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요 당대 시인(가-마)
(가)
가도 賈島(780?∼843)
당나라의 시인. 자는 낭선(浪仙). 허베이 성 판양에서 출생.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했으나 실패하고, 승려가 되었다가 811년에 뤄양에서 한유를 만나 속세로 돌아왔다. 다시 진사 시험에 응시하였으나 급제하지 못하고, 837년 쓰촨 성 창장 현의 주부가 되었으며, 이어 쓰촨 성 안악 현 푸저우 사창참군으로 전직되었다가 병사하였다. 그의 시는 정서가 결핍되어 있으나 서정적인 시어는 세련되고 묘사가 섬세하였다. 표현에 고심한 그는 오언 율시에 뛰어났고, 1자 1구도 소홀히 하지 않아 유명한 <퇴고(推敲)>의 어원이 된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작품에 시집 《가랑선 장강집》이 있다.
가지(賈至/718~772)
당(唐)나라의 문신·시인. 자 유린(幼隣). 뤄양[洛陽] 출생. 751년 명경과(明經科)에 급제하여 기거사인(起居舍人)·지제고(知制誥)가 되었고, 안록산(安祿山)의 난 때에는 현종(玄宗)을 따라 촉(蜀)나라에 갔다. 766년 경조윤(京兆尹)이 되었고 산기상시(散騎常侍)에 이르렀다. 시문에 능하였고 그 준일(俊逸)한 기품은 남조(南朝) 때 송(宋)나라의 포조(鮑照)·유신(庾信) 등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문집 30권이 있다.
(나)
노동(盧同/775?~835)
당나라 중기의 시인. 호 옥천자(玉川子). 후베이성[湖北省] 판양[范陽] 출생. 고고하고 청절한 색다른 성격으로서 처음에는 쑹산산[嵩山]에 숨어 살다가 나중에 뤄양[洛陽]에 정주하였다. 극도로 궁핍한 생활을 하면서도 청렴한 인품을 굽히지 않아, 이에 감탄하여 조정에서 기용하려 하였으나 사양하였다. 그의 시는 청렴한 인격을 반영하여 신비한 풍격을 갖추었는데, 한때 허난령[河南令]으로 있던 한유(韓愈)가 높이 평가하여, 그의 지우(知遇)를 입었다. 특히 붕당의 횡포를 풍자한 장편시 《월식시(月蝕詩)》가 유명하다. 재상 이훈(李訓) 등이 환관 소탕을 도모하다가 실패한 ‘감로(甘露)의 변’에 휩쓸려 살해되었다. 저서에는 《옥천자시집》(2권)과 외집(外集)이 있다. 변’에 휩쓸려 살해되었다. 저서에는 《옥천자시집》(2권)과 외집(外集)이 있다.
노조린(盧照隣/637?~689?)
당(唐)나라 초기의 시인. 자 승지(昇之). 호 유우자(幽憂子). 허베이성[河北省] 판양[范陽] 출생. 어려서부터 재질(才質)이 뛰어나 일찍부터 문명(文名)을 떨쳤으나, 20대 중반에 악질(惡疾)에 걸려 쓰촨성[四川省] 신도(新都)의 위(尉)를 물러나 각지를 전전하며 투병생활을 계속하였으나, 끝내 효험이 없자 물에 빠져 자살하였다. 왕발(王勃)·양형(楊炯)·낙빈왕(駱賓王)과 함께 당나라 초기 4걸(傑)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시인으로, 《당시선(唐詩選)》에 있는 장대한 칠언가행(七言歌行) 《장안고의(長安古意)》가 특히 유명하다. 시문집으로 《유우자집(幽憂子集)》(7권)이 있다.
낙빈왕(駱賓王/640?~684?)
초당(初唐)의 시인. 이우[義烏:浙江省] 출생. 조숙한 천채소리를 들었으나 출신이 낮아 불우하였고, 창안[長安]의 주부(主簿)였을 때 측천무후의 노여움을 사 저장성 린하이[臨海]의 승(丞)으로 좌천되었다. 그래서 낙임해(駱臨海) 또는 낙승(駱丞)으로도 불렀다. 처지에 대한 불만 때문에 사임하였다가, 서경업(徐敬業)이 양저우[揚州]에서 무후(武后)에 대한 반란을 일으키자 이에 가담하여 격문을 기초하였다. 그러나 반란이 실패하자 처형되었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자취를 감추었다는 설도 있다. 왕발(王勃)·양형(楊炯)·노조린(盧照) 등과 함께 시문이 뛰어난 ‘초당사걸(初唐四傑)’로 일컬어지고, ‘왕양노락(王楊盧駱)’으로 병칭되기도 한다. 육조(六朝)의 시풍을 계승하면서도 격조가 청려(淸麗)하였고, 특히 노조린과 함께 칠언가행(七言歌行)에 뛰어났다. 대표작으로는 <제경편(帝京篇)>이 《당시선(唐詩選)》에 수록되어 있고, 시문집으로는 《낙빈왕 문집》 《낙임해집(駱臨海集)》 등 10권이 있다.
(다)
두심언(杜審言/648?~708)
당(唐)나라 초기의 시인. 후베이성[湖北省] 샹양[襄陽] 출생이라고 하나, 일설에는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이라고도 한다. 자는 필간(必簡). 진(晉)의 명장이고 학자이기도 하였던 두예(杜預)의 자손이며, 성당(盛唐)의 대시인 두보(杜甫)의 조부이다. 670년 진사에 급제하고 측천무후(則天武后)와 중종을 섬겼으나, 한때 북(北)베트남의 교지(交趾)에 유배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죄에서 풀려나온 후 국자감 주부(國子監主簿)·수문관 직학사(修文館直學士)의 벼슬에까지 올랐다. 젊어서부터 문명을 떨쳐 이교(李嶠)·최융(崔融)·소미도(蘇味道)와 함께 ‘문장사우(文章四友)’라 불렸다고 하며, 또한 무후조(武后朝)의 궁정시인으로서 심전기(沈佺期)·송지문(宋之問)과 견주었다고 하나, 오늘날 시 43수만이 전할 뿐이다.
당현종(玄宗/685~762)
당나라의 제6대 황제(재위 712∼756). 본명 이융기(李隆基). 예종(睿宗)의 제3자. 명황(明皇)이라고도 한다. 조모 측천무후(則天武后) 시대에 낙양에서 태어났으며, 9세에 임치왕(臨淄王)으로 봉해졌다. 26세 때 위후(韋后)가 딸 안락공주(安樂公主)와 짜고 중종(中宗:현종의 백부)을 암살, 중종의 아들 온왕(溫王)을 제위(帝位)에 앉히고 정권을 농단(壟斷)하기 위해 현종 아버지 상왕(相王)까지도 해치려 하였다. 그는 심복 장병을 인솔, 위후와 안락공주 일당을 친 뒤 아버지를 제위에 옹립하고 자신은 황태자가 되어 실권을 잡았고, 28세에 마침내 아버지의 양위로 즉위하였다. 당시 권세를 누린 태평공주(太平公主) 일파를 타도하여, 측천무후 이래 반 세기에 걸친 부인의 정권 개입을 근절시킨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현종의 치세는 요숭(姚崇)·송경(宋璟)·장열(張說)·장구령(張九齡) 등 명상의 도움을 얻어, 안으로는 민생안정을 꾀하고 조운(漕運) 개량과 둔전(屯田) 개발 등으로 경제를 충실히 하였으며, 부병제(府兵制)의 붕괴에 대처하여 신병제를 정비하였다. 밖으로는 동돌궐(東突厥)·토번(吐蕃)·거란(契丹) 등의 국경지대 방비를 튼튼히 하여, 개원(開元)·천보(天寶) 시대 수십 년의 태평천하를 구가하였다. 그러나 노년에 접어들자 정치를 등한히 하고, 도교(道敎)에 빠져 막대한 국비를 소비하였으며, 35세나 연하인 양귀비(楊貴妃)를 궁내로 끌어들인 뒤 정사를 포기하다시피 하여 권신 이임보(李林甫)가 국정을 대신 맡아보았다. 755년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나 쓰촨[四川]으로 난을 피해 가던 도중에 양귀비는 병사에게 살해되고, 이듬해 아들 숙종(肅宗)에게 양위하고 상황(上皇)으로 은거하였으며, 장안으로 돌아온 뒤 죽었다. 그는 다재다능하였으며, 특히 음악에 뛰어나 스스로 작곡까지 하고, 이원(梨園)의 자제 남녀를 양성하였다. 서도에도 능하여 명필이라는 칭호를 들었다.
(마)
맹호연(孟浩然/689~740)
당(唐)나라의 시인. 후베이성[湖北省] 샹양현[襄陽縣] 출생. 고향에서 공부에 힘쓰다가 40세쯤에 장안(長安)으로 올라와 진사(進士) 시험을 쳤으나, 낙방하여 고향에 돌아와 은둔생활을 하였다. 만년에 재상(宰相) 장구령(張九齡)의 부탁으로 잠시 그 밑에서 일한 것 이외에는 관직에 오르지 못하고 불우한 일생을 마쳤다. 도연명(陶淵明)을 존경하여, 고독한 전원생활을 즐기고, 자연의 한적한 정취를 사랑한 작품을 남겼는데, 그 중에서도 “春眠不覺曉 處處聞啼鳥 夜來風雨聲 花落知多少”라는 《춘효(春曉)》의 시가 유명하다. 일찍이 왕유(王維)의 천거로 현종(玄宗)을 배알(拜謁)하였을 때 근작(近作)의 시를 올렸다가 ‘不才明主棄’라는 구절 때문에 현종의 노여움을 사서 모처럼의 벼슬길을 놓쳤다는 일화가 전하나, 확인되지 않았다. 시집(詩集)으로 《맹호연집》 4권이 있으며, 약 200 수의 시가 전한다.
■ 주요 당대 시인(사)
송지문(宋之問/656?~712)
초당(初唐)의 시인. 자 연청(延淸). 산시성[山西省] 펀양[汾陽] 출생. 675년 진사에 급제, 20세경 측천무후(則天武后)의 눈에 들어 습예관(習藝館) 상문감승(尙文監丞)이 된 것이 벼슬길에의 시발이었다. 그 후, 무후의 영신(臣) 장역지(張易之)에게 아첨하다가 지방으로 쫓겨났는데, 다시 돌아오자 역시 그때의 권력자 무삼사(武三思)에게 아첨하여 관직을 차지하는 등 파렴치한 행실이 많았다. 그러나 그의 재주를 아끼고 사랑하던 중종(中宗)은 그를 수문관(修文館) 직학사(直學士)로 기용, 문학의 좋은 상대로 삼아, 군신(君臣)의 신분을 망각한 주연(酒宴)에 빠졌었다고 한다. 그 후에 현종(玄宗)이 즉위하자 영신을 추종하였다는 죄로 광둥성[廣東省] 친센현[欽縣]으로 유배되어 사사(賜死)되었다. 심전기(沈佺期)와 함께 측천무후와 중종의 궁정시인으로, 연석(宴席)에서 시작(詩作)을 다투고 하여 ‘심송(沈宋)’이라 불렸다. 특히 오언시(五言詩)에 훌륭한 재능이 있었는데, 율시체(律詩體) 정비에 진력하여 심전기·두심언(杜審言) 등과 더불어 초당 후반의 문단에서 율시 유행의 선구로 공이 컸다. 문집에 《송지문집(宋之問集)》이 있다.
심전기(沈佺期/656?~714?)
초당(初唐)의 궁정 시인. 자 운경(雲卿). 허난성[河南省] 상저우[相州] 네이황[內黃] 사람. 측천무후(則天武后) 때부터 중종시대에 걸쳐서 활약하였다. 675년 진사에 급제하여 협률랑(協律郞)의 벼슬을 받고, 이어서 여러 관직을 역임하다가 무후의 영신(臣) 장역지(張易之)에게 아첨한 죄로 중종(中宗) 때 베트남 북부의 환주(驩州)로 유배되었다. 송지문과 함께 ‘심송(沈宋)’이라 병칭(竝稱)되고, 초당4걸(初唐四傑)의 뒤를 계승하여 율시(律詩)라고 하는 신시형의 운율을 완성시킨 시인으로 그의 공적은 매우 크다. 인품에 고결(高潔)하지 못한 점이 있기는 하였으나, 시풍(詩風)은 청려(淸麗)하였고, 특히 7언율시(七言律詩)에 뛰어났다. “노가(盧家)의 소부(少婦) 울금향(鬱金香)”으로 시작되는 7률 《고의(古意)》는 《당시선(唐詩選)》에도 수록이 될 정도로 유명하다.
■ 주요 당대 시인(아)
왕발(王勃/650~676)
당(唐)나라 초기의 시인. 자 자안(子安). 강주(絳州) 용문(龍門:山西省 河津縣) 출생. 일설에는 산시성[山西省] 타이위안[太原] 출생이라고 한다. 수(隋)나라 말의 유학자 왕통(王通)의 손자이다. 조숙한 천재로 6세 때 문장을 잘하였고, 17세 때인 666년 유소과(幽素科)에 급제하였다. 젊어서 그 재능을 인정받아 664년에 이미 조산랑(朝散郞)의 벼슬을 받았다. 왕족인 패왕(沛王) 현(賢)의 부름을 받고 그를 섬겼으나, 당시 유행하였던 투계(鬪鷄)에 대하여 장난으로 쓴 글이 고종(高宗) 황제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중앙에서 쫓겨나 쓰촨[四川] 지방을 방랑하였다. 뒤에 관노(官奴)를 죽였다는 죄로 관직을 빼앗기고 교지(交趾:베트남 북부)의 영(令)으로 좌천된 아버지 복치(福)를 만나러 갔다가 돌아오던 중, 배에서 바다로 떨어져 익사하였다. 양형·노조린(盧照)·낙빈왕(駱賓王) 등과 함께 초당(初唐) 4걸(四傑)이라 불리는 당나라 초기의 대표적 시인이다. ‘왕양노락(王楊盧駱)’이라 불렸던 그는 종래의 완미(婉媚)한 육조시(六朝詩)의 껍질을 벗어나 참신하고 건전한 정감을 읊어 성당시(盛唐詩)의 선구자가 되었다. 특히 5언절구(五言絶句)에 뛰어났으며, 시문집 《왕자안집(王子安集)》 16권을 남겼다.
왕유(王維/699?/701?~761?)
당(唐)나라의 시인·화가. 자 마힐(摩詰). 산시성[山西省] 출생. 9세에 이미 시를 썼으며, 서(書)와 음곡(音曲)에도 재주가 뛰어났다. 아우인 진(縉)과 함께 일찍부터 문명(文名)이 높았으며, 특히 기왕(岐王)의 사랑을 받아 731년 진사에 합격, 태악승(太樂丞)이 되었다. 후에 제주(濟州:山東省 荏平縣)의 사창참군(司倉參軍)으로 좌천되었으나, 734년 우습유(右拾遺)로 발탁되어 감찰어사·좌보궐(左補闕)·고부낭중(庫部郞中)을 역임, 이부낭중에서 급사중(給事中)이 되었다. 안녹산의 난을 당하여 반란군의 포로가 되어 협박을 받고 할 수 없이 출사하였다. 반란 평정 후 그 죄가 문책되었으나 아우 진의 조력과 반란군 진중에서 지은 천자를 그리는 시가 인정받아 가벼운 벌로 치죄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후 다시 등용되어 상서우승(尙書右丞)의 자리까지 벼슬이 올라갔다. 그 때문에 왕우승이라고도 불렸다. 또한 왕유는 육조시대(六朝時代)의 궁정시인의 전통을 계승한 시인이라 하여 장안(長安) 귀족사회에서는 칭찬이 자자하였고 존경도 받았다. 그의 시는 산수·자연의 청아한 정취를 노래한 것으로 수작(秀作)이 많은데, 특히 남전(藍田:陝西省 長安 동남의 縣)의 별장 망천장(輞川莊)에서의 일련의 작품이 유명하다. 맹호연(孟浩然)·위응물(韋應物)·유종원(柳宗元)과 함께 왕맹위유(王孟韋柳)로 병칭되어 당대 자연시인의 대표로 일컬어진다. 또 그는 경건한 불교도이기도 해서, 그의 시 속에는 불교사상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는 것도 하나의 특색이다. 《왕우승집》(28권) 등이 현존한다. 그림은 산수화에 뛰어나, 수묵(水墨)을 주체로 하였는데, 금벽휘영화(金碧輝映畵)에도 손을 대고 있어 화풍 또한 다양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순정·고결한 성격의 소유자로, 탁세(濁世)를 멀리하고 자연을 즐기는 태도 등은 남송문인화의 시조로 받들어지는 원인이 되었다. 송나라의 소동파(蘇東坡)는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고 평하였다. 당시는 장안(長安)에 있는 건축의 장벽산수화(牆壁山水畵)나 《창주도(滄州圖)》 《망천도(輞川圖)》 등이 알려져 있었으나 확실한 유품은 전하여진 것이 없다.
왕창령(王昌齡/698~755?)
당(唐)나라의 시인. 자 소백(少伯). 강령(江寧:江蘇省 南京) 출신. 727년 진사에 급제하여 비서성 교서랑(秘書省校書郞)이 되었고, 734년 박학굉사(博學宏詞)의 시험에 합격하여 범수(氾水:河南省 成皐縣)의 위(尉)가 되었다. 그러나 소행이 좋지 못하다 하여 강령의 승(丞), 다시 용표(龍標:湖南省 黔陽)의 위(尉)로 좌천되었다. 왕강령·왕용표로 불리기도 하는 것은 그 임지의 이름을 딴 것이다. 안녹산(安祿山)의 난으로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자사(刺史)인 여구효(閭丘曉)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그의 시는 구성이 긴밀하고 착상이 청신하며, 특히 칠언절구에서 뛰어난 작품이 많다. 여인의 사랑의 비탄을 노래한 《장신추시(長信秋詩)》 《규원(閨怨)》, 변경의 풍물과 군인의 향수를 노래한 《출새(出塞)》 《종군기(從軍記)》가 유명하다. 시집 《왕창령 전집》(5권)과 그의 저술로 전하여지는 시론서 《시격(詩格)》 《시중밀지(詩中密旨)》 각 1권이 남아 있다.
왕한(王翰/687~726)
당(唐)나라의 시인. ‘王瀚’이라고도 쓴다. 자 자우(子羽). 병주진양(幷州晉陽:山西省 太原) 출신. 710년 진사에 합격하였다. 병주장사이었던 장열(張說)의 인정을 받아 창락(昌樂)의 위(尉)가 되었고, 장열이 중앙의 요직으로 영전하자 함께 중앙으로 나가 가부원외랑(駕部員外郞)에 등용되었다. 그러나 성격이 호방하여 자부심이 강하고 분방한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인심을 잃어, 721년 장열의 실각과 동시에 여주장사(汝州長史)로 좌천되었고, 이어 선주별가(仙州別駕), 다시 도주사마(道州司馬)로 밀려나 그 곳에서 죽었다. 전해지는 시는 불과 14편에 지나지 않으나, “포도미주야광배(葡萄美酒夜光杯)”로 시작되는 《양주사(凉州詞)》는 당대 7언절구 중 걸작으로 꼽힌다.
원결(元結/723~772)
자 차산(次山). 허난[河南] 출신. 북조 후위(北朝後魏) 왕손의 후예라고 한다. 754년 진사에 급제하였다. 안녹산(安祿山)의 난을 피하여 장시성[江西省]에 은거하고 있었는데 759년 숙종(肅宗)의 부름을 받아 우금오병조참군(右金吾兵曹參軍)이 되어 반란군 토벌에 공을 세웠다. 763년 도주자사(道州刺史)를 거쳐 768년 용관경략사(容管經略使)를 지냈다. 성품이 고결하고 우국의 충정이 넘쳐, 그의 시는 전란으로 인한 인민의 고통과 사회상에 눈길을 돌린 침통한 작품이 많았으나, 표현의 기교보다는 내용을 중시하는 간고(簡古)한 그의 작풍과 문장은 한유(韓愈), 유종원(柳宗元)의 고문운동(古文運動)에 영향을 끼쳤다. 또 그의 대표작 《용릉행(陵行)》은 두보(杜甫)를 크게 감동시켜 거기에 답하는 시를 짓게 했을 정도였으며, 민성(民聲)을 천자에게 들려 주려는 의도에서 만들어진 《계악부(系樂府)》는 백거이(白居易)의 《신악부(新樂府)》의 선구가 되었다. 시문집인 《원차산집(元次山集)》은 그가 찬(撰)한 《협중집(中集)》과 함께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위응물(韋應物/737~804)
산시성[陝西省] 창안[長安] 출생. 젊어서 임협(任俠)을 좋아하여 현종(玄宗)의 경호책임자가 되어 총애를 받았다. 현종 사후에는 학문에 정진하여 관계에 진출, 좌사낭중(左司郞中)·쑤저우자사[蘇州刺史] 등을 역임하였다. 그의 시에는 전원산림(田園山林)의 고요한 정취를 소재로 한 작품이 많으며, 당나라의 자연파시인의 대표자로서 왕유(王維)·맹호연(孟浩然)·유종원(柳宗元) 등과 함게 왕맹위유(王孟韋柳)로 병칭되었다.
위장(韋莊/836~910)
당말(唐末)의 시인. 자 단기(端己). 산시성[陝西省] 장안(長安) 출신. 어려서부터 빈궁한 생활을 하였으며, 894년 과거에 급제하고 3년 후 쓰촨[四川]에서 모반한 왕건(王建)의 선무(宣撫) 책임을 띠고 부관으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오히려 왕건이 전촉(前蜀)의 제위(帝位)에 오르자 그 재상이 되어 왕건을 돕다가 청두[成都]에서 죽었다. 당나라 말기 사회의 혼란 황폐한 상태를 묘사하고 유랑생활의 감정을 읊은 감상적인 작품은 독자의 심금을 울린다. 7언고시(七言古詩) 《진부음(秦婦吟)》(883)이 유명하며, 입촉(入蜀) 후 지은 사(詞) 《시여(詩餘)》는 만당(晩唐) 이후 성행하던 이 형식에 신국면을 개척하였다. 《완화집(浣花集)》(10권) 《완화사집(浣花詞集)》(1권) 등의 저서가 있으며, 그 밖에 당시선집 《우현집(又玄集)》을 편찬하였다.
유우석(劉禹錫/772~842)
중당(中唐)의 시인. 자 몽득(夢得). 허베이성[河北省]출신. 일설에는 장쑤성[江蘇省] 출신이라고도 한다. 795년 박학굉사과(博學宏詞科)에 급제하여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 두우(杜佑)의 막료가 되었다. 얼마 후 중앙의 감찰어사로 영전되어 왕숙문(王叔文)·유종원(柳宗元) 등과 함께 정치 개혁을 기도하였으나 805년 왕숙문은 실각되고, 우석은 낭주사마(朗州司馬)로 좌천되었다. 10년 후 다시 중앙으로 소환되었으나 그 때 지은 시가 비판의 대상이 되어 다시 연주자사(連州刺使)로 전직되고 그 후 중앙과 지방의 관직을 역임하면서 태자빈객(太子賓客)을 최후로 생애를 마쳤다. 지방관으로 있으면서 농민의 생활 감정을 노래한 《죽지사(竹枝詞)》를 펴냈으며, 만년에는 백낙천(白樂天)과 교유하면서 시문(詩文)의 도에 정진하였다. 시문집으로 《유몽득문집(劉夢得文集)》(30권) 《외집(外集)》(10권)이 있다.
유종원(柳宗元/773~819)
중당기(中唐期)의 시인. 자 자후(子厚). 창안[長安] 출생. 유하동(柳河東)·유유주(柳柳州)라고도 부른다. 관직에 있을 때 한유(韓愈)·유우석(劉禹錫) 등과 친교를 맺었다. 혁신적 진보분자로서 왕숙문(王叔文)의 신정(新政)에 참획하였으나 실패하여 변경지방으로 좌천되었다. 이러한 좌절과 13년간에 걸친 변경에서의 생활이 그의 사상과 문학을 더욱 심화시켰다. 고문(古文)의 대가로서 한유와 병칭되었으나 사상적 입장에서는 서로 대립적이었다. 한유가 전통주의인 데 반하여, 유종원은 유·도·불(儒道佛)을 참작하고 신비주의를 배격한 자유·합리주의의 입장을 취하였다. 《천설(天說)》 《비국어(非國語)》 《봉건론(封建論)》 등이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또 우언(寓言) 형식을 취한 풍자문(諷刺文)과 산수(山水)를 묘사한 산문에도 능했다. 그는 이러한 작품을 통해 관료를 비판하고 현실을 반영하는 한편, 자신의 우울과 고민을 술회하였는데, 그 자구(字句)의 완숙미와 표현의 간결·정채함은 특히 뛰어났다. 시는 산수의 시를 특히 잘하여 도연명(陶淵明)과 비교되었고, 왕유(王維)·맹호연(孟浩然) 등과 당시(唐詩)의 자연파를 형성하였다. 송별시·우언시(寓言詩)에도 뛰어나 우분애원(憂憤哀怨)의 정을 표현하는 수법은 굴원(屈原)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된다. 저서에 시문집 《유하동집(柳河東集)》(45권) 《외집(外集)》(2권) 《보유(補遺)》(1권) 등이 있다.
이백(李白/701~762)
성당기(盛唐期)의 시인. 자 태백(太白). 호 청련거사(靑蓮居士). 두보(杜甫)와 함께 ‘이두(李杜)’로 병칭되는 중국 최대의 시인이며, 시선(詩仙)이라 불린다. 1,100여 편의 작품이 현존한다. 그의 생애는 분명하지 못한 점이 많아, 생년을 비롯하여 상당한 부분이 추정에 의존하고 있다. 그의 집안은 간쑤성[甘肅省] 룽시현[西縣]에 살았으며, 아버지는 서역(西域)의 호상이었다고 전한다. 출생지는 오늘날의 쓰촨성[四川省]인 촉(蜀)나라의 장밍현[彰明縣] 또는 더 서쪽의 서역으로서, 어린 시절을 촉나라에서 보냈다. 남성적이고 용감한 것을 좋아한 그는 25세 때 촉나라를 떠나 양쯔강[揚子江]을 따라서 장난[江南]·산둥[山東]·산시[山西] 등지를 편력하며 한평생을 보냈다. 젊어서 도교(道敎)에 심취했던 그는 산중에서 지낸 적도 많았다. 그의 시의 환상성은 대부분 도교적 발상에 의한 것이며, 산중은 그의 시적 세계의 중요한 무대이기도 하였다. 안릉(安陵:湖南省)·남릉(南陵:安徽省)·동로(東魯:山東省)의 땅에 체류한 적도 있으나, 가정에 정착한 적은 드물었다. 맹호연(孟浩然)·원단구(元丹邱)·두보 등 많은 시인과 교류하며, 그의 발자취는 중국 각지에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이다. 불우한 생애를 보내었으나 43세경 현종(玄宗)의 부름을 받아 창안[長安]에 들어가 환대를 받고, 한림공봉(翰林供奉)이 되었던 1, 2년이 그의 영광의 시기였다. 도사(道士) 오균(吳筠)의 천거로 궁정에 들어간 그는 자신의 정치적 포부의 실현을 기대하였으나, 한낱 궁정시인으로서 지위를 감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청평조사(淸平調詞)》 3수는 궁정시인으로서의 그가 현종·양귀비의 모란 향연에서 지은 시이다. 이것으로 그의 시명(詩名)은 장안을 떨쳤으나, 그의 분방한 성격은 결국 궁정 분위기와는 맞지 않았다. 이백은 그를 ‘적선인(謫仙人)’이라 평한 하지장(賀知章) 등과 술에 빠져 ‘술 속의 팔선(八仙)’으로 불렸고, 방약무인한 태도 때문에 현종의 총신 고력사(高力士)의 미움을 받아 마침내 궁정을 쫓겨나 창안을 떠났다. 창안을 떠난 그는 허난[河南]으로 향하여 뤄양[洛陽]·카이펑[開封] 사이를 유력하고, 뤄양에서는 두보와, 카이펑에서는 고적(高適)과 지기지교를 맺었다. 두보와 석문(石門:陝西省)에서 헤어진 그는 산시[山西]·허베이[河北]의 각지를 방랑하고, 더 남하하여 광릉(廣陵:현재의 揚州)·금릉(金陵:南京)에서 노닐고, 다시 회계(會稽:紹興)를 찾았으며, 55세 때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쉬안청[宣城:安徽]에 있었다. 적군에 쫓긴 현종이 촉나라로 도망하고 그의 황자(皇子) 영왕(永王) 인(璘)이 거병, 동쪽으로 향하자 그의 막료로 발탁되었으나 새로 즉위한 황자 숙종과 대립하여 싸움에 패하였으므로 그도 심양(尋陽:江西省九江縣)의 옥중에 갇히었다. 뒤이어 야랑(夜郞:貴州)으로 유배되었으나 도중에서 곽자의(郭子義)에 의하여 구명, 사면되었다(59세). 그 후 그는 금릉·쉬안청 사이를 방랑하였으나 노쇠한 탓으로 당도(當塗:安徽)의 친척 이양빙(李陽氷)에게 몸을 의지하다가 그 곳에서 병사하였다. 이백의 생애는 방랑으로 시작하여 방랑으로 끝났다. 청소년 시절에는 독서와 검술에 정진하고, 때로는 유협(遊俠)의 무리들과 어울리기도 하였다. 쓰촨성 각지의 산천을 유력(遊歷)하기도 하였으며, 민산(岷山)에 숨어 선술(仙術)을 닦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방랑은 단순한 방랑이 아니고, 정신의 자유를 찾는 ‘대붕(大鵬)의 비상(飛翔)’이었다. 그의 본질은 세속을 높이 비상하는 대붕, 꿈과 정열에 사는 늠름한 로맨티시스트에 있었다. 또한 술에 취하여 강물 속의 달을 잡으려다가 익사하였다는 전설도 있다. 그에게도 현실 사회나 국가에 관한 강한 관심이 있고, 인생의 우수와 적막에 대한 절실한 응시가 있었다. 그러나 관심을 가지는 방식과 응시의 양태는 두보와는 크게 달랐다. 두보가 언제나 인간으로서 성실하게 살고 인간 속에 침잠하는 방향을 취한 데 대하여, 이백은 오히려 인간을 초월하고 인간의 자유를 비상하는 방향을 취하였다. 그는 인생의 고통이나 비수(悲愁)까지도 그것을 혼돈화(混沌化)하여, 그 곳으로부터 비상하려 하였다. 술이 그 혼돈화와 비상의 실천수단이었던 것은 말할것도 없다. 이백의 시를 밑바닥에서 지탱하고 있는 것은 협기(俠氣)와 신선(神仙)과 술이다. 젊은 시절에는 협기가 많았고, 만년에는 신선이 보다 많은 관심의 대상이었으나, 술은 생애를 통하여 그의 문학과 철학의 원천이었다. 두보의 시가 퇴고를 극하는 데 대하여, 이백의 시는 흘러나오는 말이 바로 시가 되는 시풍(詩風)이다. 두보의 오언율시(五言律詩)에 대하여, 악부(樂府) 칠언절구(七言絶句)를 장기로 한다. ‘성당(盛唐)의 기상을 대표하는 시인으로서의 이백은 한편으로 인간·시대·자기에 대한 커다란 기개·자부에 불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기개는 차츰 전제와 독재 아래의 부패·오탁의 현실에 젖어들어, 사는 기쁨에 정면으로 대하는 시인은 동시에 ‘만고(萬古)의 우수’를 언제나 마음속에 품지 않을 수 없었다.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그의 시문집은 송대(宋代)에 편집된 것이며, 주석으로는 원대(元代) 소사빈(蕭士)의 《분류보주 이태백시(分類補註李太白詩)》, 청대(淸代) 왕기(王琦)의 《이태백전집(李太白全集)》 등이 있다.
이상은(李商隱/812~858)
만당(晩唐)의 시인. 자 의산(義山). 호 옥계생(玉谿生). 허난성[河南省] 친양[沁陽] 출생. 처음 우당(牛黨)의 영호초(令狐楚)에게서 변려문(儷文)을 배우고 그의 막료가 되었으나, 후에 반대당인 이당(李黨)의 왕무원(王茂元)의 서기가 되어 그의 딸을 아내로 맞았기 때문에 불우한 생애를 보냈다. 그의 유미주의적(唯美主義的) 경향은 이 소외감에서 비롯된 바가 크다. 그는 변려문의 명수이긴 하였으나 그의 시는 한(漢)·위(魏)·6조시(六朝詩)의 정수를 계승하였고, 당시에서는 두보(杜甫)를 배웠으며, 이하(李賀)의 상징적 기법을 사랑하였다. 또한 전고(典故)를 자주 인용, 풍려(豊麗)한 자구를 구사하여 당대 수사주의문학(修辭主義文學)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작품에는 사회적 현실을 반영시킨 서사시, 또는 위정자를 풍자하는 영사시(곝흇? 등이 있으나, 애정을 주제로 한 《무제(無題)》에서 그의 창작력은 유감 없이 발휘되었다. 《이의산시집(李義山詩集)》 《번남문집(樊南文集)》이 있으며, 《이의산잡찬(李義山雜纂)》도 그의 저작으로 전한다.
이하(李賀/790~816)
중당(中唐) 때의 시인. 자 장길(長吉). 당나라 황실의 후예이며, 두보(杜甫)의 먼 친척이기도 하다. 그의 집은 창곡(昌谷:河南省宜陽縣內)의 소지주였으며, 아버지는 변경의 관리로 근무하다가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의 목표였던 진사시(進士試)는 그의 재주를 시기하는 사람으로부터, 부친의 휘(諱)가 진숙(晉肅)인데 진(晉)과 진(進)은 동음(同音)이라 하여 그 휘를 범한다는 이의(異義)가 나와 단념하였다. 그 이듬해에 봉례랑(奉禮郞)이란 아주 낮은 직위에 2년간 근무하였을 뿐이며, 그것은 27세로 요절한 그의 일생에 영향을 끼쳐, 사상적 경향은 염세적 색채가 짙다. 그의 시(詩)는 극히 낭만적이고, 풍부한 상상력에 의하여 화려한 환상적 세계를 창조했다. 그 특출한 재능과 초자연적 제재(題材)를 애용하는 데 대해 ‘귀재(鬼才)’라는 명칭이 붙었다. 이 명칭은 북송(北宋)시대의 수필집 《남부신서(南部新書)》 및 그 밖의 책에 적혀 있다. 대표작은 <안문태수행(雁門太守行)> <소소소(蘇小小)의 노래> 등인데, 가장 유명한 작품은 《장진주(將進酒)》로서, 후세에 원대(元代)의 통속적인 시문선집(詩文選集)인 《고문진보(古文眞寶)》에 수록되었고, 《수호전(水滸傳)》의 원형인 《선화유사(宣和遺事)》에서도 인용하였다. 좌절된 인생에 대한 절망감을 굴절된 표현으로 노래하기 때문에 옛날부터 난해하다는 평을 듣고 있지만, 특이한 매력을 지녀 애호자도 많다. 저서에 《이하가시편(李賀歌詩篇)》(4권) 《외집(外集)》(1권)이 전한다.
주요 당대 시인(자-하)
(자)
잠삼(岑參/715~770)
성당기(盛唐期)의 시인. 후베이성[湖北省] 장링[江陵] 출생. 태종(太宗) 때의 재상 잠문본(岑文本)의 증손으로 744년에 진사가 되었다. 안서(安西:新疆省吐魯番 근처) 절도사의 서기관으로서 두 번에 걸쳐 북서변경 요새의 사막지대에 종군한 일이 있는데, 그 체험을 살려서 쓴 새외시(塞外詩)는 풍부한 상상력과 이국정서를 생생하게 그려 당시(唐詩) 가운데서는 독자적인 지위를 차지한다. 그 집(集)을 《잠가주집(岑嘉州集)》이라 한 것도 마지막 벼슬이 가주(四川省樂山縣)의 자사(刺史)였기 때문이다.
장구령(張九齡/678~740)
당(唐)나라 현종(玄宗) 때의 재상. 광둥성[廣東省] 취장[曲江] 출생. 진사에 등과하였고 문재(文才)로 문인 재상 장열(張說)의 추천을 받아 중서사인(中書舍人), 중서시랑(中書侍郞)을 거쳐 733년 재상이 되었다. 안녹산(安祿山)이 위험인물임을 간파했다는 일화가 전해지며, 반대파인 이임보(李林甫)에게 미움을 받고 좌천되었다(736). 《취장장선생문집[曲江張先生文集]》 20권이 현존한다.
장욱(張旭/675?~750?)
당나라 현종(玄宗) 때(8세기 후반)의 서예가. 자 백고(伯高). 장쑤성[江蘇省] 우현[吳縣] 출생. 초당(初唐)의 서예의 대가 우세남(虞世南)의 먼 친적이다. 술을 몹시 좋아하고 취흥이 오르면 필묵을 잡았으며, 때로는 머리채를 먹물에 적셔서 글씨를 쓰는 등의 취태(醉態)가 있었으므로 세상 사람들은 그를 장전(張顚)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장욱에게 필법(筆法)을 배운 안진경(顔眞卿)은 그의 서법(書法)이 진정한 것이라고 평하였다. 초서를 잘 썼으며, 얼핏 보아서 분방하게 느껴지는 광초(狂草)에도 그 바탕에는 왕희지(王羲之)·왕헌지(王獻之)의 서법을 배운 소양을 엿볼 수 있다. 장욱이 자신의 서풍(書風)을 세우게 된 유래를 적은 《자언첩(自言帖)》이 전해진다.
전기(錢起/722~780?)
당나라 중기의 시인. 자 중문(仲文). 저장성[浙江省] 우싱[吳興] 출생. 751년 진사시험에 급제한 후 교서랑(校書郞)부터 시작하여 산시성[陝西省] 란톈현[藍田縣]의 현위(縣尉)를 거쳐 고공낭중(考功郞中)으로 승진하였으므로 전고공(錢考功)이라고도 불린다. 그 뒤 성당(盛唐)에서 중당(中唐)으로의 전환기였던 대력 연간(大曆年間:766∼779)에는 태청궁사(太淸宮使)·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었으며, 청신수려한 시로써 ‘대력십재자(大曆十才子)’의 필두로 칭송받았고, 낭사원(郞士元)과 병칭되었다. 그는 친구들과 주고받은 이야기와 자연을 제재로 삼은 온화한 시를 많이 썼는데 근체시, 특히 오언율시(五言律詩)에 뛰어났으므로, 당시의 사람들은 “앞에 심송(沈宋:沈佺期·宋之問)이 있고, 뒤에 전낭(錢郞:錢起·郞士元)이 있다”고 하였다. 그가 진사시험 때 지었던 시 <상령고슬(湘靈鼓瑟)> 속의, “곡종불견인(曲終不見人) 강상수봉청(江上數峰靑)”이란 2구는 특히 유명하다. 저작에 《전고공집》 10권 외에 부(賦) 13편이 남아 있다.
진자앙(陳子昻/661~702)
초당(初唐)의 시인. 자 백옥(伯玉). 쓰촨성[四川省] 서훙현[射洪縣] 출생. 682년 진사(進士)에 급제하고, 측천무후(則天武后)를 섬겨 벼슬이 우습유(右拾遺)에 올랐고 향리에 은퇴 후 무고한 죄명으로 옥중에서 죽었다. 당시의 시는 일반적으로 육조궁정시(六朝宮廷詩)를 계승하여 수사(修辭) 편중의 경향이 있었는데, 그는 ‘한위(漢魏)의 풍골(風骨)’을 중히 여겨 강건중후한 시를 지음으로써 초당(初唐)에서 성당(盛唐)으로 넘어가는 시풍 전환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대표작 《감우(感遇)》 38수는 시세(時世)에 대한 감개를 어두운 필치로 읊은 것으로, 위(魏)의 완적(阮籍)의 《영회(詠懷)》 82수를 이어받았고, 또한 성당의 이백(李白)의 《고풍(古風)》 59수도 그 영향을 받아 만든 것이라 한다. 문집으로 시를 포함한 《진백옥문집(陳伯玉文集)》 10권이 있다.
(하)
하지장(賀知章/677~744)
당(唐)나라의 시인. 자 계진(季眞)·유마(維摩). 호 사명광객(四明狂客)·비서외감(秘書外監). 월주(越州) 영흥(永興:浙江省 會稽) 출생. 695년에 진사에 등과하였다. 태상박사(太常博士)를 거쳐 725년 예부시랑(禮部侍郞), 이듬해 공부시랑, 이어 태자빈객(太子賓客)·비서감(秘書監)을 역임하였으며, 744년 귀향한 후 병사하였다. 현종(玄宗)을 섬겼고, 시인 이백(李白)의 발견자로 알려졌으며, 그 자신도 풍류인으로서 이름이 높아 두보(杜甫)의 《음중팔선가(飮中八仙歌)》에도 읊은 것이 있다.
한유(韓愈/768~824)
당(唐)나라의 문학자·사상가. 자 퇴지(退之). 시호 문공(文公). 회주(懷州)수무현(修武縣:河南省) 출생. 792년 진사에 등과, 지방 절도사의 속관을 거쳐 803년 감찰어사(監察御使)가 되었을 때, 수도(首都)의 장관을 탄핵하였다가 도리어 양산현(陽山縣:廣東省) 현령으로 좌천되었다. 이듬해 소환된 후로는 주로 국자감(國子監)에서 근무하였으며, 817년 오원제(吳元濟)의 반란 평정에 공을 세워 형부시랑(刑部侍郞)이 되었으나, 819년 헌종황제(憲宗皇帝)가 불골(佛骨)을 모신 것을 간하다가 조주(潮州:廣東省) 자사(刺史)로 좌천되었다. 이듬해 헌종 사후에 소환되어 이부시랑(吏部侍郞)까지 올랐다. 문학상의 공적은 첫째, 산문의 문체개혁(文體改革)을 들 수 있다. 종래의 대구(對句)를 중심으로 짓는 병문(騈文)에 반대하고 자유로운 형의 고문(古文)을 친구 유종원(柳宗元) 등과 함께 창도하였다. 고문은 송대 이후 중국 산문문체의 표준이 되었으며, 그의 문장은 그 모범으로 알려졌다. 둘째, 시에 있어 지적인 흥미를 정련(精練)된 표현으로 나타낼 것을 시도, 그 결과 때로는 난해하고 산문적이라는 비난도 받지만 제재(題材)의 확장과 더불어 송대의 시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사상분야에서는 유가의 사상을 존중하고 도교·불교를 배격하였으며, 송대 이후의 도학(道學)의 선구자가 되었다. 작품은 《창려선생집(昌黎先生集)》(40권) 《외집(外集)》(10권) 《유문(遺文)》(1권) 등의 문집에 수록되었다.
허혼(許渾/791~854?)
당(唐)나라의 시인. 윤주 단양현(潤州丹陽縣) 출생. 832년에 진사(進士)에 급제하여 당도(當塗)·태평(太平) 두 현(縣)의 현령(縣令)을 거쳐 윤주사마(潤州司馬)가 되었고, 감찰어사(監察御史), 우부원외랑(虞部員外郞)·목주(睦州:浙江省)·영주(州:湖北省) 등의 자사(刺史)를 역임하다가 신병으로 관직을 물러났다. 정묘간(丁卯澗) 촌장(村莊)에 은거하였다는 뜻으로 그 논집(論集)을 《정묘집(丁卯集)》이라 하였다. 그는 자연의 정취를 즐기는 사람이었으나 한편으로는 비분강개하는 정열을 가진 시인이기도 하였다. 그의 시에는 흔히 등고회고편(登高懷古編)이 있으며, 은거하여 자연과 벗하는 일반 문인들과는 이질적인 시인이었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