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短篇小說
두 개의 별을 품다
전 미 야
차는 남해고속도로를 달린다. 조수석에는 수지가 햇살이를 안고 앉았다. 곱던 단풍도 끝물이어서인지 차량통행량이 적어져 도로는 정체되지 않고 비교적 잘 빠진다. 수지는 오디오 시디에서 나오는 발라드를 듣다가 유에스비로 돌린다. 시어머니인 승혜한테는 묻지도 않은 채다. 말없이 핸들만 잡고 있지만 왜 음악을 바꿨는지 알고 있다. 승혜는 올드 팝을 좋아한다. 늘 들어도 질리지 않고 감미로운 음률이 좋아 올드 팝을 유에스비에 저장해 차에 넣고 다니지 않는가. 수지도 그런 시어머니의 취향을 알기에 바꿨을 것이다. 오디에서는 알리다 겔리의 ‘아모레미오’가 잔잔하게 흘러나온다.
-내 사랑, 내 사랑, 내 사랑, 나의 사랑. 당신 품에 있으면 모든 고통을 잊어버려요.
승혜가 좋아하는 곡이다. 그녀는 아모레미오를 따라 부른다. 수지도 같이 흥얼거린다. 함께 노래를 부르는 그들은 걱정이라곤 해보지 않고 살아온 것처럼, 얼굴에 한 점의 그늘도 없다. 마치 친구인 듯 딸이듯 그러했다. 고부 사이인데도 말이다.
“어머니, 이 노래 좋지요?”
“그래, 많은 세월이 흘러도 지금까지 사랑받는 건 애절해서가 아닐까?”
“맞아요. ‘죽도록 사랑하여’란 제목부터가 심금을 울리잖아요. 들어도 들어도 질리지 않고 말예요.”
할머니와 엄마가 노래를 부르니 햇살이도 좋은지 방아깨비가 디딜방아 찧듯 훌떡훌떡 뛰며 꽥꽥 고함을 지른다. 차 안에는 웃음이 흐르고 마치 가을놀이를 떠나는 가족처럼 흥겹다. 차창 밖으로는 늦가을의 정취가 펼쳐졌다. 수지는 세상에, 이 아름다운 세상에, 라며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부산을 빠져나와 장유쯤 달리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아들이었다. 승혜는 핸들에 장착된 통화버튼을 눌렀다.
“엄마! 어디쯤이세요?”
“응, 지금 장유를 지나는 중이야. 아마 점심때쯤 도착될 것 같으네.”
“힘들 텐데 운전 수지한테 맡기지요?”
“나 아직 젊은데? 수지랑 얘기해.”
수지는 시어머니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불쑥 끼어든다.
“왜?”
저들의 이야기는 얼마 동안 이어진다. 자기도 함께 가고 싶었는데 하필 비상근무라서 그러지 못해 미안하다고, 엄마하고 좋은 시간 보내라고. 수지는 또 들으라는 듯 말한다. 모처럼의 어머니와의 좋은 데이트에 방해가 되니 얼른 전화 끊으라 한다.
지난번 차를 바꿀 때 기종을 잘 선택했다는 생각이 든다. 오디오와 휴대폰이 블루투스로 연결되어 터치만으로 자유롭게 통화할 수 있고 가족이 함께 통화할 수 있어 더 맘에 든다.
승혜는 차창 밖 풍경에 잠시 정신을 빼앗기는 수지를 힐끗 곁눈질해 본다. 컬러플한 레깅스에 카키색 롱 재킷을 입고 앵글 부츠에 긴 호피 머플러를 한 수지가 제법 세련돼 보인다. 늘 곰 같은 며느리보다 여우 같은 며느리가 부러웠는데 이제 여우짓을 하지 않는가.
그랬다. 수지는 너무 많이 달라졌다. 시어머니 취향에 맞춰 음악을 바꾸는가하면 껌을 꺼내서 입에 넣어주기도 한다. 거기다 햇살이 자랑까지 늘어놓곤 하는 수지를 보며 처음 명성한의원 갔을 때를 떠올린다.
그 때도 오늘 같기만 했으면 여북 좋았을까? 그땐 말이 없었다. 꼭 사형장에 끌려가는 죄수같이. 그런 수지의 기분을 풀어주고 싶었지만 차 안에서 어떻게 해줄 뾰족한 수가 없었다. 하여 애꿎은 음악만 바꾸곤 했다. 그랬는데도 수지는 다 귀찮다는 얼굴로 눈만 감고 있었다. 그런 수지였는데 오늘은 저토록 이쁜 짓을 하지 않는가. 그래, 제 마음의 감옥에서 해방된 게야. 많은 날 스스로를 옭아매어 자신을 가둬놓고 더 굳게, 더 단단하게 못질을 해놓고 그 속에 갇혀 살았는데 이제 그 감옥에서 풀려난 게야.
“우리 쉬어가자.”
“벌써 휴게소예요?”
“그래. 화장실도 가고 차도 마시고.”
그녀는 차선을 바꿔 휴게소로 들어갔다. 화장실에 들렀다가 햇살이를 받아 안는다. 그러고는 곧장 휴게실 통로를 따라 뒤편으로 나간다. 수지는 커피와 우유를 들고 뒤따랐다. 그곳은 차가 복닥거리는 휴게소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조용하고 풍광 또한 아름다웠다. 아름드리 느티나무는 잎을 반쯤이나 떨어내어 조금은 허허롭게 보였지만 주변은 아직도 가을 정취가 물씬 풍겨졌다. 그들은 그 날처럼 통나무로 된 의자에 앉는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와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간다. 떨어진 느티나무 잎들이 쏟아지는 가을 햇살 속에서 바람에 쓸려 굴러간다.
구르는 낙엽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승혜는 일어나 햇살이를 수지에게 넘겨주고는 바람에 쓸려가다 몰린 낙엽 더미로 가 몇 잎 주워든다. 울긋불긋 물든 것, 벌레 먹은 것 등이다. 그녀는 가방을 열고는 수첩을 꺼내 그것들을 갈피에 한 장 한 장 끼워 넣는다.
“어쩜 소녀 같으세요.”
지켜보던 수지의 말이다. 비록 나이 먹었지만 그녀는 아직도 가을이면 예쁜 단풍잎들을 주워 책속에 꽂아두었다가 차를 마시거나 할 때면 그 마른 잎들을 찻상에 올려 장식을 하기도 한다.
“이곳 너무 좋아요.”
“그래, 여기는 봄은 봄대로, 가을은 가을대로 운치가 있어 좋아. 지난 봄에 왔을 때도 좋았잖아.”
“맞아요. 지금은 단풍이 들었지만 그땐 녹색으로 뒤덮여 싱그러웠어요.”
시선을 멀리 주변을 둘러본다. 바람결은 여전하다. 바람 냄새가 나는 것 같다. 나뭇잎 냄새도 나는 것 같다. 그런 냄새들을 코 끝으로 느끼며 커피를 마시다가 승혜는 키득키득 웃는다.
“어머니 왜요?”
수지가 묻는다. 승혜의 그 웃음은 지난 봄 수지와 이곳에서 커피 마시던 일이 떠올라서이다. 그렇지만 수지에겐 그냥 좋아서라고 둘러댄다. 지금처럼 수지가 헤실거렸더라면 벌서듯이 그렇게 마시지는 않았을 게 아닌가.
그날 수지가 사다준 커피는 너무 진했다. 미워 일부러 그런 걸 샀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마시기가 거북할 정도였다. 그런데 수지의 기분이 영 아니어서 물을 더 부어 오라기도, 자신이 가서 그러기도 어려웠다. 그날은 좀 그랬다. 하여 그 진한 커피를 음미하듯 한 모금씩 한 모금씩 마셨으니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날 수 밖에. 그래도 수지 기분을 풀어주려고 들렸던 휴게소인데 말이다. 아무튼 그날 기분은 피차 그랬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내내 별 말도 없이 앉아 있던 수지가 물었다.
“이런 곳이 있는 줄 어떻게 아셨어요?”
“지난 해 친구들과 쌍계사 가면서 쉬어갔니라. 그런데 너 많이 피곤해 보인다. 어디 아파?”
“아니요. 요즘 들어 좀 피곤하네요. 감기인가 봐요.”
“혹시……!”
“아니에요.”
두 사람은 멋쩍은 웃음을 짓는다. 의자에 앉아 앞을 바라보니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발아래로는 강이 흐르고, 백사장이 있고, 들판이 보이고, 멀리는 병풍처럼 푸른 산이 둘러쳐져 있다. 전날 내린 비로 더 선명해진 푸른빛에 산들은 키가 한 뼘씩이나 커진 듯했다. 그 푸른빛에 마음을 빼앗기면서도 승혜는 가슴 한 구석이 찬바람 후려치듯 시리다. 자식이라고 달랑 하나 있는데 서로 마음 터놓고 도란도란 이야기라도 하고 간다면 좋을 텐데 싶다. 하지만 더 앉아 있어본들 궁색한 대화뿐일 게 뻔하다. 승혜가 일어나니 수지도 일어난다. 그들은 다시 차를 타고 남해를 향해 달린다.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의 그 한 뼘 남짓한 거리인데 마음은 지구의 이 끝에서 저 끝에 앉은 것처럼 너무도 멀기만 하다. 그러다보니 곁에 앉은 시어미의 존재가 보일 리 만무이리라. 입을 딱 닫은 채 눈은 감거나 뜨더라도 먼 풍경을 바라보는 게 고작이다. 뭔가 거리감을 좁히려 말을 던지면 예, 아니오, 란 말만 겨우 나올 뿐이다. 그러다보니 그녀도 입을 열기가 쉽지 않다.
승혜는 수지와 통화할 때면 정이 그리워 때론 ‘사랑해’라는 말을 하곤 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부터인가 그런 말을 하지 않게 됐다. 정이란 게 갈망한다고 해서 샘물처럼 솟아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수지에겐 그 말이 오히려 스트레스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고 싶고 받고 싶은 그런 감정들도 꿀꺽 삼키고 안으로 눌러야만 했다. 이를테면 한 폭의 그림처럼 그저 바라보아야만 했다. 더 가까이 하면 안 될 것처럼 마음에 일정한 선을 긋고 살아야 했다. 하여 아들 둔 게 조금 분하달까 원통하달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살다보면 서운함도 시린 마음도 시나브로 사위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차는 고속도로를 벗어나 국도를 달린다. 하늘도 파랗고, 바다도 파랗고, 빽빽하게 늘어선 벚나무의 잎들도 푸르게 넘실거리고, 논에 마늘도 웃자라 파랗다. 남해대교의 빨간 교각이 보이고, 간간이 파래를 뜯어 줄에 널어놓은 것도 보이고, 사람들도 지난다.
작은 어촌마을로 들어서니 내비게이션은 친절하게 목적지 주변에 왔음을 알린다. 바로 건너편에 ‘명성한의원’이란 간판이 보인다.
승혜와 수지는 그 한의원 건물을 보고 좀 의아해 한다. 그토록 유명한 한의원이라면 적어도 번듯한 외양의 건물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저 평범한 한옥이 아닌가. 바다를 보고 들어앉아 있어서 파도가 밀려와 부딪히는 게 훤히 보였다.
기역자형으로 된 건물은 한의원으로 쓰이고 곁에 있는 다른 건물이 살림채인 듯 했다. 건물로 이어지는 길 양쪽으로는 조그만 밭을 일구어 놓았다. 상치, 쑥갓, 파, 고추 등이 서로 다투어 자라고, 샛노란 쑥갓 꽃, 장다리꽃은 흐드러지게 피어 꽃 몸살을 앓게 한다. 그녀는 한의원을 간 게 아닌 시간 속 추억여행이라도 온 것처럼 쑥갓의 긴 대궁을 떼어 꽃을 코에 대어 본다. 진한 꽃향기에 외할머니 냄새가 나는 듯 했다. 어릴 때 엄마를 따라 외가에 가면 외할머니가 하얀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서 김을 매곤 했다. 그러면 외할머니의 뒤꽁무니를 따라 쑥갓 밭에도 들어가곤 했는데, 그러노라면 쑥갓 꽃들이 스치면서 향기가 맡아지곤 했다. 그 꽃을 여기서 본다.
한의원 출입문을 밀고 들어선다. 실내는 한옥을 개조해서 만들어졌다. 거실을 가운데 두고 진료실, 침구실, 물리치료실 등으로 나뉘어 있었다. 고향집처럼 편안한 느낌이었다.
“부산에서 왔습니다. 어제 전화한…….”
“아, 네! 사모님이시군요. 이리 들어오십시오.”
그녀는 수지와 같이 진료실로 들어가 앉았다. 황토색 생활 한복을 입은 한의원 원장은 의사 같지 않고 옆집 아저씨처럼 소탈하고 푸근한 인상이었다.
원장은 수지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고 혀를 내어보라 하는 등 문진에서 맥진까지를 끝냈다. 그러고서 하는 말은 지금은 감기 기운이 있고, 자궁이 차서 임신이 안 되는 것일 뿐이니 약을 두 제 정도 먹으면 좋은 소식이 있겠다는 것이다.
“원장님! 고맙습니다.”
승혜는 손자를 가졌다는 말도 아닌데 허리를 굽혀 몇 번이나 고맙다고 했다.
한의원을 나서는 발걸음은 더없이 가볍다. 사람의 마음이 이토록 간사한지. 오던 길보다 돌아가는 길에 보이는 것들은 내내 같은 풍경이었음에도 그 빛조차도 달라 보였다.
집에 들어서니 기다리고 있었던 듯 남편과 아들 태민이가 맞이한다. 그들은 어떤 이야기를 듣고 왔는지 퍽이나 궁금한 기색이다. 허나 승혜는 벽에 걸린 시계를 보곤 바쁘게 옷을 갈아입고 주방으로 들어간다. 며느리도 부엌에 들어선다. 그녀는 생선이라도 구워보려는지 냉동실을 열고는 한참을 서 있다가 그냥 문을 닫는다. 승혜는 피곤하다. 수지도 그럴 것 같아 아침에 먹던 반찬을 냉장고에서 꺼내어 간단하게 저녁 식탁을 준비한다.
별다른 이야기 없이 식사를 끝낸 남편과 아들은 거실로 나가 티브이를 본다. 그녀도 설거지는 수지에게 맡기고 주방을 나온다. 남편은 그녀가 곁에 앉자 흘끗 쳐다본다. 승혜는 남편이 뭘 궁금해 하는지를 잘 알고 있다. 허나 모르는 척 딴청을 부린다. 그러는 것은 너도 속 좀 터져봐라, 그런 심사인 것이다. 그동안 남편은 마음 좋고 인자한 시아버지였고 악역은 그녀 몫이 아니었던가. 답답하면 그저 애먼 승혜나 들볶았다. 대를 이을 손자를 봐야 한다, 병원에 데려가 봐라, 용한 한의원이 있다더라 하면서 말이다.
승혜의 속마음을 알 턱이 없는 남편은 혼자서 한숨을 푹푹 내쉬더니 늦가을 서리 맞은 고구마 잎처럼 축 늘어진다. 그 눈빛은 서글픔이랄까, 낭패감이랄까, 그런 게 서려 있다.
“왜?”
“…….”
“머리 아파?”
“……조금.”
남편은 그 말도 성가시다는 듯 눈을 감고는 소파에 등을 비스듬히 기댄다.
“약 두 제 지어놓고 왔어. 그것 다 먹으면 당신 할아버지 될 것이라네.”
“뭐?! 참말로?”
남편은 비스듬히 기댔던 상체를 벌떡 일으켜 앉으며 반색한다.
“그렇다니까.”
믿기지 않는지 거듭거듭 확인하며 남편은 너털웃음을 웃는다. 왜 진작 말하지 않았느냐며 눈을 흘겨보기도 한다.
그처럼 흡족한 얼굴이면서도 남편은 묻는다.
“그 약, 효험이 있을까?”
“그런 약이 어디 있겠어요. 답답하니 먹어보는 거지.”
“핏줄이 뭐라고 또 집착을 하니…….”
얘기를 하다 보니 지난 일들이 떠오른다. 그들이 살아낸 5년은 지옥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녀 자신만으로도 힘든데 남편마저 매일 무쇠 솥에 콩 볶듯이 볶아대는 것이어서 더욱 힘들었다.
“이렇게 넋 놓고 있어 될 일이 아니구만.”
남편의 성화에 못 이겨 아침밥을 먹으면서 병원에 가보자 했다. 그러나 수지는 대꾸도 않고 제 방으로 올라간다. 승혜는 준비를 하고 소파에 앉아 수지가 내려오기만을 기다린다. 수지가 말할 때 얼굴이 굳어지는 걸 보았기에 더 이상 채근하지는 못하고 그저 기다리기만 한다. 한 시간, 두 시간, 그렇게 시간이 흘러도 수지는 내려오지 않는다. 기다리다 못해 승혜는 올라가 방문을 두드린다.
“뭐해? 병원 가야지.”
그제야 수지는 마지못해 문을 삐쭉이 열어 고개를 내민다.
“검사 받아봤는데 이상 없대요.”
승혜는 너무 황당했다. 그렇다면 말을 하고 올라가든지, 뒤도 안 보고 휑하니 올라가서 벌써 두 시간이 넘지 않았는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당장 귀싸대기라도 올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참고 계단을 내려오려니 손이 덜덜 떨리고 머리가 어지럽고 다리도 휘청거린다. 그동안 귀한 아들의 여자라고, 가족이라고, 그녀 자신보다 더 소중하게도 생각하지 않았던가. 헌데 이젠 시어미까지 무시하고 안하무인이 아닌가. 화가 치밀었지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내려와 안방으로 들어가 웅크리고 앉아 눈가를 훔쳐낸다.
어떻게든 수지를 구슬려 병원에 데려가야 하기에 참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토록 피를 말리게 하고도 정작 수지는 당당하다. 막막하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 아들이 하나만 더 있었다면 이토록 손자를 기다리지 않을 테고 또 다른 며느리도 볼 수 있을 터인데 싶으면서 한탄이 절로 나온다.
“당신 많이 피곤하지? 운전 수지한테 맡기지 않고.”
“…….”
“왜? 걱정 있어?”
“아, 아니. 잠시 지난일이 생각나서.......”
우리 참 힘들게 여기까지 왔다. 그치?”
이번에 약 먹어도 안 되면 포기하자고 했다. 허나 그 포기란 게 그렇게 쉽던가. 입으로는 천만 번 그러겠다하면서도 담배연기처럼 스멀스멀 피어나 또 붙잡게 되는 것을. 오늘도 남해까지 데려가지 않았던가. 그게 다 며느리에겐 스트레스인데 말이다. 그들은 잠자리에 들어 힘들었던 날들을 떠올리며 주거니 받거니 시간 속으로의 여행을 한다.
“난 당신 어머니 지금 생각해도 소름끼치도록 무서워.”
“어머니가 왜? 우리 어머니는 참 유한 분이셨는데.”
“아니, 그 첫새벽에 어찌 참새미골까지 가냐고? 날이 샌 것도 아닌데. 더러 귀신도 만나지 않았을까?”
“무슨 그런 말을. 그 정성으로 태민이를 얻었잖아.”
그랬다. 승혜 시어머니는 무서울 정도로 자손에 대한 집착이 강했다. 2대 독자인 남편한테 시집을 왔지만 손이 귀한 집이어서인지 임신이 되지 않았다. 그녀의 시어머니는 유난스러웠다. 꼭두새벽이면 일어나 동구 밖 참새미로 가서 물을 길어왔었다. 참새미는 마을을 지나 산 밑에 있었다. 그 길이 결코 짧은 거리가 아니었다. 크지도 않는 바위틈에서 나는 샘인데 30가호가 넘는 마을 사람들이 다 먹어도 마르지 않았다.
시어머니는 동네 아낙들이 바가지를 넣지 않은 물을 길어 와야 공이 된다고 그 첫물을 놓치지 않으려 첫닭이 울면 동이를 들고 나갔었다. 엄동설한에도 어김없이 참새미골로 향했고, 빨갛게 언 손으로 하얀 주발에 물을 떠 장독 위에 올려놓고는 천지신명과 조상님께 손자 하나 점지해달라고 치성(致誠)을 들였다. 그뿐이랴. 그땐 어려운 시절이라 밥 때면 밥 얻으러 오는 사람이 좀 많지 않았던가. 헌데도 맨입으로 보내면 안 된다고 당신 밥을 덜었고, 아예 밥그릇을 다 비워주는 날도 허다했다.
“난 지금 생각해도 그때 그 스님이 도사가 아니었을까 싶어.”
“당신 배운 사람 맞아? 중인지, 사기꾼인지, 거렁뱅이인지 어찌 알아. 승복만 입었다고 다 도사는 아니잖아.”
“그 스님 말대로 되었잖아.”
시어머니는 탁발 온 스님에게 쌀독의 귀한 쌀을 퍼 바랑에 부어주고는 두 손을 모으며 관세음보살이라고 했다. 그러자 스님이 ‘좋은 일 있을 겁니다.’라고 합장하고는 돌아갔다. 그처럼 스님이 툭 던졌던 말을 시어머니는 무슨 예언처럼 가슴에 담아두고 그 날을 기다렸다. 시어머니의 지극정성인지, 천지신명의 조화인지, 아니면 조상이 도왔는지 승혜는 임신이 되었고 아들을 낳았다. 그게 바로 태민이였다.
그 아이가 장성하여 결혼을 하게 되면서부터 손이 귀한 집이라 손자를 기다렸다. 그런데 일 년이 지나도 소식이 없어 애달았다.
하지만 며느리 수지의 생각은 다른 것 같았다. 식구 많은 집에서 복닥거리고 자랐기에 아이에 대한 절실함이 없었다. 자식이야 생기면 낳고 안 생겨도 크게 문제될 게 없다는 그런 사고였다.
“아가, 병원 가보자.”
“왜요? 저 피임 안 했어요.”
시댁에서 뭘 걱정하는지 알면서도 수지는 그렇게 말했다. 당차다고 해야 할지 당돌하다고 해야 할지, 그 소리에 말문이 막혔다.
말문을 막아버리는 며느리 앞의 시어머니 된 입장에서 문득 자신의 시어머니가 떠오른다. 아마 당신도 지금 자신처럼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갔을 것이다.
대체 이런 상황에서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그 문제가 표면으로 떠올라 자꾸 이야기되자 집안 분위기는 어두워졌고 수지도 점점 말을 잃어갔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하루는 수지를 불러 다잡아 얘기했다.
“병원 가보자. 도대체 왜 그런지 확실히 알아야 될 게 아니냐.”
“휴가 낼게요.”
“너희들은 바쁘니 내가 가서 예약을 해놓을 테다.”
“네.”
그 대답에 승혜는 수지의 손을 잡았다.
“고맙다. 우리 한번 노력해보자.”
다음날 출근하는 아들 내외를 뒤쫓아 병원으로 달렸다. 병원에서는 부부가 같이 와야 된다고 해서 예약을 해두었다. 이제 무슨 답이 나와도 나올 것이다.
예약한 날이 되자 두 아이는 병원에 가더니 지쳐서 돌아왔다.
“뭐라 하더니?”
“다음 주에 또 오라네요.”
“그래 힘들었을 텐데 쉬어라.”
창백해진 수지의 얼굴에는 힘든 기색이 역력했다. 일주일이 지나고 아이들은 또 병원을 갔다. 검사가 다 끝나고 원인은 수지한테 있단다. ‘다낭성 난포증’ 불임인데 난포들이 포도송이처럼 쌓여 임신이 어렵다고 했다.
“치료받으면 임신이 된다 하더냐?”
“가능하대요.”
수지는 그때부터 클로미펜 알약을 먹어 에스트로겐 수치를 높였고, 배란 유도 주사를 맞으며 불임치료를 받았다. 헌데 8개월이 지나도 임신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자기주장이 강하고 톡톡 튀던 수지는 침잠되어 갔다. 표정 없는 얼굴이 마치 벽처럼 느껴졌다.
그날도 병원 가는 날이다. 출근하려고 나서는 수지의 몰골은 눈자위가 푹 꺼지고 초췌해보였다. 컬이 풀려 부스스한 긴 파마머리가 안쓰럽게 느껴졌다.
“병원 가는 날이제?”
“네! 오후에 들렀다 오려고요. 늦을 겁니다.”
“그래, 다녀 오거라.”
그녀는 수지가 빠져나간 현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토록 힘들어하는데, 자신도 여자고 같은 고통을 겪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수지 마음을 헤아리고 품어주어야 할 텐데 왜 그러지 못하는 것일까?
저녁때 아들 며느리가 들어와 남의 이야기처럼 툭 던졌다.
“담당과장이 이젠 인공수정이 불가하다고 시험관 해보자고 한대요.”
“병원 같이 갔어?”
“아뇨, 수지만요.”
승혜는 얼굴이 어두워진다. 예약하러 갔을 때 답답해 물었었다. 인공수정과 시험관의 차이가 어떤 거냐고. 의사는 그녀에게 말해주었다. 인공수정은 배란일을 예측하여 정자를 활동성 좋게 만들어 여성의 자궁내로 넣어주는 시술이고 시험관 아기는 난자와 정자를 체외에서 수정시켜 수정란을 자궁내로 넣어주는 시술이라 했다. 헌데 이젠 시험관 시술뿐이라니 억장이 무너진다.
그래, 그거라도 해봐야지. 돈이 많이 들면 집이라도 팔아서. 그녀는 혼잣말처럼, 그러나 강한 목소리로 말했다. 얼마의 돈이 드는지 모르지만 손자를 얻을 수만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작정이었다.
수지는 아무런 말도 없이 돌아섰다. 뒷모습이 오늘따라 몹시도 시려보였다. 그런 수지를 붙들고 토닥거려 주고 싶지만 마음뿐이었다.
며칠이 지난 토요일 오후에 수지는 할 말이 있다고 했다. 그녀도 남편도 그리고 아들 태민이도 거실로 나와 소파에 앉는다. 모두가 약속이나 한 듯 입을 꾹 다물고 수지의 말을 기다렸다. 그렇게 10여분이 지났는데도 할 말이 있다던 수지는 말을 잃은 듯 그저 잠잠했다.
기다리다 못한 승혜가 먼저 침묵을 깼다.
“할 말 있음 해 보거라.”
그때서야 수지가 입을 연다.
“아버님! 어머님! 죄송합니다. 아이 포기하렵니다. 이렇듯 노력해도 임신이 되지 않으니 어쩔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제 나름대로 할 만큼은 했다는 말씀도 드리고 싶습니다.”
“그래! 그렇지만, 새아가…….”
“아버님, 제가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굳이 안 생기는 아이를 낳으라시면 제가 이 집을 나가겠습니다.”
그 말에 남편의 두 눈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더니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승혜 역시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너 못지않게 우리도 힘들어. 네가 우리 집안을 생각한다면 이런 말을 이리도 쉽게 할 수 있어? 뭘 잘했다고!”
그동안 며느리가 상처받을까 말도 가려하고 늘 며느리 눈치만 보아왔던 그녀가 아니던가.
“어머니! 제 말부터 들어보세요. 무조건 역정만 내지 마시고.”
“그래? 그럼 마저 해봐라. 들어보마.”
“제가 아무렇게나 말씀드린 게 아니고 그동안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시험관 아기도 의학적으로 규명 안 된 부분이 많다고 하더라고요. 저라고 이 가정이 소중하지 않겠습니까. 태민씨도, 아버님도, 어머님도 저한텐 소중한 가족입니다. 모두 사랑합니다. 그렇지만, 제가 대를 이어드릴 수 없고 제 가치관은 많이 다르니까요. 저는 다음 세대가 아니라 지금이, 오늘이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제 말이 잘못 된 건가요?”
그 말에 승혜는 발끈해 손바닥으로 거실바닥을 탁 치며 버럭 고함을 지른다.
“이게 뭔 말이고? 가만히 보고 있었더니 이게 막가파구나? 너만 힘드냐? 우리 생각은 안 해봤어? 속이 새까맣게 타도 숨죽이고 사는데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뭐라! 이혼하겠다고? 뭐가 그렇게 당당하니. 그 책임이 태민이가 아니라 네한테 있는데 말이야. 너 그것 몰랐던 게야? 그래, 그렇게 하고 싶거든 네 좋을 대로 해라. 삼대독자한테 시집 왔으면 대를 이어야 하는 건 당연한 거지. 그런 생각도 않고 시집왔냐? 내가 막무가내로 그런 건 아니잖아. 남들이 그렇게 해서 아이 낳았다니까 해보잔 건데, 잔망스럽게 어른을 불러 앉혀놓고 혓바닥을 나불거려? 네 엄마가 그렇게 가르치더냐? 이게 눈에 뵈는 게 없구나.”
“어머니는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왜 너는 할 말 다하고 난 안 되냐? 내가 너한테 못할 짓 하더나?”
“어머니는 같은 여자고, 저 같은 고통을 겪었잖습니까? 그런 어머니께서 어떻게…….”
그건 그랬다. 같은 아픔을 겪었기에 그 누구 보다 수지의 마음을 잘 안다. 하지만 승혜는 대를 끊어서는 안 된다는 오직 그 마음 뿐 연민 따윈 없다. 하여 감정에 지우치지 않으려는 것이다.
수지는 말을 덧붙이려는지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말았다. 수지의 안타까운 눈빛 속에 서글픔이 서린다. 그러더니 이내 큰 눈에서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그렇게라도 해서 임신이 된다면 못할 것도 없지. 안 그래? 내가 아는 집엔 시험관 시술을 해서 쌍둥이도 낳았다더라. 누가 아니? 우리도…….”
“어머니! 저는 자신 없어요. 이러다간 아이가 아니라 제가 미치거나 죽을 것 같아요.”
듣고만 있던 남편은 탄식 같은 한숨을 쉬고는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처지를 바꿔 네가 나라면 어떻겠니? 이런 내가 무모한 거니? 인지상정이지. 안 그래?”
“어머니도 제 입장이 되어보세요. 어떤지를. 시험관시술 안 할랍니다. 죄송해요.”
저토록 완강하니 더는 할 말이 없다. 힘들어서 손자고 가정이고 다 놓고 싶었다. 살든지 말든지 싶어 일어나 나가버렸다.
아이들 방에서 고함이 들려온다..
“뭐! 이혼? 그걸 감수 못하고 헤어지자고?”
“나 이제 다 싫어! 이제 안 할래.”
아들과 며느리는 처음으로 집이 떠나가게 고함을 지르며 다툰다. 맹수처럼 서로 잡아먹을 듯 으르렁거리며 포악을 떤다. 어른도 이웃도 아랑곳없다는 듯 싸워댄다.
남편은 탄식한다.
“어쩔거나. 저 애들을 어쩔거나.”
집안은 매일매일 먹구름이 끼어 하루도 편치가 않다. 아들의 귀가는 늦어지고 술에 잔뜩 취해 들어온다. 그러면 또 난리다. 물건들을 마구 집어던지는 소리가 들리고 며느리가 비명을 지른다.
필시 둘 중 하나가 죽었겠다 싶어 승혜는 바삐 계단을 올라가 방문을 열어젖힌다. 방안은 아수라장이다. 화장대 유리가 깨지고 텔레비전이 방바닥에 떨어져 있고 화장품들은 공깃돌처럼 방바닥에 깔렸다.
“이게 뭐꼬! 어른이 있는 집에, 난 이런 꼴 못 본다. 이러려면 나가 살거라.”
승혜는 그런 꼴이 보기 싫어 내려온다.
태민이도 뒤따라 내려온다.
“이 밤에 어디 가려고?”
“바람 좀 쐬려구요.”
승혜는 아들을 잡아 앉힌다. 싸운다고 집을 나가면 쓰냐고 이러면 안 된다고, 힘들 때 서로 감싸 안아야 하는데 너까지 이러면 수지는 어떻게 하느냐고 타이른다. 그러면서 아들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그 밝기만 하던 얼굴이 거칠고 수심 가득했다.
“늦었다. 나가지 말고 들어가 자거라.”
태민은 자기들 방이 아닌 서재로 들어간다.
승혜는 밤을 하얗게 새우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
하루하루가 미로처럼 앞이 보이지 않는다. 이 암흑에서 끌어내어 줄 길잡이는 수지인데 호롱불을 들지 않으려 한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승혜는 모든 걸 수지 탓으로 돌린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수지가 아이를 못 낳아 힘들다고 집을 나가면, 내 아들이 건강한데 왜 손자를 못 얻어. 암! 얻고 말고. 제 발로 나가만 준다면 못 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다. 이제껏 자식이라고 그토록 좋아했는데 수지가 집을 나가겠다니 벌써 마음으로는 연필에 침을 묻혀 선을 쭉 그어놓고 이건 내 핏줄, 이건 남, 그렇게 구분을 지어놓고 잔인하게 수지를 대문 밖으로 내몰고 있다. 자식 일이면 목숨도 내어놓는 게 어미라 않던가. 세상이 손가락질해도 자식을 위해서라면 못할 것도 없을 일이다.
긴 밤이 지나고 아침 일찍 며느리는 출장 간다면서 가방을 챙겨 나갔다. 아들도 말없이 출근했다. 승혜는 어젯밤 일이 생각나서 며느리 방으로 올라간다. 방문을 여는 순간 놀란다. 난장판이 된 방을 며느리는 손 하나 대지 않고 몸만 빠져나갔다. 억장이 무너진다. 늙어가면서 이게 뭐람, 애꿎은 팔자타령만 늘어놓으면서 방을 치웠다.
그날은 웬일인지 아들 퇴근이 빨랐다. 옷도 갈아입지 않고 소파에 앉는다.
“아버지. 저 이혼하렵니다. 이젠 안 되겠어요.”
“부부싸움 했다고 이혼하면 이혼 안 하는 사람 있겠냐? 그런 말 왜 함부로 해?”
“그게……, 수지가 이혼하재요.”
“뭐라? 새아기가 그래?”
승혜는 순간 위기는 기회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50년도 더 남았는데 잘못된 길이라면 돌아 다른 길을 걷는 것도 괜찮다고, 손자를 안을 수 있겠다는 생각까지 한다. 그래! 제가 그러겠다면 손 안 대고 코푸는 격이 아닌가. 그녀는 또 다른 희망의 끈을 붙잡으려고도 했다.
수지는 뭐가 급한지 이삿짐 차를 불러와서 제 물건들을 모조리 다 싣고 갔다. 그렇게 수지는 제 흔적마저 다 거둬갔다.
그날도 아들은 평소처럼 퇴근해서 제 방에 들어가더니 말없이 다시 나가 술에 잔뜩 절어 들어왔다. 그렇게 아들은 날마다 술에 빠져 살았다. 그러던 하루, 아들이 늦도록 집에 오지 않았다. 혹시나 수지를 만났나 싶어 기다리다 잠자리에 들었다. 그때 전화가 왔다.
“여기 여로 주점입니다. 손님이 만취되어 잠들었는데 가게 문을 닫아야겠습니다.”
“우리 집 전화번호 어떻게 알았어요?”
“휴대전화에 입력된 전화번호로 전화했더니 이 번호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분명 수지일 게다. 그렇다면 이젠 끝난 게다. 제 남편이 술이 취해 인사불성이 되었다는데 나오지 않고 전화번호만 가르쳐 줬다면, 그렇다면 정말로 끝난 거다.
남편을 앞세워 주점을 찾아가 쓰러져 있는 아들을 겨우겨우 끌고 왔다. 그러고는 제 방의 침대에 눕히고 나오는데 말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 어머니 용서하십시오. 저는 우리 집 대가 끊겨도 수지하고 못 헤어지겠습니다. 수지를 사랑합니다.”
“저게 술주정을…….”
“술 취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남편은 멍하게 보고 있다가 안쓰러운지 혀를 끌끌 찬다.
아들이 벌떡 일어나 앉는다.
“아버지! 제 여기가 아픕니다. 너무 아파 죽을 것 같아요.”
태민이는 손바닥으로 가슴을 치며 그렇게 말하곤 무너지듯 침대에 꼬꾸라졌다.
다음날도 태민은 퇴근이 늦었다. 그동안 술에 절어 얼굴도 파리해지고 수척해 보인다. 남편은 그런 아들을 더는 볼 수가 없었던지 제 방으로 들어간 아들을 부른다. 아들은 내려와 거실 소파에 앉는다.
“태민아! 이 애비도, 집도 생각하지 말고 네 하고 싶은 대로 해라. 네가 행복하면 나도 행복하다. 살다가 예쁜 딸이라도 입양해서 키우자꾸나.”
“아버지! 고맙습니다.”
태민은 그날 수지를 찾아갔다. 수지는 그렇게 태민이를 따라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승혜는 그동안 고생했다며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아파트를 사서 분가시켰다.
“언니야. 남해 명성한의원 약만 먹으면 임신 된단다. 수지 한 번 데려가 봐.”
찾아온 동생이 이야기 끝에 한 말이다.
“그런 게 어디 있냐. 말도 아니다. 그럼 누가 병원 열심히 찾아다니며 그 힘든 불임치료를 받겠나.”
“정말이라던데 그래. 시험관 해도 안 됐는데 그 약 먹고 임신했대.”
그 말에 승혜는 귀가 쫑긋해진다. 그건 힘 드는 것도 아닌데 마지막으로 한 번 데려가 보자 싶었다.
며느리에게 그 이야기를 하며 한번 가 보자고, 속는 셈 치고 그 약만 먹어보자고 했다. 수지도 응했고 그렇게 남해를 갔었다.
하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물론 그 약에 대해 그렇게 믿거나 기대를 했던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상실감만 더했다. 그런 상실감 때문에라도 더 이상은 어떤 미련도 두지 않았다. 그렇게 마음을 비우고 나니 서로가 편해졌다. 그리고 마침내는 입양을 결정했다. 아들 며느리와 함께 입양기관인 사회 복지회 아동상담소를 찾았다.
입양 절차는 생각보다 까다로웠다. 구비해야할 서류도 많고 입양아가 건강하게 자랄 수 있는 환경 등 갖춰야 할 조건도 많았다. 거기다가 양부모 쪽에서 원하는 조건까지 맞추자면 쉬운 게 아니었다. 수지가 원하는 조건은 미혼모의 아이, 여자 아이, 자신들과 일치하는 혈액형 등이다.
그렇게 해서 입양해 들인 아이가 바로 햇살이다. ‘햇살’은 아이가 들어오던 날 제 할아버지가 처음 본 자리에서 지어준 이름이다. 낳은 지 꼭 열흘이 된다는 그 여아는 인형처럼 귀여웠다. 그날부터 삭막했던 집안엔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고 웃음소리도 났다.
햇살이는 저녁이면 수지가 데려가고 낮엔 승혜가 맡아 키웠다.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라면서 눈을 맞추고 옹알이를 하고 그러면서 백일이 지났다. 햇살이가 온 뒤부터 가족 모두는 달라졌다. 건네는 말 한마디에도 정이 느껴졌고 수지도 어른들한테 살갑게 대했으며 곧잘 어리광도 부렸다.
“우리 햇살이 왔어요.”
주말도 아닌데 아들네가 과일과 회 등을 사들고 왔다. 아들 며느리가 다른 날보다도 더 홍조 띤 얼굴에 입도 귀에 걸려 싱글벙글한다.
“왜? 승진했어?”
“아니요.”
“그럼 수지, 네가 승진했나 보네.”
“어머님 아니에요.”
승혜는 아이들이 좋아하니 영문도 모르고 덩달아 좋아한다.
수지가 식탁에 회를 차려놓고 온 가족이 둘러앉았다.
“아버님, 어머님! 제 술 받으세요.”
잔에 맥주를 채웠다. 그러더니 느닷없이 승혜 손을 잡고는,
“고맙습니다, 어머님!”
“뜬금없이……. 뭔 말이고?”
“어머님이 약 지어주셨잖아요. 남해 가서.”
“그게 언제 이야긴데 이제 와서…….”
“어머님! 저 임신했어요.”
“뭐어! 뭐라고? 다시 말해 보거라. 그게 참말이가?”
“네에! 맞아요.”
“야아, 그 약 참 약발 좋네.”
그들은 햇살이가 복을 불러왔다고, 모든 게 햇살이 덕이라고 말한다. 햇살이가 복덩이라는 것이다.
승혜는 수지를 보듬으며 울었고 수지도 울었다. 남편 눈에도 아들 눈에도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승혜는 소리쳤다. 그 한의사 욕 많이 했는데 참 용하다고, 8개월이 넘었는데도 약발이 있다고, 하마터면 우리 귀한 손자 놓칠 뻔했다고 말이다.
“어머니, 저기 보이네요. 그 한의원.”
“그래, 맞아. 그 집이다.”
그땐 마당에 쑥갓 꽃, 장다리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는데 지금은 속 찬 배추와 무들이 이랑을 채우고 있다. 수지는 차 트렁크를 열어 사과와 밀감 상자를 내려 한의원 안으로 나른다. 간호사는 웬 과일이냐고 눈이 휘둥그레진다. 원장님께 인사 왔다고 하자 간호사가 진료실로 들어간 잠시 뒤 원장이 나온다. 원장은 여전히 생활 한복을 입었고 입가엔 미소가 번진다.
“원장님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어떻게? 이 과일은?”
“원장님 우리 며느리가 임신했어요. 약 효험 봤습니다.”
“아! 이 아입니까? 그놈 잘생겼네.”
“아니고요, 이제 임신했어요.”
원장은 햇살이와 며느리를 번갈아 보며 고개를 갸우뚱 한다.
“우리 햇살이는 며느리가 가슴으로 낳았고요.”
"아! 그렇군요. 축하합니다."
진료실을 흘러나온 웃음소리는 텃밭을 지나 눈물도 고통도 다 받아주는 넓고 푸른 바다로 퍼져나간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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