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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펄 벅은 근대화가 진행되던 청나라 말기 중국인의 삶을 그린 ‘대지’로 1938년 노벨문학상을 받았어요. /위키피디아
어느새 입동(立冬)도 훌쩍 지나고, 찬 바람이 부는 겨울의 길목에 들어섰어요. 황금빛으로 물들었던 들판은 자신의 양분으로 키운 풍족한 양식을 사람들에게 다 내주고, 따뜻한 봄을 기다리며 겨울나기를 준비하고 있지요. 이렇게 풍족한 양식을 아낌없이 내주는 '땅'은 요즘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혹시 여러분의 귀에도 땅이 가진 생명력에 대한 이야기보다 땅값 이야기가 더 많이 들리지는 않는가요? 땅을 우리 생명의 원천으로 여기기보다는 경제적 가치로만 따지는 사람이 더 많기 때문일 거예요.
미국 출신의 여류작가 펄 벅이 청나라 말의 중국을 배경으로 쓴 소설 '대지'에는 땅을 생명의 터전으로 생각하며 소중히 여기는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아버지와 둘이서 가난하게 살던 주인공 왕룽은 밭일과 집안일을 하며 아이를 많이 낳아줄 아내가 필요했어요. 그래서 황 대인의 계집종인 오란을 소개받아 결혼하지요. 오란은 몸이 튼튼하여 밭일을 잘했고, 왕룽의 아버지를 극진히 모셨으며 집안일도 척척 해냈습니다. 새벽부터 해가 질 때까지 열심히 일한 왕룽은 추수한 곡식을 팔아 번 돈으로 점차 몰락해 가던 황 대인의 땅을 조금씩 사들였어요.
"그는 길쭉한 땅을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황 대인 집과 같은 부잣집에서는 이 손바닥만 한 땅뙈기는 아무것도 아니겠지. 그러나 나에게는 얼마나 귀중한 땅이냐 말이다!' 그는 지금 산 이 땅이 극히 작은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황 대인의 땅을 자꾸 살 수 있도록 은전을 모으고 또 모으리라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이 한 뙈기의 땅은 왕룽을 분발시키는 하나의 계기이자 상징이 되었다."
하지만 열심히 살던 왕룽에게 뜻하지 않았던 일이 일어나요. 심한 가뭄이 들어 모든 초목이 말라버린 것이에요. 그토록 아끼고 사랑하던 땅은 왕룽의 가족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었지요. 왕룽은 농사 밑천인 황소를 잡아야 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고, 굶주린 마을 사람들이 몰려와 왕룽의 집을 뒤지며 식량을 찾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왕룽은 땅만은 팔 수 없다고 생각하지요. 그는 결국 땅을 그대로 둔 채 가족을 데리고 남쪽 도시로 내려갑니다. 왕룽은 인력거를 몰며 돈을 벌고자 애쓰지만, 생활은 더욱 궁핍해져요. 아내 오란이 아이들을 데리고 구걸까지 하며 겨우 생계를 이어가지요. 나라에 전쟁까지 일어나자, 왕룽의 가족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부잣집에 들어가 재물을 약탈하게 됩니다. 도시 밑바닥에서 도둑으로 자라는 아이들을 본 왕룽은 고향으로 돌아가야겠다고 결심해요.
"그는 봄의 죽순처럼 자라나는 두 아들을 생각했다. 당장에라도 아이들을 양지쪽에서 놀게만 할 게 아니라 밭일을 시켜 맨발에 느껴지는 흙의 감촉, 딱딱한 괭이의 감촉을 어릴 때부터 뼈와 살에 붙이게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중략) 왕룽은 이따금 허리를 굽히고는 손으로 흙을 긁어모아 쥐었다. 그렇게 한 줌의 흙을 쥐고 있으면 손가락 사이에서 생명이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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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림=이병익
왕룽이 고향으로 돌아오자, 끝내 팔지 않았던 땅이 그를 반깁니다. 왕룽은 예전보다 더욱 열심히 일하여 가난하고 배고픈 농부에서 벗어나 많은 땅을 가진 지주가 되지요. 풍족한 삶을 누리게 된 왕룽은 자신이 땅을 통해 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는지가 아니라 땅 그 자체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땅이야말로 왕룽의 삶에 생명력과 힘을 불어넣은 원천이었던 것이에요.
가난한 농부에서 대지주가 되는 왕룽 일가의 역사를 소설 '대지'에 담아낸 작가 펄 벅은 미국에서 태어났어요. 선교사인 부모를 따라 생후 3개월 만에 중국으로 건너가 영어보다 중국어를 먼저 배웠다고 해요. 중국인 유모의 손에 자라고, 중국인 학교에 다니면서 직접 보고 들은 그들의 삶을 소설 속에 그려냈습니다. 소설 '대지'는 본래 '대지'(1931), '아들들'(1933), '분열된 일가'(1935) 등 총 3부작으로 이루어졌는데, 펄 벅은 이 작품으로 1938년 노벨문학상을 받았어요.
#이야기
청나라 말, 중국은 근대화와 전쟁으로 극심한 사회 변동을 겪습니다. 이 시기 중국은 근대화를 막 시작하였고, 지주와 부자로 이루어진 자본가 집단과 하층민의 빈부 격차는 더욱 심해졌지요. 노동자와 농민이 열심히 일하여 생긴 이윤은 대부분 자본가 집단에 돌아갔고, 노동자와 농민은 빈민층을 형성하였어요. 그러자 이들은 자본가 집단에 저항하기 시작하였고, 이것이 신해혁명(1911)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무너지고, 쑨원을 대총통으로 하는 중화민국이 탄생하지요.
'대지'는 청나라 말 신해혁명을 거쳐 중화민국이 세워진 때를 배경으로 해요. 왕룽이라는 한 농부의 파란만장한 삶을 중국 근대사와 함께 보여주지요. 무엇보다 땅을 소중히 여긴 왕룽은 아들들에게 땅을 팔지 말라고 당부하지만, 아들들은 늙은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아요. 손자들도 할아버지는 혁명으로 세상이 변한 것을 모른다며 무시하고요. 하지만 3부 '분열된 일가'의 주인공인 왕유안(왕룽의 손자)은 부패한 정권에 크게 실망한 나머지, 결국 가족들이 버려두었던 할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와 농사를 지으며 살기로 결심하지요. 이 작품을 읽으며 중국의 근대사를 함께 살펴보고, 오늘날 우리에게 '땅'은 어떤 존재인지 생각해 보세요.
[함께 생각해봐요]
왕룽에게 아내 오란과 땅은 과연 어떤 의미였을까요? 책을 읽으며 왕룽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