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의 물결
신삼숙
“변화란 단지 삶에서 필요한 게 아니다. 삶 그 자체다. Chang is not merely necessary to life-It is life”
2016년 6월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 부고 시 토플러재단 홈페이지에 올라왔던 문구다.
최근 우리는 거센 변화의 물결 속에서 살고 있다. 우리가 원하던, 원하지 않던 변화는 우리의 생활 속으로 빠르게 들어오고 있다. 인공지능이라는 거대한 쓰나미가 물밀 듯이 밀려오고 있다. 익숙한 거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아 오늘날 AI의 대유행을 알면서도 애써 외면하며 구경만 하고 있다. 나한테도 순식간에 파도가 덮칠지도 모르는데 ’설마, 내게 까지‘ 하며 방관한다. 우선 용어가 낯설고 더딘 머리로 뜻을 공부해야 함도 귀찮았다. 편하게 살 수 있으면 그리 살고 싶다.
처음 스마트폰을 접하게 되었을 때도 그랬다. 새로운 문물에 끌리면서도 두려움이 앞서 잘못 건드려 이상하게 되면 어쩌지 싶어 마음대로 폰을 건드리지 못했다. 그리고 늦은 나이의 새로운 배움에 이해도 빠르지 않아 힘들었다. 용기가 필요했다.
’예술가는 왜 AI 기술을 알아야 할까‘ 라는 수업에 참여하게 됐다. AI를 멀리하려고 해도 이미 우리 생활에 깊숙이 안으로 들어와 있어서 마냥 회피할 수만은 없지 않나 하는 생각에서다. 작지 않은 강의실인데 사람들이 꽉 차 있다. 늘 느끼는 일이지만 나보다 모두 연령대가 낮아 보인다. 직원이 내 옆으로 오더니 “노트북을 가지고 오셨나요“ 묻는다. 안 가져왔다 하니 노트북을 가져다준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게 불안 같은 거는 없었다. 오히려 호기심이 당겼다.
강사는 산업혁명의 발달사를 시작으로 4차 혁명 AI 시대까지 설명을 끝내고는 실전으로 들어갔다. 노트북을 열어서 구글이나 지메일 혹은 뤼튼 중 하나를 택하라 했다. 나는 모두 사용하지 않는 것들이다. 평소에 네이버나 다음만 사용하기에 난감했다. 조용히 직원이 다가와 구글에 가입시켜 주었다. 쳇gpt를 불러오라 한다. 쳇gpt와 대화를 시도하려는 모양이다. 옆에 사람의 자판 두드리는 소리에 신경이 거슬린다. 타타타탁 거리며 강사의 말을 따라가는데, 내 자판은 탁 탁 탁하며 더디기만 해 강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다. 할 수 없이 가만히 혼자 따로 놀았다. 마침 쓰고 있던 글인 별에 대해 알려달라 요구하니 거창하게 서론, 본론, 결론을 만들어 길게 늘어놓는다. 기계와 노는 게 재미있으면서도 놀라워 약간의 공포가 스며든다. 혼자만 더듬거리니 멋쩍고 수업 분위기에 민폐를 끼치는 듯해 결국, 중간 쉬는 시간에 강사에게 양해를 구하고 수업을 나왔다.
중도 하차한 내 마음이 편하지 않다. 무조건 피할 수만 없다는 판단에서 우선 AI가 정확히 무엇인지 알아보았다. 책(창의성을 디자인하라-조병익 지음)을 한 권 읽었고, 도서관에서 하는 ‘인간중심 AI, 인문학이 답이다’라는 강의를 들었다. 이 강의는 실습이 없는 설명만 있는 강의였다. 유명하다는 강사의 유트브도 시청했다. 아주 조금 어렴풋이 머리에 들어왔다.
AI는 영어 ‘artifcial intelligence’의 약자로서 흔히 ‘인공지능’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하지만 인공지능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떠한 방식을 통해서 작동하는지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없어 두려움이 앞서는 것도 사실이다.
AI는 인간의 학습능력, 추론능력, 지각능력을 인공적으로 구현하려는 컴퓨터 과학의 한 분야이다. 인간을 포함한 동물이 가지고 있는 지능, 즉 자연 지능과는 다른 개념이다.
AI시대에 “당신이 생각하는 미래는?” 강사가 수강생들에게 던진 질문이다. 유토피아 vs 디스토피아로 나누어졌는데 대답은 반반 정도였다. 내 생각은 기대와 걱정이 반반이었다.
‘인공지능과 협업하는 작가의 시대‘도 같은 생각이다. 내가 이해한 바로는 현재로는 생성형 AI가 충분히 신뢰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라고 한다. 실시간 정보를 수집하는 게 아니라 사전에 학습된 데이터만 가지고 답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부정확한 정보를 제공할 수도 있다. 실제로 쳇gpt하고 대화를 나누면 쳇gpt가 절대로 밀리지는 않지만, 나중에는 엉뚱한 대답을 했다고 한다. 이는 대답에 가까운 단어를 찾다 보면 가짜를 진짜같이 답을 하는 경우가 있다. 더구나 AI는 사람의 마음을 갖고 있지 않다. AI는 진실보다 사용자가 듣고 싶은 대답을 내놓는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AI의 아첨을 경계해야 한다.
글쓰기에 보조적 수단으로 사용할 수는 있겠지만 전적으로 기대서는 안 되지 싶다. 사람이 읽고, 쓰는 역량은 생각하는 힘을 만드는 근원이다.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잃을 수도 있다. 독립적인 문제 해결 방법에도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이미 스마트폰에 의존하고 있는 우리의 일상을 봐도 알 수 있다. 언젠가부터 전화번호, 노래 가사, 도로명을 외우지 못하는 자신을 본다.
AI는 상대방의 감정을 읽거나 적절한 피드백도 해줄 수 없다. 한편 시대의 흐름에 맞춰 살아가는 게 대세지 싶으면서도 마음속에서는 용납이 안 된다.
인공지능 시대에 슬기로운 생활 나도 하고 싶다. 그러려면, 겁부터 내지 말고 어시스턴트로 삼고 활용을 제대로 하는 방법을 익혀야 한다. 좀 더 적극적으로 AI에 관심을 가져야 함은 물론이고 배움이 필요하다. 패기와 힘을 내서 인공지능에 가까이 가봐야겠다.
글쓰기에 조력자로서 내 옆에 친구로 삼아 같이 가고 싶은데 가능하기나 한 지, 갈 길이 멀어 보인다.
신삼숙
서울 출생
2018년 『월간문학』 수필 등단
한국문인협회, 강서문인협회, 대표에세이, 리더스 에세이 회원, 리더스 에세이 사무국장
저서: 『모자 죽음보다 깊은 생』, 『눈물 도둑』
공저; 『스승의 초상』, 『예술 술과 겨루다』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