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조 조선을 뒤흔든
대 사건 무오사화(戊午史禍)의 단초는
기생과 놀아난 지방관의 방자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사건의 발단은 이극돈(李克墩 1435(세종 17)~1503(연산군 9))이
전라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세조비 정희왕후(貞憙王后)의
국상중임에도 불구하고 기생과 놀아났다.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이 쓴 임하필기(林下筆記) 제24권
사필(史筆)과 유자광전(柳子光塼)에 보면,
김일손(金馹孫)이 이 사실을 사초(史草)에 기록했고,
이를 알게 된 이극돈이 고쳐달라고 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이에 이극돈은 유자광(柳子光)과 모의,
무오대옥(戊午大獄)을 일으켜 대역(大逆)으로 논죄하였고
당대의 이름 있는 선비들이 모조리 살육되었다.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문제가 되어 사림(士林)들이 화를 입은
이 사건은 1498년 연산군 4년에 일어났다.
이 사화로 사림파의 사조(師祖) 김종직은 부관참시 당하고,
김일손, 정여창(鄭汝昌), 김굉필(金宏弼) 등은 죽거나 귀양 갔다.
조선조의 4대 사화사건 중 첫 사화로 남아 있다.
음양(陰陽)의 조화로움은 세상을 풍요롭게 한다.
그러나 음양의 조화가 깨질 때,
세상은 더 없이 비참한 결과를 낳게 된다는 교훈을 본다.
-한눌의 '고대사 메모' 중에서
첫댓글 잘 보았습니다. 현재 세간에 회자되고 있는 어떤 사건을 지나간 역사로 투영시켜 주셨군요. 한가지 염려스러운 것은 김일손의 예가 현재에도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역사가 정치와 맞물릴 때는 그 시기 선택이 중요한 고려사항이 될수도 있다고 봅니다. 음양의 이치는 현재에도 진행중이니 음이 있으면 양 또한 반드시 존재하는 것이지요. 그 조화가 깨어지면 결국엔 선혈만이 낭자할 뿐이니... 이번엔 좀 무거운 글을 쓰셨나 봅니다. 다들 댓글 달기를 꺼려하는것 같군요. 항상 좋은글 올려주시길 기대합니다. 즐거운 하루 보내시길.
항상 논해 주시고, 격려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백운거사님께서도 나날이 즐거우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