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기도
바바라 브라운 테일러 지음 | 송경용・진영종 옮김
Content
들어가는 말
1 Vision 하느님께로 깨어나는 연습 _ 014
2 Reverence 주의를 기울이는 연습 _ 032
3 Incarnation 살을 입히는 연습 _ 051
4 Groundedness 땅 위를 걷는 연습 _ 070
5 Wilderness 길을 잃는 연습 _ 089
6 Community 낯선 이들과 만나는 연습 _ 111
7 Vocation 목적을 가지고 사는 연습 _ 132
8 Sabbath ‘아니오’ 라고 말하는 연습 _ 149
9 Physical Labor 물을 나르는 연습 _ 172
10 Breakthrough 고통을 느끼는 연습 _ 188
11 prayer 하느님께 바치는 연습 _ 212
12 Benediction 축복을 드리는 연습 _ 234
주 _ 255
옮긴이의 말 _ 258
1
v i s i o n
하느님께로 깨어나는 연습(2)
(계속)
내가 처음 다닌 교회는 우리 집 뒤에 있었다.
교회 앞에 작은 개울가가 있었는데 이 작은 개울가에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수영하는 사람, 춤을 추는 사람, 스케이트를 타는 사람, 작은 배를 타는 사람도 있었고, 진흙 안에서 살고 있는 수많은 생물들이 있었다.
내가 눈을 찡그리면, 움직이는 수면 위에 태양은 빛의 침대가 되었다.
개울가 옆에는 꽃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그 나무에는 내가 오를 수 있는 긴 가지도 있고, 중간 길이 가지, 낮은 가지들도 있었다.
고소 공포증이 있던 나는 무서웠지만 나무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나는 위에서 나를 끌어당기는 느낌에 전율했고, 나무 몸통에 기대자 아버지에게 기대는 것처럼 편안함이 느껴졌다.
엄청나게 큰 꽃은 소박한 향기를 뿜고 있었다.
내가 꽃을 만지려고 몸을 숙이자, 차갑고 무거운 꽃잎은 기절하는 새처럼 떨어졌다.
내가 교회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학교에도 갔고, 어머니의 설거지를 도와드리거나 동생들을 돌보았고, 아버지와 함께 마당에서 일하기도 했다.
커가면서 친구들과 담배도 피웠고 버스 뒷자리에서 남자애들과 키스도 하였으며 고등학교의 계급 제도에 괴로워하기도 했다.
나의 키는 너무 빨리 자랐고 내 창백한 피부는 그을리지 않았다.
나는 열여섯 살 때까지 브래지어도 하지 않았다.
다행히도 나에게는 자기 증오를 치료하는 방법이 있었다.
학교가 끝나면 ‘프로스티’라는 말이 있는 마구간으로 달려갔다.
프로스티는 몸에 딸기색 얼룩이 있는 거세된 말이었다.
프로스티는 나를 좋아했다.
나는 프로스티를 타는 것도 좋아했지만, 프로스티가 있는 마구간을 청소하는 일도 행복했다.
나는 프로스티와 놀면서, 프로스티가 달콤한 건초 냄새 나는 숨결로 나를 소생시켜 준다고 생각했다.
저녁때는 숙제를 했다.
물론 유클리드의 기하학보다는 멜빌의 모비딕과 더많은 시간을 보냈다.
나는 열여섯 살 때 비로소 진짜 교회의 일원이 되었다.
그때 까지만 해도 여러 교회들의 차이점을 몰랐다.
나는 하느님이 하느님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하느님이 누구인지 또 그가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몰랐다.
그래서 나는 친구들과 함께 교회에 갔다가 세상에 대한 나의 사랑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기도 했다.
교회에서는 하느님만이 사랑의 대상이고, 성경만이 하느님을 알게 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가르쳤다.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세상과 하느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갈림길에 놓이게 되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기억하는 것을 말하고, 나도 내 기억에 따라 진실만을 말한다.
나는 교회 안에서 세상을 두려워하거나 의심했다.
내 육신은 세상의 것이고 육신을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배웠다.
더 이상 남자친구와 키스할 수 없었고, 새로운 선생님의 말대로 모든 육신의 유혹을 물리쳐야 했다.
교회가 세상보다 신성한 것처럼 영혼이 육체보다 신성했다.
하느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셨지만 세상이 그렇게 썩어 있지 않았다면 하느님의 아들은 죽을 필요가 없었을것이다.
내가 처음으로 일원이 된 교회와 같은 계통의 다른 교회에서 나는 하느님과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일, 덜 가진 자와의 나눔, 친구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배웠다.
나는 태양을 향해 자라는 묘목처럼 이러한 가르침들을 향해 나아갔다.
이 같은 가르침은 항상 씩씩하고자 했던 나의 비밀스러운 목표를 이용했다.
가르침은 나에게 중요한 할 일을 주었다.
만약 내가 배운 가르침이 내가 정말 사랑하던 세상과 나 사이를 이간질하려고 했다면, 설령 그랬다고 해도 나는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다만 나는 있는지도 몰랐던 세상의 세력들에 대해 경고해 주던 성스러운 책과 사람들을 알게 됐을 뿐이다.
내가 할 일은 그저 교회에 있는 하느님을 세상에 있는 신들보다 더 깊이 믿는 것이었다.
나는 세상에 속해 있지 않는 나의 진정한 충성심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 가던 삶을 살고 있었다.
이런 거친 출발과 함께 나는, 이 세상에는 많은 교회가 있고, 성경을 읽는 많은 방법과 신자들이 있고, 이들이 세상과 연결되는 많은 방법이 있음을 배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세상과 육신은 믿을 것이 못 된다’는 미묘한 가르침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사랑스럽든 놀랍든 혼란스럽든 결국 세상은 진리가 아닌 겉보기일 뿐이며 성경만이 사람들을 자유롭게 할 진정한 진리를 가졌다고 배웠다.
운 좋게도, 내가 배우고 사랑했던 성경은 나에게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다른 길을 제시해 주었다.
육체와 영혼의 결합을 신뢰하는 것같이, 세상도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장소라는 사실을 말이다.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세상이 신성한 장소임을 증명하기 위해 성경에서 적당한 구절을 고른다.
증거도 있다.
사람들은 그늘진 오크나무 밑에서, 강기슭에서, 산의 정상에서, 그리고 길고 거친 불모지에서 하느님을 만난다.
하느님은 회오리바람 속에서, 별이 빼곡히 박힌 밤하늘에서, 불타오르는 덤불 속에서, 그리고 완벽하게 낯선 사람으로 당신 앞에 모습을 나타낸다.
하느님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에
게 하느님의 아들은 들에 핀 백합꽃이나 하늘을 나는 새, 빵을 반죽하는 아낙네와 수당을 받기 위해 줄 서 있는 일꾼을 보라고 말씀하신다.
누가 이 글을 썼는지 모르지만 그는 성경에 대한 관심만큼 세상에 대한 관심도 하느님을 알아가는 방법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성경을 순서대로 외움으로써 하느님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사업의 실패, 참새가 땅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통해서도 하느님의 방식을 배울 수 있다.
십계명을 외는 것과 같이 연애와 야생화에서도 똑같이 하느님에 대해 배울 수 있다.
이것은 아름다운 소식이다.
나는 산상설교와 목련나무 둘 중 하나를 고르지 않아도 된다.
하느님은 워싱턴국립대성당의 제단을 통해서 나에게 오실 수 있지만, 하와이에 있는 잔잔한 저수지를 통해서도 오실 수 있다.
하느님의 집은 우주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펼쳐져 있다.
그 집에는 바다 괴물과 타조, 내가 모르는 언어로 기도하는 사람들과 내가 이름을 부르지 못하는 자들도 함께 살고 있다.
난 이 집의 책임을 맡고 있지 않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나는 누가 들어왔는지, 누가 나갔는지 말할 수 없고 규칙을 만들 수도 없다.
나도 욥처럼 하느님이 지구의 기초를 놓을 때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플리아데스 성단의 사슬을 묶을 수 없고 오리온 성단의 끈을 풀 수 없다.
산에 사는 염소들이 언제 출산하는지 모르고 천국의 순서에 대해서는 더더욱 모른다.
나는 이 세상에 온 손님일 뿐이고 다른 손님
들이 나의 적일지라도 그들을 섬기는 것이 나의 임무이다. 나는 그들에게 저항할 수 있지만, 내가 우리 모두를 만드신 하느님을 믿는 이상 그들을 전혀 상관없는 사람처럼 대할 수는 없다.
오직 하나의 집이 있고 인류는 그 집에서 같이 사는 법을 배우며 우리의 수명이 다하는 날 지구의 한숨 소리를 들을 것이다.
우리가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하다.
지혜는 무엇이 옳은지 알 때 얻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할 때 얻어진다.
혹은 그 일이 성공하거나 실패할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게 되면서 얻어진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행동하기 전에 무엇을 믿는지 확신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그 행동 자체가 원하는 것을 알게 해 준다는 사실을 알고, 이로 인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당신이 발을 씻는 것에 대해 불안해 한다고 하자.
그렇다면 최선의 방법은 직접 발을 씻는 것이다.
만약 당신의 이웃이 수상쩍다면 가장좋은 방법은 같이 저녁을 먹는 것이다.
이성은 경험이 함께 할 때만 그 효력을 발휘한다.
직접 해보지 않으면 현명함은 위축되고 만다.
이런 지혜는 어떤 정보보다 훨씬 많은 의미를 가진다.
지혜를 얻기 위해 당신은 뇌뿐만 아니라 배고픔, 고통, 쾌락을 느끼는 육신을 필요로 한다.
지혜는 선조들이 쌓아 놓은 통찰력을 향한 육신의 여정이고 따라서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육신의 살과 피가 필요하다.
이때 육신은 인간의 육신뿐만 아니라 조류, 나무, 물, 천체의 육신을 포함한다.
《탈무드》에 따르면, 풀잎에는 각자의 천사들이 있어 그들이 “자라라, 자라라” 속삭인다고 한다.
어떻게 하면 이런 천사들을 보고 들을 수 있을까?
나는 무언가를 바쁘게 하는 중에 신성한 환상을 보았다.
나는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환상은 마치 천둥이 치듯, 독감에 걸리듯, 지독한 사랑에 빠지듯 다가왔다.
나는 그 환상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그 환상을 몰아낼 방법은 많았다.
먼저 내가 카페인을 너무 많이 들이켰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아니면 세금 고지서와 저녁 뉴스처럼 별것 아닌 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환상에 대한 생각은 접고 오늘 당장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할 수도 있다.
이런 일은 하느님의 집에서 살아갈 수 있는, 내가 저지를 수 있는 몇몇 방법들이다.
그러나 나는 이 세상 혹은 가슴 속에 작은 제단을 세울 수 있다.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누구와 있는지, 그 장소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보기 위해 하던 일을 오랫동안 멈출 수 있다.
나는 천국으로 향하는 또 다른 문을 표시할 수 있다.
바로 사다리 자국이 있는 평범한 지구의 헝겊 조각, 그곳은 신성한 기운이 강해서 내가 알아채지 못하더라도 느낄 수 있고 바로 옆에서 볼 수 있다.
아마도 어딘가를 가기 전에 돌을 세우거나 축복의 말을 할 수도 있다.
우리는 어떤 대상에서 원하는 것을 분리해 낼 수 있다.
예를 들어 육신에서 영혼을, 세속적인 것에서 신성한 것을, 세상에서 교회를 분리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분리한 이 둘의 차이점을 하느님이 알아
보지 못하더라도 당황하지 말자.
지구는 신성한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다.
우리가 이 신성함에 걸려 넘어져 뼈가 부러지지 않는 것이 신기할 뿐이다.
야곱은 그가 전혀 모르는 장소에 있었지만 그 장소는 하느님의 집이었다.
비록 그의 가족이 그를 향해 분노를 분출했고 그의 형제들이 그를 죽이려고 했지만 하느님은 야곱이 있는 바로 그 장소에 당신을 보이셨다.
그때까지 야곱이 옳지 못했고, 앞으로 또한 그럴지라도 하느님께서는 야곱에게 환상을 보여 주셨다.
그리하여 야곱은 천사들이 지구와 천국 사이를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하느님께서 보여 주신 환상은 야곱이 알지 못했던 사실을 알려 주었다.
그는 하느님의 집에서 잠을 잤고 천국의 입구에서 깨어났다.
야곱은 아무것도 한 일이 없었다.
그가 한 일 중 유일하게 옳은 것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보고 말한 것이었다.
그리고 떠나기 전에 베고 있던 베개로 제단을 만들고 자신을 찾아온 하느님을 찬양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