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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어서 본 ‘상윳따 니까야 (Saṃyutta Nikāya)’ 12-1강
마나까마 숫따
(Mānakāma sutta, S1:9)
교만을 즐기는 자 경
사왓티 니다낭
Sāvatthinidānaṃ. ~~(생략)
1. 에까만탕 티따 코 사 데와따 바가와또 산띠게 이망 가탕 아바시.
Ekamantaṃ ṭhitā kho sā devatā bhagavato santike imaṃ gāthaṃ abhāsi:
1.한 곁에 선 그 천신은 세존의 앞에서 이 게송으로 여쭈었다.
2. 나 마나까맛사 다모 이닷티,
Na mānakāmassa damo idhatthi,
나 모나맛티 아사마히땃사;
Na monamatthi asamāhitassa;
에꼬 아란녜 위하랑 빠맛도,
Eko araññe viharaṃ pamatto,
나 맛쭈데이얏사 따레이야 빠란띠
Na maccudheyyassa tareyya pāran”ti.
2. 교만을 즐기는 자는 길들임이 없고
집중을 하지 못한 자는 성자의 삶이 없으니
홀로 숲에 거주하지만 게으르게 지내면
그는 죽음의 영역에서 저 피안으로
결코 건너지 못합니다.
바가와(bhagava)
세존
3. 마낭 빠하야 수사마히땃또,
Mānaṃ pahāya susamāhitatto,
수쩨따소 삽바디 윕빠뭇또;
Sucetaso sabbadhi vippamutto;
에꼬 아란녜 위하랑 압빠맛또,
Eko araññe viharaṃ appamatto,
사 맛쭈데이얏사 따레이야 빠란띠.
Sa maccudheyyassa tareyya pāran”ti.
3. 자만을 제거하고 바르게 집중을 한 자는
고결한 마음으로 모든 곳에서 해탈하였다.
그는 홀로 숲에 거주하면서 게으르지 않아
죽음의 영역에서 저 피안으로 건너간다.
마나(māna)는 매우 많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만’, ‘오만’, ‘아만’, ‘거만’, ‘자만’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으면서 ‘자부심’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것이 교만입니다. 그러므로 교만이 없으면 윤회를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만은 우리가 욕계에 살고 있어서 이러한 욕계를 잘 돌리는 하나의 에너지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윤회를 하는 원인으로 탐욕, 성냄, 어리석음을 말하는데 우리들 마음속 안에 깊숙이 들어가 있어서 잘 보이지 않는 것이 교만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모든 것을 분석해서 보라고 하셨는데 분석해서 속 깊이 들어가야 보이는 것이 교만입니다. 수다원이나 사다함도 이런 미세한 교만은 안 보이고 아나함도 안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만은 나를 생존하게 하는 하나의 자부심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어리석음이 있기 때문에 교만이 즐거움입니다. 아나함에서 미세한 교만을 알아차려 정진하면 아라한이 되면서 완전히 끊어집니다. 그만큼 교만, 자만, 아만은 아주 중요하기도 하고 우리를 이 세상에 묶는 밧줄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교만’, ‘아만’, ‘오만’ 등의 뜻을 가진 마나(māna)에 까맛사(kāmassa)가 붙어서 마나까맛사(mānakāmassa)가 되면 ‘교만을 즐기는’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교만을 좋아해서 즐긴다는 것입니다. 원래 까마(kāma)는 ‘욕구’, ‘욕망’, ‘감각적 쾌락’, ‘애욕’이라는 뜻도 있고 ‘즐거운 대상’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래서 마나까맛사(mānakāmassa)는 교만을 좋아해서 즐기는 것을 말합니다.
경전 본문의 나(na)는 ‘없다’, ‘아니다’, ‘무(無)’, ‘불(不)’ 등의 부정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음에 다모(damo)는 ‘길들임’, ‘복종시킴’, ‘수련’, ‘자제’ 등의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na)와 다모(damo)가 연결되면 ‘길들일 수 없음’이 됩니다. 명상을 해서 선정에 들어갈 때 교만이 가라앉아 집중하는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여기서 길들인다는 것은 교만을 없애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길들인다는 것은 집중을 했기 때문이고 집중을 해서 길들이면 교만이 없어집니다.
우리가 소나 동물을 길들이는 것은 그 동물의 아만을 없애기 위해서입니다. 소에게는 적어도 내가 소라는 아만이 있기 마련입니다. 소를 숲에서 데리고 와서 길들일 때 교만이 완전히 없어지지는 앉고 점점 사라지는 것입니다. 코끼리 길들이는 것에는 두 가지 훈련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겁을 주면서 훈련시키는 방법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소에게 이해시키면서 길들이는 방법이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이해를 시키면서 길들이고 지혜롭지 못한 사람들은 겁을 주면서 훈련시킵니다.
태국의 쇼에 나오는 코끼리는 겁을 주면서 훈련시킨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서 겁을 주면 안 되고 어릴 때부터 해야 한다고 합니다. 코끼리를 겁주면서 훈련시키는 방법을 보면 어미 코끼리와 새끼 코끼리를 서로 떨어진 곳에 묶어 놓고 새끼가 엄마에게 젖을 먹으러 가려고 애를 쓰는데 발을 하나 묶어 놓았기 때문에 가려고 하면 묶인 발이 아파서 갈 수 없습니다. 아기 코끼리가 성장하면 발에 있는 줄을 충분히 부셔버리고도 남을 정도로 몸이 커집니다. 그러나 아주 작은 줄로 묶어놔도 줄을 떼어 버리지 않고 심지어 말뚝을 빼놔도 그 주변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코끼리는 어려서부터 가려고 하면 아프다는 것이 세뇌되었고, 작은 줄이 아프다는 기억이 있어서 작은 줄조차 끊고 나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런 길들임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뭔가 하려고 하지 않고, 뭔가를 하려고 하면 겁이 납니다.
위빠사나는 우리를 지혜롭게 길들이고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힘을 키우는 것입니다. 선정은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길들임이 아니라 고요함으로 억누르기 때문에 열반까지는 못갑니다. 위빠사나는 자체에서 스스로 길들이기 때문에 마음이 고요해져 지혜가 나서 열반에 이릅니다.
그래서 다모(dama)는 아라한을 말하기도 하고 열반, 해탈, 집중을 뜻하기도 하는데 교만하거나 자만을 가진 사람은 길들임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라한은 마음이 길들여져서 자만이 사라져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소멸한 해탈의 자유를 누립니다.
주석서에 의하면 5가지 길들임이 있습니다.
첫째, 감각기능의 길들임(indriya-saṃvara)입니다. 인드리야 삼와라(indriya-saṃvara)에서 인드리야(indriya)는 ‘감각기능’, ‘감관’, ‘감각능력’ 등의 뜻입니다. 삼와라(saṃvara)는 ‘자제’, ‘제어’, ‘억제’, ‘감관을 지킴’ 등의 뜻입니다. 수행자가 감관을 지키려면 감각기관과 감각대상이 접촉할 때 일어나는 느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때 마음이 감각대상으로 나가지 말고 감관에서 일어나는 느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집중해야 합니다. 만약 마음이 감각대상으로 나가면 즉각 내가 본다는 아만이 생깁니다. 그래서 감각기관에서 일어나는 느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이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둘째, 통찰지혜인 빤냐(pañña)를 얻기 위해 10바라밀을 닦아야 합니다. 10바라밀만큼 위대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나를 길들이는 하나의 과정입니다. 바라밀은 아라한과 붓다가 될 때까지 자아를 길들여서 무아로 가는 과정입니다. 지혜 중에서 통찰지혜인 빤냐(pañña)는 꿰뚫어서 아는 지혜로 생명의 실재인 무상, 고, 무아를 아는 것을 말합니다. 누구나 예외없이 무상, 고, 무아를 알아야 집착이 끊어진 해탈의 자유를 얻습니다. 결국 집착을 끊었느냐, 아직 집착이 있느냐가 윤회를 결정합니다.
셋째, 포살(布薩)을 행하는 것입니다. 포살 행을 우뽀사타 깜마(uposatha kamma)라고 합니다. 우뽀사타(uposatha)는 ‘계(戒)를 설함’, ‘계행을 실천하는 날’, ‘포살일’, ‘제일(齊)’을 뜻하는 말입니다. 승가에서는 매월 보름에 모여서 참회의식을 갖는데 이때의 의식이 포살입니다. 포살은 비구의 의무입니다. 포살을 할 때는 인근에 거주하는 비구들이 모여서 함께 포살의식을 행합니다.
넷째, 인내하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디와사나 칸띠(adhivāsana-khanti)라고 하는데 아디와사나(adhivāsana)와 칸띠(khanti)는 똑같이 ‘인내’, ‘인욕’, ‘관용’, ‘자제’ 등으로 같은 뜻입니다. 그러나 칸띠(khanti)에는 ‘이해’라는 뜻도 있습니다. 인내하면 자연스럽게 현상을 이해하는 지혜가 납니다. 그래서 참는 것처럼 좋은 것이 없습니다. 자만을 가라앉힐 때 인욕이 나옵니다. 그래서 인욕은 자만을 가라앉게 합니다. 많은 감정들이 자만으로 인해서 알게 모르게 많이 일어납니다. 자만이 세속적인 행복도 주지만 그보다 더 많은 괴로움도 줍니다. 우리가 그것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인내와 관련하여 유명한 아라한 스님 일화가 있습니다.
인내 제일인 뿐나(puṇṇa) 아라한 스님의 이야기입니다.
부처님 시대에 뿐나(puṇṇa)라는 아라한 스님이 계셨습니다. 인내 제일인 스님으로서 80대 아라한 중에 한 분입니다. 스님의 고향은 수나빠란따(sūnaparanta)라는 지역인데 이 지역이 깡패들이 많기로 유명한 곳입니다. 자애롭지 않고 싸움질을 잘하는 사람들이 많이 사는 아주 위험한 지역으로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뿐나(puṇṇa) 스님은 어느 날 부처님께 제가 고향에 가서 포교를 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뿐나(puṇṇa) 존자가 위험한 지역에 가서 살 수 있는지 시험해 봅니다. “뿐나여! 거기 가서 포교할 수 있겠는가? 그곳은 사람들이 불교를 믿지도 않고 때로는 때리고 싸우고 그대에게 욕도 할 것이다.” 이에 뿐나 존자는 욕하면 때리지는 않았으니 참습니다. 그러나 때리면 어떻게 하느냐? 손발을 자르지는 않았으니 참을 수 있습니다. 손발을 자르면 어떻게 하겠느냐? 죽이지는 않았으니 참을 수 있습니다. 죽이면 어떻게 하겠는가? 죽임을 당해도 그 사람들에 대한 미움은 없습니다.
뿐나의 말을 들은 부처님께서 뿐나에게 이제 고향에 갈만하다고 하셨다. “장하구나, 뿐나여. 장하구나, 뿐나여. 그대는 이러한 자기제어와 고요함이 구족하여 수나빠란따(sūnaparanta) 지방에서 살 수 있을 것이다. 뿐나여, 그대가 적당하다고 생각하면 지금이 가기에 좋은 시간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내심은 집중으로 인해서 얻어진다는 것입니다.
다섯째, 집중에 도움이 되는 법입니다. 이것을 사마디 빡키까 담마(samādhi pakkhika dhamma)라고 말합니다. 사마디(samādhi)는 ‘삼매’, ‘집중’을 뜻합니다. 이러한 집중과 길들인다는 뜻의 다모(damo)와 비슷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선정에 들어갈 수 있는 그 힘이 바로 다모(damo)라고 말합니다. ‘사마디 빡키까 담마(samādhi pakkhika dhamma)’는 ‘집중에 도움이 되는 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길들임의 마지막 단계는 삼매, 또는 집중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경전의 본문에 있는 ‘나 모나맛티 아사마히땃사(na monamatthi asamāhitassa)’는 ‘집중하지 못한 자는 성자의 삶을 살 수 없다.’는 뜻입니다. ‘성자의 삶’인 모나(mona)의 동사는 무나띠(munāti)인데 이는 ‘안다’의 뜻입니다. 이때 안다는 것은 네 가지 도의 지혜인 짜뚜 막가 냐나(catu magga ñaṇa)인 사성제(catu ariya sacca)를 안다는 것입니다. 네 가지 도의 지혜는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도의 지혜를 가진 성자를 말합니다. ‘집중하지 못한 자는 성자의 삶을 살 수 없다.’는 말은 붓다 시대부터 인도에 있었습니다. 이 말을 불교적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사마타에도 불교적 사마타와 힌두교적 사마타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성제와 팔정도 등 깨달음과 연결되지 않으면 불교가 아닙니다. 모든 수행법은 사성제 팔정도와 연결시킬 수 없으면 불교와 관련이 없는 것입니다. 요가도 집중력이 있는데 사성제와 관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성제와 팔정도는 오직 부처님의 가르침에만 있는 깨달음입니다.
경전본문에 있는 맛쭈(maccu)는 ‘죽음’, ‘죽음의 신’, ‘야마(Yama)라는 뜻인데 이때 죽음이라는 말이 바로 마라(māra)입니다. 그래서 맞쭈(maccu)나 마라(māra)는 모두 똑같은 죽음을 뜻합니다. 그러나 맛쭈(maccu)의 뜻을 보면 죽음 외에도 ’죽음의 신‘이라는 뜻도 있다는 것이 당시 인도사회에서 죽음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죽음은 단지 원인과 결과로 인한 자연스러운 현상일 뿐이지만 인도사회에는 죽음을 관장하는 신이 있다고 믿습니다.
맛쭈데이야 떼부마까 왓따(maccudheyya tebhūmaka vaṭṭa)는 ‘삼계에 윤회한다.’입니다. 윤회하는 세계는 크게 3가지로 나누는데 욕계, 색계, 무색계입니다. 저 피안은 빠라(pāra)인데 ‘죽음을 초월한 피안’입니다. 나 빠란띠(na parānti)는 ‘저 피안에 가지 못한다.’입니다. 자만을 즐기는 자인 마나까맛사(mānakāmassa)는 ‘저 피안에 못 간다’는 것입니다. 이때의 피안은 열반을 통해 괴로움이 없는 다른 세계로 건너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만을 즐기는 자는 열반에 이르지 못합니다. 따레이야(tareyya)는 ‘나온다’, ‘건너간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죽음의 언덕을 건너면 저 피안인데 바로 열반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빠뿐나에이야(pāpunnāeyya)는 ‘열반을 얻는다’와 같은 뜻입니다. 그래서 저 피안으로 간다는 뜻입니다.
열반에 들어가는데 장애가 되는 자만은 3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 세이야마나(seyyamāna)는 내가 더 뛰어나다는 자만입니다.
우월감은 항상 남과 비교해서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민족도 항상 비교해서 내가 우월한 민족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한국의 어느 대학에서 한국어 공부할 때 여러 나라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미국에서 온 학생이 우월감이 아주 심했습니다. 선생님 이야기 중에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바로 친구에게 전화해서 물어봅니다. 보통 모르는 게 있으면 선생님에게 물어봐야 하는데 친구한테 전화해서 물어본 것인데 선생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민족, 재산, 위치, 권력 등으로 뛰어나다는 자만심을 갖게 되고 아름답고, 잘 생기고, 지식이 많다는 등으로 뛰어나다는 자만심들을 많이 갖습니다.
둘째, 사디사마나(sadisamāna)는 나와 동등하다는 자만입니다.
나는 다른 사람과 똑 같다고 생각합니다. 동등하지도 않은데 동등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보다 뛰어난 사람을 나와 대등하다고 생각하며 자만심을 갖습니다. 너나 나나 똑같다는 자만은 지옥으로 떨어지는 악행은 아니지만 윤회를 돌리는 고리입니다.
셋째, 히나마나(hīnamāna)는 내가 다른 사람보다 못하다는 자만입니다.
스스로 비교를 해서 다른 사람보다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자기 비하도 정도를 넘어선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위와 아래로 가는 습관이 있습니다. 서로 비교해서 우월감, 동등감, 열등감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예를 들면 내가 서울 갈 수 있는데 ‘나는 가난해서 서울은 못가네, 나는 안 돼’라고 합니다. 자만의 배경에는 윤회의 배경이 있고 이는 무명을 뜻하는 아윗자(avijjā)와 갈애인 땅하(taṇhā)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3가지 자만심을 누구나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만히 있지 못하고 못난 사람을 괴롭히려하고, 힘 있는 사람에게는 비굴하고, 그래서 자만심이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또 가만히 두면 계속 자만심이 커나갑니다.
상윳따니까야에 자만심 경인 위다숫따(vidhā sutta)가 있는데 3가지 자만심이 나옵니다. 이 경에서 자만심을 없애는 길을 설하셨습니다. 위다(vidhā)는 ‘자만심’, ‘자부심’이라는 뜻입니다.
“비구들이여, 세 가지 자만심이 있다. 무엇이 셋인가? ‘내가 더 뛰어나다.’는 자만심, ‘나와 동등하다.’는 자만심, ‘내가 더 못하다.’는 자만심이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세 가지 자만심이 있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세 가지 자만심을 최상의 지혜로 알기 위해서는 …, 철저히 알기 위해서는 …, 철저하게 멸진하기 위해서는 …, 이것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4가지 바른 노력을 닦아야 한다.
네 가지 바른 노력(四正勤, cattāro sammappadhānā) S49:1 [Pācīnaninna-sutta] 동쪽으로 흐름 경입니다.
“비구들이여, 네 가지 바른 노력(四正勤) 있다. 무엇이 넷인가?
첫째, 아직 생겨나지 않은 악하고 해로운 법(不善法)들이 생겨나지 않도록, 의욕을 일으켜 정진하고, 정근하고, 마음을 다잡아 노력한다. 둘째, 이미 생겨난 악하고 해로운 법(不善法)들을 귾기 위하여, 의욕을 일으켜 정진하고, 정근하고, 마음을 다잡아 노력한다. 셋째, 아직 생겨나지 않은 유익한 법(善法)들이 생겨나도록, 의욕을 일으켜 정진하고, 정근하고, 마음을 다잡아 노력한다. 넷째, 이미 생겨난 유익한 법(善法)들을 유지하고, 사라지지 않게 하고, 증장하게 하고, 충만하게 하도록, 의욕을 일으켜 정진하고, 정근하고, 마음을 다잡아 노력한다.
첫째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악행이 일어나지 않게 노력하고, 둘째는 악행을 끊으려고 노력하면서 자만심을 철저하게 알 수 있다. 셋째는 아직 생겨나지 않은 선한 법을 일어나게 노력한다. 예를 들면 인도 성지순례를 한 번도 못했으면 한 번 해보려고 노력한다. 넷째는 이미 생겨난 선한 법을 바로 세우고 멈추지 않게 노력하고 혼란스럽지 않게 계속해 나아간다.
위의 경전에서 ‘비구들이여, 3가지 자만심을 철저하게 알기 위해서 4가지 바른 노력을 닦아야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8정도에 나오는 바른 노력으로 인해서 자만심을 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만심은 수다원도 행하고 있고, 사다함도 행하고 있고, 아나함도 행하고 아라한이 되어야 완전히 끊깁니다.
상윳따 니까야의 사밋띠경에서는 교만, 자만, 아만인 마나(māna)를 9가지로 설명하셨습니다. 세 가지 마나(māna)를 하나에 세 가지씩 나눠서 설명합니다. 마나(māna)라는 단어에는 ‘굳게 가진다’는 뜻이 있습니다. 마나(māna)의 원어 나네(ñāne)도 ‘나에 대한 마음을 굳게 가진다.’는 뜻입니다. 나에 대해 굳게 마음을 가질 때 자만심을 가지게 됩니다. 내가 교수다, 의사다, 박사다, 변호사다 하는 마음을 굳게 가질 때 자만심이 생깁니다. 비구도 내가 비구다, 하는 것도 자만심입니다. 우리는 마음을 항상 굳게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을 뿌자 마나(pūjā māna)라고 하고, 스님들께 올리는 공양은 다나 마나(dāna māna)라고 합니다. 여기서의 마나(māna)는 지극한 마음으로 올린다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아주 중요합니다. 마나(māna)는 굳게 다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마나(māna)는 교만, 자만도 있지만 자부심도 있습니다.
아나함이 될 때 번뇌가 많이 없어지지만 그래도 자만, 무지, 들뜸이 남아 있기 때문에 다시 한 번 정거천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아나함은 자만심을 완전하게 아는 것 까지는 되는데 아직 끊어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알지만 못 끊어서 아라한이 아니고 아나함인 것입니다. 우리도 알지만 끊지 못하면 아직 확실하게 안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모르는 것보다 아는 것이 낫습니다. 알면 언젠가는 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석서에 자만심이 많은 사람은 축생으로 태어날 가능성이 많다고 합니다. 전쟁도 자만심 때문에 일어납니다. 국회에서도 회의를 하다가 소리 지르고 싸우는 것은 성냄이나 욕망도 있지만 사실은 자만심 때문입니다. 나를 굳게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내 말을 누군가 비판하면 큰 소리가 나오고 싸우게 됩니다. 스님들도 법문하시다가 누군가 자기와 맞지 않는 질문하면 화를 내는 경우가 있는데 아라한이 아니어서 아직 자만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내가 더 뛰어나다는 세이야마나(seyyamāna)가 많고, 어떤 사람은 나와 동등하다는 사디사마나(sadisamāna)가 많고, 어떤 사람은 내가 다른 사람보다 못하다는 히나마나(hīnamāna)가 많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너무 착한 사람은 히나마나(hīnamāna)가 매우 강한 경우입니다. 사실 지나치게 자꾸 양보해주는 것은 베푸는 느낌이 아니고 두렵고 무서워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코끼리 길들이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착한 것이 아닙니다. 운전할 때도 이런 것이 많이 올라오는 것 같습니다. 큰 덤프트럭이 오면 나도 모르게 무섭고 두려워서 옆으로 비키게 됩니다. 우리는 항상 이런 세 가지 자만심들이 순간순간 많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합니다.
이런 자만심은 4가지 바른 노력으로 끊을 수 있습니다. 불자들이 절에서 행사할 때나 봉사할 때 더 이상 못하겠다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자만심 때문입니다. 절에서 업무를 보시는 분들이 많이 힘들어 합니다. 이때는 내 직장이 아니고 절이다, 부처님일이다, 봉사한다고 생각하면 덜 힘듭니다. 큰소리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하라고 시킨 것을 해 놓지 않았다고 큰소리치는 사람 등 다양한 사람들 속에서 자만심이 올라 올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세 가지 자만심을 끊기 위해서는 4가지 바른 노력을 닦아야 합니다.
다시 경전 본문에 있는 세존께서 말씀하신 게송을 살펴보겠습니다.
“자만을 제거하고 바르게 집중을 한 자는
고결한 마음으로 모든 곳에서 해탈하였다.
그는 홀로 숲에 거주하면서 게으르지 않아
죽음의 영역에서 저 으로 건너간다.”
이 게송은 계정혜의 3가지 배움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띳소 식카(tisso sikkhā)라고 하는데 3학(三學)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계정혜 3가지를 배워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3학을 배우면 ‘자만을 제거했다’는 것으로 뛰어난 계의 배움을 설하는 것이고, ‘잘 집중을 했다’는 것은 뛰어난 마음의 배움을 설하고 있으며, ‘고결한 마음으로’라는 것은 지혜를 나타내기 때문에 뛰어난 통찰지의 배움을 설하는 것이다. 라고 주석서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뛰어난 계를 아디실라(adhisīla)라고 하는데 아디(adhi)는 ‘~으로’, ‘~을 향해서’, 그리고 ‘뛰어난’이란 뜻이 있습니다. 그리고 실라(sīla)는 계(戒)입니다. 그래서 ‘뛰어난 마음’은 아디찟따(adhicitta)이고 ‘뛰어난 통찰지’는 아디빤냐(adhipaññā)라고 합니다.
여기서 왜 아디실라(adhisila)를 ‘뛰어난 계’라고 했는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계율은 모든 종교에 다 있습니다. 부처님 출현 이전에도 5계가 있었습니다. 부처님의 어머니가 매월 보름마다 8계를 받았다고 합니다. 불교와는 다르지만 보름마다 8계를 받았다고 합니다. 부처님이 되시기 전의 보살이 도솔천에서 계실 때 어머니 될 분을 찾았는데 계를 잘 지키는 어머니 마야부인을 선택했다고 합니다. 사실 왕비로서 계를 지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보름마다 8계를 받았습니다. 마야부인이 8계를 받은 한 가지 이유는 아이를 갖기 위해서 힌두교적 의식을 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5계, 10계는 일반적인 실라(sīla)입니다.
하지만 ‘뛰어난 계’라는 아디실라(adhisīla)는 빠띠목카(pāṭimokkha)입니다. 빠띠(pāṭi)는 ‘결속’이고, 목카(mokkha)는 ‘열반’을 뜻합니다. 그래서 빠띠목카(pāṭimokkha)는 열반에 결속되는 것입니다. 비구가 될 때 227계를 받습니다. 대승불교나 상좌불교의 핵심적인 빠라지까, 상가디세사, 바라이죄 등은 똑 같습니다. 이것을 아디실라(adhisīla)라고 합니다. 계라는 뜻의 실라(sīla)는 어느 시대나 있었지만 아디실라(adhisīla)는 없었습니다. 아디실라(abhisīla)는 항상 있는 것이 아니고 불교의 상가가 존재할 때만 있습니다. 아프리카나 어디에서나 계율 지키는 사람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뛰어난 계(戒)인 아디실라(adhisīla)는 없습니다.
다음에 아디찟따(adhicitta)는 ‘뛰어난 마음’입니다. 누구나 마음은 항상 있지만 아디찟따( adhicitta)는 색계 4선과 무색계 4선에 들어 갈 수 있는 마음입니다. 여덟 가지 선정을 앗타 사마빳띠요(aṭṭha samāppattiyo)라고 합니다. 우리도 선정수행을 하지 않았다면 마음은 있으나 팔선정(八禪定에 들어가지 않았으니 그냥 마음인 찟따(citta)입니다. 하지만 부처님은 뛰어난 마음인 아디찟따(adhicitta)가 있는 시대에 태어나셨습니다. 팔선정인 색계 4선과 무색계 4선을 얻은 사람이 많은 시대에 태어났습니다.
다음에 아디빤냐(adhipañña)는 ‘뛰어난 통찰지’입니다. 아디빤냐(adhipañña)는 위빠사나 지혜를 말합니다. 모든 생명의 특성인 무상, 고, 무아를 발견할 수 있는 통찰지혜를 아디빤냐(adhipañña)라고 합니다. 지혜는 많이 있지만 꿰뚫어서 아는 통찰지혜가 없으면 열반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뛰어난 지혜입니다.
다음에 수사마히따(susamāhita)는 ‘바르게 집중을 한’입니다. 앞에 수(su)는 ‘참으로’라는 뜻이지만 여기서는 ‘바르게’이고 사마히따(amāhita)는 ‘가라앉은’, ‘평온한’, ‘집중을 한’이라는 뜻입니다. 수쩨따사(sucetasa)는 ‘고결한 마음에 의해서’라는 뜻입니다. 고결한 마음을 가졌다는 것은 지혜와 함께 아름다운 마음을 가졌다는 뜻입니다. 삽바디 윕빠뭇따(sabbadhi vippamutta)는 ‘모든 곳에서 해탈하였다’는 뜻으로 모든 무더기와 감각장소 등에서 해탈했다는 뜻입니다.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 ‘죽음의 언덕에서 저 피안으로 건너가도다.’라고 하는 것을 보면 아라한을 얘기한다고 봐야합니다. 아직 아라한의 되기 전의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은 죽음의 피안을 건넌 것은 아닙니다.
계, 집중, 지혜가 있는데 집중은 ‘다모(damo)’라는 단어로 표현했습니다. ‘교만을 즐기는 자’ 경에서 중요한 단어가 다모(damo)입니다. 집중을 한 자는 길들인 자이고, 집중을 하지 못한 자는 길들이지 못한 자입니다. 집중을 하면 자만심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지만 가라앉습니다. 색계에 들어가는 초선에서 제 4선을 얻은 자들은 색계에 태어납니다. 아나함은 정거천에 태어납니다. 부처님께서는 알아차림과 함께 집중을 강조하셨습니다. 집중을 하면 위빠사나 지혜를 얻게 되는 것이 어렵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항상 강조하시는 것이 ‘사띠(sati), 사마디(samādhi)’입니다. 이것이 바로 알아차림과 집중입니다. 알아차림과 집중이 팔정도에 계와 정입니다. 계와 정이 충족되면 다음에 혜가 생겨 계정혜 팔정도가 완성됩니다.
맛지마니까야의 마하 짯따 숫따(mahā catta visāka sutta)에 삼마 사마디(sammā samādhi)와 아리요 사마디(ariyo samādhi)가 나옵니다. 삼마 사마디(sammā samādhi)는 올바른 집중이고 반대는 아삼마 사마디(asammā samādhi)입니다. 아삼마 사마디(asammā samādhi)는 바른 집중의 반대라서 집중이 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러나 아리요사마디(ariyo samādhi)는 성스러운 집중으로 사성제와 팔정도를 말합니다. 반대는 아나리요 사마디(anariyo samādhi)입니다. 팔정도를 행할 때 아리요 사마디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아니리요 사마디(anariyo samādhi)는 팔정도를 행할 때의 성스러운 집중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이여! 아리요 사마디(ariyo samādhi)란 무엇인가? 팔정도에서 삼마 사마디(sammā samādhi) 외에 7개가 아리요 사마디(ariyo samādhi)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리요 사마디(ariyo samādhi)는 수행을 많이 한 제자들에게 가르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누구한테 얘기 한 것인가에 따라 내용이 다릅니다. 일반적인 재가자에게는 팔정도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경전을 볼 때는 법을 설할 때의 환경을 보면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집중을 이룬 사람에게는 성스러운 집중인 아리요 사마디(ariyo samādhi)를 얘기하십니다. 성스럽다는 것은 도과를 성취한 성자가 된 것을 말합니다. 이때 선정수행에서는 근접집중과 근본집중을 말하지만 지혜수행인 위빠사나에서는 찰나집중을 말합니다.
청정도론에 팔정도 계, 정, 혜를 계율 6가지, 집중 50가지, 지혜 31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올바른 집중인 삼마 사마디(sammā samādhi)를 하려면 계율인 실라(sīla)가 중요하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집중인 사마디(samādhi)를 얻을 수는 있지만 흔들리지 않는 사마디(samādhi)를 얻으려면 계율이 중요합니다. 계율을 확실히 잘 지키면 그 사람의 집중도 큰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계율이 없는 집중은 혼란이 올 수 있습니다. 계율이 없는 집중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사실 악업을 지을 때의 집중은 선업을 지을 때의 집중보다 더 심혈을 기울여서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집중도 바른 집중이어야 합니다.
짱까마 숫따(caṅkama sutta)인 ‘경행의 경’, 또는 ‘걷기 명상 경’에서 ‘경행으로 얻은 집중은 쉽게 무너지지 않고 오래 간다’고 나옵니다. 집중을 한 상태를 에깍가따(ekaggatā)라고 하는데 마음이 하나로 모아진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집중이 잘 된 상태입니다. 이러한 하나에 집중하는 것은 걷기 명상에서도 얻을 수 있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에서 노력이 부족하다고 할 때는 경행의 집중이 부족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경행에서 만들어진 집중력의 힘이 생길 때 좌선의 집중력이 증장됩니다. 여러 가지 종류의 집중이 있으며 상윳따 니까야에서 모두 접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부처님께서 이 설명을 누구에게 하고 있는 것인가 인데 지금 ‘교만을 즐기는 자 경’은 색계천신에게 하고 있습니다. 인간세상의 수행자들에게는 항상 팔정도와 사성제를 가르쳤다고 봐야합니다.
압빠맛또(appamatto)는 ‘방일하지 않는다’, ‘게으르지 않게’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불방일(不放逸)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부처님의 마지막 말씀도 ‘와야담마 상카라 압빠마데나 삼빠데타(vayadhammā saṅkhārā, appamādena sampādetha)는 ’형성된 것들은 소멸하기 마련이니 열심히 정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법구경에도 압빠마나왁가(Appamāṇavagga) ‘게으르지 않는 품’이 따로 나옵니다. 빠라(pāra)는 ‘피안(彼岸)’, ‘다른 쪽’이라는 말인데 고통의 바다를 건너가거나 다른 쪽의 세계로 갈 때 게으름을 피우면 건너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피안이나 다른 쪽은 열반의 세계를 말합니다.
아랸냐(arañña)는 숲입니다. 아란냐(arañña)는 나무가 있고, 공원과 같이 마을에서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곳입니다. 제따와나와 웰루와나도 사원 자체가 숲이고 마을 중심에 있었습니다. 산 속 깊이 있는 숲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쉽게 올 수 있는 거리에 나무가 있는 사원을 말합니다. 요즘은 콘크리트로 절을 짓기 때문에 절에 아란냐(arañña)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다가가기 어려운 숲이 아니고 마을과 가까운 명상원이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명상원이라는 개념은 아란냐(arañña)와 가깝고 도시에 있는 사원은 스님들이 머무는 곳이라는 뜻의 위하라(Vihāra)와 가깝습니다. 수행을 하시는 빠띠빠띠(patipatti) 스님들은 아란냐(arañña) 쪽이고, 교학을 하시는 빠리야띠(pariyatti) 스님들은 위하라(Vihāra) 쪽입니다.
부처님은 제따와나와 같은 아란냐(arañña)에 계셨는데 방에는 주무실 때만 계셨고 방에 계실 때는 항상 문을 닫고 계셨다고 합니다. 쉴 때는 나무 아래에서 쉬셨습니다. 수행을 하시는 빠띠빠띠(patipatti) 스님들은 홀로 숲에 거주하며 게으르지 않고 정진하고 어울려 살지 않고 각자가 따로 수행 했습니다.
< 질문과 답변 >
(질문 1) 청정도론에 나오는 명상주제 40가지가 언제부터 있었나요?
(답변 1) 청정도론에 있는 사마타 명상주제 40가지는 경전에 40가지로 나오는 게 아닙니다. 붓다고사 스님이 당시 인도 수행자들이 했던 사마타수행을 정리한 것입니다. 경전에는 자애명상, 죽음관찰 명상, 부정관, 사념처 수행들이 나옵니다. 부처님이 만났던 제자들은 사마타를 많이 닦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집중력을 얻은 자들이 많았습니다. 부처님은 항상 사성제와 팔정도로 연결시켜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덟 가지 선정을 앗타 사마빳띠요(aṭṭtha samāpattiyo)라고 하는데 색계 4선정과 무색계 4선정을 얻은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 두 가지 선정을 합쳐서 8선정이라고 합니다.
불교이전에 있었던 힌두교 8선정과 불교 8선정이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청정도론에 있는 40가지 사마타 수행법은 부처님 이전과, 부처님 당시, 그리고 부처님 이후의 수행법을 총 정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청정도론 이전에는 대념처경 등을 중심으로 수행했습니다. 부처님 계실 때는 부처님에 대해 수행하는 붓다누빠사나(Buddhanupassana)는 없었고 열반 후에 생긴 것입니다.
붓다고사(Buddhaghosa) 스님은 인도의 브라흐만 출신으로 자이나교 수행자였다가 불교로 개종한 분입니다. 붓다고사 스님의 스승인 레와따 스님의 권유에 따라 스리랑카에 와서 상좌불교인 테라와다를 도와 부처님의 말씀을 정리해서 주석서를 만들었습니다. 그 뒤 인도로 돌아가셔서 열반했습니다. 청정도론에 나온 사마타 40가지 주제가 매우 중요합니다. 청정도론인 위숫디막가(Visuddhimagga)의 복주석서가 스리랑카에서 나왔고 복주석서에 대한 주석서도 많이 나왔습니다. 여기에 청정도론에 대해 찬성도 있을 것이고 비판도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은 깨닫기 전에 무색계까지 선정을 이루고 나서 도과를 성취하셨고 제자들도 8선정을 이루고 나서 도과를 얻은 자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선정은 얻지 못했지만 열반을 증득한 아라한들도 많이 나왔습니다. 선정을 하지 않고 아라한이 된 경우를 순수 위빠사나라고 합니다. 이 분들은 모두 선업의 공덕으로 부처님 시대에 태어난 것입니다.
상윳따 니까야에 우리가 궁금해 하는 것이 거의 다 들어가 있습니다. 깟사빠 존자가 부처님께 옛날에는 아라한이 많이 나왔는데 요즘은 왜 많이 안 나오는지 물어봅니다. 공덕바라밀을 가진 자는 빨리 법을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공덕을 불교에서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다음 생에 뭔가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법을 만날 기회, 열반으로 가는 길에 공덕이 중요합니다. 공덕이 없으면 기회를 놓칩니다.
부처님의 말씀이 있을 때까지는 도과를 성취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 말씀에 공겁시대에는 인간세계가 사라지지만 색계나 무색계에서는 있다고 했습니다. 정거천에 계신 아나함들은 깟사빠 부처님 시대에 계셨던 분들도 계신다고 합니다. 욕계 도솔천인 뚜시따(tusita)의 하루는 인간세계에서 100년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기회를 얻는 것은 공덕을 쌓은 일입니다. 지금 여기 와서 상윳타니까야 공부하는 것이 바로 공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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