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詩, 나는 이렇게 썼다 ■
내 마음의 인사동
이 동 훈 (시인)
2010년 1월엔 눈이 유난히 많이 내렸다. 서울 지역은 백 년 만의 폭설이
란다. 눈 치우는 일은 엄두도 못 내고 하늘 보고 땅 보고 그냥 그렇게 서 있
을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 엄살로 들리진 않는다. 눈이 잘 내리지 않는 대구
에서도 눈송이 꼴을 제법 갖춘 것이 수차례나 지나갔다. 전에 없이 흔해진
눈이지만 눈에 관해서 떠올릴 만한 게 별로 없다는 것은 매사에 미적지근
한 태도와 남의 말을 건성건성 넘겨듣는 버릇 때문일 것이다.
이런 내게도 2002년 벽두에 내린 눈은 꽤나 인상 깊었나 보다. 그해「인
사동 가던 날」을 끼적거렸던 게 지금 이 글을 쓰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날 서울역으로 마중 나온 것은 폭설이었다. 한 치의 여유 없이 매몰찼
던, 좀처럼 써지지 않던 자기소개서처럼 바로 앞을 가리던 폭설이었다.
눈을 털며 들어선 식당, 국물 한 술에 입천장을 데었다. 우라질, 재수 옴
붙은 인생에 시빗거리라도 찾고 싶었을 게다, 그때는, 기다리는 게 일이고
견디는 게 전부였던 시절, 끓던 속도 곧 시들해졌다.
벼린 칼날 같은 눈발 속, 짐 부리다 발목 잡힌 차량의 경적으로 들썩하는
어둠 속을 다시 걸었다. 기록적인 폭설도, 전구 한 알에 어른거리는 후줄근
한 옷가지도, 쪼그려 앉거나 서성거리는 사내도, 그저 데면데면했다.
인사동 가는 길은 아예 눈에 묻혔다. 약속에 대어 가지 못하고 들어앉은
여관 주점에도 눈이 내렸다. 입 안의 쓰라림은 어디인지 모르게 자꾸 번지고,
술 탓인지, 눈 탓인지 통점마저 흐려졌다. 쌓인 눈을, 쌓인 도수를 생으로 버
티며, 쓸데없는 눈 걱정으로 훌쭉해진 볼을 자꾸 비벼대던 날이 있었다.
- 졸시,「 인사동가던날」전문
2002년 겨울, 민예총에서 주관했던 교원 연수가 인사동에서 있었다. 지
방에 있던 나는 후배 교사 한 명과 함께 상경해서 인사동 어느 여관에서 일
주일 간 투숙을 했다. 연수 기간 내내 눈이 내렸는데 사십 년만의 폭설이라
는 말을 들었다.
연수 마지막 날엔 도종환 시인의 강의가 있었다. 그분도 눈 때문에 강의
시간에 겨우 댈 수 있었다고 했다. 주점에서 뒤풀이를 가졌던 기억이 나는
데 무슨 이야기들이 오갔는지 그저 깜깜하기만 하다. 다만 도종환 시인이
이런저런 말끝에 ‘건사한다’는 표현을 몇 번 쓴 것이 기억에 남아 있다.
‘건사한다’는 표현의 주인공이 실제로는 다른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어쨌
든 그때의 분위기와 함께 ‘건사’라는 단어가 주는 생경한 느낌이 지금도 오
롯하게 살아 있다.
그날 밤, 후배는 일찍 곯아떨어졌다. 술기운이 아직 미치지 않은 탓인지,
일찍 깬 탓인지 알 수 없으나 그만 맨송맨송해진 나는 메모지에 낙서 몇 줄
을 남겼다. 아마 그 순간에도 눈이 하염없이 내리고 있었을 게다. 몇 번을
고쳐 쓰는 과정을 거쳤으나「인사동 가던 날」의 기본적인 틀은 그때 완성된
것이다.
위 시에서는 연수 받으러 온 나 자신을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입성한 허
구적 화자로 대치해 놓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취업을 앞둔 젊은이들이 끙
끙 앓아가며 자기소개서를 써서 내지만 번번이 튕겨져 나오기 일쑤이다.
면접 보러 오라는 연락조차 뜸해지면서 울화를 터뜨리기도 하고 끝내 자포
자기의 상태로 내몰리기도 하는 젊은 한때를 나는 용케도 피해 갔다. 그럼
에도 이러한 일이 남의 일 같지 않은 것은 가까이는 친지나 벗의 이야기이
고 조금 멀다하더라도 나와 무관할 수 없는 이웃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졸업 후 취업을 고민하던 친구가 있었다. 벌써 십오륙 년이 훌쩍 지난 일
이긴 하다. 그 친구가 거제도 어느 학교에 면접을 보러 가게 되었을 때 동
행을 하게 되었는데 몹시 추웠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거제도에 도착
해서 친구가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이발소였다. 자기 딴에는 최대한 용모를
단정하게 해서 면접관의 눈에 들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친구가 학교 면접
실로 들어가고 나는 운동장 한쪽에 서서 몇몇 아이들이 공을 차고 있는 것
을 내내 지켜보고 있었다. 귀가 얼얼할 정도로 추운 날이어서 좀처럼 나오
지 않는 친구가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한참 뒤에 나온 친구는 별 말이 없었
다. 지푸라기도 잡는 심정으로 낯선 도시까지 왔다가 아무 소득도 없이 돌
아가야 하는 마음이 오죽했을까. 달리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막막함을 견
뎌야 했던 친구의 처지도 위 시에 알게 모르게 투영되었을 것이다. “ 기다리
는 게 일이고 견디는 게 전부였던” 혹독한 시절을 지난 그 친구는 지금 부
산의 모 고등학교에 재직하고 있다.
다시 작품의 배경이 된 그날로 들어가 보자. 눈이 몰아치는 새벽녘 서울
역에 내려선 촌놈 둘은 남대문 시장 근처를 배회했다. 아직 이른 시간임에
도 생계를 위해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에 적이 놀라기도
했을 것이다. 식당에서 순대국밥을 시키고 앉았는데 급하게 밥을 말고 있
는 사람들은 바깥의 눈이 그리 반갑지 않은 내색이었다. 밥벌이에 지장을
주기 십상인 눈은 어쩌면 가난한 이웃에겐 “벼린 칼날” 같은 존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러나 취업을 위해 상경한 화자에겐 날품을
팔기 위해 “쪼그려 앉거나 서성거리는 사내”는 특별한 존재가 아닌 “그저
데면데면”한 존재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 데면데면하다는 것은 어
려운 한때를 같이 묻어가는 동류의식의 표현인 셈이다.
화자는 아직 인사동에 도착하지 못했다. 인사동은 지금까지의 고달픔을
보상해 줄 약속의 장소일 수도 있지만 폭설이 그리로 가는 길을 막고 있다.
안 그래도 자신에게 결코 우호적이지 않은 삶을 힘겹게 헤쳐 나가려는 자
를 폭설이 한 번 더 주저앉히는 꼴이다. 그렇지만 눈이 주는 이미지가 마냥
무겁기만 한 것이 아니기를 내심 기대한다. 조금 더 억지를 내면 살아온 날
과 살아갈 날에 대한 생각으로 “훌쭉해진 볼을 자꾸 비벼대던” 화자의 모습
이 조금은 가벼우면서 일면 아름답게 보이기를 바란다. 열심히 사는 삶도
중요하지만 그 못지않게 반성하는 삶이 중요하고, 무겁기만 한 것보다는
낭만적인 구석이 있는 것이 훨씬 삶을 여유롭게 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바로 앞을 가리던 폭설” 속의 화자는 인사동에 뒤늦게 갔을 수도 있고,
가는 것을 아예 단념했을 수도 있다. 정작 인사동에 가고 안 가고는 그의
인생에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여기를 벗어나고
플 때 막연하게 그리게 되는 세계의 이름이 바로 인사동일 수도 있다. 그러
니 작품 속의 그도, 현실의 나도 또 다시 인사동 가는 날을 꿈꿀지 모른다.
지금껏「인사동 가던 날」에 이러쿵저러쿵 둘러대기는 했지만 솔직히 고
백해야겠다. 애초에 시작詩作에 대한 고민이 없기야 했겠는가마는 더 많은
부분은 쓰다 보니 어느새 그냥 그렇게 되어 있었다고.
뒤늦게 ‘건사하다’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니, ‘제게 딸린 것을 잘 보살
피고 돌보다’로 되어 있다. 내 삶이, 내 시가 그랬으면 딱 좋겠다.
이동훈 시인
* 2009년 월간《우리詩》로 등단.
* 영남대 대학원 국어교육과 졸업.
* 현재, 대구 시지고등학교 재직 중
* hunii70@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