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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핫싼 들판에도 봄은 올 것이다
정다운
탕탕탕....
“오라버니이- 거기 서요-!”
갑자기 허공을 가르는 요란한 금속성이 울려 퍼진 뒤를 이어 들려온 여인의 단말 마 같은 소리였다. 사나이는 여자의 부르짖음이 들리지 않는 듯 들판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앞으로 내달렸다. 그녀가 부르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가 계속 달리는 것을 본 여자는 덩달아 들판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마치 남녀가 쫓고 쫓기는 형국이었다. 한민족의 후예 둘이 지금은 황량한 폐허로 변해 버린 선조들의 옛 터전 위를 달리면서 두만강 쪽으로 사라져가는 선조들의 넋을 좇아 달음박질치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 또 총소리가 들리는가 했더니 사나이가 무릎을 꺾으며 주저앉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가 도로에서 150미터쯤 거리에 이르렀을 때 선조들이 쓰다가 버려진 연좌방아 돌에 걸렸던 것이다. 발에 걸린 것이 연좌방아라는 것을 알고 다시 일어나려는 순간 도로까지 쫓아온 러시아 공안이 그를 겨냥해 연발을 쏘았다. 그래도 그는 안간힘을 쓰다가 흙바닥에 널브러졌다. 의식이 가물가물하는데 여자의 애타는 소리와 친구의 안타까운 애원이 뒤엉켜 현실인지 환상인지 분간이 어려웠다.
땅거미가 채 깔리기 전 어둑어둑해지는 늦은 오후 두만강을 끼고 펼쳐진 넓디넓은 핫싼들판에서 벌어진 남녀의 돌발적인 행동은 그곳 시공간에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경마장에서 경주마들이 트랙을 따라 힘차게 내닺는 순간 경주를 일시에 단절시키는 것 같은 충격이 가해진 것 같았다. 사나이의 갑작스런 피격과 잇따른 여성의 경악으로 고요하던 핫싼들판은 갑자기 팽팽한 긴장감에 휩싸였다.
2014년 4월 중순 오후 4시20분, 러시아 연해주 최남단, 두만강을 지척에 둔 핫싼 국경초소 언덕.
독립애국지사 최재형 선생의 얼을 기리는 일행은 아무 관광객이나 와 보기 어렵다는 이곳에 올라 두만강 넘어 펼쳐진 북한 땅을 착잡한 심정으로 내려다보았다. 저 멀리 들판에는 커다란 포클레인 한 대가 밭둑에 서 있고, 농부는 보이지 않았다. 농사철인데도 북녘 땅이라서 그런지 들판은 한적하기까지 했다. 일행을 언덕까지 안내한 가이드 구쏘냐는 혼자 중국 쪽 방천 전망대가 보이는 곳으로 가서 두만강 서쪽 방향으로 시선을 보냈다. 그녀는 유달리 두만강 건너 서쪽 방향에 관심을 가지는 듯 했다. 한동안 일행과 떨어져있던 그녀의 눈에는 어느 듯 물기가 어리고 있었다. 마치 이역만리 소식이 없는 연인을 그리는 여인의 자세로 마냥 서남지역 어느 곳에 눈길을 주며 움직일 줄 몰랐다.
가이드를 한 지 5년이 되었지만 여기는 국경경비대의 허가를 받아야만 올 수 있기 때문에 일반 관광객을 안내하여 오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만큼 그녀는 이곳에 와서 두만강 너머 북한 쪽을 바라보고 싶은 욕구가 간절했다. 따라서 오늘은 하염없이 강 건너편에 시선을 주고 싶었다. 그러나 생사를 알 수 없는 오뉘 간의 끈이라는 것이 한갓 꿈속에서만 헤매며 손으로 잡을 수 없는 허황된 것이 아닌지, 어쩔 수 없는 안타까움만이 그녀의 가슴 속에 켜켜이 쌓이고 있었다. 일행은 여기저기 흩어져 처음 보는 두만강과 북녘 땅에 관심을 쏟느라 그녀의 동정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쏘냐가 관심을 가진 곳은 또 하나 있었다. 정면으로 보이는 핫싼 들판이었다. 눈앞에 널따랗게 펼쳐진 들판은 버려진지 오랜 시간을 증언하듯 을씨년스럽게 드러누워 있었다. 이곳을 일군 한인들이 1937년 중아아시아로 강제 이주되는 바람에 버려진 땅이 되어 버렸다. 1957년 이후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연해주 재이주가 허용되었다지만 저 넓은 땅이 허허벌판으로 주인을 잃은 채 나뒹굴어져 있는 것을 보면 재이주의 삶이 여의치 않은 것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증조할아버지가 일가 권솔을 데리고 와서 맨손으로 닦아 놓은 터전이 저렇게 되어 있을 줄은 몰랐다. 그렇더라도 진작 와보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남의 나라 백성이 찾아와서 일구어 놓은 농토를 지금까지 그대로 둔 황폐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였을까, 국경경비사령부의 허가를 받지 않고는 아무나 들어 올 수 없는 곳, 통제구역으로 만들어 놓았다. 허허벌판 어디엔가 증조할아버지의 손길이 남아 있지 않을까, 연연해하던 구쏘냐는 그만 울컥 울음이 터져 나오려 했다.
정달성은 정면 남쪽을 바라보며 아마 저기가 지도상으로 보았던 두만강노동자구인가 짐작했다. 언덕 오른쪽으로는 멀지 않은 곳에 조로우의교가 두만강을 가로질러 러시아와 북한, 구체적으로 연해주 핫싼군과 선봉시(지금은 나선시로 통합된 것 같음) 노동자구를 잇는 가교였다. 아직 해질녘이 되지 않았지만 하늘에 구름이 끼어 두만강 주변 일대가 조금 어두운 빛을 띠고 있었다. 조로우의교를 지나 산기슭 가까이 마을 부근에서는 때 아닌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시간으로 봐서는 저녁 짓는 연기는 아닌데 제법 뭉개뭉개 피어오르는 모양이 공장 연기처럼 넓게 퍼졌다. 동해로 흐르는 강물을 따라 왼쪽으로 시선을 돌려 녹둔도가 러시아 땅에 붙은 곳이 어디 있는지 찾았다. 그러나 강물이 굽이쳐 흘러가는 방향이라서 더 이상 강변을 볼 수가 없었다. 옛날에는 거기서도 농사를 지었다는데 우리 땅을 찾지 않고 그대로 방치해 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최재형 선생이 형님네의 이주 행렬을 따라 두만강을 건너 핫싼지역으로 들어와서 지신허에 자리를 잡은 후에 이 들판에는 한민족 후예들이 농사를 지었다. 일부는 북간도에서 땅을 일구며 논농사를 지었지만 이쪽 지역에서는 핫싼으로 오거나 배를 타고 포세이트항을 거쳐 내륙으로 가서 농사를 짓기 시작하여 우수리스크이남 지역에 정착민이 20만 명이나 될 정도로 한민족의 터전을 잡았던 곳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농사짓는 사람은 보이지 않고 애꿎은 물새만 까악까악 울어대며 정적을 깨트렸다. 정달성은 최재형 선생 일가의 첫 정착지인 지신허마을마저 흔적이 없어진 사실이 떠올라 울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남북관계가 얽혀 있는 두만강변 언덕에서 착잡한 심정에 사로잡힌 정달성은 남쪽 하늘을 구름처럼 감싸도는 연기를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때 탐방단장이 나타나 소리쳤다.
“여러분 다음 핫싼역을 둘러보고 포시에트로 갑니다. 얼른 타세요.”
초소 언덕에서 불과 10여 분만에 핫싼역에 도착했다. 무심코 버스에서 내리는데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옆에 있는 간이 의자에 우리와 같은 얼굴이 몇이 보였다. 순간 이 사람들이 북한 벌목공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쳤다. 정달성은 무심결에 그중 젊은이에게 다가갔다. 3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데다 비교적 깔끔한 옷을 입었고, 작가들이 자주 쓰는 도리우찌를 쓰고 있었다. 아무래도 벌목공 행색이 아니었다.
“북한 가려고 기다리는 중입니까?”
대답이 없었다. 묵묵한 채로 있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젊은이는 마지못한 듯 대답했다.
“네."
얘기를 좀 해보려고 말을 걸었다.
“일행이 몇 명이나 됩니까?”
그 말에 입을 닫아 버렸다. 모처럼 북한 사람을 만나서 얘기해 보려 했지만 계면쩍게 되었다. 언뜻 말하기 싫은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들어 그를 지나쳐갔다. 북한벌목공들이 왔다면 역 대합실에 모여 있을 것이라 짐작하고 대합실문을 밀쳤다. 구쏘냐가 옆에 서서 경비대에서 사진을 찍지 말라고 한다고 일러주었다. 일단 대합실 내를 훑어보았다. 북한 벌목공들이 삼삼오오 의자에 앉아 있었다. 얼굴이 새까맣게 그을린 사람들이 큰 짐 보따리들을 주변에 늘어놓고 있었다. 정달성은 대합실로 성큼 들어서서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일행은 몇 사람 보이지 않고 벌목공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로 쏠렸다. 그들의 시선을 맞받으며 곁으로 다가갔다. 먼저 눈길을 끈 것은 크고도 많은 보따리였다. 마치 3개 노선 기차역이 몰려 있는 모스크바 콤소몰광장의 야로슬라브역에서 지방인들이 보따리를 싸들고 기차를 타려고 하는 광경과 흡사했다. 보따리 안에 무엇이 그렇게 많이 들어 있는지 궁금했다.
실내를 한 바퀴 돌아보고 나오다가 오른쪽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다가갔다.
“반가워요. 우리는 우수리스크 독립운동가 유적지를 돌아보다가 왔어요. 어디서 오는 길입니까?"
"띤다에서 옵니다."
띤다란 지명이 무척 낯설었다. 하바롭스크 위쪽 체그도민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북한 벌목공들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지만 띤다는 처음 듣는 곳이었다.
“이 짐들은 가족 선물입니까?”
그 사나이는 미소를 띠고 맞받았다.
“조선족입네까?”
뭐라고 말하기가 어색해 고개만 끄덕거리고 다시 물었다.
“무슨 선물입니까?”
“아이들 과자입네다.”
“러시아 초콜레트 같은 건가요?”
“네 러시아 초콜레트도 있어요.”
가벼운 화제라 대화가 순순히 이어졌다. 이때 등 뒤에서 날선 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사진은 찍지 말라우!”
그는 사진 얘기를 안 했는데 누군가 사진을 찍으려고 하는가 보다 하고 뒤로 돌아보았다. 언제 왔는지 안경을 낀 50대 중반 이상으로 돼 보이는 사나이가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 역시 도리우찌모자에 벌목공들과는 다른 깨끗한 옷차림이었다. 순간 약간 긴장감이 느껴졌으나 한발 앞으로 다가갔다. 도리어 선수를 쳐서 말을 붙여 볼 심산이었다.
“사진 찍어도 됩니까?”
그 사나이는 언짢은 표정을 짓더니 퉁명스럽게 한마디 툭 던졌다.
“사진은 왜 찍어?”
반말 투에 기분이 언짢았으나 다시 다가갔다. 그리고 면전에 대고 대꾸했다.
“사진 찍어도 되는지 물어 본 겁니다.”
대합실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사진을 찍지 말라는 주의를 들었기 때문에 굳이 면전에서 사진을 찍을 생각이 없었다. 가벼운 대화로 벌목공들의 반응을 떠보려는 의도 밖에 없었다. 해서 그 사나이가 째려보거나 퉁명스러워도 꿀릴 것이 없었다. 도대체 얘기 한번 해보려고 하는데 사진 찍지 말라고 김빠지는 소리를 하는 작자가 누군가 싶었다. 아까 말을 걸었던 젊은 사람과 같은 인상이라 보위원 같아 보였다. 물러서지 않고 상대해 볼 작정이었다.
“동무 우리 동포 끼리 사진 한번 찍는 것도 안돼요? 동무 하고 기념촬영이나 합시다.”
“머이 어드레? 사진 찍는 거이 안된다고 했잖소.”
“허 그참. 우리는 한 핏줄을 타고난 한민족의 아들 아니요. 북한에 살면 한민족 아니요?”
“동무, 말이 많아. 사진 개지구서리 시비걸지 말라우.”
“시비는 누가 시비 걸어요? 동무는 한민족끼리 사진 찍는 걸 그렇게 싫어해요?”
가벼운 마음으로 대화를 나누고 기념 촬영도 하고 지나치려 했다가 사뭇 분위기가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정달성은 뒤로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서로 이해를 하기에는 거리감이 있기 마련이라 생각했다. 자신은 오늘 이 사람과 상대하며 이 거리감을 좁혀 볼 작정이었다.
“동무, 그러지 말고 우리끼리 인사도 나누고 얘기 좀 합시다.”
그는 미소를 띠고 한발 다가서며 손을 내밀었다. 도리우찌 사나이는 그를 노려 보더니 고개를 돌렸다. 정달성은 그의 손을 잡았다.
“동무, 악수나 합시다. 서로 인사하는 것이 좋지 않소.”
그 말에 도리우찌 사나이는 그의 손을 획 뿌리치고는 대합실문 쪽으로 향했다. 그는 그 사나이의 뒤통수만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거리를 좁힐 수 없다는 사실에 실망감을 떨칠 수 없었다. 그때 구쏘냐가 망연자실한 채 서 있는 정달성에게 다가왔다.
“아직 여기 계셔요?”
“아 그래요. 북한 벌목공들과 사진 한번 찍을까 하고 말을 했는데 잘 안되네요.”
“사진 그거 뭐 어려울 것 있습니까.”
쏘냐는 정달성의 손을 잡고 오른 쪽 의자에 앉은 사람들에게 다갔다. 역시 짐들이 잔뜩 놓여 있는 가운데 앉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경계심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과 얼굴이 같으니 조선족이나 고려인쯤으로 생각했겠지. 한국에서 온 사람이, 그것도 작가가 오지 같은 핫싼역에 나타나리라고는 아마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쏘냐는 그들이 언제 러시아에 왔는지 물어 봤다.
“3년 됐지비.”
“어디서 오는 길입니까?”
“띤다에서 옵네다.”
“띤다요? 체그도민이 아니고요.”
“네.”
“띤다는 어디 있는 겁니까?”
“아무르주에 있습네다.”
“아무르요? 그러면 하바롭스크에서 가깝겠네요."
“하바롭스크에서 멉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기분이 어때요?”
“가족들한테 가니 너무 기쁘고 좋지 앵이 하갔소.”
“우리 동포끼리 만났는데 사진 한 장 찍읍시다.”
“사진 찍는 거이 앵이되오.”
그러자 쏘냐는 서슴없이 북한 사투리로 말을 건넸다.
“동무 안 되는 게 어데 있습네까?”
“사진은 안돼요. 찍으면 안되니까니... .”
구쏘냐는 빙그레 웃으며 그들 사이에 털썩 주저앉았다. 양옆에 앉은 사나이의 팔을 하나씩 끼고 너스레를 떨었다.
“동무 사진 찍는 거이 무시기 문젭네까?”
그녀는 일부러 함경도 사투리를 쓰며 팔짱을 낀 팔에 힘을 주었다. 사나이들은 그녀의 넉살에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고려인 같은 여인이 애교를 부리는데 어쩔 수 없는 듯 웃기만 했다. 그 사이 일행은 휴대폰으로 촬영에 바빴다.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정달성이 곁에서 한몫 거들자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쏘냐와 벌목공들은 마치 오뉘처럼 보였다. 아까 그 도리우찌 사나이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쏘냐가 먼저 말을 걸었다.
“나는 구쏘냐라고 해요. 성함이 누구신지...?”
“아 나는 박일호입네다.”
“고향은 어디세요?”
“내레 고향은 함북 경원입네다. 쏘냐 고향은 어디메요?”
순간 쏘냐는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경원이라, 경원... 그러면... .’
“나는 모스크바가 고향이지만 할아버지 고향이 경원인데요.”
“기러문 같은 고향인디 모르갔구만.”
“기래요...?”
쏘냐도 혹시 이 사람에게 물어 보면 오빠 소식을 알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경원 어디메인데요?”
“내레 경흥이디요.”
“어마! 그래요. 할아버지가 경흥 출신이신데... . 혹시 구중석이라고 몰라요?”
“구중석이를 어드렇게 암둥?”
“구중석이 내 오빠에요.”
“기러문 중석이 여동생 앵이가.”
“기래요, 오라버니. 우리 오빠는 어캐 됐시오? 소식 알아요?”
“중석이는... 중석이는... 그 참... .”
박일호는 뜻밖에 구중석의 여동생을 만나게 되고 오빠 소식을 다그쳐 묻는 여동생 앞에서 입맛만 쩝쩝 다셨다.
‘중석이 여동생을 여기서 만나게 되다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꼬망.’
옆에서 듣고 있던 정달성은 쏘냐가 사람을 제대로 만난 것 같다고 생각했다. 박일호에게서 무슨 얘기가 나올지 궁금해서 몸을 바짝 붙이고 앉았다.
박일호는 시베리아 오지 띤다 제2임업연합기업소 소속 투타울벌목장에서 구중석을 마지막 만난 순간을 떠올렸다.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막혔다. 그 얘기를 어떻게 이 가련한 여동생에게 해줄 수 있는가,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구중석이 그에게 마지막 구원을 요청했을 때 그로서도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었다.
박일호는 구중석이 고향 친구로서 함께 러시아 벌목장으로 오게 된 것을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었다. 둘이서 기차를 타고 두만강을 건너 핫싼을 지날 때는 이제 벌목장에 다 온 것처럼 기뻐하며 들떠 있었다.
“야 우리 이자 러시아 돈 좀 벌어 보자요. 동무 벌목장에서 잘만 하믄 텔레비니 냉장고니 니런 것들 사서 집에 보낼 수 있갔지. 허허 생각만 해도 기분 좋구만.”
서로 이런 얘기를 하며 시시덕거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투타울벌목장에서 몇 달 있어보지도 않은 사이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되었다. 돈이 없다며 돈을 주지 않은 것은 예사고 순전히 몸으로 때우는 일이라 예상외로 고된 중노동이었다. 거기다가 하루 12시간 일한 것도 모자라 밤이면 사상학습이니 뭐니 해서 고단한 몸을 쉬지도 못했다. 일찌기 모스크바에서 자란 구중석은 북한의 답답한 생활에 익숙해졌다 해도 이런 생활을 견디지 못했다. 그는 차차 불만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고향 친구라고 자기에게 불만을 털어 놓기 시작하자 박일호는 은근히 겁이 났다. 해서 자꾸 그런 말 하면 친구로 생각하지 않겠다고 까지 했다. 그러나 결국 사단이 나고 말았다. 그때는 구중석을 구하지 못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와 행동을 같이 하지 못한 것이 후회되었다. 벌써 2년이 넘은 일이었다. 그런데 뜻밖에 중석의 여동생이 그 얘기를 새삼스레 끄집어내려 하는 것이 아닌가. 고향 친구라고 한 말을 거짓말이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때 일을 말해 줄 수도 없고 해서 말문을 열지 못했다. 그러자 구쏘냐는 그의 표정을 살피더니 다그치듯 물었다.
“오라버니 어디 편찮시우? 어두운 얼굴인데... .”
박일호는 속내를 들킨 것 같아 얼른 대꾸했다.
“응 무시기... 기리니까니 말이지비. 내레 벌목장에 가서 벌목일 하느라 바빠개지구... .”
“기러믄 오빠 소식 모른단 말이야요?”
그는 다시 입을 닫았다. 하나 있는 여동생이라던데 어떻게 전혀 모른 체 할 수 있겠는가. 뭐라고 해야 할지 난감했다. 구중석의 애절한 모습이 떠올라 더욱 말하기가 어려웠다. 쏘냐는 여자의 직감으로 뭔가 짚이는 것이 있었다. 말하자면 꺼림칙한 그 무엇이 이 사람의 말문을 막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솟았다.
여기에 정달성이 끼어들어 한마디 했다.
“동무, 쏘냐가 오빠 소식을 몰라 그렇게 애절한 마음인데 아는 대로 말해주구려.”
그도 이 사람이 알면서도 무엇을 숨기려 하는 기색을 느꼈다. 무엇이든지 얘기를 끌어내야 되는 상황임을 깨달았다. 그는 보다 진지한 표정으로 박일호에게 접근했다.
“우리가 한민족이면서도 내외의 힘에 의해 뿔뿔이 흩어져 사는 이산민족이 된지 오래라는 걸 동무도 잘 알 것이라 믿소. 이대로 가다가는 얼마 가지 않아 한민족은 영원히 터전을 잃고 헤매고 다닐지도 모르오. 지금 이 순간만이라도 우리끼리 얘기를 나누어 소통해야 되지 않갔소."
박일호는 한 차원 높은 민족 얘기에 숙연한 자세가 되었다. 정달성은 내친김에 강하게 주장했다.
“한민족의 아픔을 극복할 방도를 우리 세대가 찾아야 하지 않겠어요. 그런 의미에서 쏘냐 오빠 얘기도 좀 해주구려.”
박일호가 무언가 깨닫는 듯 한참 먼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 분위기에 힘을 얻은 쏘냐는 그의 팔을 잡았다.
“오라버니, 내레 동생으로 생각하시고 오빠 얘기 좀 해 주시라우요.”
박일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녀를 돌아보고 말문을 열었다.
“내가 중석이와 함께 투타울벌목장에 있을 때... .”
이때 방해자가 끼어들었다. 퉁명스런 소리가 가까이서 들려왔다.
“동무, 지금 여성 동무와 부화놀이 하는 거이가?”
박일호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거기 안전원이 서 있었다. 안전원은 어느새 능글맞은 표정으로 그를 똑바로 쳐다보고 겁박했다.
“벌목장에서 돈 좀 벌어 왔다고 조선족 여자 하고 팔짱 끼고 기래 잘 놀아 보라우. 평양 가서 인민재판에 붙일 거이니까니.”
“안전원 동무, 부화가 아니꼬망.”
“아니기는 무에 아니야. 기거이 반동질이니까니 당장 니러 나라우!”
“안전원 동무 아니 무시기 반동임둥?”
“닥치라우!”
구쏘냐는 안전원이 하는 꼴이 너무 얼토당토 하지 않아 벌떡 일어섰다.
“동무, 오라버니와 얘기하는 거이 어드렇게 부화놀이고 반동질입네까? 이거이 어거지 아닙네까?”
“무어이 어드레? 조선족 에미나이가 말이 많구만.”
“뭐야요, 조선족 에미나이...? 내레 조선족 아니야요. 러시아 동포야요.”
그러자 잘못 건드렸다 싶었는지 그는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만 있었다. 쏘냐는 내친김에 한술 더 떴다.
“니 보라우, 안전원 아저씨. 저기 러시아 경비대 병사에게 물어 보라우. 내가 누군지... .”
그는 이 에미나이와 더 이상 시비해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했다. 주위를 한번 휘둘러보고는 저만치서 동정을 살피고 있던 젊은이를 불렀다.
“김 동무, 이 동무를 날래 연행해 가기오.”
2층 인솔자 대기실로 올라온 박일호는 지도원으로부터 힐책을 당했다. 당초 벌목공으로 선정하여 띤다 제2임업연합기업소를 거쳐 투타울벌목장으로 배속되는 동안 외부인과 말을 하지 말도록 교육을 받았는데 이제 와서 왜 딴 짓을 하느냐, 총화시간에 반성이 없으면 평양에 가서 인민재판에 회부할 수도 있다고 다그쳤던 것이다. 박일호로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지도원의 지도를 거부하는 것처럼 비치는 경우에는 3년 동안 동토에서 죽어라 고생한 보람이 다 날아갈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엄습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경고음이 머리속에서 들렸다. 한 동안 맥없이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던 그는 벌떡 일어나 담배를 피우고 있는 지도원에게로 갔다.
“지도원 동지, 대합실에서 고향 친구 여동생을 만나 반가운 김에 한마디 한 것 뿐이꼬망. 고향 소식이 궁금하다고 해 러시아 벌목장에서 일해 잘 모르겠다고 하지 앵이했슴메. 그 에미나이와 말을 섞은 것은 반성하꼬망. 지도원 동지, 조국을 위해 불철주야 수고하시고, 위대한 수령님과 영명하신 지도자 동지의 영광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신 거 받들어 따르갔시오.”
“기러믄 동무는 두 번 다시 모르는 사람과 말을 섞지 안카서?”
박일호는 갑자기 차렷 자세를 취하고 소리쳤다.
“이 박일호, 사나이로서 지도원 동지 앞에 멩세하갔시오.”
지도원의 표정이 약간 누그러지는 같았다. 그러자 박일호는 소리를 낮추어 소곤거렸다.
“지도원 동지, 나한테 사향이 있슴메. 연로하신 아버지 드리려고 개지구 왔는데... .”
“머이? 사... 사향이 있단 말이네?”
“네 동지, 선물로 드려도 괜찮겠슴둥?”
“내레 꼭 필요한 거인데 잘 됐구만. 잘 됐어. 두만강역에 가서 보자우.”
그제야 박일호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 담배 한 대 피우기 위해 창가로 갔다. 비스듬히 열려진 커튼 사이로 관광버스가 보였다. 구쏘냐가 버스 문아래 서서 일행이 모두 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를 보니 마음이 언짢았다.
‘저 사람이 구중석의 여동생이라니... .’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녀가 어쩐지 애처로웠다. 중석의 소식을 그렇게 듣고 싶어 했는데 생사여부를 알려 주지도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는 구중석이 시체가 되어 벌목장으로 실려 온 모습이 떠올라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날 벌목장에서 막 돌아와서 저녁 식사를 끝내고 한숨 돌리던 중이었다. 갑자기 밖에서 웅성거리더니 누군가 소리치는 것이 들렸다. 무슨 일인가 싶어 내다 봤다. 트럭에서 2, 3명이 내리더니 낡은 부대로 둘둘 말은 시체를 내려놓았다. 박일호는순간 섬찟했다. 혹시나 하고 앞으로 내달렸다. 둘러선 사람들을 헤집고 들어가서 시체를 내려다 봤다. 깡마른 얼굴에 덤불에 긁힌 자국이 많아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옆에 섰던 안전원이 곧 시체의 정체를 알려주었다.
“구중석이 간나새끼 반동짓을 해놓구서리 니렇게 될 줄 알아가서.”
박일호는 몸을 수그리고 찬찬히 살폈다. 왼쪽 뺨에 조그마한 사마귀가 있는 것이 보였다. 틀림없는 구중석이었다. 그는 넋을 놓고 앉아 어쩔 줄 몰랐다. 안전원이 퉁명스런 소리를 내뱉었다.
“동무들도 조국을 배신하믄 니렇게 된다, 알가서!”
그는 노동자 몇 사람을 시켜 시체를 자작나무 숲으로 옮기도록 했다. 화장이라도 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냥 숲속에 버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망자의 유류품을 뒤져서 돈 될 만한 것은 먼저 갖는 것이 임자였다. 참 어처구니없는 짓거리라고 욕설이 나오려던 때 창밖의 광경이 눈길을 끌었다. 구쏘냐가 이쪽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하는 순간 눈길이 부딪쳤다. 쏘냐는 무언가 말을 할 듯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이라도 한마디 해주고 싶었다.
‘오빠는 2년 전에 죽었어.’
그녀에게 오빠 소식을 알려주고 싶었지만 마음속으로만 중얼거렸다. 그때 쏘냐는 애절한 표정으로 그에게 소리치는 것 같았다.
‘오라버니, 우리 오빠 소식 알지요. 알면서 나한테 말 안 해주는 거지요.’
박일호는 차마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머릿속 생각이 말이 되어 목구멍으로 올라오는 것을 참자니 목이 막혔다. 캑캑 침을 몇 번 뱉었다. 헛기침을 했다.목이 좀 트이는 것 같았다. 힘겹게 말을 입 밖으로 내보냈다.
“쏘냐, 쏘냐 무시기 어드렇게 말할지 모르갔꼬망. 쏘냐... .”
쏘냐는 그의 표정을 보고 마음을 읽었다. 자기에게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손을 동그랗게 오므리고 소리를 모아 2층으로 날려 보냈다.
“네, 뭐라고 했어요. 크게 말해 줘요.”
그리고 기다리는데 박일호가 고개를 돌리더니 안쪽으로 쳐다보았다. 동시에 우악스런 팔 하나가 그의 팔을 잡아 당겼다. 그가 힐끔 뒤돌아보는 사이 몸뚱이는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쏘냐가 사태를 알아차리는 순간 커튼이 출렁거리더니 창문을 가렸다.
“오라버니가... .”
결국 얘기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마는가 싶어 울먹거렸다. 가려진 창문만 보고 있는데 일행을 다 챙긴 탐방단장이 재촉하는 소리가 들렸다.
“쏘냐, 타요. 어서 갑시다.”
그녀는 해질녘 우수리스크로 가는 길이 바빠 서둘러 버스에 탔다. 가는 도중 슬로비안카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밤늦게 우수리스크호텔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내일 행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강행군 일정을 짠 것이 후회되었다. 그렇다고 핫싼에 남아 뭐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일이었지만 오매불망하던 오빠 소식을 들을 수 있었는데 그냥 가게 되어 무척 안타까웠다. 북한의 몰인정이 몹시 불쾌하다 못해 분통이 터지려 했다. 그녀는 가까스로 감정을 추스르며 차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어느 듯 어둑어둑해지는 가운데 수평선에 걸린 석양이 비친 차창에 오빠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쏘냐의 하나 밖에 없는 오빠 구중석은 성격이 활달하고 정의감이 투철한 청년이었다. 그는 20년 전인 1995년 5월 김일성 주석이 죽은 후 그를 승계한 김정일이 선군정치를 지도노선으로 내세워 권력을 틀어쥐기 시작했을 때 조국을 위해 인민군에 입대하겠다고 스스로 귀국길에 올랐다. 하나뿐인 여동생이 오빠가 가고 나면 나 혼자 어떻게 하느냐고 울고 불며 말렸지만 그의 곧은 성미를 꺾을 수 없었다. 아버지가 평소 하던 얘기로는 오빠가 증조할아버지를 닮아 한번 뜻을 세우면 꺾일 줄 모른다는 것이었다.
증조할아버지는 왜적에 짓밟힌 조국을 찾기 위해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면서 연해주로 왔다. 경흥에 사시던 고조할머니가 그렇게 만류했는데도 대장부는 사사로운 정에 얽매어서는 안 된다는 한마디를 남기고 떠났다. 단신 핫싼을 거쳐 연해주로 가는 길에 얀치헤(연추, 현 크라스키노)에서 최재형 선생의 소식을 접하고 최재형 선생 일가가 살았다는 지신허(계심하, 지신하)로 찾아갔다. 그때 마침 안중근 선생이 하르빈에서 왜적 이등박문을 저격한 소식을 듣고 블라지보스톡으로 갔다. 거기서 최재형 선생을 만나 그의 뜻을 전해 듣고 함께 독립운동 대열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 후 우수리스크로 옮겨 와서 일가를 이루고 독립운동가들을 뒷받침하면서 독립운동 진영이 사상으로 갈라지지만 않는다면 일본에 대한 압박전략이 주효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간도지방의 독립군이 용정참사 후 쫓기고 있기는 하지만 머지않아 진용을 새로 갖추게 되면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다. 만주에 있던 관동군은 흩어진 독립군이 일부는 백두산 밀림으로 들어가고 일부는 연해주로 갔기 때문에 최후의 일격을 감행하지 못해 안달을 했다.
이때 극동지역에서는 볼세비키계열 빨치산 부대가 활략한 결과 백색군을 저지하고 적색군이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 백색군을 지원하던 미영체코가 궁지에 몰리는 것을 본 일본은 그 동안 유지했던 중립을 깨고 대적색군 공세에 가담했다. 그들은 이를 계기로 연해주에 7만 명이라는 대군을 투입하여 대대적인 공세에 나섰다. 바로 1920년 4월4일 밤 우수리스크에 주둔 중인 적색군 부대에 특공대를 침투시켜 병사들을 학살하는 한편 눈에 가시처럼 거치적거리던 빨치산부대장 라조를 붙잡아 열차 화차에 던져 화형을 하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동시에 우수리스크 수하노바 32번지 최재형 선생 자택을 둘러싸고 왜경들이 투항을 권유하고 있었다. 이미 밀정을 통해 최 선생 일행이 자택에 잠입한 정보를 듣고 달려왔던 것이다. 함께 있던 김이직이 만류했으나 최 선생은 자신은 러시아 국적이라 괜찮다면서 자택에서 나가 다가 체포되었다. 그러나 7일 우수리스크감옥에서 이송되던 중 탈출을 시도하다가 현장에서 사살되고 말았다. 쏘냐의 증조할아버지도 함께였다. 이때 블라지보스톡에서는 항일운동뿐만 아니라 적군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신한촌을 기습 공격하여 휩쓸어버렸다. 아무르바다를 바라보며 망향의 정에 젖던 한인들은 가족과 삶의 터전을 잃어버렸다.
증조할아버지가 4월참변으로 불귀의 객이 되자 강단이 있던 증조할머니는 연해주가 더 이상 발붙일 곳이 못 된다는 것을 깨닫고 바이칼호수가 가까운 이르쿠츠크로 이주해 갔다. 데카브리스트의 귀족 아내들이 유배되어 간 남편을 따라 동토지방 이르쿠츠크로 와서 일생을 보냈다는 얘기 때문이었다. 그녀들이 남편 곁을 지키며 뒷바라지했다는 말을 듣고 감동했던 것이다. 독립운동을 하러 멀리 타국에 왔던 남편을 따라 저승에 가지 못한 조선인 여인의 심정을 이르쿠츠크에서 불태우려고 작정했다.
그로부터 10여년이 흘러 연해주 한인들을 강제 이주시킨다는 얘기를 듣고는 이르쿠츠크에도 화가 미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저 멀리 모스크바로 향했다. 다시 시베리아횡단 열차에 몸을 실은 증조할머니의 심정은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동포들이 많이 모여 사는 연해주를 버리고 모스크바에 간다면 별 수가 있을 것인가. 외아들을 데리고 모스크바로 달려가고 있는 자신은 앞으로 낯설고 물 설은 곳에서 또 무엇을 하며 어린 것을 대장부로 키워낼 것인가. 생각할수록 첩첩산중이었다.
증조할머니는 모스크바에 닿자 말자 일손이 필요한 데를 찾아다녔다. 어느 날 붉은광장에서 만난 할머니의 아들 집에 가정부로 들어갔다. 아들은 철도노동조합 간부였는데 볼세비키혁명 때 공을 세워 모스크바시 인민위원회 산업부장이고 며느리는 모스크바여성연맹 부위원장으로서 일이 바빠서 가정부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증조할머니는 그 집에서 외아들을 공부시켜 모스크바국립대학 교수까지 되도록 뒷바라지했다. 그 교수가 구중석과 쏘냐의 할아버지였으며, 외아들인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교수가 되고자 했으나 1974년 어머니와 결혼하여 진로를 바꾸게 되었다. 활달한 성격의 어머니는 교수보다 언론인으로서 활동하기를 바랐다. 아버지는 결국 이즈베스챠신문 외신부 기자로 활동하게 되었다. 그러나 1987년 아프카니스탄 전선에 특파원으로 갔다가 돌아오지 못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 후 어머니는 혼자서 남매를 키우며 중석을 모스크바대학에 입학시켰고, 쏘냐를 3년 후에 역시 모스크바대학에 보내려 했다. 중석이 대학 1학년 때인 1995년에 김정일이 선군정치를 내걸고 권력을 강화할 즈음 러시아 고려인 청년들 사이에 조국에서 새 세대 집권세력의 등장을 도와줄 필요가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외국에서 오랜 세월을 보낸 이들은 국내 집권세력의 권력강화 음모를 몰랐다. 이미 그때 국내에서는 선군정치로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하기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를 닮아 유달리 활달한 구중석은 이런 줄도 모른 채 만류하는 어머니와 쏘냐의 손을 뿌리치고 조국으로 달려갔다. 처음 한 두 해 이따금 소식을 전하던 중석은 3년째부터 아무 연락을 하지 않고 있었다. 형편이 좋지 않아 고향 경흥으로 갔다는 얘기만 들려왔을 뿐이었다. 어머니가 모스크바대사관에 가서 알아 봤지만 끝내 어떻게 됐는지 알 길이 없었다.
쏘냐는 눈물로 지새는 어머니를 보다 못해 평양으로 가보려고 했지만 어머니가 한사코 말렸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오빠의 소식이 끊어진 후 수 백만 명이 굶어 죽었다는 불길한 얘기뿐이었다. 쏘냐는 결국 조국으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대신 증조할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던 연해주로 가보기로 했다. 북한이 가까워서 어쩌면 북한 사람으로부터 오빠 소식을 들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거기는 구씨 집안의 첫 해외 이주지여서 집안의 뿌리를 찾아볼 셈이었다. 그녀는 연해주에 온지 벌써 5년째, 결혼도 하지 않고 가이드를 하며 언제나 오빠 소식을 들을 수 있으려나 하고 지내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데 뜻밖에 오빠가 갔다던 고향 경흥 출신인 북한 벌목공을 만나다니... 이것이 하늘이 준 기회인데 그만... . 그 생각에 미치자 쏘냐는 울컥하여 흐느꼈다. 옆에 있던 정달성이 달랬다.
“쏘냐, 너무 상심하지 말아요. 또 기회가 있을 거요.”
그러면서 어깨를 다독거려 주었다. 그 말에 그녀는 설움이 북받쳤다.
“오빠아 흑흑흑... .”
박일호는 쏘냐에게 오빠 소식을 알려주지 못하고 떠나온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핫싼역을 출발하여 두만강으로 가는 동안 자꾸 뒤돌아보는 자신을 어쩔 수 없었다. 구중석이 함께 귀국하지 못하게 된 것이 자신의 잘못인양 가슴이 아팠다. 마음이 무거워지자 오빠 소식을 묻던 구쏘냐의 애절한 표정이 눈에 아른거렸다. 구중석은 러시아 벌목장으로 가는 단짝이었다. 3년 전에 두만강을 건너면서 그와 함께 철없는 아이처럼 소리친 일이 새삼 되살아났다. 둘은 ‘잘 있거라 두만강아’ 하고 고함을 질러 제쳤다. 그때는 가벼운 마음으로 여정에 오르는 나그네가 되었다. 그런데 지금은 혼자서 다리를 건너려 하고 있지 않은가. 중석이는 시베리아의 곰이나 호랑이 밥이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겠지.
중석이 선군정치 대열에 참여한다고 조국을 찾아 왔으나 결국 김정일의 억압체제 아래에서 눈에 가시 같은 존재가 되고 말았다. 처음에 인민군에 입대하여 옛 종주국 소련에서 왔다고 우대받던 것도 잠시 날이면 날마다 개밥에 도토리처럼 따돌리게 되었다. 못된 하급전사 뿐만 아니라 상위 같은 장교마저 하는 소리가 돼먹지 않았다. 걸핏하면 상소리였다.
“중석 동무 간나는 모스크바에서 버터나 쳐먹구서리 백러시아 에미나이 꽁무니나 따라다니다가 오지 않아가서. 기리니까니 정신머리가 썩었다 니거이야. 알간!”
소련에서 나고 자란 때문에 문화적인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는데도 이해는커녕 그저 자기네 열등감을 해소시키는 밥으로 취급했다. 개성이 강한 중석이 그러면 그럴수록 억하심정이 깊어갔다. 그러다가 결국 하급전사로도 있지 못하고 인민군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분노한 중석은 참을 길이 없어 모스크바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언감생심 그를 조국을 등지는 배신자로 몰아 보위부 지하실에서 한 달을 썩히며 닦달을 했다. 그 후 중석은 폐인이 되다 싶이 하여 방랑길에 올랐다. 장마당으로 돌아다니며 중국 밀수품 공급책을 도와주고 연명했다. 자연히 돈이 좀 생기자 술집에 드나들게 되고 거기서 안주시 비사그루빠(사회주의에 반하는 패거리) 동무들과 친해져 불법활동을 해왔다. 그러면서 호시탐탐 탈출기회를 노렸다.
1990년대 후반을 넘어서면서 굶주림에 지친 인민들의 탈북행렬이 이어지자 그도 탈북루트를 찾았다. 그러나 흔히 압록강이나 두만강을 건너다가 사살되거나 체포되어 관리소로 넘겨진다는 소식을 들었다. 일반인이 생각하지 않은 루트를 찾아보았다. 밀수꾼에 끼이거나 단동이나 훈춘 쪽으로 드나드는 상인에 끼이는 방법을 생각해 보았다. 일단 중국으로 왕래하는 루트는 될 수 있지만 그로서는 요주의 인물이라서 국경을 넘나드는 것이 쉽지 않았다. 고민 끝에 경흥으로 갔다. 우연히 장마당에서 만나게 된 박일호와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그와 어울리던 어느 날 박일호가 술자리에서 넌지시 벌목공 일을 얘기했다. 시베리아에 가서 한 3년 고생하면 한밑천 잡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벌목공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을 다 알아 봤다고 했다. 그러면서 중석이를 부추켰다.
“중석아 우리 함께 시베리아에 한번 가보자우.”
그날 이후 중석은 일호와 함께 벌목공이 되는 길로 나섰다. 그들은 관계자를 돈으로 구어 삶아 후보군에 들어가기는 했지만 당 간부급을 배경으로 한 경쟁자들 때문에 함북도당 서기 뿐만 아니라 군인민위원회 위원장에게 특별히 선물을 약속하고 선발되었다. 적어도 1년 이내 냉장고 한 대를 보내는 조건으로 외화벌이 대열에 합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정달성은 울먹거리는 쏘냐를 달랠 길 없어 자신도 함께 울적해졌다. 해질녘이라 철새도 둥지로 날아가고 있었다. 저녁 식사자리가 예정되어 있는 슬로비안카로 가는 길은 평탄했지만 두 사람의 마음은 바위에 눌린 듯 무겁기만 했다. 그는 자신이 북한에서 겪었던 체험으로 쏘냐 오빠의 신상에 좋지 않은 일이 생겼을 것 같은데 내색을 할 수 없었다.
정달성은 카자흐스탄 강제이주 고려인의 후손으로서 고향 선봉에 왔다가 반인권적 탄압을 견디지 못하고 고향을 등진 탈북자 출신이었다. 홀로 된 할머니가 외딸인 어머니를 데리고 낯설고 물 설은 만리타향에서 고생 끝에 고향에 돌아 왔다가 다시 고향을 등진 기구한 신세였다.
1937년 9월 어느 날 강제이주 전 할아버지가 피살된 줄도 모르고 귀가를 기다리고 있던 할머니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연해주 한인들은 모조리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를 떠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30세로서 만삭이던 할머니는 기다려도 오지 않는 할아버지의 소식을 모른 채 간단한 가재도구만 준비하여 이주 열차에 올랐다. 함께 열차에 탄 여인들은 만삭인 젊은 여인을 보고 혀를 끌끌 차며 동정을 아끼지 않았다.
열차 내에는 나무판자를 덧대어 창문이 없었으며, 숨 쉴 틈도 없었다. 한 칸에 무조건 40, 50명씩 태우는 바람에 가족이 분산되어 혼란이 일어났다. 엄마, 아빠를 찾는 어린애들의 울부짖음은 물론 노부모를 잃어 버려 안타깝게 허둥대는 아들딸들의 모습 또한 차마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영하 30도를 오르내리는 강추위가 난감한 한인들을 더욱 움츠러들게 했다. 난방장치라고는 전혀 없는 차 칸에서 어른 아이, 남녀 할 것 없이 서로 붙어 앉아 몸을 비비대며 한기를 견디어내야만 했다.
카자흐스탄주 크질오르다까지 장장 6천 킬로미터를 거의 40일 동안 폐쇄된 열차공간에서 버티어내야 했던 할머니는 기진맥진 쓰러지고 말았다. 그 와중에 진통이 와서 차내가 바짝 긴장했다. 열흘 이상 제대로 먹지 못한데다가 편히 쉴 틈이 없었던 여인이 산기를 느끼자 모두 어찌 할 바를 몰랐다. 60대 할머니가 나서서 힘겨워하는 임신부를 붙잡고 산모의 역할을 하나하나 일러주었다. 강제이주 열차에서 태어난 어머니는 여인들의 극성스런 산후조리 덕택에 마지막 정차역까지 버티어냈다. 내리고 보니 크질오르다였다. 할머니는 땅굴을 파고 추운 겨울을 이겨낸 후 봄에 황무지를 개척하는데 동참했다. 그럭저럭 카자흐스탄에서 농장생활을 하다가 1957년 재이주가 허용되자 평양으로 이주했다.
어머니는 문재가 뛰어나 해방20주년기념 전국수기공모에서 최우수상을 받고 평양중앙방송작가로 일하게 되었다. 그러나 방송기자였던 아버지가 정치범수용소로 가는 바람에 어머니는 달성이를 데리고 탈북했다. 달성은 국제타임즈 기자로서 언제고 기회가 오면 연해주 한민족 발자취를 따라 탐방기사를 써보려고 별렀다. 그가 남달리 이런 기획에 관심을 가진 것은 두 가지 목적 때문이었다. 하나는 스탈린이 사전검속을 통해 한인 지식인들을 대거 학살한 사건을 파헤쳐 정부로 하여금 강제이주에 따른 물적 정신적 피해 문제를 러시아정부에 제기하도록 하려던 참이었다. 다른 하나는 일본 측 만행에 관한 것으로서 최재형 선생 등 독립지사들의 주검 반환 문제를 일본정부에 제기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핫싼역에서 북한 벌목공 일행을 만나게 되어 취재기획 하나가 더 늘게 될 판이었다. 아까 쏘냐와 박일호 사이에 벌어졌던 일을 염두에 두고 옆에 앉은 쏘냐를 새삼 쳐다보았다.
쏘냐는 버스를 타고 가면서 박일호가 2층 창가에서 뭐라고 말을 하려는 찰라 커튼이 닫히고 그가 사라져버린 장면에 못이 박힌 듯 집착해 있었다. 그러다가 불현듯 대기를 찢는 금속성을 들었다. 핫싼역을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깜짝 놀라 창밖을 내다보는 순간 또다시 금속성이 울렸다. 이번에는 두 번 세 번 연속되었다. 정달성도 그 소리를 듣고 벌떡 일어섰다.
“웬 일이지?”
그 순간 쏘냐가 자지러질듯 고함을 질렀다.
“아저씨 차 좀 돌려요. 네.”
아무래도 핫싼역에 이상이 생긴 것 같았다. 정달성이 그녀를 말리다가 언듯 벌목공 사이에 어떤 사태가 벌어지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함께 고함을 질렀다. 버스가 역 방향으로 되돌아가는 도중 갑자기 앞에 사람이 나타났다. 사나이는 몹시 허둥대는 모습이었다. 그를 본 쏘냐가 소리쳤다.
“아저씨 차 좀 세워 봐요. 저기... 저기 오라버니가... .”
그녀는 미처 말을 잇지 못한 채 창밖을 손짓했다. 정달성이 엉거주춤 선 채로 창밖을 내다 봤다. 저쪽에서 사나이 하나가 달려오는 것 같더니 총소리가 잇달아 들리자 들판 쪽으로 방향을 꺾었다. 자세히 보니까 아까 그 박일호가 황급히 달려가고 있었다. 버스가 미처 멈추기도 전에 쏘냐가 문을 열고 뛰어내렸다. 위험을 느낀 그녀는 그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오라버니이- 거기 서요-!”
박일호는 쏘냐의 부르짖음이 들리지 않는 듯 들판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앞으로 내달렸다. 그녀가 부르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달리는 것을 본 쏘냐는 덩달아 들판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마치 남녀가 쫓고 쫓기는 형국이었다. 그러다가 또 총소리가 들리는가 했더니 박일호가 무릎을 꺾으며 주저앉았다. 동시에 발에 걸린 것이 연좌방아 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다시 일어나려 했다. 순간 뒤쫓아 온 러시아 공안이 연발을 쏘았다. 결국 핫싼 들판에 널브러진 그는 의식이 가물가물하는 가운데도 귓전에 메아리치는 환청에 몸부림쳤다. 쏘냐와 중석의 안타까운 애원이 뒤엉켜 그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던 것이다. 두 사람에 대한 연민이 마치 끈질긴 줄 마냥 사그라지려는 의식을 동여매고 있었다.
박일호는 두만강 철교를 건너기 위해 기차를 타고 막 출발할 무렵 구중석이 함께 탈출하자고 애원하던 모습이 떠오르면서 쏘냐의 애절한 표정과 중첩되어 과거와 현재의 기억에 사로잡혔다. 구중석이 탈출을 결행할 줄 알았으면서도, 더욱이 그것이 잘못된 길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동참하지 못한 것은 순전히 자신의 현실주의 적 판단 때문이었다. 그런데 쏘냐의 물음에 응답하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안전원의 협박 때문인가? 지도원의 회유 때문인가? 아니다. 그것은 순전히 자신의 우유부단 때문이 아니었던가. 그렇게 오래 동안 오빠와 헤어진 처녀가 오빠와 함께 벌목장에 갔던 나를 만났다면 구세주를 만난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만 주춤거리기만 하다가 안전원을 불러들인 꼴이 된 것이 아닌가.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주춤거렸나, 생각하니 자신은 비겁하기 짝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연히 오빠 친구로서, 그것도 오빠와 함께 이역만리 러시아 벌목장으로 가서 고락을 같이 한 사람으로서 안부를 전해주는 것이 도리이다. 그런데 그것을 왜 하지 못했는가? 새삼스레 후회하는 가운데 문득 깨달음이 왔다. 자신의 비겁한 태도는 바로 공화국의 통제 속에 주눅이 든 때문이었다. 아무리 사소하고 인간적인 일이라 해도 개인의 입장을 내세우지 못하게 만든 어버이 수령의 교시가 사람을 옭아맨 것이다. 그래서 공화국 지도자가 선군정치에 빠져 굶주리는 인민을 내팽개친 현실 앞에서 중석과 내가 황량한 시베리아 밀림으로 달려가서 뼈 빠지게 노동을 한 대가마저 제대로 받지 못한 것도 꾹꾹 눌러 참고 있었다. 이때까지 진실을 외면하고 살아온 자신이 미워졌다. 할아버지 때부터 조국을 떠나 멀리 타국 생활을 하면서도 끈질기게 조국을 그리던 그 심정이 바로 조국의 권력자로부터 외면당한 것을 이제야 깨달을 수가 있었다.
할아버지는 강제징용당해 사할린 탄광에서 어렵게 생활을 해왔다. 그러나 일본이 항복했을 때 이제 해방이 되어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고 기뻐 날뛰었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 당시 50세이던 할아버지는 1945년 8월16일 사할린 미즈호학살 때 참변을 당했다. 해방이 되었으니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며 짐 꾸릴 걱정을 하고 있던 할머니는 그날 할아버지가 늦게까지 집에 오지 않자 수소문을 했다. 일본경찰이 한인들을 무차별 학살했다는 얘기가 나돌아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렸다. 할머니는 사건현장으로 내달았다. 집에서 불과 4, 50미터 거리에 있는 길가 도랑에 할아버지의 시체가 처박혀 있었다. 일본 경찰의 칼에 목을 찔린 자국이 선명했다. 할머니는 통곡하다 말고 정신을 잃었다.
할머니는 혼자 외아들을 데리고 사는 것이 힘들어 북한 고향 경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귀환동포를 돌봐주기는커녕 사상이 의심스럽다며 박대를 했다. 그 바람에 아버지는 탄광에서 어렵게 일하다가 갱도가 무너져 46세에 돌아가셨다. 일호는 고등중학을 겨우 마치자 군에 입대하여 10년 복무했다. 그때 나이 설흔이 가까웠다. 제대했으나 이렇다 할 직장이 없어 떠돌이 신세를 면할 길이 없었다. 벌써 10년이 지났다. 이판사판으로 러시아 벌목장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만약 그때 벌목장으로 갈 수 없었으면 남들이 하는 것처럼 두만강을 건넜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벌목장에서 돌아오는 길도 별 수가 없지 않은가. 싸구려 보따리만 짐이 되었다. 조국을 찾는 것이 애꿎은 인민의 귀소본능일 뿐 조국은 자신을 반기기는커녕 벌어 놓은외화 착취에만 눈독을 들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순간 불끈했다. 열차 문 앞에 버티고 선 안전원을 밀치고 몸을 날렸다. 아직 가속이 붙지 않은 때라 몸을 한 바퀴 굴린 후 쉽게 일어서서 뛰었다. 안전원이 ‘저놈 도망친다, 잡아라!’ 하고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 열차 내 공안에게 쏴 죽여도 좋으니까 총을 쏘아 저지해 달라고 요청했다. 러시아 공안은 러시아 벌목공이 탈출했다는 말에 벌목사업에 지장을 주지 않을까, 하는 우려로 권총을 마구 쏘아댔다.
쏘냐는 박일호의 시신을 부등켜안고 통곡을 했다. 오빠 중석이 만큼이나 가슴에 와 닿는 애틋한 정을 느끼며 몸부림쳤다.
“오라버니이.... 눈 좀 떠 봐요오.... .”
처절한 울음소리가 땅도 울고 하늘도 울게 할 즈음 오른쪽에 길다랗게 뻗어 있는 조로우의교 남쪽에서 시커먼 형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마치 수십 미터 되는 능구렁이처럼 몸체를 뒤틀며 두만강 철교를 건너오고 있었다. 이른 바 평양발 핫싼행 북한 기차였다. 그때 누군가가 북한 기차가 온다고 외쳤다.
정달성은 조로우의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우리가 온 날 북한 기차가 올라오는가 싶어 고개를 내밀어 북한쪽 다리 입구를 살폈다. 아닌 게 아니라 북한 기차가 다리로 들어서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핫싼들판에서 벌어진, 때 아닌 비극 앞에 망연자실한 채 모여 서 있던 일행은 모두 한마디씩 했다.
“아 저기 온다. 북한 기차다.”
“맞다. 저기 봐라.”
“저 기차가 남북 간에도 오가야 할 텐데... .”
바로 눈앞에 펼쳐진 을씨년스런 들판과 대조적으로 오른쪽 다리에는 낯 설은 기차가 마치 북한을 대표하여 일행에게 다가오는 것 같은 인상을 던져주었다. 어쩐 일인지 어릴 적 철로 변에서 자주 들어온 그 소리, 철거덕거리는 소리가 없이 핫싼 쪽으로 오고 있는 기차가 살아서 꿈틀거리며 일행을 맞으러 오는 생물처럼 느껴진 것이다. 기차가 점점 이쪽 입구로 가까워지자 문득 북한 사람들의 긴 행렬처럼 보였다. 이념이고 체제고 관계없이 오로지 살길을 찾아 남부여대하고 두만강을 건너던 그 시대 한민족 자손들이 지금 순간에 손짓하며 부르고 있는 것 같았다.
‘어이 이보게들 거기 서서 무시기 함둥? 우리와 같이 가잲고.’
잠시 후 북한 기차는 초소 언덕 옆으로 사라졌다. 아마 곧 핫싼역으로 진입할 것이었다. 정달성은 이 기차도 북한과 러시아를 오간지 3년도 채 안 된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2013년에야 라선과 핫싼 54킬로미터 철로가 연결되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남북철로 연결에 합의 한지 13년만에 겨우 54킬로미터만이, 그것도 남북한이 아니라 북러 간 철로가 연결된 것이다. 남북 간 철로는 남쪽 도라산역에서 멈추어 선 후 이어질 날을 기약 없이 기다리고만 있는 실정이 아닌가. 그러나 1937년에 사라져 버린 한민족 발자취와 1948년에 끊어져 버린 남북철로가 다시 모습을 드러낼 날이 언제든 오고야 말 것이라는 기대감에 사로잡혔다.
한민족이 겪어온 시련의 거센 물결에 휩쓸려 쏘냐도 박일호도 제갈 길을 제대로 가지 못한 채 방황하다가 끝내는 오늘 같은 비극을 맞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오늘 한민족 유랑의 현장에서 겪은 한 사나이의 비극이 흔히 해온 대로 북한 당국의 반인권적 반민족적 횡포에 의한 희생 얘기로만 끝나지 않을 것이다. 정달성이 있고, 쏘냐가 있고, 또 이 비극을 목격한 일행이 있기에 새로운 한민족의 나갈 길을 여는데 밑거름이 될 역사적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사실을 깨닫자 정달성은 쏘냐에게 조용하면서도 단호한 어조로 일러주었다.
“쏘냐, 오늘 박일호가 총을 맞고 쓰러졌다 해도 그의 피가 젖어든 황폐한 핫싼들판에도 언젠가 봄은 올 것이야.”
(끝)
첫댓글 정다운 선생님 소설 잘 읽었습니다. 짧은 단편소설에 엄청난 사건과 민족의 애환과 지리적 배경들이 녹아있네요. 이번 중앙아시아 여행까지 선생님의 글을 읽으며 한민족 디아스포라와 분단의 아픔까지 모두 깊은 아픔들이 절절합니다. 좋은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자료로만 보는 것보다 역시 현장 탐사를 해야 감정이입이 잘 되는 것 같아요.