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간 163.6]
특집 해월신사 순도 124주기
해월신사가 의암성사에 도통전수한 땅 전거론, 성역화 하자!
편집실
해월신사 순도 제124주기 참례식이 6월 2일 해월신사 순도일에 여주시 천덕산 신사 묘소에서 열렸다. 묘소 참례식에는 유족대표들과 박상종 교령을 비롯하여 이정희 연원회의장, 주용덕 종무원장을 비롯한 교직자들과 김시형 여주교구장과 이항진 여주시장과 여주시민 등 80여 명이 참석하였다. 참례식은 이미애 교화관장의 집례로 청수봉전, 심고, 주문3회병송, 분향 순으로 진행되었다.
이항진 여주시장은 전날(6.1) 선거에서 낙선하였지만 신사 묘를 찾아 인사말을 남겼고 신사묘소를 비롯하여 학술대회를 통해 도통 전수지 강천면 전거론, 민족대표33인 홍병기 행적 등 여주시의 동학 관련 사업에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박상종 교령은 신사묘소 참례식 후 손시화 사모님의 묘소를 참례하였다. 손시화 사모는 의암성사의 동생으로 26살의 나이에 예순 둘의 신사와 결혼하였고 최동희, 최동호 두 아들의 묘소와 손자 되는 최익환의 묘도 신사 묘소 아래에 자리하고 있다.
한편, 해월신사 묘소가 지난해 4월 경기도 지정문화재(도 기념물 제228호)로 지정되면서 해월신사와 의암성사 관련 유적지에 대한 관심이 여주시 등 경기도에서 높아지고 있다. 김시형 여주교구장은 전거론의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블로그에 글을 올렸다.
“동학역사문화선양회와 최보따리인문포럼은 이곳 전거론에 주민들의 동의를 얻어 역사적인 표지판을 세웠다. 이곳은 경기도 여주시 강천면 도전2리 전거론은 동학의 2세 교조인 해월신사최시형(1827~898)이 1897년 8월부터 1898년 1월까지 5개월 간 은거하던 곳이다.
동학혁명의 좌절 이후 강원도와 경기 북부, 경상도 일원의 산간 마을을 전전하다가, 제자인 임순호가 이곳에 집을 마련하고 모시게 되었다. 해월신사는 71세라는 고령과 병환 등으로 거동이 쉽지 않을 때이다.
그러나 찾아오는 제자들에게 「이천식천」, 「이심치심」 등의 법설을 펼쳤다. 특히 「이천식천」의 법설은 오늘 인류에게 가장 긴요한 사안이 되는 생명, 생태 문제를 새로운 차원으로 이끌 중요한 가르침이다.
또 이곳은 1897년 12월 24일 의암성사 손병희(1861~1922)에게 동학의 도통(道統)을 전수한 곳이기도 하다. 해월신사가 체포되어 순도하기 불과 몇 개월 전의 일이다. 추적과 은둔이라는 절대 절명의 위기 속에서 행해진 도통 전수는 훗날 일어나는 3.1혁명으로 이어진다. 도통 전수를 통해 스승의 보국안민 정신을 이어받은 의암성사의 용단과 결의가 거국적인 3.1혁명을 일으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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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거론 성역화 필요
천도교에서 이러한 의견에 집중하여 전거론의 성역화 사업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 특히 올해는 의암성사 순국 100주년 되는 해로 경기도 등에 사업의 필요성을 타진하고 정부예산사업으로 추진할 준비를 할 필요도 있다.
먼저, 전거론은 교단 내에서만 언급되고 말 곳이 아니다.
의암성사께서 해월신사에게서 도통을 이어받은 역사적인 곳이다. 특히 올해는 의암성사 순국 100년의 해이다. 우리 천도교인이 앞장서야 한다. 동학혁명 이후 동학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더 민중운동에 앞장섰다.
갑진개화혁신운동을 통하여 민중들의 실용적인 삶을 지향하며 했으며, 천도교로 이름을 바꾼 이후에는 더욱 민도를 높이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국토가 일제에 강제로 병탄된 뒤 민중들은 천도교를 희망이라 여기며 입교하였다.
그리고 십여년 뒤 3.1운동이라는 거족적인 운동을 계획하고 주도하였을 뿐 아니라 이후 국내에서의 민족문화운동도 천도교인들의 몫이었다.
의암성사의 높은 덕을 제대로 추모하고 계승하는 것은 서울뿐만 아니라 전국의 유적지에서 이루어야 한다. 전거론은 그 시작일 뿐이다.
둘째, 전거론 지역의 주민들의 요구를 먼저 수렴할 필요가 있다.
이곳은 해월신사의 둘째 아들이며, 항일운동과 3.1 혁명에 적극 참여하다, 감옥에 수감되었고, 그 후유증으로 생을 마감한 독립운동가인 최동호(1897~1923)가 태어난, 유서 깊은 독립운동의 산실이기도 하다. 이러한 연계성으로 인해 이곳의 복원은 매우 주요한 의미를 지닌다.
단지 이 장소만 복원 할 것이 아니고 주변 700여평을 매입하여 ‘동학대도소’로서 또한 의암성사의 도통전수터로서 명실상부한 동학의 유적지로서 기념공원화 할 필요가 있다. 전거론 마을 이장도 적극 지원하고 있고 장수폭포와 연계하여 기념공원이 조성된다면 전국의 어느 지역 보다도 중요한 곳으로 그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장수폭포는 사유지로 물놀이하기에는 아주 적합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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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출신의 민족대표 33인 홍병기
아울러 여주 출신의 동학 천도교인을 선정하여 대외적으로 널리 알려야 한다. 3.1혁명 당시 민족대표 33인으로 선정되었던 홍병기의 삶을 조명해 보고자 한다.
홍병기(洪秉箕, 1869. 11. 5 ~ 1949. 1. 26)는 1869년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이포리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운회(運晦), 도호(道號)는 인암(仁菴)이다. 아버지 홍익룡은 참봉의 벼슬을 한 양반이었으나 홍병기는 서자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한학을 배우고 무예에 능력을 발휘하여 1887년 19세 때 무과에 급제하였다. 전근대적인 신분질서가 남아있는 시대적 상황에서 서자라는 그의 신분은 정치 사회적으로 불평등함의 한계에 부딪칠 수 밖에 없었다.
홍병기는 24세 때인 1892년 동학에 입도하였는데, 무관으로서 임무에 충실하기에는 아무런 희망을 발견할 수 없었던 만민평등과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동학사상은 당시대의 불평등함에 맞닥뜨려 있던 그를 자극하기에 충분하였다. 신분 차별의 철폐를 실천했던 수운대신사와 해월신사의 동학은 그를 깨우치기에 충분한 시대의 개혁사상이었다.
동학에 입도한 홍병기는 교리의 연구와 수도에 정진하며 여주지역을 중심으로 인간 평등과 보국안민의 동학사상을 전파하는 포덕활동에 진력하였다. 이후 그는 여주지역의 접주에 임명되어 지역민들에게 자신이 동학을 통해 깨우칠 수 있었던 시대개혁인식을 확대시키기 위해 포덕활동에 진력하여 여주지역 동학교세 확장에 기여하였다. 이에 1893년 3월 충청 보은에서 교조신원운동 집회가 개최되었을 때 양주, 여주지역 동학교인 270여명도 참석하였는데, 이때 홍병기는 여주지역 접주였으므로 휘하의 교인들을 이끌고 집회에 참석하였을 것이다.
이후 1894년 동학혁명운동의 참여와 이 과정에서 이루어진 손병희와의 만남은 홍병기에게 동학의 개혁인식과 외세의 침략에 대항한 민족의식을 구체적으로 실천해 나갈 수 있었던 매우 중요한 인생의 경로가 되었다.
1905년 12월 동학이 천도교로 바뀐 후 천도교의 중앙총부에서 천도교의 정책과 노선을 결정하는 중요한 교직자로 활동하였다. 이후 1910년 한일합방에 대해 강한 불만을 갖고 있던 그는 1918년 말 파리강화회의에서 미국의 윌슨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한 것을 알고 “우리 조선도 민족자결의 원칙에 의하여 독립이 될 것이다.”라고 생각하였다.
1919년 2월 10일경 권동진을 만나 구체적인 독립운동 방안을 모색한 홍병기는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 참석하여 민족대표와 함께 독립선언식을 참석하였고 독립선언식 거행 직후 곧 일본관헌에 체포되었다.
홍병기는 심문을 받을 때 판사가 “피고는 금후도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라고 묻자, “그렇다. 기회만 있으면 운동을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예심과 최종판결이 나기까지 선생은 갖은 옥고를 치르고,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2년을 받았다. 1921년 11월 4일 나용환 등 민족대표들과 함께 출옥한, 홍병기는 천도교회혁신운동에 주력하는 한편 다시 동학의 항일의식을 실천하기 위한 새로운 방향의 민족독립운동을 모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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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이후 고려혁명위원회 조직, 위원장 맡아
홍병기는 당시 전국순회강연을 하고 있던 연해주 교구의 천도교인들과 1922년 7월 14일 고려혁명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이는 의암성사의 애국정신과 항일의지를 계승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할 것을 설립 목적으로 하였다. 위원회의 조직에 핵심 역할을 하였던 홍병기는 위원장으로 선임되어 보다 적극적이고 혁명적인 항일운동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하의 국내에서는 혁명위원회가 목표로 한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홍병기는 최동희 등과 연해주에서 소비에트 러시아의 지원을 얻어 독립운동을 전개하고자 위원회의 방략을 전환하고 이를 위해 1924년 4월 5일 천도교최고비상혁명최고위원회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홍병기는 집행위원장으로 선임되어 최동희와 함께 만주와 국내에 회원을 파견하여 동지규합과 독립운동자금의 모집등 실무를 주도하며 고려혁명위원회의 활동 지원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1925년 소비에트 러시아와 일본의 평화조약 체결 전후 한국독립운동가들을 추방함으로 고려혁명위원회 홍병기 등의 계획은 좌절됨으로 실망은 컸다. 동년 2월 중국 길림으로 간 최동희는 만주지역 정의부, 천도교연합회, 형평사의 삼각동맹으로 혁명당을 결성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혁명당의 창당선언문 등을 결정하고 1926년 4월 5일 고려혁명당을 창당하였다. 앞서 3월 고려혁명당의 창당 계획을 이동구로부터 전달받은 홍병기는 조선독립과 함께 계급해방이라는 사회주의적 경향의 창당 목적에 처음에는 우려하였으나 보다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갈망하였던 홍병기는 조선독립을 우선시하여 4월 김봉국이 서울에 와서 창당 사실과 당원 명부에 등재되어 있음을 알리자 고려혁명당의 가입을 승낙하였다. 홍병기와 함께 활동하였던 천도교 동지들에게는 홍병기라는 인물의 필요성이 그만큼 컸던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활동을 시작한 지 얼마 안된 1926년 12월 28일 고려혁명당의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하던 이동락이 장춘에서 일경에 체포되고 말았다. 이에 혁명당의 조직이 탄로남으로 당원들이 대부분 체포되었다. 이동락이 체포 당시 당과 관련된 문서를 다수 소지하고 있었음으로 혁명당의 조직과 인적 내용이 노출되고 말았다.
이에 홍병기도 이동욱, 김봉국 등 과 함께 1927년 1월 19일 만주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60세의 고령으로 수감 중 고통을 받았으나 1928년 4월 20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2년의 형을 선고받았고, 그 해 10월 18일 평양복심법원의 판결에서도 징역2년의 형을 선고받았다. 이로써 고려혁명당에서 활동은 성과를 얻지 못하고 좌절된 이후 신의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1929년 7월 5일 가출옥하였다.
이후 서울 재동에서 칩거하면서 자녀의 항일독립의식을 고취시키는 교육에 전념하며 지내던 중 마침내 광복을 맞게 되었다. 광복 후에도 동학혁명운동을 기념하는 활동을 벌이면서 동학사상과 동학혁명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전파하는 데도 힘쓰는 등 대외적인 활동을 하였다. 광복 직후 12월 삼일동지회에서 활동하고 있던 그는 독립촉성선서식을 거행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 봉대를 천명하며 3.1민족사상을 고양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 1947년 2월 천도교당에서 개최된 동학혁명 53주년기념대회에 참석하여 동학혁명의 역사적 의미를 설파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홍병기는 1949년 1월 17일 교통사고를 당하여 머리에 부상을 입고 다리가 절단되는 고통을 겪게 되었다. 사고 직후 육군 병원으로 호송되었으나 결국 1월 26일 81세를 일기로 동학을 통해 조선의 근대개혁과 민족의 독립을 위해 바쳤던 일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묘소는 서울 현충원에 모셔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