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1번 자료는 위키백과에서 옮겼습니다. 마태복음의 계보에 26대가 유다로 나와 있어서 '아몬'으로 백과사전 내용을 수정하는 수고(?)를 거쳐 바른 자료를 가져왔습니다.
언뜻 보아도 누가복음의 계보와 마태복음의 계보에 큰 차이가 있습니다. 자세히 보면 누가복음의 계보에서 다윗 이후의 계보는 다윗의 작은 아들로 이어져서 아브라함 부터 계산해도 예수는 55대 후손이 됩니다. 마태복음에는 다윗에서 솔로몬으로 이어지는 왕의 계보를 따르고 있습니다.
왜 성경은 이렇게 서로 다른 두 가지의 계보를 보여주고 있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에 의해 동정녀로 탄생했지만 그 남편은 요셉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의 아버지가 누가복음에는 '헬리'이고, 마태복음에는 '야곱'입니다.
마태복음은 요셉의 부계 혈통을 따랐고, 누가복음은 마리아의 모계 혈통을 따랐다고 하는 것이 두 번째 참고자료에 나오는 설명입니다. 그것은 마리아도 윗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다윗왕의 작은 아들의 후손이다. 즉, 마리아도 왕의 가문 출신이라는 설명이 가능합니다.
<참고자료1: 위키백과의 계보>
<참고자료2>
예수 그리스도의 두 갈래 계보
출처> http://www.thewordofgod.kr/%EC%98%88%EC%88%98-%EA%B7%B8%EB%A6%AC%EC%8A%A4%EB%8F%84%EC%9D%98-%EB%91%90-%EA%B0%88%EB%9E%98-%EA%B3%84%EB%B3%B4.htm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는 마태복음 1:1-17과 누가복음 3:23-38에 나온다. 두 갈래의 계보가 있다고 해서 이상하다고 여길 필요는 없다. 누구나 두 갈래의 계보, 아버지 쪽과 어머니 쪽이 있다. 예수님의 아버지는 하나님이므로 친부 쪽 계보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예수님의 사회적인 법적 위치는 사회에서 인정하는 아버지, 요셉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서는 예수님의 두 갈래 계보가 있는 것이다. 이 두 계보에 관해 두 가지 문제점이 제기되었다. 첫 번째 문제는 마태복음 계보(마태복음 1:16)에 나오는 구절과 상관이 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즉, 요셉은 야곱의 아들이라고 나오는데 누가복음의 계보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누가복음 3:23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위는 헬리요 그 위는 맛닷이요….”
여기서 야기되는 문제는 이 계보가 요셉의 계보라고 믿는 데서 나온다. 하지만 이는 요셉의 계보가 아니라 예수님의 계보이다. 사회의 눈으로는 예수님께서 요셉의 아들이고, 요셉은 헬리의 아들이고 헬리는 맛닷의 아들이다. 마태복음에는 요셉의 아버지가 헬리가 아니라 야곱이라고 했으므로 예수님은 요셉 쪽 계보를 따른 헬리의 자손이 아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누구의 계보를 통해서 헬리의 자손이 되는 걸까? 대답은 물론 마리아 쪽이다1.
이밖에 또 다른 논쟁의 근원이 되는 부분은 마태복음 1:17에 나오는 세대 계산이다.
마태복음 1:17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더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14라는 숫자가 세 번 나오기 때문에 열네 세대를 각각 찾아볼 생각보다는 마흔 두(42) 세대를 한꺼번에 찾을 생각부터 한다. 진정 말씀에서 마흔 두대라고 한 적이 있는가? 없다. 대신 말씀은 각각 열네 세대씩 세 무리로 갈라놓았다. 이 세 무리는 과연 어떻게 나누었졌는가? 말씀 속에 나오는 대답은 명확하다.
첫 번째 무리는 아브라함에서 다윗까지이다.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아브라함, 이삭, 야곱, 유다, 베레스, 헤스론, 람, 아미나답, 나손, 살몬, 보아스, 오벳, 이새, 다윗.
두 번째 무리는 다윗에서 바빌론 억류까지이다. 많은 사람들이 말씀에는 “다윗부터”라고 하는 데도 솔로몬부터 세기 시작하는 실수를 저지른다. 성경말씀을 그대로 따르면 아래와 같다.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요”
“다윗, 솔로몬, 르호보암, 아비야, 아사, 여호사밧, 요람,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므낫세, 아몬, 요시야”
(여기서 다윗은 첫 번째 그룹에도 들어가고, 또 두 번째 그룹에도 포함되는 이중 계산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예수까지 전체 대수는 41대가 된다.)
이 무리의 이름들은 모두 열네 세대의 왕들이었다. 이 무리는 다윗에서 시작해서 왕국의 실질적 마지막 왕, 요시야에서 끝난다.
세 번째 무리는 바빌론 억류부터 예수님까지로 알고있다.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더라”
여고냐4, 스알디엘, 스룹바벨, 아비훗, 엘리아김, 아소르, 사독, 아킴, 엘리웃, 엘르아살, 맛단, 야곱, 요셉, 예수님.
그렇기 때문에 말씀에서 각각 열네 세대씩 세 무리가 적혀있다면 그렇게 받아들여야함이 분명해진다. 마흔 두 세대를 찾으려고 한다면 말씀에 적혀있지 않는 것을 찾는 헛수고를 하게 되기 때문에 분명히 문제가 생길 것이다.
타소스 키울라초글루
각주
1. 마리아의 이름 대신에 남편 요셉의 이름이 나왔다고 이상하게 여길 필요가 없다. 성경에 나오는 여러 계보들을 살펴보면 확실해지지만 계보에 여자의 이름이 들어가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계보에도 마찬가지로 여자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다. 이유는 아마도 성경시대의 동양 풍습에서 기인한 것으로 본다.
2. 비록 마태복음 1:11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에” 요시야와 형제들이 태어났다고 하는 구절과, 마태복음 1:12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구절에서 여고냐의 이름이 두 번 나오지만 바빌론으로 사로잡혀 간 경계선을 앞뒤로 한 두 무리 중 한 곳에만 포함되어야 했다. 다윗의 이름이 첫 번째와 두 번째 무리 둘 다에 나오는 점과는 상반적으로 여기서 경계는 여고냐가 아니라 바빌론 억류이기 때문에 여고냐의 이름이 두 무리 중 한 곳에만 들어갔어야했다. 여고냐의 이름이 세 번째 무리에 들어간 이유는 그렇지 않고서는 둘 째 무리는 열다섯 세대, 셋 째 무리는 열세 세대가 돼 버리기 때문에 말씀과 차이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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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는 참고자료를 먼저 인용해서 성경의 예수님 계보 기록을 검토해본 것이다.
이제부터 김성수 목사의 강해로 돌아가서 그가 설명하고자 하는 내용을 검토해보자.
<예수님의 족보를 14:14:14대로 끼워 맞췄다는 얘기:>
자세히 세어보면 위의 자료에 나온 것과 같이 다윗이 두번 계산되어서 14:14:14대가 만들어지며 전체로는 42가 아닌 41대가 된다. 즉, 14:13:14대가 바른 대수 계산이다.
그러나 다윗 대에서 바벨론 이거까지 왕의 족보에는 네 왕이 빠져 있다. 20대 요람에서 21대 웃시야 사이에 (20)요람→아하시야→요아스→아마샤→(21)웃시야,
그리고 (27)요시야와 (28)여고냐 사이에 (27)요시야→여호야김→(28)여고냐로 여호야김이 빠져 있다.
다윗에서 바벨론 이거 까지 4명의 왕이 족보에서 빠져 있다. 이 4명의 왕을 계보에 넣으면 가운데에 들어가는 14대 왕의 그룹은 13+4=17이 되어야 한다. 마태복음은 아브라함에서 예수의 탄생까지 세대를 14:14:14로 짜맞추기 했다는 것이고 그것은 그 당시 David의 히브리어 자음은 숫자를 대신하고 있었으며 D(4)aV(6)iD(4) = 4+6+4 = 14라는 숫자에 맞추려고 의도한 것 같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러나 김성수 목사는 가운데 그룹의 대수가 15대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계산상의 오류로 보인다. 그리고 다윗이 예수님의 계보에서 빠지고 우리야와 그의 아내 밧세바를 개입시킨다.
우리야는 다윗의 죄를 짊어지고 죽은 예수를 상징한다고 해석한다. 밧세바가 낳아서 죽은 아기 또한 다윗의 죄가 되어 죽은 예수의 모형이라고 설명한다.
밧세바는 다윗의 구원을 위해 부정한 신부가 되었다고 해석하며, 그녀로 인해 다윗은 죄인임을 깨닫고 구원에 이른다고 해석한다. 그렇게 용서 받은 다윗에게서 솔로몬이 나온다.
이러한 해석은 죽은 아벨 대신에 셋이 나와서 아벨의 대를 잇는 것처럼 다윗이 죽인 우리야와 아기 대신에 솔로몬이 태어나 예수의 역할을 한 우리야의 대를 잇는다는 해석으로 연결된다.
여기서 인간 다윗은 죽고 우리야의 꺾어진 뼈의 공로로 우리야화 된다고 해석한다.
솔로몬은 죄인 다윗, 인간 다윗의 아들이 아니라 우리야의 자리를 잇는 우리야의 아들이 된다는 해석이다.
밧세바라는 여자는 다윗이라는 죄인 남편에 의해 약속의 후손이 끊어질 뻔한 계보에 뛰어들어, 자신이 부정한 여인이 되어서 예수라는 후손을 잇는 자로 등장한다고 해석한다.
다윗의 계보에 대한 김성수 목사의 해석은 유대의 전통인 시형제결혼법(형사취수)에 의한 혈통 잇기 전통을 다윗왕과 밧세바의 관계에 확대적용한 해석이다. 다윗이 우리야를 죽게 하고 그의 아내를 자신의 아내로 맞이한 다윗의 얘기에 시형제결혼법의 관행을 적용하여 솔로몬이 우리야의 대를 잇는 후손이라고 해석한 것은 다윗이 우리야의 동생도 아니므로 정확한 시형제결혼법의 적용은 아니다. 영적 또는 상직적 해석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김성수 목사가 다윗은 죽고 솔로몬은 우리야의 대를 잇는 자라는 해석은 다소 무리한 해석으로 보인다. 다만 김목사는 우리야가 다윗의 죄를 짊어지고 죽은 예수를 상징한다는 것과, 아기가 다윗을 대신해서 죽었다는 기록에서 만일 밧세바가 아기를 출산하지 않았더라면 다윗이 죽었을 것임을 유추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다윗의 대를 이은 후손에서 예수가 탄생하는 하나님의 계획에 중대한 차질이 생기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목사는 다윗의 계보를 다루면서 사실상 다윗의 혈통이 예수 탄생의 계보에서 배제되는 것으로 간주해버리고, (예수를 예표하는 자인)우리야의 대를 이은 솔로몬의 라인으로 계보가 이어져서 그 후손에서 예수가 탄생한 것으로 결론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