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원과 발전
재속프란치스코회는 프란치스코 성인이 직접 세운 회입니다.
프란치스코가 제자들과 함께 회칙 구두인준(1209년)을 받고 로마에서 돌아와 회개 설교를 할 때,
기혼 남녀 평신도들이
프란치스코와 그 동료들의 모범에 감화를 받아 회개생활을 하려던 데서 비롯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수도원에 들어가지 않고도
세상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실천할 수 있는 생활규범과 구원의 길을 제시하였습니다.
초기 공동체는 회개하는 형제자매회라 불리며 완덕의 길로 나아갔습니다.
교회법적 창설은 1221년 호노리오 3세의 회칙 인준을 받은 해로 보며,
이 회칙에 따라 서약한 첫 회원은 복자 루케치오와 보나돈나 부부입니다.
1289년 니콜라오 4세 교황의 회칙 개정으로 회개의 형제자매들의 회는 더욱 보편적이고 프란치스칸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후 600여년간 지속되어 오던 이 회칙은
레오 13세 교황에 의해 1883년 개정 되었고,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권고와 효시에 따라 다시
1978년 6월 24일 바오로 6세에 의해 회칙이 개정되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800여년의 역사를 가진 재속프란치스코회는
시대적 상황과 생활양식의 변화에 따라 그 명칭도 변화되었습니다.
창설 당시(1209-1221)에는 '회개의 회' 또는 '회개의 형제자매들의 회'라고 불리다가,
도미니코3회와 구별하기 위해 '프란치스코 3회'라 불렀고,
14세기에 인준된 율수3회와의 구별을 위해 '프란치스코 재속3회'라 하였으며,
재속3회의 재속성과 프란치스칸임을 드러내기 위해
현 바오로6세 회칙에서는 '재속프란치스코회'라는 명칭이 주어졌습니다.
재속프란치스코회는
프란치스코의 가족 가운데서 고유한 위치를 가지며,
온 세계에 퍼져 있고 모든 신자들 그룹에 개방되어 있는 모든 가톨릭 형제회의 유기적 결합체입니다.
형제자매들은
저마다 재속 신분 안에서 성령의 이끄심으로 사랑의 완성에 이르며,
서약으로써 성 프란치스코의 방법과 교회가 인가한 이 회칙에 따라 복음을 살려고 노력합니다.
재속프란치스코회는
전세계 모든 남녀 평신도와 재속 성직자(부제, 사제, 주교)에게 개방되어 있습니다.
재속프란치스코회는
현재 전 세계 112개국의 국가형제회가 있으며
2011년 교황청에 보고된 회원 수는 432,000명 정도 됩니다.
T 재속프란치스코회 배출성인
재속프란치스코회가 배출한 성인성녀는 현재 80여명에 이르며,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성 루도비코, 코르토나의 성녀 마르가리타, 비떼르보의 성녀 로사, 스웨덴의 성녀 브리짓다, 성 토마스 모어,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복자 요한 23세 교황 등을 들 수 있습니다.
그레고리오 9세로부터 바오로 6세까지
20여명의 교황과 시성
단테, 예술가 미켈란젤로, 라파엘, 탐험가 콜럼버스, 빈첸시오
바오로회 창설자 프레데릭 오자남 등 각계 각층에서 회원들은 프란치스코 성인의 발자취를 따라 교회를 빛냈습니다.
재속프란치스코회는 단위형제회, 지구형제회, 국가형제회, 국제형제회의 4단계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들 각급 형제회는 교회 내에서 독립적인 법인으로 인정받고 있고, 평의회와 봉사자(회장)에 의하여 활성화되고 이끌어집다.
T 단위형제회 단위형제회는 교회법적으로 설립해야 하며, 이로써 전체 재속프란치스코회의 첫 번째 세포가 되고, 사랑의 공동체인 교회의 볼 수 있는 표지가 됩니다. 그래서 각 단위형제회는 교회의 의식과 프란치스칸 성소를 진작시키고 회원의 사도적 생활에 활기를 주기 위한 특전적인 모임이 되어야 합니다(회칙 22조). 단위형제회는 형제회의 서약한 회원에 의해 선출된 평의원과 봉사자가 활성화하고 이끕니다. 형제회 평의회는 봉사자, 부봉사자, 서기, 회계, 양성담당자 등의 직책으로 구성되며, 영적보조자는 법적으로 평의원이 됩니다(회헌 49, 1-2). T 지구형제회 지구형제회는 한 지역 안에 있거나, 또는 지리적인 인접성이나 공통적인 문제와 사목적 현실에 의해 자연스럽게 하나로 통합될 수 있는 모든 단위형제회의 유기적 결합체입니다. 지구형제회는 재속프란치스코회의 단일성에 따라 그리고 그 지역 안에서 영적보조를 제공하는 프란치스코 수도회들의 합의체적 보조에 따라 단위형제회와 국가형제회 사이의 연결을 보장합니다(회헌 61,1). 지구형제회의 구성은 회헌과 국가규정에 따라 국가평의회의 권한에 속합니다. 이에 대해 영적보조를 요청해야 할, 권한을 지닌 수도 장상들에게 알릴 것입니다(회헌 61,2). 지구형제회는 평의회와 봉사자가 활성화하고 이끌며, 국가규정과 고유규정에 의해 조정되고, 자체 본부를 가집니다(회헌 61,3).
T 국가형제회 국가형제회는 한 국가 또는 그 이상의 국가 안에 있는 모든 단위형제회의 유기적 결합체이며, 지구형제회가 있는 곳에서는 지구형제회를 통해서 결속되고 조정됩니다(회헌 65, 1). 해당 형제회들의 평의회의 요청과 대화를 통해 새로운 국가형제회를 설립하는 것은 국제평의회 의장단의 일입니다. 영적보조를 청하게 될 국가의 관할 수도회 장상에게 이를 알려야 합니다(회헌 65,2). 국가형제회는 평의회와 봉사자가 활성화하고 이끌며, 고유규정에 의해 조정되고, 자체 본부를 가집니다(회헌 65,3).
T 국제형제회 국제형제회는 전 세계의 모든 가톨릭 재속프란치스코 형제회들의 유기적 결합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국제형제회는 재속프란치스코회와 같은 말입니다. 국제형제회는 교회 안에서 자체 법인격을 가집니다. 회헌과 고유규정에 따라 조직되고 운영됩니다(회헌 69,1). 국제형제회는 이탈리아 로마에 본부를 두고 있으며 재속프란치스코회 국제평의회(CIOFS)와 그 의장단 및 총봉사자가 활성화하고 이끕니다(회헌 69,2).
|
재속프란치스킨이란
① 성령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
성 프란치스코의 길을 걷는 재속프란치스칸은 성령의 부르심에 기꺼이 “예”라고 응답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재속프란치스코회 회칙을 준수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살기로 서약하는 사람들이다. 이를 위해 기도와 관상을 삶의 혼으로 삼아 끊임없이 주님의 뜻을 찾으며 실행합니다.
② 교회와 하나되어 복음을 사는 사람
재속프란치스칸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의 복음을 읽으며 복음에서 삶으로, 삶에서 복음으로 나아갑니다. 기도와 관상이 자신의 온 존재와 활동의 길잡이가 되도록 하며, 교회의 전례기도에 참여함으로써 그리스도 생애의 신비를 재현하고, 무엇보다 성체성사 안에서 살아계시고 활동하시는 그리스도와 하나를 이룹니다. 또한 교회와 결합하여 생활과 말로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을 기뻐합니다.
③ 끊임없이 회개하는 사람
창설초기부터 회개하는 형제자매들이라 불렸던 재속프란치스칸은 끊임없는 내적 변화를 바라며 날마다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그리스도와 일치시키는 회개생활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리스도와 성모님의 가난하고 겸손한 삶을 본받아 물질의 욕구를 줄이고, 하느님 자녀들을 위한 재물의 관리인으로서 ‘참 행복’의 정신으로, 소유하고 지배하려는 온갖 경향에서 마음을 깨끗이 하고자 합니다.
④ 정의와 평화를 북돋우는 사람
하느님께서는 재속프란치스칸들에게 더욱 형제적이고 복음적인 세상을 건설하라는 임무를 맡기셨습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책임을 힘껏 완수하며, 모든 사람을 주님의 선물이자 그리스도의 모상으로서 겸손하고도 인간답게 받아들입니다. 무엇보다도 공적 생활에서 용기를 갖고 신앙에 부합하는 선택을 구체적으로 합니다. 또한 평화를 끊임없이 건설하고 선포하며 사랑과 용서와 화합을 북돋습니다.
⑤ 모든 피조물을 형제 자매로 사랑하는 사람
재속프란치스칸은 자연 환경의 주보성인이신 성 프란치스코를 본 받아 인간 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 곧 생물과 무생물까지 형제와 자매로 깊이 사랑합니다. 만물에게 존경심을 지니고 남용하려는 유혹에서 벗어나 보편적 형제애의 정신으로 위기에 처한 생태 환경을 보전하고자 힘씁니다.
⑥ 완전한 기쁨과 희망을 전하는 사람
재속프란치스칸은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완전한 기쁨의 전달자로서 다른 이들에게 기쁨과 희망을 주는 사람들입니다. 회원들은 굳은 믿음으로 복음에 따라 삶의 희망과 기쁨을 확신하며, 절망과 비관주의에 대항하여 이 세상이 그리스도의 현존 장소임을 확신시키는 사람들입니다.
⑦ 형제회 안에서 서로를 도우며 성장하는 사람
회원들은 형제회 안에서 교회의식과 프란치스칸 성소를 키우고 실현시키며 자신의 사도적 생활에 활기를 얻습니다. 빈번한 만남으로 상호친교를 나누고, 서로 격려하며 형제회의 전례, 사도직, 자선활동에 적극 참여합니다. 또한 영적보조자를 통해 영성적 도움을 받습니다.
⑧ 프란치스칸 가족과 더불어 친교로 일하는 사람
재속프란치스칸은 프란치스칸 가족의 모든 구성원과 활기찬 상호 친교 안에서 살도록 힘씁니다.
영적가족인 1회(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 카푸친 작은형제회),
2회(가난한 글라라 봉쇄수녀회),
수도3회의 수도자들과 함께 일하며,
성 프란치스코의 모범과 영감을 따르는 분들과
그밖에 교회의 여러 평신도 단체들과 함께 공동선을 추구합니다.
한국의 첫 재속프란치스칸은 1922년 미국 유학 중 프란치스코 재속3회에 입회하여 서약한 장 면(요한)입니다. 그러나 400여 년 전에 이미 조선인 재속 3회원이 있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많은 조선인들이 일본으로 끌려갔으며, 이들 중 다수는 노예 생활 중에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여 하느님께 대한 신앙으로 그들의 쓰라린 생활을 극복해 나갔습니다.
그 당시 일본에서 전교를 하고 있던 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회원들의 가르침을 받아 많은 조선인들이 프란치스코 재속 3회에 입회했습니다. 159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박해로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26명이 나가사키에서 순교의 화관을 쓰게 되었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프란치스칸으로 성 베드로 밥티스타를 비롯하여 17명의 프란치스코 재속3회원이었으며, 이들 중에 3명이 조선인이었습니다.
이들은 1627년에 우르바노 8세에 의해 시복되었으며, 1862년 6월 8일 비오 9세에 의해 시성되었습니다. 또한 1867년 7월 2일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시복된 순교자 205위 중 두 명도 한국인 프란치스코 재속3회원이었습니다. 같은 날 순교한 이들은 파스칼 보스와 가이오리 에몬입니다. 따라서 한국 재속프란치스코회의 역사에 있어 그 첫 자리는 일본에서 3회원이 된 순교자들이라고 하겠습니다.
관련연혁
1921. 첫회원 : 장면(요한) 미국 뉴욕 세자요한 성당에서 루드거(Ludger, ofm cap.) 신부 집전으로 프란치스코 3회 입회
1922. 9. 24 장면(요한) 뉴욕 세자요한 성당에서 서약
1923. 12.30 장발(루도비코) 서약
T 형제회 창설기(1937-1941)
장 면, 장 발 형제의 3회 입회
한국 교회가 선교사가 아닌 평신도들의 자발적인 입교로 시작되었듯이 한국 재속프란치스꼬회 역시 1회가 이 땅에 프란치스칸 씨앗을 심기 전에 이미 프란치스코 재속3회 서약을 한 장 면(요한), 장 발(루도비꼬) 형제에 의해 기묘하게 시작되었습니다. 장 면(張勉, 세자 요한, 1899∼1966)은 미국 뉴욕 맨하탄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프란치스코회가 사목하는 성 요한 성당에 다녔습니다. 그는 그 곳에서 프란치스코 재속3회에 대해 알게 되었고 프란치스코 성인에게 매료되어 1921년 3회에 입회하였으며 1922년 9월 24일 수도명을 프란치스코로 서약하였습니다. 또한 동생 장 발(張勃, 루도비꼬) 역시 1922년 3회에 입회하여 1923년 12월 30일 수도명을 가브리엘로 서약하였습니다. 이들은 유학을 마친 후 입국하여 혜화동 성당 신자로서 서울 교구와 한국 교회를 위해 헌신하였고, 또한 사부 프란치스코의 향기가 되어 많은 신자들의 신앙 생활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프란치스코회의 조선 진출과 오기선, 이광재 신부의 입회
프란치스코회는 1937년 9월 15일 도 요한(Jean-Joseph Deguire), 배 쥐스땡(Justin M. Bellerose) 형제가 입국함으로써 조선에 진출하였습니다. 이들은 1938년 12월 15일 대전 목동에 '천사들의 성 마리아 수도원'을 건립하여 지원자들을 받아들이면서 조선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에 대한 흠모의 마음을 가지고 있던 오기선(吳基先 요셉, 1907∼1990) 신부는 프란치스코 재속3회에 입회하여 재속에서 사부 프란치스코를 따르는 수도자가 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리고 풍수원 본당에 있다가 요양 중이던 이광재(李光在, 디모테오, 1909∼1950) 신부에게도 입회를 권했습니다. 그리하여 1937년 9월 28일 서울에 온 도 요한(Deguire) 신부의 주례로, 원 라리보 주교 경당에서 오기선 신부(수도명 : 프란치스코)와 이광재 신부(수도명 : 안또니오)가 한국 사제로는 처음으로 프란치스코 재속3회에 입회하였습니다. 그리고 두 신부는 도 요한 형제의 도움으로 형제회 조직의 권한을 위임받아 3회원인 장 면, 장 발 형제와 함께 당시 교회 지도층이 많았던 백동(현 혜화동) 성당을 중심으로 형제회 창설을 추진하였습니다.
첫 형제회 창설
목포에 사는 김익진(프란치스코)가 1937년 11월 19일 오기선 신부의 주례로 입회하여 단독회원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또한 대전의 도 요한, 배 쥐스땡 신부의 적극적인 호응과 오기선 신부, 장 면, 장 발 형제의 도움으로 서울교구의 종현(명동), 약현(중림동), 백동(혜화동), 영등포 네 본당에서 명망 있는 교우들이 3회에 입회하게 되었습니다. 시인 정지용(鄭芝鎔, 6. 25 때 납북)을 비롯하여 28명(남 13명, 여 15명)이 1937년 12월 25일 오기선 신부의 주례로 서울 혜화동 성당에서 첫 착의식(현 입회식)을 가졌습니다.
오기선 신부는 입회자들을 지도하였습니다. 이들은 혜화동 성당에서 매월 첫 주일 오후 3시에 정기적인 집회를 갖고, 수련교육을 받았습니다. 이런 소식이 전국에 전해지면서 오기선, 이광재, 도요한, 배유스틴 신부에게서 개별지도를 받고 단독회원으로 입회한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오기선 신부는 입회한 회원들을 이끌면서도 작은형제회에 재속3회 규정의 지도를 청하고 1938년 11월 15일 대전목동에서 도요한 신부 주례로 서약하였습니다. 1938년 12월 25일에는 제주 교육의 별인 최정숙(베아트리체)이 혜화동 성당에서 오기선 신부 주례로 입회하였습니다.
이어서 1939년 1월 3일, 혜화동 성당에서 도 요한 신부 집전으로 20명이 서약을 했습니다. 오기선 신부의 형제회 창설 노력으로 1939년 1월 3일 원 라리보 교구장으로부터 형제회 창설 승인을 받아, 성 프란치스코를 주보성인으로 하는 ‘서울 형제회’가 탄생하였습니다. 초대회장은 장면(요한)이고, 초대 지도신부는 오기선 신부였습니다.
당시 대전에는 도 요한 신부의 특별한 지도를 받고 재속3회 회칙을 따라 공동생활을 하는 미혼 여성들의 공동체가 있었습니다. 1939년 당시 서울 형제회는 수련자를 포함하여 60명의 회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전 목동 지역에는 형제회 조직은 없었으나 목동 성당을 중심으로 약 25명의 회원들이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서울 형제회는 형제회의 구성원들이 대부부 교회지도자들로 교호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회원들은 평신도 활동이 활발하지 못했던 당시의 교회 안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였습니다.
관련연혁
1937. 9. 28 오기선(요셉), 이광재(디모테오) 신부, 종현(명동) 주교좌 경당에서 3회에 입회하여 첫 사제회원이 됨
1937. 12.25 첫 착의식(입회식), 혜화동성당에서 오기선 신부 주례로 28명 입회
1939. 1. 3 서울형제회 설립, 초대회장 장면, 초대지도신부 오기선, 주보 성프란치스코
T 재건기(1972-78년)
연합회의 재기 - 제2대 한국연합회(1972. 8.~1975. 8.)
초대 연합회가 공백 상태에 머무르게 되자 서울 형제회가 지방 형제회에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전국 지도신부 공안드레아 ofm 신부는 연합회 재건을 위해 전국대회를 개최하고, 이순석(바오로)를 회장으로 하는 제2대 연합회를 발족했습니다.
1972년 연합회는 제6차 전국대회에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교회의 변화에 맞게 단독회원제와 수도명을 폐지하였고, ‘프란치스코 재속3회’를 ‘프란치스코 재속형제회’로 변경하였습니다.
연합회는 1972년 9월 15일, 서울 형제회의 월보 ‘평화의 사도’ 이름을 인수하여 창간호를 냈습니다. 또한 입회식에서 성의와 띠를 착용하던 것을 뱃지로 바꾸었습니다. 그러나 서약자들이 수도복을 입는 규정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제7차 전국대회는 1973년 대전에서 총회와 함께 처음으로 수련장을 위한 교육이 실시되었습니다.
당시 꼰벤뚜알 설립 형제들과 작은형제회 설립 형제들이 서로 왕래를 하지 못하다가 두 영적지도자들의 노력으로 하나의 연합회 안에 속하기로 결의하고 전국 행사가 있을 때는 한 자리에 모이게 되었습니다.
한편 서울형제회는 1973년 6월 9일, 회원들에게 물질적 도움을 주기 위한 ‘형제 상호 신용협동조합’을 창립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노령회원이 대부분인 형제회에 기둥이 되어주길 바라며 청장년 형제회를 만들었습니다.
제3대 연합회(1975. 8. - 1978. 8.)
대구 범어동 꼰벤뚜알 수도원에서 가진 제9차 전국대회에서 다시 이순석(바오로)을 회장으로 하는 제3대 연합회가 출범하였습니다.
1974년 9월 15일 대구 범어동에서 엘리사벳 형제회가 설립되었습니다. 1975년 1월 21일 마산 지역에도 재속형제회 창설을 위한 모임이 시작되었다. 당시 80 고령의 마산교구 은퇴 신부인 정수길 신부의 노력으로 1976년 7월 19일 드디어 마산형제회가 설립되었습니다. 이후 2명의 교구 사제가 3회에 입회 하였습니다.
1976년 2월 부임한 제5대 지도신부 최정오(마리노) ofm 신부는 1978년까지 매년 전국대회를 개최하고 단위형제회의 지도자들을 위한 강습회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많은 형제회가 이 시기에 조직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형제회는 서약회원 3명만 있으면 형제회 조직을 하다 보니 내실을 기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리하여 교육자료와 월보 발행 등을 계속하면서 1976년 지구 협의회를 구성하였습니다.
1977년에는 부산 대연동 성당에서 꼰벤뚜알 황 마리오 신부가 적극적인 활동을 하여 부산 대연동 안토니오 형제회가 설립되었습니다.전국에서 많은 형제회가 설립되었고, 지역 형제회의 유대를 위해 1976년 5월 전북 지구협의회(현 전주지구형제회)가 조직되었고, 사부님 서거 750주년 기념식과 전국대회가 전주에서 열렸습니다. 1977년 7월 전남 지구협의회(현 광주지구형제회)가 조직되었습니다.
관련연혁
1975. 8. 22. 제9차 전국대회에서 제3대 연합회(회장 : 이순석 바오로)
1976. 5. 1 전북 지구협의회 조직(현 전주지구형제회)
1977. 7. 14 전남 지구협의회 조직(현 광주지구형제회)
1978. 2. 12 제1차 전국 지도자 연수회 개최
1978. 8. 27 제12차 전국총회에서 제4대 연합회(회장 : 김옥윤 요한)
T 제1성장기(1978-1993년)
제4대 연합회(1978. 8. - 1981. 10.)
1978년은 국내외적으로 3회에 큰 전환점이 되는 해였습니다. 변천하는 새 시대에 부응하며 개정된 회칙이 인가를 받고, 그 명칭도 종전의 ‘프란치스코 재속3회’에서 ‘재속프란치스코회’로 변경되었습니다. 4대 연합회는 김옥윤(요한)을 회장으로 하고 한국 재속프란치스코회가 본연의 자세를 확립하도록 노력했습니다. 당시 전국 지도신부는 이종한(요한) ofm 신부였습니다. 연합회는 주로 교육에 주안점을 두어 지도자 연수회와 수련장 연수회를 개최하였고, 청년 프란치스칸에게 많은 관심을 가져 젊은이의 모임을 개최하여 활기를 불어넣었습니다.
제5대 연합회(1981. 10.-1984. 9.)
1981년 6월 13~16일 국제평의회 마누엘라 마찌올리 회장이 처음으로 방한하여 한국의 형제회를 살펴보았습니다. 김옥윤(요한)이 선거총회에서 다시 선출되어 제5대 연합회를 이끌었습니다. 연합회는 1982년 사부 탄생 800주년을 기리기 위해 추진한 출판사업과 회관 건립을 위한 모금운동을 활발히 진행했습니다.
전국형제회는 당시 주로 작은형제회의 영적보조를 받고 있었고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영적 보조를 받는 형제들과 빈번한 교류를 갖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1980년 8월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의 영적보조를 받는 부산과 대구의 형제회들이 ‘꼰벤뚜알 성 프란치스코회 재속형제회 한국연합회’를 만들었습니다. 1983년 김옥윤 회장은 이 형제들과 서로의 발전을 위한 회의를 하고 여러 가지 사항을 협의했습니다.
1983년 5월 29일 제주교구의 이태수(미카엘) 신부와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임피제(바드리시오) 신부가 제주 글라라 수녀원에서 하멜키올 신부 주례로 입회를 하였습니다.
제6대 연합회(1984. 9-1987. 10.)
제6대 연합회는 박상배(마태오)를 회장으로 출발했습니다. 연합회는 새로운 정신과 각오로 한국의 재속프란치스코회를 확고한 바탕 위에 놓을 것을 다짐했습니다. 1985년 5월 9대 전국 지도신부로 임명된 김창재 (다미아노) ofm 신부는 전국 형제회의 재정비를 위해 형제회 시찰을 강화하고 연합회는 지도자 연수회와 젊은이 모임을 연례행사로 실시하였습니다. 또 장년모임과 수련장 학교, 전국 입회․서약의 강화 등 형제회 활성화와 양성에 주력하였습니다.
1986년 2월 14일 꼰벤뚜알 설립 형제들과 작은형제회 설립 형제들 간의 일치를 위한 모임이 있었습니다. 연합회는 작은형제회와 함께 1987년 한국 진출 50주년을 기념 전국 대회를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열었습니다. 전국의 형제들이 함께 기금을 만들고 정성을 모아 봉헌했던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이 1987년 4월 22일 축성식을 가졌습니다.
제7대 연합회(1987. 10-1990. 10.)
1987년 10월 3~4일 제15차 전국 총회가 개최되어 박상배(마태오) 회장이 유임되었습니다. 1988년 1월 연합회는 전국 평의회를 열고 수도복 폐지를 결정하였습니다. 1988년 2월 국가형제회는 김창재(다미아노) 지도신부의 도움으로 한국 재속프란치스코회 50주년 역사서 ‘평화의 사도’를 발간하였습니다. 1987년에는 제주교구 양명현(토마) 신부가 사제회원으로 입회하였습니다. 1988년 10월 제10대 전국 지도신부로 류이규(프란치스코) 신부가 부임했습니다. 1989년 6월 28일에 대전지구협의회(현 대전지구형제회)가 구성되었습니다.
제8대 연합회(1990. 11.-1993. 11.)
1990년 11월 제16차 전국 총회에서 김종학(아오스딩)이 회장으로 선출되어 제8대 연합회가 출범하였습니다. 1991년 2월 제11대 지도신부로 유영진(루카) 신부가 부임했습니다. 1991년 6월 15일 경남지구협의회(지금의 경남지구형제회)가 구성되었습니다. 같은 해 9월 국제평의회 엠마누엘라 데 눈치오 회장과 총영적보조자 칼 쉐이퍼 신부가 방한하여 전국 연합회를 방문하였습니다. 1990년 새 임시회헌이 발효됨에 따라 1992년 1월 전국 연례회의에서 그동안 사용하던 명칭들을 변경하기로 하였습니다. 한국 연합회는 ‘한국 국가형제회’로, 지구 협의회는 ‘지구형제회’로, 지도신부는 ‘영적보조자’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1992년 3월 21일 부산지구형제회가 구성되었습니다. 같은 해 10월 과거 포켓판의 지침서를 회칙과 회헌을 실어 ‘재속프란치스코회 지침서’로 새롭게 발행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