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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여왕 마고”를 통해 본 프랑스의 종교전쟁
목차
Ⅰ. 프랑스의 시대적배경
Ⅱ. 영화 “여왕마고”의 역사적 사실들
<1>까뜨린느 드 메디치(catherin de medici)가 프랑스를 섭정하다
<2>카톨릭‘마고’와 위그노‘나바르’의 결혼동맹
<3>성 바톨레메 축일(Massacre de la Saint- Barthelemy, 1572. 8. 24)의 대학살
<4>대학살이후에 위그노의 반발
Ⅲ. 프랑스 종교전쟁
Ⅳ. 나의 소감
Ⅰ. 프랑스의 시대적 배경
1559년 발로와(Valois)왕가의 앙리(Henri) 2세가 사망한 후 아들 프랑스와(Francois) 2세는 재위 18개월만에 사망하고, 동생인 샤를르(Charles) 9세는 열살의 나이에 왕위를 계승하고, 모후 까뜨린느 드 메디치(Catherine de Medicis)가 섭정을 펼치게 된다. 이미 앙리 2세 말기부터 발달하기 시작한 칼빈주의는 많은 귀족들의 개종을 이끌었고 한 국가내의 두 종교라는 양상은 왕국의 통일성 (cujus regio, ejus religio 하나의 국왕, 하나의 국가)을 위협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가톨릭 당파는 몽모랑시(Montmorency)원수와 프랑스와 드 기즈(Francois deGuise)의 지휘하에, 신교도 위그노(Huguenots)파는 앙트완 드 부르봉(AntoinedeBourbon), 루이 드 콩데(Louis de Conde) 그리고 꼴리니(Gaspard de Coligny) 제독의 지휘하에 무력적으로 대립하게 된다.
한동안 꼴리니는 샤를르 9세의 신임을 받으며 두 교파간의 화해를 실현시키고자 했으나, 그는 모후 메디치의 사주에 의해 암살되고, 이틀 후 파리에서는 샤를르 9세의 여동생인 마르거리트 드 발로와와 신교도인 앙리 드 나바르(Henri de Navarre, 앙트완 드 부르봉의 아들)의 결혼식에 참석한 신교도들에 대한 대학살사건이 벌어진다(St. Barthelemy의 학살). 1574년 샤를르의 사망으로 앙리 3세가 즉위한다. 하지만 그는 정치적으로 무능했고, 이에 프랑스와 드 기즈의 아들인 앙리(Henri de Guise, Balafre)는 카톨릭급진파의 우두머리로서 프랑스 왕위에 대한 야심을 키우고 세력을 확보하고자 한다. 이후에 앙리 드 나바르(Henri de Navarre)는 무력을 통해서 프랑스를 재통일 한다.
Ⅱ. 영화 “여왕마고”의 역사적 사실들
<1>까뜨린느 드 메디치(catherin de medici)의 프랑스 섭정
왕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해서 야기된 혼란의 와중에서 까뜨린는 지금까지 속으로만 품고 있던 통치를 실현시키게 된다.
샤를르 9세는 열살에 불과하였기에 섭정은 불가피하였다.섭정에 대면해 오는 어려움들은 국내외적으로 엄청난것들이었다. 가장 골치아파했던 것이 위그노에 대한 처리였다.
<2>카톨릭‘마고’와 위그노‘나바르’의 결혼동맹
까뜨린느는 종교전쟁을 불식시키기 위하여 그녀의 딸이자 발로와왕가의 샤를르 9세와 앙리 3세의 누이로서 구교도인 마고와 위그노의 나바르의 왕인 앙리 드 나바르(미래의 앙리 4세)를 정략결혼 시킨다.
<3>성 바톨레메 축일(Massacre de la Saint- Barthelemy, 1572. 8. 24)의 대학살
파리는 자기네들의 젊은 지도자가 마고공주와 결혼하는 것을 축하하기 위해 온 위그노들로 가득차 있었다. 그때 까뜨린느는 꼴리니의 암살을 시도하나 실패하자 폭도를 두려워하여 까뜨린느는 수많은 위그노들을 즉각적으로 학살함으로써 자신을 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학살은 단지 파리에만 국한된 사건이 아니었다. 프랑스전역에서 가톨릭교도들에 의한 위그노 학살은 최소한 10월초까지 계속되었다.
파리에서만 약3000명 그리고 지방에서 2만명의 위그노(Huguenots)가 희생되었다. 많은 개종이 뒤따랐다.
<4>대학살이후에 위그노
위그노를 근절시키기란 그렇게 쉬운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지도자들은 근절되었으나, 그들은 다시 힘을 모아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영화상에서 그들은 때를 기다리며 앙리를 기다렷다. 영화상이 아닌 역사상으로는 위그노는 대학살 이후에 더욱 힘을 모았고 그런 위그노를무너뜨리기 위해서 제4차 종교전쟁이 유발되어 위그노 진영인 라 로셀은 봉쇄당하였으나 기근을 끝가지 참아냈고 결국에 카톨릭군이 물러났다. 하지만 쌍쎄르는 운이 좋지 못했다. 카톨릭군의 지도자인 라 샤트르는 밀집봉쇄를 하여 시민들은 극악한 기근을 겪게 되어 약500명의 성인과 12세이하에 아이들이 많이 죽게 되는데 이 사건이 바로 교수님께서 말씀해 주신 위그노의 한소년의 일화이다. 위그노의 어린소년이 “내가 배고픔으로 죽는 것을 보고서 어찌 우실 필요가 있겠어요?” “나는 빵을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어머니에게 없다는 것을 알아요. 하나님께서 내가 죽도록 정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기쁨으로 죽음을 받아들여야 해요. 착한 나사로도 배고프지 않았나요?”라고 말하였다.
점점 전쟁은 위그노가 우세하게 되어 두왕자가 도피를 하는 상황까지 되어서 볼리외(Beaulieu)칙령으로(1576년 5월 6일) 지금까지의 어는 것보다도 개신교에게 유리하였고 거의 모든 위그노의 요구사항이 관철되었다.
Ⅲ. 프랑스 종교전쟁(1562-1598)
1차 : 바시대학살에서 앙부와즈칙령 (1562년 3월-1563년 3월)
1562년 1월의 칙령은 신교도에게 도시밖에서 예배의 자유를 인가. Wassy (Champagne)라는 작은 시내부에서 종교행사를 하던 신교도를 Francois de Guise가 학살하게한 사건은 당시 왕실이 주도하던 화해노력을 무산시키고, Louis de Conde의 주도하에 신교도가 집결, 무장하고, 몇몇도시를 점령. 1562년 Dreux전투가 첫 번째 부력분쟁. 1563년 2월, Guise공의 암살. 전쟁은 1563년 3월 15일 앙부와즈칙령으로 일단락. 위그노 종교행사공식인정. 칙령의 실행을 위해 왕비 Catherine de Medicis는 아들 Charles IX를 데리고 구토순방.
2차 (1567년 9월-1568년 3월)
Meaux의 음모, Conde공이 국왕의 신변확보기도. 스페인군대의 네덜란드(신교지역) 진격으로 인한 위기감의 고조.
3차 (1568년 8월-1570년 8월)
중서부와 남부를 중심으로 혼란상황이 시작. 가톨릭파의 앙주공, 왕의 동생과 콩데공과 콜리니 지휘하의 신교도군의 전쟁. 콩데공의 암살이후 콜리니지휘하에 신교도군이 파리를 위협. 종결;최초의 안전지구설치(place de s urete)
4차 (1572년8월24-1573년7월)
나바르공과 왕녀 마고 드 발루와의 결혼은 두 파간의 평화무드를 조성하기 위한 시도였지만 이 노력은 성 바르톨로뮤축일의 대학살로 무산. 국왕의 화해정책에 대한 민중적 반발. 결혼시을 위해 파리에 모인 다수의 위그노인사가 주 희생. 이틀전에 이미 콜리니암살기도 미수사건(스페인의 음모)이 촉진제. 위그노의 반발을 두려워한 모후는 파리주민을 선동 파리의 사건은 이후 지방으로 유포되어, 학살은 전국적으로 파급. 파리지역에서만 약 3000명의 위그노가 희생. 청산과 정화차원의 문제. 이 사건으로 남서부지역에서 위그노의 조직적 무장이 시작되고 내전은 장기전의 양상을 띠기 시작.
5차 (1574년11월-1576년5월)
불평당의 난. 정치분쟁의 본격적 출현. 1574년 헨리3세(Henri III)는 1576년 종교의식의 자유와 8개의 요새화된 보호도시를 설정하는 볼리외(Beaulieu)칙령반포. 온건 가톨릭세력과 불평당이 알랑송공(앙리 3세의 동생)을 중심으로 형성. 샤를르9세의 죽음(1574/5)에서 폴란드왕인 앙리3세의 귀환사이의 공백기에 왕비의 섭정. 1580년경, 프랑스는 카톨릭급진파와 앙리 드 나바르의 위그노파, 그리고 온건카톨릭 정치파(Politiques)로 분열.
6차 (1576년12월-1577년10월)
삼부회의 소집과 프와티에칙령. 삼부회의 종교단일화.
7차 (1579년11월-1580년11월)
프와티에칙령의 적용의 어려움과 안전지구설정에 대한 반발로 인한 남서부지역에
집중된 전쟁.
8차 (1585년7월-1598년6월)
신성연맹의 결성에서 왕국의 위기. 1584년 6월 10일 앙리 3세의 동생이자 발로와왕가의 마지막 왕위계승후보였던 프랑스와 알랑송(Francois d"Alenccon)이 네덜란드에서 사망하고 앙리 드 나바르가 왕위계승자로 지목. 앙리 드 기즈는 스페인 국왕 펠리페(Felipe II)와 협약. 앙리 3세는 통치력을 상실하고 파리를 탈출. 기즈의 인기고조. 앙리3세는 앙리 드 기즈와 그의 동생 로렌(Lorraine) 추기경을 암살. 국왕은 이제 카톨릭에 의해 버림받고 앙리 드 나바르에 접근. 1598년 8월 1일 도미니크회 수도사 쟈크 클레몽(Jacques Clement) 앙리 3세 암살. 공식적으로 왕위 계승자가 된 앙리 (Henri de Navarre)는 이제 무력으로 왕국의 회복에 나선다. 카톨릭세력은 왕위후보문제를 둘러싸고 분열하였고, 지루한 내전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권태는 안정과 평화에 대한 갈망을 낳게 하였다. 1593년 7월 25일 앙리 4세 가톨릭으로 개종. 내전해결의 숨통이 트이게 됨.
1597년 9월 아미엥을 스페인군에 탈환.
1598년 4월 낭트칙령의 선포 낭뜨 칙령은 신교와 구교의 타협의 산물로 종교에 대한 관용 정책으로 가톨릭 우위의 신교 보호책이다. 법으로는 신․구교도의 평등권을 인정하였으나 일정 장소와 조건하에서만 신교의 자유를 허용하였다.
Ⅳ. 나의 소감
프랑스 영화는 원래 화면이 다크 블루톤이 진한데다 불을 끄고 봐서 그런지 영화가 참 어둡다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조금은 긴 듯했다.
하지만 프랑스의 종교개혁을 이해하기에는 좋은 영화다
이 영화는 교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국가적 프로젝트 영화라 그런지 1492콜롬버스 보다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기에 사료와 그리 큰 차이는 없었고 또 영화적 측면에서도 극적으로 각색하여서 영화적 요소가 많이 들어있음을 느낄수 있었다.
나는 이영화를 통해서 수업으로만 듣던 프랑스의 종교전쟁의 느낌을 조금은 알 수 있었다. 그냥 역사적 사실뿐이 아닌 그 참혹한 죽음들...
오직 자신의 종교를 지키기 위해서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 특히 교수님께서 말씀해 주신 위그노 소년의 일화는 참 충격적이었다. 어린아이가 아사(餓死)를 하면서도 어찌 그리 꿋꿋할 수 있는지 신념을 위해서 죽음을 맞이할 정도는 아니더라도 굳은 신념과 그 신념을 지킬 수 있는 의지를 기르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겠다.
극 중에서 프랑스 종교전쟁뿐만이 아니라 다른 점에서도 느끼는 점이 많았는데 같은 여성으로써 특히 화가났던 일이 후에 앙리3세가 되고 마고의 오빠이자 까뜨린느의 셋째 아들인 앙주가 마고를 여러사람이 보는 가운데 성적으로 범하고자 한다. 마고가 원치 않는데도 말이다. 이 장면 때문에 이 영화를 보면서 기분이 찜찜하였는데 여성의 입장에서 보면 정말 화가 난다.
또 마고에서 가장 개인적으로 측은했던 샤를르9세는 굉장히 유약한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까뜨린느가 꼴리니를 죽인 것에 대해 자책감을 느껴 괴로워하기도 그는 곤경에 처했을때 나바르의 앙리가 목숨을 구해주자 그에게 유일한 친구라고 하며 자신의 비밀스런 집에도 데리고 가기도 한다. 그는 왕위에 맞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는 괴로웠고 프랑스 역시 더욱 혼란스러워졌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런 그에게 연민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영화상에서 샤를르는 까뜨린느가 사냥책에 독을 묻혀놓고 그 부분은 붙여 놓았는데 침을 묻혀 읽게되고... 이러한 과정속에서 독에 중독되어 죽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어머니인 까뜨린느가 사위인 나바르의 앙리를 죽게하려고 꾸민 짓인데 결국은 자신의 아들이 그 책을 읽게 되고 죽게 되는 것이다.
사실 샤를르 9세는 발로아 가문과 메디치 가문의 전염된 피로 인하여 죽게된다. 실제로도 그는 임종을 맞는 순간에도 대학살에 대해 책임감을 느껴서 악몽과 환시에 시달렸다고 하며 죽는 순간에도 어머니를 외쳤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영화를 보고나서 신념의 숭고함 즉 종교적 신념 때문에 목슴을 잃는 사람들 안타깝기 보다는 나는 오히려 인간자체의 숭고함을 생각하게 되었다.
인터넷에서 찾아낸 마고 과제물 작성한 분의 레포트 입니당.,,*^^*
위에 글처럼....순서 정한다음 쓰시고여...마지막에....자기 소감을 쓰시면 됩니당~~
위에 글을 똑같이 쓰시면 안됍니다..,,
글쓰시는걸 넘 걱정하시는것 같아여...예시로 올린거니까여..
참조만 하시면 될것 같아여.......
모두 홧팅~~~입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