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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曰 奏假無言하야 時靡有爭이라 하니 是故로 君子는 不賞而民勸하며 不怒而民威於鈇鉞이니라 성내지 않아도 백성들이 작도와 도끼보다 더 두려워하느니라. 지극한 정성으로 받들면 신이 감격하여 이르게 되는데 이때에는 아무 말이 필요 없고 묵묵한 가운데 신과 통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곳에 다툼이 있을 수가 없듯이 군자가 지극한 정성으로 백성에게 임하면, 군자가 백성에게 상을 주지 않아도 백성들은 서로 잘하자고 권하며, 군자가 성내지 않아도 백성들은 형벌보다도 더욱 두려워하여 잘 따르게 된다. 군자는 공순함을 돈독히 하여 천하가 평평해지느니라. 먼 뜻을 삼은 것이라. 윗글을 이어서 천자가 드러나지 않은 덕이 있어 제후가 그것을 법으로 삼으면 그 덕이 더욱 깊어 효험이 더욱 멀어지는 것을 말함이라. 독은 두터움이니 독공은 그 공경함이 나타나지 않음을 말함이라. 공순함을 돈독히 해서 천하가 평평해짐은 이에 성인의 지극한 덕이 깊고 은미하여 자연히 응함이니, 중용의 지극한 공효이라. “소리와 빛은 백성을 교화하는데 끝이라” 하시니라. 시경에 이르기를 “덕이 가볍기가 터럭과 같다” 하니 터럭은 오히려 비교할 수 있거니와 상천의 일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어야만 지극하니라. 밝히는데 있다(大學之道 在明明德)고 하였듯이 사람은 모두 밝은 덕을 갖고 나왔다. 이것이 앞에서 나온 不顯惟德이다. 이 드러나지 않는 덕은 멋진 소리나 화려한 색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기에 시경에서 ‘밝은 덕의 소리와 색을 대단치 않게 여긴다’고 하였다. 공자는 이러한 소리와 빛은 백성을 교화시키는데 지엽말단적인 것이라고 하였다. 덧붙여 시경의 말을 인용하여 덕은 가볍기가 터럭과 같다고 하였다. 만약 덕이 무겁다면 누가 그것을 마음에 품고 있겠는가. 하지만 그러한 터럭조차 물건이라 큰 터럭, 작은 터럭이 있듯이 비교가 된다. 이렇게 비교가 되는 것으로 덕을 나타낼 수가 없다는 말이다. 주역 산천대축괘의 상구효에 보면 “어느 하늘의 거리인고, 형통하니라(上九曰 何天之衢ㅣ오 亨하니라)”하였고, 그 爻象傳에“何天之衢는 도가 크게 행함이라 (象曰 何天之衢는 道ㅣ 大行也ㅣ라)”하였다. 주역의 易簡의 법칙이 있을 뿐이다. 하늘은 쉬운 법칙이 있기에 만물을 내고, 땅은 하늘의 쉬운 법칙을 그대로 따르는 간단한 법칙으로 만물을 기르고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이 상천의 일은 易簡의 법칙에 따라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이 지극할 뿐인 것이다. 『중용』은 『시경』「文王篇」의 “上天之載 無聲無臭”를 인용하고 이 뒤에 “至矣라(지극하니라)”라는 두 단어만을 덧붙여 끝맺음을 하였다. 하늘의 덕은 지극하기에 더 이상 보탤 말이 없다는 것이다. 이제 다만 크게 여기지 않게 여긴다고 말했을 뿐이라면, 이것은 오히려 소리와 색이 남아 있는 것이니 드러나지 않는 묘함을 형용하기에 충분하지 못함이라. 『시경』「증민」시에 말한 바 ‘덕은 가볍기가 터럭과 같다’라고 한 것만도 못하니 즉 거의 가히 써 형용이 되었으되 또 스스로 이르기를 터럭이라고 하면 오히려 가히 비교가 되니 이 또한 그(불현지덕) 묘함을 다하지 못한 것이리라. 「문왕시」에 말한 바 ‘상천의 일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다’고 한 것만 못하니, 그렇게 한 후에야 드러나지 않음의 지극함이 될 뿐이라. 대개 소리와 냄새는 기운만 있고 형체가 없어서, 물건에 있어 가장 미묘한 것임에도 오히려 없다고 말한 것과 같으니라. 그러므로 오직 이것은 가히 써 드러나지 않은 공순함을 돈독히 한다는 묘함을 형용함이오, 이 덕의 밖에 또 별도로 이 세 가지 등수(성색→ 터럭→무색무취)가 있은 연후에 지극함이 된다고 함이 아니니라. 其可不盡心乎아 미루어 말해서 써 공순함을 돈독히 해서 천하가 평해지는 성한 데까지 길들여 이루게 하시고, 또 그 묘함을 찬양하여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은 뒤에 끝나는 데 이르게 하시니, 대개 한 편(제33장)의 요점을 들어 간략하게 말씀하시어 그 반복하고 정녕하여 사람에게 보여주신 뜻이 지극히 깊고 절실하시니, 배우는 자가 그 가히 마음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지극한 정성의 덕은 드러나지 않아 소리나 빛, 터럭으로도 비교할 수 없는 무색무취의 지극함만이 있을 뿐인 것이다. 지극한 정성은 신과 같다(至誠如神). 그러하므로 사람이 항상 지극한 정성으로 임한다면 신이 감격하여 이르니 하늘이 감동한다는 것(至誠感天)이 자사가 『중용』을 통해 우리들에게 가르치려는 요체일 것이다. 따라서 배우는 우리들은 그 마음을 다하여 中庸의 道를 배워야 할 것이다.
2008년 12월 1일 중용 원문을 마침(終) 뒤에서는 中庸章句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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