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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공생 국가와 그 적들
2013년 국회와 정부의 과제
(사회디자인연구소 / 김대호 / 2011-09-22)
국가에 대한 가장 보편적인 정의는 ‘물리적 폭력수단의 독점에 근거하여 구성원들에게 구속력 있는 규칙(질서) 제정권을 독점적으로 행사하는 제도와 사람’이다. 국가의 3요소는 영토, 국민, 주권이며, 이 주권은 바로 독점적 규칙(질서) 제정권이다. 이로부터 국가와 정치의 본령은 외부의 도전(군사적 침략, 환경재앙 등)으로부터 공동체를 방어하고, 구성원의 사고와 행위를 규율하는 좋은 질서(철학, 가치, 제도, 문화 등)를 세워 공동체의 물질적 문화적 생산력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이다. 이 규칙(질서)은 곧 正義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 핵심은 승자도 패자도 억울함 없이 그 결과에 승복하도록 하는 게임 규칙이다. 달리 표현하면 다양한 가치생산생태계를 건강하게 만들어주는 사회적 동기부여체계=상벌체계(incentive-penalty system)이다. 사회적 상벌체계의 지주는 합리적 격차(공평)와 사회적 최소한=복지이다. 중국공산당이 자신의 핵심 가치를 안보, 공평, 복지로 집약하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지금은 우리가 딛고 서 있고, 우리를 규율 해 온 주요 질서들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동아시아 국제정치 질서의 변화, 북한의 총체적 파탄, 기후환경 위기 및 에너지 자원 위기 등으로 인해 안보·안전의 개념이 바뀌고 있다. 직업, 직장 수명의 단축, 시장의 격심한 변화부침, 저출산 고령화, 양극화 등으로 인해 사회적 최소한의 수준과 내용에 대한 인식이 크게 바뀌고 있다. 결정적으로는 사회 상벌체계의 핵심이자, 사회적 가치·자원 배분의 핵심 기제인 시장, 국가, 사회가 대한민국의 성장과 통합을 더 이상 담보하기 힘들다는 인식이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다. 한마디로 분단건국, 산업화, 민주화, 외환위기 조기극복 신화를 창조한 제반 질서들이 재건축 수준의 리모델링을 요구받고 있다.
수명이 다한 1953년 체제
1953년 체제(질서)는 전 지구적 차원의 체제 경쟁과 독립운동 시절부터 내연해 오던 한반도·한민족 차원의 정치사회적 헤게모니 경쟁이 맞물려서 일어난 거대한 유혈참극인 한국전쟁을 통해서 탄생하였다. 1953년 체제는 남북한의 뼈대와 영혼을 형성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성현은 북한이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전체주의 체제가 된 이유를 1,2차 대규모 월남, 혹독한 폭격, 전쟁고아, 8월 종파사건이 불과 10년간에 집중되면서 비판과 저항의 싹을 깨끗이 뿌리째 뽑아버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남한과 북한은 체제 유전자는 다르지만, 냉전과 전쟁이라는 한 배에서 나온 이란성 쌍둥이라고 보아야 한다.
1953년 체제는 남한을 비행기나 배가 아니면 외국으로 나갈 수 없는 10만 평방킬로미터의 섬나라로 만들어 버렸다. 북에서는 우파, 남에서는 좌파가 사실상 소멸해 버리면서 정치 지형도 여느 민주주의 국가와 다르게 되었다. 남과 북에는 혹독한 제도적 폭력과 물리적 폭력으로 인한 피해의식, 두려움, 증오심을 가진 사람들이 넘치게 되었다. (남한의 경우) 이 중심에는 월남민, 피난민과 잔혹한 전쟁 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다. 행정조직, 군대, 경찰, 정보기관 등 감시, 통제, 동원 기구는 비대화한 반면, 후세대를 포함한 공동체 전체와 가치생산생태계 전체를 의식하는 공공 마인드, 상생(공생) 마인드는 퇴조해 버렸다. 사회 전반에 화전민 마인드와 약탈 마인드가 넘치게 되었다고나 할까? 한편 전쟁과 철저한 토지개혁으로 기득권 세력의 물질적 기반과 봉건 신분 질서의 유습이 완전히 파괴되어 버리면서 그야말로 출발선의 평등이 이루어졌다. 이 바탕 위에 조선조 이래로 내려온 문민 우위의 전통이 결합되면서, 교육이나 시험이 유력한 계층 상승의 통로로 되었다. 이는 한강의 기적의 주요한 동력 중의 하나가 되었다.
전쟁 전까지만 해도 남북의 집권 세력은 국민이나 인민을 상대로 치열한 환심 사기 내지 체제 혁신 경쟁을 하였다. 하지만 전쟁 후에는 이 경쟁은 사라지고, 체제 내부의 이단자(박헌영, 8월종파, 조봉암 등) 숙청 경쟁에 매진하다시피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한에서는 체제가 지극히 후진적이면 적화통일이 될 수 있다는 공포가 자체 혁신의 동기로 작용하였다. 4.19와 5.16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어쨌든 1953년 이전의 체제 혁신 경쟁으로 인해 남에서는 무산농민의 정치사회적 역량에 비해 훨씬 무산농민 친화적인 토지개혁이 이루어졌다. 제헌헌법에는 여성 투표권을 포함한 보통선거권이 유럽 선진국과 별 시차 없이 보장되었다. 근로자의 이익균점권, 광물 등 지하자원과 전기·통신 등 공공산업에 대한 국·공영화, 노동자 농민에 대한 강조 등 사회민주주의적 요소도 많이 들어왔다. 이렇게 주어진 ‘선심성 민주주의’는 이후 이승만 세력의 백색테러, 용공조작, 부정선거 등으로 인해 그 내용이 많이 형해화되긴 했지만…. 이로 인해 한국에서 민주화 운동은 국가를 원점(Zero Base)에서 디자인하는 운동도 아니요, 보통선거권 등 민주적 제 권리를 하나하나 쟁취하는 운동도 아니게 되었다. 주로는 헌법과 노동법 등에 명시된 권리를 정부가 보장하거나 준수할 것을 요구하는 운동이었다. 그러다 보니 시민사회운동은 순수성, 정치적 중립성, 도덕성을 중시하게 되고, 현실 정치나 국가경영과 상당한 거리를 갖게 되었다.
그런데 한국 사회, 아니 남북한 전체를 규율하는 가장 밑바탕 질서인 1953년 체제가 수명을 다한 징후가 뚜렷하다. 이 체제를 만들고 유지시킨 결정적인 힘인 동아시아 냉전 대결구도는 진작에 끝났다. 남한은 더 이상 적화통일 위협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체제 경쟁에서 의문의 여지가 없도록 승리하였다. 이제는 남북 간의 긴장 관계가 생래적으로 보수 친화적인 기업과 금융에게도 큰 리스크로 작용하고 있다. 게다가 1953년 체제 형성 과정에서 훈장을 주렁주렁 단 인사들의 생물학적 수명도 다했다. 1990년대 중반쯤부터 의심받아 온 북한의 체제 내구력도 어느 정도 증명되었고, 남한의 대북 강경 정책의 한계도 노정되었다. 북한에 대한 중국의 이해관계와 지지력도 확인되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이명박 정부는 3년여 동안 견지하던 “비핵 개방 3000”과 (천안함, 연평도 포격 사건 이후) “先 사과 後 대화 재개”로 집약되는 대북 정책의 기조를 대전환하려고 하는 조짐이 뚜렷하다. 이제는 “후천성 분단 인식 결핍증” 환자와 “북·중 관계 인식 결핍증” 환자와 아직도 적화통일 위협에 떠는 “피해망상증” 환자만 아니라면, 2012년 총선과 대선의 승자가 누가 되더라도 남북 관계만큼은 대전환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2011년 7월에 발표된 한나라당 ‘뉴비전’의 북한 개발·투자 프로젝트 -개성공단 기능확대, 남포·원산·나선·신의주 자유무역지대 개발, 동·서해안 남북통합 교통인프라 벨트 구축 등- 는 실로 남북관계 대전환을 전제로 한 야심적인 개발 프로젝트이다. 그러므로 2013년 이후 한국 정치의 최우선 과제의 하나는 1953년에 공고화된 분단 체제를 해체, 재편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대전환의 최소한은 2000년 6.15 정상회담, 2005년 9.19 공동성명, 2007년 10.4 선언을 이행하는 것이고, 더 나간다면 “평화협정 체결(북미수교) 대규모 경제지원 패키지와 더불어 북한이 흡수 통일 위협을 크게 덜 수 있는 한반도의 재통합과정을 비교적 안정적으로 관리할 국가연합 건설”과 완전한 한반도 비핵화 합의가 아닐까? 어쨌든 남북관계의 대반전은 외교, 국방, 재정, 산업(남북 분업, 물류, 북한 SOC 투자 등) 질서의 대대적인 재편을 요구하게 되어 있다.
이 외에도 인류의 생활양식과 국가의 발전 방식 전반의 대전환을 요구하는 거대한 변화가 쓰나미처럼 밀려오고 있다. 기후 변화와 환경생태 위기, 에너지자원 위기, 국제 통상·산업 질서의 변화(FTA, 역내 경제공동체 등, 중국-미국 간의 통상마찰 등), 중국과 인도의 정치경제적 비상, 인간의 소통·관계 방식의 변화(SNS, 인터넷) 등이 그것이다. 하나하나가 우리의 생활방식과 국가 시스템에 큰 영향을 미치는 준엄한 도전들인데, 여기에 응전하는 일 역시 2012년 총·대선을 통해 구성될 국회와 정부의 난제들이다.
한강의 기적을 남기고 사라진 1961년 체제
1953년 체제가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면 1961년 체제는 ‘한강의 기적’과 재벌과 관료 등 수많은 유산을 물려주고 아래로 잠복한 체제이다. 1961년 체제의 주도세력은 1953년 체제의 주도세력을 숙청하면서 등장했다. 1961년 체제는 남북 간의 체제 경쟁과 군부쿠데타 정권의 정통성 열위를 의식한 국가(관료)주도의 압축적인 산업화 체제라고 할 수 있다. 반공의 전초기지인 한국의 국제 정치적 위상을 활용하여, 국제 분업 질서 속에서 한국의 자리를 재빨리 찾아간 체제이다. 이를 위해서 당시 대부분의 신생 독립국가들과 달리 해외 시장, 자본, 기술, 자원을 과감히 활용하였다. 국가가 경제산업 부문을 총괄 기획하고, 한 손에는 채찍(각종 억압, 규제책)을 다른 한 손에는 당근(관치금융, 촉진책)을 틀어쥐고, 당시 사업 경험이 비교적 풍부한 재벌, 대기업이나 박태준 같은 믿을만한 장교를 신산업 개척(후발 추격 산업화)과 해외 시장 개척의 선봉에 내세웠다. 또한 여기에 필요한 산업 인력 공급을 위해 국민보통교육을 강화하는 한편, 실업고(공고)와 이공계 대학 설립 및 진학을 촉진하였다. 농촌 유휴인력을 도시 공장 노동력으로 전환하기 위해 저곡가 정책 등 농민권 억압 정책을 폈다. 독일, 일본의 경제개발 경험을 참고하여 후발 추격(catchup) 전략을 기조로 제조업, 수출산업, 중화학 공업(방위산업), 사회간접자본 등에 자원을 집중하였다. 기업의 리스크를 줄여주기 위해 수입제한, 정책금융, 조세특혜, 싼값의 토지 불하, 일부 기능인력 대한 병역 혜택 등 각종 특권, 특혜를 제공하였다. 기업은 말할 것도 없고, 전 사회를 일사불란한 병영 체제처럼 운영하기 위해, 노동권과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권을 강력하게 억압하는 한편, 국회를 일종의 통법부로, 사법부를 독재권력의 시녀로, 은행을 독재권력의 사금고로 만들었다. 물론 아프리카 후진국 독재자와 달리 은행 돈을 대체로 실적이 좋은 수출대기업을 위해 많이 쓰려고 노력하였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정경유착의 패악(특권, 특혜 제공)으로부터 그리 자유롭지는 못하였다.
민간 부문, 산업 부문, 수출 부문, 전문직 부문으로 인재들을 배치하려는 전략에 따라 공무원의 근로조건은 매우 낮게 유지하는 대신, 말 잘 듣는 공무원에 대해서는 임금 보상적 성격의 후한 공무원 연금을 제공했다. 뿐만 아니라 개발 정보가 앞설 수밖에 없는 공무원들의 부동산 투기를 은근히 방조하였다. 퇴임 뒤에는 관료들이 로비스트(전관예우)로 변신하는 것도 방조하였다. 적게 내고 많이 받는 공무원 연금제도와 함께 부동산투기권(?)과 약간의 부정부패권(?)은 공무원의 박봉과 장시간 노동에 대한 대가로 주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961년 체제는 많은 부담을 민간으로, 또 후대로 넘긴 체제이다.
1961년 체제는 강력한 노동권 억압 체제였기 때문에 기업 규모에 따른 근로조건 격차가 별로 없었다. 대기업 노동 현장에서도 “조인트 까기” “두발 검사” 등 군대식 통제가 횡행하였다. 그래서 보다 자유롭게 근무하면서, 다방면의 업무를 익혀, 자기 사업이라도 해 보고 싶은 사람들은 일부러 중소기업으로 오기도 하였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노동력 이동은 지금보다 훨씬 원활하였다. 이렇게 무수히 많은 불의를 저지르는 체제가 언론 통제와 정보 정치를 하지 않을 리 있겠는가? 당연히 중앙정보부, 경찰, 검찰, 국세청 등을 활용하여 사회 다방면에 대한 정보 정치를 일삼고, 언론에 대한 매수와 탄압을 일삼았다.
한편 국가의 복지제도도 도입하였다. 이는 군인, 공무원, 교원, 대기업 근로자 등 비교적 형편이 나은 사람들부터 먼저 적용하였다. 퇴직금 제도(1961), 생활보호제도(1961), 공무원 및 군인연금제도(1963), 사학연금 제도(1974), 전국민의료보험 제도(1977), 국민연금 제도(1988)가 그것이다. 하지만 이 제도들은 오랫동안 국민적 관심사는 아니었다. 보장 범위도 좁았고, 가입자들의 사회보험료 납입 연한도 짧았고, 인구 구조도 젊었다. 또한 전통적인 대가족 복지(상호 부조)제도가 당시까지는 작동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경제가 급성장하면서 취업 기회나 창업 기회가 넘쳤다. 1961년 체제는 몇 번의 정치적, 경제적 위기; 차관 기업 위기, 사채 위기(8.3조치), 중화학 위기, 외채 위기 등을 겪었는데, 그때마다 한일국교 정상화, 월남 특수, 중동 특수, (전두환 시대의) 3저 호황 등 예기치 않은 국제적 특수에 힘입어 이를 무사히 넘기면서 한강의 기적을 창조하였다. 하지만 이처럼 정의롭지도, 효율적이지도 않은 시스템이 오래갈 수가 없다는 것은 불문가지.
문제는 1987년 체제
6.29 선언과 1987년 헌법 개정을 주도하고, 1987년 체제의 첫 번째 대통령을 지낸 노태우 전 대통령은 자신과 전두환 대통령이 직면한 “민주화 시기”를 이렇게 규정했다.
“민주화의 시기는 욕구분출의 시기이다. 이 거친 욕구분출은 역사의 대세이고 당위이므로 도도히 흐르는 강물과도 같아서, 어설프게 막으려 하다가는 둑이 터지고, 그렇다고 내버려두면 마을을 휩쓸어 생존의 근거를 무너뜨린다(중략) 나는 지금도 민주주의는 공짜가 아니라 비싼 대가를 치러야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귀중한 가치라고 생각한다. 오죽하면 미국 독립선언의 기초자인 토머스 제퍼슨은 ‘민주주의는 독재자와 애국자의 피를 마시며 자란다’는 끔찍한 이야기를 했겠는가?”
민주화가 수많은 개인과 집단의 욕구 분출을 의미한다면, 아무래도 힘센 개인과 집단이 더 많은 욕구를 분출하고 실현하게 되어 있다. 자신의 욕구를 쫓아서 각개약진하는 존재들은 강한 공공에 의해 제어되든지, 아니면 시장에서 경쟁자나 소비자에 의해 제어되지 않으면, 사회나 시장 생태계를 크게 교란하게 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토머스 제퍼슨이 살았던 시대는 ‘전제 군주’나 ‘폭군’이 민주주의 주적이었다면, 지금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적은, 자신이 기여, 부담한 것에 비해 훨씬 많은 권리, 이익을 누림으로써 가치생산 생태계를 피폐하게 하는 힘센 사익집단 일 것이다. 독과점과 경제적 지대는 가장 잘 알려진 적이다.
어쨌든 1987년 체제는 ‘아래로부터 광범위한 민주화 운동에 의해 탄생한 체제’이다. 5년 단임 대통령을 직선으로 선출하는 것을 골자로 한 헌법 체계는 기본적으로 독재 방지에 치중한 나머지 책임 정치, 유능 정치 등 많은 가치를 포기하였다고 할 수 있다. ‘소선거구제 단순다수 득표제’를 채택한 국회의원 선거제도는 1구 2인 동반당선을 보장한 기존 선거제도보다는 당시 여당(민정당)에 불리한 제도였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3김의 분열을 노린 여당(민정당)의 어부지리 책략과 서울과 호남에 집중된 지지 기반을 가진 김대중의 책략이 결합한 것이었다. 그런데 의외로 반민정당 정서가 강하고, 지역별 표 결집이 이루어져 민정당의 어부지리는 무산되었다. 하지만, 이 제도로 인해 유력 정당들의 지역 분할・독점 구도는 매우 강화되었다. 1995년부터 실시된 지방자치 단체장 선거는 이들의 물적 기반을 획기적으로 강화시켰다. 현행 국회의원 선거제도는 엄청난 부동산 개발이익을 사유화할 수 있도록 한 토지 소유제도 및 조세제도와 결합하여 국회의원을 국민 전체의 대변자가 아니라, 도로 뚫고 교량 놓고 공항 짓는 예산 등을 따와서 자신의 부동산 가치를 올려주는 ‘지역(부동산) 개발 일꾼’으로 전락시키려는 압력이 강한 제도이다. 이는 진보와 보수의 끊임없는 정책적 헛발질의 주요한 뿌리의 하나이다.
87년 체제는 단군 이래 최대의 호황기를 배경으로 탄생한 체제였기에 경제 패러다임상의 변화의 목소리는 약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6월항쟁과 7~9월 파업투쟁을 주도한 세력들은 농업국에서 불과 30년 만에 자동차, 반도체 같은 상품을 선진국에 수출하는 신화를 창조한 한국식 자본주의 체제와 근본적으로 다른 경제사회 모델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1987년 이후 노동운동은 수익성과 교섭력이 좋은 대기업 노조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이들의 철학과 정서는 ‘단결하면 힘 생기고, 투쟁하면 쟁취한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익성과 교섭력이 좋은 곳에서 선도적 투쟁을 통해 근로조건을 끌어올리면, 주변 지역이나 동종 산업으로 파급되어 나머지 전체의 근로조건을 끌어올린다는, 사익과 공익을 완전히 일치시킨 가정을 깔고 있었다. 사회적 약자의 빼앗긴 권리 찾기가 곧 정의라는 생각을 내면화한 민중운동과 시민운동의 머릿속에는 가치생산생태계의 균형이나 노동의 양, 질에 따른 합리적인 불평등(공평), 다양한 집단의 이해관계의 충돌을 조화시킨 국가비전 개념이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하였다. 지난 30여 년간 한국사회의 변화를 주도해온 민주, 노동, 민중, 시민 세력은 보수와 마찬가지로 상충하는 이해관계를 절충하고 조화시킨 큰 그림(국가비전) 없이, 대체로 자신이 부당하게 빼앗기고 억눌려온 약자라는 확신을 깔고 상하 좌우(공동체 전체)를 살피지 않고 자신의 권리 찾기에 매진해 왔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한국사회는 압축적 경제발전과 민주화 과정에서 과거의 약자가 강자로 되고, 부당하게 빼앗기는 자가 빼앗는 자가 되는 일이 무수히 일어났다. 각자가 빼앗긴 권리를 찾아 힘차게 각개약진만 하면 그것이 곧바로 공공성이 되는 시대가 아니게 된 것이다. 단적으로 여성의 정치적 진출 확대를 위한 여성 정치인 프리미엄은 청년, 장애인, 노인, 중소기업가 등 다양한 소수자, 전문가, 정치신인들의 권리와 충돌하고 있다. 각자 공공적 가치라고 주장하는 교권과 학생 인권, 검찰권과 피의자 인권, 검찰권과 경찰권, 의권과 약권 등이 충돌하고 있다. 또한 수도권(효율성)과 지방(균형발전)이 충돌하고, 육체노동의 권리와 지식노동의 권리, 노동권과 자본권, 현세대 권리와 후세대 권리 등이 충돌하고 있다. 민주주의의 생명인 선거 제도에서는 선거의 공정성과 국민의 알 권리, 표현의 자유가 충돌하고 있다. 재정 지출의 우선순위를 둘러싸고 수많은 이해관계자들이 제각기 ‘족’(토건족, 복지족, 보건족, 사학족 등)이나 ‘마피아’를 구성하여 충돌하고 있다. 이는 정부 부처 간의 충돌로도 나타난다. 그런 점에서 지금은 19세기 말 유럽 열강들이 무주공산이나 다름없던 아프리카, 아시아에서 경쟁적으로 식민지 개척에 나섰다가, 1898년 아프리카 파쇼다에서 충돌(영국의 아프리카 종단정책(縱斷政策)과 프랑스의 횡단정책(橫斷政策)이 충돌)했던 것처럼, 이제 한국 사회는 충분히 확장된 권리들끼리 서로 충돌하는 국면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한국 사회에는 무수히 많은 파쇼다가 있다.
1987년 체제는 국가와 사회의 주인 노릇을 하던 독재 권력을 몰아내고, 국민이 진정한 주인이 되고자 하였다. 시장과 사회에 대한 권력의 부당한 억압을 철폐하고, 개인, 기업, 집단의 자유로운 권리・이익 추구의 자유를 보장하였다. 민주화의 핵심 가치로 반독재, 탈권위, 분권, 자치, 참여, 노동권, 도덕적 신뢰, 깨끗한 정치 등은 중시했지만, 투명, 공정, 공평(합리적 불평등), 할 일을 하는 유능한 정치 등은 상대적으로 중시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진보의 탈권위, 분권, 민주주의에 대한 강조는 여당, 검찰, 국정원, 국세청 등 권력기관에 대한 대통령의 불간섭(정치적 중립화), 당정분리, 지방분권, 조직 하부로 권한 이양 정책 등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이 스스로 버린 제왕적 권력은 재벌, 검찰, 법원, 관료, 언론사, 여당 중진 등이 나눠 가졌지만 민주주의의 건강한 힘은 발휘되지 않았다.
2500년 전 그리스 도시국가에서 잠깐 꽃을 피웠던 민주정이, 그 이후 2000년 이상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지 못했던 것은 민주정이 건강한 힘을 발휘하기 위한 전제 조건들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민주주의 혁명은 왕과 독재자를 권좌에서 몰아내고, 국민 다수가 그 자리에 앉아 이들보다 더 좋은 공공재를 생산하고, 더 크고 강한 정의를 세우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 국민들은 권력은 빼앗았지만 실질적인 주인으로 등극하는데 실패했다. 힘센 이익집단에 의해 가치생산생태계가 황폐화되는 것을 막고, 합리적인 사회적 상벌체계를 운영할 진짜 주인과 충직하면서도 유능한 대리인(정치, 관료, 언론 등)을 만들어내지는 못했다고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1987년 체제는 공공의 핵심인 정치의 (공동체와 가치생산생태계) 전체를 보는 안목, 책임성, 국가과제 추진 능력 등을 매우 약화시킨 체제라고 할 수 있다. 정치의 혼미, 무능과 민주화, 자유화를 틈타 공공적 마인드는 취약하지만 재력, 조직력, 전문성, 여론 조작력 등을 가진 관료, 재벌, 토건족, 언론, 직능협회, 노조 등의 정치사회적 힘이 급성장 하였다. 상대적으로 왜소해진 선출권력은, 특히 진보적 선출권력은 이들 거인들에게 겹겹이 포위되어 포박, 포섭당하는 상황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개인과 기업의 탁월한 변신·적응 능력에 비해 국가와 사회 시스템의 형편없는 변신·적응 능력은 한국 정치의 상대적 왜소화, 무능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김대중의 4대 부문 개혁
김대중 정부의 개혁은 IMF와 미국 재무성의 압력을 받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관치경제’로 명명된 1961년 체제를 개혁하려고 줄기차게 노력해온 경제관료 및 금융 전문가들과 개혁적인 지식인들의 오랜 염원과 지혜의 산물이다. 노무현 정부는 김대중 정부가 깔아놓은 레일을 충실히 달려갔다. 시스템 개혁의 과도기라고 생각하고 참고 기다리는 전략을 취했다고 볼 수 있다. 참여정부가 발표한 비전2030은 이 시스템이 만들 2030년의 미래상을 재정계획과 연계하여 그려 본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노무현 정부의 거의 모든 것을 무시했지만, 대북정책을 제외하면, 대체로 김대중 정부가 설계, 구현한 시스템에 박정희적 요소를 가미하고, 현대건설 사장과 서울시장 시절에 보여준 저돌적 추진력과 탁월한 임기응변 능력까지 동원하여 돌려 보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역시 잘 작동하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그런 점에서 우리 시대의 고통과 갈등의 뿌리를 알기 위해서는 김대중 정부가 심혈을 기울여 추진한 4대 부문(기업, 금융, 노동, 공공) 개혁과 복지 개혁의 성과, 한계, 오류를 규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김대중 개혁의 진수는 “4대 부문 개혁”과 “남북관계 개선”이다. 이 중에서 한국 사회에 대한 가장 길고 강력한 영향을 준 것은 4대 부문(기업, 금융, 노동, 공공) 개혁이다. 복지 개혁은 이 충격을 완충하기 위한 장치였다. 남북관계는 이명박 정부에 의해 노태우, 전두환을 넘어 박정희 시대로 돌아갔다. 따라서 4대 부문 개혁의 성과, 한계, 오류를 규명하면, 한국 사회가 어디쯤 있고, 어디로 가야 할지 가늠할 수 있게 해준다.
4대 부문 개혁의 핵심은 금융 개혁이었고, 그 초점은 은행이었다. 김대중은 은행이 빨리 정상화되어, 필요한 부문, 기업, 가계로 돈을 융통하는 한편, 기회만 보고 달리는 산업자본에 대한 감시, 견제(투자=대출 타당성 검사 등) 기능을 수행할 것을 기대했다. 한마디로 은행이 개혁의 중심으로, 경제의 심장이 되어 줄 것을 기대한 것이다. 그러나 공적자금과 인수합병 및 대량 정리해고를 통해 경영이 급격히 개선된 은행들은 김대중 정부의 기대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외환위기 전에 가계대출만 주로 하다가 졸지에 은행 인수합병(M&A)의 중심이 된 국민, 주택, 신한 은행 등은 좀 극단적으로 말하면 돈만 많고 덩치만 큰 전당포에 불과했다. 인수합병 과정에서 기업 금융 노하우가 상대적으로 많은 피인수 합병 은행 직원들을 주로 잘라냈으니 기업 금융 노하우나 기업 금융에 적합한 조직 문화가 생길 리가 없었다. 게다가 과점 구조이다 보니 예대마진도 컸다. 건설 경기 부양을 위해 떼일 염려가 없는 부동산 담보대출을 큰 폭으로 허용했으니, 은행들은 골치 아픈 기업 금융을 할 이유도, 경쟁이 치열하고 불확실성이 많은 해외로 진출할 이유도 없었다. 은행의 재무(금융)건전성이 역할 건전성으로 바뀌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정부는 시장이나 산업을 보는 눈은 없어도 공적 책임성이라도 있는데, 외환위기 이후 은행 산업의 중심이 된 대형 은행들은 둘 다 없었으니, 새롭게 들어선 시스템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그 결과 은행들이 기업 금융 노하우가 있었다면 충분히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될 수도 있었던 수많은 기업들이 쓰러졌다. 2000년대 들어 중견기업들과 벤처기업의 몰락은 재벌대기업의 황소개구리적 행태 못지않게 금융의 무능, 무책임도 크게 일조했음이 분명하다.
외환위기는 무분별한 금융자율화(종금사 행태 등), 허술한 금융 규제·감독, 변덕스러운 국제금융환경에 대한 무지, 재벌들의 대마불사 경험과 미래에 대한 지나친 낙관에 기반을 둔 무분별한 투자의 합작품으로 터졌다는 것이 정설이다. 따라서 김대중 정부의 금융개혁은 이 혹독한 경험과 교훈(?)에 근거하여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한편 매사가 그렇듯이 정치가 금융을 잘 모르는 상황에서는 금융개혁을 주도하는 금융 전문가들의 이해관계와 지적 한계(규모에 대한 맹신)가 새로운 금융시스템 디자인에 여과 없이 반영되었다. 이로 인해 금융 개혁의 기조를 금융안정성을 위한 금융산업에 대한 과도한 보호와 과도한 통제로 내달리게 하였고, 다른 한편 연대보증제 등 은행과 채권자의 이익을 과보호하는 제도를 유지시키도록 하였다. 공정·공생 사회는 김대중이 못다 이룬 금융의 정상화 내지 선진화를 빼놓고는 생각하기 어렵다고 보아야 한다.
김대중 정부의 노동개혁의 핵심은 노동시장의 유연성 제고를 통해 기업의 부담을 덜어주고, 구조조정으로 쏟아져 나온 유휴노동력을 새롭게 성장하는 산업이나 기업으로 이전시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노동기본권(노조의 정치활동 허용, 교원노조 합법화)과 함께, 기초생활보장제도와 고용보험 등 사회안전망을 강화했다. 그러나 노동개혁의 핵심인 고용유연성은 힘 있는 노조가 있는 대기업과 공기업, 더 힘센 공무원은 비켜가고 힘없는 민간 중소기업에만 관철되었다. 한때는 재벌대기업이 인재 유출을 걱정할 정도로 달아올랐던 벤처기업(.com 기업) 열풍은 2000년을 넘기지 못했다. 기업・금융개혁과 중국 특수 등에 힘입어 실적이 좋아진 기업들은 고용을 늘리기보다는 기존 임직원에 대한 보상을 강화했다. 동시에 비용 절감과 유연성 제고를 위해 대기업들은 공정(工程)분할이 가능한 업무나 주변적인 업무는 최대한 외주하청화했다. 좋아진 경영실적을 신규고용 창출이 아니라 종업원의 고액연봉으로 전환하는 데 노조와 경영진의 의견이 완벽히 일치했다. 따라서 민간 중소기업이 노동력을 조달하는 외부노동시장(성 밖)과 대기업 및 공기업, 공무원 등 좋은 직장(성안)의 격차가 점점 커지면서, 둘 사이의 왕래는 거의 단절되었다. 성안 사람을 성 밖으로 밀어내는 인력구조조정은, 복지매트리스도 얇은데다가, 무엇보다도 낙차가 너무 커서 2009년 쌍용차, 2010년 한진중공업 정리해고가 보여주었듯이 일종의 살인행위처럼 되어버렸다. 당연히 성안 사람들은 결사적으로 저항했고, 경영진도 성안의 고용유지에 진력하면서 신규채용은 극소화하고 외주하청화는 극대화했다. 이에 비례하여 좋은 직장을 둘러싼 경쟁도 점점 치열해져 갔다. 대기업이 차지하는 고용비중 또한 점점 줄어갔다. 1987년 이전과 달리 고졸자가 좋은 직장(생산직)에 들어갈 기회가 완전히 없어지면서 대학진학은 필수가 되고 대학진학률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올라갔다. ‘영혼을 팔아서라도’ 괜찮은 직장에 취직하고자 하는 살인적인 청년실업대란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 독특한 한국적 모순에 대해 진보세력은 복지와 공공부문(청년고용할당제 등)과 결사항전 말고는 뚜렷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보수세력 역시 경제성장, 취업자 눈높이 낮추기, 고용유연성 제고 말고는 뚜렷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김대중 정부의 기업개혁의 핵심은 ‘5+3’원칙에 집약되어 있다. 이는 1998년 1월 김대중 당선자와 대기업 총수들이 합의한 ‘경영투명성 제고, 상호보증채무 해소, 재무구조 개선, 업종전문화(핵심사업 설정), 경영자 책임강화’라는 5개 원칙과 1999년 8·15 경축사에서 밝힌 ‘제2금융권 경영지배구조 개선, 순환출자 억제를 위한 출자총액제한제도 부활, 부당내부거래 및 변칙상속증여 차단’이라는 3개 원칙을 말한다. ‘5+3원칙’은 기업들이 맞출 능력만 있다면 정말 바람직한 기준이었다. 하지만 당시는 김대중의 말대로 “정경유착을 통해 엄청난 대출특혜를 받은 기업은 돈줄만 죄면 무너지게 되어 있는 상황”이었고, 구조조정을 책임지고 수행하는 은행들은 자기 손으로 부실기업을 정리해본 역사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회를 놓치면 기업개혁을 할 기회가 다시는 오지 않으리라 판단한 김대중 정부와 은행은 초보의사였지만 생명이 오락가락하는 중병환자에게 과감히(?) 메스를 들이댔다. 그러다 보니 많은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다. 대표적인 것이 대우그룹 등 공격적인 경영을 하던 재벌 및 중견기업과 이들이 선도하던 진취적인 경영마인드와 중요 기업의 내국인 지분율이다. 그런데 진짜 심각한 문제는 중저가 부품의 최강국 중국과 첨단부품 소재의 최강국 일본 사이에 낀 조건에서 한국 특유의 고비용구조를 해소하지 못하다 보니, 기업들의 글로벌 전략이 진행되면서 국내 산업연관효과가 급격히 약화됐다는 사실이다. 이는 잘나가는 기업들의 실적(매출, 이익, 수출)과 국내 고용 및 부가가치의 연계성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재벌대기업으로의 경제력 집중 정도가 외환위기 전보다 더 높아졌지만, 해외매출 비중이 압도적이고 재무구조도 건실해졌기에 정부가 이들을 통제할 방법도 마땅찮아 졌다. 그럼에도 정부가 쥔 공정의 칼이 무디고 칼질이 서툴다 보니,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에서 보듯이 부당내부거래와 변칙상속증여에서는 큰 진전이 없었다. 산업생태계의 피폐로 인해 재벌계열사가 아닌 독립기업들이 성장해 올라오기가 정말 힘들게 되어버린 것이다. 한국은 선진국과 달리, 대기업 및 공기업, 공무원, 국가가 면허증을 통제하는 전문직의 처우가 매우 좋다 보니 한국 벤처중소기업들은 청년인재를 끌어들이기 힘든데다가, 설상가상으로 재벌대기업의 인재 빼가기, 기술 탈취, 대기업 유통망을 통한 착취, 연대보증제도 등 채권자를 과보호하는 금융방식까지 겹쳐져서 삼중고, 사중고를 겪고 있다.
공공개혁의 핵심은 ‘작지만 효율적인 정부’와 이를 위해 불요불급한 ‘규제개혁’과 ‘공기업 민영화’였다. 김대중 정부 기간에 포항제철, 한국중공업, 한국종합화학, 한국통신 등 8개의 공기업이 민영화되었다. 하지만 이 때문에 요금이 인상되는 등 소비자 후생이 악화되었다는 곳은 없다. 오히려 민영화로 기업이 가진 다양한 잠재력이 발휘되었다는 것이 중평이다. 규제개혁의 경우 풀어야 할 규제는 풀고, 있어야 할 규제는 존치시킨다고는 했지만, 풀어야 할 규제는 “이익집단의 필사적 로비와 국회의 동조”로 많이 축소, 변질되었다고 한다. 한편 김대중 정부는 외환위기로 파탄위기에 이른 가계 긴급구제책이자 경기부양책의 일환으로 부동산 분양가와 신용카드 현금서비스를 자율화했다. 하지만 적절한 시점에 브레이크를 밟지 못해 결과적으로 민생에 엄청난 타격을 입혔다. 신자유주의 개혁의 전형이라 할 규제 완화조차 시장과 자유에 대한 맹목적 신념에서 나온 게 아니라, 고육책이자 ‘비상’ ‘긴급’ 처방이었다. 김대중 정부의 공공개혁은 ‘규제개혁’과 ‘민영화’의 속도, 범위, 수순 등 여러 측면에서 시비할 거리가 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과연 공공개혁의 핵심을 짚었느냐 문제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김대중은 공공문제의 핵심을 건드리지 못했다. 이는 2009~11년에 집중적으로 드러난 검찰과 금융감독기관의 후진성을 보면 알 수 있다. 한국 ‘공공’문제의 핵심은 기본적으로 공공이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고, 관료 입장에서 ‘돈 되는 일’을 주로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공공의 핵심인 정치에 대한 무지와 무능의 소산이다.
‘생산적 복지’로 명명된 복지개혁에서는, 기초생활보호제도 등 선별주의도 가동했지만 그 골간은 4대 사회보험료에 기초한 보편주의였다. 하지만 사회보험료(국민연금 등)조차 낼 수 없는 500만 명은 사각지대에 방치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복지가 가장 절실히 필요한 자영업자와 영세 중소기업 종사자였다. 이들 수백만 명의 소득을 높여주거나 좋은 직장에 취직시키는 것은 이 시대 최고 최대의 진보이자 보수지만 그 누구도 대안을 갖고 있지 못하다.
김대중 정부의 4대 부문 개혁과 복지 개혁은 우선순위, 속도, 전제조건 확보 등에서 상당한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라서, 선별주의라서 실패했다고 볼 수 없다. 외환위기 상황이라 불가피했다고도 볼 수 없다. 그것은 1980년대 이래 “관치 경제”를 탈피하고자 한 시대적 합의 내지 상식을 다소 거칠지만 주체적으로 구현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김대중 정부의 구조개혁의 과정과 결과를 종합하면 이는 철저히 금융에 의한, 금융을 위한, 금융의 개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박정희 시스템 이후의 한국의 경제사회 질서가 어떤 기조로 가야 하는지는 금융 외에는 그럴듯한 대안을 갖고 있는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금융 중심의 대안 시스템은 영국 대처와 미국 레이건과 클린턴이 그 효용을 증명했고, 다른 선진국도 앞다투어 채택하는 시스템이기도 했다. 그러나 내포적 공업화론, 공업-농업 동반 발전, 중소기업 중심 발전 등을 기조로 한 박현채식 경제 패러다임은 3저 호황을 통해 외채위기를 극복하고, 세계 시장을 향해 힘차게 뻗어가는 한국 경제 앞에서 완전히 설득력을 잃어버렸다.
외환위기 이후 한국 경제, 산업, 기업, 산업에 대한 문제의식과 구조조정 기조는, 산업현장이나 바닥현실을 잘 모르는 금융전문가들의 문제의식과 논리로 추동되었다. 이는 규모, 제도, 구조에 대한 지나친 숭배로, 제도를 운영하는 사람들의 노하우, 마인드, 조직 문화에 대한 지나친 경시로 나타났다. 이 징표는 기업 빅딜론, 부채비율 200%에 대한 과도한 집착, 은행 합병을 통한 대형화에 입각한 손쉬운 수익성 및 경쟁력 제고 전략, 은행의 노하우와 조직문화를 묻지 않고 부동산 담보 가계대출을 중심으로 성장한 은행들에게 은행산업의 주도권을 내 준 것, 살아남은 은행으로 하여금 과점 체제에서 너무나 편하게 돈을 벌게 해 준 것, 연산 400만 대 이상을 생산하는 5~6개 자동차 회사만 살아남을 것이라는 디트로이트 산 괴담(한국 자동차 산업의 독자생존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생각)에 현혹된 것 등이다. 금융인들의 문제의식과 논리는 산업, 노동 현실과는 충돌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업-금융-노동-공공-복지 전체를 관통하는 선진적 경제사회 패러다임(국가비전)으로 정식화 되어 있었기에 정치인들에게는 설득력이 있었다.
외환위기는 산업과 금융이 개방화, 자유화된 상태에서 은행과 정부가 과거처럼 이들의 리스크를 떠안아 주면서, 선단식 경영, 황제경영, 불투명경영, 정경유착 등 1961년 체제의 유산을 청산하지 않아서 발생한 측면이 분명히 있다. 그와 동시에 기업, 금융, 관료, 정부의 총체적인 경영 노하우(위험관리, 시장 전망 등) 부족으로 인해 발생한 측면도 있다. 그런데 4대 부문 개혁은 경영노하우 문제를 너무 무시하면서 진행되었다. 다시 말해 경영 자원을 숫자로만 이해하는 금융인들이나 재무전문가들이 구조조정을 주도하다 보니 구조조정이나 감량 경영을 할 때 뇌수와 근육과 비계살을 구분하지 않고 같이 빼버린 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지금 한국사회의 문제 대부분은 초보의사가 중환자를 수술하면서 생긴 후유증이다. 초보의사는 김대중 정부와 구조조정의 선두에 선 은행과 관치경제 탈피를 외친 많은 경제개혁가들만이 아니다. 실은 1987년 6월항쟁과 노동자대투쟁을 주도한 세력도 구체제를 과감하게 수술한 초보의사였다고 보아야 한다. 물론 노태우·김영삼 정부도 마찬가지다. 그런 점에서 지금은 1987~88년의 국가 주요 질서에 대한 거친 수술과 1997년 이후 몇 년간의 시장경제에 대한 거친 수술의 후유증이 악조합되어 합병증이 극도로 심화된 상태다. 이 합병증은 단지 진보와 보수 정치세력의 수술(개혁), 수습 미숙 탓만은 아니다. 급격한 세계화, 지식정보화, 중국의 세계의 공장화, 분단체제의 재편 실패 등이 가세하면서 병세가 더욱 악화된 측면도 있다. 이 모든 것의 중심에는 국내외 환경변화에 조응하여 시스템을 제대로 바꾸지 못하는 남과 북, 진보와 보수의 정치적, 정책적 무능이 자리하고 있다.
건국의 아버지, 어머니들처럼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정부 공히, 그전 10~20년 동안 행해진 거친 대수술의 깊고 다양한 후유증을 제대로 인지하지도, 치유하지도 못하였다.
노무현 정부는 양극화 해소와 동반성장을, 이명박 정부는 공정사회와 공생발전을 내세웠지만, 양극화와 불공정의 원천인 강고한 기득권 구조를 거의 바로 잡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2012년에 탄생할 국회와 정부는 1987년 체제와 김대중 개혁의 성과, 한계, 오류를 정확히 분별하여 그 합리적 핵심을 계승・발전시키고, 한계와 오류는 뛰어넘어야 한다. 물론 민주화나 1987년 체제의 그늘이 짙다고 박정희·전두환체제를 대안으로 삼을 수는 없고, 자유화, 세계화, 김대중 개혁의 그늘이 짙다고 이를 전면 부정한 어떤 체제(착하고 유능한 박정희 시스템, 독일·스웨덴 시스템 등)를 대안으로 삼을 수도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한국 사회를 주조한 핵심 질서들은 각각 뚜렷한 대립물과 관통하는 정신이 있다. 1953년 체제는 한반도 전체를 석권할 뻔한 북한과 남한 내 좌파가 주된 대립물이었다. 주류적 정신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좌파를 척결하는 것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영혼을 팔아서라도 생존하고, 출세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좌파와 원칙과 양심을 무자비하게 학살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북한과 좌파에 대한 공포(레드콤플렉스)와 증오심도 몸에 배였다.
한편 1961년 체제는 빈곤, 무질서, 국정의 표류(추진력 상실)가 주된 대립물이었다. 주류적 정신은 ‘잘 살아보세”였다. “소득증대, 수출증대(신중상주의), 수출대기업에 자원(특권, 특혜)을 몰아주는 발전 드라이버(불균형발전) 전략”이 핵심 전략이었다. 1987년 체제는 사회 곳곳에 똬리를 튼 권위주의, 불균형 발전, 지나치게 강한 자본권이 주된 대립물이었다. 주류적 정신은 ‘억눌린 권리 찾기, 빼앗긴 내 몫 찾기’였다. 이는 반독재 민주화, 탈군부·권위주의, 노동권 강화, 분권화, 주민참여 확대, 협치(거버넌스) 강화 등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이뤄진 개혁은 정부의 부당한 간섭을 제거하고, 시장 (금융시장, 상품서비스 시장 등) 질서를 정비하여 다방면에 걸쳐서 시장원리, 즉 경쟁과 소비자 선택권을 강화하는 쪽으로 달려갔다. 참여정부 출범 이후에는 분권, 자율, 참여, 탈권위, 반칙특권 철폐라는 1987년 체제의 가치가 더욱 강조되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에는 1961년 체제의 가치가 더욱 강조되었다. 물론 둘 다 유효성을 잃은 가치였기에 별무신통이었다.
어쨌든 2013년 체제의 주된 대립물과 핵심적인 정신은 무엇일까?
진보는 주로 반복지, 반통일·평화세력 등을 지목하고, 보수는 무분별한 포퓰리즘, 친북좌파 등을 지목한다. 양극화, 저출산·고령화, 청년 실업과 불완전 고용, 성장동력의 약화 등의 심각성은 그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문제들의 뿌리를 파고들어가 보고, 민주화, 자유화, 세계화의 의미를 곱씹어 보면, 결국은 힘센 이익집단에 의한 가치생산생태계의 피폐와 국가의 무능, 무책임성(취약한 보호, 완충, 균형, 조절 기능) 등이 이 시대 대한민국의 모순부조리의 핵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요컨대 양극화 해소, 동반성장, 공정사회, 공생발전을 가로막는 것은, 한국의 공공(정치, 행정, 사법, 언론, 지식사회 등)은 취약한데 반해, 사익집단은 강성하여 힘 약한 존재들에게는 너무 과도한 경쟁과 과소한 보호 규제가 적용되고, 힘센 존재들에게는 너무 튼실한 보호 장벽과 너무 적은 경쟁이 적용되는 불공정하고 불공평한 사회 구조라고 할 수 있다. 재벌의 황소개구리화, 은행과 전문직능(자격증)에 대한 과보호, 공공부문의 양반관료화, 전관예우 현상(마피아 집단의 준동), 거대한 부동산 불로소득 방치, 연대성・공평성과 담 쌓은 기형적 노조 등은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기본적으로 공공의 보루인 정치, 행정, 사법, 언론 등이 제 역할을 못하여, 이권(이익집단) 편향적이거나 이념편향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2013년 체제의 핵심 정신이자, 공정·공평 사회의 관건은, 단기적이고 협소한 이익을 추구하는 힘센 사익집단에 의해 훼손된 시장생태계, 정치생태계, 언론·문화 생태계, 자연생태계, 국가의 재정할당구조, 노동간 분배구조, 수도권과 지방의 건전한 관계를 복원하는 것이다. 가치생산생태계의 건강성 혹은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공평성의 전제인 평가, 계량이 잘 돼야 한다. 사회적 연대성과 투명성이 저변에 흘러야 한다. 정치가 좋은 의도와 실제 결과를 일치시킬 수 있는 유능함을 갖추어야 한다. 따라서 2013년 체제의 핵심 정신은 정의(공평과 복지)와 유능이다. 정의는 참여정부가 강조한 반칙・특권 없는 사회, 공정・투명 사회, 동반성장과도 일맥상통하고, 이명박 정부가 추구하는 공정·공생 사회와도 일맥상통한다. 문제는 가치와 제도의 우선순위와 정치집단과 관료집단의 진정성과 실행력이다.
2013년 체제가 우선시해야 할 가치와 제도는 1987년 체제가 경시하거나 간과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분단체제의 재구성, 고용률과 임금근로자 비율의 제고, 우리의 생산력 수준(1인당 GDP)에 맞고 노동의 양과 질에도 상응하는 보상체계 구축, (노동과 자본간 재분배, 조세・재정을 통한 재분배와 더불어) 노동간 재분배를 통한 중향 평준화, 청년인재의 흐름 건전화, 기업의 국내 투자 및 고용에 대한 공포 저감, 수출 및 매출의 국내고용과 부가가치 유발 효과의 제고, 서민과 벤처중소기업 금융의 정상화, 부동산 불로소득 최소화, 중국발 구조조정 압력 대응, 유연안정 시스템 구축, 정치의 유능화(관료 및 이익집단에 대한 민주적 통제 강화), 기후변화와 에너지자원 위기 시대에 대한 대비 등.
2012년 총·대선에서 밑그림을 제시하고 2013년부터 본격적으로 재건축할 새로운 질서는 지난 20~30년 동안 대한민국을 떠 받쳐온 헌법, 선거제도, 관료제도, 교육제도, 복지제도, 조세·재정구조, 공정거래 질서, 노동운동의 문화와 관행 등을 망라한다. 김대중이 남긴 미완의 4대 부문 개혁, 복지개혁, 분단체제 재편은 그것대로 하고, 또 다른 4대 혹은 6대 부문 개혁(헌법·선거법·국회법을 포함한 정치개혁, 사법, 조세・재정, 교육개혁 등)을 추가해야 한다. 2013년 이후 한국을 책임지겠다는 정치집단과 지식사회는 성찰과 모색 작업을 ‘건국의 아버지, 어머니들’처럼 해야 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런 지도자와 정치집단을 우리 사회가 2012년에 만들어 낼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 이 글은 ‘사회통합위원회-경제·인문사회연구회-동아일보 공동주최 세미나 발제문’입니다.
http://news.donga.com/Culture/New/3/07/20110922/40502919/1
http://www.konas.net/article/article.asp?idx=26628
김대호 / 사회디자인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