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운거사님의 글이 뜸하군요. 가운거사님은 선원에 입주하셔서 일기를 쓰셨답니다. 일기에 그날그날 일어났던 선원의 일, 선생님의 언행을 기록해놓으셨지요. 잔잔하고 감동적인 가운거사님의 글을 기다리며 또 생각나는 것을 적어 보겠습니다.
남천동 선원은 건물 앞에 있는 잔디밭이 좋았지요. 오십평에서 백평쯤? 잔디도 참 조밀하게 잘 자라고 있었습니다. 뜰에 넓은 잔디밭이 있는 것도 드문 일이었지만 그 잔디밭에서 광안만이 그대로 보였기 때문에 '선원'하면 '선생님', 그리고 '잔디밭'을 연상할만큼 잔디밭은 참 좋았습니다. 선원이 지금은 고기를 파는 집이 되어 있지만 잔디는 여전히 남아 있어 입주했을 때, 정진할 때의 추억을 되살릴 수 있습니다.
제가 입주했을 때인 1982년은 이미 선배 학인들이 잔디밭에서 잡풀을 뽑는 수행을 지극히 한 후여서 풀이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종종 잔디밭을 뒤지며 풀을 뽑았지요. 선방에 앉아 있다 무료해지면 잔디밭으로 나가 풀을 찾는 것이 좋은 소일거리였지요. 해가 질 때면 잔디밭에 방석을 깔고 바다를 바라보며 앉는 일도 많았습니다. 밤에는 멀리 외항선의 불빛을 바라보며 앉았구요. 다행이 모기가 없어 여름철에는 해진 후 시원한 잔디밭에서 정진하는 일도 많았습니다. 참 낭만적으로 수행했지요. 수행을 했다면 말이지요.
어느날 몇 명이 잔디밭을 뒤지며 풀을 뽑고 있는데 선생님이 나오셨습니다. 한 쪽 다리를 끄시며 다가오셨죠. 그리고 저에게 물으셨습니다.
"최군, 무엇을 하고 있나?"
"예, 풀을 뽑고 있습니다."
"그래? 나는 허공을 뽑고 있는 줄 알았다."
제가 준비가 되어 있는 수행자였다면 그 때 계합이 이루어졌을 겁니다. 그러나 저는 구만 팔천리 떨어져 있었죠. 무늬만 수행자였지 엉터리였지요. 아니 수행자의 무늬조차 갖추지 못했죠.
도반 중에 김진옥선생님이란 분이 계셨습니다. 배재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셨죠. 생명의 실상이란 책을 보시며 불교에 빠지셨고 저보다 일년 먼저 보림선원에 등록을 하셨습니다. 교사에게는 여름, 겨울방학이 있어 김진옥선생님도 철야정진을 빠지지 않고 참석하실 수 있었습니다. 여름 철야정진을 하던 어느 날 잔디밭에서 그 분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 때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김진옥선생님은 서둘러 선원안으로 들어가셨고 백봉선생님이 의자에 앉아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 선생님께 말씀을 드렸죠.
"선생님, 비가 옵니다."
"비가 오는 것도 아니고! 오지 않는 것도 아니고!"
그 말씀에 김진옥 선생님은 쓰러져 선생님 발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 삼배를 드렸습니다. 그날 저녁에 인가를 받으셨죠. 운파라는 호를 받으셨습니다.
이십대에 저는 이기영박사님을 모시고 불교를 배웠습니다. 한 때 달마대사의 혈맥론, 관심론을 배웠는데 그 글에 '스승이 없이 깨닫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는 내용이 있어 '왜 그리 스승이 중요한가?'하고 의아해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그 의아함을 기억합니다. 선원에서 운파선생님의 일을 겪으며 스승의 가치를 알았습니다. 스승은, 진정한 선지식은, 그 자리를 알고 있는 수행자는 타고 있는 불과 같습니다. 그 옆에 있다보면 어느 새 자신에게도 불이 붙는 것이죠. 그러나 그런 스승이 없이는 스스로 불을 일으켜야 하니 참으로 어려울 수 밖에 없습니다. 선지식을 잠깐 친견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 분의 불과 훈기로 욕망에 젖어 있는 자신을 말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 분이 그 자리를 드러나는 순간, 불꽃이 튀는 순간 옆에 있어야 합니다. 이제 그 큰 불은 사라졌지만 그 불을 이어받은, 인가를 받으신 제자분들이 작은 불로 계십니다. 그 불에 가까이 가시기를, 그리고 어느 날 불이 붙어 활활 타오르시기를 기원합니다.
첫댓글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운초거사님!
스승님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시는 군요.
항상 불옆에 가까이 있겠습니다.
운초거사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스승을 소중하게 여기는 전통이 사라진 것은 우리 시대의 큰 슬픔이자 아쉬움입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않을 만큼 사람들은 스승의 존재를 귀하게 여겼습니다. 지금은 학생들을 재미있게 해야 강의를 할 수 있는 엔터테인먼트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선배도 이제는 스승을 대신하는 존경의 대상이라기 보다 경쟁의 대상, 논쟁의 파트너가 되었습니다. 깨달음이 논쟁의 대상이 되다보니 후배가 선배를 논박하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후배가 선배와 더불어 토론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존경심이 사라진 대화가 문제인 것입니다.
진리에 대한 외경이 사라진 자리에는 무의미한 지식경쟁만 남게 됩니다. 사태가 이러다보니, 학인들은 진리를 설명할 수는 있어도 진리와 더불어 사는 것이 무엇인지 느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불교를 가르치는 사람도 진리와 더불어 사는 기쁨을 잃어 버렸습니다. 수행의 세계에는 자조와 회의가 만연합니다. 이 모두 스승을 등진 업보입니다. 스승은 진리를 익히며 살아가는 생생한 이정표이기 때문에, 스승을 모시고 공부하면 진리에 대한 신심이 일어납니다. 우리 보림선원이 잘못된 물줄기를 돌이키는 진리의 수행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운초 거사님! 글이 항상 아름답군요
글이 아름다운것은 운초거사님 마음이
아름답기 때문 인가요? ㅎㅎ
선원은 운파선생님처럼 깨달은 사람이 나는 곳이었지요. 우리 서울선원에서도 우뚝한 학인이 많이 나오시길.... 많이
자극받아 아마도 ...아마도.... 잠 못잘 분들 참 많을텐데. 운초거시님의 말씀처럼 스스로 태우는 공부길에 스승을
가까이 하여 많은 공덕이 있기를 빕니다.
가운거사님, '운초거시'가 뭡니까? 기분나쁘게! '거사'나 '거지'를 잘못치신 것 같은 데... 그렇다고 고치진 마세요. 그럼, 이 댓글이 붕 뜨니까. 그냥 두고 반성하시면 되요.
'운초거지'라,,, 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