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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문학>(2011년 연간집)에 발표한 최상일 동화작가의 동화를 올립니다.
동화
할아버지의 보물상자
│최상일
"당신은 무얼 그렇게 만지작거려요." 할아버지는 할머니 말에 황소처럼 씩- 웃으며 손에 쥐었던 물건을 내민다. "참 영감도 그것이 무엇이라고 여태까지 가지고 있어요?" "허허!" 할아버지는 멋쩍게 웃으시며 호두알 두 개를 머리맡에 있는 보물상자에 넣으시고 힘없는 웃음으로 돌아누우셨다.
그날 밤이었다. 시골에 계시는 할아버지가 무척 편찮으시다는 연락을 받고 상규는 아빠를 따라 달려갔다. 할아버지는 아빠를 보시자 꺼져가는 의식 속에서도 아빠를 보며 희미한 웃음을 지으신다. "애비 왔어?" 할아버지 눈가에 이슬이 맺히더니 이내 눈물방울이 된다. "아버지 정신 차리세요. 제가 왔어요." 아빠가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울먹이며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니 상규도 콧날이 시큰해진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상규는 우두커니 할아버지의 퀭한 눈빛만 쳐다본다. 할아버지와 눈이 마주치자 상규를 보는 할아버지의 눈빛이 순간 반짝 빛난다. "할아버지." 상규도 할아버지를 불러본다. 할아버지는 상규의 음성을 들으셨는지 입가에 웃음이 희미하게 번진다. 그렇게 상규를 좋아해 주시던 할아버지셨는데 이렇게 누워계시니 정말 마음이 아프다. 할아버지 옆에 가까이 가니 담배 냄새가 확 끼친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다. 지난날에는 할아버지 담배 냄새가 정말 지독했는데 오늘은 그렇지가 않다. 할아버지의 손을 두 손으로 꼭 잡아본다. "할아버지 정신 차리세요." 할아버지는 한번 씩 웃으시더니 안간힘을 쓰시며 상규의 손을 꼭 잡아 보신다. 그러더니 스르르 힘이 빠진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상규의 애절한 부르짖음도 멀리하고 할아버지는 그만 저 먼 나라로 가셨다.
그 후 어느 날이었다. 상규는 겨울방학이라 심심하여 할아버지의 빈방으로 들어가 봤다. 어디 장난감으로 쓸 좋은 물건은 없나 하고 이리저리 뒤적이다가 상규는 할아버지가 쓰시던 작은 상자 하나를 발견했다. 무엇이 들었을까? 혹시 금으로 만들어진 두꺼비가 들어 있을까? 친구 정민이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금 두꺼비를 주셨다고 했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런데 할아버지의 나무상자 속에서 나온 것은 겨우 호두알 두 개였다. "에이, 이게 뭐야. 호두알이잖아." 상규는 정말 실망했다. 또 무엇이 있을까? 아무리 낡은 나무상자 속을 뒤적여 봐도 편지 몇 통 그리고 이상하게 생긴 구슬과 동전 몇 개가 전부다. 상규는 호두알 두 개를 손에 쥐고 굴리니 동글동글 잘 부딪친다. 재미있다. 방바닥에 놓고 데구르르 구르니 잘 굴러간다. 그런데 호두알이 좀 하얗다고 생각했는데 이 호두알은 완전 까만빛으로 변해 있다. 할아버지가 물감을 칠했나? 상규는 호두알 두 개를 만지작거리며 들고 밖으로 나왔다. 엄마가 그것을 보시곤 상규를 부른다. "상규야! 그게 뭐니?" "이것? 호두알이야. 깨서 먹으면 참 맛있겠다. 그치 엄마" "글쎄…." 상규가 호두알을 굴리며 깨지라고 돌바닥에 내던졌다. 마당에서 놀고 있던 깜둥이가 그것을 보고 냉큼 물고 달아난다. "얘! 그것 내놔. 넌 못 먹는 거야." 깜둥이는 막무가내다. 도망가기 바쁘다. 상규는 깜둥이를 잡으려고 하고 깜둥이는 빼앗기지 않으려고 달리고 마당에서 상규와 깜둥이가 술래잡기를 한다. "얘! 얘! 그것 이리 내 놔." "싫어! 싫어!" 한참 마당을 돌아다니다가 깜둥이가 호두알을 입에서 떨어뜨려 버렸다. 호두알이 뺑그르 돌더니 굴러간다. 상규가 호두알을 주우려 하자 이번에도 깜둥이가 재빠르다. 깜둥이가 입에 물려고 하자 대문 옆에 난 작은 구멍 속으로 쏙 들어가 버린다.상규는 그것을 겨우 꺼내니 깜둥이가 달라고 상규의 바짓가랑이를 물고 늘어진다. 깜둥이와 상규가 호두알을 가지고 놀고 있는 모습을 할머니가 봤다. "상규야! 그것 할아버지 방에 있던 호두알 아냐?" "네 할머니." "이리 다오." "싫어요. 이것 깨서 알맹이 내어 먹을 거예요." 상규는 지난 보름날 아침에 엄마가 호두알 알맹이라며 주신 것이 생각났다. "안 돼! 그건 너무 오래된 거라서." "괜찮아요. 할머니 먹을 수 있어요." 상규는 할머니가 먹으면 안 된다고 해도 깨어 먹겠다고 망치를 찾는다. "엄마, 망치." 부엌에서 일하는 엄마를 부른다. "엄마! 망치 어디 있지?" 아빠가 할아버지가 심심하시다고 안고 온 강아지 깜둥이의 집을 지으시던 그 망치를 찾으려고 뒷간의 이 구석 저 구석을 찾아 헤매어 보았지만 눈에 띄질 않는다. "상규야! 뭘 그렇게 찾니?" 학교에서 퇴근하여 집에 오신 아빠를 본 상규는 반가운 마음에 물었다. "아빠! 망치 어디 있어요?" "뭐하게?" "이것 깨서 알맹이 먹게요." "그것 어디서 생겼니?" 상규는 호들갑스럽게 말한다. "아빠! 할아버지 방요. 우리 이것 깨먹어요. 네." "이리 줘봐. 아니, 이건…." 아빠는 호두알을 보자 금방 눈물을 글썽이신다. 그것은 아빠가 대학교에 다닐 때에 어느 겨울방학 학과 모임에 갔다 오면서 드린 호두알 두 개다. 큰아들이 가져다 준 호두알 두 개. 비록 작은 선물이지만 아들이 처음으로 가져다 준 거다. 만지작거리면 치매와 혈액순환에 좋다기에 구해다 드린 이 호두알 두 개. 아버지는 이 호두알을 만지작거리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아들이 이 외딴 시골에서 자라 대학교에 합격한 것이 그렇게도 좋아 온 동네 다니며 자랑하시던 모습들이 밀려온다. 아버지의 별명은 논고둥이다. 몇 마지기 되지도 않은 땅을 농사지어 아들딸들을 공부시키시느라고 허리 한번 제대로 펴지 못하고 논에서만 일을 한다고 사람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그렇게 고생하시더니 좀 형편이 나아지려니까 아깝게도 돌아가신 아버지! 상규 아버지는 솟아오르려는 눈물을 참고 호두알 두 개를 만지작거린다. "애비 왔나?" 할머니가 아빠의 인기척을 느끼시고 방문을 열었다. "네! 어머니!" "애비야! 손에 들고 있는 그것, 너의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그 호두알 아니냐?" "네! 맞아요. 어머니." 방에 들어간 아버지와 상규는 할머니와 밥상머리에 앉아 이 호두알에 얽힌 이야기들을 들을 수가 있었다. 그러니까 이 호두알은 처음으로 아들에게서 선물로 받은 거라 그렇게 애지중지 손에서 놓지 않고 갖고 놀았던 할아버지의 유일한 장난감인 것이었구나. 호두알 두 개가 그렇게 할아버지에겐 소중한 것이었다는 것을 안 상규는 이제 도무지 이 호두알을 깨버릴 수는 없었다. "할머니! 그럼, 이 호두알이 할아버지의 보물이네요." "그렇지 보물이지. 이 세상에 둘도 없는 할아버지의 보물이지." 그러니까 보물이란 귀중하고 값나는 것만 보물이 아니라 마음이 있고 사랑이 그곳에 담겨 있다면 무엇이든지 보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상규는 알 것만 같았다. 상규는 저녁을 먹고 마당에 나오니 보름달이 동산에서 환히 웃고 있다. 마치 할아버지가 환하게 웃으시는 것만 같다. 상규는 호주머니 속에 넣어 두었던 호두알 두 개를 만지작거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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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따뜻한 호두알 두 개, 저도 오래 간직하고 싶네요...
할아버지는 작은 호두알을 만지작거릴 때마다 아들의 사랑을 느끼셨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