돈을 추렴한다.
∙ 당산제의 ‘헌관’으로는 “아들도 많고 먹고살기도 좋고 신세가 좋은 노인”을 뽑는데, 헌관으로 뽑힌 사람은 당산제 일주일 전부터 하루에 한번씩 목욕을 하며 정갈하게 지낸다.
∙ 당산제 당일 새벽에 왼새끼를 꼬아 백지를 찔러 넣은 쌍줄(금줄, 인줄)을 쳐서 외부 사람들의 출입을 금하였다.
∙ 당산 할아버지에는 종이로 고깔을 만들어 씌웠는데 이 고깔을 씌웠기 때문에 당산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 ‘수헌관’은 흰 두루마기에 관을 썼으며, 당산제와 시암제는 남자들만 참여할 수 있었는데, 수헌관이 앞서서 가면 그 뒤에 마을 남자들이 제물을 들고 뒤를 따른다.
∙ 먼저 시암제를 지내고 와서 당산할머니와 당산할아버지의 제사를 지낸다. 시암제에서는 풍물을 울리지 않으며 유교식 제사만 지낸다. 제물로는 일반적인 제사 음식과 같이 준비하되 과일, 육류, 어류를 쓰지 않고 “농촌에서 나는 그것만 가지고 제사를 모신다”고 하였다.
∙ 당산제에서는 당산 할머니와 당산 할아버지가 한 자리에 있기 때문에 한꺼번에 제사를 모시는데, 시암제에서 차려놨던 제물을 갖고 와서 다시 차려놓고 제사를 지낸다. 유교식 제사가 끝나고 나면 풍물을 친다고 하였다.
∙ 당산제가 끝나고 난 후 쌍줄(금줄, 인줄)을 걷어 온다.
○ 조탑(돌무덤)
장재 마을에서는 농로가 나기 전에 부안군 백산면으로 가는 길이 가장 큰길이었다. 그 길의 마을 입구에 돌무덤이 하나 있었는데 이것을 따로 부르는 명칭은 없었다. 사람들은 그곳을 지나가려면 꼭 돌멩이 하나씩을 던지고 지나갔는데, 돌을 하나 던져놔야 발병이 안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3) 마을의 일생 의례
○ 출산의례(出産儀禮)
아이가 생기지 않은 것은 인력으로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안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어 따로 기자의례를 하지 않았다. 아이가 안 생겨도 집안에서 일만 잘하면 그다지 문제되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가 오랫동안 생기지 않아도 따로 비손하는 것은 없다. 또한 예전에는 의학이 발달하지 않아 아기를 낳더라도 손님(마마)을 앓다가 죽는 경우가 많았다.
보통 태몽으로 꾸는 꿈은 선명한데, 예전에는 태몽이 실실해도(선명해도) 죽을 아이는 죽었다고 한다.
보통 말에 관한 꿈을 꾸게 되는데 굴레가 짠 말은 아들이다. 꿈에 산모가 송아지를 끌고 들어와 집안에 묶어 두면 아들이다. 집안에 커다란 나무가 있는 꿈을 꾸면 아들이다. 그러나 말 중에서 새까맣고 매끈한 말에 관한 꿈을 꾸게 되면 딸을 낳는다. 그럼에도 아들 딸을 구분하는 특별한 방법은 없다.
예전에는 먹고 살기 힘들었기 때문에 따로 금기하는 음식은 없었고, 딸을 임신하게 되면 오징어를 먹고, 아들은 닭을 먹었다고 한다. 산모가 음식을 찾는 것은 개개인에 따라서 달리 나타난다. 입덧이 심한 사람은 매달을 누워서 지냈다고 한다. 입덧 대신 아이를 낳고 난 후 오히려 음식을 못 먹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
예전에는 먹고살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보통 아이가 생겨도 아이가 생긴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아, 아이가 생겼을 때 특별히 금기를 하는 것은 없었다고 한다.
예전에는 아이가 생긴지도 모르고 일을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아이가 지워지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유산 방지하는 법은 따로 없고 일하다가 갑자기 빠진다(유산된다). 만약 유산을 하지 않으려면 애기 진 놈을 나락으로 만든 후타리에 말뚝을 베고 넣어두면 유산하지 않는다고 한다.
보통 산달이나 8․9개월 정도 되면 산모나 시어머니, 혹은 친정어머니가 흰 천으로 태어날 아기의 옷을 짓는다. 이것을 배냇저고리라고 하는데, 산모가 20살 전후에 아이를 낳아 만들어 입힌 배냇저고리를 잘 보관해 두었다가 송사가 났을 때 가지고 가면 이기기도 하고, 아이가 큰 시험을 보러갈 때 품에 넣고 있으면 합격을 한다. 배냇저고리에는 고름을 따로 만들거나 단추를 다는 대신 미영으로 실을 만들어서 깃 두 쪽에 다는데 이때 길이는 아기의 허리를 한번정도 두를 수 있는 길이로 만든다. 이때 외악(왼) 쪽에는 짧게, 오른쪽은 길게 만든다. 예전에는 실이 귀했기 때문에 굵게 만들지 않고 몇 가닥 정도 꼬아서 사용하였다.
산실을 따로 정하지는 않고 보통 산모가 그 동안 묵었던 방에 산실을 마련한다. 산실 마련에는 산달에 깨끗한 짚을 구해다가 한쪽에다 쌓아두었다가, 아이를 낳을 때 짚을 깔고 그 위에서 아이를 낳았다. 아이를 낳을 때는 보통 시어머니나 친정어머니, 혹은 마을에서 나이 많고, 경험이 많은 친척 여자들이 와서 도와주게 된다.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동시에 산고가 들어 산달이 같을 경우, 먼저 낳는 사람이 집에서 낳고 나중에 낳는 사람이 밖에서 낳기도 하나 보통은 자기가 묶는 방에서 낳는다.
산모가 아이를 낳으면 시어머니나 친정어머니, 혹은 마을에서 나이 많은 여자가 산모의 수발을 들어주는데 산모가 아이를 막 낳으면 멥쌀을 찧고, 미역국을 끓여 첫국밥을 한다. 첫국밥은 먼저 삼신상에 미역국과 국, 물을 떠서 올린 후 상에 올린 첫국밥을 산모가 먹는다. 첫국밥을 올린 후 삼신상을 매끼마다 차리지는 않고, 이레마다 차린다.
아이가 잘 되라고 성주상에서 이레마다 비는데 “명도 삼천갑자 동박이 해 도라고, 복도 석숭이 갖은 복 해 도라고” 빈다. 보통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가 빌어준다. 산모가 하기도 하는데 보통 산모는 빌 줄 모르기 때문에 할머니들이 하는 경우가 많다.
아이를 낳으면 탯줄은 가위를 자른다. 탯줄을 자른 후 아이의 탯줄은 목실로 묵어 놓는다. 태를 묵을 때 보통 태를 그냥 놔두면 태가 올라붙어버리기 때문에 산모의 발가락에 태를 감아놓고 아이 탯줄을 실로 묶는다. 탯줄을 묶는 실의 길이는 아기의 배에서 물팍(무릎)까지 실을 재서 태를 묵는다. 아이의 태는 보통 길게 자르는데, 탯줄을 짧게 자르면 아이가 오줌을 자주 싼다고 한다.
예전에는 짚을 깔고 아이를 낳는 경우가 많은데, 태를 자른 후 아이를 낳았던 짚에 탯줄을 쌓아놓고 3일 만에 한쪽에 가서 쳐 지른다(불 태운다). 한 여름에도 삼일 정도는 탯줄을 짚에 싸서 산실의 한쪽에 놓아 둔다.
아이를 낳으면 집 문밖에 금줄을 치게 되는데, 아들을 낳으면 고추하고 숯을 끼우고, 딸을 낳으면 시집가서 바느질을 잘하라고 바늘같이 생긴 솔가지를 끊어다 숯과 함께 꽂은 금줄을 친다. 일곱이레가 지난 후에 금줄을 살갖에 던져 놓으면 쳐 지르기도 하고, 혼자 삭아서 없어지기도 한다.
예전에는 산모가 건강하지 않거나, 많이 먹지 못하여 젖이 많이 안나오는 경우가 많았는데 산모가 저이 나오지 않는 경우, 밥물을 끓여서 사카린을 섞어 아이에게 먹이기도 하였다고 한다.
젖은 보통 샘에서 타오는데 자신의 집 샘에서 타오기도 하고 마을 공동 샘에서 타오기도 한다. 보통 이레마다 한번씩 샘에 가서 젖을 타오기도 하고 아즉(아침)마다 샘에 가서 젖을 타오기도 한다. 깨끗한 은박지에다 떡가루 치는 체를 업어놓고 물을 떠서 부으며 “이 쳇구녁 같이 젖 나오게 해도라”고 빌면서 젖을 탄다. 그렇게 젖을 타다가 윗목에다 떠다놓고 빌게 되면 망중 이레 정도 지나게 되면 젖이 많이 나오게 된다.
아이를 낳았을 때 상인(喪人)이나 초상집에 다녀 온 사람, 짐승을 잡은 사람, 살생한 사람은 출입을 금한다. 그 외에 식구들이나 깨끗한 사람은 아무나 들어올 수 있다. 식구들은 일곱이레가 지날 때까지 상가집에 가지 않는다.
아들을 낳거나 딸을 낳거나 모두 일곱이레를 쇴다고 한다. 따로 상을 차리거나 하지는 않고, 집 문밖에 금줄만 쳐 놓았다고 한다. 예전에는 가난했기 때문에 바로 전날 아이를 낳았어도 산모는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물을 져다 밥을 하고, 집안 일을 다 하였다고 한다.
아이를 낳은 지 댓달(대여섯 달) 정도 지난 후 아이들의 태내 머리가 빠질 무렵 아이의 머리카락을 가위로 자른다. 아이의 자른 머리카락은 따로 모아 두었다가 쳐 지른다(불지른다). 아이 머리는 함부로 버리지 않고 마당에 피워놓는 화롯불이나 모깃불에 넣는다.
쌍가마를 가진 아이는 외갓집에 가서 은 숟가락을 훔쳐 와야 좋다고 한다. 또한 아기의 피부는 여리기 때문에 아기의 손톱은 가위로 자르지 않고 엄마가 이로 잘라 준다.
예전에는 백일을 따로 쇠지 않는다. 일을 하면 백일이 지나간 줄도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보통 돌을 크게 쇠지는 않으나, 식구들끼리 모여 미역국을 끓여 먹고, 떡을 해서 먹기도 하는데, 쌀이 귀하기 때문에 밀가루나 수수, 혹은 쌀로 떡을 해 먹기도 한다.
○ 혼례(婚禮)
보통 중신아비나 중신어미가 중신을 서는데, 예전에는 중신을 보통 친척들이 많이 한다. 옛말에 “삼이 삼 먹고, 쇠가 쇠 먹는다”고 하는 말이 있느데, 그만큼 친척들이 많이 둘려 먹는다고 한다. 그 후에 신랑 집에서 시어머니나 손 위 시누이가 처녀 집에 와서 선을 본다.
선을 본 후 신랑집에서는 신랑 부모가 점쟁이에게 날택이를 해서 신부집에서 보낸다. 이것을 사성이라고 하는데, 신랑집에서 날을 택해서 보내면 신부집에서는 탈이라도 날까봐 신랑집에서 정한 날짜에 보통 따른다.
예전에는 일제시대를 막 지났기 때문에 가난하여 함을 주거나 받지 않았다고 한다. 혼수는 보통 이불이나 한 채 하고, 잘 해가는 사람은 농을 짜기도 한다.
신랑이 가마를 타고 와서 바로 신부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주점으로 들어간다. 신랑이 주점에 들어가면 신랑과 같이 온 중방이 신부집으로 인사를 간다. 주점에서 신랑을 다루다가 중방이 신랑이 데리러 오면 식을 올린다. 보통 신랑과 함께 중방과 상각이 오게 되는데 중방은 마을에서 좋은 사람을 선택하고, 상각은 신랑의 아버지가 된다. 신랑이 아버지가 없으면 형이라도 상각으로 따라온다. 가난한 시절이었기 때문에 일반적인 혼례상을 차려놓고 식을 빨리 치른 후 점심을 먹고 바로 시댁으로 향한다.
식이 끝나면 신부는 친정아버지인 요각과 함께 시댁으로 간다. 신랑 아버지는 딸을 잘못 키우면 욕을 얻어먹기 때문에 요각이라고 한다. 또 가난한 시절이었기 때문에 혼례식을 치르면 그 이후 예식은 없다.
○ 상례(喪禮)
장재 마을에는 상포계는 따로 없고, 상여계가 있었다. 현재는 상여계원들이 거의 대부분 돌아가시고, 또 최근에는 상여를 매지 않기 때문에 그 명맥이 끊어진 상태이다. 예전에 상여계가 잘 될 때는 산에서 나무를 베어다 목상여를 조각하여 상례를 치렀다고 한다. 예전에는 상여를 마을 입구 도로편에 건물을 지어 상여를 보관하였다고 한다.
예전에는 상여를 맬 때 보통 12명 정도가 맸었는데, 마을에서 만석꾼 부자가 돌아가셨을 때는 상여를 두개 맸다고 한다. 앞에 가는 상여에는 고인의 유품을 싣고 뒤에 가는 상여에는 고인의 시신을 안치하였다고 한다. 앞에 가는 상여는 12명이 상여를 매고, 뒤에 가는 상여는 36명이 상여를 맸다고 한다. 상여 앞에는 가마를 앞세우게 되는데 가마에는 고인의 영정을 싣고 간다. 만석꾼이 돌아가셨기 때문에 산으로 가는 길목마다 술동이를 놔서 상여꾼들이 가는 곳마다 목을 축였다고 한다.
4) 기타 마을의 민속과 모임
○ 앵성리의 장고명인
이명식은 1912년 정읍군 영원면 앵성리 출생이며 영원면 장재리 장재마을은 그의 아내의 고향으로, 처가마을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는 20세부터 10여 년간 부안의 상쇠 김바우의 아들인 김대근의 장고를 사사하였고, 김대근의 부안 농악대에서 장고를 쳤다. 30세 때 정읍농악단 김광래패에서 전이섭(쇠)․전사종(쇠)․전사섭(장고)․이동원(장고)․전홍근(징)․정오동(채상)․김방현(채상)․이봉춘(대포수) 등과 함께 부장고와 설장고로 활동했다.
1960년대 초 전주의 국악동호인들과 흥행사들이 전북여성농악단을 조직하자 박남식(쇠)․홍유봉(채상) 등과 함께 여성농악단을 가르쳤다. 송윤섭에 따르면 이명식은 정읍에서 입암중학교, 감곡중학교, 이평중학교 등에서 학생들에게 풍물굿을 가르쳤으며, 계속 장재 마을에서 살다가 나이가 60이 넘어 혼자 살기 어렵게 되자 자녀들이 모셔갔다고 한다. 현재 이명식의 아들이 전북 전주에서 살고 있다.
○ 축귀(逐鬼) 의식
송윤섭이 어렸을 적만 해도 마을에서 주당맥이를 했다고 하는데, 송윤섭은 주당맥이의 방법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알지 못하였다. 다만 “굿 치면서 주당 묶어놓고, 새내끼 요만썩하게, 외약 사내(왼새끼) 꽈 가지고 묶어놓고 뺑뺑 돌며 굿 치잖아”라는 정도로 대략적으로 설명을 하고 있다.
송윤섭은 주당맥이와 같이 축귀(逐鬼)를 한다고 믿는 ‘동진잽이’와 ‘물린다’에 대해 알려 주었다. 이러한 의식들은 ‘비손 할머니’가 주로 하는데, 이 비손 할머니는 주로 집안이나 동네의 할머니로서 이런 의식들에 대해 아는 바가 많고, 또한 그 효험에 대해 믿음이 강한 사람이라고 한다.
동진개비는 외출을 하고 돌아온 사람이 갑자기 아프면 하는 의식으로, 이렇게 아픈 것을 ‘동토 쪘다(꼈다)’고 하며 귀신이 붙어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귀신을 쫓기 위해 동진개비를 하는데, 먼저 솥에 물을 한 그릇을 떠 붓어 놓고 그 물 뜬 그릇을 그 물에 엎어놓는다. 그리고 그 아궁이에 불을 때서, 막 끓게 되면 마른 고추 한 주먹을 가져다 그 물에 집어넣는다. 그러면 매운 냄새가 많이 나게 되는데, 만약 매운 냄새가 안날 때는 ‘동토가 쪄서’ 그렇다고 한다. 그런 후 주문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솥 옆에 앉아서 수저로 솥의 가장자리를 두드리면서 주문을 읽는다. 물이 한참 끓으면 불을 그만 때는데, 솥이 식으면서 솥의 물이 그릇 속으로 모두 들어가 버리면 그것 또한 ‘동토가 쪄서’ 그렇다고 한다. 송윤섭은 이러한 동진개비가 의학적 효험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약은 없고 이것 두들겨서라도 낫았다고 하면 우선 맘이 편허니까 정신적으로 개안(개운)할 거 아녀. 그거 삼아서 한 거야”라고 하며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한편, ‘물린다’는 것은 ‘귀신을 물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주당맥이나 동진개비와 마찬가지의 축귀 의식이다. 집안에 환자가 생기면 하는 의식으로 환자의 머리에 바가지를 씌우고 비손 할머니는 다른 바가지에 소금 한 주먹을 넣어서 칼을 들고서 물에다 적셔 가지고 환자가 쓴 바가지를 두드리면서 주문을 읽었다고 한다. 주문의 내용은 “어디를 갔다 왔더니 멫(몇) 살 먹은 동자가 이렇게 아퍼서 신음하니 이 대칼로 목을 칠턴 게 빨리 가라”고 한다. 그렇게 한 후 들고 있던 칼을 훌떡 던지는데, 이때 날아간 칼이 똑바로 꽂히면 귀신이 나갔다고 믿었고, 그렇지 않으면 칼이 꽂힐 때까지 몇 번이고 던지는 행위를 했다고 한다.
○ 두레
예전에는 두레가 커서 6·70 여명이 두레 계원이었다고 한다. 두레가 모이면 12마지기를 하루아침에 다 맬 정도였다고 한다. 두레에는 마을 사람 전체가 들어갈 수 있다. 두레가 번성했을 때는 풍물이 강해서, 풍물을 관리하는 사람이 따로 있었는데, 두레가 시작되면 풍물을 관리하는 사람의 논에 가장 먼저 가서 그 사람의 논을 매 줬다고 한다. 두레에는 좌상이 있는데 마을에서 가장 힘을 잘 쓰는 사람이 보통 좌상이 되었다. 두레에 들어갈 수 있는 나이가 되면 총각의 아버지가 품앗이에 넣어 줘서 감사하다는 뜻으로 술을 한동이 정도 내게 된다. 두레에 들어갈 수 있는 나이의 여부는 다른 사람의 품앗이를 할 수 있는 가로 판가름하게 된다.
<제보자>
송윤섭(69세)
김현수(48세, 이장)
<조사 장소>
장재 마을회관
2. 백양(白良) 마을
면소재지에서 북쪽으로 1.5㎞ 지점에 위치한 백양 마을이 현재의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일제 시대부터이며, 조선시대에는 이곳을 ‘곤촌(昆村)’․‘배암구지’ 등으로 불렀다. ‘배암구지’는 마을을 둘러싼 지형이 뱀이 개구리를 잡아먹는 형국이고, 황새가 뱀을 찍으려고 하는 형국이기 때문에 불려진 이름이라 한다. 백양 마을과 이웃하고 있는 청량 마을의 사이에는 언덕이 있는데, 이 언덕이 황새다리 형상을 닮았으며, 이 황새다리 형상의 언덕을 사이에 두고 아랫 마을인 ‘아랫배암구지’는 백양 마을이고, 윗마을인 ‘윗배암구지’는 청량 마을이다.
농업형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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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농사 |
65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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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양 마을은 영원면에서 가장 큰 마을로 벼농사를 주로 하며 밭도 많은 편이어서 고추․담배 등을 많이 한다.
백양 마을의 마을 입향조는 약 400년 전쯤에 입촌한 해주 오씨이고, 오씨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고 하는 자료가 있다. 그런데 이번 조사에서 제보자들의 말에 따르면 백양 마을에서는 여산 송씨, 해주 오씨, 안동 권씨, 전주 이씨의 네 성씨가 오랫동안 살아왔으며, 이 네 성씨의 사람들에 의해 마을이 설립되었다 한다.
1) 마을의 세시 풍속
○ 1월
차례를 지낸 후 마을 어르신께 세배를 간다. 예전에는 설이 되면 아이들에게 새 옷을 해서 입혀준다.
정초의 소날에는 소를 키우는 사람은 일을 하지 않는다. 이날 일을 하면 소가 그해에 아프다고 한다. 소날에는 머리도 빗지 않는다. 만약 소날에 머리를 빗거나 감으면 연장이 부러진다고 하여 가린다.
용날은 농사 지을 때 비가 온다고 샘에서 물을 떠오지 않는다. 또 뱀날에 일을 하면 뱀이 나온다고 해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뱀날에 ‘이삼만’이라는 글씨와 “뱀사(蛇)”자를 써서 아침 일찍 기둥에 거꾸로 붙여 뱀뱅이를 한다. 뱀축은 집안에 남자들이 쓰거나 마을에서 글씨 잘 쓰는 사람이 써준다. 칼질도 하지 않고 그 전날 미리 다 썰어놓는다. 만약 떨썩거리면 뱀이 들어온다고 한다. 그리고 말날에는 장을 담그는데, 말 피가 진하기 때문에 말 피처럼 간장과 된장이 진하라는 의미라고 한다.
정월 초사흗날까지 여자들은 대문 밖 출입을 안했다. 정월달은 액달이며 정월이기 때문에 남의 집에 들어가면 재수 없다고 생각했다.
정월 초사흗날이 되면 성주에 나물과 밥, 떡 등을 올려 상을 차린다. 정초에 상을 차리면 그 달에 좋다고 한다. 정월 초사흗날에는 찰떡을 하고, 유월 유두는 밀가루로 개떡을 만들어서 놓는다. 입춘에 입춘축을 붙인다. 입춘은 보통 절에서 보내오거나 집에서 쓰기도 한다.
예전에는 정월대보름에 굿을 치며 걸립을 하였으나 지금은 노인들밖에 없어서 하지 않는다. 그밖에도 잡곡밥을 해먹고 나무를 아홉 짐을 하고 책도 아홉 권 읽고, 식사도 아홉 번을 먹었다고 한다.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복조리에 밥을 얻어서 먹기도 하고, 더위를 팔았으며, 정월대보름 새벽에는 아주까리대․호박넝쿨․옥수수대 등을 모아 ‘댓불’을 피우기도 했다.
집집마다 마당 가운데 댓불을 피우고 그 해 수가 사나운 사람이나 화재수가 있는 사람은 종이로 옷을 해 입고 그 종이옷을 댓불에 태운다. 또 깡통에 불을 붙여 내두르면서 이웃 마을과 불싸움을 한다. 싸움이 격렬해지면 돌팔매질을 하기도 하는데 도망가는 쪽이 진다. 이와 함께 정월에 연을 많이 날리는데 열 나흗날 저녁에 그 동안 날렸던 연을 불태운다. 연을 날리는 것은 일년에 ‘신수땜 한다’고 한다.
대보름이 아침이 되면 조상에 상을 차린다. 정월 대보름은 개 보름 쇤다고 하여 음식을 많이 장만하지 않는다. 정월 초, 초사흗날에 이미 차례를 모셨기 때문에 보름에 따로 음식을 걸게 마련하지는 않는다.
○ 2월
2월 하드레에는 집집마다 텃밭에서 솥을 걸고 “해삼 볶으자, 콩 볶으자, 사내기 볶으자, 좀생이 볶으자”하면서 콩을 볶아 먹는다. 이때는 지붕에 솔가지를 꺾어다 던지면서 사내기 방지를 한다. 또 2월 초하루날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마당밟이를 한다.
○ 5월
5월 단오가 되면 창포물로 머리를 감는다.
○ 7월
칠석에 논 주인은 밀가루로 개떡을 만들어서 저녁에 해가 저물 무렵 논제를 지낸다.
한편, 술멕이는 7월 백중․6월 유두․7월 칠석 중에 일년에 한번을 한다. 술멕이 준비는 그 전날부터 하는데 주로 음식 장만을 하고 포장치는 등의 행사 준비를 한다. 백양마을에서는 술멕이 때 줄다리기를 하였는데 그전에는 마을에서 술멕이 전날 짚으로 줄을 꼬아 사용하였으나 지금은 사다놓은 것을 사용한다.
백양 마을에서는 지금도 외지로 나간 이 마을 출신 사람들이 계를 만들어서 술멕이 때마다 참석하여 함께 줄다리기를 하고 술과 음식을 먹으며 하루를 함께 논다고 한다.
백양 마을에서는 모를 심은 뒤에 지신을 4번 맸다고 한다. 모를 심은 지 20일이 지나면 호미로 1번 메고, 그 뒤에 다시 1번을 호미로 지심을 맨다. 3번과 4번은 손으로 매는데 이때 3번 매는 것을 ‘아가시 한다’고 하고 4번 매는 것을 ‘만두레’라 한다.
○ 8월
추석에 차례를 모신 후 성묘를 간다.
○ 12월
설날을 쇠기 위해서 섣달에 설장을 보며, 섣달 그믐이 되면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마당밟이를 한다.
2) 마을의 민속 신앙 - 당산제
백양 마을은 2005년 현재까지 당산제가 전승되고 있다. 조사자는 백양마을의 당산제에 대하여 권동환(79?)과 김안순(80?)으로부터 서로 다른 제보를 들을 수 있었다. 먼저 권동환에 의하면, 백양마을의 당산제는 일제시대에 약7~8년간 단절되었으나 ‘소화(昭和) 10년 넘어서’, 즉 1935년 이후부터는 다시 당산제를 모셨다고 한다. 당산제를 다시 시작한 이유는 어느 해 전염병에 의해 마을의 어린 아이 20여명이 죽게 되었는데, 그때 노인들이 점을 치자 당산제를 지내지 않았기 때문에 마을에 그런 불상사가 일어났다는 점괘가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그때부터 다시 당산제를 지내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전승되고 있다는 제보이다.
그런데, 김안순에 의하면 백양 마을의 당산제는 본래 남자 노인들이 ‘갓 쓰고 절을 허고, 그러고는 굿치고’하는 방식으로 모셔왔다. 그런데 해방된 그 이듬해쯤 큰바람으로 당산나무가 넘어졌는데, 그 마을의 한 남자가 그 당산나무를 잘라다 땔감을 해갔다. 그러자 그 집 아이에게는 아무 탈이 없었는데, 그 마을의 8~9세 아이들 9명이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점을 해보니 ‘당산이 떴다’는 점괘가 나와서 그때 당골과 재인들을 불러다가 크게 굿을 해서 당산을 다시 모셔들였다고 한다. 그 뒤부터는 백양마을에서는 당산제 때마다 무당을 불러서 당산제를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이 두 제보는 그 내용이 다르지만 백양 마을의 주민들이 당산나무와 당산제에 대해 경외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잘 알려주고 있다. 2~3년 전부터는 무당을 부르지 않고 마을의 부녀자들이 주축이 되어 당산제를 모신다고 한다.
백양 마을 당산제의 신앙 대상은 팽나무가 군집을 이루고 있는 당산나무숲과 그 숲 속에 있는 1m가 채 못되는 높이의 돌인 ‘당산할머니’이다. 당산나무숲은 마을 서쪽 끝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앞으로는 냇물이 흐르고 있었고 ‘당산할머니’는 윗 부분에 짚으로 엮어진 모자 모양의 덮개를 쓴 채 그 당산나무숲 속에 자리하고 있다.
조사자가 1차로 백양 마을의 당산나무숲을 찾아갔을 때에는 여름의 태풍으로 인해 나무 밑동이 부러져 있거나 많이 훼손된 상태였으며, ‘당산할머니’ 위에 씌운 덮개도 훼손되어 거의 벗겨져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제보자들은 당산숲에 손을 대면 ‘동티’가 나서 집안의 사람이 아프거나 죽는다고 믿어서 당산숲을 치우지 않고 그대로 둔다고 하였다. 2차 조사를 위해 다시 방문했을 때에는 당산나무숲 주위에 금줄이 쳐져 있었고, ‘당산할머니’의 덮개도 짚으로 새로 짜서 백지를 달아 씌워져 있었다.
백양 마을의 당산제는 여자들이 주축이 되어 당골 무당을 초청하여 지내는 무당형 당산제로 음력 2월 초하루에 지낸다. 당산제를 모시기 3일전에 마을의 여자들 중에서 ‘깨끗한 사람’ 서너 명을 선정해서 그들이 마을의 가가호호를 방문하여 쌀․벼․팥 등의 곡식과 돈을 걷어 제비(祭費)를 마련한다. 당산제의 전날인 정월 그믐날 아침에는 마을로 들어올 수 있는 모든 입구와 마을회관․당산 등에 금줄을 치고 ‘궂은 사람’, 즉 초상집에 갔다 온 사람이나 출산한 가정의 사람 등과 외지인은 출입을 금한다. 부녀자들은 이날 시장에 가서 제물을 사고, 제물장만은 마을의 ‘깨끔헌 아주머니’들이 하는데, 주로 50대 이상의 폐경기 여성으로 집안에 초상․출산 등이 없었던 사람들이 맡는다. 정월그믐날 오후부터는 마을회관에 사람들의 출입을 금하고 선정된 부녀자들만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마을회관에서 제물을 장만한다. 예전에는 가정집에서 제물을 장만하였으나 마을회관이 생긴 이후로는 마을회관에서 당산제를 준비를 하며 당산제용 그릇도 따로 사서 마을회관에서 보관을 한다. 이번에 조사한 당산제의 절차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시 간 |
내 용 | |
9일 |
오전 |
당산숲 주위를 청소하고, ‘당산할머니’의 머리 부분에 짚으로 만든 ‘유지저리’를 씌운다. 당산숲․마을회관․마을 입구 등에 ‘임줄’(금줄)을 친다. |
‘깨끗한’ 부녀자 몇이서 제물 준비를 위해 장을 보러 간다. | ||
오후 |
부녀자들은 마을회관에 모여 그릇을 삶고, 제물거리를 다듬고, 다음날 온 마을 사람들이 먹을 음식을 장만하는 등 당산제 준비를 한다. 당산제에 쓸 돼지머리도 삶아 놓는다. 대충의 준비가 끝나면 담소를 나누며 논다. | |
18시 경 |
준비를 하던 부녀자들은 함께 마을회관에서 저녁을 먹기도 하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기도 한다. | |
19시 경 |
2월 초하루 마을 도처에 뿌릴 잡곡밥을 하는데, 팥, 수수, 보리, 쌀 등을 넣는다. | |
20시 경 |
제물로 쓸 백설기를 만들 쌀을 빻으러 방앗간에 갔다 온다. | |
21시 경 |
소지 종이를 접는다. 본격적인 제물 준비는 2월 초하루가 되면 시작한다. 그 전에는 마을회관 안에서 부녀자들이 자유롭게 담소를 나누거나 체조를 하기도 하는 등 비교적 자유롭게 시간을 보낸다. | |
10일 |
1시 경 |
제물을 장만하기 시작하는데 다음과 같은 음식들을 준비하였다. ․ 전부치기 : 다른 때는 명태전만 준비했으나 이날은 명태전과 함께 오징어․맛살․파 등을 꿴 산적을 준비함. ․ 나물 : 무나물, 뜸베기, 고사리 ․ 과일 : 배, 사과, 귤, 대추, 곶감, 밤, 바나나, 딸기, 참외. ․ 생선찜 : 조기, 병치, 간재미. 이외에 밥, 미역국, 탕국, 돼지머리, 백설기, 명태포, 유과 등이 준비되었다. |
4시10분 경 |
제물 장만 완료. | |
제물은 당산할머니 앞, 모정, 마을회관의 성주상, 당산숲 앞 도랑의 유왕상 등 4개를 차린다. 이때 당산할머니의 제물과 유왕상에만 돼지머리를 놓았다. 그리고 상에 올릴 미역국의 양이 적자 성주상에는 미역국 대신 무를 넣은 쇠고기국을 올렸다. | ||
4시40분 경 |
제의 현장으로 가기 위해 바구니나 함지박 등에 제물을 담아서 준비하고 풍물을 칠 남자들은 모여서 소리를 울려준다. | |
5시 경 |
제물을 운반하기 시작하는데, 트럭의 짐칸에 제물들을 실어 운반한다. 풍물을 치는 사람들은 마을회관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다. | |
|
먼저 당산숲 앞에 있는 냇물 앞에 유왕상을 차린다. 부녀자들이 내 앞에 돗자리를 펴고 제물을 차리는 동안 마을회관 근처에서 대기하던 풍물패들이 마을회관에서 풍물을 치기 시작한다. | |
|
유왕상에는 제물로 장만한 음식 외에도, 마을의 곳곳에 뿌리기 위해 준비한 잡곡밥을 옆에 놓고 커다란 함지박에 쌀을 담아 촛불을 십여 개 밝혀 두었다. 제물이 다 차려지면 소지를 올리고 절을 한다. 이 잡곡밥과 촛불을 담은 함지박은 당산할머니 상 옆에도 두는데, 잡곡밥은 당산할머니 앞에서의 절차가 끝나면 온 마을의 곳곳에 뿌린다. 원래는 부녀자들이 머리에 이고 마을의 양 갈래로 돌면서 뿌렸다고 하는데, 이번에는 두 명의 부녀자가 손수레에 잡곡밥을 싣고 마을의 도처에 잡곡밥을 뿌렸다. |
1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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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왕상에서의 절차가 끝나면 유왕상 앞에서부터 당산할머니 앞까지 짚을 쭉 깐다. 풍물패들은 마을회관에서부터 당산할머니 앞으로 질굿을 치면서 온다. 당산할머니 앞에 도착하면 느린삼채로 가락을 바꿔 치다가 휘모리로 끝을 맺는다. 인사굿을 3번 치는데, 인사굿 끝에 가락을 털면서 3번 인사를 한다. 풍물패는 꽹과리 3명, 징 1명, 장구 2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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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산할머니 앞에 제물을 차려놓는데, 그 옆에 유왕상에 차렸던 제물을 함지박에 담아놓고, 잡곡밥과 촛불을 켠 함지박 등을 함께 둔다. 부녀자 대표 한 명이 술을 올리고 절을 한 후에 참석한 부녀자들이 소지를 올린다. 부녀자들은 소지를 올리며 마을의 무사태평과 각 가정의 안녕을 빈다. 소지는 소지를 올리는 사람의 식구 수대로 올리기도 하고, 또는 당산제에 참석하지 못한 이웃 가정의 것을 올려주기도 하는 등 여러 장을 올린다. 소지를 다 하면 부녀자들은 합장을 여러 번한다. 이런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풍물패들은 느린삼채-휘모리, 오방진가락-느린삼채를 치는데, 부녀자들이 합장을 끝내면 느린삼채에서 휘모리로 가락을 바꾼다. | |
5시40분 경 |
당산할머니 앞에서의 제의 절차가 끝나면 참석했던 사람들이 음복을 하고, 당산할머니 주변에 몇 가지의 제물을 뿌려놓는다. 그런 후 제물을 정리해서 트럭에 싣고 모정으로 옮겨간다. 이때 함지박에 켠 촛불이 꺼지지 않도록 주의를 한다. 부녀자들 중 두 명은 손수레에 잡곡밥을 싣고 온 동네에 뿌리러 다닌다. 나머지 부녀자들은 트럭을 따라 모정 쪽으로 가고 풍물패는 부녀자들 뒤를 따른다. | |
5시50분 경 |
부녀자들은 모정의 마루에 제물을 펼쳐놓고, 소지를 올리고 절을 한다. 풍물패들은 제물이 다 차려질 때쯤 모정에 도착하여 앞뜰에서 일렬횡대로 서서 인사굿을 3번 치며 인사를 한다. 그리고 난 후 원진 형태에서 오방진가락을 치며 논다. 모정에서의 절차가 다 끝나면 함지박의 촛불을 끄고 제물을 걷는다. | |
6시 이후 |
당산제가 모두 끝나면 부녀자들은 남은 제물과 함께 따로 마련한 음식들을 챙겨놓는다. 그러면 마을 사람들이 함께 아침식사를 한다. 당산제가 끝난 후에 ‘임줄’을 걷고 오전에는 마을회관에서 마을총회를 한다. |
3) 마을의 무속 신앙
마을에 자주 오던 당골이 있었는데, 꽹과리 명인 전사종과 한 집안 사람으로 백양 마을에서 당산제때 초청하였다고 한다. 이 ‘당골할매’는 정월초하룻날 새벽에 마을에 들러서 집집마다 방문하여 소원을 빌어주었으며 이때 사람들이 곡식으로 사례를 하기도 하였다.
4) 마을의 일생 의례
○ 출산의례(出産儀禮)
아이가 생기지 않으면 삼신을 맞아들인다. 보통 삼신은 조상이 되는 경우가 많다. 이외에도 임신하지 못한 여자가 임신한 여자와 같이 있으면 삼신이 질투해서 아이가 생기기도 한다. 아이를 많이 낳은 여자의 옷을 빌려다가 입고 있으면 아이가 생기기도 하고, 무당이나 유명한 절에 빌거나, 조상에게 아이를 타오기도 한다.
아들과 딸을 구별하는 특별한 동물은 없다. 단지 그 크기나 암컷이냐 숫컷이냐에 따라서 태어날 아이의 성별이 달라진다고 한다. 소 한 마리를 끌고 와서 집 안쪽에 묶어 놓으면 아들을 낳는다고 하였고, 감, 꽃, 작은 뱀이 나오는 꿈을 꾸면 딸을 낳는다고 하였다.
산모의 배가 위쪽으로 불러 있으면 딸이고, 밑으로 불러 있으면 아들이라고 한다. 아이가 만약 딸인 것 같으면 약을 지어서 백일 안에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고 한다.
산달이 되면 배냇저고리를 흰색으로 만드는데 보통은 옷고름을 달지 않고 실을 달게 된다. 양쪽에 두 개를 달게 되는데 오른쪽은 길게 왼쪽은 짤게 달아 오른쪽 실이 아이의 몸을 한 번 정도 두를 수 잇게 만든다. 아이들의 배냇저고리에는 깃이 없다.
아기가 태어나려 하면 산실 윗목에 성주와 삼신에 상을 차린다. 상을 차린후 순산하고 후딱 낳으라고 미역과 쌀을 올려놓고 빈다. 미역은 보통 산달에 가족들이 파는 미역을 반으로 접지 않고 그대로 가져와서 쓰게 된다. 미역이 부러지면 아이의 명이 짧아진다고 한다. 아이를 낳은 후 첫국밥을 차리면 상에 올린 첫국밥을 산모가 먹는다.
아이를 낳은 후 태반이랑 깔고 누웠던 짚은 바로 치우지 않고 3일 정도 두었다가 3일이 지난 후에 마당 가운데 놓고 태운다. 아이의 탯줄은 짧게 자르지 않고 아이의 발목까지 재서 두 군데를 묶은 후 가위로 자른다. 보통 탯줄은 일주일만에 떨어지는데 떨어진 탯줄은 횃줄에 걸어 놓는다.
아이가 태어나면 삼줄(금줄)을 친다. 아들을 낳았으면 고추와 숯을 꽂고, 딸을 낳으면 솔가지와 숯을 꽂는다. 일곱이레까지 금줄을 쳐 둔다. 이레를 모두 쇠고 나면 금줄을 떼서 아침 일찍 대문철주에 걸어 놓는다.
산모에게 젖이 부족하면 젖을 탄다고 해서 삼신에 가서 빈다. 일곱이레가 다 되도록 물을 떠놓고 삼신에 빌고, 그 물을 먹기도 한다. 돼지족을 삶아서 산모가 먹으면 젖이 많아지기도 한다.
보통 아이가 태어나면 아들과 딸을 구별하지 않고 일곱이레를 쇤다. 그러나 아이가 많은 집에서는 보통 3명까지는 일곱이레를 다 쇠지만, 그 이후에는 3이레만 쇤다고 한다. 이레가 되면 떡을 해서 상에 올린다.
아이가 태어나면 어른들은 윗목에 상을 차리고, 쌀과 물을 노적이라고 해서 놓고 삼신에 “아이가 먹고 자고 먹고 놀고 복 많게 해달라”고 빈다.
아이의 명이 짧다고 하면 엄마를 둘 가지면 좋다고 해서 무당에게 판다. 무당에게 아이를 팔아 아이의 명을 잇는다고 하는데, 보통 명절이 되면 아이를 판 무당에게 음식이며 돈이며 가져다준다. 그러면 무당이 아이의 명을 길게 해달라고 빈다고 한다.
아이의 머리에 제비꼬리가 있으면 가위로 잘라두고 중이 오면 쌀과 함께 제비꼬리를 넣어준다. 아이에게 쌍가마가 있을 경우, 외할아버지 수저를 도둑질해서 먹인다. 아이의 손톱과 발톱은 모두 이로 잘라주는데 아이의 피부가 연하여 다칠까봐 쇠를 대지 않는다.
보통 백일은 잘 쇠지 않고 넘어간다. 돌이 되면 떡을 해서 마을 전체가 나눠 먹는다. 수수로 떡을 해서 떡을 돌리고, 동네 사람들을 초대하여 밥을 같이 먹는다. 돌이 도면 돌잽이도 하게 되는데, 연필, 책, 실, 돈, 떡 등을 올리고 아이에게 잡도록 한다. 돌떡을 받은 집에서는 빈 그릇을 그대로 돌려보내지 않고 그 속에 쌀이나 팥 등의 잡곡이나 돈 등을 넣어 돌려 보낸다. 돌떡은 삼신상에 올려 아이의 명이 길고 아이가 잘 되라고 빌기도 한다. 삼신에 빌지 않고 유명한 절에 가서 빌기도 한다.
한편, 쌍둥이를 낳으면 부모를 잃던지 자식을 잃던지 한다는 말이 있다. 그 외에도 남매 쌍둥이를 낳게 되면 남매끼리 부부가 될지도 모른다고 하여 쌍둥이 낳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오래 살라고 아이의 이름을 천하게 짓기도 한다. 또 아시 본다고 하여 보통 일정한 나이가 되면 아이들이 엎드려서 하늘을 본다. 아이가 이런 행동을 하면 터 판다고 하여 동생을 보게 된다.
○ 혼례(婚禮)
혼례식이 끝나면 신부는 신랑이 마련해온 가마를 타고 시댁으로 바로 간다. 시댁으로 가면 바로 시댁으로 들어가지 않고 신랑집에서 마련한 주점에서 기다리다가, 받은 시간에 맞춰서 들어가게 된다. 신부는 혼자 가지 않고 안상각이 같이 들어간다. 바로 첫날밤을 지낼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안방으로 들어가서 시부모님과 친척들, 그리고 동네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는데 이것을 ‘각시굿 본다’고 한다. 시간이 되면 방으로 들어간다.
혼수로 보통 신부가 나이 들도록 4계절 동안 입고 쓸 수 있는 옷가지와 버선 등을 준비한다. 혼수로 마련하는 이불보, 책상보, 베게, 인두판, 등에는 신부가 모두 수를 놓아 가져간다. 한국전쟁 이전에는 신부가 혼수를 많이 마련하였지만, 한국전쟁 이후에는 혼수를 마련하지 않고 이불채 하나 가져가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 신부가 잘 사는 경우, 하님(하녀)과 식모까지 같이 오는 경우가 있다.
○ 상례
마을에 초상이 나면 요즘에는 주로 장례식장으로 많이 가지만, 백양 마을에서는 지금도 간혹 상여가 나가기도 한다고 한다. 백양마을의 상여소리는 우재균(58세)이 앞소리를 메긴다. 우재균은 동네 어른들에게서 “귀동냥으로 쪼끔 해가지고” 상여소리를 할 줄 안다고 하는데, 인터뷰하기를 꺼려했다. 그래서 장례 의식의 전체 과정과 상여 소리를 완전하게 듣지는 못했다.
백양 마을에서는 상여를 메고 가는 사람들은 ‘유대군’이라 불렀는데, 유대군들의 수는 고정적이지 않으며 관습적으로 ‘서른 두명 유대군들’이라 불렀다고 한다. 우재균이 제보한 상여 나가는 절차와 상여소리 가사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상여가 나가기 전에 ‘핑경’(종)을 쳐서 유대군들을 불러 모은다.
∙ 유대군들이 상여를 멜 자리에 서면 상여소리를 시작한다.
앞 : 서른 두 명 유대군들이 앞소리 맞춰 뒷소리 허자, 관암--모-사(관음보살)
뒤 : 관암--모-사(관음보살)
∙ ‘관음보살’을 서너번 반복한 뒤 상여를 메기 위해 앉는다.
앞 : 서른두 명 유대군들 앞소리 맞추어 뒤소리 허소, 어허노화 어허네
뒤 : 어허노화 어허네
∙ 유대군들이 상여를 허리 밑으로 들고 제자리에서 다리를 벌려 서서 좌우로 몸을 흔들며 논다.
앞 : 반 어깨다 메고 놀아나 보세
뒤 : 어허노화 어허네
∙ 유대군들이 어깨에 상여를 메고 제자리에서 다리를 벌려 서서 좌우로 몸을 흔들며 논다
앞 : 어깨다 메고 놀아나 보세
뒤 : 어허노화 어허네
∙ 상여가 집안을 한바퀴 돈 후에, 유대군들은 상여를 들고 세 번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하며 하직인사를 하고 상주들은 곡(哭을) 하며 상여 앞에 절을 한다.
∙ 상여가 대문 앞을 나오는데 이때 상여에 친 새끼줄에 망자의 가족들과 마을 사람들이 노잣돈을 끼운다.
앞 : 가세가세 어서 가세 나는 간다 이집을 떠나서 나는 간다
뒤 : 어허노화 어허네
∙ 대문 앞을 나서서 어느 정도 나온 후에 상여가 마을 사람들에게 하직인사를 하는데, 집안에서 하는 하직인사와 마찬가지로 유대군들은 세 번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한다.
앞 : 어이노오 어이노오 오나리 넘차 어허네
뒤 : 어이노오 어이노오 오나리 넘차 어허네
∙ 장지(葬地)를 가는 도중에 삼거리․사거리․다리 등이 나오거나 유대군들이 다리가 아플 때쯤 되면 노자가 없어서 못가겠다거나 염라대왕 앞에 바칠 돈이 필요하다고 상주들에게 돈을 걸라고 하며 잠시 놀다 간다.
앞 : 삼천초목이 멀다드니 문악으 나서보니 삼천초목이다
뒤 : 어이노오 어이노오 오나리 넘차 어허네
5) 마을의 풍물굿
영원면은 정읍 농악단의 상쇠였던 전사종, 설장구 이명식, 징 강수복 등이 출생하고 거주했던 곳이어서 풍물굿이 매우 성하였다. 백양 마을도 풍물굿이 성했다고 하며, 지금은 작고하였지만 이성우․최수봉 등은 ‘소고 선수’일 정도로 소고놀이를 잘했다고 한다. 현재에는 주로 고진기(60세)․권정환(69세) 등이 꽹과리를, 최병심․이용수 등이 당산제에서 장고를 친다고 한다.
그리고 현재 영원면에는 부녀자들로 꾸려진 풍물패가 있는데, 이들은 초기에 농협 영원지점에서 전주에서 고수로 활동하는 홍석렬로부터 풍물을 배웠다. 현재는 다른 사람이 가르치고 있으며 영원면에서는 마을 별로 한두 명씩 모여서 영원면 행사 때에 풍물을 치는데, 이들이 치는 가락은 백양 마을 남자들이 치는 가락과 잘 맞지 않는다고 한다.
<제보자>
권동환(??세)
권정환(69세)
김영주(70세)
우재균(58세)
김안순(여, 80세, 부안군에서 17살에 시집옴)
<조사 장소>
백양 마을회관, 당산나무숲 등 백양 마을 일대.
3. 청량(靑良) 마을
면 소재지에서 북쪽으로 2㎞ 지점에 있는 청량 마을은 뱀 형국으로 이웃에 황새다리 형국인 백양 마을과 함께 개구리 형국인 부안군 백산면 상교 마을과 위치해 있다. 뱀 형국인 청량 마을과 황새다리 형국인 백양 마을이 서로 개구리 형국인 상교 마을을 잡아먹으려는 지명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다른 지명 전설로는 황새다리 형국인 백양마을이 뱀 형국인 청량 마을을 찍으려는 형국이라는 지명 전설도 전해진다. 또한 각각 ‘아랫배암구지’와 ‘윗배암구지’로 불리는 백양과 청량이 다리를 사이에 두고 서로 저울질하고 있는 형국이라는 지명 전설도 전해지고 있다.
오랜 옛날에는 마을 입구까지 배가 들어올 정도로 깊은 바다였다는 전설이 있는데 그래서 인지 마을의 농지를 파 보면 뻘흙도 나오고, 바다였을 때 물에 잠긴 나무가 토탄이 되어 토탄 연료를 많이 채취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일제 때 땔감이 없던 이웃 마을에서 청량 마을로 토탄을 사러 왔고, 청량 마을에서는 한 평당 쌀 10가마 정도의 값을 치르고 토탄을 팔았다고 한다.
농업형태 |
가구수 |
세대수 |
인구 |
경지면적 | ||||
계 |
남 |
여 |
계 |
전 |
답 | |||
벼농사 |
약 50 |
약50 |
100여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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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 마을은 1987년 1월에 이평면 청량리에서 행정 구역 변경으로 영원면으로 편입되었다. 현재 이평면에도 청량 마을이 있어 이평면 청량을 원청량이라고 한다. 예전에 마을이 가장 번성했을 때는 100여 가구가 살 정도였으나 현재는 50여 가구가 살고 있다. 현재 마을에는 여산 송씨가 가장 많이 살고 있다.
마을의 주 수입원은 농사로 예전에는 인근 마을에서 가장 번성하여 마을을 두 곳으로 나누고, 이장도 2명 선출할 것을 제안할 정도였다고 한다. 마을이 한참 번성했을 때 마을 자체에 ‘새터’가 생겨 현재도 새터에 10여 가구 정도가 살고 있다. 현재 참외 작목반이 3가구 정도 있는데, 예전에 참외 작목반이 활성화되었을 때는 적게 하는 사람이 1,200평 정도를 지었다고 한다. 40여 년 전에는 미원회사에서 고구마를 많이 사들였기 때문에 고구마를 많이 키웠고, 그 이후로는 수입이 많은 담배 농사를 지었다.
현재 옆 마을인 백양 마을에 교회가 생겨 청량 마을 사람 대부분이 교회에 다닌다고 한다.
1) 마을의 세시 풍속
○ 1월
세배가 끝이 난 후 차례를 모신다. 예전에 식구가 많을 때는 차례상 앞에 절을 하는 사람이 50여명 넘게 절을 하였다. 차례상에 떡국을 올리지 않고 밥과 국을 올린다. 상에 올리지 않고 먹을 떡국의 국물은 소고기로 맛을 낸다. 그리고 차례를 모시고 나서 밥을 다 먹고 성묘를 간다.
새벽에 차례를 지내기 전에 먼저 부모에게 세배를 하고, 집안 어른들께 돌아다니면서 세배를 한다. 여자들은 음식 장만으로 바쁘기 때문에 남자들보다 먼저 집안 어른들께 떡국을 끓여 상에 차리거나, 식혜 등 자기 집에서 장만한 음식을 상에 차려 돌아다니면서 세배를 한다. 세배를 다니다 사촌끼리 만나면 덕담을 하고 맞절을 한다. 세뱃돈은 예전에는 돈 대신 곶감이나 음식을 주었다고 최근에 와서야 돈을 주었다고 한다.
차례를 모신 뒤 식사를 마치고 여자들이 상을 치울 동안 남자들은 윷놀이 등의 집단 놀이를 한다.
예전에 바느질해서 옷을 해 입을 때는 부모님들이 설장에 다녀오셔서 양말이라도 한 켤레 사다 주시면 좋았다고 한다.
차례를 간소하게 모시는 곳에서는 설쇠기 3일 전에 설장을 보았고, 차례를 크게 모시는 집에서는 15일 정도 전에 설장을 봤다. 설장을 볼 때 한번에 다 보는 것이 아니고 여러 번에 나눠서 보게 된다. 더불어 첫 말날에 간장을 담그면 그 맛이 좋다.
정월이 되면 한달 내내 처녀들이 널을 뛴다. 그 외에도 ‘댕깡살이’라고 하여 네 칸 정도의 칸을 친 후 상대편에 넘어가고 상대는 자기 영역에 못 넘어오게 막는 놀이를 한다.
한편 정월 초사흘에는 떡 시루를 하고 성주에 올리고 빈다. 장독, 샘, 마당, 안방, 부엌에 상을 차린다.
그리고 입춘이 되면 아침 일찍 입춘축을 붙인다. 입춘 아침 일찍 ‘뱀뱅이’라고 해서 뱀사(蛇)자를 써서 거꾸로 붙이면 뱀이 들어오지 않는다.
정월 보름이면 집집마다 풍물패가 돌아다니면서 지신밟기를 한다. 또 해질 무렵이 되면 집 뒤에 대나무가 있는 집에 모여서 대나무를 한 두 개 씩 얻어와 집안에서 불을 피운다. 대나무로 불을 피우면 대에서 펑펑 소리가 나는데 그 소리에 잡귀가 놀라서 도망간다.
남자아이들이 여장하고 각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오곡밥을 얻으러 다닌다. 밥을 아홉 그릇 먹어야 한다고 해서 밥을 얻으러 다닌다. 얻은 밥은 대부분 사람들이 모여서 같이 먹는다.
남의 집 마당 쓰는 대비를 훔쳐다가 비에 불을 붙여 아랫배미(백양 마을)와 윗배미(청량 마을)가 싸움을 한다. 상대편의 쥐불을 모두 빼앗거나 상대편이 모두 도망을 가면 이긴다. 싸움이 거세지면 돌팔매질도 하고 막대로 사람들을 치기도 하여 사람들이 다치기도 하였다. 예전에 청량이 이평면에 속해 있을 때 많이 하였다. 40여 년 전까지 많이 하였다.
정월 대보름에 콩을 볶아 먹는다. “사내기 볶으자”라고 해서 콩을 볶는데, 초가 지붕에 많이 나오는 사내기를 방지하기 위해서 콩을 볶는다. 또 정월대보름날 해뜨기 전에 더위팔기를 한다.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불러 대답을 하면 “내 더위 사라”고 소리치면 그 사람에게 더위가 간다. 예전에는 여름에 초학에 많이 걸리기 때문에 더위팔기를 새벽마다 집집마다 다니면서 더위를 판다. 더위를 안 받으려면 대답을 하지 않고 반대로 “니더위”하면 된다. 또 열사나흗날 저녁에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된다고 해서 잠을 자지 않는다.
○ 2월
2월 초하루날 예전에는 당산제를 하였는데, 당산제가 끝이 난후 줄다리기를 하였다. 줄다리기에 사용되는 줄은 보통 그날이나 그 전날에 만드는데 외줄로 만든다. 줄다리기에 쓰일 줄은 집집마다 각출을 한다. 줄은 석줄 정도 꼬아서 사용한다. 줄을 꼴 때 여자들이 넘어가면 큰일 난다고 생각했다. 편은 마을의 동끄티, 서끄티로 나눠서 줄을 당겼다. 이긴 쪽이 풍년이 든다고 하여 서로 이기려고 하였다. 줄다리기가 끝난 후에 줄은 당산나무에 감았다. 그러나 당산나무가 없어지면서 줄다리기도 자연스럽게 없어졌다.
정월 대보름에 썩은 사내끼(새끼)를 가지고 산으로 목 매달러 간다. 2월 초하루는 농사의 시작이기 때문에 이제까지의 휴식에서 벗어나 고된 농사일을 시작한다는 의미에서 썩은 사내끼를 가지고 목 매달러 간다. 이 시기에 각종 나물을 캐서 보름 안에 해 국을 끓여 먹으면 그 해 건강하다.
○ 3월
삼월 삼짓날 안으로 개구리를 먼저 보면 부지런하고, 호랑나비를 먼저 보면 그해 옷을 많이 얻어 입고, 뱀을 보면 게으르다고 한다. 그래서 개구리는 먼저 보려고 노력하고, 뱀은 먼저 보지 않으려고 한다.
○ 4월
한식이 되면 산일, 즉 이장을 많이 한다. 또 이때에는 마을 가까이에 천태산에 치마바위가 있어 봄철이 되면 날을 받아 화전을 간다. 장구를 가지고 가서 장구 치며 놀기도 한다. 화전에 쓰이는 비용은 각출하여 마련한다.
○ 7월
7월 칠석에 술멕이를 한다. 청량에서는 마을의 큰 잔치가 두 번있는데 삼월에 한번 칠석에 한번 한다고 한다. 칠석에 하는 마을 잔치는 풍년을 기념하는 풍년잔치이다. 칠석 무렵이 되면 나락이 다 익다시피 했기 때문에 동네 잔치를 한다. 하루 종일 모정에서 돼지 한 마리를 잡아 술을 마시고 논다. 이때 사용되는 돈이나 술, 혹은 돼지는 그 해 좋은 일이 있는 사람이 내기도 하고 기부도 하며, 부족할 경우는 마을 기금으로 충당한다.
또 칠석이 되면 동네별로 나누거나, 동네 안에서 동끄티 서끄티로 나눠 짚으로 만든 공을 차고 놀았다.
○ 8월
추석에 조상에게 그 해에 난 쌀을 가장 먼저 바치기 위해 올이심리(올게심리)를 한다. 가장 먼저 익은 나락을 베어다가 쪄서 말린 후 방아를 해서 밥을 한 후 그것을 올린다. 이 쌀을 ‘올이쌀’이라고 한다. 요즘은 쌀이 일찍 익기 때문에 올게심리를 하지 않는다.
추석 차례가 끝난 후 보통 60여명이 모여서 추석 성묘를 간다. 요즘은 성묘 갈 때 여자들도 참여하지만, 예전에는 여자들은 성묘에 가지 않았다.
○ 10월
추수를 하고 짚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10월이 되면 짚으로 지붕을 새로 올린다. 가을에 바쁠 경우 봄에 지붕을 새로 올리기도 한다. 지붕은 동네에서 같이 올리는 것이 아니고 지붕을 잘 이는 사람이 있어 품을 팔기도 한다. 지붕을 올릴 때는 맨 밑바닥에는 나락 벤 곳을 바깥쪽으로 해서 올리고, 그 다음 줄부터는 나락이 있는 부분을 바깥으로 올린다. 그래야 맨 밑바닥은 짱짱하고, 그 다음 줄부터는 비가와도 비가 잘 흘러내린다.
○ 12월
동짓날이 되면 여산 송씨들은 문중에서 시제를 모신다. 동지가 되면 동짓죽을 끓여 먹고, 집 사방에 팥죽을 뿌린다. 또 섣달이 되면 한 해 동안 밀린 빚을 갚는다. 한 해 농사를 다 지었기 때문에 그 때 여유돈이 생겨 밀린 빚을 다 갚는다.
겨울에는 농사를 지지 않는 농한기이기 때문에 집안에서 앙굴(왕골) 가마니를 짠다. 왕골은 보통 여름에 많이 수확하는데, 이웃 사람들이 앙굴 껍질을 쪼개러 와서 껍질은 주인을 주고 속은 자신들이 가져가기도 한다. 앙굴 속은 질겨서 나중에 사내끼(새끼) 꼴 때 짚과 함께 꼬면 사내끼(새끼)가 단단해진다.
○ 윤달
윤달에는 무슨 일을 해도 탈이 없다고 해서 대개 산일을 많이 한다. 윤달에는 결혼을 하지 않는다. 또 윤달에는 자손들에게 해가 없다고 해서 수의를 만들거나 관을 짠다.
2) 마을의 샘제
청량 마을은 현재 이장을 맡고 있는 송성회(57세)가 어렸을 때만해도 당산제와 샘제를 모두 지냈으며, 당산제를 모시고 나면 마을 사람들이 줄다리기를 하고 나서 그 줄을 당산나무에 감아두었다고 한다. 현재 당산나무는 없어져 버렸고 당산제도 전승이 끊어진 상태이지만 샘제는 잘 전승되고 있다. 샘제는 마을의 공동 우물에 지내는 제의로, 청량 마을에서는 음력 2월 초하루에 ‘할아버지샘’과 ‘할머니샘’에 샘제를 지냈다고 한다. 그러다 약 20여 년 전부터 할머니샘은 뚜껑을 덮어버리고, 현재 마을회관 앞에 위치해 있는 할아버지샘에만 제사를 지내오고 있다. 제비는 마을의 각 호당 ‘인구전’을 걷어서 마련한다.
예전에는 샘제를 지내기 위해서 일주일 전쯤부터 금기를 지켰는데, 특히 제물을 준비하는 아주머니는 화장실에 가면 부정을 탄다는 생각 때문에 음식과 물을 적게 먹고 부부간에도 방을 따로 쓰고 자주 목욕을 하며 외지에도 나가지 않는다. 지금은 ‘많이 물러져서’ 하루나 이틀 동안 금기를 지킨다. 샘제 전날에는 마을의 입구와 제물을 준비하는 마을회관 등에 ‘임줄’(금줄)을 쳐서 사람들의 출입을 금하고, 마을 입구에서부터 길 양쪽으로 빨간 황토흙을 쭉 뿌려놓는다. 그리고는 제물을 준비하기 위해 마을 사람들 중 깨끗한 사람들이 장을 보러 가는데, 이때 제물을 장만하는 사람은 더러움을 타지 않으려고 장을 보러 나가지 않는다.
2월 초하루가 되면 마을의 남자들이 새벽에 모여서 할아버지샘과 할머니샘의 물을 모두 퍼내고, 우물 속과 그 주변을 청소한다. 이때 여자들은 우물청소에 참여하지 않고 구경도 하지 않는다. 우물물을 퍼낼 때 마을 사람들은 동서로 편을 갈라 할아버지샘과 할머니샘을 각각 청소하면서 어느 쪽이 더 빨리 퍼내는가를 시합하기도 하는데, 여기서 이기면 풍년이 든다는 말이 있다고 한다. 또 우물의 맨 밑바닥을 깨끗이 청소하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서, 마을 사람들 중 아들이 없는 사람이 자원해서 우물의 맨 밑바닥을 청소하기도 하였다. 청소가 끝나고 제물이 준비되면 샘 앞에 제물상을 차려놓고 유교식으로 제사를 모시는데, 축을 읽고 소지도 한다. 그리고 제사상 위에는 숭늉 대신 우물물을 길어서 올린다. 유교식 제사가 끝나면 참여했던 사람들이 함께 음복을 하고, 마을 회관으로 돌아와 함께 아침 식사를 한다. 이런 절차들이 다 끝나면 마을 사람들이 모여 마을 회의를 한다.
요즘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많이 물러져서’ 금기를 엄격하게 지키지 않으며, 우물도 할머니샘은 덮어버려서 샘제도 할아버지샘에서만 모신다. 그리고 예전에는 일일이 손으로 우물물을 퍼냈던 데에 비해 요즘은 양수기로 물을 퍼내는데, 마을 사람들이 식수로 사용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샘제의 축관과 제관을 선정하는 특별한 절차는 없으며, 근래에는 이장 송성회의 작은 아버지인 송기면(70세)이 주로 축관을 맡았다. 그러나 이번 조사에서는 송기면이 칠순을 맞아 해외로 여행을 간 까닭에 송창섭(72)이 대신 축관을 하였다.
현재 청량 마을은 “주일날 같은 경우는 일하기가 복잡할 정도로” 기독교 신자가 많은데, 이들은 백양 마을에 있는 교회에 다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샘제는 마을의 전통이라고 하는 인식이 강하게 있어서 지금까지 단절된 적이 없이 꾸준히 전승되고 있다. 그렇지만 샘제의 절차에 필요한 풍물은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 없어서 급격하게 약화되고 있는 추세이다. 2005년 3월10일에 있었던 청량 마을 샘제의 절차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시 간 |
내 용 | |
10일 |
7시5분 |
시암제를 위한 우물 청소에 협조해달라고 이장님이 방송을 한다. |
우물 청소를 하기 위해 마을 남자들이 청소도구를 가지고 모이기 시작한다. 우물 청소와 시암제에는 여성들은 참여하지 않는다. | ||
양수기로 우물을 퍼내는 동안에, 우물의 주변을 깨끗이 청소한다. | ||
8시 30분 |
청소를 하던 사람들 말고도 마을 주민들이 모이기 시작한다. 풍물을 칠 사람들도 악기를 준비한다. | |
풍물패들이 마을회관 입구에서 풍물을 치고 있으면, 다른 주민들은 준비된 제물을 상 째로 들고 나와 우물로 옮겨가서 우물 앞에 놓는다. 그러면 그 상 뒤를 풍물패와 마을주민들이 뒤따른다. | ||
제의절차는 유교식 제사 의식과 같으며, 축문을 읽고 나서 그 축문은 소지한다. 상에 올리는 물은 우물물을 사용한다. | ||
9시 |
시암제가 끝나면 제물을 음복하고, 제상을 마을회관으로 이동하는 동안 풍물패들은 풍물을 치며 그 뒤를 따르고 마을회관에 도착하면 풍물 치는 것을 끝낸다. |
3) 개인 신앙
부엌에 못을 박아놓고 그 위에 물그릇을 올린 후 정안수를 떠놓는. 매일 아침마다 새로 샘에서 물을 길어 어제 물은 버리고 그릇을 깨끗이 씻은 후 아침에 새로 물을 떠온 동이에서 한 그릇 떠서 조왕에 바친다.
4) 마을의 민속과 옛 이야기
○ 두레
예전에 농사를 지을 때 두레가 나서 공동으로 논을 맨다. 두레가 나면 풍물패가 함께 나와 농사일을 할때 신명나게 일을 할 수 있도록 풍물을 친다. 두레가 나서 논을 매면 두레에 속한 어른들은 피를 뽑고, 아이들이 뒤에 따라오면서 쓰러진 모를 추워 올린다. 보통 논은 두벌에서 세벌 정도 매는데 마지막 매는 단계를 ‘아가시’라고 한다. 아가시를 할 때는 굿도 치고, 논에서 노래를 부르면서 김을 맨다. 그 때 일이 끝나면 같이 술도 먹는 등 술멕이를 한다. 술멕이는 보통 칠월 칠석 무렵에 많이 한다. 이때 하는 술멕이는 풍년 잔치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 고시레 전설
(제보자 1) 우리가 그전에 일함서도 고시, 고시레라고 글잖아요. 거 애기 이름, 어떤 애기 이름, 거지 이름이드만, 거.
(제보자 2) 고시레를?
(제보자 1) 엉. 그 이름이 글드만요, 그게. 근께 가를 주기위한 이 밥이다 글드만요.
(조사자) 예, 그런 말이 있어요?
(제보자 1) 예
(조사자 2) 저기가 그래요. 그 고수레를 이렇게 던져서, 사방데 던지는 것이 고수레구요, 여기다 놓는 것은 사자밥이라고 해서 그런다고 그래요.
(조사자 2) 아니여, 고시레, 그게, 이름이여.
(조사자) 고시레가 이름이에요?
(제보자 1) 예, 예, 그, 그 이름인데, 그것을 함시로, 그 저 들판에서 해가지고 주서(주워) 먹는 사람인데, 아주 불쌍한 사람이여. 근께 그 사람을 주기 위한…
(조사자) 옛날 어르신들이 그런 말씀을 하세요?
(제보자 1) 그때 전설에서도 한번 나오던데?
(조사자) 그래요?
(제보자 1) 예, 전설에서도 한번 나왔어요.
(조사자) 고시레가 사람이름이고 어린아이의 이름이라고요?
(제보자 1) 예, 예. 전설에서도 한번 나왔어요.
○ 깔 베기
예전에는 소를 키울 때 사료가 따로 없어 어린아이들은 소를 먹이기 위해 깔을 베러 다녔다. 아침 일찍 한번 지게를 지고 가서 한 짐 해오고, 해질 무렵에 또 한짐을 해와서 소를 먹였다. 보통 깔을 베러 다닐 때는 몰려다니면 많이 베지 못하기 때문에 몰려다니지 않고 자기만이 봐둔 장소에 몰래 가서 깔을 베어와 소를 먹였다.
○ 나무 따먹기
예전에는 전부다 나무를 땠기 때문에 산으로 나무를 베러 다녔다. 나무를 베다 심심하면 한 곳에 나무를 모아놓고 나무 따먹기를 하는데, 갈코리를 위로 던져서 위쪽으로 엎어지면 이기고, 아래쪽으로 엎어지면 진다. 이긴 사람이 모든 나무를 가지고 간다.
○ 뱀 형국에 관한 이야기
(제보자) 우리 동네가 뱀 형국인데
(조사자) 동끝 이쪽이 뱀 머리…
(제보자) 능이, 우리 동네 뒤로 아까 그 인삼밭에서 오믄 저그 있어요. 이렇게.
(조사자) 예.
(제보자) 그럼 우리 동네 뒤로 능이 좀 이렇게 좀…
(조사자) 능이?
(제보자) 응, 좀 뽈쑥해요. 그 능이 바로 뱀형국, 그런데 그 그전에 사람들이 말하기를, 저희 아버지한테 들었는데 지금 그 배수로, 농사를 짓기 위해서 그 능을 전부다 파부렀어요. 똘을 놔부렀어.
(조사자) 예.
(제보자) 그런데 그 전 사람들은 거그다 똘을 내면은 동네가 안 좋다 했어요. 근데 꼭 그 능을 따라서 똘을 꼭 나부렀어요.
(조사자) 똘이,
(제보자) 네. 논에 물을 대기 위해서, 농사를 짓기 위해서. 꼭 그 능만 따라서 이렇게 됐어요.
(조사자) 그 능을 따라서요.
(제보자) 예. 그러면 안 좋다 했어요. 그래서 그런가, 나는 인제 우리는 그 저 안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게 했기 때문에 농사는 더 많이 짓지만은 이 백양리, 그 내기 전에는 그 백양리보다 그 어떤 동네보다 우리 동네가 잘 살았어요. 잘 살았어. 근데 그거 내코부터는. 환자는 없는데, 돈은…경제는… 경제는 조끔 뒤진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동네는, 우리 동네가 그때는 우리 동네가 그때가 한참 잘 살때는 그것을 내키 전에는 저 장재리까지 저 영원 소재지 거 운학리까지 땅을 거지금 다 차지했어요.
(조사자) 동네 사람들이요?
(제보자) 예, 동네 사람들이. 여기 짓는 사람들이 근데 많이 빼앗겨부렀지요.
(조사자) 그 도랑이 난 것은 아버님 세대에?
(제보자) 아니요, 나 어릴때게. 그 난지 얼마 안 되었어요. 그 나 철 들어서 놨어요. 근께로 어른들이 그 똘 남스로 상당히 그 불편하게 여겼어요.
(조사자) 누가 냈어요?
(제보자) 정부에서. 아, 농사짓기 위해서 놨으니까.
(조사자) 정부에서 수로를?
(제보자) 예, 수로를 인자. 그렇기 때문에 우리 생각은 그렇지 않지요. 옛날하고 박정희 대통령 때 고속화를 따면은 산 동, 뭐 산, 나라, 산 능 끊으믄 나라가 망한다고 했잖아요. 근데 지금 더 잘살잖아요. 고속도로를 낸께 더 잘살았단 말이야. 그전에는 옛날사람들은 산 능 끊으믄 나라가 막 안 좋다고 막 했잖아요. 근께 전번에 본께, 어떤 스님도 거그를 못 끊게 하잖아요. 그런 식으로 하잖아요. 사실상 우리나라 고속도로를 내놓은께 더 잘살잖아요. 근께 나도 인자 그 능을 따라서 동네에서 그전에 옛날사람은 안 좋다 했지만, 어찌 되었든 농사를 잘 지은께 되았지 않냐. 나는 인자 그렇게. (모두) 하하하.
(제보자) 근데, 이상하게 그전에는 백양리보다 우리가 더 잘살았는데 근께 그 하는 말이 있어요. 이 저울이다. 백양하고 우리는. 근게 이쪽으로 지울었다(기울었다) 이쪽으로 지울었다(기울었다). 근께 지금 현재는 저쪽 동네가 우리보다 쪼금 더 나슨 편이고. 인자 어느 때 이쪽으로 또 지우려질련가 또 모르제. 그런 말이 있어요. 사람들이. 그전에는 여가 확실히 잘 살았어요. 지금도 우리 동네가 못 사는 것은 아니에요. 그래도 우리동네가 못 살지는 않아요.
○ 석제비
옛날에는 석제비라고 하여 눈에 이상이 생기면 생선 젓갈 중 삭지 않은 것을 한 마리 꺼내 생선 눈에 가시를 찔러 벽에 꽂아두는 민간의료를 행했다. 이외에도 ‘티를 낸다’고 해서 눈에 이물질을 꺼내는 사람에게 찾아가 티를 내면 눈이 나았다고 한다.
<제보자>
송성회(남, 이장, 57세)
이덕임 (여, 덕천면에서 시집 옴, 52세)
<조사장소>
제보자 송성회 댁
4. 주촌 마을
예전에는 ‘주천(蛛川)’이라고 하였는데, ‘주촌(蛛村)’으로 변경되었다고 한다. 주천이라는 명칭은 이 마을이 형국으로 봤을 때, 거미의 다리처럼 띄엄띄엄 떨어져 형성되어 있고, 마을 앞에 긴 천이 형성되어 있어 마을 형국을 따라 거미주(蛛), 내천(川)자를 써서 주천이라고 불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주천이라는 명칭 이외에도 ‘똥뜸’이라고도 하는데, 마을이 띄엄띄엄 떨어져 있다고 해서 똥뜸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건너뜸’, ‘안뜸’, ‘모탱이뜸’ 등의 지명이 있다.
주촌 마을은 신기 남쪽에 있는 마을로, 면 소재지에서 2㎞ 지점에 있으며, 농사가 주생업인 마을이다. 고부천(古阜川)과 인접하여 있고, 부안군 백산면과 연결되는 ‘중다리’라는 다리가 있다. 중다리라는 명칭은 수성교와 평교 사이에 있다는 의미에서 붙여졌다고 한다. 중다리는 현재 주촌교로 명칭이 변경되고 예전의 나무다리인 주촌교 대신 시멘트로 만든 다리가 있다.
현재 이 마을은 각성받이 마을로 김해 김씨, 전주 이씨, 밀양 박씨가 살고 있다.
농업형태 |
가구수 |
세대수 |
인구 |
경지면적 | ||||
계 |
남 |
여 |
계 |
전 |
답 | |||
벼농사 |
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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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마늘․감자․참외 하우스 작목반이 있었다. 잘 되었을 때는 18명 정도가 작목반에 소속이 될 정도로 활성화되었으나 현재는 수입이 맞지 않아 작목반이 폐지되었다. 현재는 벼농사가 마을의 주 수입원이다.
1) 마을의 세시 풍속
정월의 설날에는 떡국과 밥, 나물, 조기, 삼실과 등을 차려 차례를 지낸다. 떡국의 국물은 보통 구하기 쉬운 닭이나 꿩으로 국물을 낸다. 요즘에는 소고기로 국물을 낸다. 설에는 춥기 때문에 성묘를 잘 가지 않는다. 보통 사흘과 보름에 성묘를 많이 간다.
한편, 정월 보름에는 마을에서 집집마다 굿을 친다. 마당밟이를 하면 그 집에서는 돈과 쌀을 내 놓는데, 이 돈은 마을 공동 기금으로 사용한다.
2) 마을의 일생 의례
○ 가정 신앙
자식들이 잘 되라고 빌기 위해서 어머니들은 부엌에 조왕을 모신다. 솥단지가 놓여 있는 위쪽에 말뚝을 박아 놓고, 그 위에 조왕 그릇을 놓는다. 조왕은 보통 새벽마다 샘에 가서 무를 떠놓고 빈다. 상수도가 생긴 이후에는 샘물에서 물을 뜨지 않고 상수도에서 물을 받아 했다. 조왕을 그만 둘 때는 보통 점집이나 무당에게 물어서 그만둔다.
한편, 성주는 보통 집집마다 있는 가장 높은 신으로 성주에는 날마다 상을 차리지 않고 명절이나 아이가 태어났을 때 안방의 윗목에 상을 차린다. 아이가 생기지 않을 경우 성주에 상을 차려놓고 삼신을 맞아들이기도 한다.
○ 출산 의례
아이가 생기지 않으면 약을 지어먹거나, 삼신을 맞아드린다. 삼신을 맞아들이는 방법은 동네 샘에 떡시루를 가져가서 빌고, 그것을 다시 가져다가 성주에 가서 비는 것이다. 초저녁에 샘에 가서 물 떠다 빌기도 하고, 무당에게 가서 빌기도 한다. 태몽은 꾸는 사람도 있고, 꾸지 않는 사람도 있다.
더불어 예전에는 먹을 것이 없는 세상이었기 때문에 특별히 음식을 가리거나 하는 것은 없었다. 오히려 없어서 먹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편, 아이를 낳을 달에 배냇저고리를 만든다. 배냇저고리는 명(미영)베나 방목으로 만든다. 배냇저고리는 따로 단추나 고름을 달지 않고 실로 둘러 묶는다. 보통 흑헌실(명주실)을 여러가닥 겹쳐서 왼쪽은 짧고 오른쪽은 길게 달아 아이의 몸에 한번 둘러 묶는다. 이렇게 실로 하는 이유는 아이의 명이 실처럼 길라고 하는 의미이다.
산실은 보통 안방에 차리는 것이 보통이나, 일반적으로는 시어머니가 안방에 있을 경우, 산모가 원래 묵던 방에 차리는 경우가 많다.
아이를 낳고 나서 바로 삼신상을 차린다. 아이를 낳기 전에 삼신상을 차리는 경우도 있는데, 윗목에 삼신상을 차려놓으면 산모가 속이 시원하여 마음 편하게 아이를 잘 낳기도 한다. 보통 삼신상은 시어머니나 어머니, 혹은 어른들이 차려놓는데 어른들은 삼신상을 차리고 나서 바로 애기 잘 낳게 해달라고 빈다. 삼신상에는 보통 물을 떠놓고, 밥은 상 아래에 떠놓는다. 그리고 아이를 낳은 후에 땅에 밥 한 그릇, 물 한 그릇, 미역국 한 그릇을 차려 놓는다. 그리고 성주상 위에는 밥 한 그릇, 물 한 그릇을 떠 놓는다. 삼신에 올린 첫국밥은 산모가 먹는다. 상은 이레마다 차리는데, 보통 귀한 아들일 경우 이레, 세이레, 망중이레에는 떡을 해서 올린다. 상에 올린 떡은 동네 사람들과 함께 나눠 먹는다. 딸을 낳았을 경우, 잘 하면 떡을 하고, 보통 밥만 차리는 경우가 많다.
아기를 낳으면 태는 가위로 자른다. 탯줄은 아기 다리부터 배꼽까지 길이를 재서 두 군데를 묶은 후 그 가운데를 자른다. 탯줄은 보통 길게 자르는데, 탯줄을 짧게 끊으면 아이가 오줌을 자주 싼다고 한다. 자른 태와 태반은 삼일 뒤 아침에 마당의 손 없는 곳에서 어른들이 태운다. 태운 후 재는 손 없는 곳에 버린다.
산모가 아이를 낳으면 문밖에 쌈줄(금줄)을 친다. 아들을 낳으면 왼새끼를 꼬아 고추와 숯을 끼우고, 딸을 낳으면 솔가지와 숯을 찔러준다. 솔가지를 끼우는 이유는 딸이 시집가서 바느질을 잘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보통 아이를 낳으면 여섯 이레나 일곱 이레가 지낸다. 이레를 모두 쇠면 후타리에 걸어 놓는다.
산모가 젖이 안 나오면 쌀을 이빨로 깨물어서 끓여 먹인다. 돼지 족(足)을 삶아서 산모가 먹으면 젖이 많이 나온다.
아들․딸 가리지 않고 일곱이레 모두 지낸다. 그러나 자식을 많이 낳은 경우는 귀한 아들을 제외하고는 보통 셋째나 넷째까지만 이레를 쇠고 그 이후에는 가리지 않는다.
아이들의 태내 머리가 빠질 무렵 아이의 머리카락은 가위로 자른다. 그렇게 하면 아이의 머리가 새카맣고 숱이 많아지고, 좋기 때문이다. 아이의 머리카락은 따로 보관하지 않고 버린다. 아이에게 제비추리(제비꼬랑지)가 있으면 깎아준다. 잘라낸 제비추리는 탁발하러 다니는 중의 바랑에 넣는데, 이렇게 하면 아이의 제비추리가 없어진다고 한다.
아이에게 쌍가마가 있으면 시집이나 장가를 두 번 간다는 속설이 있어, 외가집에서 어른의 수저를 훔치면 좋다고 한다.
아이에게 제비꼬랑지가 있으면 가위로 잘라두었다가 중이 동냥(탁발)하러 다니면 제비꼬랑지를 함께 중의 바랑에 넣어준다. 그러면 아이의 제비꼬랑지가 없어진다고 한다. 또 아이의 손톱과 발톱은 산모가 이로 잘라준다. 아이의 피부는 연하기 때문에 가위나 칼을 대면 상처가 나기 쉽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백일을 따로 쇠지 않는다. 백일을 쇨 때는 보통 흰미리로 흰떡을 해서 사람들과 나눠 먹는다. 그리고 아이의 돌이 되면 떡을 해서 이웃사람들과 나눠 먹고, 아들을 낳으면 돌잔치를 한다. 보통 돌이 되면 윗목에 밥 한 그릇을 담아놓고 떡을 해서 이웃과 친척이 나눠먹는다. 돌상에 연필이나, 실, 학습장 같은 것을 올려 놓는데, 실을 잡으면 명이 길고, 연필이나 학습장을 잡으면 공부를 잘한다고 한다.
아이의 이름은 신랑이나, 시부모님 등이 짓는다. 한편 아이가 조금 자라서 엎드려서 다리 사이로 하늘을 바라보면 ‘지아시 본다(동생을 본다)’고 한다. 또 아이가 쌍둥이로 태어나는 경우, 아들 쌍둥이는 좋지만 아들과 딸 쌍둥이는 부부가 된다고 하는 속설이 있어 좋지 않다.
○ 혼례(婚禮) 의식
혼인을 위한 중신은 보통 친척이 많이 한다. 중신이 성사되면 시댁에서 각시굿을 보러 부모들이 오게 되는데 보통은 시어머니와 손위 시누이가 많이 온다. 이때 신부가 될 집에서 밥을 해 주게 되는데 시어머니 될 사람이 밥을 먹고 가면 결혼이 성사가 되고 그렇지 않으면 보통은 결혼이 성사되지 않는다. 이렇게 결혼이 성사되면 신랑집에서 사성이 쓰여진 종이가 온다.
혼례식(婚禮式)은 중각이라고 부르는 함진애비가 함을 지고 와서 신부댁에 가져다 준다. 함 속에는 명주, 속저고리, 속치마, 노란 저고리, 새파란 저고리, 옥색 치마 분홍색 치마 등과 사성이 들어있다.
신랑이 혼례식을 치르러 오면 바로 혼례식장으로 들어오지 않고 신부댁에서 신부집과 가깝게 차려놓은 주점으로 먼저 들어간다. 이때 신랑은 친구와 아버지나 혹은 형인 상각과 함께 주점에서 혼례식이 시작하기를 기다린다. 신랑이 올 때는 보통 마을에서 가마를 빌려 오는데 가마 쓰는 비용을 마을에 내면 마을에서는 공동 기금으로 사용한다. 만약 한날에 두 명이 결혼을 하게 되면 날을 늦게 받은 사람은 다른 마을에서 가마를 빌려온다.
신부는 신랑댁에서 보낸 원삼족두리를 쓰고 혼례식을 한다. 보통 혼례식은 겨울에 농한기에 많이 한다. 결혼식 날은 신랑집에서 받기도 하고 신부집에서 받기도 한다. 신부 쪽에서 날을 받는 이유는 신부가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혼례식을 치를 때 신부가 절 할 때 절하기 쉽도록 옆에서 찬임각시 2명이 부축을 해준다. 찬임각시는 보통 마을에서 결혼을 하여 복 있게 사는 사람들이 하는 경우가 많다.
혼례식을 치룬 후에 바로 시댁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보통 가마에 타서 이동을 하게 된다. 가마 속에는 짚을 깐 요강과 반지그릇(반지고리)을 넣어주는데 반지그릇을 넣어주는 이유는 시집가서 바느질을 잘 하라는 의미에서 넣어준다고 한다. 신부가 가마에 탈 때는 보통 뒷걸음으로 타는데, 그래야 잘 산다고 하기도 하고, 가마 속이 좁기 때문에 가마 속에서 다시 자리를 잡기 힘들어서 뒤로 탄다고 한다. 신부가 내리고 탈 때는 보통 신랑이 가마 문을 잡아준다고 한다. 가마를 타지 않고 인력거를 타기도 한다.
신부는 친정에서 혼례식을 치른 후 바로 원삼 족두리를 쓴채로 시댁으로 가서 시댁에서 첫날밤을 보낸다. 첫날밤에는 술상을 넣어 준다. 신랑이 옷고름까지 풀러주면 신부가 옷을 벗는다. 신랑은 입으로 불어서 촛불을 끈다.
옛날에는 가난한 시절이어서 따로 이바지를 준비하지 않고 신부가 베고 잘 이불채만 하나 해 가지고 간다. 가난한 시절이었기 때문에 혼례식을 치루면 그 이후 예식은 없다.
○ 상례(喪禮)
주촌 마을에는 상포계가 따로 있지 않고 주목계라고 하여 마을에서 젊은 사람들이 주로 하는 계가 30여 년 전부터 활성화되었다. 현재는 18명 정도의 계원이 있다. 여기에 소속된 계원들이 주로 마을에서 상사(喪事)가 있으면 주로 가서 일을 한다. 상사 이외에도 마을에서 큰일이나 어려운 일이 있으면 이 계원들이 주로 가서 일을 한다고 한다. 예전에는 상사가 났을 때 관이나 상여 모두 마을 뒷산에서 소나무를 베어다가 짰지만 지금은 장의사가 활성화되어 있어 관이나 상여를 직접 짜지는 않는다.
예전에 마을에서 상여를 짰을 때는 상여채를 사용하려면 상주는 쌀을 한말 정도 내고 상여채를 빌려 썼다고 한다. 이때 들어온 돈은 보통 마을 기금으로 사용하고, 마을 사람들은 모두 가서 상가집의 일을 도와주었다고 한다. 이 마을에 두진상씨라는 분이 상여소리를 잘 하셔서 영원면의 다른 마을까지 다니시면서 상사 소리를 해주셨다고 한다.
출처 : 영원면지(http://cafe.daum.net/youngwonm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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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도저히 다 못읽겠습니다, 숨 넘어 갈까봐서리~~~~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