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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베르메르(1632~1675네덜란드)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알려져 있는 것이 거의 없다. 그의 작품 중 현존하는 것은 37점이다. 남은 작품만을 기준으로 놓고 봤을때 1년에 고작 두어 점정도 그림을 그렸다는 계산이 나온다(물론 전해지지 않은 작품들이 더 있을 수는 있다). 이것은 베르메르가 예술 시장을 위해서 작업했다기보다는 예술 후원자들을 위해 작업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낳게 했다. 특히 11명의 아이를 가진 대가족의 가장이 1년에 그림 2점을 그려서는 부양의 의무를 지킬 수 없으므로, 그는 그림 이외의 다른 밥벌이 수단을 가졌는지도 모른다. 그의 그림은 색조(色調)가 아주 뛰어났으며 적 ·청 ·황 등의 정묘한 대비로 그린 실내정경은 마치 맑게 개인 날 북구의 새벽 대기(大氣)를 생각나게 한다. 맑고, 부드러운 빛과 색깔의 조화로 조용한 정취와 정밀감(靜密感)이 넘친다. 초기의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의 뚜렷한 대비는 만년이 될수록 완화되었다.
<우유를 따르는 하녀> 1658년 요하네스(얀) 베르메르作 캔버스에 유채 45×47cm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베르메르(1632~1675)의 작품 중에서 의미심장하고 거창한 주제를 다룬 것은 거의 없다. 대부분의 작품은 전형적인 네델란드 가옥의 실내에 서 있는 순박한 인물들을 보여준다. 위의 그림은 인물이 들어있는 정물화이다. 이렇게 단순하고 가식이 없는 그림이 불후의 명작이 된 이유가 무엇인지 규명하기는 쉽지 않다. 명작이 된 이유중 하나는 바로 질감, 색채 및 형태들을 치밀하고 완벽하게 묘사하는 베르메르의 표현 기법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밝고 정확한 화면 속에는 고심하거나 힘들여 제작한 흔적이 없다. 형태를 흐릿하게 만들지도 않고 윤곽선을 부드럽게 만들었고 그러면서도 입체감과 견고함의 인상을 주었다. 그의 최고 걸작들을 그처럼 잊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러한 부드러움과 정확성을 불가사의하고 독특한 방법으로 결합시킨 데 있다.
<델프트市의 풍경> 1661년 베르메르作 캔버스에 유채 98×118cm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
해안, 강, 도시, 하늘, 이렇게 네 개의 수평적 부분으로 이루어진 이 그림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 중 한 작품이라고 격찬을 받았던 그림이다.
베르메르는 하늘에 많은 공간을 할애했는데 구름의 그림자 진 부분을 어둡게 표현하여 하늘의 느낌을 잘 살렸다. 강에 비친 도심 건물의 윤곽선을 부분적으로 퍼지게 표현하여, 강에 잔잔하게 부는 바람이 느껴지는 것 같다. 종전의 퐁경화는 전경이 밝고, 배경인 흐릿하게 묘사되기 마련이었다. 이 그림에선 거꾸로 멀리 배경의 건물들이 훨씬 밝고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바로 구름이 빚어낸 자연의 경이다. 전경의 하늘은 구름에 가려져 빛이 차단된 상태라 그늘 질 수밖에 없지만, 빛이 쏟아지는 뒤편의 건물들은 금빛으로 밝게 빛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가까운 경치는 선명하고 먼 배경은 흐릿해야한다는(대기 원근법) 풍경화의 상투적이고 오래된 관례를 뒤엎은 것이었다.
<화가의 아뜰리에> 1667년 베르메르作 캔버스에 유채 130×110cm 빈 미술사 박물관
인상주의 화가 르느와르가 죽기 전에 꼭 보고 싶다던 그림이다. 그림 왼쪽의 화려한 장식이 있는 무거운 커튼은 무대의 막 같은 역할을 해 관찰자를 실내로 끌어들인다. 뒷벽에 걸려있는 네덜란드 지도는 어렵게 이룬 독립에 대한 연합국가의 자부심을 나타내는데, 지도의 굴곡이 너무나도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모델로 서고 있는 소녀의 머리 위에 얹은 월계관과 오른손의 트럼펫, 왼손의 책은 역사기술을 담당하는 클리오(그리스 신화의 예술과 학문을 담당하는 여신)가 지녀야 할 상징물이다. 구성면에서 보면, 빛은 왼쪽 창문에서 들어오며, 정적인 인물이 공간의 중심을 차지하고 호화로운 정물들이 탁자에 어지럽게 놓여있다. (베르메르의 전형적인 실내장면 배열방식) 화가가 선호했던 노란색과 푸른색은 빛나는 조화를 이루고 있다.
<지리학자> 1669년 베르메르作 캔버스에 유채 52×45.5cm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미술연구소
17세기를 지배하던 열정은 '동양과 서양을 잇는 미지의 바닷길'을 찾는 것이었다. 여행과 만남과 새로운 지식을 통해 과거에는 갈 수 없었던 거리를 줄이기 위해 고향을 등지고 원하는 세계를 찾아나섰다. 세계는 결코 이전과 같지 않은 방향으로 바뀌게 된다. 베르메르처럼 고향에만 머물던 화가들까지도 변화의 낌새를 알아차리고 있었다. 그림 속 인물은 포목상이기도 했고, 측량 기사이기도 했고, 망원경 개발자이기도 했고, 베르메르 가족의 친구이기도 했던 안토니 반 레벤후크로 추정된다. 터키 카펫이 전경을 채우고 있는 이 그림에는 빌렘 블라외가 그린 유럽 해도와 헨드리크 혼디우스가 제작한 지구의가 놓여 있다. 생각에 잠긴 지리학자는 진지한 자세로 전 세계에서 유럽으로 들어오는 지리적 지식을 이용하여 세계를 포괄적으로 이해하고자 애쓰는 모습이다.
<잠자는 헤르마프로디토스>는 헤르마프로디토스가 잠자는 모습을 등신대(169cm)로 조각한 대리석 조각이다. 고대적 물건이라는 것은 알려져 있지만, 언제 누가 만들었는지 알 수 없다. 1620년 잔 로렌초 베르니니가 침대를 조각해 그 위에 올려놓은 것이 현재의 모습이다. 아름다운 여체에 살며시 드러난 남성 성기가 눈길을 끈다.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리스 신화에서 헤르마프로디토스는 헤르메스(도둑, 여행자, 상인, 전령의 신)와 아프로디테(미의 신)와의 사이에 태어났다. 이 아름다운 미소년 헤르마프로디토스는 자기가 자라서 정든 이다 山을 떠나 세상구경, 낯선 산수 구경하러 나그네 길에 올랐다. 가는 도중에 헤르마프로디토스는 호수 하나를 만났다. 호수에는 물의 요정 살마키스가 살고 있었는데, 꽃을 꺽다가 헤르마프로디토스를 보았다. 그녀는 사랑을 느꼈다. 그러나 헤르마프로디토스는 그녀를 외면했다. 하지만 살마키스는 호수로 뛰어들어, 목욕을 하는 헤르마프로디토스를 껴안고 놓아주질 않았다. 그는 집요하게 요구하는 사랑의 쾌락을 거절했다. 살마키스는 절대 이 소년과 떨어지지 않게 해달라고 신에게 기도했다. 그러자 그의 기도가 이루어져 둘은 한 몸이 되었다. 몸의 절반은 남성이고 절반은 여성인 一身兩性이 된 것이다.
<페르세포네의 납치> 1621~1622년 베르니니作 로마 225cm 보르게세 미술관
페르세포네는 제우스신과 농업의 신 데메테르의 딸이었으며 매우 아름다웠다. 그녀를 보고 반한 저승의 신 하데스가 납치해 아내로 삼았다. 데메테르는 딸이 납치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분노를 한다. 분노한 데메테르는 온 세상에 있는 대지에 가뭄과 기근을 일으켰다. 제우스신은 하데스에게 페르세포네를 데메테르에게 돌려보내라고 명령했지만 페르세포네는 저승에서 석류 하나를 먹었기 때문에 저승사람이 되어서 돌아 올 수가 없었다. 저승에서 뭔가를 먹은 사람은 누구든 지상으로 돌아 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제우스신은 페르세포네가 일 년에 삼분에 이는 지상에서 보내고 나머지는 저승에서 하데스의 아내로 살도록 중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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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 하고 생각이 깊지 않은 자는 습관적으로 자신의 불행을 남의 탓으로 돌리고
약간이라도 깨어 있는 자는 그 모든 것을 자신을 탓으로 돌리지만
완전히 깨어 있는 자는 남도 자신도 탓하지 않고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감정의 흔들림 없이 받아들이며 신과 자연의 본성을 이해하고자 한다.
ㅡ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토스ㅡ
<다윗> 1623~1624년 베르니니作 170cm 로마 보르게세 미술관
도나텔로나 미켈란젤로의 <다윗>상이 조용히 서서 생각하는 모습이라면 베르니니의 다윗상은 막 돌을 집어 던지려고 몸을 비틀고 있는 일촉즉발의 순간을 보여준다. 주름살진 이마, 그리고 잔뜩 찡그린 얼굴을 지닌 베르니니의 다비드는 동적인 동작으로 르네상스의 정체와 고전적 엄격함을 크게 뛰어 넘는 감동을 보여주는 바로크 정착의 전범(典範)이라고 할 수 있다. 미켈란젤로는 다비드의 영웅적 본성을 표현했고, 베르니니는 그가 영웅이 되는 순간을 잡아내었다.
<아폴론과 다프네> 1622~1625년 베르니니作 243cm, 로마 보르게세 미술관
태양의 神인 아폴론은 사랑의 신인 에로스(큐피트)를 어른의 무기를 가지고 논다며 꾸짖는다. 이에 앙갚음으로 에로스는 황금 화살로 아폴론을 맞추어 아폴론을 다프네를 보자마자 사랑에 푹 빠지도록 만든다. 그러나 다프네는 영원한 순결을 맹세한 물의 님프인데다 게다가 에로스에게 납 화살을 맞아 아폴론의 접근에 무감각하게 된다. 다프네는 강의 신인 그녀의 아버지에게 자신을 월계수 나무로 변신시켜 그녀의 아름다움을 없애고 아폴론의 접근을 피할 수 있도록 애원한다. 이 조각상은 에로스의 화살을 맞은 아폴론이 다네프를 쫓아가자 그녀가 월계수 나무로 변하고 있는 극적인 순간을 보여준다.
<발다키노-천개天蓋> 1633년 베르니니作 베드로 대성당
성 베드로의 무덤위로 실타래처럼 비틀어 놓은 네 개의 나선형의 기둥은 베르니니가 인간의 영혼이 천국으로 올라가는 것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지붕위 네 귀퉁이에는 조각상이 서있고 맨 꼭대기에는 황금 십자가가 빛을 발하고 있는데 십자가 끝의 높이까지가 29m다. 네 기둥안에 중앙제단이 있고 이 제단을 중심으로 네 방향으로 뻗은 홀 안에서 예배를 본다.
<성 테레사의 환희> 1652년 베르니니作, 높이350cm, 로마 산타마리아 델라 비토리아 성당 부속 코르나로 예배실의 제단
성 테레사는 16세기 수녀로 그녀가 본 신비스러운 환영을 글로 쓴 유명한 책을 남겼다. 그 책에서 그녀는 천상의 환희를 느낀 순간을 이야기하면서 주님의 한 천사가 황금으로 된 뜨거운 화살로 자기 심장을 꿰뚫자 아픔과 함께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희열로 충만됨을 느꼈다고 설명했다. 베르니니가 감히 표현하고자 한 것이 바로 이 순간의 광경이다. 우리는 그 성녀가 구름을 타고 황금빛 햇살의 형태로 위로부터 쏟아지는 빛줄기를 향해서 하늘로 올라가는 광경을 본다. 천사가 공손하게 그녀에게 다가서고 있으며 성녀는 기절한 채 황홀감 속에 빠져있다.
이 인물들이 배치된 방법이 대단히 교묘해서 이들은 제단이 제공해주는 훌륭한 틀 속에 아무런 받침도 없이 떠 있는 것처럼 보이며, 위쪽의 보이지 않는 창으로부터 광선을 받고 있는 듯이 보인다. 우리는 그때까지 미술의 영역에서 한번도 시도된 일이 없는 얼굴 표정의 격렬함이 표현되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라오콘과 두아들>의 두상과 비교해보면 그 차이점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베르니니의 옷주름 처리 방법도 그 당시로서는 아주 새로운 것이었다. 즉 고전적인 방식으로 인정되어온 품위 있는 옷주름으로 흘러내리게 하지않고 흥분과 움직임의 효과를 보다 강조하기 위해서 옷자락이 몸부림을 치듯 펄펄 날리게 했다. 베르니니의 이러한 강렬한 효과들은 얼마 안 가서 유럽 전역에 퍼져 모방되었다.
성 베드로 광장의 설계자는 잔 로렌초 베르니니이다. 베르니니는 성 베드로 대성전을 설계하면서, 가톨릭교회가 그곳을 찾아오는 모든 사람을 포용하고 있다는 뜻을 전하고자 했다. 그는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성 베드로 대성전의 돔을 머리로 두고, 반원형의 회랑 두 개를 팔로 묘사함으로써 성 베드로 대성전이 두 팔을 벌려 사람들을 모아들이는 모습을 표현하였다. 성 베드로 광장 양편에 각각 네 줄로 늘어선 토스카나식(도리아식보다 더욱 단순한 양식) 기둥 284개와 벽에서 돌출된 기둥 88개로 이루어진 베르니니의 회랑은 1656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1667년에 완공되었다. 16m 높이의 원기둥꼴 대리석 기둥 위에 있는 140개의 성인상은 베르니니의 제자들이 조각한 것이다.
<교황 알렉산드르 7세 무덤> 1678년 베르니니作 대리석과 도금한 청동, 성 베드로 대성전
베르니니의 마지막 조각 작품이다. 베르니니의 통제 아래 조수들과 함께 만들었다. 자칫 조각을 설치하는데 방해가 되었을 門이라는 건축 요소를 형식과 내용 면에서 조각과 분리될 수 없게 조각의 구성요소로 전환시켰다. 중간에 알렉산드르는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고 있다. 그 아래에 네 명의 여자 동상이 있는데 각자 교황에 의해 실행되는 미덕을 대표한다. 왼쪽에 있는 아이를 안고 있는 여성은 자비를 상징한다. 오른쪽에 지구본에 발을 올린 여성은 진실을 상징한다.
자세히 보면 여성의 발이 영국 위에 있다. 이것은 영국에서 국교회주의가 성장하는 것을 저지한다는 의미가 있다. 영국에서 성공회가 번성하여 가톨릭 신자를 탄압하자 거만해진 영국을 누르고자 모색하는 교황의 의도가 담겨있다. 원래 이 여성은 나체였지만 후에 옷을 입혔다고 한다. 나머지 뒤에 있는 두 여성은 신중함, 정의를 대표한다. 전체적으로 삼각형 구도이며 교황이 무릎을 꿇고 있어서 전체적인 조각의 높이를 낮추는 효과를 냈다. 가운데 아래에는 금박을 입힌 청동색의 ‘죽음의 해골’이 있다. 한손에 모래시계를 들고 교황을 향해 내보이고 있는데 이것은 마치 시간이 다 되었으니 자신과 함께 문을 통해서 저 세상으로 가야한다고 재촉하는 듯하다. 이렇게 베르니니는 원래 있던 문이라는 건축요소를 주제 강화에 잘 이용하였다.
세상에서의 마지막을 상징하는 죽음의 해골
진리의 여신이 왼쪽 발로 지구본의 영국을 지긋이 누르고 있다.
<예수의 성스러운 이름을 찬미함> 1683년 조반니 바티스타 가울리作, 프레스코, 로마 일 제수 예수회 교회당 천장화
베르니니를 추종했던 화가인 조바니 바티스타 가울리(1639~1709)의 천장화에서 그는 교회의 궁륭형 천장이 열려있으며 보는 사람에게 천국의 영광을 보고 있다는 환상을 주려했다. 그의 작품은 이전의 코레조보다 훨씬 무대 효과에 가깝다.
이 그림의 주제는 그리스도의 성스러운 이름을 찬미하는 것으로 예수의 이름은 교회 중앙에 금빛 찬란한 글자로 새겨져 있다. 그 주위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천사, 성인들이 황홀경 속에서 빛을 바라보고 있는데 악마와 타락한 천사들은 천국에서 내쫓기고 있다. 이 혼잡한 장면은 천장의 틀을 깨고 부수고 튀어나올 듯이 보인다. 그는 보는 사람을 혼란시키고 압도해서 무엇이 실제이고 무엇이 환상인지를 알 수 없게 만든다. 그러나 이와 같은 지나치게 장식적인 그림은 이러한 장소를 떠나면 의미를 상실한다.
<클레오파트라의 연회>1750년경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플로作 프레스코 베네치아 라비아 궁
18세기 이탈리아 미술가들은 대부분 뛰어난 실내 장식가들이었으며 치장 회반죽 세공과 대형 프레스코 벽화를 그리는 기술에 있어서 유럽 전역에 이름을 날렸다. 그 가운데 제일 유명한 사람은 베네치아 출신의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플로(1696~1770)이다. 이 그림은 티에플로에게 화려한 색채와 호화스러운 의상 묘사를 과시할 모든 기회를 준 주제인 <클레오파트라의 연회>이다. 그것은 안토니우스가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를 위해서 사치에 달한 향연을 베푼다는 이야기인데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값비싼 산해진미의 요리들이 쉴 새 없이 들어오지만 클레오파트라는 감명을 받지 않았다. 그녀는 자부심이 강한 주인 안토니우스에게 자기는 그가 지금까지 제공한 어떤 음식보다도 더 값비싼 음식을 만들 수 있다고 장담했다. 그리고 그녀의 귀걸이에서 그 유명한 진주를 떼어내어 그것을 식초에 녹여 마셨다. 티에플로의 프레스코는 그녀가 안토니우스에게 그 진주를 보여주는데 한 흑인 하인이 그녀에게 유리잔을 내밀고 있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이와 같은 프레스코는 그리기에도 재미있었을 것이며 보기에도 역시 즐겁다. 그런데도 어떤 이들은 이렇게 재치가 넘치는 작품들이 그 이전 시대의 보다 차분한 작품들보다 영구적인 가치에 있어서는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이탈리아 미술의 위대한 시대가 끝나고 있는 것이다.
<키테라 섬으로의 순례> 1717년 앙투안 바토作 캔버스에 유채, 129×194cm 루브르 박물관
그리스의 키테라 섬은 고대 비너스 신전이 모셔진 사랑의 성지이다. 이곳은 비너스(아프로디테)가 바다의 물거품에서 탄생하여 조개껍데기를 타고 파도 위를 떠돌 때 바다 아래로부터 홀연히 솟아서 비너스를 맞아주었다는 섬이다. 그리스의 서사시인 호메로스가 지은 ‘아프로디테 송가’에는 비너스 여신이 서풍의 입김을 타고 섬에 당도하자 계절의 여신 호라이가 비너스를 맞아주었다고 한다.
바토(1684~1721 프랑스)는 사랑의 섬을 순례하는 젊고 기품있는 남녀들의 사랑 이야기를 그림의 주제로 삼았다. ‘순례’라는 제목의 설명으로는 키테라 섬에 당도하여 하선하는 순간인지, 키테라 섬에서 한 나절을 보낸 청춘남녀들이 이윽고 일상으로 귀환하기 위해 배에 오르는 순간인지 구분하기가 어렵다. 다수의 등장인물로 채워진 구성은 자칫 산만해지기 쉬우나, 바토는 화면을 좌우로 나누어 배경의 명암을 구분하고, 섬의 완곡한 능선을 따라 배치된 인물들에게 사랑의 여러 성숙 단계를 할애함으로써 자연스러운 줄거리를 짜는데 성공했다.
<마담 퐁파두르> 1756년 프랑수아 부셰作 캔버스에 유채 212×164cm 뮌헨 알테 피나코텍
프랑수아 부셰(1703~1770)는 로코코 양식으로 작업한 프랑스의 화가, 판화가이다. 고전적인 주제의 전원적이고 관능적인 그림과 장식적인 알레고리로 알려져 있다. 부셰의 후원자였던 퐁파두르 후작 부인은 당시로는 불온한 사상이라고 할 수 있던 계몽사상에 관심을 기울인 것으로도 유명하다. 높은 지적 수준과 교양을 갖추고 학예보호에 힘쓴 그녀의 살롱에는 볼테르와 몽테스키외 등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현재 프랑스 대통령의 관저인 엘리제 궁은 그녀의 저택 중 하나다.
<그네> 1768년 프라고나르作 캔버스에 유채, 81×64cm 런던 월레이스 컬렉션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1732~1806프랑스)의 로코코 시대의 관능과 쾌락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 얼핏 보면 한 여성이 풀숲에서 단지 그네를 타고 있는 모습으로 보이지만 이 그림에는 수많은 재미있는 도상들이 있다.
여성의 뒤편에는 그네를 끌어주는 조금은 나이가 들어보이는 남성이 있고, 여성의 앞에는 뒤로 넘어져 여성의 치마 속을 바라보고 있는 젊은 남자가 있다. 또한 여성의 왼쪽 신발은 벗겨져 저 멀리 날아가고 있다. 젊은 남자의 머리위에는 사랑의 신 큐피드가 여성을 바라보면서 입을 손가락으로 막고 있는데, 큐피드가 손가락으로 조용히 하라고 손짓을 하는 것을 보면 그네를 타는 여성과 그 앞의 남성은 매우 비밀스러운 사랑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젊은 남녀의 비밀스러운 밀회를 적나라하지 않고도 흥미롭고 밝게 그려놓은 이 그림은 꼼꼼이 보면 볼수록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미소를 짓게 만든다.
<붉은 가오리> 1728년경 샤르댕作 캔버스에 유채 114×146cm 루브르 박물관
정물 표현이 뛰어난 샤르댕의 대표작이 <붉은 가오리>다. 이 작품은 음식을 준비하는 과정을 묘사했다. 주방 벽의 고리에 가오리가 걸려있고 요리를 하기 위해 가오리의 배는 갈라져 있다. 가오리 옆에 청동으로 된 큰 냄비가 세워져 있다. 식탁 위 굴껍질 위에 발을 딛고 서있는 고양이는 금방 뛰어나갈 것 같다. 식탁 위가 무질서하게 보이지만 그릇은 오른쪽에, 음식은 왼쪽에, 중앙에 가오리를 배치했다. 샤르댕은 실제 요리를 할 수 있는 부엌을 묘사했지만, 이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기보다는 물건들을 재배치함으로써 자신의 의도를 나타내고자 했다.
<비누 방울> 1734년 샤르댕作 캔버스에 유채 61×60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년은 자신의 비누방울 놀이에 완전히 몰입돼 있다. 하찮아 보이는 일상적 행위지만 그렇게 진지할 수가 없다. 그 천진난만한 진지함은 뜻밖에도 감상자에게 뭉클한 감동을 전해준다. 감성의 언저리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아름다운을 경험하려고 미술관을 찾고, 음악회를 가고 먼 곳으로의 여행을 꿈꾸지만. 우리 곁에 있으나 무심하게 지나치는 사물들, 그것이 그릇이든, 과일이든 시들어버린 꽃이든, 모든 사물은 미의 평등함을 지니고 있음을 잊은 채 아름다움을 일상이 아닌 특별한 공간속에서 찾으려 한다.
예술의 감상이라는 것이 모든 아름다운 것을 단지 객관적 대상으로 감상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을 통해 교감하고, 인습적인 것으로 부터 벗어나 확장된 상상력을 갖고 사물을 깊이 응시하는 총체적 행위라고 한다면, 눈을 돌려 우리 곁에 무심히 놓인 흐트러진 식탁, 빛에 반짝이는 반쯤 비운 포도주잔, 비스듬히 놓인 쿠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진 벽처럼 늘 우리 주위에서 침묵하고 있는 것들을 진심으로 바라본다면, 하찮게 여긴 사물들이 조용한 명상의 먼지를 털고 일어나 해방된 감각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니 그것이 사물에 대한 참된 인상이며 미의 발견이라 할 수 있다.
<시장에서 돌아옴> 1738년 샤르댕作 캔버스에 유채, 47×38cm 루브르 박물관
시장에서 닭을 사가지고 온 여인이 탁자에 빵 두 덩어리를 올려놓고 기대어 서 있다. 보자기에 싼 닭과 빵은 장을 봤음을 나타내며 여인이 머리에 쓴 외출용 모자와 스카프, 그리고 구두는 시장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을 가리킨다. 여인이 탁자에 기대어 선 자세는 시장에서 무거운 짐을 들고 와 힘들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인의 표정은 무언가에 정신이 팔려 있는 듯 보이는데 대화를 엿듣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 작품의 경우 화가 자신이 똑같은 그림을 4점 만들었고 현재 3점이 베를린, 오타와, 파리(루브르)에 남아있다. 이렇게 여러 점을 직접 그린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그의 그림이 인기를 얻은 것은 사실이다. 스웨덴 왕녀, 리히텐슈타인의 왕자 등 유럽 각지의 부유한 귀족이 그의 고객이 되었다.
<감사 기도> 1744년 장 밥티스트 시메옹 샤르댕作 캔버스에 유채, 루브르 박물관
귀족풍의 몽상적인 로코코 미술이 퇴조하면서 일부 화가들은 당대의 보통 사람들에게 눈을 돌리고 이야기로 엮어낼 수 있는 감동적이거나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그리기 시작했다. 샤르댕(1699~1779프랑스)은 위 그림에서 한 여인이 식탁위에 저녁을 차리면서 두 아이들에게 감사 기도를 드리라고 말하는 소박한 장면을 보여준다. 샤르댕은 이러한 서민 생활의 평온한 광경을 좋아했다. 눈에 띄는 효과나 날카로운 비유를 추구하지 않고 가정적인 정경의 시정詩情을 느껴 화폭에 담은 면에서 그는 네델란드의 화가 베르메르와 유사하며, 색채는 고요하고 은근하다.
<다이아나 상> 1779년 장 안투안 우동作 대리석 리스본 쿨벤키안 컬렉션
다이아나는 수렵의 여신이므로 화살을 손에 쥔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대리석같은 경우 인체가 받침대와 연결되는 부분이 적을 경우 작품의 견고성과 직결되므로 보통 인물의 뒷부분에 소품들을 끼워 넣으면서 그 문제점을 해결하곤 했다. 여기서는 풀이 그 역할을 하고 있는데 다이아나의 모습보다는 그 풀의 표현이 오히려 흥미롭다. 장 안투안 우동(1741~1828프랑스)은 18세기 신고전주의에 입각한 사실주의 조각의 선구자다.
<볼테르 좌상> 1779년 장 앙투안 우동作 테라코타 높이133cm LA카운티 미술관
프랑스 계몽주의를 이끌었던 위대한 사상가 볼테르(1694~1778)는 그리스 철학자의 모습으로 의자에 앉아있다. 우아하게 흘러내리는 옷, 두 손을 팔걸이에 올린 그는 상체를 살짝 오른쪽으로 틀었다. 볼테르는 프랑스의 지성사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종교적 광신주의에 맞서 평생 투쟁했던 그는 관용(tolerance) 정신이 없이는 인류의 발전도 문명의 진보도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불관용은 신의 법도 아니다. 그대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자 한다면, 순교자가 될지언정 망나니가 되지 말라.”
<조지 워싱턴> 1788년 장 앙투안 우동作 대리석 187.9cm 버지니아주 의사당
워싱턴이 대통령이 되기 전 미국 독립 전쟁을 마치고 퇴역한 장군으로서 군복을 입고 지팡이를 짚고 편히 서 있는 모습이다. 이 상의 오른쪽 외투 깃에는 단추 하나가 떨어져 나가 있다. 이는 그가 이룬 업적에 비해 의외로 느슨하고, 형식에 집착하지 않는 소탈한 성격임을 드러내 주는 치밀한 디테일이다.
<소크라테스의 죽음> 1787년 자크 루이 다비드作 캔버스에 유채 130×197cm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크라테스의 침대 발치에는 플라톤이 펜과 두루마리를 옆에 놓고서 국가가 저지르는 불법행위를 지켜보는 증인으로 말없이 앉아있다. 당시 플라톤의 나이는 겨우 29세이었는데도, 다비드는 그를 희끗희끗한 머리에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 노인으로 바꿔놓았다. 복도에는 소크라테스의 아내 크산티페가 간수들의 부축을 받고 있다. 가장 가까운 동료였던 크리톤은 소크라테스 옆에 앉아 깊은 애착과 근심어린 눈빛으로 거장을 응시하고 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꼿꼿한 자세를 조금도 흩트리지 않고 불안해하거나 후회하는 기색을 내비치지 않는다. 수많은 아테네 시민들이 그를 어리석은 존재로 매도했다는 사실조차 자신의 철학에 대한 그의 믿음을 흔들어 놓지는 못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암살당한 마라> 1793년 자크 루이 다비드作 캔버스에 유채 165×128cm 브리셀 벨기에 왕립박물관
프랑스 대혁명의 혁명가들은 자신들이 영웅시대에 살고 있으며, 그들 당대의 사건들이 그리스와 로마 역사의 여러 일화들과 마찬가지로 화가의 주목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프랑스 대혁명의 지도자 중 한사람인 마라(Marat)가 반혁명파의 젊은 여자에 의해 목욕탕에서 피살되었을 때 혁명정부가 내세우는 ‘공식화가’였던 다비드는 그를 대의명분을 위해 죽은 순교자의 모습으로 그렸다.
<알프스 산맥을 넘는 나폴레옹> 1801년 다비드作 캔버스에 유채 259×221cm 루브르박물관
역사적 기록에 따르면 1800년 나폴레옹은 말 대신 산길에 강한 노새를 타고 알프스를 넘었다고 한다. 다비드는 이 작품을 제작하면서 나폴레옹에게 직접 모델을 해달라고 청했으나 나폴레옹은 거절했다. “초상화와 내가 닮고 안 닮고는 중요하지 않다. 천재의 창의력을 발휘해서 그리면 된다.”고 했다. 그림 왼쪽 하단 바위에 보나파르트(나폴레옹)이전에 알프스를 넘은 두 영웅, 한니발과 샤를마뉴의 이름이 새겨진 것도 나폴레옹의 제안일 가능성이 크다.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1850년 폴 들라로슈作 캔버스에 유채 289×222cm 루브르 박물관
우울한 표정의 나폴레옹이 탄 노새를, 그곳 지리를 잘 아는 지역 주민이 고삐를 잡고 끌어주고 있다.
<나폴레옹1세의 대관식>1805~1807년 다비드作 캔버스에 유채 621×979cm 루브르 박물관
예식중 나폴레옹은 교황이 머리에 왕관을 씌우려는 순간 잽싸게 그것을 빼앗아 자기머리에 썼다. 지켜본 참석자들이 망연자실한 사이 자기 아내인 죠세핀의 왕관을 자기가 씌우는 것이다. 나폴레옹이 교황에게서 뺏은 왕관은 월계수로 만들어진 로마 황제의 왕관인데 이것은 자기 위치가 과거 로마제국의 황제와 같음을 상징하는 것이고 죠세핀에게 왕관을 씌우는 것은 자기가 무너뜨린 부르봉 왕가의 권한을 자기가 이어받았다는 상징이었다.
<먼지중의 티끌> 1779년 프란시스코 고야作 동판화
열등아가 반성할 때 쓰는 종이 모자를 쓴 노파가 이단 심문 판결문의 낭독을 듣고 있다. 주석은 다음과 같다. ‘이것이 뭐란 말인가. 당신들의 수발을 들며 당신들의 치다꺼리를 도맡았던 이 갸륵한 여인이 이렇게 취급받다니 대체 이것이 뭐란 말인가’ 당시 종교재판소의 횡포를 고발하고 있다.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나타난다> 1779년 고야作 동판화
잠들어 있는 사람은 고야 자신이다. 주석은 다음과 같다. ‘이성에 버림받은 상상력은 불가사이한 괴물을 낳는다. 이성과 하나로 합쳐지면 상상력은 모든 예술의 어머니가 되고 경이의 원천이 된다’
<재단사가 할 수 있는 것> 1779년 고야作 동판화
사람의 손철럼 뻗어있는 나무에 성직자의 옷을 입혀 설교자가 손을 치켜든 모습으로 형상화 하였다. 그 앞에 홀린 듯한 여인과 분별없는 군중을 배치하였다. 성직자들이 그들의 신앙심보다는 복장에 의해 존경받는다는 사실을 꼬집고, 대중들의 어리석음과 성직자들의 위선을 고발하고 있다.
<날이 밝으면 우리는 떠날거야> 1779년 고야作 동판화
미신과 불합리가 지배하는 마녀들의 야간 집회는 동트는 새벽을 맞이하면 중단하고 떠나야한다. 이성의 도래를 예고하는 작품이다.
위 작품들은 판화집《카프리초스-변덕》의 일부분으로 1779년에 간행된 80점의 판화로 이루어진 판화집《카프리초스》는 당시 스페인 사회의 구태의연한 악폐와 인습, 위선자, 어리석은 남녀관계, 매춘부, 수도회의 타락, 이단 심문, 무능한 정치가, 비참한 민중의 모습을 계몽과 자유, 이성의 시각에서 묘사한 것이다. 그림 80점은 아무런 연결없이 ‘제멋대로’ 흩어져 있다. 이는 고야가 당시의 종교재판소를 의식해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이 판화집은 카툰의 시초로 평가받기도 한다.
<카를로스 4세의 가족> 1801년 고야作 캔버스에 유채 280×336cm 프라도 미술관 소장.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4세가 궁정화가인 프란치스코 고야에게 그리도록 명령한 그림이다. 혁명의 불길 속에서도 부르봉 왕가는 건재하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는데, 고야는 훈장에서부터 의상까지 색과 빛의 마술을 그려내는 듯한 아름다움을 낳았다. 그러나 왕은 중심부에서 물러나 있고 왕비가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 왕비의 모습은 전반적으로 천박하게 그려진 반면에 왕은 무기력하고 어리석어 보이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기울고 붕괴되어 가는 운명에 아무런 저항의 힘도 보이지 않는 왕족의 연약성이 모두의 얼굴에 역력히 나타나 있어, 그 묘사는 자칫 가혹하리만큼 날카롭다. 가장 왼쪽 그늘에 있는 남자는 고야 자신이다.
마하 연작(캔버스에 유채, 97×190cm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은 고야의 널리 알려진 그림들 가운데 하나이다. 1800년에 <옷벗은 마하>를 그렸고 1803년에 <옷입은 마하>를 그렸다. <옷벗은 마하>는 서양 예술 최초로 등신대 여성 누드로 평가받는데, <옷을 벗은 마하>는 신이 아닌 인간을, 그리고 누구인지 모르는 인간(정확히는 성경이나 신화에 등장하지 않는 인간)의 누드를 적나라하게 그렸다는 점, 심지어 모델이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관객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점 때문에 종교 재판에도 회부되어 그림에 옷을 입히라는 압력을 받았다. 이에 고야는 그림에 옷을 입히는 것을 거절하고 <옷입은 마하>를 새로 그렸다.
<1808년 5월 3일> 1814년 고야作 캔버스에 유채 268×347cm 프라도 미술관
1808년에서 1814년까지 프랑스와 스페인간에 반도 전쟁이 일어났다. 고야는 프랑스 대혁명을 지지하였지만 자신의 조국 스페인을 침략한 프랑스군의 만행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였다.
<태고적부터 계신 이> 1794년 윌리엄 블레이크作 판화에 수채 23×17cm 런던 대영박물관
“새로운 아이디어가 필요할 때마다 나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를 읽는다.” 스티브 잡스의 이 말 때문에 더 관심을 모은 인물, 윌리엄 블레이크(1757~1827영국). 그에게 붙은 수식어는 참으로 다양하다. 시인이자 화가, 신비주의자, 몽상가, 미치광이··· 알쏭달쏭한 인물답게 작품세계 역시 독보적이다. 태양 속에 사는 듯 이글거리는 불꽃 속 노인은 엄청난 암흑을 밝히고 있다. 수염과 머리를 보면 노인인데 건장한 몸은 우주도 들어 올릴 것 같다. 노인은 곡선의 패턴 속에 있는데 그 손에는 아주 반듯한 직선의 컴퍼스가 있다. 빛과 어둠, 늙음과 젊음, 곡선과 직선이 대비되는 극적인 순간을 담은 걸작이다. 창조자는 저렇게 반듯하게 세상을 재고 있는데 세상 밑에서는 어떤 일이 있을까? 알 수 없어서 신비롭고, 엄청난 일이 일어나기 직전의 긴장감이 감돈다.
<아이작 뉴턴> 1795년 윌리엄 블레이크作 판화에 잉크&수채, 46×60cm 런던 테이트 갤러리
시인이자 신비주의자인 블레이크는 자기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에 사는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었다. 그는 아카데미의 관학적 미술을 경멸하였고 이러한 관학 미술의 기준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사람들은 그를 완전히 미친 사람으로 보거나 아니면 순진한 기인奇人으로만 단정했다. 오직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그의 미술을 인정해 주었고 그를 굶어죽지 않게 해주었다. 전前 시대의 대표적 가치였던 합리적 이성은 블레이크에게는 인간을 영혼의 세계에서 떼놓는 악의 뿌리에 불과했다. 충동과 감각, 느낌과 인상이야말로 블레이크가 주장한 최고의 가치였다. 때문에 블레이크에게 뉴턴은 수학과 과학으로 인간들의 혼을 쏙 빼놓은 범죄자에 불과했다.
<위대한 붉은 용과 태양을 입은 여자> 1805년 윌리엄 블레이크作 종이에 펜과 수채,
43.7×34.8cm 브루클린 미술관
레드 드래곤이란 성경의 맨 마지막에 등장하는 예언서인 요한계시록(요한묵시록)에 등장하는 붉은 용이다. 인간의 7대 죄악(교만, 질투, 탐욕, 식탐, 분노, 나태, 색욕)을 상징하는 머리가 7개, 뿔이 10개 달린 이 용은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데, 사악한 괴물들을 이끌며 인간을 타락시키고 괴롭히는 존재다. 그야말로 악의 근원인 셈이다. 블레이크는 신비와 공상으로 얽힌 화가로서 초상화나 풍경화처럼 자연의 외관만을 복사하는 회화를 경멸했다. 또 일반으로 보는 무감동한 작품을 부정하여 대개 이론을 벗어나서 묵상 중에 상상하는 신비로운 세계를 그린다. 그는 너무 깊이 환상에 빠진 나머지 현실 세계를 그리기를 거부하고 오로지 자기 내면의 눈에만 의존했다. 백년 이상이 지나서야 비로소 그는 영국 미술사에서 중요한 인물 중의 하나로 인정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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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대혁명이후 그림의 주제를 마음대로 선택하는 새로운 분위기에서 가장 많은 혜택을 입었던 분야는 풍경화였다. 그때까지 풍경화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져 왔었다. 특히 시골의 집이나 공원, 또는 멋진 경치를 그려 생계를 꾸려왔던 화가들은 진정한 예술가로서의 대우를 받지 못하였다. 이러한 태도는 18세기 말엽 낭만주의 정신을 통해 다소 바뀌었으며 위대한 화가들은 풍경화를 새로운 권위로 끌어 올리는 것을 일생의 목표로 삼았다.
<카르타고를 건설하는 디도> 1815년 윌리엄 터너作 캔버스에 유채 155×231cm 런던국립미술관
윌리엄 터너(1775~1851영국)는 여러 곳의 풍습과 풍경을 주로 그렸으며, 특히 빛의 묘사에 획기적인 표현을 낳은 화가이다. 후에 문학가 러스킨이 격찬하여 명성이 높아졌으며, 일생 동안 풍경화를 계속 그린 화가로서 17세기 프랑스의 클로드 로랭을 능가하는 것이 그의 생애의 염원이었다. 디도는 레바논 남부의 도시 티로스의 공주로 용모가 빼어났다고 한다. 왕인 아버지가 죽으면서 오빠 피그말리온과 왕권을 나누라고 했지만 피그말리온이 디도의 남편을 죽이고 협박하자 디도는 북아프리카로 도망간다. 지금의 튀니지에 해당하는 지역의 왕에게 소 한 마리의 가죽이 덮일 정도의 땅을 주겠다는 약속을 받아 소가죽을 잘게 잘라 이어서 성채 하나를 쌓을 정도의 땅을 얻고 카르타고를 건설한다(기원전 750년경).
<전함 테메레르호> 1839년 윌리엄 터너作 캔버스에 유채 91×122cm 런던국립미술관
전함 테메레르는 1805년 트라팔가 해전에서 프랑스와 스페인의 연합 함대를 물리쳐 영국의 시대를 열게 된 유명한 전함이다. 1838년 퇴역하게 된 테메레르가 검은 굴뚝에서 연기를 뿜어내는 증기선에 이끌려 해체장으로 가는 장면이다. 불 타는 듯한 석양에 옛 영화를 상징하는 거대한 전함이 증기선에 끌려가는 모습에서 과거의 명성이 저문다는 향수와 상실의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증기선은 새로운 근대 문명의 도래를 상징하고, 색체를 통해 애틋한 감정이 전달된다. 이와 같이 터너의 작품은 사람이 거의 등장하지 않지만 따뜻한 인간애가 느껴진다.
<해풍에 흔들리는 네델란드 군함과 수많은 범선> 1640~1645년경 지몬 데 블리헤르作 41.2×54.8cm 런던 국립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