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하 의사(1905~1928)
젊은 시절 6.10 만세운동과 나석주 의사의 의거를 보고 깨달은 바 있어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마음먹고 니뽕국으로 건너감
그러나 니뽕국에서는 자신의 뜻을 펼 기회를 잡을 수 없어서
상하이 임시정부로 가려고 했지만 이마저 여의치 않았음
하는 수 없이 타이완의 타이중 시에 머무르게 되었고
녹차밭에서 일하며 타이완의 항일운동가와 연을 맺고 도움을 받았음
그러던 중 1928년 5월 히로히토 왜왕의 장인이자 자신도 왕족인
니뽕국 육군 대장 쿠니노미야 쿠니요시 왕(久邇宮邦彦王)이
타이완 주둔 니뽕군의 검열 특사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조명하 의사는 그 자를 암살하기로 결심함
5월 14일 쿠니노미야의 환영 행렬 와중에
조명하 의사는 인파를 뚫고 쿠니노미야가 탄 차에 뛰어올라
배설물을 바른 칼로 찌르고 그 자리에서 체포당했음
칼에 배설물을 바른 것은 당장 죽지는 않더라도 패혈증을 유도하기 위함이었음
이게 맞아 떨어져서 쿠니노미야는 즉사하지 않았지만
이듬해 1월 끝내 패혈증으로 죽었음
체포당한 조의사는 왕족을 해코지한 대역죄라는 명목으로
단심제로 치뤄진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그 해 10월 타이베이 형무소에서 23세를 일기로 순국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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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함안(咸安). 황해도 송화 출생. 조용우(趙鏞禹)의 아들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18년 황해도 풍천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1926년 9월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 곳에서 건전지제작소·메리야스공장·상점 등의 고용원으로 일하면서 대판(大阪)에 있는 상공학교(商工學校)를 마쳤다.
그 뒤 큰일을 계획하고 대만(臺灣)으로 건너가 타이중시[臺中市]에 있는 부귀원(富貴園)에 들어가 점원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중국인으로부터 칼쓰는 법을 익혔다. 1928년 5월 일제침략자들이 중국본토 산둥[山東] 출병 등으로 대중국침략전쟁을 계획하면서 일본왕 히로히토[裕仁]의 장인인 구니노미야[久邇宮邦彦王] 육군대장을 육군특별검열사로 대만에 파견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5월 14일 타이중시 다이쇼정[大正町] 도서관 앞으로 나가 환영하는 일본인 인파에 묻혔다가 날쌔게 달려들어 독검(毒劍)으로 구니노미야를 찔렀다. 이 때의 부상으로 구니노미야는 이듬해 1월에 사망
서울 대공원에 있는 조명하 의사 동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