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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수(眉叟) 허목(許穆)에 대해서 알고 싶었는데 오늘 이 글 올리고 보니
시대는 다르지만 17세기 붕당의 대립의 정쟁이 심했던 숙종 때의 현실 정치나 지금의 현실 정치와 다른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 허목의 삶과 생애를 통해서 알 수 있을 것 같다.
- 예림(曳林)
“의술은 인술이니, 병을 이용해 목숨을 빼앗지는 않는 법이다.”
서로 이념이 달라 정쟁을 하는 관계지만, 두 사람(許穆과 宋時烈)모두 한 시대를 풍미한 유학자이며 義와 禮를 아는 선비로서 믿음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許穆은 평생 학문과 문학에 뜻을 두었다가 나이 예순이 넘어 대사헌에 정승까지 올랐으나 생의 황혼기에 이르러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이황(李滉)의 학풍을 이어받은 정통 성리학(性理學)자였지만, 백성을 돌보는 것을 정치의 근본이라 여기고 현실적인 학문을 궁구한 실학자이기도 하다.
조선역사에서 17세기 후반은 붕당간의 대립이 가장 치열했던 시기다. 숙종의 즉위로 남인이 정권을 잡은 이후 20년 동안 집권 세력이 세 차례나 바뀔 정도였다. 서인은 1674년 갑인환국을 통해 남인에게 밀려났다. 남인은 1680년 경신환국으로 축출되고 다시 서인이 정권을 잡았다. 이어 1689년에는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제거되고, 남인이 집권한다. 하지만 남인은 1694년 갑술환국으로 물러나고 서인이 재집권한다
남인 실학파(實學派) 초석을 닦다
허목 (許穆 . 1595(선조 28)~1682년)
* 眉(눈썹 미)叟(늙은이 수) 許(허락할 허) 목(화목할 목)
미수(眉叟), 허목許穆
(許穆)의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화보(和甫), 문부(文父)이며 호는 미수(眉叟)이다. 아버지는 현감 허교(許喬)이고 어머니는 임제(林悌)의 딸이다. 그는 1595년(선조 28)
에 한양에서 태어났다.
1615년(광해군 7) 鄭彦(언)용(엄숙할용(禺긴꼬리원숭이 우+頁머리 혈))에게서 글을 배우고, 1617년(광해군 9) 현감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 거창으로 가서 퇴계 이황의 문인인 鄭逑(정구)의 문하에 들어갔다.
목차
1. 주자(朱子) 성리학(性理學)자. 실학(實學)의 비조가 된다
1. 예송. 허목(許穆)의 진심
1. 66세의 나이로 삼척부사에 부임하다
1. 원칙을 중시한 청남의 영수
1. 정적 관계를 뛰어넘은 선비의 믿음
조선 후기는 주자학(朱子學)을 정통 학문으로 추앙하고 유일한 정치 이념으로 받아들이던 시대이다. 학문적으로 경직되어 있던 시대적 분위기에서 허목(許穆)은 주자학(朱子學)을 따르면서도 고전에 더 관심을 두었다, 또한 현실에 구현할 수 있는 학문을 추구해 실학(實學)이 형성되는 초석을 놓았다.
1626년(인조 4) 인조가 어머니 계운궁을 추존하는 일과 관련해 인조의 미움을 받아 과거를 보지 못하는 처벌을 받았는데, 이후 벌이 해제된 이후에도 과거를 보지 않았다.
1650년(효종 1) 쉰여섯 살에 이르러서야 정릉 참봉에 천거되었으나 곧 사임했고, 이듬해 공조 좌랑을 거쳐 용궁 현감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657년(효종 8) 에는 지평에 임명되었으나 소를 올려 사임을 청했다. 그 후 사복시 주부로 옮겼다가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산림에 묻혀 학문을 즐기던 허목이 정치 일선에 전면적으로 등장한 것은 1660년(현종 1)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의 복상문제로 1차 예송이 일어났을 때이다. 허목은 자의대비의 복상이 서인이 주장하는 1년 복으로 정해진 1년 후에 3년복을 주장했다.
1차 예송 당시에는 허목(許穆)의 의견이 채택되지 않았으나 15년 뒤 2차 예송에서 남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지면서 그 공이 인정되었다. 이 일로 숙종 초기 남인이 집권할 때 대사헌에 특진되고, 이어 이조 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올랐다.
남인이 탁남과 청남으로 분열할 때 청남의 영수가 되어 송시열 처벌 등 강경론을 이끌었다. 남인 정권이 몰락한 경신환국(庚申換局 )당시 많은 남인들이 처벌되었으나 허목(許穆)은 귀향해 고향에서 저술과 후진양성에 힘쓰며 아흔 살 가까이 천수를 누렸다.
기호 남인의 선구자이자 남인 실학파의 토대를 닦은 문신이다. 효종에 대한 인조의 계비 자의대비의 복상 기간을 서인 송시열 등이 주도하여 1년으로 한 것은 잘못이므로 3년으로 바로 잡아야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예송을 시작하였다.
- 주자 성리학자, 실학의 비조가 되다
허목(許穆)은 일찍이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 경남 거창에 갔다. 거기에서 이황(李滉)의 학통을 이어 받은 영남 남인의 거두 정구(鄭逑)의 문인이 되어 학문을 익히고, 장현광(張顯光)에게도 배웠다. 즉 그는 정통 주자학(朱子學)자였다.
“기(氣)는 이(理)의 기(氣)이고, 이(理)는 기(氣)의 이(理)이다. 천리에 밝게 되면 그 기(氣)가 호연하게 되는데, 그 이(理)가 어두우면 굶은 것같이 되어 이(理) 밖에 기(氣)가 없고 기(氣) 밖에 이(異)가 없게 된다.” 라고 하는 이기불리(理氣不離)를 주장하고, 무한한 이(理)가 유한한 기(氣)보다 우위에 있다고 보는 학문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허목(許穆)은 책 읽기를 좋아하고 글을 짓거나 글씨를 쓰는 일에 전념했다. 그러나 출사해 관직에 오르는 일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1626년(인조 4) 인조의 어머니 계운궁이 사망하자 박지계(朴知誡)가 계운궁을 추존하자는 의논을 주창했다. 당시 동학(東學)의 재임(齋任)으로 있던 허목(許穆)은 임금에게 영합해 예를 어지럽히는 짓이라며 박지계(朴知誡)를 처벌하고 유적(儒籍, 유생 명부)에 기록해 버렸다. 그러나 이런 허목(許穆)이 곱게 보일 리 없었고, 결국 그는 과거 응시를 제한하는 벌을 받았다. 그 후에 벌이 해제되었지만 허목(許穆)은 과거를 보지 않고 재야에 묻혀 있었다. 그는 책을 읽고 시를 지으며 동방 제일이라는 전서(篆書)를 갈고 닦는데 힘썼다.
허목(許穆)은 기본적(基本的)으로는 주자학(朱子學)이면서 다른 학자들과는 다른 학자들과는 다른 독특한 학문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그가 예순 살이 되도록 관직에 오르지 않고 스스로 학문적 성취를 일궈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선 후기 사상계는 주자학(朱子學)이 거의 종교처럼 받들어지고 있었다. 송시열처럼 절대적(絶對的) 신자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선비들은 주자(朱子)의 말을 진리(眞理)로 여겼다. 또한 그 말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곧 사문난적(斯文亂賊)이고, 이단으로 매도되기까지 하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허목(許穆)은 주자(朱子) 주석의 사서나 칠서보다는 중국의 고전 육경(六經), 즉 <시경(詩經)>, < 서경(書經)>, <역경(易經)>, <춘추(春秋)>, <예경(禮經)>, < 악경(樂經)>에 중점을 두었다. 요순시대를 배워 그 시대를 현실에 구현해 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허목(許穆)의 이러한 학문적(學問的) 경향은 주자학(朱子學) 일색의 학풍에 영향을 미쳤다. 나아가 수사학(洙泗學, 공자와 맹자의 유학)의 부활을 통해 주자학(朱子學)을 넘어서려고까지 했다. 이는 훗날 이익(李瀷)과 이가환(李家煥), 정약용(丁若鏞)으로 이어지는 기호 남인 실학(實學)자들에게 맞닿는다. 말하자면 허목(許穆)은 영남(嶺南) 성리학(性理學)의 학통과 기호 남인의 학통을 통합한 것이다. 이것은 남인이 중심이 된 실학이라 할 수 있다.
- 예송 허목(許穆)의 진심
산림에서 쌓은 학문의 명성으로 여러 번 왕의 부름을 받았지만, 허목은 번번이 사양하곤 했다. 그런 허목이 정치 일선에 전면적으로 등장하게 된 계기가 있었으니 효종이 승하한 후 현종 즉위년에 벌어진 예송이다. 이것은 인조의 계비 자의대비의 상복이 문제가 된 것인데, 당시 집권세력이던 서인은 송시열등의 의견을 받아들여 효종을 차자로 인정하고 상복을 1년 복으로 결정했다. 당시 초상 때는 시간도 없고 경황도 없어 현종 역시 이를 받아 들였다. 그러나 1년 후인 1660년(현종 1) 소상(小祥)직전에 허목(許穆)이 지방에 있어 이의를 제기했다. 효종의 초상 당시에는 허목(許穆)이 지방에 있어 복제 논의에 참석하지 못했는데, 1년 복으로 정해졌다는 소식을 듣고 소상이 지나기 전에 복제를 바로 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올린 상소내용은 대개 이렇다.
첫째, 아들이 죽으면 적처 소생의 둘째 아들을 장자로 삼을 수 있다고 했으니 효종은 둘째 아들이지만 종통을 이을 수 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 상에는 너덜너덜한 3년복(참쇠斬衰三年服 오복의 하나,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상에 입음 외간상(外艱喪)에 입는데, 거친 베로 짓되, 아랫단을 꿰매지 않음.)을, 어머니상에는 가지런한 3년복(제쇠齊衰三年服))을 입고, 반대로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너덜너덜한 3년복을,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가지런한 3년복을 입어야 한다.
셋째, 송시열이 말하는 4종설의 세 번째로 들먹인 서자(庶子)는 중자(衆子, 적처 소생 장자외의 아들)가 아니라 첩자(妾子)이다. 그러므로 이 조항을 효종에게 적용하는 것은 잘못이다.
넷째, 첫째 아들이 죽어 둘째 아들이 승중(承重, 대를 잇는 것) 했을 경우 아들을 위해 1년복을 입는다는 규정은 <의례주소儀禮住疏> 의 어느 곳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
허목(許穆)과 송시열(宋時烈)의 주장이 이토록 다른 것은 4종설의 서자를 중자로 보느냐, 첩자로 보느냐에 있었다.
허목(許穆)은 서자(庶子)를 첩자(妾子)로, 송시열(宋時烈)은 중자(衆子)로 보았다. 또 허목(許穆)은 같은 남인으로 3년복을 주장한 윤휴가 종통을 이었으면 무조건 종통을 잇는 것으로 보아 너덜너덜한 3년복을 주장한 것과 다르게 어머니 상은 한 등급 아래인 가지런한 3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했다.
지금의 시선으로 보면 3년복이든 1년복이든 사소한 문제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조선 사회는 유학을 국시로 ‘예’를 중시 하는 나라였고, 각 정파의 주장은 국가를 다스리는 통치 이념의 발로였기 때문에 서로 강경하게 맞설 수밖에 없었다. 허목(許穆)이 예송에서 3년복을 주장한 것은 대통을 바로 세워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는 이념에서 비롯된 것으로 야당으로서 왕권 강화를 들먹여야 자신들에게 정권이 돌아올 수 있었다. 그래서 허목(許穆)은 왕권 중심으로 백성을 위한 치세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응 허목(許穆)의 주장에 대해서 “사대부례와 왕 조례가 다르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며 사대부의 권위를 왕권과 동일시 했던 송시열(宋時烈) 등 서인의 이념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
허목(許穆)의 상소로 인해 예론 정쟁에 다시 한 번 불이 붙었다. 군신 중에는 허목(許穆)의 주장이 타당하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었으나 집권세력인 서인의 뜻에 쉽사리 거스를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현종 역시 아버지의 정통성을 위해 3년복을 선호할 수밖에 없었지만, 갓 등극한 왕으로서 송시열(宋時烈)과 같은 원로대신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결국 원안대로 1년복이 확정되고 허목(許穆)은 좌천 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윤선도(尹善道)에 의해 정쟁으로 비화되었다. 그는 왕이 되었으면 적통(嫡統)과 왕통(王統)이 다 돌아가는 것인데 서자이니 적통이 아니라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 말이 도무지 사리에 맞지 아니하여 즉 말이 이치(理致)에 맞지 않음을 뜻함)이라고 주장하였다. 더구나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이 효종의 지우(知遇: 자기의 인격(人格))이나 학식(學識)을 남이 알고 잘 대우(待遇)함)가장 많이 받았으면서도 효종에게 각박하게 대하는 것은 배은망덕이라는 것이다. 처음 이론적으로 전개된 예론이 여기에서부터 정쟁으로 비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윤선도는 삼수(三水)로 귀양을 가게 되었고, 이로써 기해예송에서는 서인이 승리하고 남인이 패배하였다.
- 66세의 나이로 삼척 부사에 부임하다
기해예송에서 허목(許穆)은 여러 번 상소하고 상복도(喪服圖)까지 올렸지만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사헌부 지평에서 삼척 부사로 좌천 되었다. 1660년(현종 1)삼척부사로 부임할 때 허목(許穆)의 나이는 예순여섯, 고희를 바라보는 인생의 황혼기였다. 중앙 정계에 있다기 지방의 목민관으로 좌천된 것이니 낙담하고 정무에 시들할 수도 이었지만 허목(許穆)은 그렇지 않았다. 부임하는 즉시 부로(父老)들을 초청해 지방 풍속과 옛 사적을 묻고 부지런히 행정 활동을 시작하였다. 당시 삼척 사람들은 지방 풍속대로 비유교식 제사인 음사(陰祀: 함부로 제사(祭祀)지냄, 부정(不正)한 귀신(鬼神)을 제사(祭祀) 지냄), 격식에 맞지 않는 제기(祭器)들을 점검하고 <삼례도(三禮圖)>대로 다시 만들어 향교에 보관해 유교식 제례를 보급하는 일에 힘썼다. 또한 각 고을에 향약을 보급하고 이사(理社, 마을에서 지신(地神)을 위해 마련한 집)를 설치해 풍년을 비는 제례를 올렸다.
허목(許穆)은 삼척의 명승지를 돌아보고 건물을 증축하기도 하였다.
죽서루(竹捿樓)에 올라 현판 글씨를 남겼으며, 처음으로 사당을 창건하기도 하였다. 동해는 본시 바람이 많고 파도가 심한데다 특히 장마철이 되면 오십천이 범람해 백성들에게 피해를 입히곤 하였다. 이에 허목은 해일 피해를 줄이기 위해 바닷가에 우임금의 전서체로 쓴 비석을 세웠는데, 이것이 바로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다. 이 비석은 동방 제일로 일컬어진 허목(許穆)의 전서체로 쓰여 진 데다 도가와 주술적인 비유들이 들어 있어 명물이 되었다.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의 탁본은 물과 불이 침범하지 않는 효험을 본다고 해서 부적처럼 사용되었고 지금까지도 유행하고 있다.
허목(許穆)이 삼척부사로 성실하게 일하며 남긴 업적 중에 삼척지역의 지리지인 <척주지(陟州誌) 두 건을 편찬한 것도 빼놓을 수 없다. 허목(許穆)은 일하는 틈틈이 고을의 노인들을 찾아다니며 이야기를 수집하고 관아에 있던 고문서들과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등의 기록을 대조하면서 관련 자료들을 정리하였다. 또한 허목(許穆)은 2년간 삼척 부사 생활을 성실하게 수행하고 고향 연천으로 돌아왔다. 나이 든 몸으로 좌천되어 간 자리였음에도 현지 사정을 부지런히 살피고 할 수 있는 일을 최선을 다하였고, 틈틈이 주변을 여행하며 기록을 남기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과연 실학자의 면모가 아닐 수 없다.
- 원칙을 중시한 청남의 영수
허목(許穆)이 삼척 부사를 역임한 뒤 고향에 내려와 독서하고 글을 지으며 보내는 동안 1674년(현종 15) 효종의 비 인선왕후가 승하했다. 이때 자의대비의 복제 문제로 다시 한 번 예송이 일어났다. 이것이 2차 예송, 즉 갑인예송이다. 집권 세력인 서인 측에서 처음에 1년복으로 했다가 다시 둘째 며느리의 상복에 해당하는 9개월 복으로 정정하는 일이 발생 하자 다시 논쟁이 일었다. 9개월 복의 부당함을 호소하는 영남 유생 도신징의 상소가 올라오자, 현종은 대신들을 불러 모아 다시 의논하도록 하였다. 이때 현종은 1차 예송 때와 다르게 15년동안 왕으로서 자리를 지킨 터였다. 그는 “임금에게 박하고 누구에게 후 하려 하는가?”라며 김석주(金錫冑)에게 서인과 남인의 예론을 검토해 어느 것이 옳은 것인지를 보고하라고 하였다. 김석주(金錫冑)는 허목(許穆)의 예론이 옳다고 보고 하였다. 김석주(金錫冑)는 서인이지만 그의 가문인 청풍김씨와 송시열(宋時烈)의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현종은 자의대비의 복제를 1년복으로 결정해 버린다. 이일로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대거 등용되었다,
허목(許穆)은 논의가 진행될 때 지방에 있어 참여하지 않았으나 1차 예송당시 허목(許穆)이 제시한 의견이 채택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현종이 승하하고 숙종이 즉위한 후 그는 대사헌으로 특진되어 정계에 다시 진출하게 되었다. 실로 오랜만에 정권을 잡아 정국을 이끌게 되었다. 허목(許穆)은 여든살의 나이였지만 나름대로 포부를 가지고 상경하였다. 주자학(朱子學)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 학계에 파란을 일으키던 윤휴도 이때 함께 등용되었다, 숙종은 허목(許穆)에게 “경이 쌓은 덕망을 들은 지 오래이다. 사퇴하지 말고 나의 미흡한 점을 도움이 마땅하다.”고 예를 다해 환대하였다. 그리고 6개월만에 우의정에 임명했는데 전고(前古)에 없던 일이다.
그런데 막상 조정에 나와 사정을 두루 살펴보니 허목(許穆)의 생각과 달랐다. 서인이 물러난 조정에는 허적(許積)과 권대운(權大運), 외척 김석주(金錫冑)가 포진하고서 정권을 차지하고 있었다. 허적(許積)과 권대운(權大運)은 남인이었다. 그러면서도 서인이 요직을 차지하던 시기에도 탁월한 행정력과 원만한 처사로 요직에 등용 되었다. 또한 남인이 정권을 잡은 뒤에는 재상직을 독점하였다.
재야에서 올라온 허목(許穆)이나 윤휴에게는 이렇게 보수화 된 남인 세력이 마땅치 않았다. 허목(許穆)은 홍우언(洪宇遠), 조경(趙絅), 윤선도(尹善道)와 함께 ‘남인 4선생’으로 칭송받고 있었고, 윤휴는 송시열(宋時烈)도 감당하기 힘든 학자이다. 남인의 양대 이론가이며 사림의 우상인 이들이 조정에 들어서서 남인은 분열되고 말았다. 기존에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허적(許積), 권대운(權大運) 등을 따르는 이른바 온건파 탁남(濁南)과 허목(許穆)과 윤휴를 따르는 강경파 청남(淸南)으로 갈라진 것이다.
허목(許穆)이 영수가 되어 이끈 청남(淸南)에는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세 아들의 외숙인 오정창(吳挺昌)을 비롯해 이하진(李(夏鎭), 이원정(李元禎), 이수경(李壽慶), 조사기(趙嗣基), 장응일(張應一) 등이 있었다.
허적이 이끈 탁남에는 민희(閔熙), 민암(閔黯), 김덕원(金德遠) , 김휘 등이 있다.
청남과 탁남이 분열된 기폭제는 李德馨의 손자이자 許穆의 문인인 이수경의 상소였다.
삼정승은 반드시 서생 때부터 이미 재상이 될 만한 덕망이 있어야 그 지위를 감당할 수 있는 것인데, 지금 영의정은 너무도 합당한 인물이 못 됩니다. 또 김휘는 이조 판서로 있을 때,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는데 다시 이조 판서에 의망되었으며, 민암은 평소에 세상의 신망이 없었는데 정승에 의망되었으니 진실로 너무나 분수에 지나칩니다.
<연려실기술> 권 33종, 숙종 조 고사본말
이는 허적으로 대표되는 탁남의 수뇌부를 정면으로 공격한 상소였다. 영의정 허적과 좌의정 권대운이 사직상소를 올렸으나 숙종은 탁남을 두둔했다. 외척 김석주와 연계되어 있으면서 정국을 운영하는 데는 탁남이 더 낫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후에는 조정은 탁남과 청남이 서로 반목하느라 조용할 날이 없었다. 그러던 중 1679년(숙종 5) 許穆은 숙종에게 탁남의 허적을 경계하라는 상소문을 한 장 올렸다.
영의정 허적은 선왕께서 부탁한 신하요, 주상께서 친신(親信) 하는 신하로. 마치 제환공(劑桓公)의 관중(管仲)과 같은 신하로서 임무가 크고 책임이 무겁습니다.그러나 위엄과 권세가 드세지자 척리(戚里)와 결탁해 형세를 만들고 환관과 귀근(貴近)을 밀객(密客)으로 삼아서 임금의 동정을 엿보아 영합을 하고 있습니다.
상문(相門)에 내관(內官)이 있다는 비난이 있은 이후 깊은 산 험준한 곳에 수많은 성루를 쌓도록 권장해, 백성은 괴로워하는데도 일에 부지런하다는 것으로 주상의 뜻을 현혹시켜 권력을 독차지하는가 하면, 그의 서자(庶子) 허견(許堅)은 하는 짓이 무례하지만 법을 맡은 자도 그것을 막지 못합니다.
<숙종실록) 권8. 숙종 5년 6월 13일
숙종은 이 상소문을 접하고 “나도 모르게 마음이 서늘해지고 뼈가 차가워진다. 영상은 원로대신이자 임금 3대에 걸쳐 조정에 재상으로 있으면서 마음을 다해 충성했으니, 이는 신명(神明)도 보증하는 일이다.”라면서 허적을 두둔했다. 그러나 허목(許穆)은 사직하고 연천으로 낙향했다.
- 정적 관계를 뛰어넘는 선비의 믿음
허목(許穆)이 낙향하고 이듬해 허적의 아들 허견이 역모 사건에 연루되는 일이 일어났다. 이른바 경신환국이다.
조선역사에서 17세기 후반은 붕당간의 대립이 가장 치열했던 시기다. 숙종의 즉위로 남인이 정권을 잡은 이후 20년 동안 집권 세력이 세 차례나 바뀔 정도였다. 서인은 1674년 갑인환국을 통해 남인에게 밀려났다. 남인은 1680년 경신환국으로 축출되고 다시 서인이 정권을 잡았다. 이어 1689년에는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제거되고, 남인이 집권한다. 하지만 남인은 1694년 갑술환국으로 물러나고 서인이 재집권한다.
허적은 물론 허목과 함께 청남을 이끌던 윤휴 등 남인들이 이 사건에 연루되어 사사되면서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재집권을 하게 되었다. 허목(許穆)은 관작을 삭탈하는 정도에 그쳐 낙향하고 고향에서 저술과 후진 양성에 힘쓰며 천수를 누렸다.
몇 년 후 서인이 영수 송시열의 정쟁이 피바람 속에서 여든 셋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사사된 터에 허목(許穆)이 목숨을 보전한 것은 어찌 보면 그의 처세가 능란했다고 할 수 도 있다. 그러나 그 보다는 세속을 초탈한 그의 성품 덕이 컸다. 허목(許穆)의 졸기를 보자
허목(許穆)은 옛날 사람의 풍모와 흰털이 섞인 눈썹을 지니고 학(鶴)과 같은 자태가 있다. 학식이 넓고 성품이 아담하며, 옛것을 좋아했고, 문장(文章)은 고상하고 간결했으며, 전법(篆法)은 매우 기이했고 속류(俗流)에 비해 특별히 다른 것이 있었으나, 학문은 실지의 공부가 없었다.
대개 송시열의 예론으로써 요종을 깎아 박대했다고 해서 반드시 고묘(告廟) 해 법대로 적용하라고 한 것은, 그가 중한 일을 핑계로 남을 얽어서 해치는 죄과에 스스로 들어감을 몰랐던 것이다. ...... 그러나 윤휴와 허적과는 다른 점이 있어서 이따금 좋은 언론(言論)이 있기도 하다.
<숙종실록보궐정오> 권 13, 숙종 8년 4월 27일, 허목(許穆)의 졸기
남인과 척을 진 서인이 쓴 졸기이기 때문에 許穆을 낮추어 평가하면서도 윤휴와 허적과는 달랐다고 평가한 것이다.
한편 말년의송시열(宋時烈)과 얽힌 일화가 있다. 宋時烈이 하루는 중병으로 자리에 눕게 되었다. 많은 약을 써 보아도 소용이 없자 宋時烈은 아들을 불렀다.
“이 병은 許穆 대감이 아니고는 고칠 수 없다.병세를 자세히 고하고 정중하게 부탁해 약을 얻어 오라.”아들은 깜짝 놀랐다. 許穆이라면 선비로서의 의술을 잘 아는 어른이기는 하지만 서인인 宋時烈과는 견원지간犬猿之間)인 남인이었기 때문이다. 아들은 마음이 찜찜했지만 아버지의 명을 거역할 수 없어 심부름을 갔다.
許穆의집에 도착한 송시열의 아들이 병세를 이야기하자 許穆은 아무 말없이 정성스레 약을 지어 주었다.약첩을 받아 들도 오던 아들은 아무래도 의심도 나고 궁금하기도 해서 약봉지를 열어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 속에 ‘비상’이 들어 있는 게 아닌가? 아들은 괘씸하게 여기며 비상을 반으로 줄여 宋時烈에게 약을 달여 올렸다. 약을 먹은 宋時烈은 곧 병에서 회복 되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병이 도졌다. 아들은 다시 許穆의 집을 찾았다.
“자네가 혹시 약 속에 비상의 양을 줄인 것이 아닌가? 자네 아버지 병에는 적당한 양의 비상이 필요해 처방한 것이거늘! 이렇게 사람을 믿지 못하다니......,“
許穆은 호통을 치면서도 또 약을 지어 주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宋時烈은 아들을 크게 꾸짖었다.
“의술은 인술이니, 병을 이용해 목숨을 빼앗지는 않는 법이다.”
서로 이념이 달라 정쟁을 하는 관계지만, 두 사람 모두 한 시대를 풍미한 유학자이며 義와 禮를 아는 선비로서 믿음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許穆은 평생 학문과 문학에 뜻을 두었다가 나이 예순이 넘어 대사헌에 정승까지 올랐으나 생의 황혼기에 이르러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이황(李滉)의 학풍을 이어받은 정통 성리학(性理學)자였지만, 백성을 돌보는 것을 정치의 근본이라 여기고 현실적인 학문을 궁구한 실학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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