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 모델 체인지한 신형 레인지로버는 전작의 디자인을 계승하면서도 한결 스포티해졌다. 프레임 보디를 포기하고 모노코크 구조를 채용했지만 안정된 승차감과 탁월한 오프로딩 실력은 오히려 더 높아졌다. 이런 부피와 질량의 차이로 보이는 놀라운 가속은 ‘돌진’이라는 말 외에는 표현할 길이 없다.
풀 모델 체인지한 신형 레인지로버는 전작의 디자인을 계승하면서도 한결 스포티해졌다
바꾸지 말 것, 더 낫게만 만들 것
네 번째 레인지로버의 디자인 총책임자였던 데이비드 새딩턴 씨를 만났을 때 그는 개발진 앞에 던져진 황망한 목표를 회상하며 그때의 막막했던 심정을 털어놓았다. 대성공을 거둔 선대 모델이 주는 부담감, 그 차에 쏟아진 고객의 애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아니, 손대지는 말고 바꾸라니……. 이게 말이나 되는 요구인가. 모든 것을 갈아엎는 풀 모델 체인지를 거친 차는 분명 더 나은 차가 되기 마련이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변화 또한 필연적이다. 그런데 이들이 받아 든 임무는 그 변화를 가능한 한 ‘억제’하라는 것이었다. 그래서일까, 어딜 봐도 신형 레인지로버는 분명한 ‘새차’이긴 한데 정작 이게 ‘풀 모델 체인지’인지 ‘마이너 체인지’인지 헷갈리게 만들 정도로 변화의 정도를 자제하였다.
LED를 적극 사용한 새로운 주간주행등과 브레이크등으로 개성을 불어넣었다
그러나 세세히 들여다보면, 분명한 풀 모델 체인지의 증거가 보인다. 오버행이 줄어들었고 무엇보다도 차가 스포티해 보인다. 너비 2.1m, 길이 5m에 이르는 거대한 차가 전에 없이 스포티해 보이는 것은 디테일을 손본다고 나타낼 수 있는 효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속을 들여다보면 그 변화의 폭은 더욱 아찔할 정도다. 이 차는 전통의 프레임 보디를 과감히 포기하고 모노코크 구조를 채용한 첫 레인지로버일 뿐 아니라, 알루미늄 플랫폼을 쓴 최초의 SUV다(재규어 XJ의 알루미늄 모노코크를 차용했다). 이것으로 덜어낸 몸무게는 자그마치 420kg. 이 정도의 무게를 덜어냈으니 연비와 성능 양쪽 모두 큰 폭의 개선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단, 프레임 보디로 보여줬던 강력한 오프로드 주파능력과 그 무게로 인한 특유의 차분한 승차감을 어떻게 보완했는지가 시승의 관건이다.
역대 최고의 온로드 주행능력
시승한 모델은 V8 5.0L 수퍼차저 엔진을 얹은 VOGUE SE. 랜드로버 브랜드의 기함 역할을 하는 레인지로버 중에서도 최상급 모델이다. 그에 따른 옵션과 장비도 최정상급이다. 현존하는 온갖 종류의 첨단기능이 다 들어가 있다고 보면 된다. 너무나 많은 기능 때문에 사용이 혼란스러울 것 같지만 일목요연한 터치스크린 구성 덕분에 이런 저런 기능을 꺼내 쓰기가 어렵지 않다.
사진 스위치만 누르면 지상고를 최대 75mm까지 높일 수 있다.
온로드의 주행감은 여전히 명불허전. 다이어트를 했다 해도 여전히 2.5톤에 육박하는 육중한 무게가 안정된 승차감을 만들어낸다. 여기에 감응식 에어 서스펜션까지 더해져서 승차감은 말 그대로 탁월하다. 높은 지상고 때문에 승차가 조금 부담스러워도 주변을 내려다보게 되는 탁 트인 시야는 승하차 때의 노고를 보상하고도 남는다. 탁월한 질감의 인테리어에 둘러싸여 세상을 내려다보면 약간의 자만심마저 생길 정도다. 그리고 달리기 시작하면 그 생각은 더욱 커진다.
보통의 SUV를 운전하는 감각으로 가속 페달을 밟았다간 이 거대한 덩치의 차가 ‘튕겨’ 나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레인지로버용으로 준비한 세 가지 심장 중 가장 강력한 V8 5.0L 수퍼차저 엔진의 출력은 자그마치 510마력, 최대토크는 63.8kg·m에 달한다. 0→시속 100km에 걸리는 시간은 단 5.4초. 직진 가속은 그야말로 돌진이라는 말 외에는 표현할 길이 없다. 이런 부피와 질량의 차로는 어이없을 정도로 놀라운 가속력을 보이기 때문에 잠깐이라도 최대토크를 발휘하다가는 주변 도로에 끼치는 위압감이 상상 이상이다. 워낙에 파워가 넘쳐나므로 안전 최고시속인 225km까지 속도를 높이는 건 일도 아니다. 삽시간에 백미러를 가득 채우는 덩치를 보고 혼비백산하는 앞차들의 모습을 보고 즐거워하는 고약한 취미가 있는 게 아니라면 가속 페달의 조작에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이미지 목록신형 레인지로버의 대시보드. 최신 재규어와 레인지로버의 패턴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 터레인 리스폰스의 상태는 중앙 터치스크린과 계기판에 모두 표시된다 |
영국 메리디안사의 오디오 시스템. 명성에 걸맞은 탁월한 사운드가 일품이다 | 독립제어가 가능한 리어 엔터테인먼트 시스템. 팔걸이 속에 터치식 무선 리모컨이 들어 있다 |
압도적인 오프로드 주파능력
가장 염려했던 오프로드 주행능력은 오히려 더 높아졌다. 레인지로버가 자랑하는 전천후 지형돌파 시스템 터레인 리스폰스는 2세대로 업그레이드되었다. 자갈이든 모래든 진흙이든 노면 상황에 따라 셀렉터를 돌려주면 되던 기존 시스템은 더욱 발전하여 아예 선택 자체를 알아서 한다. 어지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그냥 자동 모드로 달리면 된다. 모래든 돌밭이든 진흙이든, 노면 상황을 따지지 않고 앞으로 나가는 끈덕진 트랙션에 혀를 내두를 정도.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다. 조심스럽게 시도해본 도하주행 때 범퍼까지 차오르는 물속을 아무렇지 않게 헤쳐나가는 능력에는 그만 경의를 표하고 싶어질 정도다. 신형 레인지로버는 아무런 개조 없이도 90cm까지 자력 도하가 가능하도록 설계되었다. 이를 위해 모든 부품이 방수처리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인생의 승리자
요즈음에는 레인지로버를 그저 럭셔리 SUV 중 하나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 차는 4륜구동 파워트레인을 고급 자재로 적당히 감싼 많고 많은 고급 SUV 중 하나가 아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앞으로 나갈 수 있도록 만들어진 보기 드문 진짜배기 heavy duty vehicle이다. 이 압도적인 주행능력 앞에서 호화로운 내장은 부차적인 능력으로 보일 정도다. 이 차를 타고 달리는 것만으로도 어디든지 갈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승리자의 기분에 취하게 된다. 아니, 2억원에 이르는 가격을 감당할 재력을 갖춘 것만으로도 인생의 승리자임은 이미 입증된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