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葆光의 수요 시 산책 49)
먼 곳에서부터
먼 곳에서부터
먼 곳으로
다시 몸이 아프다
조용한 봄에서부터
조용한 봄으로
다시 내 몸이 아프다
여자에게서부터
여자에게로
능금꽃으로부터
능금꽃으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몸이 아프다
- 김수영(1921-1968), 시선집 『꽃잎』, 이영준 엮음, 민음사,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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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일상적으로 듣는 말인 트라우마Trauma는 외부에서 일어난 충격적인 사건으로 인해 발생한 신체적, 정신적 외상外傷을 말합니다. 전쟁이나 자연재해, 대형사고와 같은 대규모 참사에서부터 타인에게 당한 폭력이나 강간 등 신체적, 성적, 정서적 학대 모두 트라우마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트라우마는 심각한 사건을 직접 경험하거나 목격한 후 나타나는 불안장애의 일종인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와 같은 정신장애를 유발하기도 하는데요, PTSD 환자는 꿈이나 생각으로 사건을 반복적으로 재경험하며 그로 인한 극심한 불안과 공포, 무력감, 수면장애 등에 시달리게 되어 정상적인 일상생활이 힘들어집니다. PTSD 증상은 사건 이후 몇십 년이 지나 나타날 수도 있으며 특히 어린 시절 트라우마를 경험한 사람이 다시 새로운 충격을 받으면 PTSD와 같은 증상이 쉽게 발생할 수 있습니다.(이상 <다음백과사전>에서 인용) “포항 영일만 앞바다에서 140억배럴에 달하는 석유와 가스가 매장돼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물리 탐사 결과가 나왔다”는 엊그저께 정부의 발표는 처음이 아니지요. 1990년대 이후로 잊을만하면 반짝 등장하는 뉴스입니다. 정치권에서는 뜬금없다는 반응도 나왔다고 전하는데, 제 주변의 반응은 거의 나뉘어서 ‘또?’와 ‘이번에는!’이었습니다만 새롭게 나온 반응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그건 ‘지진’이었습니다. 이제는 지열발전소 시험 가동 중 발생한 유발지진이라고 결론이 난 포항지진 이후 시민들에게서 자주 나오는 한걱정이 지진인 것은 알게 모르게 다들 경중의 차이는 있겠지만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습니다. 포항지진 이후 매물로 내놓았어도 팔리지 않는 집을 그대로 두고 타지로 이사간 시민도 일부 있었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일부 시민들은 극심한 트라우마 증상을 겪었고 지금도 여전히 겪고 있는 이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습니다. 기우일까요. 모르죠. 포항지진이야 유발지진으로 결론이 났더라도 재해는 언제 어떻게 일어날지는 알 수 없으며 우리는 여전히 지진대 위에서 살고 있으니까요. 트라우마로 인한 외상이 언제 나타날지 역시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만 몸에 새겨진 상처는 몸이 먼저 말합니다. “다시 내 몸이 아프”지요. 제 경험으로는 그랬습니다. 몸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갑자기 아파 왔습니다. “먼 곳에서부터/먼 곳으로” “조용한 봄에서부터/조용한 봄으로” “여자에게서부터/여자에게로” “능금꽃으로부터/능금꽃으로……” 일상은 다시 원위치하여 돌아가더라도 한 번 새겨진 상처는 늘 “다시” 어김없이 돋아났습니다. 치유가 되었다고 다 아무는 상처는 없겠지만 그래도 치유가 된 상처는 그나마 나았지요. 참사는 대부분 처리 과정에서의 미숙에서 일어납니다. 사건이나 사고로 끝날 수도 있는 재난이나 재해를 제대로 대비하거나 대처하지 않아서 일어난 일입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고 우습게 이야기하지만 소를 잃었어도 다시 소를 제대로 키우려면 외양간은 고쳐야 합니다. 일상이 '참사에서부터 참사로', '재난에서부터 재난으로' 이어지는 일이 반복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이후에라도 고쳐진 제대로 된 외양간을 가져야 합니다. (20240605)
첫댓글 나이가 들어가니 몸이 문득문득 사인을 보내오는데요, 김수영도 그래서 이런 시를 썼나 봅니다. 잘 읽었습니다!
시 소개하면서 시집으로 시선집을 올렸습니다. 김수영 시인의 시를 읽고 싶어도 전집은 부담스러울 독자들이 편하게 구매해서 읽을 수 있는 시집으로 시선집이 좋아 보였습니다. 시선집에는 23편의 시 외에 엮은이가 집필한 작가론과 작품론이 실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