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미/ 신작시/ 한강문학 6호,봄호
경동시장
박 찬 미
움직이지 않는 것들은 모두 적
허리를 기역자로 구부린 노인도
겨울바람이 해일처럼 몰려오는 시장 모퉁이에서
귤 바구니 방패삼아 하루를 이겨 낸다
한 바구니로 얼마만한 生생 지켜 낼까
사는 게 참으로 모질구나 섧구나 생각되다가도
고장 난 몸으로 아예 침몰한 사람에 비하면
푸르게 일렁이는 물결이지 싶다
물고기처럼 수많은 생명 몰려왔다 몰려가는 바다
그 물살에 올라타지 못하는 사람 꽤 있기 마련
그 출렁이는 가뿐 숨결을 타고 그렇게 출렁여야 한다고 출렁이다가
출렁이는 사람이 되어 돌아오고 싶어지게 마련
밤 세 바구니에 만 원 도라지 한 바구니에 삼천 원
목소리와 목소리가 손과 손이 발과 발이 눈과 눈이
물결이 되어 술렁이는
지하철 일호선 동대문 지나 제기동 그 나라.
봄 소문
박 찬 미
창경궁에 홍매
눈 떴다는데
진분홍 눈자위 사랑스럽다는데
사람들 아침부터 떼 지어 몰려들어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고
공들여 눈맞춤 중이라는데
열정의 눈 수백 개인 그녀도
순정은 하나
찾아낸 사람 아직 없다는데
꿈속에서조차 그 사람에게 다가갈 수 없던 날들
내 한숨 같은 탄식
흩날린다는데
제 집처럼 드나드는 곤줄박이가
길지도 않은 목을 외로 꼬고 좌로 꼬아
그녀에게 콕콕 입맞춤 중이라는데.
사랑을 찍다
박 찬 미
무주구천동 숲길에서
오십대 부부들이 사진을 찍는데
조건을 붙였다
사랑으로
손을 잡을 것
마주 바라볼 것
아내는 남편을 애교스럽게 불러 볼 것
남편은 부드럽게 대답해 볼 것
이 간단한 행위만으로도
특히 남들 앞에서 사랑이 서툰 오십대는
허리를 틀고
목젖을 드러내게 마련인데
남편들은 꼭 전학 온 서울 계집아이와 마주친 시골 소년 같아서
아내들은 꼭 애인의 입술이 처음으로 다가올 때 처녀 같아서
숲속 잎새들까지 일제히 팔랑팔랑 몸을 뒤집는데
아내와 남편 눈빛이 맞닿은 지점에 나타난
閃光섬광 하나
햇살을 둥글게 말아놓은 섬광 하나
찰칵!
<시작노트>
*경동시장 : 이십 년 만인가요. 경동시장에 갔습니다. 끊임없이 움직거리는 바다였습니다. 아무리 나이가 많은 노인도 그 추운 한 겨울 길모퉁이에서 한 바구니의 귤, 한 바구니의 밤, 한 바구니의 버섯을 앞에 놓고 하루를 견딥니다. 가게 주인들의 외침도 끊이지 않습니다. 좋은 물건을 고르려는 사람들의 눈길과 발길과 손길도 끊이지 않습니다. 누추하고 고단해보일망정 사는 냄새가 진솔하게 풍깁니다. 사는 게 영 재미없어지거나 기운을 잃은 날은 경동시장으로 달려가면 좋겠습니다. 저 흔들리는 물살에 출렁이다보면 삶의 용기가 솟아나 잰 발걸음으로 돌아올 것 같습니다.
*봄 소문 : 사월 중순경에 창경궁에 홍매화 구경을 갔습니다. 그 꽃을 들여다보는 사람들로 인산인해입니다. 그 꽃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로 북적입니다. 그 꽃을 사랑하는 까닭이겠지요. 특히 카메라를 든 사람들이 많았는데요. 들여다보고 찍고 또 들여다보고 찍고 또 들여다보고. 매화꽃은 꽃이 아닙니다. 눈입니다. 사랑스런 여자의 눈입니다. 안타깝지만 그녀의 마음은 오직 하나입니다. 오직 한 개의 꽃에만 들어있습니다. 그 마음을 찾으려고 안달중입니다. 떠나지를 못합니다. 곤줄박이가 가끔 날아와 앉는데요. 꽃에 부리를 박고 꿀을 쪼아 먹는데요. 달콤한 입맞춤입니다. 다들 부러운 눈초리로 구경중입니다.
*사랑을 찍다 : 오십대 이후의 부부들은 사랑을 표시할 줄 잘 모릅니다. 말하지 않아도 그냥 마음으로 다 느껴지는 거라고 핑계를 댑니다. 그러면서도 사랑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은 잠재되어 있습니다. 무주구천동으로 네 부부가 여행을 갔던 날이었는데요. 푸른 숲길이 끝이 없었는데요. 서로에게 가장 간단한 말과 행동으로 사랑을 표시해보기로 하고 그 장면을 사진에 남겨보려는 욕심을 내 봤습니다. 아내와 남편이 손을 잡고 불러보고 대답하는 장면이었는데 어찌나 서툴던지요. 어색하면서도 기꺼이 마음을 보여주려는 즐거운 사진이 나왔습니다. 배꼽을 잡고 웃을 만큼 행복한 사진이 나왔습니다.
약력
<문예운동>으로 시 등단. 서울시단, 청하문학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