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다림에 목숨 거는 것이 아니고 목숨을 걸기 때문에 기다리는 것이다.
[시민포커스=조한일 기자]
명품대전 名品大戰
정경화
영하 9도 백화점 앞 노숙의 텐트 행렬
밤톨 같은 막내아들 밤새워 떨고 있다
선착순 한정판에 꽂힌 저 구겨진 기다림
느린 햇살 바투 당겨 신발끈을 조인다
핏빛 눈자위에 좀비보다 역한 걸음
목숨 건 에스컬레이터, 역주행도 불사한다
아들아 부디 빈손, 더 처절히 돌아오렴
꽉 깨문 그 희망엔 치사량의 독이 있어
젊음의 서사를 잃은 MZ세대의 오픈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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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에 ‘독’이 있다니? 그것도 ‘치사량’만큼이나...., ‘희망’을 구성하는 성분은 의심의 여지 없이 “순기능”을 위한 성분 간 비율 정도나 사람마다, 상황마다 다를 것이라 믿었던 게 후기 586세대의 왜곡된 믿음이었음을 느낀다. 희망을 논함에 가슴이 저리긴 처음이다.
‘아들아 부디 빈손, 더 처절히 돌아오렴“ 이 문장을 시인은 몇 번의 퇴고를 거쳐서 세상에 내놓았을까? 머리를 망치로 맞은 듯하다. 끝내는 명품끼리 싸우는 “전쟁터”에서 ‘막내아들’의 “빈손 귀환”을 기원하는 모성애에 무릎을 쳤다. “명품 득템”을 위한 ‘독’이 든 성배 같은 희망을 악착같이 버리지 않는 아들에 대한 조기 early “참교육”을 본다.
“얼리어답터 early adopter”이라는 “종족 種族”이 출현한 지 이제 제법 되었다. 사냥을 위해 활과 화살, 창을 들고 맨몸으로 뛰어다니던 선사시대에도 ‘선착순’의 룰은 있었다. 또한 지금의 “선택적” 노숙, 텐트, 추위도 당시의 “불가피한” 강과 숲과 늪과 바위에서의 ‘기다림’을 그들의 후손으로 추측되는 “얼리어답터”가 ‘구겨진 기다림’으로 재현하고 있다. 다만 그때는 “죽고 사는” 문제였던 ‘기다림’이 지금은 “사고 죽자”는 문제로 변이를 일으켰다. 그러다 보니 ‘좀비’의 걸음을 능가하는 앞뒤 가리지 않는 ‘역한 역주행’에 ‘목숨’까지 거는 무모함과 ‘핏빛 눈자위’가 없으면 결격사유가 되어 슬로어답터 slow adopter로 신분이 ‘역주행’한다.
이 시대, 이 땅의 MZ세대는 시인의 언급처럼 ‘빈손’과 대전 大戰으로부터의 ‘처절한 귀환’을 그들의 언어 “현타”로 받아들이는 데 대부분 익숙하다. 취업, 집, 결혼과 교육에 ‘희망’을 ‘꽉 깨물어’ 심신에 ‘독’이 퍼져 있다. 이제 ‘오픈런’하지 않아도 되는 기다림을 위한 해독제가 필요하다.
기다림에 목숨 거는 것이 아니고 목숨을 걸기 때문에 기다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