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신입회원 워크숍 경유지를 밀양으로 잡은데는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고자 했다. 점필재 김종직 선생님의 발 자취를 따라가면서, 이 시대의 스승은 어떠해야하는지를, 내자신을 되돌아 보는 계기를 삼고자 함이었고, 월연정에서, 선비들이 사화를 피해 고햔으로 돌아와 정자를 짓고 교육하면서 어떤 마음를 갖졌을까에 대한 심리적 갈등을 원예치료적으로 접근하고자 함이었다.
-폭우 특보가 내려진 가운데 예림서원을 거처 점필재 선생의 생가인<추원제>를 포기하고 밀양 시내 용활동을 거처서 <월연정>에 오니 정말 장대 같은 폭우가 앞을 가리웠다. 우산을 제데로 받쳐들 수 없을 정도의 폭우를 맞으며 월연정 쌍경당 기와에서 떨어지는 낙수물 소리를 크게 들을 수 있었다. 낙수물 소리들어 본지 얼마만이던가? 앞에 보이는 밀양강의 황토물이 곧 넘칠 것 같은 기세로 흘러 내렸다. 어릴 때 큰 홍수를 보는 것 같았다.
-호남의 최고의 원림 소쇄원과 비견되는 정자라고 평가하면서도 후손과 밀양 시민이 그 가치를
몰라서 제데로 홍보나 관리가 소홀함에 늘 마음 아프다.
-지역의 문화재가 잘 관리 되고 홍보 되어 지역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월연대 : 월연대 아래의 작은 골짝물의 황토빛의 거센 물줄기는 금방이라도 온 산을 삼킬듯 굽이처 흘러 내렸다.
오랫만에 보는 산골작의 황토빛 급류였다. 이정자를 짓은 주인 한림학사 월연 <이태>선생은 중종 14년(1519년) 11월
기묘사화에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내려와 이정자를 짓고 교육하였다.
-정자 지을 때 심었을 것으로 추측 해 본다.: 배롱나무-
-남쪽에서 가장 큰 백송나무이다. 중국에서 가져와서 심은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관리인의 말로는 큰 백송은 죽고 씨가 떨어져
자란다고 하는데 아닌 것 같다.
-잎이 3장이다.
-껍질에 흰 무늬가 들어 있어서 백송이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 추사 김정희 선생이 아버지 김노경을 따라서 <청나라 연경>에 갔다가 백송의 종자를 필통에 넣어가지고 와서 <고조부 김흥경>의 묘옆에 심은 것이라 전한다. 예산에 있으며 천연기념물 106호이다.추사의 서울 본가에도 영조(1724~1776)가 하사한 백송이 있다.
-산청에 성철 스님 생가에서도 백송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