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피스: 매트릭스는 어디에나 있어, 그것은 우리들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이야, 심지어 여기 이 방 안에도 있지. 창문 너머나 텔레비전에서도 볼 수 있어. 일하러 갈 때나 교회에 갈 때, 세금을 낼 때에도 느낄 수 있지. 그것은 네 눈 위에 놓여 있는, 진실을 볼 수 없도록 하는 세계다.
네오: 무슨 진실?
모피스:네가 노예라는 진실, 네오. 너는,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노예상태로 태어났다... ...냄새를 맡지도 맛을 보지도 감촉할 수도 없는 감옥 속에 있어 왔다. 네 마음을 위한 감옥.
1.
영화 {매트릭스}에서 모피스는, 매트릭스는 우리 눈 앞에 놓여 있는 '세계'라고 말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우리의 매트릭스 곧 모체다. 모체의 특징은, 모체 속의 존재들이 그 안에 있는 것들을 보고 느낄 수 있지만 모체 그 자체를 알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예컨대 자궁 속에서 자라는 태아가 자궁 자체를 볼 수 없는 것이나, 바다 속의 물고기들이 바다를 통해 살아가면서도 바다 자체를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자연은 그 속에 존재하는 것들의 모체이며, 그 존재들은 자연의 일부들로서 전체적으로 자연 곧 모체를 이루어 낸다. 이런 점에서 모체로서의 자연과 그 속의 존재들은, 나무와 숲의 관계처럼 구별될 수는 있지만 분리되지는 않는다. 존재들은 자연이라는 모체 속에서 살며 그 모체는 존재들을 통해 이루어진다. 요컨대 자연이라는 모체는 존재들을 너머 존재할 수 없으며, 존재들은 모체 없이 존재할 수 없다. 존재와 무관한 자연은 비(非)존재로서의 모체 곧 비자연이다. 자연과 무관한 존재는 비자연·비모체로서의 비존재다.
양식장의 물고기들은 물 속에서 자유롭게 살아 가지만 양식장이라는 조건에서다. 양식장이 그들의 자연이며 모체다. 거기서 그들은 식량으로서 길러지며, 그들의 존재는 실제 식품으로 규정되어 있다. 그들은 물고기로서의 물고기가 아니다. 그들은 식품으로서의 물고기, 물고기식품이다. 그들은 물고기로서가 아니라 식품으로서 존재한다. 만약 그들이 식품으로서의 가치를 잃어버린다면, 식품으로서 기능하지 못한다면 더 이상 그들은 존재하지 못한다. 이 때문에 양식장에서 물고기들은 자신의 자연적 존재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는 무관한 식품 곧 자신이 아닌 존재로서 따라서 비존재로서 존재한다. 동시에 여기서 그들의 모체로서의 자연은 비존재로서의 모체 곧 비자연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모체로서의 양식장은 애초부터 그들과는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으로서 양식업자가 만들어 준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양식장과 물고기들은 양면적으로 자연스럽지 못한 관계에 놓여 있다. 한편으로 양식장은 물고기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양식업자를 위해서 물고기와 관련되어 있다. 다른 한편으로 물고기들은 식품으로서, 그들에게 강제된 삶의 터전 곧 양식장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 어느날 양식업자의 필요에 의해 어떤 물고기가 수면 위로 사라져 버릴 때 그 현상을 나머지 물고기들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현상은 자연적으로는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이 양식장에서는 일상적인 일이긴 하지만... 만약 그들이 의식을 좀더 갖게 된다면 그들은 이러한 초자연적 현상에 대해 종교적인 태도를 취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저 수면 위에서 그들의 삶을 주재하는 어떤 초월자가 있으리라는 예감을 갖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신의 생명이 그의 손아귀에 있으며, 이 양식장에서의 최선의 삶이란 오직 그분을 믿고 따르는 것이라고 여기게 될 것이다.
양식업자는 자신의 상품을 시장에 내다 판다. 그는,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상품세계 속에 살고 있다. 그는 이 세계 속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지만 상품세계라는 조건에서다. 상품세계가 그의 자연이며 모체다. 여기서 인간들은 서로 상품들을 사고 팔지만 상품들을 매매하는 그들 자신도 상품들이다. 양식업자는 자신이 기른 물고기상품을 판다. 물고기를 상품으로 팔기 위해서 그는 일정한 양의 노동을 거기에 바쳐야 한다. 이 과정이 없다면 물고기는 상품으로 되지 않는다. 물고기를 물고기-상품으로 생산하는 과정을 거친 후 그가 그 상품을 시장에 내 놓을 때 사실 그는 그 물고기-상품에 투하한 자신의 노동을 상품으로 내놓는 것이다. 요컨대 여기서 물고기-상품은 인간 노동의 상품화를 대리해 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상품세계에서는 상품들의 관계가 인간들의 관계를 대리한다. 인간들은 상품들의 관계를 통해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리하여 상품세계에서 인간들은 상품으로 살아가며, 그들의 존재는 실제 상품으로 규정되어 있다. 그들은 인간으로서의 인간이 아니다. 그들은 상품으로서의 인간, 인간상품이다. 그들은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상품으로서 존재한다. 상품세계에서 '노동자'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상품화를 나타내는 부정적인 개념이다. 과거에 혹은 어쩌면 미래에 노동자란 인간 자신의 생활 및 욕구에 필요한 물건을 생산하고 향유하는 인간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나 상품세계에서 '노동자'란 '상품'을 생산하기 위해 '자신'을 팔아야 하는 곧 자신을 상품으로 내놓아야 하는 인간을 뜻한다. 간단히 말해 '노동자'란 상품생산에 직,간접적으로 고용되는 존재다. 상품의 종류가 다양하듯이 다양한 종류의 노동자가 있다. 또 노동자는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한다. 분명한 것은 이 세계에서는 거의 대부분의 인간이 유·무형의 상품생산에, 어떤 방식으로든, 예속되어 있는 노동자라는 사실이다. 만약 그가 상품생산에 기여하지 못한다면 따라서 그가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잃어버린다면, 상품으로서 기능하지 못한다면 그는 존재가치를 잃게 된다. 이 때문에 상품세계에서 인간들은 자신의 자연적 존재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는 무관한 상품 곧 자신이 아닌 존재로서 따라서 비존재로서 존재한다. 동시에 여기서 그들의 모체로서의 자연은 비존재로서의 자연, 모체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자신을 상품으로 기를 상품세계를 스스로 만들어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모체로서의 상품세계는 애초부터 그들과는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으로서 상품의 운동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리하여 상품세계와 인간들은 양면적으로 자연스럽지 못한 관계에 놓여 있다. 한편으로 상품세계는 인간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상품을 위해서 인간과 관련되어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인간들은 상품으로서, 그들에게 강제된 삶의 터전 곧 상품세계와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 어느날 상품의 필요에 의해 어떤 인간이 갑자기 죽어버릴 때 그 현상을 나머지 인간들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현상은 자연적으로는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이 상품세계에는 일상적인 일이긴 하지만... 인간들은 의식을 갖고 있기에 이러한 초자연적 현상에 대해 종교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다. 그들은 저 위에서 그들의 삶을 주재하는 어떤 초월자가 있다고 믿는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신의 생명이 그의 손아귀에 있으며, 이 세계에서의 최선의 삶이란 오직 그분을 믿고 따르는 것이라고 여긴다.
2.
영화 {매트릭스}에서 인간들은 인공지능의 에너지원으로 되어 있다. 인공지능은 인간들이 그 사실을 알지 못하도록, 인간의 의식을 지배하여(프로그램화하여) 인간에게 하나의 세계 매트릭스를 제공한다. 마치 양식업자가 물고기들이 건강한 식품으로 자라도록 자연에 가까운 양식장을 제공한 것과 마찬가지다. 이제 삼단논법을 적용해 보자. 대전제-인간은 기계(인공지능)를 만들었다. 소전제-기계는 매트릭스를 만들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인간이 매트릭스를 만들었다!가 된다. 그러나 이런 결론은 일면적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자신을 지배할 매트릭스를 만들기 위해 기계를 만든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양식장의 경우에도 똑같이 해당한다. 대전제-자연은 인간을 창조했다. 소전제-인간은 양식장을 만들었다. 결론-자연이 양식장을 만들었다! 이 결론 역시 일면적이다. 왜냐하면 자연이 양식장이라는 비자연적인 인공물을 만들기 위해 인간을 창조한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 경우에는 차라리 불행한 과학자와 그의 창조물인 프랑켄슈타인의 관계가 더욱 적절해 보인다. 그 과학자가 자신의 창조물이 끔찍한 괴물임을 알았을 때 그는 그 괴물을 죽일려고 하고 그 괴물은 자신을 낳은 아버지를 죽인다. 오늘날 인간은 자신이 만들어 낸 기계가 자신을 죽일지도 모를 괴물일 수도 있다는 사실에 끔찍해 한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과 자연에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일 지도 모른다. 자연의 입장에서는 인간이 자신을 죽일 괴물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비록 의도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 괴물을 만든 것이 그 인간이고 그 자연이라면 결국 그 책임도 그 인간과 자연이 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위의 삼단논법과 그 다음의 과학자의 이야기는 그리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맑스는 젊은 시절 상품세계에 대한 분석을 시작하면서 이런 질문을 던졌다. "왜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소외시키는가?" 맑스의 나머지 인생은 오직 이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한 위한 것이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트리니티는 처음 만난 네오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네가 여기에 온 것은 답을 알고자 하기 때문이다" 세상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날카로운 유리파편들처럼" 네오의 마음에 꽃혀 있다. 그것이 그를 몰아쳐 미치도록 하며 동시에 답에로 몰고 간다. "그러나 그것은 무엇인가"(모피스가 처음 만난 네오에게 건네는 대사).
그것은 무엇인가? 맑스는 상품을 분석하는 중에 상품의 진화된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자본이었다. 여기서 맑스는 마침내 그것을 찾게 된다. 상품세계는 상품들의 교환이라는 단순한 유통관계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상품교환의 발달과 함께 상품들은 진화를 하면서 다른 모든 상품들에 대해 보편적인 하나의 상품을 창조하기에 이른다. 그것이 화폐다. 상품세계에서 화폐는 일자(一者, the One)이며 절대자가 된다. 그리고 이제 다른 모든 상품들은 화폐에 의해 가치가 매겨지게 된다. 위에서 이미 언급한대로 상품들을 통해 관계를 맺는 인간들은 보편적 상품인 화폐를 보유한 정도에 따라 가치가 매겨진다. 왜냐하면 상품세계에서 가치를 매기는 것은 이미 인간이 아니라 화폐이기 때문이다. 상품세계의 진화는 그러나 화폐에서 멈추지 않는다. 화폐는 한층 더 진화하여 가치를 증식시키는 가치, 혹은 자기복제하는 화폐에 이르게 된다. 그것이 자본이다. 화폐는 다른 모든 상품들의 가치를 매기고 또 상품들의 교환을 보편적으로 매개할 수 있지만 가치 그 자체를 증식시킬 수는 없다. 이를테면 내가 내 수중에 있는 1000원으로 1000원의 물고기상품을 샀을 때 이 교환으로 나는 내가 원하는 물고기를 얻었지만 처음 내가 가지고 있던 1000원의 가치가 더 불어난 것은 아니다. 반면 자본은 그 자체의 운동을 통해 자기의 가치를 증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내가 1000원으로 산 물고기상품을 소비하지 않고 새로운 상품 예컨대 통조림상품을 생산하여 그것을 다시 시장에 내놓고 1100원으로 판다면 이때 본래의 1000원의 가치는 100원만큼 불어난다. 그러나 이것이 가능하려면 나는 이미 1000원보다 훠씬 많은 규모의 화폐를 갖고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원료인 물고기뿐만 아니라 통조림을 생산하는 시설과 기계 그리고 노동력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원료와 생산수단 및 노동력 이 모든 것들은 상품들인데 이것들을 모두 구매할 수 있는 정도로 축적되어 있는 화폐가 자본으로 기능할 수 있는 것이다. 역으로 화폐가 자본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화폐를 조금 혹은 거의 갖고 있지 않는 자들이 항상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노동력은 바로 이들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일하지 않고도 살 수 있을 정도의 돈이 있는 사람이 타인을 위해 노동할 이유는 없다. 그러므로 자본은 끊임없이 팔 것이라고는 '노동력'밖에 없는 노동자들을 창출해 낸다. 노가다판에 가면 이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집에 쌀 떨어져 봐라, 일 안하고 배기나!" 그러므로 자본은 끊임없이 대중들을 밥에 쫒기게 함으로써 그들을 '노동'하게 만든다. 그들의 노동으로 사회의 부는 더욱 증대하고 자본은 더욱 쌀찌지만 그들 자신의 부는 늘 제한당한다. 여기서 맑스는 마침내 '상품세계'에서 '자본의 세계'에 발을 들여 놓는다. 맑스는 그 세계의 주인, 주체를 보았다. 그 주체는 자본가도 아니고 노동자도 아닌, 결국 인간이 아니라, '자본'이었다. 맑스는 자본가들을 에이전트라고 부른다. 기억나는가? 영화 {매트릭스}에 나오는 에이전트들을. 맑스는 자본가들이란 자본의 운동을 대리하는 자들일 뿐이라고 본다. 한편 노동자들은 자본의 식량이 되어 있다고 맑스는 본다. 그래서 맑스는 '자본'을 뱀파이어라고 부른다. {매트릭스}에서 에이전트 스미쓰는 인간을 '농작물'이라고 불렀다. 매트릭스는 농작물로서의 인간이 있기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자본'은 착취재료로서의 노동자가 있기에 존재할 수 있다.
물론 인간의 상품화는 오래 전부터 있어 왔다. 이미 고대에 매춘이 있었고 노예거래가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거래는 정치권력과 신분제라는 억압적 질서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반면 오늘날 '노동자'라는 개념은 완전히 '자본주의적'인 개념이다. 노동자는 노예가 아니며 어떤 신분적 속박에서도 자유롭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밥으로부터도 자유롭다. 밥으로부터의 자유는 삶으로부터의 자유 곧 죽음을 의미하므로 그는 밥에 다가서야 한다. 그러나 자본의 세계에서 그것은 우리의 일자 곧 화폐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살아가기에 충분한 화폐가 있는 자는 이미 노동자가 아니다. 노동자란 애초에 화폐로부터 자유로운 자다. 결국 노동자는 처음부터 노예'상태'(노예'신분'이 아니라)로 태어난 자다. 마치 모피스가 네오에게 "너는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노예상태로 태어났다"고 말한 것처럼. 그러나 매트릭스는 이 진실을 알지 못하게 하는 세계다. 왜냐하면 노동자는 '자유롭게' 일을 할 수 있고(사실은 일을 강제당한다) '자유롭게' 소비할 수 있기(사실은 소비를 강요당한다) 때문이다. 물론 노동자는 누구나 사이퍼가 말한대로 '배우처럼' 멋지게 살 수도 있다. 매트릭스를 '현실'로 받아들이기로 한 사이퍼는 자신의 '노예상태'를 잊어버리고자 한다. 그는 매트릭스 속에서 배우처럼 멋지게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그 삶은 '농작물'로서 매트릭스를 유지시켜주는 한에서다. 마찬가지로 노동자가 성공할 수 있지만 그것은 자본을 유지시켜주는 한에서다. 매트릭스 속에서는 누구나 에이전트가 될 수 있다. 그들이 매트릭스의 조종을 받는 한 분명 그렇다. 마찬가지로 노동자는 누구나 자본의 에이전트가 될 수 있다. 그들이 자본의 조종을 받는 한 말이다.
3.
영화 {매트릭스}는 기계와 인간의 싸움을 보여준다. 이 싸움의 고전적 형태는 러라이트(기계 파괴 운동)이며 그 현대적 형태는 네오러라이트다. 1996년 4월에 체포된 시어도어 카진스키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유나바머라는 닉네임으로 대학과 공황에 폭탄테러를 감했다. 유나바머(UNABOMBER)란 명칭은 대학(university)의 UN과 공황(airport)의 A 그리고 폭파범 bomber의 합성어다. 그는 공황과 대학을 현대 과학기술의 상징으로 간주하여 그곳을 범행대상으로 삼았다.
기계와 인간의 싸움의 최초의 형태는 기계가 자본의 물질적 존재형태로 도입되면서부터였다. 자본관계(자본과 노동력의 관계)에서 기계는 노동자의 경쟁자로 되었고 기계에 의한 자본의 가치증식은 기계에 의해 쫒겨난 노동자의 수에 정비례하였다. 기계는 노동력의 사용가치를 대신하였으며 따라서 노동력의 상품가치를 빼앗았다. 노동자는 자신을 상품으로서 팔 수 없게 되었고 한낱 노동수단일 뿐인 기계가 노동자를 파멸시켰다. 그리하여 노동수단이 기계로 되면서부터 노동수단에 대한 노동자의 격렬한 반항이 시작되었다. 여기서 맑스는 상품진화의 최종단계를 기계에서 보게 된다. 상품교환의 발달은 상품세계에서 상품들의 일자인 화폐를 창조했고, 이 화폐는 나아가 화폐를 낳는 화폐 곧 자본으로 되었으며, 다시 이 자본은 이제 기계의 힘으로 자기증식을 이루어낸다.
자본은 테크놀러지를 이용함으로써 무한한 힘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테크놀러지의 발달 자체가 한계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테크놀러지의 무한한 발달은 자본의 힘에 의해서며 또 역으로 자본의 무한한 발달은 테크놀러지의 무한한 발달에 의해서다. 자본 자체는 인간 노동력을 항구적으로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인간 노동력은 자본의 항구적인 착취재료이기 때문이다. 만약 상품을 소비하는 인간이 아무도 없다면 기계로부터 나온 생산물은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그런데 상품생산에 전혀 기여하지 않는 인간은 아무것도 소비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소비수단인 화폐는 반드시 그 화폐소유자가 유,무형의 상품생산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은 상품생산을 기계로 대체함으로써 인간을 상품노동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기술적으로 상품노동의 노예로 만든다. 이 노예는 생산의 노예일 뿐만 아니라 소비의 노예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생산은 소비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자본세계에서 테크놀러지는 착취의 최후, 최고의 수단이다. 자본은 테크놀러지에 의해 끊임없이 새로운 직업들을 만들고 새로운 시장을 만든다. 여기서 인간은 끊임없이 생산하고 소비하도록 내몰린다. 혹은 자본은 어떤 형태로든 인간으로 하여금 생산하고 소비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인간이 어떤 형태로든 생산하지 않는다면(직업이 없다면) 그는 소비도 할 수 없을 것이고 따라서 기계도 멈출 것이기 때문이다. 자본은 끊임없이 생산의 새로운 분야와 새로운 시장을 개척한다. 개척을 위해 전지구를 사냥하는 자본은 테크놀러지의 힘에 의해 인간의 정신영역을 생산의 분야와 식민지-시장으로 삼을 수 있게 되었다. 향후 몇십년 내 나로-로봇이 인간 뇌신경망을 돌아다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자본이 활개치는 곳에서는 이미 인간은 자본의 생산지이자 식민지였다.
사실 최고의 기계는 자본 그 자체다. 왜냐하면 잠시도 중단없이 상품을 생산하고 소비하게 만드는 것은 자본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자본-기계는 사회 전체를 공장으로 만든다. 상품사회는 상품을 끊임없이 생산하고 소비하는 일련의 공정(operation) 단계를 갖추고 있는 공장이다. 자본-기계는, 맑스의 말을 인용하자면, "공장건물 전체를 차지하는 하나의 기계적 괴물(monster)"로서 "악마적(demonic) 힘"을 발휘한다.
자본-기계가 인간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매트릭스}에서 인공지능은 '인간'을 필요로 한다. 만일 인공지능이 순수하게 에너지원만을 필요로 했다면 말썽많은 인간 대신에 소나 돼지를 생체에너지원으로 삼는 것이 훨씬 더 편리할 것이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이 '인간'을 필요로 하는 데에는 또다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아마도 매트릭스가 인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일 것이다. 매트릭스는 테크놀러지의 세계이며 그 세계가 유지되고 또 더욱 발달하기 위해서는 지능적이고 의식있는 종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매트릭스]에서 인종은 매트릭스를 더욱 발달시켜 주는 요소가 된다. {매트릭스 2편}에서 우리는 이 점을 보게 된다. 매트릭스 자체가 진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이라는 노예를 통해서다. 물론 매트릭스 속에 있는 인간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상품으로부터 진화해 온 자본-기계는 앞으로 더욱 진화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 노동력이라는 착취재료에 의해서일 것이다. 인간은 순수하게 테크놀러지 자체를 발달시키는 것이 아니다. 사실은 인간이 테크놀러지를 발달시키도록 강제당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인간은 이 사실에 대해 대개 눈을 감는다.
4.
네오 러타이트는 두 부류가 있다. 첫번째 부류는 첨단문명을 거부하고 외딴 곳으로 떠나는 자들이다. 그들을 비겁한 은둔자라고 부를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들이 첨단문명과 싸우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은 첨단문명을 거부할 수 있는 용기를 보여 준다. 그러나 자본은 천당까지라도 쫒아가 그들을 포획하려 할 것이다. 네오 러타이트의 두번째 부류는 유나바머처럼 폭력적인 방법으로 기계문명에 도전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과감하지만 무력해 보인다. 왜냐하면 그것은 기계문명 그 자체의 근거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그 표면만을 살짝 건드리는 것인데 그것은 기계문명에 대한 그들의 두려움을 표현해 줄 뿐이기 때문이다.
맑스는 자본의 운동을 '철의 법칙'이라고 불렀다. 자본의 세계 속에서 자본의 운동을 벗어나거나 그 법칙을 거역할 수는 이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맑스는 동시에 그 법칙은 영원한 것도 절대 보편적인 것도 아니라고 본다. 자본주의는 인류 역사의 한 특수한 시기에 불과하며 이 시기 이전이나 이후에 그 법칙은 더 이상 작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자본주의를 지배하는 '철의 법칙'은 역으로 해석될 수 있다. 즉 그 법칙은 자본주의를 영원히 보존시키는, 자본주의에 대한 긍정의 법칙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무너질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에 대한 부정의 법칙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매트릭스는 '철의 법칙'을 지니고 있는 강고한 감옥이다. 모피스의 말처럼 우리는 실제 "냄새를 맡지도 맛을 보지도 감촉할 수도 없는 감옥" 속에 있다. 우리의 오감은 '자본'에 잡혀 있다. 우리의 감성, 행동 나아가 의지까지도... 사이퍼가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먹는 장면은 바로 이것을 보여 준다. 사이퍼는 그 자리, 그 맛, 그 냄새, 그 음악 모두를 받아들인다. 그래서 그는 "현실이란 네 개의 다른 철자로 이루어진 한낱 말일 뿐"(Real is just another four-letter word)이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사이퍼다. 우리는 사이퍼처럼 "현실을 잊고", 상품세계 속에서 "부자가 되고 싶고", "중요한 인물"이기를 원한다. 마치 "배우처럼"(Shit). 그것이 비록 감옥 속에서일 지라도 감옥을 감옥으로 모른다면 아무 상관이 없지 않겠는가?! 사이퍼의 말대로 "모르는 것이 약이다". 모피스는 이 감옥을 "네 마음을 위한 감옥"이라고 말했다. 사이퍼가 스스로 매트릭스를 현실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자본은 우리의 마음 한 가운데에 자리잡은 채 우리를 움직인다. 우리는 자본의 식민지다. 때문에 우리가 이 식민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의 마음을 구출해야 한다. 사이퍼는 매트릭스 바깥에서 돼지죽 따위를 먹어야 하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의 몸은 매트릭스에서 벗어나 있지만 그의 마음은 여전히 거기에 잡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모피스는 "네 마음이 현실을 만든다"고 말한다. 이것은 어떤 관념론적인 맥락에서 해석될 수 없다. 왜냐하면 모피스는 네오에게 "현실의 사막"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문제는 현실에 대한 각자의 태도다. 그 태도에 따라 현실은 각자에게 다른 의미를 띤다.
마음은 몸을 통해 나타난다. 마음의 싸움은 몸의 싸움으로 표출된다. 매트릭스에 대항하기 위해 네오는 무술 훈련을 한다. 이 훈련의 목적은 무엇인가? 모피스는 훈련 중에 네오에게, "마음이 자유로울 수 있으면, 몸이 따를 것이다", "마음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는 네 자신을 비워야 한다"고 말한다.
동양에서 무(武)는 수양의 방법이다. 수양은 몸과 마음을 닦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의 근원적 대상은 몸과 마음이다. 하지만 무의 우선 대상은 몸이다. 그것은 몸은 구체적인 것이고 마음은 추상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은 몸이란 구체 속에 자리잡고 이 구체를 통해 표현되기 때문에 마음을 그 자체로 닦기란 매우 힘든 일이다. 그러므로 무는 몸을 수련함으로써 동시에 마음을 갈고 닦는다. 그러나 몸의 수양이 반드시 마음의 수양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몸의 수양 정도가 반드시 인격의 정도를 나타내는 것은 아닌 것이다. 몸의 수련이 마음으로 가지 못할 경우 몸의 수련은 수양이 아니라 창(戈)의 수련이 되어 버린다. 무(武)자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이 창 과(戈)는 전쟁을 뜻한다. 이 창이 자신의 몸과 마음으로 향하지 못할 때 그것은 자신과 타인의 피를 부르는 도구가 된다. 그러므로 무는 반드시 몸을 통하여 마음으로 가야 한다. 무는 내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모든 것을 과감히 쳐부수는 것이다. 내 몸을 창으로 만들어 나의 마음을 무찔러야 하는 것이다. 마음이야말로 싸워야 하는 세계다. 왜냐하면 마음 바깥의 세계가 이미 마음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매트릭스는 마야(maya)다. 그것이 우리의 마음을 온통 차지하고 있다. 마야에 의해 지배받는 마음은 우리의 몸을 지배한다. 우리의 감각과 의지와 행위 모두 이 마야, 매트릭스에 잡혀 있는 것이다.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와지려면 마야로 가득 찬 자기 자신을 버려야 한다. 그것은 자기자신과의 싸움이며 동시에 그것은 매트릭스 전체와의 싸움이다. 창이 마음 속의 마야, 매트릭스를 쳐낼 때 무(武)는 이제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그 마야, 매트릭스를 그치게(止) 만든다. 무(武)자를 이루고 있는 이 나머지 한 부분인 그칠 지(止)는 평화를 뜻한다. 무(武)는 전쟁(戈)과 평화(止)의 변증법이다. 전쟁과 평화라는 모순관계가 무를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무는 끝이 없는 과정이다. 매트릭스가 존재하는 한 말이다. 열반이란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매트릭스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열반의 말뜻은 '벗어남'이다)다. 그러나 열반은 이제 시작에 불과한 하나의 단계일 뿐이다. 이 단계에서 전쟁은 이제 비로소 진정한 전쟁이 된다.
이 마야를 맑스는 물신숭배라고 불렀다. 맑스의 관점에서, 상품세계는 물신의 세계이며, 이 세계 속의 인간은 자신의 몸과 마음을 상품에 저당잡혀 있다. 맑스의 {자본}은 이 마야와의 투쟁의 산물이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죽을 때까지 {자본} 집필에 매달렸다. {자본}을 집필하면서 그는 '자본'과 처절한 싸움을 벌여야 했다. {자본} 집필은 '자본'과의 죽음을 건 내기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언제나 돈의 무서운 공격을 받던 맑스는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우연찮게 생긴 돈을 마구 탕진해 버리기도 했다. 그런 행동은 대가를 치러기 마련이었다. 그와 그의 가족은 몇배나 더 심각한 지경에 빠지곤 하였다. {자본}은 궁핍과 희생의 산물이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맑스가 그것을 어느 정도는 의도했다는 느낌마저 든다. 마치 삶을 스스로 벼랑으로 내몲으로써, 그 극단의 자리에서 자신의 집필 대상인 '자본'의 실체를 볼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마야와의 싸움은 자신의 존재를 건 싸움이다. 이 싸움에서는 기존의 자신의 마음을 무찌러지 못하면 이길 수 없다. 그리고 기존의 그의 몸도 이길 수 없다. 그의 기존의 마음과 몸은 그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시 인용하면, "진실을 볼 수 없도록, 네 눈위에 놓여 있는 세계"의 것이다. 매트릭스, 마야로부터 갇혀 있는 마음과 몸을 완저히 무찌리기 위해서는 곧 그 마음과 몸을 완전히 죽여버려야 한다. 네오는 에이전트들과의 싸움 과정을 통해 이 점을 깨달아 간다. 그러나 결코 그 극한에까지는 가지 못한다. 그러다 마침내 303이라고 적혀 있는 아파트 문에서 죽게 된다. 깨달음은 바로 그 순간에 이루어진다. 열반의 순간인 것이다. 그리고 예수처럼, 사흘이 아니라, 약 3초 후에 부활한다. 이제 그는 마야로부터, 매트릭스로부터 벗어났다. 그의 몸과 마음은 이제 더 이상 매트릭스의 것이 아니다. 그 순간 매트릭스의 모든 '철의 법칙'은 한순간에 무너지고 만다. 그리고 그 법칙들을 오히려 자기의 것으로 삼아 버린다. 그러나 진정한 싸움은 이제부터다. 그 이전까지의 싸움은 갈등과 회의 및 두려움이 뒤섞여 있는 가운데서 벌이는 수동적인 싸움이었다(죽어라 도망치는 네오를 보라). 그러나 죽음을 통해 부활한 네오는 이제 매트릭스 그 자체와 싸울 수 있다. 오라클의 예언은 실현되었다. 오라클은 네오에게 "너는 일자(the one)가 아니다. 더 많은 것을 배웠어야 했다. 어쩌면 다음 생애에서는 몰라도"라고 말한다. 그 말 그대로 네오는 죽음을 통해 더 많은 것을 배웠고 새로운 생애에서 일자가 된다. 여기서 문제는 다시 마음이다. 오라클은 위의 말 앞서 네오에게, 너는 자신이 일자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묻는다. 이 물음에 네오는 "나는 모르겠다"고 답한다. 여기서 네오가 모르는 것, 더 알아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오라클의 방 앞에서 네오는 마음으로 스푼을 구부리고 있는 아이를 보게 된다. 아이가 네오에게 스푼을 주자 네오도 아이처럼 마음으로 스푼을 구부려 보려고 하지만 되지 않는다. 아이는, "스푼이 구부러지지 않는 것은 그것이 단지 그것 스푼일 뿐이기 때문이다. 내가 스푼을 구부리는 것은 {여기에} 있는 것이 스푼이 아니라 오직 내 마음만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네오에게, "자신을 스푼에 접속시켜라. 스푼이 되어서 너 자신을 구부리라"고 한다. 이 이야기 또한 관념론적(혹은 실재론적)인 맥락에서 이해해서는 안된다. 네오의 스푼-되기는 네오의 일자-되기와 동일한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다. 내가 나 아닌 다른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나라는 존재를 부정할 수 있어야 한다. 동시에 나는 다른 존재일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나중에 트리니티는 네오에게 말한다: "중요한 것은 그(모피스)가 믿는 것이나 또 심지어 오라클이 믿는 것도 아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네(네오)가 믿는 것이다.) 이 나(我)는 이미 매트릭스에 잡혀 있는, 따라서 그 자체 매트릭스의 한 요소를 이루고 있는 감옥, 마야다. 그것은 이 나들을 통해 유지된다. 이 마야에 갇힌 나에 대한 부정 없이는 나는 다른 존재가 될 수 없다. 우리는 자신을 죽인 전태일을 기억한다. 그는 노동자로서의 자신, 자본의 한 요소로서의 자신을 불태워버렸다. 그는 자신이 되돌아오기 위해서 죽는다고 말했다.
부활은 죽음을 전제로 한다. 맑스가 노동자에게 궁극적으로 요구한 것도 바로 이것이었다. 노동자가 다른 모든 계급뿐만 아니라 계급으로서의 자신의 존재도 폐지할 때 비로소 혁명은 완수되는 것이다. 노동자의 위대함은 바로 여기에 있다. 즉 죽을 수 있다는 것, 자기 존재에 대해 근원적으로 부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는 자본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노동자가 자신의 존재를 철폐하지 않는 한, 자본은 계속 살아남을 것이다. 사람들이 상품생산을 넘어서지 않는 한, 자본은 계속 힘을 발휘할 것이다. 사회가 자본-공장으로 존재하는 한, 자본-기계는 계속 돌아갈 것이다. 역사적으로 자본에 대한 노동자의 싸움은 때로는 승리하고 때로는 패배하기도 했다. 그러나 승리했을 때조차도 노동자의 승리는 미완의 승리로 머물렀다. 왜냐하면 노동자는 계급으로서 계속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도 있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자기 존재에 대한 부정의 과정을 이루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노동자를 대표하는 당들은 권력을 획득하면서 권력기관이 되었는데 그것은 자본의 위장된 모습이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교훈을 찾을 수 있다면, 나는 그것이 "매트릭스와의 싸움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생각한다.
5.
남은 이야기.
일자(the One)에 대해: {매트릭스} 제1편과 제2편을 통털어 보면 모두 세 종류의 일자가 나온다. 첫번째 종류의 일자는 매트릭스 그 자체다. 매트릭스는 하나의 전체로서 신이다. 그것은 절대자이며 감옥이다. 그것은 장막이며 마야다. 이에 대해서는 위에서 모두 언급했다. 두번째 종류의 일자는 네오다. 네오는 매트릭스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일자다. 제2편을 보면 네오는 '불규칙'의 산물임이 밝혀진다. 네오는 프로그램 과정 중에서 발생할 수 있는 하나의 오류, 말하자면 불량품인 셈이다. 불규칙이란 통제할 수 없는 어떤 것을 뜻한다. 매트릭스를 골치아프게 만드는 것은, 제품생산에서 피할 수 없이 나오는 약간의 에러처럼 얼마간의 불규칙이 존재한다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네오의 프로그램 중 어디에서 그런 오류가 일어나는 지를 알 수 없다는 데에 있다. 때문에 불량품으로서 매트릭스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네오가 일자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결국 매트릭스 내의 다른 인물들 모두 일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왜냐하면 네오처럼 그들에게도 어떤 불규칙이 내재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네오의 일자로서의 성격은 모든 이들에게 잠재되어 있는 혹은 조금씩 표출되는 불규칙에 있다. 이 불규칙이 일자로 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매트릭스가 유일하게 프로그램화시킬 수 없는 어떤 근본적인 것이 있음을 암시한다. 제2편에서 그것은 사랑으로 나온다. 세번째는 제2편에 나오는 스미쓰다. 그는 이제 더 이상 매트릭스의 에이전트가 아니다. 그는 이제 매트릭스로부터 자유롭다. 더구나 자기복제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마이더스의 손과 비슷하게 그는 누구에게도 손만 대면 그를 자신으로 만들 수 있다. 그것은 동일시의 능력을 보여 주는데 마치 다른 모든 상품들에 대해 보편적인 상품인 화폐와 같다. 화폐는 일자로서 다른 모든 상품과 교환될 수 있다. 즉 다른 모든 상품들은 화폐화될 수 있다. 상품들은 화폐라는 일자를 통해 모두 동일시되는 것이다. 하지만 화폐의 동일시의 기능과 스미쓰의 동일시의 기능은 어떤 차이점이 있어 보인다. 동일시의 능력으로 보면 둘 다 일자다. 그 둘 모두 자신 이외의 것들을 자신과 똑같이 만들어 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화폐는 항상 자신 이외의 것들 곧 다른 무수히 많은 상품들의 존재를 전제한다. 화폐는 다른 상품들이 있음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화폐들만 존재한다면 화폐는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다. 화폐의 일자로서의 성격은 다자를 전제한다는 것이다. 마치 왕이 신민을 전제하는 것처럼. 반면 스미쓰는 모든 이들을 자신과 완벽하게 똑같이 만들어 버리려고 한다. 모두가 스미쓰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스미쓰들만 있게 될 것이다. 스미쓰의 일자로서의 성격은 전체주의적 획일화를 생각나게 한다.
사랑에 대해: 네오의 부활은, 예수의 부활과는 달리, 세속적인 사랑을 통해 일어난다. 그를 죽음으로부터 깨어나게 하는 것은 트리니티의 키스였다. "너는 죽을 수 없어, 네오. 내가 널 사랑하니까." 지극히 통속적으로 보이는 이 대사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트리니티가 그의 죽음 앞에서야 처음으로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기 때문이다. 그 이전까지 트리니티는 계속 갈등하고 있었다. 오라클의 예언에 따르면 그녀가 사랑하게 될 인물은 일자다. 그녀는 네오를 사랑한다. 그러나 자신이 사랑하는 네오가 과연 일자인 지에 대해 그녀는 확신하지 못한다. 만일 네오가 일자가 아니라면 그녀의 사랑은 헛된 것이 되어 버릴 수 있다. 이것이 그녀가 계속 사랑을 고백하지 못하는 이유다. 그녀는 네오를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사랑하게 되지만 그것은 네오가 일자라서가 아니다. 하지만 일자를 사랑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그녀의 사랑의 감정을 계속 억누른다. 이 때문에, 네오가 자신이 일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고 있었던 것처럼, 그녀도 자신의 사랑을 믿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 더 나아가 그것은 혁명이란 대의 앞에서 사랑은 기꺼이 희생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자기-기만이다. 네오의 죽음 앞에서 비로소 그녀는 그 관념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그를 그 자체로서 사랑한다는 것을 믿게 되는 것이다. 이 믿음으로부터 네오는 깨어난다.
믿음에 대해: 믿음은 계산의 영역과는 다른 영역이다. 불규칙과 에러의 원인이 아무리 정밀한 분석을 통해서도 밝히지지 않는 것은 그 원인이 그 분석을 넘어 있기 때문이다. 영화 {매트릭스}는 한편으로는 기계의 논리와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논리를 대립시킨다. 기계의 논리는 근본적으로 수학적 논리인 반면 인간의 논리는 마음의 논리다. 트리니티가 사랑과 혁명을 저울질 할 때, 즉 그 두 관계를 계산하려고 할 때 그녀는 기계의 논리를 따른다. 네오의 죽음 앞에서 그녀는 비로소 자신의 마음을 따른다. 결국 우리는 혁명이 마음으로부터 일어난다는 것을 본다. 자본-기계가 상품을 생산할 때 잘 계산되지 않는, 잘 계획되지 않는 요소가 있다. 노동자가 그것이다. 노동자는 인간이기 때문에 자본의 요소로 머물기를 원치 않는다. 이 때문에 자본은 그들을 끊임없이 궁핍하게 만듦으로써 그들 스스로가 자발적으로(자유롭게) 상품생산의 노예가 되게 하려고 한다. 인간을 궁핍하게 만듦으로써 인간적 욕망은 동물적 욕망으로 되었고, 동물적 욕망이 인간적 욕망이 되어 버렸다. 가끔 주위에서 인간의 욕심, 욕망이 문제라는 말을 듣곤 한다. 그러나 인간의 욕심(망)은 문제의 출발점이 아니라 문제의 결과점이다. 현재 우리의 욕망은 과잉되어서가 아니라 과소하기 때문에 문제다. 자본-기계는 인간의 욕망을 오로지 의식주와 생식의 욕망으로 축소시켜 버렸다. 그것이 자본-기계가 인간의 마음을 다루는 방식이다. 사이퍼는 맛있는 음식 앞에 기꺼이 자신의 인간다움을 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 억압된 욕망은 분출될 수 있다는 것, 노예의 욕망을 벗어버릴 수 있다는 것, 노예이기를 그칠 수 있다는 것, 혁명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 들을 믿을 때 그것들은 일어난다. 전태일이 되돌아올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가 산화할 수 있었겠는가! 혁명의 원동력은 인간의 인간에 대한 믿음과 사랑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