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CI |
G002+AKS-KHF_13BC30C6D0C6B0D1202X0 |
생몰년 |
? ~ 1202(신종 5) |
시대 |
고려 중기 |
본관 |
미상 |
활동분야 |
변란 >민란주모자 |
[상세내용]
배원우(裵元祐)에 대하여
미상∼1202년(신종 5). 고려의 민란 주모자.1202년(신종 5) 경주에서 신라의 부흥을 표방하는 민란이 일어났을 때 낭장동정(郞將同正)으로서 이에 참여하였고, 그 당시 고부(古阜)에 유배되어 있던 전장군(前將軍) 석성주(石成柱)를 찾아가 모주(謀主)로 세우려 하였다.그러나 석성주가 거짓으로 이를 승낙하고 군수 유정(惟貞)에게 밀고함으로써 잡혀 죽음을 당하였다. 이후 경주의 민란은 운문산(雲門山) 및 울진‧초전(草田)의 민란과 결합되어 3군을 편성하고 스스로 정국병마(正國兵馬)를 칭하면서 인근의 여러 주군(州郡)을 위협할 정도로 강성하였으나 다음해에 대장군 정언진(丁彦眞) 등에 의하여 진압되었다.
[참고문헌]
高麗史高麗史節要農民‧賤民의 亂(邊太燮, 한국사 7, 국사편찬위원회, 1973)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역대인명록 / 배중손(裵仲孫).
역대인명록 / 배중손(裵仲孫)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BC30C911C190D1271X0 |
생몰년 |
? ~ 1271(원종 12) |
시대 |
고려 후기 |
본관 |
미상 |
활동분야 |
군인 >장군 |
[상세내용]
배중손(裵仲孫)에 대하여
미상∼1271년(원종 12). 고려 원종 때의 장군.서반의 장군인 동시에 가장 유력한 삼별초의 지휘관이었던 까닭에 항쟁이 계속되는 동안 수령으로 추대된 인물이다.배중손이 역사에 뚜렷이 부각되는 것은 삼별초의 대몽항전 이후부터이며 그 이전의 경력은 자세하지 않다. 단지 임연(林衍) 부자 계열에 속하는 무인으로 대몽 강경파의 선두에 서서 비타협적 항전의 계속을 주장한 인물로 추정될 뿐이다.몽고를 방문하고 개경에 돌아온 원종이 출륙환도(出陸還都)를 단행하고 삼별초에 대해서는 강화도를 철수하여 개경에 돌아올 것을 명령하였다. 삼별초가 이를 거부하자 왕은 강제로 해산명령을 내렸는데, 이에 대하여 삼별초는 원종을 폐하고 승화후(承化侯) 온(溫)을 새 왕으로 옹립하고 새 정부를 수립하여 강한 저항을 시작하였다.배중손 등은 본토와의 교통을 차단하고 귀족 고관의 가족을 포함한 섬 주민들과 병사의 이탈을 엄중히 방지하였다.또 도내에 있는 몽고인을 베어 단호한 대몽항전태도를 보였다. 그리고 강화도에 보관된 국고를 접수하고 귀족 고관의 가족들을 인질로 삼았다. 배중손 등의 지도로 이들은 새 정부 수립 3일 후에 진도로 본거지를 옮겼다.《고려사》의 기록은 수비병의 탈주와 민심의 동요로 인하여 삼별초가 강화도를 포기한 것처럼 전하고 있으나 이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이른바 심입해도(深入海島)는 역대 대몽항쟁책에 있어 최고 최후의 전략이며 배중손은 이를 단호하게 실천하였을 뿐이다.진도에 본거를 설치한 삼별초는 도내에 방비의 성곽을 구축하고 웅장한 궁전을 설치하여 장기 항전의 태세를 굳혔다. 이 소식은 본토에도 전달되어 전라도‧경상도의 주민들과 멀리 개경의 관노들이 이에 호응하여 동조하였다.또 삼별초는 해상으로 수송되는 세공(稅貢)을 노획하여 재정에 충당하였다. 개경에서는 참지정사 신사전(申思佺)을 전라도토적사(全羅道討賊使)에 임명하여 토벌하게 하였으나 성과가 없었다.또한 고려는 단독으로는 진도의 삼별초를 진압할 능력이 없었으므로 몽고와 연합하여 공략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하였다.고려군의 지휘관은 김방경(金方慶)이며 몽고군의 지휘관은 처음에는 아해(阿海)였으나 뒤에는 흔도(欣都)로 바뀌었다. 흔도는 몽고 왕 세조(世祖)의 조서를 배중손에게 전달하여 항복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배중손은 몽고군이 철수하면 전라도를 자기의 영토로 삼아 몽고에 내부(內附)하겠다고 대답하였다.배중손의 이 제안은 앞서 자비령 이북 서북면 60여성을 들어 몽고에 항복한 최탄(崔坦)의 행위와 같은 것이라고 해석하는 견해도 있으나, 사실은 작전상의 시간적 여유를 얻기 위한 전술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고려와 몽고의 연합군이 진도 공략에 여러 번 실패하자 이듬해(1271) 5월 홍다구(洪茶丘)가 몽고의 대군을 이끌고 출동하여 김방경‧흔도의 휘하에 있던 연합군과 합세하여 격전 끝에 간신히 진도를 함락시켰다. 이리하여 삼별초의 새 정부 군왕인 승화후 온은 홍다구의 손에 죽고 배중손도 이때 전사한 듯 그뒤의 소식은 알 수 없다.그러나 삼별초의 여당은 진도 함락 이후에도 제주도로 본거지를 옮겨 김통정(金通精)을 지휘관으로 삼아 2년간이나 더 항전을 계속하였다.
[참고문헌]
高麗史元史三別抄와 그의 亂에 就하야(金庠基, 震檀學報 9‧10‧13號, 1938‧1939‧1941)高麗の三別抄について(池內宏, 史學雜誌 38―9, 1926)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역대인명록 / 배정지(裵廷芝).
역대인명록 / 배정지(裵廷芝)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BC30C815C9C0B1259X0 |
자 |
서한(瑞漢) |
호 |
금헌(琴軒) |
일명 |
배공윤(裵公允) |
생몰년 |
1259(고종 46) ~ 1322(충숙왕 9) |
시대 |
고려 후기 |
본관 |
달성(達城) |
활동분야 |
무신 >무신 |
부 |
배영(裵瑩) |
[상세내용]
배정지(裵廷芝)에 대하여
1259년(고종 46)∼1322년(충숙왕 9). 고려시대의 무신. 초명은 배공윤(裵公允), 자는 서한(瑞漢), 호는 금헌(琴軒).본관은 달성(達城).민부전서(民部典書)를 지낸 배영(裵瑩)의 아들이다.10세에 금위(禁衛)에 들어가 도지(都知)가 되었다.1270년(원종 11) 강화에서 개경으로 환도할 때 나이 11세로 말고삐를 걸머지고 왕을 호종하여, 그 공으로 대정(隊正)이 되었다.1291년(충렬왕 17) 별장(別將)으로 만호(萬戶) 인후(印侯)를 따라 합단적(哈丹賊)을 연기에서 크게 무찔렀다.이때 유시(流矢)가 턱뼈를 관통하는 중상에도 불구하고 분전하여 전과를 거둠으로써 중낭장(中郞將)에 특진하였다.그뒤 인후를 따라 원나라에 들어가 원제로부터 용사라는 칭찬을 받고 백금을 하사받았다. 뒤에 충청‧전라 양도 찰방이 되어 지방의 관기를 바로잡고 외로운 사람들을 위로하였다.충선왕 때 호군(護軍)이 되었으며, 사농시(司農寺)와 유비창(有備倉)의 일을 관장하였다.1318년(충숙왕 5) 대호군으로서 탐라존무사(耽羅存撫使)가 되어 성주와 왕자를 추방하고 반란을 일으킨 제주민(濟州民) 사용(使用)‧김성(金成)‧엄복(嚴卜) 등을 토벌하였으며, 돌아와 밀직부사가 되었다.1321년 옥사가 일어나 귀양갔다가 풀려나온 뒤에는 거문고와 바둑으로 여생을 보냈다. 체구가 크고 무략(武略)에 뛰어났다. 나주의 초동사(草洞祠)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高麗史高麗史節要
[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
본과(本貫:姓鄕) 이란 무엇인가?
본관(本貫:姓鄕) 이란 무엇인가?
- 우리들은 서로 인사를 하게되면, 처음 묻는 말이 성이 무엇이요? 그 다음, 본관이 어디시요? 하고 묻는다. 그러면 예 “성산 배(星山裵)가” 입니다. 하고 대답을 한다.
이 때, 배(裵)는 성이고 성산(星山)은 본관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 본관이란 어떤 것인가?
▶ 본관(本貫)의 뜻은, 사전에는;
성(姓)의 출신지. 관향(貫鄕)·본적(本籍)·관적(貫籍)·선향(先鄕)·본(本)으로 기록되어 있다.
~ 사람들은 대개 혈연·지연에 매여 살고 있는데, 성이 부계(父系)의 연결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본관(本貫)은 조상의 거주지를 나타낸 것이다. 그러므로,
『친족(親族)은 성과 본관이 동일해야 같은 혈연(血緣)』인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성(姓)은 같으나 본관이 다르면 계통(系統)이 다르다는 뜻이다.
~ 한국의 성과 본관제도는, 중국 '한식 씨성제도'(漢式氏姓制度)를 들여와 모방한 것에서 비롯되었는데, 본관을 사용한 시기는 고려 초(918년) 부터라 한다. 신라시대는, 왕실의 3성(朴·昔·金)과 6부촌의 6성(李·崔·鄭·孫·裵·薛)이 처음으로 생겼으나, 본관 사용 전(前) 시대였으며, 고려 초기부터 지배층과 호족에게 많은 성들이 사성되면서 본관사용이 시작되어 점차 제도화 되었다 한다.
~ 중국에는 문헌으로 내려오는 성씨관계 자료가 많은데 반해, 한국의 성씨 자료는 "고려사열전" 과 고려시대 "묘지(墓誌)" 등 일부 자료밖에 없어, 그 흐름을 찾는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특히 고려 시대에서 군현(郡縣)제도의 개편작업과 함께, 공신과 지방 토호들에게 각각 성과 본관을 나누어 준 기록이 있어 마치 본관이 국가에 의해 정해진 것 처럼 보이기도 한다.
~ 본관은, 지금도 준용되고 있는 '본적'의 의미도 가지고 있었다. 과거에도 현재나 마찬가지로 국정 수행의 수단으로 국민을 파악하는데는, 항상 혈연적·지연적인 본적(관)을 정책수단으로 이용했던 것이다. 이러한 본관제도는 씨족들을 결속시키고, 나아가 그들의 지위를 유지하는데 큰 몫을 했다. 이런 기능은 고려 후기 때 부터 많이 약화되여 조선 후기로 접어들면서 본관은 오로지 성의 고향(姓鄕:姓貫)으로만 인식되게 되었다.
[註]: 본관(本貫)은, 성의 고향 표시로 그 씨족들의 고유한 전통이다.
이 전통은, 시류(時流)에 따라, 후손들 편의대로 고치(改貫)고, 바꾸(易貫)고 할 수 있는 그런 宗事(종사)가 아니다.
~ 인위적으로 본관을 바꾸(易貫)거나, 고치(改貫)는 것은, 그 씨족의 조상을 환부역조(換父易祖)하게 되고, 근본을 뒤 흔드는 결과로 연결되어, 예로부터 윤강(倫綱)을 어지럽히는 패덕(悖德)이고, 패륜(悖倫)으로 규율(規律)하고 있는 것이다. 근래에, 배씨 일각에서 "배씨 본관을, 통합을 위해 바꾸자" 는 기만성 논리로 전통을 휘젓는 상식밖의 일들이 벌어지고 있음은 심히 유감이다.
~ 청사(靑史)에 선양(宣揚) 될 엄숙한 종사에서, 사성(賜姓) 받은지 2천년이 흘러간 지금의 싯점에서, 盆城裵氏ㆍ 星山裵氏ㆍ 達城裵氏ㆍ 興海裵氏ㆍ 慶州裵氏 등으로 수 백 년을 이어온 '전통 본관'들을 "경주배가로 통일? 하자"는 주장은, 과연 그 진정성이 건전한 상식을 바탕한 내용이며, 진솔한 경조돈목(敬祖敦睦)이 되고, 숭조상문(崇祖尙門)하는 정신인가? 를 묻지 않을 수 없다.
~ 우리 첨종(僉宗)은, "星山裵氏" 선사(先史)를 수 백 년 동안 가꾸고 모셔온, 모든 조선(祖先)님과 앞으로 이어 갈 영원한 후손에게,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와 '덕목'이 과연 무엇인지? 냉철한 이성으로 판단하여야 할 것이다.
역대인명록 / 흥해군(興海君) 배전(裵佺).
역대인명록 / 흥해군(興海君) 배전(裵佺)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2BC30C804FFFFD1361X0 |
생몰년 |
? ~ 1361(공민왕 10) |
시대 |
고려 후기 |
본관 |
흥해(興海) |
[상세내용]
배전(裵佺)에 대하여
미상∼1361년(공민왕 10). 고려 말기의 인물. 본관은 흥해(興海).궁비(宮婢)의 소생으로서 충혜왕의 총애를 받아 호군이 되어 기무(機務)를 장악하였으며, 뒤에 군부판서에 올랐다.1339년(충숙왕 복위 8) 조적(曺頔)의 난 때 왕을 호종(扈從)한 공으로 일등공신이 되어 1345년(충목왕 1) 6월에 흥해군(興海君)에 봉해졌다. 뒤에 원나라에 들어가 강윤충(康允忠)과 함께 덕녕공주(德寧公主: 忠惠王妃)의 총애를 받아 권력을 쥐고 비행을 일삼았으며, 행성이문(行省理問)이 되었다.1351년(공민왕 즉위) 이제현(李齊賢)이 권성(權省)이 되자 행성옥(行省獄)에 갇혔으나 공민왕이 그를 석방하여 백성들의 비난을 받았다.
[참고문헌]
高麗史高麗史節要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역대인명록 / 달성군 배천경(裵天慶).
역대인명록 / 달성군 배천경(裵天慶)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BC30CC9CACBDU9999X0 |
생몰년 |
? ~ ? |
시대 |
고려 후기 |
본관 |
달성(達城) |
활동분야 |
문신 >문신 |
부 |
정지(廷芝) |
[상세내용]
배천경(裵天慶)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고려 후기의 문신. 대구배씨의 시조.원종의 호종신인 밀직부사(密直副使) 정지(廷芝, 초명은 公允)의 아들이다.1321년(충숙왕 8) 당옥(黨獄)이 일어나 아버지가 죽림방호(竹林防護)로 장류(杖流)당할 때 아버지를 대신하여 형을 받기를 주청하였다가 마침내 함께 향리로 돌아갔다.1354년(공민왕 3) 체제정비를 위한 대대적인 인사개편이 단행될 때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졌다.1356년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를 거쳐 지추밀원사에 올랐는데, 이때 동북면이 수복되어 그 경영이 중요하게 되었으므로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에 특차되었다.2년 뒤 판추밀원사(判樞密院事)에 오르고 뒤에 동경윤(東京尹)을 지냈다.
[참고문헌]
高麗史高麗史節要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역대인명록 / 배검(裵儉).
역대인명록 / 배검(裵儉)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2BC30AC80FFFFU9999X0 |
생몰년 |
? ~ ? |
시대 |
고려 후기 |
본관 |
미상 |
활동분야 |
무신 >무신 |
[상세내용]
배검(裵儉)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1380년(우왕 6) 전라도 원수 지용기 휘하에 있었다. 이때 왜적이 처음에는 상주에 있었는데, 그가 가서 적을 정탐하기를 자청하였다. 배검이 적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왜적을 선주로 달아나게 하였다.
[참고문헌]
高麗史節要
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
역대인명록 / 화당공(花堂公) 배규(裵規).
역대인명록 / 화당공(花堂公) 배규(裵規)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2BC30ADDCFFFFU9999X0 |
자 |
중원(仲員) |
생몰년 |
? ~ ? |
시대 |
조선 전기 |
본관 |
성산(星山) |
활동분야 |
문신 >문신 |
[관련정보]
[고려문과] 우왕(禑王) 8년(1382) 임술(壬戌) 우왕 8년 임술방(壬戌榜) 병과(丙科) 3위
[상세내용]
배규(裵規)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중원(仲員). 호는 화당(花堂). 대사간(大司諫)을 지냈다.세종(世宗) 때 사람이다. 아들 배한(裵閑)과 배윤(裵閏)이 모두 과거에 올라 부자(父子)가 연이어 간원(諫院)에 들어가니 사림(士林)이 아름답게 여기었다.
[참고문헌]
新增東國輿地勝覽 제28권 慶尙道 星州牧양촌선생문집國朝文科榜目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역대인물록 / 분성군(盆城君) 배원룡(裵元龍).
역대인물록 / 분성군(盆城君) 배원룡(裵元龍)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BC30C6D0B8E1U9999X0 |
생몰년 |
? ~ ? |
시대 |
고려 후기 |
본관 |
미상 |
활동분야 |
관료 >관리 |
부 사혁(斯革)
[상세내용]
배원룡(裵元龍)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고려 말기 우왕 때의 관리(官吏). 김해 배씨의 시조.가락군(駕洛君) 사혁(斯革)의 큰아들이다.우왕 때 권신인 염흥방(廉興邦)의 양자가 되어 계림부윤(鷄林府尹)이 되었으며 침입한 왜구를 토벌하였으나 토색과 치부로 오명을 남겼다.벼슬은 병부상서에 오르고 분성군(盆城君)에 봉하여졌다.
[참고문헌]
高麗史金海裵氏譜
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
역대인명록 / 정절공(貞節公) 배극렴(裵克廉).
역대인명록 / 정절공(貞節公) 배극렴(裵克廉)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BC30ADF9B834B1325X0 |
자 |
양가(量可) |
호 |
필암(筆菴) |
호 |
주금당(晝錦堂) |
시호 |
정절(貞節) |
생몰년 |
1325(충숙왕 12) ~ 1392(태조 1) |
시대 |
고려 후기 |
본관 |
성산(星山) |
활동분야 |
변란 >공신 |
부 |
배현보(裵玄輔) |
외조부 |
이천년(李千年) |
공신호 |
회군공신(回軍功臣) |
공신호 |
개국공신 |
[상세내용]
배극렴(裵克廉)에 대하여
1325년(충숙왕 12)∼1392년(태조 1). 고려말 왜구 토벌에 공을 세운 조선의 개국공신.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양가(量可). 호는 필암(筆菴)‧주금당(晝錦堂). 문음(門蔭) 출신. 위위시소윤(衛尉寺少尹) 배현보(裵玄輔)의 아들이다. 외조부는 성주이씨 이천년(李千年)이다.진주의 수령으로 있을 때 선정을 베풀었으며, 상주목사(尙州牧使)‧계림윤(鷄林尹)‧화령윤(和寧尹) 등 외직을 담당할 때 선정을 베풀었다.1376년(우왕 2) 진주도원수(晉州都元帥)로 진주에 침략한 왜구를 반성현(班城縣)에서 크게 격파하고, 이듬해 우인열(禹仁烈)을 대신하여 경상도도순문사(慶尙道都巡問使)가 되어 왜구의 방어에 공을 세웠으며, 이때 병영이 있는 창원 인근의 합포(合浦)에 왜구방어를 위한 축성을 주관하여 완성하니, 조선시대 경상우도병마절도사영(慶尙右道兵馬節度使營)의 번성(藩城)이 그것이다.한편 1378년 경상도원수로서 욕지도(欲知島)에서 왜구를 대파하고, 같은해 겨울 경상도도순문사로서 하동과 진주에 침략한 왜구를 추격하여 사주(泗州)에서 크게 이겼다. 이듬해 진주 반성현의 대혈전(大血戰), 울주전투와 청도전투‧사주전투 등에서 크게 활약한 뒤, 정치적 성장을 거듭하여 1380년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올랐다.1388년의 요동출병 때 우군의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우군도통수(右軍都統師)인 이성계(李成桂)의 휘하에 참여하여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을 도와주고, 1389년(창왕 1) 7월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의 요직을 맡았다. 그해 10월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로 승진하고, 하정사(賀正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1390년(공양왕 2) 평리(評理)로서 회군공신(回軍功臣)에 추록되었으며, 같은해 양광도찰리사(楊廣道察理使)가 되어 한양 궁궐의 조성을 감수하였다. 이어 3군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의 중군총제사(中軍摠制使)가 되어 도총제사(都摠制使) 이성계의 병권장악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같은해에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어 개경의 내성(內城)을 축성하는 총책을 맡고, 1392년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올랐다.그해 7월 문하우시중(門下右侍中)으로 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과 함께 공양왕을 폐하고 이성계를 추대하여 조선의 건국과정에 중요한 소임을 담당하였다. 이어 개국공신 1등이 되고 성산백(星山伯)에 봉하여졌으며, 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이 되고, 1392년 11월 죽어 고려와 조선 두 왕조에 걸쳐 정승이 되었다.태조의 계비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 소생인 이방석(李芳碩)이 1392년 8월 세자로 책봉되는 데 관여하였다 하여 뒤에 태종에 의하여 폄하(貶下)되었다. 아들이 없으므로 누이의 외손인 안순(安純)이 주상(主喪)이 되었다. 시호는 정절(貞節)이다.
[참고문헌]
高麗史高麗史節要太祖實錄新增東國輿地勝覽國朝人物志
출처: 한국학중안연구원
역대인명록 / 배운태(裵運泰).
역대인명록 / 배운태(裵運泰)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2AD6DD604FFFFU9999X0 |
생몰년 |
? ~ ? |
시대 |
고려시대 |
본관 |
미상 |
활동분야 |
관료 |
[상세내용]
배운태(裵運泰)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918년(고려 태조 1) 8월 신해(辛亥)일에 배운태(裵運泰), 적철(狄鐵) 등과 함께 공2등을 지정받았고, 각각 금은기(金銀器)와 금수기(金繡綺), 피욕(被褥)과 능라(綾羅)와 포백(布帛)과 곡미(穀米)를 차별 있게 하사받았다.
[참고문헌]
高麗史朝鮮氏族統譜
역대인명록 / 배총규(裵悤規).
역대인명록 / 배총규(裵悤規)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784CD98AE38D0918X0 |
생몰년 |
? ~ 918(태조 1) |
시대 |
고려 전기 |
본관 |
미상 |
활동분야 |
변란 >모반인 |
[상세내용]
배총규(裵悤規)에 대하여
미상∼918년(태조 1). 고려 태조 때의 모반자. 태조 1년 9월 같은 청주인인 배총규(裵悤規), 계천(季川: 전남 장흥)사람 강길(康吉)‧아차귀(阿次貴), 매곡(昧谷: 충북 회인)사람 경종(景琮) 등과 반란을 일으켜 청주로 도망하고자 하였다.그러나 복지겸(卜智謙)이 이 사실을 태조에게 밀고함으로써 잡혀 죽게 되었다. 이에 청주인인 순군낭중(徇軍郞中) 현율(玄律)이 경종의 매형이 후백제와의 접경지대인 매곡성주 공직(龔直)임을 들어 이들을 살려줄 것을 청하였다.그러나 마군대장군(馬軍大將軍) 염상(廉湘)이 이를 반대하여 결국 죽음을 당하였다.이 모반사건의 영향으로 현율은 병부낭중으로 관직이 바뀌었으며, 그해 10월 청주에서 진선(陳瑄)‧선장(宣長)형제의 모반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청주인들에 의한 모반사건은 궁예(弓裔)집권시인 904년 청주인 1,000여호를 철원으로 이주시킨 데 대한 불만에서 비롯된 것이라 추정된다.
[참고문헌]
高麗史高麗史節要高麗建國期의 淸州勢力과 王建(金甲童, 韓國史硏究 48,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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