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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민이 추앙하는 조선인 음악가 정율성
참 우리 역사
2005/09/28 08:31 http://blog.naver.com/js1440/80017833125 |
중국의 3대 음악가(섭이, 선성해, 정율성)중 한사람으로서 20세기 격변기를 불꽃처럼 살다 간 항일조선인 음악가로 추앙 받는 인물이다. 과연 정율성은 어떤 인물이기에 그 자부심 높은 중국에서 최고로 평가받게 되었는가. 그에게 음악은 오락의 수단이 아니라 해방의 무기였다아래의 글은 정율성에 대한 정보가 극히 제한된 조건에서 ‘호남인물탐구’(www.honams.com)에 소개된 자료와 블로그데코의 글을 중심으로 수집 요약, 정리한 것이다.
정율성(鄭律成, 1914~1976). 그의 이름은 국내에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그의 음악은 낯설지 않다.
1990년 9월 22일 베이징 아시안게임 개막식은 인민해방군 군악대의 힘찬 연주로 시작됐다. 300만 중국군이 아침저녁으로 부를 뿐만 아니라 주요 국가행사 때 어김없이 연주되는 ‘팔로군 행진곡’이었다. 이 곡은 중국에서 국가 ‘의용군 행진곡’ 다음으로 널리 연주된다고 한다.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 때 순안공항에 내린 김대중 대통령을 맞은 것은 ‘조선의용군 행진곡’이었다. ‘팔로군 행진곡’ ‘조선의용군 행진곡’은 모두 그가 작곡한 곡이다. 중국 3대 음악가 중 1인으로 추앙받는 그는 13억 중국인들이 떠받드는 항일 투쟁가이자 음악가다. 가곡, 합창, 가극, 동요, 영화 등에서 무려 360여 곡의 노래를 남겼다. 하지만 그가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한국 태생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의외로 많지 않다. 사회주의 계열의 혁명가로 생전에 조국과 단절된 시간이 워낙 길었던 데다 해방 후 북한에서 5년을 보낸 게 그 이유일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 8월 4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그의 외동딸 딩샤오디 여사(丁小提·62) 가 참석한 가운데 기자설명회가 열렸다. 11월 11~12일 광주시에서 이곳 태생의 작곡가 정율성의 음악세계를 조명하는 국제음악제를 소개하는 자리였다. 음악제 명칭은 그의 이름을 따 ‘광주정율성국제음악제’다. 광주광역시 남구(구청장 황일봉)가 중국문화부 대외문화협력국과 공동 주최한다. 음악제를 앞두고 쑨자정(孫家正·61) 중국 문화부장도 지난 8월 9~10일 광주시를 방문, 정율성의 생가 등을 둘러보고 음악제 관계자를 만나 행사관련 내용을 협의하고 돌아갔다.
정율성의 어린시절과 항일가족
정율성은 항일운동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농사를 지었지만 항일운동에 동참한 애국자였으며, 큰형 효룡과 둘째형 인제는 3.1운동 이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중국에 들어가 항일운동을 한 투사들이다. 셋째형 의인 또한 조선의용단 군정학원에서 학생모집책으로 활동했다. 정율성의 누나 봉은도 항일투쟁 중 항일운동가 박건웅과 만나 결혼하였는데, 박건웅은 황포군관학교 출신으로 김산과 함께 조선민족해방동맹 결성을 주도하고 해방 후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을 역임한 열혈투사였다. 이렇듯 항일투쟁의 가풍은 정율성이 민족애와 진보성이 강한 음악가로 성장하는 배경이 되었다.
1916년 8월 광주 양림동에서 출생한 정율성에게 부모가 애초 지어준 이름은 부은(富恩)이었다. 이후 선율을 통해 인민에게 봉사한다는 뜻인 율성으로 이름을 고쳤다. 어릴 적부터 음악과 운동에 남다른 재주가 있던 그는 중학시절부터 ‘브나로드운동’(대중속으로 들어가는 계몽운동)에 참여했다. 아버지의 죽음을 경험하고 누이마저도 항일운동을 위해 떠나자 정율성은 셋째형 의인과 함께 15살에 상해로 향한다
아버지 정해업과 어머니 정영온 사이에 10남매 중 5남으로 태어났으나 그중 5명이 요절하는 바람에 그는 4남1녀 중 막내로 성장했다. 그의 큰형과 둘째형은 1919년 3·1운동에 가담한 죄로 일제로부터 체포령이 떨어져 중국으로 망명했고, 그중 큰형은 다시 비밀리에 국내에 들어와 독립운동을 하다가 체포돼 옥고를 치렀을 만큼 애국집안이었다. 넷째형 역시 조선공산당에 가입했으며 중국 남경에 있던 조선 의열단의 밀명을 받고 한중 국경을 넘나들면서 비밀리에 한국의 건장한 청년들을 모집해 중국으로 데려가는 일을 했다.
정율성은 어릴 때부터 음악에 소질이 있었고 만돌린을 즐겨 탔다. 1922년 기독교계 사립학교인 광주 숭일소학교에 입학한 그는 축음기가 있던 외삼촌 집에 자주 갔는데 이때 동서양의 명곡을 폭넓게 접했고 이것이 훗날 그의 음악적 자산이 됐다. 소학교 졸업 후엔 역시 기독교계 사립학교로 1919년 3·1운동 당시 전주의 3·1운동을 주도하고 일제의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하다 폐교까지 당한 전주 신흥중학교에서 수학했다.
중국 건너가 사회주의에 눈 떠
정율성이 중국으로 건너간 것은 그의 나이 열아홉살이던 1933년. 당시 학생을 모집하러 중국에서 조선에 온 넷째형을 따라 상하이로 갔다. 그리고 곧 난징으로 가서 중국에 있었던 한인 항일단체인 의열단에서 운영하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입학했다. 이때 사회주의에 눈을 뜬 그는 1934년 4월 군사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난징에 남아서 항일 비밀활동에 종사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음악공부를 하게 되고 이름을 ‘율성’으로 고쳐 부른 시기도 이 즈음이다. 당시 상하이에 체재하던 소련의 유명한 음악교수 크리노와(Krenowa)의 문하에서 성악과 음악이론을 지도받았고 세계 명곡도 두루 접했다. 크리노와는 정율성의 음악적 재질을 높이 평가하면서 “만일 이탈리아에 가서 학습한다면 동방의 카루소가 될 것”이라며 이탈리아 유학을 적극 주선하려고 했다. 하지만 정율성은 이를 포기하고 적극적으로 한국의 항일단체 및 중국 공산주의 인사들의 조직에 가담했다. 이름을 바꾼 것과 관련해 그의 아내 딩쉬에송(丁雪松)은 “그는 음악에 몸바치며 아름다운 선율로 인민의 목소리를 반영할 것을 결심해 부은을 율성으로 고쳤다”고 회상했다. 1941년 정율성과 결혼한 딩쉬에송은 항일군정대학 여학생대 대장 출신으로 훗날 중화인민공화국의 주덴마크, 주네덜란드 대사 등 고위 외교관을 지낸 중국인이다.
1938년과 1939년 정율성은 음악인으로서 첫 번째 황금기를 맞는다. 1938년 ‘옌안송’을 작곡함으로써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으며 중국공산당의 최고위 지도자들인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주더, 왕전 등을 만났다. 그해 항일군정대학 정치부 선전과에서 음악지도원으로 일했으며 이때 ‘10월 혁명 행진곡’ 등을 작곡했다. 이듬해인 1939년 1월 항일군정대학에서 중국 공산당에 정식으로 가입한 그는 ‘예수이 노래(延水謠)’ ‘위대한 우한을 지키세(保衛大武漢)’ ‘생산의 노래’ 등에 이어 대작 ‘팔로군 대합창’을 작곡했다. ‘팔로군 대합창’은 6개 곡으로 구성된 대형 군가로 그중 ‘팔로군 행진곡’은 팔로군의 전투적 정신과 기상을 행진곡으로 표현해 그 후 중국 인민해방군의 군가로 채택됐다. 이 작품은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건립된 후에도 계속 군가로 사용되다가 1988년 중화인민공화국 중앙군사위원회가 ‘중국인민해방군 군가’로 비준했다. 정율성이 ‘옌안송’을 작곡할 때 만 24세가 못 되었고, ‘팔로군 대합창’을 창작하던 해 24세였다.
천재적 음악가로 성장한 청년 정율성
정율성은 중국 남경에서 김원봉이 운영하는 ‘조선혁명간부학교’에 입학한다. 거기서 그는 군사활동 뿐 아니라 삼민주의와 맑스레닌주의를 배웠으며 조선역사도 공부하였다. 정율성은 비밀단체에 가담하여 항일운동을 하면서도 크리노와교수로부터 4년 간 매주 음악을 배웠다. 정율성은 혁명가 라청과 함께 머물게 되는데 라청의 소개로 ‘남경 5월문예사’라는 진보적 문예단체에서 활동할 수 있게 된다. 정율성은 문예 뿐 아니라 ‘조선민족해방동맹’에 가입해 활동하면서 항일운동가로서 더욱 성장하게 된다. 19세의 정율성은 이후 중국 최고의 민족작곡가로 존경받는 선성해에게 음악을 배운다. 중일전쟁이 터진 후에는 중국항일투쟁의 근거지 연안에 들어간다.
정율성이 ‘노신예술학교’ 음악학부에 입학한 후 연안의 변혁적 분위기는 그의 창작열을 들끓게 했다. 모택동이 참석한 대규모 야회에서 정율성은 「연안을 노래하다」라는 곡을 불러 청중들의 심금을 울린다. 웅장하면서 서정적인 이 노래가 오늘까지도 중국전역에 퍼져 우리의 「아리랑」처럼 널리 애창되는 「연안송」이다. 이후 정율성은 홍군의 대장정을 직접 답사하여 그 감흥을 바탕으로 「팔로군행진곡」을 창작한다. 「팔로군행진곡」은 중국인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곡 중 하나다. 이 노래는 1949년 중국공산당정부로부터 「중국인민해방군가」로 비준되었으며 1990년 북경아시안게임에서 연주되기도 했다.
공산당가입과 부인 정설송
정율성은 21세의 나이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후 항일군정대학에서 음악지도를 맡는다. 그는 군정대학의 지도교원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하면서 여학생 대대장이었던 정설송과 열애를 한다. 한 때 서로 떨어져 지낼 때도 있었지만 3년간의 사연 많은 연애 끝에 두 사람은 결혼하게 된다. 평생을 정율성과 함께 한 정설송은 멕시코와 네델란드 대사를 지낸 중국의 대표적인 신여성이기도 하다. 정설송은 1996년 문화체육부 산하 국립국악원의 국빈 초청으로 이남에 와 악보를 기증한 바 있다.
조선인 정율성
정율성은 중국의 항일운동 뿐 아니라 조선의 항일운동에도 큰 발자욱을 남겼다. 정율성은 태항산으로 근거지를 옮겨 항일전투에 나섰다. 태항산근거지로 집결한 120여명의 조선인 동지들과 함께 조선독립동맹, 조선의용군을 조직하고 조선혁명군정학교를 설치하였다. 또한 전투에 직접 참가할 뿐 아니라 적군와해사업도 전개하였다. 그런 속에서도 정율성은 창작활동을 계속해 「조선의용군행진곡」과 「혁명가」 등의 곡을 작곡해 조선항일투사들에게 널리 전파했다.
일제가 항복하고 조국이 해방되자, 정율성을 비롯해 중국의 조선인 항일투사들은 하루빨리 조국으로 돌아가길 바랬다. 조국에 돌아온 정율성은 이북에서 황해도 도당위원회 선전부장과 평양음악대학 담임교사로 활동하면서, 「조선인민군 행진곡」, 「두만강」 등 10여곡의 작품을 내놓으며 창작활동에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해방과 함께 시작된 민족의 분단과 전쟁으로 정율성은 5년 만에 중국으로 다시 돌아가야 했다.
해방 후 북한에서 활동하기도
1942년 폐결핵을 앓던 그는 조선인 장군 무정을 따라 태앙산으로 들어가서 조선의 젊은이들을 규합, 조선독립동맹 조선의용군 조선혁명군정학교 등을 조직하는데 참여했다. 이때 그가 작곡한 곡으로는 ‘조선의용군 행진곡’ ‘혁명가’ 등이다. 이 가곡들은 화북과 동북의 항일근거지에서 활약하는 조선 젊은이들 사이에 널리 퍼졌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자 정율성은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아내와 딸을 데리고 9월 중국 옌안을 떠나 3개월 만인 12월에 평양에 도착했다. 이듬해 1월 황해도에 배치받아 도 위원회 선전부장을 맡았으며 해주에 음악전문학교를 설립하고 이 해에 김일성도 만났다. 1947년 봄 평양으로 전근돼 북한군 구락부 부장을 맡았고 북한군협주단을 창설하고 단장을 겸했으며 1949년에는 조선음악대학 작곡부장을 맡았다. 이 기간에 그는 ‘해방행진곡’ ‘조선인민군 행진곡’ 등의 노래와 ‘동해어부’ ‘두만강’ 등의 대 합창곡을 창작했다. 그중 ‘조선인민군 행진곡’은 후에 조선인민군의 군가가 됐다. 김일성은 1948년 공로를 인정해 정율성에게 표창장을 수여했다.
1950년 6·25가 발발하자 정율성은 ‘조선인민 유격대 군가’ ‘공화국 기치 휘날린다’ ‘우리는 탱크부대’ 등의 작품을 작곡했다. 하지만 그해 9월 아내는 중국인민공화국 정부로부터 귀국명령을 받고 돌아갔고 같은 해 10월 정율성도 77세 고령의 어머니를 모시고 중국으로 돌아가 중국 국적과 당적을 회복했다. 같은 해 12월 중국인민지원군 창작팀과 함께 다시 북한에 들어가 전선에서 ‘중국인민지원군 행진곡’ ‘지원군십찬’ ‘사랑스러운 군대 사랑스러운 사람’ ‘백운산 노래’ 등을 창작했다. 1951년 4월 다시 중국으로 건너간 그는 북경 인민예술극장에서 일했다.
1952년부터 1966년 사이에 중앙가무단, 중국음악가협회 창작조, 종앙악단 등 중국 최고 음악단체에 근무하면서 수많은 노래를 만들었으며 ‘우리는 얼마나 행복해요’ ‘유쾌한 동년’ 등의 동요도 창작했다. 또 ‘행복한 농장’ ‘추수봉기’ 등 대형 합창곡들과 오페라 ‘망부운’ 및 영화음악과 연극음악도 탄생시켰다.
하지만 그의 음악활동이 결코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1959년 중국의 반우파 정치운동에서 그는 ‘엄중한 우익’ ‘반당(反黨)’이라는 누명을 쓰고 비판을 받았고 1966년부터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간첩이라는 죄명으로 감금됐을 뿐만 아니라 그가 일생을 바쳤던 창작활동의 권리마저 박탈당했다. 그의 작품은 방송, 연주, 출판이 금지되기까지 했다.
10년간 문화대혁명의 좌경바람이 그치자 정율성은 현역으로 복귀하며,1976년 10월 소위 사인방이 분쇄되고 문화대혁명이 종결되자 정율성은 저우언라이 총리를 노래하는 연가와 중화인민공화국 건군 50주년을 위한 대형작품 창작을 서둘렀다. 이전보다 더욱 넘치는 열정으로 창작활동을 계속한다. 하지만 정율성은 주은래 총리에 대한 연가와 건군 50주년 기념작품을 창작하던 중 고혈압으로 세상을 달리하게 된다. 조국의 해방을 위해 싸웠던 청년은 결국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국 땅에서 세상을 달리한다. 1976년 그의 나이 58세인 12월 7일 뇌일혈로 갑자기 세상을 떴다. 그가 숨지자 왕전 등 중국 공산당 정부의 최고위 인사들의 조문이 잇따랐다.
중국공산당과 정율성
중국에 돌아온 정율성은 노동자들의 생활과 정서가 담겨있는 노래들을 열정적으로 작곡하였다. 「벌목가」와 「홍안령에 눈이 내리네」는 당시 창작된 대표적인 노래이다. 중국공산당에서 항일투쟁을 한 정율성이었지만 공산당이 정권을 잡은 후에도 그의 삶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그는 1966년부터 10년간 중국을 휘몰아친 문화대혁명(10년내란) 시기 공산당의 좌경노선에 단호히 맞섰다. 그는 문화대혁명의 정책에 비타협적으로 맞서 모든 작곡요구를 거부하였다. 당연히 그는 창작과 발표를 포함한 모든 권리를 박탈당했다.
진보적인 민족음악가 정율성
작곡가 정율성은 고향 광주를 떠나 40여년간 중국대륙을 누비며 큰 족적을 남겼다. 그는 가장 격동적인 근현대사 시기에 민족과 민중의 염원을 노래한 작곡가이며, 항일무장투쟁을 수행한 투사이며, 조국을 그리워한 민족의 아들이었다. 정규적인 음악교육을 받지 못한 그가 시대의 진실을 담아낸 300여곡을 작곡할 수 있었던 비결을 그의 천재성에서만 찾을 수는 없다. 식민지 민족의 설움과 민중들의 고통을 온 몸으로 체현한 예술가의 뜨거운 열정이야 말로 창작의 가장 큰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정율성은 조선인이었지만 항일투쟁과 음악창작의 탁월한 업적으로 중국최고의 음악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중국인들은 대다수가 그의 노래를 알고 있지만 정작 이남에선 그를 별로 알지 못한다. 1992년 이남과 중국의 수교 이후 그에 대한 이야기의 일부가 기사로 다뤄졌지만 단편적인 소개에 그치고 말았다. 일제에 의해 조국에서 내쫓기고 냉전시기 반공이데올로기에 묻혀진 그의 역사를 이젠 되찾아야 한다. 사상과 정견의 차이를 넘어 민족이라는 이름아래 그를 재평가해야 한다.
2004년 6월 광주 남구청(청장 황일봉) 주최로 '음악가 정율성 기념 국제학술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자리에서는 중국 전 문화부장관 하경지의 「현대 중국의 탄생과 조선인 작곡가 정율성」이라는 기조강연이 있었고, 「<태양을 향하여>와 정율성 예술혼 재조명」(박준희) 등 여러 논문들이 발표되었다. 이런 국제학술대회에 이어 4회 광주국제영화제가 정율성의 일대기를 담은 영화 <태양을 향하여>를 특별상영한 것은 매우 주목할 일이다. 1980년 민중항쟁의 성지이자 정율성의 고향인 광주가 항일선열의 역사를 바로잡는 일에 앞장서는 것은 응당하다. 6.15통일시대에는 냉전적 낡은 사고를 벗어던지고 민족의 자존을 세우는 일에 과감히 나서야 한다.
인터뷰 / 정율성의 딸 딩샤오디씨
“아버지 음악이 상호이해의 통로됐으면”
제1회 광주정율성국제영화제 개최 협의차 쑨자정 중국 문화부장과 함께 내한한 정율성의 외동딸 딩샤오디씨는 “아버지와 관련해 많은 기억이 있다”며 “성품을 이야기한다면 굉장히 낙관적이고 마음이 넓으셨고 항상 천진난만하게 소년처럼 웃으시던 모습이 떠오른다”고 회고했다. 그는 “아버지는 심지어 문화혁명 중 불공정한 대우에도 항상 웃는 분이셨다”고 덧붙였다.
“북한에서의 기억도 물론 있어요. 제가 유치원을 그곳에서 다녔는데 제가 유치원이 끝나면 강변에 나와서 아버지를 기다리다가 함께 집에 돌아가곤 했거든요.”
그는 “아버지에 대한 중국의 예우는 각별하다”고 강조했다. 한 예로 중국 문화부에서는 광주정율성국제음악제를 여는 데 필요한 것들을 적극 지원해주겠다고 약속했다는 것. 그는 “이미 중국에서는 아버지를 기념하는 음악회가 7번 정도 열렸는데 공연을 관람한 한국인뿐 아니라 중국인들도 눈물을 흘렸다”고 전했다.
딩샤오디씨의 한국방문은 이번이 8번째. 그는 “이번 방문에서는 정율성국제음악제 관련해 문광부 장관 미팅과 기자회견, 정율성준비위원회 출범식 등에 참석했고 중국 문화부장 방한 미팅 및 진행과정에서 한국과 중국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을 도왔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중국에 돌아가서는 중국에서 정율성음악제에 참가할 중국 교향악단을 선별하고 조직위와 논의해 아버지의 음악 중 합창단이 부를 노래를 선곡하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번 음악제가 한국과 중국이 서로를 더 잘 이해하고 알아가는 통로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요. 중국 문화부장도 내년, 후년에도 계속 문화행사를 해서 많은 나라들이 참가해 서로의 우의가 증진됐으면 좋겠다고 말했어요. 또 한국의 도시 광주를 알게 된 만큼 중국의 문화도 한국에 소개된다면 좋을 것 같아요.”
딩샤오디씨는 중국 베이징에서 바로크합창단장을 맡고 있다.
출처:블로그 데코2005/08/27 00:36
[출처] 중국인민이 추앙하는 조선인 음악가 정율성 |작성자 아름다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